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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 손재호
성경본문 마 9:9-13
성경본문내용 (9)예수께서 거기서 떠나 지나가시다가 마태라 하는 사람이 세관에 앉은 것을 보시고 이르시되 나를 좇으라 하시니 일어나 좇으니라(10)예수께서 마태의 집에서 앉아 음식을 잡수실 때에 많은 세리와 죄인들이 와서 예수와 그 제자들과 함께 앉았더니(11)바리새인들이 보고 그 제자들에게 이르되 어찌하여 너희 선생은 세리와 죄인들과 함께 잡수시느냐(12)예수께서 들으시고 이르시되 건강한 자에게는 의원이 쓸데 없고 병든 자에게라야 쓸데 있느니라(13)너희는 가서 내가 긍휼을 원하고 제사를 원치 아니하노라 하신 뜻이 무엇인지 배우라 내가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부르러 왔노라 하시니라
강설날짜 2006-09-10

2006년 9월 10일 설교


마태를 부르신 왕


말씀:마태복음 9:9-13
요절:마태복음 9:9     “예수께서 거기서 떠나 지나가시다가 마태라 하는 사람이 세관에 앉은 것을 보시고 이르시되 나를 좇으라 하시니 일어나 좇으니라.”

예수님의 두 번째 기적 이야기의 마무리로 두 가지 이야기가 나옵니다. 하나는 ‘마태를 부르신 이야기’(9:9-13)이고, 또 하나는 ‘금식에 관한 이야기’(14-17)입니다. 오늘 말씀은 그 첫 번째 이야기로 예수님께서 ‘마태를 제자로 부르신 사건’입니다. 예수님은 중풍병자의 죄를 사해 주시고 고쳐두신 후 길을 가시다가 마태가 세관에 앉자 있는 것을 보시고 부르셨습니다. “나를 좇으라.” 이 말씀은 마태의 인생을 바꾸어 놓은 은혜스럽고 복된 말씀이었습니다. 오늘 말씀을 통해 세리 마태를 제자로 부르시는 예수님을 배울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리하여 마태에게 임한 은혜가 우리들 가운데도 충만히 임하길 바랍니다.
  
