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모데전서 5장] 장로들을 배나 존경할 자로 알라

by 손재호 posted Jan 12, 20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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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 손재호
성경본문 딤전 5:17-25
성경본문내용 (17)잘 다스리는 장로들을 배나 존경할 자로 알되 말씀과 가르침에 수고하는 이들을 더할 것이니라(18)성경에 일렀으되 곡식을 밟아 떠는 소의 입에 망을 씌우지 말라 하였고 또 일군이 그 삯을 받는 것이 마땅하다 하였느니라(19)장로에 대한 송사는 두 세 증인이 없으면 받지 말 것이요(20)범죄한 자들을 모든 사람 앞에 꾸짖어 나머지 사람으로 두려워하게 하라(21)하나님과 그리스도 예수와 택하심을 받은 천사들 앞에서 내가 엄히 명하노니 너는 편견이 없이 이것들을 지켜 아무 일도 편벽되이 하지 말며(22)아무에게나 경솔히 안수하지 말고 다른 사람의 죄에 간섭지 말고 네 자신을 지켜 정결케 하라(23)이제부터는 물만 마시지 말고 네 비위와 자주 나는 병을 인하여 포도주를 조금씩 쓰라(24)어떤 사람들의 죄는 밝히 드러나 먼저 심판에 나아가고 어떤 사람들의 죄는 그 뒤를 좇나니(25)이와 같이 선행도 밝히 드러나고 그렇지 아니한 것도 숨길 수 없느니라
강설날짜 2014-01-12

2014년 디모데전서 공부


장로들을 배나 존경할 자로 알라


말씀:디모데전서 5:17-25
 
우리는 지난 시간에 바울 사도가 디모데에게 교회 성도들을 어떻게 대해야 하는지에 대해서 권면하는 것을 배웠습니다. 오늘도 계속해서 디모데전서 5장 말씀을 공부하겠습니다. 오늘 말씀은 교회에서 성도들을 다스리며, 말씀을 가르치는 장로를 어떻게 대우해야 하며, 그들에 대한 치리문제와 안수문제를 어떤 기준에 의해서 해야 하는지를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디모데 개인에게도 권면을 하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 말씀에서 말하는 장로란 우리가 알고 있는 장로의 개념과는 좀 다릅니다. 물론 장로를 잘 다스리는 자와 말씀과 가르침에 수고하는 자로 구분을 합니다. 그래서 전자를 치리 장로, 후자를 가르치는 장로로 구별하기도 합니다. 오늘날 우리는 치리 장로를 다스리는 장로로, 가르치는 장로를 목사로 구별을 합니다. 그러나 이 당시에 교회에서는 장로와 목사를 구별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므로 오늘 본문에서 말하는 장로란 오늘날의 목사로 보아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오늘 본문 말씀은 바울 사도가 영적인 아들 디모데에게 목사에 대한 대우와 치리문제와 안수문제를 어떻게 해야 하는지를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17절 말씀을 보면 “잘 다스리는 장로들을 배나 존경할 자로 알되 말씀과 가르침에 수고하는 이들에게 더할 것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바울 사도는 다른 직분에 비해서 교회를 잘 다스리고, 말씀과 가르침에 수고하는 이들을 배나 존경하라고 합니다. 여기서 ‘존경’이란 단어는 ‘timής’(티메스)라는 단어인데 이 말은 ‘보상’이나 ‘보수’라는 말로도 번역이 됩니다. 그러므로 오늘 본문에서 말하는 ‘잘 다스리는 장로’라는 말은 교회에서 전적인 사역을 하는 전임사역자로서 사례를 받는 사람들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그런데 바울 사도는 잘 다스리는 자들에게 말로만 존경하는 것이 아니라 보수를 배나 지급하라고 하는 것입니다. 특히 바울 사도는 말씀과 가르침에 수고하는 목사에게는 이보다 더하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권면의 말씀의 근거를 18절 말씀에 보면 구약의 신명기 말씀을 인용하여 말씀하고 있습니다. 신명기 25:4절 말씀을 보면 “곡식 떠는 소의 입에 망을 씌우지 말지니라”고 했습니다. 이 말씀은 일하는 소가 그 먹을 것을 먹는 것이 당연하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말씀은 단순히 소에 대하여 말하는 것만이 아니라 일반적인 원리에서도 일하는 자가 삯을 받는 것이 당연하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복음서에서 이 원리를 복음을 전하는 자들에게 그대로 적용하셨습니다. 곧 복음을 전하는 자는 그 복음으로 사는 것이 당연하다는 것입니다. 마태복음 10:10절 말씀에 보면 예수님께서는 “일군이 그 삯을 받는 것이 마땅하다”는 말씀으로 인용하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12명의 제자들을 전도여행 보내시면서 그들에게 주머니나 두 벌 옷이나 신이나 지팡이를 가지지 말게 하시는 것입니다. 그것은 일군이 그 먹을 것을 받는 것이 마땅하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복음을 전하다가 너희를 영접하는 자가 있으면 거기서 머물고, 영접하지 않으면 떠나면서 발의 먼지를 떨어버리라고 하신 것입니다. 이것은 제자들을 대접하고 안하고가 아니라 그 제자들이 주님의 복음을 들고 갔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러므로 제자들을 받아들이는 것은 주님의 복음을 받아들이는 것이고, 제자들을 받아들이지 않는 것은 주님의 복음을 받아들이지 않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제자들을 받아들이는 것이 복이고, 제자들을 배척하는 것은 그들에게 심판이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그러함에도 불구하고 우리의 정서는 어떻습니까? 교회에서 목사의 사례비를 이야기를 하면 아주 예민합니다. 특히 목사가 사례비를 이야기 하면 속물적인 목사로 보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래서 목사가 사례비 이야기 하는 것을 금기시 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바르게 알아야 하는 것은 말씀을 가르치는 목사의 사례를 많이 하고 적게 하고의 문제가 아니라 우리가 말씀에 대한 자세가 어떠해야 하는가를 말씀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디모데전서 4:12-13절 말씀에 보면 바울 사도는 디모데에게 ‘네 연소함으로 사람들에게 업신여김을 받지 말라’고 하고 있습니다. “누구든지 네 연소함을 업신여기지 못하게 하고 오직 말과 행실과 사랑과 믿음과 정절에 대하여 믿는 자에게 본이 되어 내가 이를 때까지 읽는 것과 권하는 것과 가르치는 것에 착념하라”고 했습니다(딤전 4:12-13). 여기서 ‘누구든지 네 연소함을 업신여기지 못하게 하라’는 말은 쓸데없이 목사의 권위를 세우라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위하여 그렇게 하라는 것입니다. 곧 목사를 업신여긴다는 것은 그가 전하는 하나님의 말씀을 업신여기는 것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목사는 모든 행실에 본이 되어서 업신여김을 받지 말아야 하는 것입니다.

