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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 최상범
성경본문 히 10:26-39
성경본문내용 (26)우리가 진리를 아는 지식을 받은 후 짐짓 죄를 범한즉 다시 속죄하는 제사가 없고(27)오직 무서운 마음으로 심판을 기다리는 것과 대적하는 자를 소멸할 맹렬한 불만 있으리라(28)모세의 법을 폐한 자도 두 세 증인을 인하여 불쌍히 여김을 받지 못하고 죽었거든(29)하물며 하나님 아들을 밟고 자기를 거룩하게 한 언약의 피를 부정한 것으로 여기고 은혜의 성령을 욕되게 하는 자의 당연히 받을 형벌이 얼마나 더 중하겠느냐 너희는 생각하라(30)원수 갚는 것이 내게 있으니 내가 갚으리라 하시고 또 다시 주께서 그의 백성을 심판하리라 말씀하신 것을 우리가 아노니(31)살아 계신 하나님의 손에 빠져 들어가는 것이 무서울진저(32)전날에 너희가 빛을 받은 후에 고난의 큰 싸움에 참은 것을 생각하라(33)혹 비방과 환난으로써 사람에게 구경거리가 되고 혹 이런 형편에 있는 자들로 사귀는 자 되었으니(34)너희가 갇힌 자를 동정하고 너희 산업을 빼앗기는 것도 기쁘게 당한 것은 더 낫고 영구한 산업이 있는 줄 앎이라(35)그러므로 너희 담대함을 버리지 말라 이것이 큰 상을 얻느니라(36)너희에게 인내가 필요함은 너희가 하나님의 뜻을 행한 후에 약속을 받기 위함이라(37)잠시 잠깐 후면 오실 이가 오시리니 지체하지 아니하시리라(38)오직 나의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또한 뒤로 물러가면 내 마음이 저를 기뻐하지 아니하리라 하셨느니라(39)우리는 뒤로 물러가 침륜에 빠질 자가 아니요 오직 영혼을 구원함에 이르는 믿음을 가진 자니라
강설날짜 2012-12-02

2012년 12월 2일 한결교회 주일예배강설

히브리서 제26강


구원에 이르도록 나아가자


말씀 : 히 10:26-39


지난주에 우리가 예수의 피를 힘입어 성소에 나갈 담력을 얻었기 때문에, 온전한 믿음과 참 마음으로 하나님께 나아가자라는 말씀의 의미에 대해서 생각해보았습니다. 여기서 온전한 믿음과 참 마음이 무엇이라고 했습니까? 온전한 믿음은 내가 아무런 소망이 없는 죽을 죄인이었는데, 이런 벌레 같은 날 위해 주님이 그 모진 십자가를 지셔서 나를 용서하시고 나를 하나님의 자녀로 삼아 주셨다 라고 하는 놀라운 구원의 은혜를 마음속으로 믿어 영접하고, 그 공로를 온전히 의지하면서, 주님께 감사와 찬송을 올려드리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리고 참 마음은 “진실한 마음 또는 진리의 마음”이라는 뜻인데, “진실한 마음”이라고 보는 것이 타당할 것입니다. 그것은 예수님이 “마음이 청결한 자는 하나님을 볼 것이요.”라고 말씀하신 것과 일맥상통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 세상에 마음이 청결한 자가 어디 있습니까? 예수님 말고는 아무도 없습니다. 그러면 아무도 하나님을 볼 수 없다는 말일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주님의 놀라운 은혜로 말미암아 그 마음에 예수님의 피뿌림을 받아 청결케 된 자는 하나님을 뵐 수 있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참 마음은 청결한 마음, 곧 피뿌림을 받은 마음이요, 그러므로 그 마음은 자신이 죽을 죄인이라는 것을 진실되게 인정하는 마음인 것입니다. 자신이 나름대로 괜찮은 신자라고 하는 모든 거짓된 생각과 교만과 위선을 다 내어던지고, 하나님과 사람 앞에서 자신이 더러운 죄인이라는 사실을 깊이 인정하면서, 자신의 죄로 인해서 한없이 후회하고 아파하고 슬퍼하면서... 그리고 죄를 미워하고 버리고자 하는 마음을 가지면서, 상하고 통회하고 애통하는 마음으로 십자가를 바라보면서 주님 앞에 있는 모습 그대로 서는 마음이 바로 참 마음입니다. 이러한 마음으로 나아가야 하고, 주님의 십자가의 공로만을 온전히 의지하는 온전한 믿음으로 나아가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신학적인 용어로 회심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날마다 주님 앞에 나아가는 회심을 통해 주님과 겸손히 동행하는 삶을 살아가는 것이 바로 신자의 삶입니다.

 

왜 그렇게 날마다 주님께 나아가야 합니까? 왜냐하면 우리 속에는 여전히 죄악된 본성이 남아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우리의 육체의 정욕을 좇아 살기 쉽고, 또 자기를 사랑하고 죄를 사랑하고 이 세상에 전부인 것처럼 이 세상을 소망하며 살아갈 때가 많은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주님이 우리를 부르시고 구원하셔서 회복하신 그 창조목적대로 살아가기 위해서는 반드시 날마다의 회심을 통해 이러한 죄악된 본성을 끊임없이 죽여서 우리의 그릇된 가치관과 생각들, 세상에 대한 사랑과 세상을 향한 소망을 깨트리고, 주님을 사랑하고, 주님이 약속하신 영원한 새 하늘과 새 땅을 바라보면서, 이 잠간 있는 세상을 나그네로, 주님의 뜻에 순종하며, 주님과 늘 겸손히 동행하는 삶으로 바뀌어야 하는 것입니다. 이런 은혜가 날마다 임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런 은혜는 우리가 나아가야지만 얻을 수가 있는 것입니다. 아니 그냥 하나님이 주권적으로 은혜 주시면 안 되는 것일까요? 물론 그렇게 하실 때도 있지만, 보편적으로 그렇게 안하십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로서 로봇이 아니라 인격체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부르시고 구원하시고 모든 죄를 사하여 거룩케 하신 목적이 무엇입니까? 바로 하나님을 나의 아버지로 모시고 그분과 인격적인 관계를 맺는 자녀가 되게 하시기 위함인 것입니다. 탕자의 비유에서처럼 아버지는 아들을 억지로 끌고 올 수 있는데도 그렇게 하지 않고 돌아올 때까지 기다렸던 것처럼 주님도 우리를 기다리시는 것입니다. 돌아감은 우리가 해야 할 일입니다.

