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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 손재호
성경본문 요 21:15-17
성경본문내용 (15)저희가 조반 먹은 후에 예수께서 시몬 베드로에게 이르시되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이 사람들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 하시니 가로되 주여 그러하외다 내가 주를 사랑하는 줄 주께서 아시나이다 가라사대 내 어린 양을 먹이라 하시고(16)또 두번째 가라사대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하시니 가로되 주여 그러하외다 내가 주를 사랑하는 줄 주께서 아시나이다 가라사대 내 양을 치라 하시고(17)세번째 가라사대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하시니 주께서 세번째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하시므로 베드로가 근심하여 가로되 주여 모든 것을 아시오매 내가 주를 사랑하는 줄을 주께서 아시나이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 양을 먹이라
강설날짜 2011-03-20

2011년 3월 20일 설교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말씀:요한복음 21:15-17

 

우리는 지난 시간에 약속하신 대로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먼저 갈릴리에 오셔서 물고기 잡으러 간 제자들을 만나 주시고 자신을 나타내신 사건을 공부했습니다. 주님께서는 낙향하여 밤새도록 고기를 잡았으나 한 마리도 잡지 못해 절망 가운데 있는 제자들에게 그물을 배 오른편에 던지라고 하시고 그들에게 많은 고기를 잡아 주셨습니다. 그리고 숯불을 피우시고 떡과 고기로 맛있는 조반을 준비하셔서 그들을 섬겨 주셨습니다. 이를 통해 낭패와 실망 가운데 있는 제자들에게 자신을 나타내셨습니다. 오늘 말씀은 지난 사건에 계속되는 말씀으로써 부활하신 주님께서 제자들에게 개인적으로 자신을 나타내시는 사건입니다. 곧 베드로에게 사랑고백을 받으신 후 자신의 양무리를 먹이라고 하시는 사건입니다. 이 말씀은 예수님과 베드로 사이에 이루어지는 일이지만 제자들을 떠나 개인적으로만 이루어진 일은 아닙니다. 제자들이 있는 가운데 공개적으로 이루어진 일입니다. 그러므로 베드로에게 사랑고백을 받으신 후 자신의 양무리를 부탁하신 것은 베드로뿐만 아니라 모든 제자들에게 해당되는 말씀입니다. 또한 오늘날 우리들에게도 동일하게 해당되는 말씀입니다. 우리가 오늘 본문 말씀을 살펴보는 가운데 이 말씀이 우리들에게 주는 의미가 무엇인지를 배울 수 있기를 바랍니다.

 