 

갈라디아서 6:6-8절 말씀을 보면 “가르침을 받는 자는 말씀을 가르치는 자와 모든 좋은 것을 함께 하라. 스스로 속이지 말라. 하나님은 만홀히 여김을 받지 아니하시나니. 사람이 무엇으로 심든지 그대로 거두리라. 자기의 육체를 위하여 심는 자는 육체로부터 썩어진 것을 거두고, 성령을 위하여 심는 자는 성령으로부터 영생을 거두리라”고 했습니다. 여기서 보면 “가르침을 받는 자는 말씀을 가르치는 자와 모든 좋은 것을 함께 하라”고 합니다. 또한 “사람이 무엇으로 심든지 그대로 거두리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우리의 관심사가 정말 하나님의 말씀에 있다면 그 말씀을 가르치는 자와 각양 좋은 것을 함께 하는 것이 당연할 것입니다. 이 말씀은 목사에게 대접을 잘하여 복을 받자는 그런 이야기가 아닙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공경하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심은 대로 거둔다’는 것은 우리의 영원한 운명에 관한 문제인 것입니다.

 

우리의 시간과 물질을 어디에 가장 많이 투자하고 있습니까? 영원한 말씀에 있습니까? 아니면 잠시 있다가 없어질 세상 것들 입니까? 아이들 교육비 중에서 말씀을 위한 부분이 몇 퍼센트나 되십니까? 신앙서적이라도 한권 사주고 있습니까? 우리는 심은 대로 거두는 것입니다. 자기의 육체를 위하여 심으면 결국 썩어질 것을 거둘 것이요, 성령을 위하여 심는 자는 영생을 거둘 것입니다. 그러므로 오늘 본문 17절 말씀 “말씀과 가르침에 수고하는 자들을 배나 존경하라”는 것은 단순히 사례비를 많이 주라는 말이 아닙니다. 그렇게 하는 것이 말씀에 대한 관심과 사랑인 것입니다. 보물이 있는 곳에 마음이 있습니다. 마음이 가는 곳에 물질도 가고 시간도 가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말씀과 가르침에 수고하는 자에 대한 우리의 자세와 태도란 곧 하나님의 말씀과 그 말씀의 가르침에 대한 우리의 자세와 태도인 것입니다.

