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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 손재호
성경본문 사도행전 9:32-43

2004년 9월 5일 설교
                                                      애니아와 다비다

말씀:사도행전 9:32-43

   우리는 지난 몇 주간에 걸쳐 사울에 대해서 배웠습니다. 주님께서 그를 어떻게 사로잡으시고 당신 종으로 빚으시는가에 대해 배웠습니다. 오늘부터 우리는 사울에 관한 역사를 잠시 접어 두고 베드로를 통해서 이루시는 주님의 승리의 역사에 대해 배우고자 합니다. 사도행전 9:32-12장까지 말씀을 살펴보면 사울이 역사에서 사라지고 베드로가 역사전면에 등장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리고 13장부터 다시 주님께서 사울을 통해서 이루시는 이방선교역사를 다루고 있습니다. 오늘 말씀은 베드로가 애니아를 치유하고 다비다를 살린 사건입니다. 본문은 사울에 관한 이야기와 고넬료에 관한 이야기를 연결해 주는 역할을 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오늘 말씀을 통해서 성도들의 아름다운 섬김과 교제, 성령님의 역사하심과 주님께서 거두시는 놀라운 승리의 역사를 볼 수 있습니다. 이 시간 주의 성령께서 우리와 함께하사 말씀을 통해 주시고자 하시는 하나님의 놀라운 음성을 듣게 하시기를 바랍니다.

32절에 보면 베드로가 사방으로 두루 다니며 복음을 전파하다가 룻다에 사는 성도들에게 내려 갔습니다. 우리는 여기서 한가지 의문이 생깁니다. 룻다에 사는 성도들이 어떻게 생겨났는가 하는 것입니다. 8장에 보면 집사 빌립이 에디오피아 내시에게 복음을 전한 후 아소도에 나타나 여러 성을 지나다니며 복음을 전하고 가이사랴에 이르렀다고 했습니다. 아소도와 가이사랴에 이르는 빌립의 전도 여행 여정을 지도에서 살펴보면 아소도와 가이사랴를 잇는 길에 룻다가 있다는 사실을 발견하게 됩니다. 우리가 이 사실을 기초로 해서 볼 때 룻다도 빌립이 복음을 전파한 도시들 중에 하나라는 사실을 집작해 볼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룻다에 예수님을 믿는 성도가 있었던 것은 빌립의 전도의 결과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면 룻다에서 주님께서는 베드로를 통해 어떤 놀라운 승리의 역사를 이루셨습니까? 룻다에 도착한 베드로는 중풍병으로 누운지 8년이나 되는 애니아라는 사람을 고쳐 주었습니다. 베드로는 그를 어떻게 고쳐 주었습니까? 34-35절을 보십시오. “베드로가 가로되 애니아야 예수 그리스도께서 너를 낫게 하시니 일어나 네 자리를 정돈하라 한대 곧 일어나니 룻다와 사론에 사는 사람들이 다 그를 보고 주께로 돌아가니라.” 본문을 읽을 때 우리는 마치 복음서를 읽는 것 같은 착각에 빠지는 것 같습니다. 베드로가 애니아에게 한 말을 보십시오. “예수 그리스도께서 너를 낫게 하신다. 네 자리를 정돈하라.” 우리는 여기서 복음서에서 말씀하신 예수님의 음성을 다시 듣는 것 같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중풍병자에게 “일어나 네 상을 가지고 집으로 가라”고 하셨습니다(막2장). 그러자 중풍병자가 즉시 일어나 갔습니다. 이처럼 베드로는 “일어나라”며 애니아의 의지에 호소했습니다. 어떤 조건없이 즉각 “일어나 네 자리를 정돈하라”고 명령했습니다. 이 명령은 고침을 받는 사람의 형편과는 아무 상관이 없었습니다. 고침받는 사람에게 믿음이 있었기 때문이 아니었습니다. 이 명령은 고침받고 싶은 욕망이 있을 뿐인 병자에게 아무런 조건없이 부여된 치유의 선물이었습니다. 베드로는 단지 애니아에게 일어나 걸을 것을 호소하였습니다. 우리는 여기서 사도행전의 서문의 말씀, “데오 빌로여 내가 먼저 쓴 글에는 무릇 예수께서 행하시며 가르치시기를 시작하심부터”라는 말씀을 생각하게 됩니다. 애니아에게 “일어나 네 자리를 정돈하라”고 말씀하신 이는 베드로가 아니라 곧 주님이십니다. 주님께서 여전히 자기 몸의 한 지체인 사도 베드로를 통하여 그 일을 행하시고 계셨던 것입니다. 주님께서 베드로를 통해 애니아에게 “일어나 네 자리를 정돈하라”고 명했을 때 어떤 일이 일어났습니까? 8년 동안 중풍병으로 누워 있던 애니아가 즉시 일어났습니다. 놀라운 승리의 역사가 일어난 것입니다. 이 놀라운 기적의 역사를 보고 룻다와 사론에 사는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믿고 돌아오는 놀라운 역사가 일어났습니다. 베드로를 통해 승리의 역사를 이루신 주님께서는 지금도 주권적으로 승리의 역사를 이루십니다. 나의 믿음과 형편과 상관없이 주님께서 원하시면 놀라운 치유의 역사가 일어납니다. 주님께서 우리를 향해 말씀하십니다. “일어나 네 자리를 정돈하라.” 우리가 이 주님의 음성을 들을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리하여 질병에서 일어나길 바랍니다. 영적인 침체에서 일어나길 바랍니다. 베드로를 통해 이루신 놀라운 승리의 역사가 우리 가운데도 충만히 일어나길 바랍니다.  