15절에 보면 조반을 먹은 후에 예수님께서는 시몬 베드로에게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이 사람들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라고 물으셨습니다. 이 질문은 예수님께서 베드로의 사랑을 의심해서 물으시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아마 예수님께서는 베드로에게 주님이 아직 사랑하고 계시며 버리지 않았다는 사실을 알려 주시기 위해 이런 질문을 한 것 같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이런 질문을 세 번이나 반복해서 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베드로에게 세 번이나 반복해서 이런 질문을 하셨다는 것은 상당히 의도적이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베드로에게 세 번이나 동일한 질문을 하신 이유가 무엇일까요? 우리가 그 이유를 정확히 알 수는 없지만 베드로가 예수님을 세 번 부인한 것과 연관이 있는 것 같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세 번이나 자신을 부인하고 물고기 잡으러 간 베드로의 내면을 잘 아셨습니다. 다른 사람은 다 버릴지라도 자신은 버리지 않겠다고 큰 소리쳤지만 닭 울기 전에 저주 하면서까지 예수님을 부인하였기 때문에 주님에 대해 면목이 없었습니다. 베드로는 그 일로 인해 늘 마음의 짐을 지고 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런 베드로의 마음의 부담을 아셨습니다. 주님께서는 이런 베드로에게 세 번이나 반복해서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고 질문하심으로 그 마음의 짐을 벗겨주시고 주님과 사랑의 관계를 새롭게 회복하도록 하기 위함이었습니다. 또한 이를 통해서 주님께서는 베드로가 자신과 사랑의 관계를 회복하고 주님께서 맡기신 사명을 감당하게 하려 하심이었습니다. 17:18절에서 우리가 살펴본 대로 주님께서는 아버지께서 자신을 보내신 것같이 제자들을 세상에 보낸다고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주님께서는 지금 베드로로 하여금 자신의 양무리를 먹이는 삶을 살게 하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베드로에게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이 사람들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라고 질문하셨는데 여기서 ‘이 사람들보다’라는 말이 무엇을 의미하는지에 대해서는 학자들마다 의견이 다양합니다. 어떤 학자는 ‘이들보다’ 곧 ‘다른 제자들보다’라고 번역하기도 하고, 어떤 학자는 ‘이것들보다’ 곧 ‘배와 많이 잡힌 물고기와 다른 제자들보다’라고 번역하기도 합니다. 그런데 어느 쪽으로 번역해도 큰 문제는 없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여기서 예수님께서 왜 베드로에게 이렇게 질문하셨는지 그 의미에 기초해서 해석하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생각됩니다. 그런 관점에서 보면 부활하신 예수님과 그의 동료들 가운데 어느 쪽을 더 사랑하는지 묻는 말로 이해하는 것이 보다 더 바람직한 것 같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여기서 알아야 할 것은 이 질문은 다른 제자들보다 베드로가 예수님 자신을 더 많이 사랑하고 있는지 확인하고자 하는 것 자체가 목적이 아니었다는 것입니다. 즉 예수님의 여러 제자들 가운데 베드로가 예수님을 가장 사랑하는 제자임을 밝히려고 하는 것이 목적이 아니었다는 것입니다. 그렇지만 학자들 가운데는 다른 제자들보다 예수님을 더 사랑하는 것처럼 생각해 오던 베드로의 그 전 태도를 책망하려는 주님의 의도가 거기에 숨겨져 있는 것으로 보는 분들이 많습니다. 이들은 베드로에게 대한 예수님의 이 질문을 통해 베드로를 겸손케 하려 했다는 것입니다. 이런 학자들은 베드로의 주님에 대한 사랑이 다른 제자들보다 더 큰지 묻고 있는 것으로 보는 것입니다. 하여튼 예수님께서는 “네가 이 사람들을 사랑하는 것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라고 묻고 계시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 주님의 질문에 대한 베드로의 대답이 어떠합니까? “주여! 그러하외다. 내가 주를 사랑하는 줄 주께서 아시나이다”라고 했습니다. 베드로는 거기에 있는 다른 제자들이 아니라 부활하신 주님을 본질상 더 사랑하고 있음을 고백하였습니다. 베드로의 이 고백은 거기에 있는 모든 제자들이 보고 듣는 가운데 공개적으로 이루어졌습니다. 그러므로 이 질문은 베드로 개인에 대한 질문이라기보다는 모든 제자들에 대한 질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주님께서는 베드로를 대표로 이 질문을 모든 제자들에게 하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라는 질문을 세 번이나 되풀이 해서 하셨는데 처음에는 비교급의 형태로 곧 ‘이 사람들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고 물으셨습니다(15). 그러나 나머지 두 번은 일반적인 형태 곧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라고 물으셨습니다(16, 17). 오늘날 주님께서도 우리에게 질문하십니다. ‘너희는 이것들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 이 질문에 대한 우리의 대답이 어떠합니까? 우리가 하나님 보다 자녀를, 가정을, 은행의 잔고를, 집이나 차동차를 더 사랑하고 있다면 우리는 아직도 더 깨어져야 합니다. 베드로는 중심으로 주님을 사랑하여 따랐습니다. 죽기까지 충성하겠다는 그의 말이 빈말이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십자가 앞에서 그는 주님을 저주하면서 세 번이나 부인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주님을 사랑하기보다는 다른 것들을 더 사랑하고 있다면 우리는 아직 출발도 하지 못한 것입니다. 주님께서 우리에게 요구하시는 것은 능력이 아니라 사랑입니다. 이 말씀 앞에 우리의 심령이 어떻습니까? 확신입니까? 좌절입니까? 우리가 말씀을 피상적으로 알 때에는 ‘예, 주님을 사랑합니다’하고 말하였을지 모르지만 그러나 베드로의 부인을 보면서 또한 우리가 얼마나 주님을 사랑하지 않는가를 말씀을 통해 보면서 자신이 없습니다. 베드로의 심령이 됩니다.