 

말씀 한 곳을 더 보겠습니다. 히브리서 13:17절 말씀을 보면 “너희를 인도하는 자들에게 순종하고 복종하라. 저희는 너희 영혼을 위하여 경성하기를 자기가 회계할 자인 것 같이 하느니라. 저희로 하여금 즐거움으로 이것을 하게 하고 근심으로 하게 말라. 그렇지 않으면 너희에게 유익이 없느니라”고 했습니다. 히브리서 저자는 히브리서 서신을 받는 성도들에게 너희를 인도하는 자들에게 순종하고 복종하라고 합니다. 왜냐하면 저희는 너희 영혼을 위하여 경성하기를 자기가 회계할 자인 것 같이 하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여기서 ‘경성한다’라는 말은 ‘ajgrupnούσιν’(아그뤼프누신)이라는 단어인데 ‘자지 않고 있다’, ‘깨어 있다’, ‘감시하다’라는 뜻이 있는데, 영적으로 각성해 있어서 그리스도께서 재림하시는 때를 기다리는 태도를 가르킬 때 사용이 되었습니다(막 13:33; 눅 21:36; 엡 6:18). 또한 ‘회계할’에 해당하는 단어는 ‘lovgoν ajpodώvdσοντες’(로곤 아포도손테스)라는 단어인데 본래 ‘계산 한다’라는 의미로 여기서는 하나님의 심문에 응하여 셈을 한다는 의미입니다(마 12:36). 그러므로 본절은 성도들이 장차 그리스도의 재림시에 부끄러움을 당하지 않도록 하기 위하여 그 영혼을 맡은 교회 지도자들이 밤낮으로 쉬지 않고 저들을 지도하며 돌보는 것을 뜻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도들은 너희들을 인도하는 자들에게 마땅히 순종하고 복종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성도 자신에게 복이라는 것입니다.
 
바울 사도는 말씀을 가르치는 목사에 대해서 어떤 자세로 대해야 하는지를 권면한 후에 이제 그들에 대한 송사 문제에 대해서 권면을 합니다. 오늘 본문 19절 말씀을 보면 “장로에 대한 송사는 두 세 증인이 없으면 받지 말 것이요”라고 합니다. 바울 사도는 장로 곧 목사의 송사에 대해서는 두 세 증인이 없으면 받지 말라고 합니다. 모세의 율법에도 어떤 사람을 송사할 때 두 세 증인이 있어야 한다고 규정하고 있습니다. 신명기 19:15절 말씀을 보면 “사람이 아무 악이든지 무릇 범한 죄는 한 증인으로만 정할 것이 아니요, 두 증인의 입으로나 세 증인의 입으로 그 사건을 확정할 것이며”라고 했습니다. 이 말씀은 재판의 공정성을 기하기 위한 제도적인 장치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본절에서 장로를 송사할 때 두 세 증인이 없으면 받지 말라는 것은 장로의 송사는 신중을 기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 이유에 대해서는 밝히지 않고 있지만 장로는 교회의 지도자이므로 안팎으로 중상모략으로 무고를 당할 수가 있기 때문입니다. 또한 교회의 지도자이기 때문에 잘못된 판단은 교회에 심대한 악영향을 가져 오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장로나 목사를 송사할 때는 아주 신중해야 하는 것입니다.

 

