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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 최상범
성경본문 히 1:1-4
성경본문내용 (1)옛적에 선지자들로 여러 부분과 여러 모양으로 우리 조상들에게 말씀하신 하나님이(2)이 모든 날 마지막에 아들로 우리에게 말씀하셨으니 이 아들을 만유의 후사로 세우시고 또 저로 말미암아 모든 세계를 지으셨느니라(3)이는 하나님의 영광의 광채시요 그 본체의 형상이시라 그의 능력의 말씀으로 만물을 붙드시며 죄를 정결케 하는 일을 하시고 높은 곳에 계신 위엄의 우편에 앉으셨느니라(4)저가 천사보다 얼마큼 뛰어남은 저희보다 더욱 아름다운 이름을 기업으로 얻으심이니
강설날짜 2012-06-10

2012년 6월 10일 한결교회 주일예배강설
히브리서 제2강

 

말세에 아들로 말씀하심

 

말씀 : 히 1:1-4

1-2절을 보시면, “(1)옛적에 선지자들로 여러 부분과 여러 모양으로 우리 조상들에게 말씀하신 하나님이(2)이 모든 날 마지막에 아들로 우리에게 말씀하셨으니”(히 1:1-2) 라고 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구약과 신약의 공통점과 차이점을 동시에 볼 수 있습니다. 먼저 신구약의 공통점은 동일한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점입니다. 옛적에 선지자들을 통해서 계속해서 말씀 해 오셨던 그 하나님이 동일하게 이 모든 날 마지막에 아들로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신약이나 구약이나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점에서 동일합니다. 하나님이 말씀해 오셨다는 것은 우리 인생들을 향한 하나님의 놀라운 은혜요 사랑의 표현입니다. 부부가 싸우면 제일 처음 나타나는 현상이 무엇입니까? 서로 말을 안 합니다. 말을 해도 아주 필요한 말만 하고, 또 평소에 안하던 존댓말로 말합니다. 그래서 누군가에게 말을 건넨다는 것은 관계를 전제로 하는 것입니다. 사랑하면 할수록 말이 많아집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범죄 했음에도 불구하고 우리를 버려두지 아니하시고 긍휼과 사랑으로 끊임없이 (아담이 타락한 이래로 적어도 4000년 동안) 우리에게 말씀을 해 오신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만이, 하나님과의 커뮤니케이션만이, 죄로 죽을 소망 없는 우리 인생들에게 있어서 유일한 살길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바로 우리 인생들을 구원하시기 위해서 하나님 자신이 어떤 분이신지, 우리 인생들이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그리고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 하나님이 무슨 일을 행하셨는지를 구약에서는 선지자들을 통해서, 그리고 신약에 이르러서는 아들로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구약이나 신약이나 동일하게 우리를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점에서 연속적인 것입니다. 다만 차이점은 무엇이냐 하면, 결국 구약이든 신약이든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하는 것인데, 구약은 이 예수 그리스도를 부분적으로 계시하되 처음에는 희미하게 그리고 점차적으로 보다 구체적이고 분명하게 계시하고 있는 것이고, 신약은 친히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심으로 완전히 계시된 것입니다. 그래서 구약이나 신약이나 믿는 바 본질에 있어서는 차이가 없으나 믿고 알고 확신하는 일에 있어서는 확연한 차이가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가 갖게 되는 질문이 아니 아담이 타락하자마자 예수님 보내주시면 안되는가 하는 것입니다. 아니 정 때가 되어서 보내야 하셨다면, 최소한 아담에게 장차 “예수 그리스도를 너희에게 보내어서 그로 십자가에 대신 죽게 함으로 너희를 죄에서 구원할 것이다” 그렇게 분명하게 약속하시면 안 되는가 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질문은 꼭 무엇과 같으냐 하면, “갓난아기한테도 아주 매운 라면을 먹이고, 매운 고추장 불고기 같은 것 주면 안 되냐”하는 질문하고 똑같습니다. 그런 매운 음식들은 어른용입니다. 어른들은 매운 음식을 먹으면 헥헥 거리고 땀으로 범벅되면서도 맛있다고 막 먹잖아요? 어떤 사람은 매운 음식을 너무 좋아해서 매운 음식점만 찾아 다니면서 먹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런데 자기가 맛있다고 갓난아이한테도 주면 어떻게 됩니까? 큰일 나는 것이죠. 갓난아이들한테는 갓난아이들이 감당할 수 있는 음식을 주어야 하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하나님께서 이 세상에 구속의 경륜을 이루시고, 하나님 나라가 임하게 하실 때에도 맨 처음부터 완전한 상태로 임하게 하시는 것이 아니라, 처음에는 작고 미약하게 임해서, 점차로 성장의 과정을 거치도록 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하나님 나라가 진전해 감에 따라서 그 백성들이 감당할 수 있을 만큼만 부분적이고 점진적으로 계시하신 것입니다. 그리고 그 과정이 반드시 필요한 것입니다. 복음이 오기 전에 먼저 율법이 와야만 하는 것입니다. 새 언약이 오기 전에 먼저 옛 언약이 와야 합니다. 심지어는 이스라엘이 옛 언약을 파기하고 불순종하고 우상숭배를 반복하고 결국에는 언약의 저주를 받고마는 그러한 기나긴 어두운 역사조차도 새언약이 도래함에 있어서 필요한 것입니다. 그렇게 하나님의 구속역사의 계획표를 따라 모든 것들이 적절히 배치되고 진행되어지고 다 갖추어진 후에 비로소 “때가차매!” 모든 계시의 결정체인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세상이 오시는 것입니다. 그래야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가 온전히 빛날 수 있고, 그것이 참으로 복음이 될 수가 있는 것입니다.