 

그런데 우리가 주님을 사랑하지 않고 다른 것을 사랑한다는 것은 주님을 죽이는 것입니다. 공생애 기간 세상의 능력을 달라고 주님께 몰려들던 그 많던 사람들이 주님께서 주시고자 하시는 것이 세상의 능력이 아니라 자신의 살과 피를 주심으로 영생을 주시는 것이라고 말씀하시자 반응이 어떠하였습니까? 그 많은 무리들이 모두 돌변하여 예수님을 떠났습니다.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아 죽이라고 소리를 쳤습니다. 마치 모세가 이스라엘 백성들을 구원하기 위하여 바로 왕 앞에 섰을 때 그로 인하여 고난이 가중되자 모세를 벌하여 달라고 말한 이스라엘 백성들의 모습과 다를 바가 없는 것입니다. 나는 나와 나의 가정과 나의 회사와 나의 종교단체와 나의 국가와 이 세상을 더욱 아름답게 발전시키고 영원토록 보존하여줄 그런 메시아를 원하고 있는데 예수님은 오히려 모든 것을 버리고 부정하고 자기 목숨마저 미워하고 나를 따르라고 하시는 주님을 과연 우리가 사랑할 수가 있겠습니까?

 

주님은 베드로에게 다시 묻습니다.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베드로가 예수님을 부인하기 전 같았으면 아주 당당하게 대답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제는 무어라고 합니까? “내가 주를 사랑하는 줄 주께서 아시나이다”라고 대답을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이와 같은 질문을 세 번이나 반복해서 물으시고, 베드로도 세 번이나 반복해서 대답을 합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세 번의 질문에 사용된 헬라어 단어가 다릅니다. 첫 번째와 두 번째 질문에서 주님은 ‘아가파오’(ajgapavw)로 묻고, 세 번째는 ‘필레오’(filevw)로 묻습니다. 베드로는 세 번이나 ‘필레오’로 대답을 합니다. 흔히 헬라어에서 사랑이란 ‘에로스’, ‘필레오’, ‘아가페’로 말합니다. 애정적인 사랑, 우정, 신적 사랑 이렇게 구별하지만 그러나 ‘필레오’와 ‘아가페’가 같이 사용됩니다. 그런데 왜 그렇게 구분을 하여서 보는가 하면 예수님께서 처음에 두 번은 아가페로 물으시는데 베드로는 계속 필레오로 대답을 하자 예수님께서 세 번째는 필레오로 낮추어 물으신 것이라고 합니다. 그렇게 눈높이를 낮추어 주심을 은혜로 볼 수가 있지만 그러나 이미 베드로의 마음을 아시는 주님이십니다. 그러니 세 번이나 물으심은 세 번이나 부인한 베드로를 회복시키시는 말씀으로 봅니다. 그리고서 ‘내가 주를 사랑하는 줄 주께서 아시나이다’에 대한 말씀으로 ‘내 양을 먹이라’고 하십니다. 결국 처음에 주님께서 베드로를 부르실 때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게 하시리라는 말씀을 이루어내시는 것입니다. 베드로가 세 번이나 저주하고 맹세하고 부인할지라도 주님은 또다시 찾아 오셔서 자신의 말씀을 이루어 내시는 것입니다. 여기에 우리 주님의 놀라운 은혜가 있는 것입니다. 주님께서 이루어내시지 아니하시면 베드로나 우리나 결코 주님의 양무리를 섬기는 목자의 삶을 살 수 없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이루어 내시면서 왜 실패하고 부인하고 배신한 베드로를 사용하시는 것입니까? 자아를 깨어내시고 사용하시는 것입니다. 자존심을 부수어 버리고 사용하시는 것입니다. 이와 같은 것은 다른 제자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렇게 하심을 통하여 주님의 일을 나타내시는 것입니다. 즉 베드로나 모세나 바울과 같은 경우에 그러한 깨어진 자를 사용하심을 통하여 오직 주님의 은혜와 사랑을 증거하게 하시는 것입니다. 이처럼 주님의 은혜와 사랑이 증거 되는 자리는 참으로 처절하게 자신이 낮아진 자리에서 시작이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주님을 믿고 따른다는 것은 세상의 영광이나 우리의 자랑이나 능력을 드러냄이 아닙니다. 오히려 우리의 약함과 악함에도 불구하고 나타난 하나님의 오래 참으심과 긍휼이 드러나는 것이 주님의 제자로 부름 받은 자의 당연한 모습인 것입니다. 오늘 저와 여러분들에게도 주님께서 찾아 오셔서 물으십니다. “이것들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 우리가 이 주님의 물음에 무어라고 대답하시겠습니까? 만약에 아직도 우리가 주님보다 더 사랑하는 것들이 있다면 주님께서는 우리들을 사랑하시기에 그것들을 부수어 버리실 것입니다. 그리고 오직 주님의 사랑에만 항복하도록 만들어 내실 것입니다. 이것이 사랑입니다. 왜 그렇게 하시는 것이 사랑입니까? 고린도전서 16:22절에 보면 “만일 누구든지 주를 사랑하지 아니하거든 저주를 받을지어다. 주께서 임하시느니라”고 하고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주님을 사랑하지 않으면 저주를 받습니다. 그러므로 주님께서는 우리가 주님보다 더 사랑하는 것이 있으면 그 것들을 다 깨어 부수어 버리시는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를 향하신 우리 주님의 사랑인 것입니다. 베드로는 세 번씩이나 저주하고 맹세하면서 주님을 부인했습니다. 제자들은 부활하신 주님을 직접 목격하고서도 물고기 잡으러 가버렸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그 밤에 한 마리의 물고기도 잡지 못하고 실의에 빠져 있었습니다. 주님께서는 이런 제자들에게 약속하신 대로 찾아 오셨습니다. 그리고 실패를 만회 해 주시고 사랑으로 섬겨 주셨습니다. 사랑고백을 받으시고 자신의 양무리를 맡겨 주셨습니다. 참으로 이것은 우리 주님의 놀라운 은혜가 아닐 수 없습니다.