36절을 보십시오. 욥바에 다비다 곧 번역하면 도르가라는 여제자가 살고 있었습니다. 그녀는 좋은 바느질 솜씨를 가지고 많은 봉사의 일을 하던 자매였습니다. 그런데 그런 그녀가 그만 병에 들어 죽고 말았습니다. 그에게 은혜를 입은 많은 사람들이 병들어 죽은 그녀의 시체를 씻어 다락방에 뉘었습니다. 그리고 베드로가 욥바에서 가까운 룻다에 있다는 소문을 듣고 두 제자를 보내어 베드로를 속히 오게 하였습니다. 사람들은 도르가의 죽음이 너무나 애석하고 안타까워서 베드로에게 도움을 청하여 오게한 후 살려 달라고 간청한 것입니다. 우리는 여기서 한가지 주목해 봐야 할 사실이 있습니다. 보통 사람들은 병들어 죽으면 슬퍼하고 장례를 치를 생각을 합니다. 병들어 죽기 전에는 고치기 위해 기도도 하고 안수도 받고 도움을 청하지만 죽으면 다 그만 둡니다. 그런데 많은 사람들이 도르가가 죽었는데 베드로에게 사람을 보내어 오게 한후 도움을 청했습니다. 우리는 여기서 이들의 믿음을 볼 수 있습니다. 이들은 예수님께서 죽은 도르가를 살리실 것을 믿었습니다. 참으로 놀라운 믿음이 아닐 수 없습니다. 무엇보다도 우리는 도르가가 얼마나 사람들로부터 존경을 받았는가를 볼 수 있습니다. 본문에 보면 선행과 구제하는 일이 심히 많았더라고 하였습니다. 나중에 베드로가 왔을 때 사람들이 보인 반응을 보면 그녀가 얼마나 많은 선행과 구제의 일을 하였는가 짐작해 볼 수 있습니다. 베드로가 그녀의 방에 들어가자 많은 과부들이 울며, 도르가가 지어준 옷을 베드로에게 보여 주었습니다. 이 과부들은 도르가로부터 많은 사랑과 섬김을 받았습니다. 그들은 도르가로부터 너무나 많은 사랑과 섬김을 받았기 때문에 그녀의 죽음으로 인해 너무나 슬프고 고통스러워 한 것입니다. 그들은 도르가의 선행을 말하며 꼭 살려 달라고 베드로에게 간청을 하였습니다. 이 얼마나 아름다운 장면입니까? 도르가는 가난한 이들에게 옷을 지어 입혔습니다. 그녀가 헐벗고 가난한 과부들과 이웃들에게 옷을 지어 입힌 것은 그리스도의 사랑 때문이었습니다. 그녀가 어떻게 그리스도의 사랑을 알고 그 사랑에 감격하여 이렇게 사랑으로 섬기는 삶을 살게 되었는지는 잘 알 수 없습니다. 아마 빌립의 전도를 통해 예수님의 사랑을 알게 되었던 것 같습니다. 그녀는 주님의 사랑에 감격하여 새 사람이 되었습니다. 주님의 사랑이 너무나 크고 놀라워 가만히 있을 수 없었습니다. 그녀는 주님에 대한 사랑의 표현으로 가난하고 헐벗은 과부들을 위해 옷을 지어 입힌 것입니다.