따라서 구약은 신약과 동일한 하나님의 말씀일 뿐만 아니라, 신약의 영원한 바탕이요 토대이며 실체를 더욱 빛나게 해줄 모형이요 그림자인 것입니다. 그래서 비록 히브리서에서 옛언약의 열등함과 무능력함을 강조하지만, 그것은 “성경에서 구약을 찢어 버려라”는 말이 아니라, 그리스도 안에서 허락된 새언약을 등한시하고 옛언약만을 고집하는 유대교와 유대주의를 배척하라는 말입니다. 우리는 신약시대 성도라고 해서 결코 구약을 무시할 수 없고 무시해서도 안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오늘 본문에서 옛언약도 하나님의 말씀이요 우리에게 필요한 말씀이다 하는 것을 염두에 두어야 합니다.


그리고 두 번째로 우리는 오늘 본문의 실질적인 강조점인 신구약의 차이점에 좀 더 주목해 보겠습니다. 본문은 4가지 점에서 차이점을 나타냅니다.


① 시기 : 구약은 “옛적에”라고 되어 있고, 신약은 “이 모든 날 마지막”에 라고 되어 있습니다. “옛적에”라는 말은 아담이 타락한 이후서부터 예수님이 오시기 전까지 모든 구약의 기간을 말합니다. 그 오랜 기간 동안 선지자들을 통해서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러나 신약은 “이 모든 날 마지막에”라고 했습니다. 이 말은 “말세에 최종적으로 / 세상 끝에 단번에” 라는 뜻입니다. 예수님이 이 땅에 초림하실 때 이미 세상 끝이 임했고 종말이 시작된 것입니다. 그리고 주님의 재림하셔서 종말이 완성될 때까지 이 세상은 종말의 정황으로 충만한 때인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미 종말에 살고 있고, 말세를 살고 있습니다. 이러한 말세에 단번에 최종적으로 아들로 말씀하신 것입니다.


② 말씀 듣는 대상의 차이 : 구약은 우리 조상들(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말씀하셨고, 신약은 우리들에게 말씀하셨습니다.


③ 누구를 매개로 말씀 하셨는가? : 구약은 “선지자들로” 말씀하셨습니다. 복수입니다. 거의 1500년의 기간 동안 다수의 선지자들을 통해서 하나님은 부분적으로 그리고 점진적으로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나 신약은 “아들 안에서” 말씀하셨습니다. 단수입니다. 예수님 한분으로 완전하게 그리고 최종적으로 말씀하셨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복수와 단수의 대조는 뒤에 대제사장 논증에서도 중요한 논점이 됩니다.