 

물론 지금도 내가 주님을 붙잡고 있는 것이 아니라 주님이 우리를 붙잡고 계십니다. 그러나 이것을 잘못 오해해서... “그렇죠? 내가 주님을 붙잡고 있는 것이 아니라, 주님이 우리를 붙잡고 있는 것이죠? 그러면 주님은 계속 저를 붙잡으시고, 저는 내 마음대로 살랍니다.” 그럴 수 없습니다. 그 주님이 나를 온전히 붙잡고 계신다는 사실을 깨달을 때, 우리도 주님을 붙잡아야 합니다.

 

이러한 회심의 역사를 위해 우리가 할 일이 무엇입니까? 말씀과 기도밖에 없습니다. 주님이 우리를 위해 십자가에 대신 죽으셔서 우리를 죄와 심판에서 구원해주셨다는 사실을 가슴 깊이 기억하고 생각하면서, 말씀을 통해 그 큰 은혜와 사랑을 더 깊이 깨달아가야 하고, 또 기도에 힘을 써야 합니다. “더 이상 이렇게 죄 가운데 살 수 없다” 하고 결단하면서 “이제는 주님을 만나고 주님의 사랑을 깨달아서 변화되어야 하겠다”는 간절한 소원 가운데, 뜻을 세우고 결단해서 말씀과 기도에 힘쓸 때, 하나님의 은혜가 우리 마음속에 부어지는 것입니다. 그런 노력과 애씀과 간절함과 결단 없이 그냥 매일 매일을 그저 그렇게 살아간다면, 끝까지 그렇게 살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그렇게 살면 안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히브리서는 우리의 성화에 대해서 매우 능동적인 태도를 강조합니다. 이것은 이후에 배울 모든 히브리서의 저변에 흐르고 있는 핵심적인 사상입니다. 그 앞까지는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단번의 희생이 우리를 온전히 영원히 거룩하게 했고, 그러한 영단번의 거룩함은 우리로 하나님 앞에 아무런 장애물 없이 담대하게 나아갈 수 있는 자격을 갖추게 하였다는... 구약과는 비교할 수 없는 새언약의 놀라운 축복에 대해 집중했다면, 이제부터는 그러한 은혜 받은 우리가 새 언약백성으로서 그러한 놀라운 특권을 어떻게 누려갈 것인가, 그리고 그 특권을 누림으로써 우리가 이 세상에서 어떻게 구원의 완성을 향해서 성화의 삶을 전진해 나아갈 것인가 하는 것을 가르치고자 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온전한 믿음과 참 마음으로 주님께 나아가지 않으면 그 어떠한 신령한 은혜의 축복을 누릴 수 없을 뿐만 아니라, 우리가 영적인 게으름과 부주의함 속에서 세상과 벗하는 삶을 계속 살아갈 때에, 결국 뒤로 후퇴하는 삶을 살다가 비참한 타락에 떨어지고 말 것이라고 오늘 본문이 경고하는 것입니다.


(26)우리가 진리를 아는 지식을 받은 후 짐짓 죄를 범한즉 다시 속죄하는 제사가 없고(27)오직 무서운 마음으로 심판을 기다리는 것과 대적하는 자를 소멸할 맹렬한 불만 있으리라


여기서 “짐짓”이라는 단어를 원어로 보면 “고의로, 자원하여, 즐겨”라는 뜻입니다. 이 단어는 구약의 민수기 말씀을 배경으로 하고 있습니다.


(30)본토 소생이든지 타국인이든지 무릇 짐짓 무엇을 행하면 여호와를 훼방하는 자니 그 백성 중에서 끊쳐질 것이라(31)그런 사람은 여호와의 말씀을 멸시하고 그 명령을 파괴하였은즉 그 죄악이 자기에게로 돌아가서 온전히 끊쳐지리라(민 15:30-31)


여기 민수기 말씀에서 “짐짓”이라는 단어를 원어로 보면 “손을 세게 던지다, 손을 높이 들다”라는 뜻입니다. 대놓고 대적하고 항거하는 것입니다. 그 구체적인 예가 뒤에 나옵니다.


(32)이스라엘 자손이 광야에 거할 때에 안식일에 어떤 사람이 나무하는 것을 발견한지라(33)그 나무하는 자를 발견한 자들이 그를 모세와 아론과 온 회중의 앞으로 끌어 왔으나(34)어떻게 처치할는지 지시하심을 받지 못한 고로 가두었더니(35)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그 사람을 반드시 죽일지니 온 회중이 진 밖에서 돌로 그를 칠지니라(36)온 회중이 곧 그를 진 밖으로 끌어내고 돌로 그를 쳐 죽여서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명하신 대로 하니라(민 15:32-36)


안식일을 범한 사람을 갖다가 속죄하는 죄사 없이 곧바로 돌로 쳐죽였습니다. 안식일 한번 범했다고 곧바로 돌로 쳐 죽이는 것이 조금 과한 형벌 아닌가 그렇게 생각할 수 있겠지만, 그러나 사실을 잘 생각해보면 이것은 연약함으로 말미암아 있게 되는 실수나 허물 정도가 아니라, 아주 대담하고 고의적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멸시하고, 공개적으로 하나님을 훼방한 것입니다. 왜냐하면 이 안식일을 범한 자는 어떤 자입니까? 이 사람은 바로 하나님의 놀라운 이적과 기사와 구원의 역사를 친히 목도한 자이고, 또 모든 사람들이 하나님의 뜻을 따라 안식일을 지키는 상황에서, 사람들 앞에서 보란 듯이 대담하게 안식일을 범하고 나무를 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연약함이나 실수가 아닙니다. 아주 하나님을 대적하는 고의적이고 대담한 범죄입니다. 이런 죄에 대해서는 더 이상의 속죄하는 제사가 없고 곧바로 돌로 쳐 죽였습니다.