누가가 이 아름다운 이야기를 기록하면서 “선행과 구제하는 일이 심히 많더니”라고 했습니다. 우리는 여기서 “그녀가 행한 선행과 구제의 일”이라고 한데서 하나님의 뜻을 깨달을 수 있습니다. 대게 많은 사람들은 선행과 구제의 일에 대해서 생각에 그칠 뿐이지만 도르가는 실제로 그것을 행했습니다. 그녀는 가난한 이웃을 동정했을 뿐만 아니라 추위에서 그들을 보호하기 위해 자기 손으로 그들에게 필요한 것을 만들어 주었습니다. 우리는 여기서 성도들의 진정한 교제에 대해서 배울 수 있습니다. 성도들의 교제에는 두 가지 측면이 있습니다. 먼저 교회 안에서 일하는 동역자끼리의 교제, 곧 복음 전도자와 사도의 교제처럼 한 사람은 구원의 최초의 사실을 알리고 또 한 사람은 그것을 견고케 하고 가르치는 사역자의 교제가 있습니다. 또 하나는 가난한 이웃에게 겉옷과 속옷을 지어 준 도르가와 그 주변에 모여 있는 여인들의 모습 속에서 찾아볼 수 있는 사랑의 교제입니다. 이 두 경우 모두가 다 똑같은 성도들의 교제라고 할 수 있습니다. 즉 전도자와 사도들 사이에 이루어진 교제의 원리나 이웃에게 옷을 지어준 자비롭고 사랑이 있는 여인과 그 지어 준 옷을 입은 가난한 여인들 사이에 이루어진 교제의 원리는 동일한 것입니다. 성도들의 교제는 항상 봉사로써 이루어집니다. 성도 간에 참된 교제와 친교를 나누고자 한다면 그 교제의 모습이 반드시 어떤 유의 봉사로 나타나야 합니다. 교회가 친교를 외치며 함께 모여만 있다고 해서 교제가 이루어지는 것은 아닙니다. 교회가 어떤 유의 봉사로든지 그 교제를 표현해야만, 곧 사랑과 봉사로 서로 도와야만 참된 교제가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섬김과 봉사가 없이는 진정한 교제도 없습니다. 섬김과 봉사는 성령의 역사입니다. 본문에는 성령의 역사가 계시되어 있습니다. 섬김과 봉사는 성령의 역사의 열매입니다. 고린도전서 12장에 보면 바울은 여러 가지 은사를 열거하면서 “서로 돕는 은사”를 언급하고 있습니다. 도르가가 옷을 지어 이웃에게 입힌 것은 바로 이 돕는 은사에 해당됩니다. 돕는 은사는 문자적으로 단순히 “구제의 은사”를 뜻합니다. 도르가가 솜씨 좋은 바느질로써 옷을 지었을 때에 그녀는 성령께서 자신에게 주신 은사의 능력으로 그 일을 행하였던 것입니다. 이것은 베드로가 성령께서 자신에게 주신 은사로 도르가를 살리고 애니아를 치유했던 것이나 마찬가지입니다. 오늘날 세상을 향한 그리스도인의 증언이 그 힘을 대부분 상실하게 된 이유는 바로 “서로돕는 일”이 성령의 은사라는 점을 잃어버렸기 때문입니다. 오늘날 사람들은 이런 섬김과 봉사를 성령의 은사로 생각하지 않습니다. 방언을 하고 예언을 하고 신유의 능력을 행하는 것만 성령의 은사로 생각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래서 도르가와 같이 섬김과 봉사를 하찮게 생각합니다. 그래서 이런 일에 힘쓰기보다 방언과 예언과 같은 이런 것에 힘씁니다. 그러나 섬김은 성령의 은사입니다. 우리는 이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여러분! 성령의 은사가 무엇입니까? 아무도 이 물음에 이것이다라고 대답할 수 없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성령의 은사는 너무나 다양하기 때문입니다. 오늘날의 교회에는 사도시대에 없었던 은사들이 있는 것도 있고, 그 반대로 오늘날의 교회에 없는 은사들이 사도시대 교회에는 있는 것들이 있습니다. 고린도전서 12장에는 매우 중요한 두 구절이 있습니다. “한 성령이 그 뜻대로 각 사람에게 나눠주시니라”는 구절과 “하나님이 그 원하시는대로 지체를 각각 몸에 두셨으니”라는 구절입니다. 우리는 이 구절들을 볼 때 우리에게는 왜 초대 교회가 가졌던 은사들이 없는가 하며 시간을 낭비할 필요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성령님께서는 그 뜻대로 은사를 나눠 주시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이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만일 성령께서 과거 베드로가 가졌던 치유의 은사를 거두셨다면 우리는 그 은사와 아무런 관계가 없습니다. 그러나 성령께서 여전히 돕는 은사를 주셨다면 우리는 그것으로 감사할 따름입니다. 만일 우리가 이 은사는 작은 것이고, 저 은사는 큰 것이라고 생각한다면 그것은 잘못입니다. 만일 어떤 이들이 자신들을 유명하게 만들기 위해 보다 극적인 그 무엇을 기대하고 갈망한다면 그들은 자신들을 유익하게 할 성령의 은사를 무시하는 것입니다. 궁극적으로 하나님의 사역을 방해하는 것입니다. 오늘날은 성령의 시대입니다. 우리는 사도시대의 방법들을 모방함으로써가 아니라 오늘날 역사하시는 성령의 능력에 복종함으로 일해야 합니다. 무한하신 지혜를 소유하신 성령님께서는 사람들에게 그 뜻대로 은사를 나눠주십니다. 따라서 주시지 않는 은사들을 받기 위해 한숨을 쉴 것이 아니라 주신 은사가 아무리 하찮다할지라도 귀한줄 알고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해 사용해야 합니다. 이런 자가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데 기여하게 됩니다. 바울은 고린도전서 12장을 끝맺으면서 “더욱 큰 은사를 사모하라”는 말로 끝맺지 않습니다. 그는 “제일 좋은 길을 너희에게 보이리라”는 말씀으로 끝맺음으로써 사랑의 길을 제시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이 사역은 중요하고 저 사역을 하잖다고 생각하는 것을 버려야 합니다. 이 은사는 중요하고 저 은사는 중요하지 않다고 생각하는 것도 버려야 합니다. 은사에는 차등이 없습니다. 그리스도의 교회의 지체로서 주님의 사랑으로 가난한 이웃들을 위해 옷을 만들어 준 도르가의 행위나 그녀를 다시 살린 베드로의 행위나 똑같이 거룩한 것입니다. 우리는 유명해야만 위대하다는 생각을 버려야 합니다. 우리는 눈에 띄는 은사를 추구할 때 위험에 빠집니다. 진실로 그리스도인들은 도르가와 같이 가난한 이들에게 선행과 구제를 행한다면 그것이 그리스도의 승리에 기여하는 공헌도는 죽은 자를 살리는 일이나 병든 자를 치료하는 일이나 설교자가 말씀을 선포하는 일이나 동일한 것입니다. 그것으로 인해 교회는 널리 확장될 것입니다. 우리가 주님께서 각자에게 그 뜻대로 주시는 은사를 귀히 여기며 자신에게 주신 은사에 충성함으로써 하나님의 뜻을 이루며, 교회를 널리 확장하는 일에 귀하게 쓰임받을 수 있기를 바랍니다.