 

누가복음 22:24-34절을 보면 “또 저희 사이에 그중 누가 크냐 하는 다툼이 난지라. 예수께서 이르시되 이방인의 임금들은 저희를 주관하며 그 집권자들은 은인이라 칭함을 받으나 너희는 그렇지 않을찌니 너희 중에 큰 자는 젊은 자와 같고 두목은 섬기는 자와 같을찌니라. 앉아서 먹는 자가 크냐 섬기는 자가 크냐. 앉아 먹는 자가 아니냐. 그러나 나는 섬기는 자로 너희 중에 있노라. 너희는 나의 모든 시험 중에 항상 나와 함께 한 자들인즉 내 아버지께서 나라를 내게 맡기신 것 같이 나도 너희에게 맡겨 너희로 내 나라에 있어 내 상에서 먹고 마시며 또는 보좌에 앉아 이스라엘 열 두 지파를 다스리게 하려 하노라. 시몬아 시몬아 보라. 사단이 밀 까부르듯 하려고 너희를 청구하였으나 그러나 내가 너를 위하여 네 믿음이 떨어지지 않기를 기도하였노니 너는 돌이킨 후에 네 형제를 굳게 하라. 저가 말하되 주여 내가 주와 함께 옥에도, 죽는데도 가기를 준비하였나이다. 가라사대 베드로야 내가 네게 말하노니 오늘 닭 울기 전에 네가 세번 나를 모른다고 부인하리라 하시니라”고 했습니다. 이 말씀은 누가복음 22장 앞부분을 보면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앞에 두고 마지막 유월절 만찬을 행하시는 것을 배경으로 주어지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떡과 포도주로 자신의 살과 피를 주신다고 말씀 하고 계십니다. 이것이 주님의 피로 세우시는 새 언약이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러니 지금 예수님께서는 죽으시려고 가시는데 제자들은 무슨 다툼을 하고 있는 것입니까? 누가 크냐의 싸움을 하고 있습니다. 이런 그들에게 주님께서는 세상에서는 높은 자가 주관하지만 그러나 너희는 그렇지 않다고 하십니다. 너희는 섬기는 자로 부름을 받았다는 것입니다. 그러시면서 사단이 너를 밀 까부르듯 하려고 너희를 청구하였다고 합니다. 그러나 주님께서 베드로의 믿음이 떨어지지 않도록 기도하신다는 것입니다. 비록 부인할지라고 근본적인 믿음과 주님에 대한 사랑이 떨어지지 않도록 주님께서 기도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그러나 베드로는 자기의 연약함을 몰랐습니다. 그는 도리어 주님 앞에서 큰 소리쳤습니다. 주와 함께 옥에도, 죽는데도 갈 준비되었다고 하였습니다. 이런 그에게 주님께서는 오늘 닭 울기 전에 네가 세 번 나를 부인하리라고 하셨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여기서 한 가지 의문이 생깁니다. 주님께서 베드로가 처음부터 부인하지 않도록 기도하시면 되실 텐데 왜 부인하도록 허락하시고서는 다시 돌이키게 하시는 것인가 하는 것입니다. 주님께서 이렇게 하시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그 이유는 베드로의 열심을 인정하지 않겠다는 것입니다. 베드로가 얼마나 용감하고 얼마나 자신 있게 주님을 위하여 죽기까지 따르겠다고 다짐에 다짐을 하였습니까? 그는 주와 함께 옥에도 가고 죽는데도 갈 준비가 되어 있다고 했습니다. 다른 복음서에 보면 다른 사람은 다 부인할지라도 자신을 부인하지 않겠다고 큰 소리쳤습니다. 그런데 이런 그가 주님을 어떻게 부인했습니까? 계집 종 앞에서 저주하며, 맹세하며 주님을 모른다고 부인하였습니다. 우리 주님께서는 이런 것을 통해 자신의 의와 열심으로 결코 주님을 따를 수가 없다는 것을 알게 하시는 것입니다. 주님을 따른다는 것, 주님을 믿는다는 것이 결코 사람의 일이 될 수 없음을 알게 하시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우리의 결심과 마음은 조석지변입니다. 순간순간 변합니다. 그러므로 베드로의 열심과 자존심이 다 무너져 내려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야 주님의 일이 드러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주님의 일을 감당하는 자들은 반드시 깨어져야 하는 것입니다. 자신이 깨어지지 않고서는 결코 주님의 일을 감당 할 수 없는 것입니다.