 

뿐만 아니라 레위기 24:1-10 말씀에서 또 다른 예가 나오는데, 거기서는 어떤 한 여인의 아들이 진중에서 공개적으로 여호와의 이름을 훼방하고 저주하여서 곧바로 진 밖에서 돌로 쳐 죽임을 당했습니다. 이런 경우가 구약성경에 자주 나오는데, 특히 신 13장, 17장에서는 우상숭배 하는 자나 신접한 자에 대해서 곧바로 돌로 쳐 죽일 것을 명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돌로 쳐 죽일 때 긍휼히 여기지 말라고 명하셨습니다. 긍휼 없는 심판만 있는 것입니다. 이 외에도 살인을 행한 자, 가족공동체를 깨트리는 간음을 행한 자, 부모를 고의로 거역하는 패역하고 완고한 자 등에 대해서는 더 이상의 속죄하는 제사가 없고 긍휼 없는 심판만이 주어졌습니다. 이것이 구약에서 속죄 제사 없이 곧바로 돌로 쳐 죽임을 당하는 죄들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혼란스러운 것은 나중에 여호수아가 죽고 나서 사사시대 이후부터는 (다윗과 솔로몬 시대를 제외하고서는) 사실상 우상숭배가 보편화되고 일반화되었는데, 그때는 왜 다 죽임당하지 않았는가 하는 것입니다. 오히려 하나님께서 때때로 징계하시지만, 또한 회개하면 이스라엘 백성들을 용서하시고 그들을 대적의 손에서 구원해주셨습니다. 사사기에서는 회개 안 해도 구원해주셨습니다. 그리고 왕정시대를 보면,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우상을 숭배했어도 회개하고 자신에게 돌아오면 용서해주실 것이라고 선지자들을 통해서 말씀하셨습니다. 다윗 같은 경우는 유부녀와 간음하고 살인까지 저질렀어도 죽임당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면 이런 것하고 민수기나 모세의 치하의 상황에서 범죄하여 곧바로 죽임 당하는 것하고 어떤 차이가 있는 것일까요? 이것이 오늘 본문을 이해하는데 있어서 포인트입니다.

 

그것은 바로 네 가지 특징이 있느냐 없느냐로 구분합니다. 첫째로, 그 사람이 하나님의 놀라운 구원의 은혜를 친히 목도하고 경험했음에도 불구하고 고의로 범죄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이방인이나 혹은 이스라엘 백성이라 하더라도 부모로부터 신앙교육을 제대로 받지 못해 하나님에 대해 무지한 경우에는 정상참작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모세의 치하에서 곧바로 돌로 침을 당한 모든 경우들은 명백하게 하나님의 놀라운 구원의 역사와 기적과 이사와 하나님의 영광을 친히 목도 했음에도 불구하고 고의로 대적하며 범죄한 것입니다. 두 번째로 연약함에 의한 실수나 허물이 아니라 아주 강퍅하고 악심에서 비롯되는 고의적인 범죄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세 번째로 그 범죄들은 모두 공개적이었습니다. 대놓고 보란 듯이 안식일을 범하고, 사람들 앞에서 부끄러움이나 수치심 없이 여호와의 이름을 훼방하고 저주하는 것입니다. 공개적으로 범하는 죄는 온 사람들에게 미치는 파급효과가 크고, 공동체 앞에서 하나님을 현저히 욕보이는 것이기 때문에 그것은 용서받지 못할 중죄가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네 번째 속죄의 제사 없이 형벌받는 죄의 특징은 계속적이라는 것입니다. 그 악행을 멈출 생각을 안하는 것입니다. 이런 4가지 특징을 가진 범죄일 경우에 하나님께서는 용서와 긍휼 없는 심판을 명하셨습니다.

 

그리고 이것은 신약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도 “우리가 진리를 아는 지식을 받은 후”에 짐짓 범죄한 것이라고 했습니다. 아무나 고의로 범죄했다고 더 이상의 회개할 기회 없이 긍휼 없는 심판만 받게 되는 것이 아닙니다. 이 세상에 불신자로서 살아가는 수많은 사람들이 성령뿐만 아니라 성삼위 하나님을 다 공개적으로 모독하며 살아갑니다. 그래도 그런 사람들에게는 회개할 기회가 있습니다. 왜냐하면 몰랐기 때문입니다. 사도바울도 “내가 전에는 훼방자요 핍박자요 포행자이었으나 도리어 긍휼을 입은 것은 내가 믿지 아니할 때에 알지 못하고 행하였음이라”(딤전 1:13) 라고 했습니다. 그렇게 무지함으로 하나님을 고의적으로 공개적으로 대적할 때에는 알지 못하고 행한 것이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회개할 기회를 주십니다. 그러나 명백하게 하나님의 놀라운 기적과 이사와 구원의 은혜를 목도하고 체험하고도 고의적으로 그것을 대적할 때에는 그것은 용서받지 못하는 죄가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바리새인들이 예수 그리스도께서 귀신을 쫓아내고 병을 고치는 놀라운 기적을 목도하였을 때, 그것은 명백하게 부인할 수 없이 하나님의 은혜의 역사요 성령의 역사임이 드러났습니다. 본인들도 마음속에서 그것을 부인할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바리새인들은 그 악한 마음을 따라 고의적으로 그리고 공개적으로 대적하면서 그것이 귀신의 역사라고 훼방하였습니다. 이것이 바로 용서받지 못하는 성령훼방죄가 되는 것입니다. 이 성령훼방죄가 바로 오늘 본문에서 짐짓 죄를 범하는 것과 동일한 죄인 것입니다. 특히 오늘 본문에서 범죄하다라는 단어가 현재 분사형으로 되어 있다는 점에 주목해야 합니다. 그렇게 멈출 생각 없이 계속적으로 그리고 공개적으로 하나님을 대적하는 것입니다. 이런 죄에 대해서는 은혜의 시대인 신약의 시대라 하더라도 역시 더 이상의 회개의 기회 없이 긍휼없는 심판이 주어지게 됩니다. 29절에 이 짐짓 범하는 죄에 대해 보다 구체적인 설명을 하고 있습니다.