또한 바울 사도는 장로를 세울 때도 신중하게 세워야 한다고 권면을 합니다. 22절 말씀에 보면 “아무에게나 경솔히 안수하지 말고 다른 사람의 죄에 간섭지 말고 네 자신을 지켜 정결케 하라”고 합니다. 이 말씀에 보면 직분 자를 안수하여 세울 때에는 조심스럽고 신중하게 세워야 합니다. 왜냐하면 그 만큼 중요하기 때문입니다. 장로와 목사를 송사하는 문제도 가볍게 다루어서는 안 되겠지만 그들을 안수하여 세우는 문제도 역시 가볍게 다루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20절 말씀에 보면 바울은 범죄한 자들을 모든 사람 앞에 꾸짖어 나머지 사람으로 두려워하게 하라고 합니다. “범죄한 자들을 모든 사람 앞에 꾸짖어 나머지 사람으로 두려워하게 하라”(20). 예수님께서는 형제가 범죄 하는 것을 볼 때에 어떻게 하라고 하셨습니까? 마태복음 18:15-17절 말씀에 보면 “네 형제가 죄를 범하거든 가서 너와 그 사람과만 상대하여 권고하라. 만일 들으면 네가 네 형제를 얻은 것이요, 만일 듣지 않거든 한 두 사람을 데리고 가서 두 세 증인의 입으로 말마다 증참케 하라. 만일 그들의 말도 듣지 않거든 교회에 말하고 교회의 말도 듣지 않거든 이방인과 세리와 같이 여기라”고 하셨습니다. 이 말씀에 보면 예수님께서는 범죄한 형제를 어떻게 도와야 하는지를 세 단계로 말씀하고 있습니다. 먼저 형제가 범죄하거든 그 사람과 일대일로 권고를 하라고 합니다. 그래도 듣지 아니하면 두 세 증인을 데리고 가서 그 증인의 입으로 증참케 하라고 합니다. 그래도 안 들으면 교회에 말하고, 교회의 말도 안 들으면 이방인과 세리와 같이 여기라고 합니다. 교회에서의 치리 문제는 아주 중요한 문제입니다. 참된 교회의 표지 중에 하나로 바로 치리 문제입니다. 곧 교회에서 정당한 치리가 이루어져야 참된 교회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어떻게 하고 있습니까? 첫번째부터 어긋나게 하고 있지 않습니까? 교회에서 가끔 보면 형제, 자매들 중에 누가 잘못하는 일을 하였는데 그 일이 몇 날이 못 되어서 전교인이 다 아는 경우가 있습니다. 이것은 누가 어디서 어떻게 하더라고 친한 사람들끼리 전화도 하고, 이야기도 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면서 꼭 하는 말이 무엇입니까? ‘너니까 하는 말인데 너만 알고 있으라’고 그렇게 말을 합니다. 그러나 정말 형제를 사랑한다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먼저 혼자 일대일로 조용히 그 형제에게 말해야 합니다. 그때 그 형제가 들으면 형제를 얻은 것이요, 안 들으면 신실한 두 세 증인이 가서 돕고, 그래도 듣지 아니하면 교회에 말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오늘 말씀에서 모든 사람들 앞에서 알리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러함에도 불구하고 듣지 아니하면 어떻게 하라고 합니까? 이방인처럼 여기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교회안의 치리 문제는 쉬운 일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조심스럽게 다루어야 합니다. 그리고 이러한 치리나 재판은 언제나 주님의 심판을 염두에 두고 행해야 하는 것입니다. 사람들의 감정이나 인맥이나 이해관계에 의해서 재판을 하면 안 됩니다. 교회 안에서 송사문제가 발생하면 대부분 감정적으로 나가서 싸우게 되는 것을 보게 됩니다. 서로 상대방을 마귀라고 몰아 부치는 것입니다. 그리고 결국 최종적으로는 세상의 법정에까지 가서 소송을 거는 부끄러운 일들이 교회 안에서 일어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재판을 하게 될 때에 그 자세를 21절에서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21절 말씀을 보면 “하나님과 그리스도 예수와 택하심을 받은 천사들 앞에서 내가 엄히 명하노니. 너는 편견이 없이 이것들을 지켜 아무 일도 편벽되이 하지 말며”라고 했습니다. 바울 사도는 하나님과 그리스도 예수와 택하심을 받은 천사들 앞에서 엄히 명한다고 합니다. “너는 편견이 없이 이것들을 지켜 아무 일도 편벽되이 하지 말며”(21b). 이 말씀은 치우치지 않게 하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러한 송사나 재판이 일어나지 않도록 경솔하게 안수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교회는 직분 자를 세울 때 함부로 세워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오늘날 교회에서 직분 자를 세울 때 과연 무슨 목적으로 세우고 있습니까? 우리는 우리 자신에게 물어 봐야 합니다. 많은 경우를 보면 때가 되면 적당한 시기에 진급시키는 식으로 직분을 주어 교회에 충성하게 하도록 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또 교회에 급한 재정적인 문제가 발생하면 직분 자를 대량으로 세워서 감당하게 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이것은 교회다운 모습이 아닙니다. 교회는 직분 자를 세울 때 경솔하게 세워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22절을 다시 보면 “아무에게나 경솔히 안수하지 말고 다른 사람의 죄에 간섭지 말고 네 자신을 지켜 정결케 하라”고 합니다. 교회가 장로를 잘못 세우면 우리는 그 잘못에 동참하게 되기 때문에 자기를 지켜 정결해야 합니다. 교회에 직분 자를 세울 때 목사가 세우고 싶은 사람 있고, 성도들이 세우고 싶은 사람이 있을 것입니다. 여러분은 어떤 사람을 장로로 세우고 싶습니까? 장로의 직분을 잘 감당할 자겠죠. 이것은 정답입니다. 그런데 실제로는 어떻게 되기 쉽습니까? 사회적인 명성이나 제정적인 능력이 있는 자를 세워 교회의 유익을 구하고자 하기 쉽습니다. 이렇게 되면 그것이 쓴뿌리가 되어 결국 교회 가운데 많은 문제가 생기게 됩니다. 그렇기 때문에 경솔히 안수하지 못하게 한 것입니다.