40-42절을 보십시오. 베드로는 사람들을 다 내어보내고 무릎을 꿇고 기도했습니다. 그리고 돌이켜 시체를 향하여 외쳤습니다. “다비다야 일어나라.” 그러자 어떤 놀라운 역사가 일어났습니까? 그가 눈을 떴습니다. 그가 살아났습니다. 베드로는 손을 내밀어 일으켰습니다. 성도들과 과부들을 불러 그가 살아난 것을 보였습니다. 이 놀라운 기적의 역사는 온 욥바에 퍼지게 되었습니다. 그로인해 어떤 역사가 일어났습니까? 많은 사람들이 주를 믿게 되었습니다. 베드로가 죽은 다비다를 살리신 장면을 가만히 보면 예수님께서 야이로의 죽은 딸을 살리신 사건과 너무나 흡사합니다. 베드로가 그리스도께서 하신 말씀을 그대로 사용하고 있습니다. 베드로와 예수님의 말씀 사이에는 문자 하나만 다를 뿐 똑같습니다. 예수님은 “달리다굼”이라고 하셨고, 베드로는 “다비디구미”라고 말했습니다. 저자 누가는 이것을 통해 다비다를 살린 분이 베드로가 아니라 예수님이심을 나타내고 있습니다. 부활하신 주님께서는 베드로를 통해 죽은 다비다를 살리신 것입니다. 우리는 애니아를 고친 사건과 다비다를 살린 사건에서 한가지 주목해야할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그 사건들의 정황이 복음서의 예수님께서 행하신 정황과 너무나 흡사하다는 것입니다. 또한 두 사건을 통해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믿게 되었다고 기록한 사실입니다. 이것은 베드로가 애니아를 고치고 다비다를 살린 것이 아니라 주님께서 애니아를 고치시고 다비다를 살리셨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우리를 통해 이루시는 승리의 역사를 통해 주님의 영광을 드러내야 합니다. 주님의 이름이 드러나게 해야 합니다. 많은 사람들이 승리의 역사를 이룬 후 그 영광을 자기가 차지하는 경우를 우리는 봅니다. 그러나 그것은 죄악입니다. 우리는 주님의 이름으로 승리의 역사를 이룬 후 모든 영광을 주님께 돌려야 합니다. 사람들이 주님을 믿고 주님께로 돌아오게 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주님께서 나를 통해 역사하시고 승리의 역사를 이루신 것이기 때문입니다.      