(29)하물며 하나님 아들을 밟고 자기를 거룩하게 한 언약의 피를 부정한 것으로 여기고 은혜의 성령을 욕되게 하는 자의 당연히 받을 형벌이 얼마나 더 중하겠느냐 너희는 생각하라


하나님의 아들을 밟고 자기를 거룩하게 한 언약의 피를 부정한 것으로 여기는 것은 히브리서 6장에서처럼 유대교의 입장으로 돌아가는 것을 의미합니다. 즉 이것은 예수는 자칭 메시아이고 거짓 이단자이며 신성모독을 행했기 때문에 마땅히 십자가에 처형당해야 했다고 주장하는 유대교의 입장으로 돌아가는 것을 말합니다. 히브리서 수신자들이 지금 흔들리고 있는 위기도 바로 이것입니다. 기독교를 버리고 배교하여 옛날의 유대교로 돌아가고 싶은 것입니다. 히브리서 저자는 바로 그것이 용서받을 수 없는 성령훼방죄를 범하는 것이라고 경고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여기서 짐짓 죄를 범한다는 것은 일반적으로 우리가 매일 짓는 우리의 연약함으로 말미암은 허물과 실수가 아니라, 고의적이고 공개적으로 그리고 대담하게 그리스도를 배반하고 옛날의 삶으로 돌아가는 것을 말합니다. 이러한 짐짓 범한 죄는 신약에서도 다시 회개할 기회가 없고, 구약에서처럼 긍휼 없는 심판만 있습니다. 아니 구약보다 더 큰 심판이 있다.

 

모세의 법에 대하여 짐짓 범죄 했을 때는 돌로 침을 당해서 그 육체가 형벌 받았습니다. 그것은 신약의 백성이 짐짓 죄를 범했을 때보다 오히려 형벌이 가벼운데, 왜냐하면 그들이 경험하고 목도한 하나님의 은혜는 장차 오실 참 실체의 모형과 그림자에 불과했기 때문입니다. 구약의 백성들은 희미하게 그리스도를 보았습니다. 희미하게 보았어도 공개적으로 부정하고 대적할 때는 용서받지 못하고 돌로 침을 당했다면, 하물며 그 모든 구약의 모형과 그림자의 궁극적 실체요 성취로서 그리스도를 친히 보고 경험한 자가 이후에 그 복음을 져버리고 배반한다면, 그가 받을 형벌의 중함이 어떠하겠는가 하는 것입니다. 그 육체만 형벌 받는 정도가 아니라, 그 몸과 영혼이 영원히 불로 태워지게 되는 고통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27)오직 무서운 마음으로 심판을 기다리는 것과 대적하는 자를 소멸할 맹렬한 불만 있으리라


그래서 그렇게 주님을 배반하고 타락하면 결국 회개의 기회를 얻지 못하고, 무서운 마음으로 심판을 기다리며 두려움 속에 고통하며 살다가, 결국에는 자기를 소멸할 맹렬한 불 심판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특히 이 점은 히브리서 6장의 경우와는 조금 다른 점입니다. 히브리서 6장에서는 마음이 강퍅할 대로 강퍅해 져서 도저히 회개를 생각할 수 없을 정도로 굳어진 상태를 말했지만, 여기서는 자기가 심판받을 것을 알면서도, 그 심판 때문에 무서움에 벌벌 떨고 있으면서도, 도저히 회개할 마음이 생기지 않는 그런 비참한 상태를 말합니다. 그래서 절망 가운데 무서운 마음으로 심판이 임할 때까지 기다리며 사는 것입니다. 그렇게 무서운 마음으로 기다리는 것 자체가 지옥 심판의 시작입니다. 그러므로 오늘 본문 말씀이 우리에게 얼마나 두려움을 주는 말씀입니까?

 

이러한 통렬한 경고의 말씀은 히브리서 6장에서 배웠던 것처럼, 참된 신자라도 타락할 수 있다고 하는 성도의 견인교리를 부정하는 말씀이 아니라, 그만큼 우리에게 허락된 구원이 얼마나 큰 것인가 하는 것을 가르쳐주고, 우리가 그렇게 큰 구원을 받은 자로서 책임 있는 삶을 살아야 한다는 것을 강조하여 가르쳐주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오늘 이 경고의 말씀을 나와는 상관없다고 생각하면 안 됩니다. 물론 이 말씀이 우리와 직접적인 연관성이 있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가 유대교로 돌아갈 리가 없습니다. 그러나 그럴지라도 이 말씀이 우리와 전혀 상관없는 것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그들이 신앙을 져버리고 유대교로 돌아갔던 것처럼, 동일하게 우리도 신앙을 져버리고 세상으로 돌아가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오늘 본문에서 말하는 짐짓 죄를 범하는 것이 고의적이고 공개적인 배교라고 하니, 내가 지금 짓고 있는 죄는 그런 죄는 아니니깐 안심해도 괜찮네... 그렇게 생각하면 안 됩니다. 결국은 우리가 전진해 나아가지 아니하면, 그것은 가만히 현상유지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후퇴하고 있는 것이고, 그리고 그 후퇴의 끝에는 타락이 있기 때문입니다.