④ 말씀하시는 방식의 차이 : 구약은 여러 부분과 여러 모양으로 말씀하셨다고 말합니다. “여러 부분”은 계시의 점진성을 따라 부분적으로 계시하셨다는 말이고, “여러 모양”은 여러 가지로 해석될 수 있는데, 아마도 성경의 장르가 아닐까 생각됩니다. 구약성경에 보면 다양한 장르가 나옵니다. 족장들의 이야기, 족보, 법, 왕들의 이야기, 시와 노래, 지혜의 격언, 선지자들의 외침 등 다양하게 하나님의 말씀이 계시되었습니다. 그러나 아들 안에서 하신 말씀은 이러한 구약의 계시와는 전혀 다르게, 아들 안에서 한꺼번에! 최종적으로! 단번에! 마치 최후통첩과 같이 완벽하게! 말씀하셨던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아들 안에서 말씀하신 것은 그 계시의 절정이요 클라이맥스인 것이고, 그래서 모든 계시를 결론내시고 종결을 지으신 것입니다. 예수님으로 끝입니다. 더 이상의 계시가 없습니다. 예수님으로 충족한 것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왜 예수님의 계시가 완전하고 온전한 것입니까? 그것은 그분이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분이 구약의 모든 인물과 율법과 제사제도와 모든 것들보다도 탁월할 수밖에 없는 것은 그분의 비교할 수 없는 절대적인 신분, 하나님의 아들되심이라는 사실에서 비롯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세상에 예수님 말고는 구약의 어떤 인물도 하나님을 반영할 수 있는 자는 없는 것입니다. 모세든 엘리야든 아브라함이든 하나님의 말씀을 대언했으면 대언했지, 또 하나님의 말씀 앞에서 순종하며 사느라고 자신들이 변화되기는 했을지언정, 그들 자신이 그리고 그들의 행동과 그들의 존재가 하나님을 대언하고 하나님을 표현하는 것일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다릅니다. 그분은 구약의 선지자들 같이 말씀을 받아서 전달하는 스피커나 마이크와 같은 존재가 아니라, 그분 자신이 말씀이시고, 그의 존재, 그의 반응, 그의 일거수일투족이 다 하나님이 누구신가를 표현하는 분이십니다. 그래서 요셉과 마리아아 아기 예수님을 데리고 모세의 율법을 따라 결례의식을 행하기 위해 성전에 갔을 때, 거기서 시므온을 만나는데, 이 시므온은 아기 예수님을 보자마자 뭐라고 합니까?

 

(29)주재여 이제는 말씀하신 대로 종을 평안히 놓아 주시는도다(30)내 눈이 주의 구원을 보았사오니(눅 2:29-30)

 

아기 예수님이 말 한마디 하지 않았고, 아무것도 한 것이 없어도, 그냥 그분의 존재자체로도 구원의 계시가 되는 것입니다. 그분의 존재 자체가 하나님의 말씀이십니다. 그래서 요한복음에 보면 “(1)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요 1:1)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사람의 말처럼 단순한 발화현상이나 소리가 아니라 인격체이시고 그분이 바로 성자 하나님이신 것입니다. 바로 이 말씀 하나님이 성육신하셔서 우리에게 하나님을 온전히 계시하신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계시의 주인이 되십니다. 선지자들은 기껏해야 “여호와께서 가라사대...”라고 하면서 하나님의 메시지를 받아서 전달해주는 마이크 노릇밖에는 못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는 ~하라는 것을 들었으나.. 나는 너희에게 말하노니..”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분은 계시의 주인으로서 계시의 내용을 결정하시는 분으로 이 세상에 오신 것입니다.


그러니 이런 아들로 말미암아 이 모든 날 마지막에 최종적으로 말씀하신 신약의 계시가 구약에 하나님이 계시하신 것보다 얼마나 크고 충족하며 탁월한 것일 수밖에 없습니까? 예수님 말고 더 이상 다른 계시가 필요합니까? 필요 없습니다. 예수님 한분으로 충분합니다.


그러므로 이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들을 수 있다는 것이 얼마나 놀라운 특권이요 지위인지 모릅니다. 그것은 구약의 모세도 아브라함도 다윗도 듣기를 원했고 보기를 원했던 것입니다. 구약 백성들은 장차 오실 예수님을 믿기는 믿었지만, 너무 희미해서 늘 마음에 답답함과 아쉬움이 많은 것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다만 희미하게나마 계시된 그분을 믿음으로 멀리서 보고 환영하였던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어떻습니까? 계시의 결정체인 예수님을 보고 듣고 만질 뿐만 아니라, 그분이 우리 마음에 오셔서 우리와 교제 나눠주시는 분으로 우리와 함께 하시는 것입니다. 거기 무슨 답답함이 있을 수 있습니까? 거기 무슨 아쉬움 같은 것이 있을 수 있습니까? 지난 시간에 배웠듯이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는 충만을 경험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은 구약과 비교할 때 감히 상상도 할 수 없는 놀라운 특권인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은 특권일 뿐만 아니라 우리에게 큰 책임으로도 주어지고 있습니다.