9절을 보면 예수님은 가버나움에서 중풍병자를 고치신 이후에 세관을 지나시게 되었습니다. 마침 세관에서 ‘마태라는 하는 사람’이 앉아 있었습니다. 마가복음과 누가복음을 참조하면, 마태는 세리였고 본명이 레위였습니다. 당시 로마인 세금 징수원은 인기가 없는 직업이었습니다. 그런 일에 종사한 유대인 또한 인기가 없었습니다. 인기가 없는 정도가 아니라 조롱과 멸시의 대상이었습니다. 일제시대 이완용과 같은 매국노들을 우리가 멸시하고 천대하듯이 이들도 그런 존재였습니다. 마태는 그런 세리 중에 한 사람이었습니다. 유대인들의 입장에서 볼 때 그는 도덕의식도 없고 국가를 위한 야망도 없는 구제불능의 사람이었습니다. 탐욕에 눈이 어두워 로마에 빌붙어 살아가는 매국노, 정직하지 못한 더러운 놈, 탐욕에 빠진 죄인으로 밖에 보이지 않았습니다. 당시 세리와 창기하면 죄인의 대명사처럼 불리웠습니다. 마태는 동족들로부터도 멸시와 천대를 받는 소망이 없는 죄인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이런 마태가 세관에 앉은 것을 보셨습니다. 마태는 자신의 소명 사건을 회고하면서 예수께서 ‘마태라 하는 사람’을 보셨다고 기록합니다. 마태는 예수님께서 자기를 부르실 때, 한 인격으로 대우해 주셨음을 생생하게 기억했던 것 같습니다. 예수님은 그를 더러운 죄인이라는 선입관으로 대하지 않으셨습니다. 그의 직업과 과거 때문에 사람도 아닌 것처럼 취급하지 않으셨습니다. 이제껏 마태가 만났던 많은 사람들은 그를 판단하고 정죄했습니다. 그래서 마태는 외롭고 힘들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를 다른 이들과 동등한 ‘사람’으로 여기셨습니다. 예수님은 동족들로부터 극도의 멸시와 천대를 받던 마태라는 사람을 보셨습니다. 이런 그를 보시고 “나를 좇으라”고 말씀하심으로 동족들로부터 버림받은 그를 자기 제자들의 그룹에 포함시키셨습니다. 이것은 마태를 향한 우리 주님의 일방적인 은혜요, 긍휼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세리 마태를 제자로 부르셨다는 것은 우리에게 많은 의미를 전달해 주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중풍병자의 죄를 사해 주심으로 자신이 사죄의 권능이 있음을 주장하셨습니다. 그런데 여기에 백성들의 눈에는 어떤 사람보다도 더 큰 죄인 한 사람이 있습니다. 예수님은 이런 그를 제자로 부르셨습니다. 예수님은 거기서 떠나가시다가 마태라 하는 사람을 보셨습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무엇을 보았습니까? ‘세리’를 보았습니다. 세상 사람들은 우리 안에서 온갖 것을 다 보지만 그것들은 모두 부수적인 것입니다. 그러나 그리스도는 모든 것을 아시면서도 그런 것들을 보시지 않으셨습니다. 예수님은 사람을 보십니다. 우리는 찢기고 멍들고 흠집투성이일지 모릅니다. 그리고 그 모든 것이 다 우리의 잘못 때문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어느 경우에서나 그리스도는 사람을 보십니다. 그 분은 마태가 들었던 것과 똑같이 부드러운 음성으로 우리를 부르십니다. “나를 좇으라.”

마태를 부르신 사건을 통해서 또한 우리 주님께서 왕으로서 인간의 의지의 영역에서 능력과 권위를 나타내시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세관에 앉아 있는 마태를 보시고 “나를 좇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에게 양해나 설득도 하지 않았습니다. 그의 제안을 먼저 심사숙고해 보는 것이 좋을 것이라고 제안하지도 않으셨습니다. “나를 좇으라.” 이 말씀은 조용하나 힘이 있었습니다. “나를 좇으라”는 주님의 부르심에 대한 마태의 반응은 어떠하였습니까? 마태는 즉각 응답했습니다. “일어나 좇으니라.” 왕의 능력이나 권위는 사람들에 의해 제한을 받습니다. 가다라 지방에서 ‘우리를 떠나라’고 하셨을 때 우리 주님은 떠나셨습니다. 그러나 마태는 주님의 권위에 순종하였습니다. 이것은 우리 주님의 은혜와 긍휼로 말미암은 역사입니다. 마태는 주님의 부르심에 순종함으로 그의 인생은 놀랍게 변화를 받게 되었습니다. 그는 죄사함을 받고 구원을 받게 되었습니다. 멸시받고 천대받는 죄인 중에 죄인이 왕이신 우리 주님의 제자가 되었습니다. 그는 왕의 사관이 되어 우리에게 이 하나님 나라의 위대한 복음서를 전해 주는 복된 인생이 되었습니다.