 

오늘 본문의 흐름을 생각해보십시오. 25절에 모임을 폐하는 어떤 자와 같이 하지 말라라고 말했습니다. 모임에서 서서히 빠지는 것이 바로 타락의 첫 관문입니다. 타락은 바로 복음의 은혜의 감격을 잃어버리고, 구원의 은혜를 망각한 자가 모임에 빠지게 되는 작은 죄에서부터 시작합니다. 우리도 타락하여 세상으로 돌아가는 것이 어떤 사건을 계기로 확 돌아서게 되는 것이 아니라, 작은 죄에서부터 시작하여 서서히 타락을 향해서 후퇴를 하면서 결국은 타락에 떨어지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도 이 큰 구원의 은혜를 망각하고 세상과 벗하면서 죄 가운데 거하게 될 때, 그 죄로부터 시작해서 우리는 타락을 향해서 나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천로역정에서 해석자의 집에서 크리스챤이 쇠창살에 갇혀 절망하며 슬퍼하고 탄식하고 있는 “절망”이라는 사람을 보게 되는데, 거기서 그와 이와 같은 대화를 나눕니다.


크리스챤 : “왜 여기 갇혀 있습니까?”

절망 : “나는 지금 절망에 빠진 인간이 되어 이 쇠창살로 된 감방에 갇혀 있고, 영원히 나갈 수가 없어요. 나에게는 아무런 희망이 없습니다.”

크리스챤 : “어쩌다 이 지경이 되었습니까?”

절망 : “나는 경계하고 절제하는 일을 게을리 했습니다. 욕망에 눈이 어두워 스스로 쇠사슬에 묶인 꼴이 되었고, 결국에는 하나님의 선하심과 그 말씀의 빛에 대항하는 죄를 지었습니다. 나는 성령을 슬프시게 했습니다. 그랬더니 그분은 내 곁을 떠났습니다. 성령이 내게서 떠나자 나는 악마를 유혹했지요. 악마가 내게로 왔습니다. 나는 하나님을 진노케 했고, 그분은 내게서 떠나셨습니다. 내 마음이 너무나도 굳어져서 이젠 회개할 수도 없게 됐습니다.”

크리스챤 : “아니, 찬송 받으실 하나님의 아들은 매우 인자하시지 않으십니까?”

절망 : “나는 내 손으로 다시 한 번 그분을 십자가에 못 박았습니다. 나는 그분의 인격을 모독했고, 그분의 의로우심을 경멸했으며, 그분의 피를 속되게 만들었고, 그리고 성령을 모욕했습니다. 그리하여 이제 내게는 무서운 협박과 피할 수 없는 심판, 맹렬한 분개만이 남았습니다. 어떠한 희망도 없습니다.”

크리스챤 : “도대체 어떤 일로 인해서 이렇게 비참한 지경에 이르게 되었습니까?”

절망 : “욕망과 쾌락과 이 세상의 안락함 때문입니다. 그런 것들을 즐길 때는 나 자신이 대단히 즐겁고 행복하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그 모든 것들이 독충처럼 나를 물어뜯고 있지요.”


마찬가지로 우리가 이 큰 구원의 은혜를 망각하고 등한히 여긴 채 죄 가운데 거하는 삶을 계속적으로 살아간다면, 시간이 가면 갈수록 이 천로역정의 “절망”의 모습이 곧 내 모습이 될 수가 있는 것입니다. 타락의 이야기는 남의 이야기가 아니라 바로 나의 실제적인 이야기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오늘 본문 앞에서 정신을 차리고 깨어 근신해야 합니다. 내가 지금 공개적으로 배교하는 죄를 범하지 않았다고 결코 이 타락을 나와는 상관없는 이야기로 생각하거나 안심해서는 절대로 안 되는 것입니다.

 

특히 오늘 본문은 바로 믿는 신자에게 경고로서 주어지고 있습니다. 우리에게 주신 하나님의 경고의 말씀입니다. 어떤 사람은 이 타락한 자는 수박 겉핥기식으로 은혜를 체험한 비중생자로서 신앙의 곁자리에만 머물다가 결국 신앙을 포기한자라고 말하는데, 그런 식으로만 볼 수 없습니다. 물론 결과적으로 맞지만, 그렇게 이분법적으로 본문에 접근하면 안 된다고 히브리서 6장을 다룰 때 배웠습니다. 특히 오늘 본문에서 26절의 주어가 무엇입니까?


(26)우리가 진리를 아는 지식을 받은 후 짐짓 죄를 범한즉 다시 속죄하는 제사가 없고


주어가 “우리가”입니다. 예수님 믿는다고 하는 우리가, 중생했다고 하는 우리가, 짐짓 죄를 범하면 다시 속죄하는 제사가 없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29절을 자세히 보십시오.


(29)하물며 하나님 아들을 밟고 자기를 거룩하게 한 언약의 피를 부정한 것으로 여기고 은혜의 성령을 욕되게 하는 자의 당연히 받을 형벌이 얼마나 더 중하겠느냐 너희는 생각하라


이 타락한 사람은 이미 한 번 언약의 피뿌림을 받아 거룩하게 함을 입은 자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런 거룩함을 입은 자가 자기를 거룩하게 한 은혜의 보혈을 부정한 것으로 여기고 있다는 것이죠. 그러므로 우리가 이 본문을 단순히 이분법적으로 접근해서 이 사람은 거듭난 자가 아니라고 말해서는 안 됩니다. 본문에 의하면 참된 신자라도 타락할 수 있고, 이 타락의 교리는 우리로 정신을 차리고 깨어 정진하도록 하기 위해서 경고의 말씀으로 주어지고 있는 것입니다. 더욱이 30절을 보십시오.