 

모세가 40세 때 자기 민족을 위해 목숨을 걸고 애굽 감독을 죽였지만 오히려 도망가게 되었습니다. 다시 40년의 세월이 지나고 자기의 힘과 능력이 다 빠지고 나서 주님께서 다시 그를 부르셨습니다. 그러므로 베드로도 자신의 열심과 능력들이 다 빠져 나가는 것이 예수님을 저주하고 맹세하면서 부인하는 것입니다. 바울 사도도 어떨 때에 부르신 것입니까? 예수님을 핍박하고 예수님 믿는 자를 잡아 죽이려고 다닐 때 주님께서 부르신 것입니다. 왜 이렇게 하시는 것입니까? 인간이 얼마나 하나님을 모르느냐를 드러내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모를 뿐 아니라 하나님을 위해 자신이 능력 있게 일한다고 하는 것이 도리어 하나님의 일을 망치고 있음을 알게 하시는 것입니다. 이정도로 우리가 하나님에 대해 무지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오늘도 원하시는 것은 능력이 아니라 사랑인 것입니다. 여러분이 교회에 어떤 문제가 생기거나 가정에 어떤 문제가 생길 때 늘 생각하는 것이 무엇입니까? 하나님이 전지전능하신 분이신데 말씀으로 천지를 창조하셨는데 왜 이런 어려움을 단번에 해결하지 않으시는가 하는 것일 것입니다. 그러다 보니 사람들이 하나님께 구하는 것이 능력을 달라고 합니다. 능력 받아서 하나님의 일을 크고 멋있게 원도 한도 없이 해드리겠다고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러한 능력 행함을 원하시지 않으십니다. 그러므로 주의 이름으로 귀신도 좇아내고 큰 능력을 행하였다고 하여도 주님께서는 나는 너를 모른다고 하시는 것입니다(마 7장).

 

그러면 주님께서 무엇을 원하시는 것입니까? ‘너 죽으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자신이 능력 있게 일함으로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겠다고 합니다. 그러나 그러한 곳에 하나님의 영광이 나타나는 것이 아니라 십자가에서 하나님의 영광이 나타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섬기는 자로 오신 것이 하나님의 영광이고, 한 알의 썩는 밀알로 오신 것이 하나님의 영광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주님을 따르는 자들의 능력이란 섬기는 것이 능력이고, 자기를 부인하는 것이 능력인 것입니다. 이러한 것은 결국 자신의 자존심이 죽어야만 되는 것입니다. 그래야 주님의 일하심과 은혜가 드러나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고 나오는 일들이라는 것이 겉으로는 하나님의 영광이라고 하지만 모두가 자신들의 힘과 땀과 수고를 찬양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러한 모습이 베드로나 우리나 다를 바가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주님께서는 오늘도 우리에게 찾아 오셔서 물으시는 것은 “네가 이 사람들 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입니다. 우리가 이 주님의 질문에 어떻게 대답하시겠습니까? 성령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은혜를 주셔서 우리로 베드로와 같이 겸손히 주님에 대한 사랑을 고백 하게 하여 주시기를 원합니다. 그리하여 오직 주님의 사랑에 기초해서 주님께서 맡겨주신 양무리를 먹이는 목자의 삶을 살 수 있기를 원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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