마태라는 사람을 보시고 제자로 불러주신 주님께서 우리 한 사람 한 사람들을 보시고 주님의 제자들로 불러주신 은혜를 감사하고 찬양합니다. 우리의 왕은 사죄의 권세 자가 되십니다. 이 예수님은 우리를 사람으로 보십니다. 우리의 외모나 선입견으로 대하지 아니하십니다. 마태라는 사람을 보시고 그를 제자로 부르신 왕께서 우리들을 또한 보시고 제자로 부르십니다. “나를 좇으라.” 이 주님의 부드럽고 아름다운 음성이 우리 각자의 심령에 충만히 울려 퍼질 수 있기를 바랍니다. 나의 죄악된 모습을 보시지 아니하시고, 나의 부족한 모습을 보시지 아니하시고, 나를 한 사람의 인격체로 보시고, 제자로 부르시는 우리 주님의 은혜를 감사하고 찬양합니다. 우리가 이 주님의 은혜에 마태와 같이 즉각 순종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리하여 세리 레위가 성 마태가 되어 하나님의 통치를 받고 하나님 역사에 귀하게 쓰임 받은 것같이 우리도 하나님 앞에 복된 인생들이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10절에 보면 예수님의 부르심을 받은 마태는 친구들을 초청하여 큰 잔치를 베풀었습니다. 이것은 주님의 부르심에 은혜로 말미암아 새 인생을 살게 된 마태의 신앙고백이요, 간증과도 같은 것이었습니다. 왕이신 우리 주님은 기쁨이 충만하셔서 마태와 그의 친구들과 함께 기대어 앉아 먹고 마시셨습니다. 그런데 이 은혜로운 모습을 지켜본 바리새인들의 반응이 어떠하였습니까? 11절에 보면 이들은 제자들에게 말했습니다. “어찌하여 너희 선생은 세리와 죄인들과 함께 잡수시느냐.” 바리새인은 당시 유대 사회에서 대단히 존경을 받는 인물들이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께 헌신하기로 결단한 사람들로서 경건한 생활을 하기 위해서 매주 이틀씩 꼬박꼬박 금식을 할 정도로 종교적인 열심이 많았습니다. 이런 그들이 생각하기에 세리나 죄인들은 도무지 상종할 수 없는 존재들이며, 선택받은 하나님 백성에 도저히 포함될 수 없는 부류들이었습니다. 그런데 이런 세리와 창기들과 함께 어울려 식사하며 교제하는 예수님을 보고 그들은 상당히 실망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이 경건한 사람으로 생각했었는데 알고 보니 죄인들과 어울리는 상종 못할 사람이었습니다.

12절에 보면 예수님은 이같은 바리새인들의 말을 들으시고 말씀하셨습니다. “건강한 자에게는 의원이 쓸데없고 병든 자에게라야 쓸 데 있느니라.” 예수님은 죄인들과 함께 하심을 병자들과 함께 있는 의원에 비유하셨습니다. 참된 의원이라면 병든 자를 배척하거나 비방하지 않습니다. 병들었기 때문에 오히려 긍휼히 여기고 고쳐주기 위해 그들과 많은 시간을 함께합니다. 예수님이 죄인들과 함께 식사교제를 하신 것은 그들의 망가진 삶을 고쳐주시려는 긍휼의 표현이었습니다. 주님의 일방적인 긍휼을 입은 사람들의 누리게 될 풍성함이 가시화 된 것이 주님과의 식탁교제였습니다. 늘 지탄받고 멸시받던 세리와 죄인들은 한 인격체로 대해주시는 주님과 식사하면서 주님의 자비하심과 은혜로우심을 만끽할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바리새인들은 이런 주님의 마음을 전혀 헤아리지 못했습니다.