(30)원수 갚는 것이 내게 있으니 내가 갚으리라 하시고 또 다시 주께서 그의 백성을 심판하리라 말씀하신 것을 우리가 아노니(31)살아 계신 하나님의 손에 빠져 들어가는 것이 무서울진저


히브리서 저자는 우리에게 하나님의 심판이 하나님의 친 백성인 이스라엘에게도 임하였다는 것을 상기시킵니다. 여기서 인용된 말씀은 신명기 32장인데, 이 신명기 32장은 모세의 노래입니다. 그 내용을 보면, 앞부분에는 하나님이 이스라엘에게 베푸신 놀라운 구원의 은혜가 칭송되고 있고, 그 뒤에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스라엘 백성들이 배반하여 하나님을 대적할 것이라는 예언이 나옵니다. 그러면서 하나님이 하시는 말씀이 바로 오늘 본문에서 인용한 말씀입니다. 하나님은 자기를 대적한 원수를 반드시 갚으시는 분이신데, 그 대적이 자기의 택한 백성이라도 예외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이 신명기 말씀을 인용하는 것은 이 타락과 심판이 하나님의 자녀라고 하는 우리에게도 임할 수가 있다는 것을 강조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정신 차려서 신앙의 길을 전진해 나아가지 아니하면, 우리도 이스라엘 백성들과 똑같이 진멸당하고 말 것이라는 것입니다. 아니 그들보다 더 큰 형벌이 있을 것입니다. 그래서 히브리서 저자는 “하나님의 손에 빠져 들어가는 것이 무서울진저...”라고 말끝을 흐렸습니다. 그것이 얼마나 무서운 것입니까?

 

그러므로 우리는 신앙생활에 회의가 들고 신앙을 포기하고 세상으로 돌아가고 싶을 때, 그 끝에 있을 심판의 무서움을 생각해야 합니다. 영적으로 게으르고 부주의하며, 이 세상의 안일함과 행복과 육신의 쾌락을 좇아 살아가고 있다면, 그 끝에 있을 하나님의 심판의 무서움을 생각하십시오. 신앙이 성장하지 않고 오래도록 병적인 유아상태 머물러 있다면 정말 이 심판이 내게 임할 것이라고 생각하고 정신을 차려야 합니다. 살기 위해 몸부림 쳐야 합니다. 임박한 진노에서 벗어나기 위해 구원을 부르짖으며 몸부림쳐야 합니다.

 

우리가 살 길은 오직 하나입니다. 회개하고 주님께로 돌이켜서 소망을 굳게 붙잡고 믿음으로 신앙의 경주를 해 나가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우리가 온전한 믿음과 참 마음으로 날마다 주님 앞으로 나아가서 주님께 은혜를 받아야 하는 것입니다. 지금 나의 상황이 아무리 죄로 인해 어둡고 비참해도 참회하며 주님께 나아가면, 주님께서 반드시 은혜로 우리를 영접하시고 우리의 모든 죄를 고쳐주시고, 우리의 삶을 변화시켜주실 것입니다. 죄에서 벗어나려고 아무리 노력해도 벗어날 수 없었던 그 무기력함에서부터 우리를 건져내셔서 우리에게 죄를 이기는 권능을 주실 것입니다. 그리고 주님의 은혜 안에서 주님이 약속하신 더 나은 소망을 굳게 붙잡도록 하실 것입니다. 그래서 이 땅에서 고난을 인내하며 순례의 길을 정진해 나아갈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주님께서 은혜를 주셔서 이 경고의 말씀을 두렵고 떨림으로 우리 마음에 새기게 하여주시고, 우리로 깨어 근신하게 하시고, 날마다 주님의 십자가 은혜 안에서 주님께 나아가는 자가 되게 하여주시기를 간절히 기도합니다. 그리하여 우리 가운데 이 신앙의 길에서 낙오하는 사람이 한 사람도 없게 하시고, 다 신앙의 경주를 완주하는 자들이 되게 하여주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32절부터는 히 6장에서 그러했던 것처럼 통렬한 경고에 뒤따라오는 위로와 격려의 메시지입니다. 히 6장에서도 통렬하게 경고한 뒤에 9절에서 그들이 과거에 성도들을 섬긴 것을 말하면서 그들을 위로하고 격려했듯이 여기서도 동일하게 그들의 과거의 선행을 근거로 위로하고 격려합니다.


(32)전날에 너희가 빛을 받은 후에 고난의 큰 싸움에 참은 것을 생각하라(33)혹 비방과 환난으로써 사람에게 구경거리가 되고 혹 이런 형편에 있는 자들로 사귀는 자 되었으니(34)너희가 갇힌 자를 동정하고 너희 산업을 빼앗기는 것도 기쁘게 당한 것은 더 낫고 영구한 산업이 있는 줄 앎이라(35)그러므로 너희 담대함을 버리지 말라 이것이 큰 상을 얻느니라


이전에 그들이 예수님을 처음 믿었을 때에는 고난의 큰 싸움에서 인내하였습니다. 여기서 싸움은 “contest”입니다. 무언가를 얻기 위해 서로 경쟁하고 싸우는 운동경기입니다. 그들이 무엇을 얻기 위해 어떤 고난의 싸움에 참여하였습니까? 사람들에게 비방과 환란을 당하였고, 구경거리가 되었고, 그리고 이런 형편에 있는 자들과 교제를 나누었습니다. 그리고 산업을 빼앗겼다고 했습니다. 예수님 믿는다는 것 때문에 농사지을 땅과 재산과 집을 몰수당했습니다. 그리고 갇힌 자를 동정하였습니다. 그 당시는 자기 재산이 없는 수감자들은 친구들이 음식과 그 밖에 필요한 것을 공급해 주지 않으면 굶어 죽기 일쑤였습니다. 그리고 로마 제국이 교회를 박해한 모든 시대에 옥에 갇힌 친구를 찾아본다는 것은 목숨을 걸어야 할만 큼 위험한 일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두려움 없이 신자의 의무를 다하였습니다.