 

23절 말씀에 보면 이제 바울 사도는 디모데에게 개인적인 당부의 말씀을 합니다. “이제부터는 물만 마시지 말고 네 비위와 자주 나는 병을 인하여 포도주를 조금씩 쓰라”(23). 아마 디모데가 무슨 연유인지는 모르겠지만 위장이 좋지 않았나 봅니다. 그런데도 자신의 정결을 유지한다고 전혀 포도주를 마시지 않았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바울 사도는 디모데에게 포도주를 조금씩 쓰라고 권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은 디모데가 자기 자신에게 지나친 엄격함을 가지고 있는 것을 경계하는 것으로 봅니다. 그렇게 되면 자칫 금욕주의로 흐를 수도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바울은 디모데에게 자신의 위장병과 또 다른 질병으로 인하여 약용으로 포도주를 조금씩 쓸 것을 권면하고 있는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참으로 디모데를 향한 목자 바울 사도의 상한 심정과 사랑을 느낄 수 있습니다.

 

24-25절 말씀을 보면 “어떤 사람들의 죄는 밝히 드러나 먼저 심판에 나아가고 어떤 사람들의 죄는 그 뒤를 좇나니. 이와 같이 선행도 밝히 드러나고 그렇지 아니한 것도 숨길 수 없느니라”고 합니다. 이 말씀은 결국은 모든 것이 다 드러나리라는 것을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악행도 드러나고, 선행도 드러나게 될 것입니다. 곧 모든 것이 다 밝히 드러나게 될 것입니다. 이것은 22절의 경고를 강조하기 위함입니다. 22절 말씀을 다시 보면 “아무에게나 경솔히 안수하지 말고 다른 사람의 죄에 간섭지 말고 네 자신을 지켜 정결케 하라”고 했습니다. 당시에 어떤 사람을 직분 자로 세워놓고 보니 그의 죄가 드러나는 경우가 있었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바울 사도는 디모데에게 아무에게나 경솔히 안수하지 말고 신중 하게 하라는 것입니다. 직분 자의 자격에 대하여서는 우리가 이미 디모데전서 3장에서 자세히 살펴보았습니다. 그러므로 교회에서 직분 자를 세울 때에는 어떤 현실적인 문제나 사심을 따라서 세워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오직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따라 말씀의 기초 위에서 해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모두가 다 결국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 서게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무슨 직분을 받았든지, 직분을 받지 않았든지 간에 주님 앞에 설 것이라는 자세로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신앙생활이란 예배드리기 위해서 예배당이 나오는 것만이 아닙니다. 우리의 모든 생각과 가치관과 시간을 쓰는 것과 물질을 쓰는 모든 영역에서 나타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날마다 말씀과 그 가르침에 착념하면서 우리의 삶을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 서서 심판을 받는다는 자세로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곧 종말론적 자세를 가지고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성령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은혜를 주셔서 우리로 하나님께서 주신 직분을 충성되게 감당하게 하여 주시기를 원합니다. 특별히 우리교회가 말씀을 맡은 자들을 신중하게 세우며, 그들이 하나님 앞에서 그 직분을 충성스럽게 감당해 나가도록 배나 존경할 수 있기를 원합니다. 그리하여 우리교회 가운데 하나님의 말씀이 바르게 선포되어지며, 온 교회가 그 말씀의 가르침을 잘 받아 말씀의 열매를 풍성히 맺어가게 하여 주시기를 원합니다. 그리하여 우리교회가 진리 위에 굳게 세워져 가게 하여 주시고, 교회다움을 잘 나타내 가는 교회가 되게 하여 주시기를 원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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