예수님은 이런 그들에게 13절에 보면 “너희는 가서 내가 긍휼을 원하고 제사를 원치 아니하노라 하신 뜻이 무엇인지 배우라”고 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호세아 6:6절 말씀을 인용한 것입니다. “나는 인애를 원하고 제사를 원치 아니하며 번제보다 하나님을 아는 것을 원하노라.” 원래 제사란 도저히 하나님께 나올 수 없는 죄인들로 하여금 다시 하나님과 교제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해 하나님께서 계시해주신 은혜의 방편입니다. 제사 제도를 주신 것 자체가 이미 하나님의 긍휼이었습니다. 어떤 종류의 제사도 있기 전부터 하나님께서는 이미 죄인들을 사랑하셔서 그들과 다시 교제할 수 있는 방편을 고려하셨습니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는 좋은 제물이 바쳐지는 것 자체를 기뻐하신 것이 아니라, 그 제사를 통해서 죄인과 다시 교제 하게 되는 것을 기뻐하신 다는 것이 분명합니다. 이처럼 제사의 근본정신은 긍휼이었습니다. 그런데 바리새인들은 제사의 근본정신인 긍휼은 잃어버리고 제사 자체만 열심히 드렸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5:20절에서 살펴본 대로 이들의 의로서는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습니다. 그들의 의는 하나님과 하나님을 아는 마음에서 나오는 의가 아니었습니다. 자기 열심에서 나오는 의였습니다. 그런데 당시 바리새인들은 자신들이 아주 모범적인 신앙인이라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그들의 근본적으로 잘못된 신앙생활을 지적하셨습니다. “너희는 가서 내가 긍휼을 원하고 제사를 원치 아니하노라 하신 뜻이 무엇인지 배우라.” 긍휼이 없는 그들의 신앙생활은 남을 판단하는 모습으로 나타났습니다. 자기들이 열심히 금식할 때는 금식하지 않는 자들을 판단하고, 자기들이 열심히 기도할 때는 기도하지 않는 사람들을 판단했습니다. 나중에는 예수님까지 판단했습니다. 그렇게 열심히 신앙생활 할 수 있는 것이 주님께서 긍휼히 여겨주셨기 때문이라는 것을 그들은 알지 못했습니다. 예수님은 이런 그들에게 “너희는 가서 내가 긍휼을 원하고 제사를 원치 아니하노라 하신 뜻이 무엇인지 배우라. 내가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부르러 왔노라”고 하셨습니다(13). 하나님께서 보실 때 모든 인간은 죄인입니다.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거룩하신 하나님께서 보실 때는 도토리 키 재기일 뿐입니다. 모든 사람이 죄인이기 때문에 모든 사람에게는 하나님의 긍휼이 필요합니다. 하나님께 영접을 받고, 하나님과 교제할 수 있는 것은 다른 사람보다 의롭기 때문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긍휼히 여겨주셨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긍휼이 없이 살아갈 수 있는 존재는 아무도 없습니다. 하나님의 긍휼 없이 바르게 신앙생활 수 있는 사람도 없습니다. 우리가 만약 하나님의 긍휼을 배우지 못한다면, 객관적으로 훌륭한 신앙인처럼 보일지라도 자기 의에 사로잡힌 바리새인 밖에는 되지 못할 것입니다. 긍휼히 여기는 마음은 내가 옳다고 해서 상대방을 정죄하지 않습니다. 내가 올바르다는 확신이 있을지라도 그것이 주님의 긍휼로 말미암은 것임을 알기 때문에 상대방에게도 긍휼이 베풀어지기를 간구하게 됩니다. 예수님을 잘 믿고 따른다는 것은 주님의 긍휼을 바르게 깨닫고 감성적으로나 의지적으로나 바르게 반응하고 있는 삶을 두고 하는 말입니다. 건강한 신앙생활은 주님께서 일방적으로 베풀어주시는 자비로 인해 그분을 즐거워하고 그분과 함께 즐거워하는 생활입니다. 우리의 신앙생활이 단지 제사에 열중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긍휼을 배우는 삶, 하나님의 긍휼을 기뻐하고 즐기는 삶, 긍휼에 바르게 반응하는 삶이되기를 바랍니다.

예수님은 중풍병자의 죄를 사해주셨습니다.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죄사함의 역사가 일어났습니다. 뿐만 아니라 예수님의 긍휼로 말미암아 멸시받는 죄인이 왕국의 신하의 반열에 끼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은 참으로 자비로우신 분이십니다. 우리가 이 하나님을 신뢰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리하여 주님의 자비로운 부르심에 마태와 같이 모든 것을 버리고 따라 갈 수 있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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