 

이러한 그들의 모습은 예수님의 비유를 생각나게 합니다. 마 25장 31절 이하에서 하나님이 양과 염소를 나누시면서 하신 말씀이 “그 때에 임금이 그 오른편에 있는 자들에게 이르시되 내 아버지께 복 받을 자들이여 나아와 창세로부터 너희를 위하여 예비된 나라를 상속하라 내가 주릴 때에 너희가 먹을 것을 주었고 목마를 때에 마시게 하였고 나그네 되었을 때에 영접하였고 벗었을 때에 옷을 입혔고 병들었을 때에 돌아보았고 옥에 갇혔을 때에 와서 보았느니라”... 그때 양들이 말하기를 “우리가 언제 그렇게 했습니까?”라고 하자, 하나님은 “지극히 작은 자에게 한 것이 곧 나에게 한 것이니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즉 히브리서 수신자들이 처음 예수님 믿었을 때는 그렇게 주님을 섬기는 삶을 살았습니다. 그것은 고난의 삶이었고 그들은 그 고난을 기쁨으로 받았습니다. 이것이 바로 담대함입니다.


(35)그러므로 너희 담대함을 버리지 말라 이것이 큰 상을 얻느니라


우리는 두 가지 차원에서의 담대함을 가져야 합니다. 먼저는 예수의 피를 힘입어 주님 앞에 담대하게 나아가야 하는 것이고, 그렇게 나아가서 은혜를 받았으면, 이제 이 세상에 대해서 담대함을 가져서 고난과 핍박 앞에서 두려워하지 아니하고 당당하게 맞서는 것입니다. 어떻게 이런 담대함을 가질 수 있습니까? 그들이 그렇게 고난의 큰 싸움에 참여해서 얻고자 한 것이 무엇이었습니까? 그것은 바로 “더 낫고 영구한 산업이 있는 줄 앎이라”입니다. 죽음 너머에 있는 더 나은 삶, 곧 하나님 나라의 상급을 바라보는 믿음과 소망이 그들로 하여금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고 고난과 맞서 싸우게 하였던 것입니다. 히브리서 저자는 수신자들에게 바로 이러한 믿음과 소망을 놓지 말고 끝까지 붙 잡을 것을 권면하고 있습니다. 끝까지 붙잡으면 상을 잃지 않을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바로 이 믿음과 소망을 우리도 가져야 합니다. 물론 오늘날 우리는 이 히브리서가 쓰여진 당시처럼 예수님 믿으면 죽는다든지 옥에 갇힌다든지 재산을 몰수당한다든지 하는 일은 없습니다. 그러면 그때보다 편하게 신앙생활 할 수 있느냐... 절대로 그렇지 않습니다. 직접적인 핍박은 없을지라도 결국 우리도 주님의 뜻대로 살려하면, 많은 것을 희생하고 포기해야 하는 고통을 감수해야 하는 것입니다. 안정적인 삶, 좋은 직장, 좋은 환경. 좋은 집, 좋은 차, 좋은 대접, 명성 포기할 수 있어야 하고, 물질을 희생하여 주와 복음을 위해 사용하고, 사람들에게 욕먹고 조롱당하고 왕따 당할 것을 각오하고서라도 복음을 자랑하고 전파하는 삶을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사실상 순교의 정신이 아니고서는 살아갈 수 없는 삶입니다.

 

우리가 만일 이러한 희생에 대한 두려움 때문에 주저하고 머뭇거리게 된다면, 결국 세상의 정욕에 얽매이게 되어서 타락의 길로 들어서게 되는 것입니다. 이 시간 우리의 삶을 돌아볼 수 있기를 바랍니다. 우리가 지금 어떤 삶을 살고 있습니까? 하나님과 교회와 주와 복음을 섬기면서 고난의 큰 싸움을 싸우고 있습니까? 아니면 고난을 피해 나 자신을 섬기고, 가정의 행복과 편안하고 안락하고 안정된 삶을 꿈꾸며 돈을 섬기며 살고 있습니까? 우리는 우리 자신을 깊이 돌아보아야 합니다.

 

그렇게 우리가 주님의 사랑도 모르고, 주님의 은혜도 모르고 우리의 고집대로 살 때에 우리에게 고난이라는 것이 있었습니까? 고생은 있었죠. 그러나 그런 고생은 안 믿는 사람들도 이 세상 살면서 다 당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자기를 위해 살면 고생은 있지만, 고난은 없습니다. 고난은 주님이 우리에게 복음을 통해서 우리의 소명을 알게 하시고, 소명을 따라 살도록 하나님이 은혜를 주신 다음에야 비로소 생기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고생하면서 산 것은 하늘나라에서 상급이 없습니다. 고난을 받으면서 산 것이 그것이 바로 하늘나라의 상이 있는 것입니다.

 

여기에 이 상 안 받고 싶은 사람 아무도 없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우리의 삶을 이렇게 살면 안 됩니다. 죽으면 죽으리라는 일사각오의 정신으로 고난에 맞서 싸워야 합니다. 우리가 영원한 하나님 나라를 상속받기 위해서 가야 하는 길은 고난의 길 외에 다른 길이 없습니다. 그래서 36절에서 히브리서 저자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36)너희에게 인내가 필요함은 너희가 하나님의 뜻을 행한 후에 약속을 받기 위함이라


주님께서도 하나님의 뜻을 행하시는데 있어서 고난과 죽음이 뒤따랐습니다. 하물며 그 뒤를 따라가는 주의 종들이 하나님의 뜻을 행함에 있어서 주님이 가신 길보다 더 쉬운 길일 것이라고 생각하면 안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뜻을 행한 후에 약속의 성취 곧 하늘나라의 상급을 받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뜻을 행하려면 고난 받아야 합니다. 그래서 우리에게는 고난을 견뎌내는 인내가 필요한 것입니다.