본문에 나타나 있는 주님의 승리 가운데 가장 놀라운 것은 병든 이를 고친 것도 아니고 죽은 이를 살리신 것도 아닙니다. 베드로에게 영적인 해방을 주신 것입니다. 43절에 보면 베드로는 욥바에 가서 피장이 시몬의 집에 유하였습니다. 유대인들은 피장이에 대해 혐오감을 가질 정도로 멸시했습니다. 피장이는 죽은 짐승의 가죽을 취급하고 가공하는 직업을 말합니다. 우리나라 조선시대로 말하면 가파치가 여기에 해당됩니다. 조선시대 가파치나 백정들은 멸시와 천대를 받았습니다. 이와 같이 유대인들은 피장이들을 부정하다며 멸시했습니다. 당시 피장이들은 아무데서나 거주할 수 없었습니다. 그들이 사는 곳은 도시에서 멀리 떨어진 곳에 법적으로 한정되어 있었습니다. 그리고 유대인들의 유전인 미쉬나에 보면 피장이 남편을 둔 여자는 그가 피장이라는 이유만으로 이혼을 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베드로는 이런 피장 시몬의 집에 거하였던 것입니다. 이것은 베드로가 모든 편견에서 벗어났다는 것을 말합니다. 베드로는 모든 율법적인 편견에서 벗어나 복음 안에서 자유하는 삶을 살았습니다. 이것은 모든 편견에 대한 주님의 승리였습니다. 복음서에 보면 주님께서 이와 비슷한 유의 사람인 세리장 삭게오의 집에 들어가신 적이 있었습니다. 그 때 바리새인들이 주님을 가리켜 “저가 죄인의 집에 유하러 들어갔도다”라고 불결한 듯이 이야기 했습니다. 이제 베드로는 주님과 같이 모든 편견에서 해방되어 피장이 시몬의 집에 들어가 그와 함께 유하였습니다. 베드로가 복음 안에서 자유함으로 피장 시몬의 집에 거하게 된 것은 더 큰 주의 환상을 보기 위한 예비 단계였습니다. 사도행전 10장에 보면 베드로는 환상을 보게 됩니다. 그리고 이방인 고넬료를 구원하게 됩니다. 이 사건에 대해서는 다음 주에 공부하겠습니다. 진리 안에서 자유함을 덧입은 베드로를 통해 성령께서는 놀라운 이방선교의 역사를 이루셨습니다. 참으로 진리는 우리로 하여금 자유하게 합니다. 자유한 자를 통해 주님께서는 놀라운 승리의 역사를 이루십니다. 우리에게는 자유하지 못하는 문제들이 많이 있습니다. 자기 생각과 관념에서 자유하지 못합니다. 도덕적인 관념에서 자유하지도 못합니다. 죄악된 습관과 편견에서 자유하지도 못합니다. 미움과 증오심, 불신에서 자유하지도 못합니다. 우리가 이런 것들에 매여 얼마나 고통스러운 인생을 삽니까? 얼마나 자유하지 못하는 인생을 삽니까? 우리가 이런 것에 매여 자유하지 못하고 있다는 것은 내가 진리 가운데 있지 못하다는 것을 말해 줍니다. 진리가 우리를 자유하게 합니다. 복음이 우리를 자유하게 합니다.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를 자유하게 합니다. 우리에게 베드로에게 허락하신 자유를 허락해 주시기를 바랍니다. 그리하여 우리도 주 안에서 승리하는 삶을 살 수 있기를 바랍니다.

성도의 교제는 성령의 역사하심으로 이루어집니다. 병든 자가 나음을 받으며, 죽은 자가 살아나는 승리의 역사는 주님의 승리의 역사로 말미암는 역사입니다. 주님의 승리는 성령의 역사하심으로 말미암은 성도의 교제로 인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활발한 성도의 교제를 나누워야 합니다. 성도의 교제를 나눌 때 주님께서 함께 하사 승리의 역사를 이루십니다. 우리가 진리 안에서 자유함을 누릴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리하여 모든 편견에서 벗어나 진정한 친교를 이룰 수 있기를 바랍니다. 이를 통해 주님께서 이루시는 놀라운 승리의 역사를 이룰 수 있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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