 

고난을 통해서 영광에 이르고, 인내를 통해서 약속을 받는 것이 영원히 변할 수 없는 신앙의 법칙입니다. “예수님 믿고 충성해서 이 세상에서도 복 받고 저 세상에서도 복받자.” No! 절대로 그럴 수 없습니다. 저 세상에서 천국을 얻고자 한다면, 이 세상에서는 주님의 뜻을 행하기 위해서 고난 받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그리고 이런 고난을 인내하는 자세는 결국 주님이 다시 재림하여 오실 것에 대한 간절한 소망에서 비롯되는 것입니다.


(37)잠시 잠깐 후면 오실 이가 오시리니 지체하지 아니하시리라(38)오직 나의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또한 뒤로 물러가면 내 마음이 저를 기뻐하지 아니하리라 하셨느니라


이 말씀은 합 2:3-4을 인용한 말씀입니다. 원문이랑 다릅니다. 70인역을 인용했기 때문입니다. 구약의 백성들은 장차 초림하여 오실 그리스도를 바라보는 믿음으로 고난을 인내하는 삶을 살았고, 신약의 백성들은 이미 오셔서 구속을 이루신 그리스도의 공로를 믿는 마음으로, 그리고 그분이 다시 구름을 타고 이 세상에 재림하여 오실 것이라고 하는 것을 믿는 마음으로 현재의 고난을 인내하며 사는 것입니다. 이 믿음으로 전진해 나아가야지 뒤로 물러가면 안 되는 것입니다.


(39)우리는 뒤로 물러가 침륜에 빠질 자가 아니요 오직 영혼을 구원함에 이르는 믿음을 가진 자니라


침륜은 파멸, 멸망입니다. 쉽게 말해 지옥입니. 우리에게는 전진이냐 후퇴냐 둘 중의 하나밖에 없습니다. 가만히 그 자리에 가만히 있는 것이란 존재하지 않습니다. 앞으로 나아가지 아니하면 자동적으로 후퇴하고, 정박지에 딱 붙들려 있지 않으면 자동적으로 흘러 떠내려가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끝은 타락이고, 거기는 더 이상의 회개의 기회가 없고 오직 파멸과 긍휼 없는 심판만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히브리서 저자는 우리가 어디로 갈지 둘 중의 하나를 선택하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그는 우리에게 말합니다. 우리는 그렇게 뒤로 후퇴할 자들이 아니고 오히려 믿음으로 전진하는 자들로 부르심을 입었고, 결국 그 길 끝에 있는 영혼을 구원함이 이르는 운명으로 정해진 자들이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갈 길은 정해져 있습니다. 우리의 운명을 정해져 있습니다. 그것은 믿음으로 전진해 나아가서 영혼을 구원함에 이르는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구원이라는 단어가 일반적으로 은혜로 우리가 수동적으로 받게 되는 구원을 의미하는 ‘소테리아’라는 단어가 아니라, ‘페리포이에시스’라는 단어인데, 이 단어는 ‘페리포이에오마이’라는 동사에서 왔습니다. 이 동사의 의미는 “획득하다, 구매하다” 라는 뜻의 단어입니다. 그리고 ‘페리포이에시스’라는 단어는 신약성경에서 4번 사용되었는데 단 한 번도 ‘구원’이라는 의미로 사용되지 않았고, ‘얻다, 획득하다, 소유가 되다’라는 의미로 사용되었습니다. 그래서 원어 그대로 다시 직역하면 “영혼을 얻고 획득함”입니다. 말이 조금 어색하지만, 이렇게 표현하는 것은 천국은 침노하는 자들의 것이라는 예수님의 말씀처럼 구원의 여정을 끊임없이 달려가서 완주하는 자가 되어야 할 것이라는 우리의 적극적이고 능동적인 성화의 노력을 그렇게 표현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바울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13)형제들아 나는 아직 내가 잡은 줄로 여기지 아니하고 오직 한 일 즉 뒤에 있는 것은 잊어버리고 앞에 있는 것을 잡으려고(14)푯대를 향하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이 위에서 부르신 부름의 상을 위하여 좇아가노라(빌 3:13-14)

(23)오직 성령이 각 성에서 내게 증거하여 결박과 환난이 나를 기다린다 하시나(24)나의 달려갈 길과 주 예수께 받은 사명 곧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 증거하는 일을 마치려 함에는 나의 생명을 조금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노라(행 20:23-24)


사도바울은 하나님이 주신 사명을 이루기 위해서 일사각오의 자세로 고난의 길을 끝까지 걸어갔습니다. 바로 이러한 삶을 우리에게 기대하시면서 주님은 그 십자가에서 우리의 죄를 대신하여 못 박혀 피 흘려 죽으셨던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우리가 가야 할 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오늘 본문 말씀 앞에서 우리의 삶을 돌아보면서 두 가지로 도전을 받아야 합니다. 하나는 우리가 전진해 나아가지 않을 때 빠지게 될 침륜을 생각하면서 그것에 대한 거룩한 두려움을 가지고 정신을 차리고 근신해야 하고, 또 다른 하나는 바로 우리가 이 신앙의 길을 끝까지 완주하여 결국 하늘나라의 상급을 받는 자로 운명 지워진 자라는 것을 기억하면서 하늘소망을 가지고 믿음으로 고난과 맞서 싸워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를 위해서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현재 나와 함께 하시고, 나를 긍휼히 여기시는 대제사장이신 예수님께서 지금도 은혜의 보좌에서 우리가 나아오기를 기다리고 계신다는 것을 알고, 오직 십자가만 붙들고 날마다 주님께 나아가는 삶을 살아가야 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저와 여러분들이 가야 할 길입니다. 우리에게 허락하신 십자가의 사랑을 깊이 생각하면서 믿음과 소망으로 이 길을 끝까지 걸어가시는 저와 여러분들이 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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