 

(1)그러므로 모든 들은 것을 우리가 더욱 간절히 삼갈지니 혹 흘러 떠내려 갈까 염려하노라(2)천사들로 하신 말씀이 견고하게 되어 모든 범죄함과 순종치 아니함이 공변된 보응을 받았거든(3)우리가 이같이 큰 구원을 등한히 여기면 어찌 피하리요 이 구원은 처음에 주로 말씀하신 바요 들은 자들이 우리에게 확증한 바니(히 2:1-3)

 

부분적이고 모형적인 구약의 말씀을 불순종했을 때도, 그들에게 하나님의 공변된 보응이 임했는데, 하물며 말세에 아들로 말씀하신 그리스도 예수의 복음을 우리가 등한히 여기고 가볍게 여기고 듣는 둥 마는 둥 그렇게 하면, 우리에게 얼마나 더 큰 심판이 임하겠느냐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깊이 생각해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말세에 아들로 우리에게 말씀하셨다는 사실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깊이 생각하고 그것을 마음에 새기고,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귀하게 여기고 그 말씀을 존중하면서, 두렵고 떨림으로 그 말씀을 들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아들로 말씀하신 하나님의 계시가 오늘날 어떻게 우리에게 주어집니까? 지금 우리 곁에는 예수님이 계시지 않습니다. 예수님은 2000년 전에 부활 승천하셔서 하늘로 올라가셨습니다. 그러면 더 이상 우리는 그리스도를 통한 하나님의 계시를 들을 수 없는 것입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아들을 통해서 계시하신 것을 사도들이 목격했고, 그 목격한 것을 성령의 영감 가운데 글로 기록했고, 또 단순히 그 계시를 옮겨적기만 한 것이 아니라, 거기에 친절하게 해석과 적용까지 첨부해서 기록해 놓은 것이 바로 이 신약성경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 신약성경을 통해서 오늘날 우리들에게 아들을 통한 온전한 계시의 말씀을 허락해주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신약성경의 말씀을 존중하고 사랑하고 깊이 읽고 공부하고 묵상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구약성경은 이제 안 읽어도 됩니까? 아니죠. 구약성경을 모르면 신약성경말씀을 제대로 이해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그리스도의 성취의 빛에서 다시 구약을 깊이 읽고 공부하고 묵상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오늘날 우리에게 아들로 말씀하시는 계시는 결국 이 신구약성경 전체를 통해서 우리에게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특히 하나님께서는 이 일에 있어서 이 신구약 성경을 풀어 가르치는 목회자들의 말씀 강설을 주된 방도로 사용하십니다. 그러므로 지금 이 시간 우리가 함께 모여 예배드리는 가운데 듣는 주일예배강설과 오후에 있는 주일오후강설, 그리고 수요모임 강설, 이 세 가지는 신약성도로서 가지는 가장 놀랍고 탁월한 큰 특권이요 또 엄중한 책임이기도 한 것입니다. 그런데 이 의식이 의외로 우리 가운데 많이 부족합니다. 더욱이 저같이 서툴고 어쭙잖은 말투로, 실수도 하면서 그렇게 설교하면, 우리가 이 말씀 강설을 듣는 시간을 하찮게 여겨지기 쉬운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강설시간에 때로는 졸기도 하고, 때로는 딴 생각을 하고 딴 짓을 할 때가 많은 것입니다. 그리고 예배만 드리고 집에 가는 분들도 많고, 일 있으면 주일오후강설이나 수요모임도 빠질 때가 많습니다. 그래서 이런 말씀에 대한 절대성이 없는 모습들이 사실은 우리의 큰 신앙문제인 것입니다.


그러나 만일 여러분, 이 자리에 모세가 있다고 생각해보십시오. 막 기적이 일어나고 반석에서 물이 나고, 하늘에서 만나가 내려오고 빽빽한 구름과 우레 가운데서 하나님의 음성이 들려오고 그러면 여러분 어떻게 반응하시겠습니까? 아마 이스라엘 백성들처럼 벌벌 떨면서 하나님의 말씀을 두렵고 떨림으로 듣지 않겠습니까?

 

(18)너희의 이른 곳은 만질만한 불 붙는 산과 흑운과 흑암과 폭풍과(19)나팔 소리와 말하는 소리가 아니라 그 소리를 듣는 자들은 더 말씀하지 아니하시기를 구하였으니(20)이는 짐승이라도 산에 이르거든 돌로 침을 당하리라 하신 명을 저희가 견디지 못함이라(21)그 보이는 바가 이렇듯이 무섭기로 모세도 이르되 내가 심히 두렵고 떨린다 하였으나(22)그러나 너희가 이른 곳은 시온산과 살아 계신 하나님의 도성인 하늘의 예루살렘과 천만 천사와(23)하늘에 기록한 장자들의 총회와 교회와 만민의 심판자이신 하나님과 및 온전케 된 의인의 영들과(24)새 언약의 중보이신 예수와 및 아벨의 피보다 더 낫게 말하는 뿌린 피니라(25)너희는 삼가 말하신 자를 거역하지 말라 땅에서 경고하신 자를 거역한 저희가 피하지 못하였거든 하물며 하늘로 좇아 경고하신 자를 배반하는 우리일까 보냐(히 12:18-25)

 

이 히브리서 말씀은 우리가 함께 모여 이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이 자리가 과거 이스라엘 백성들이 두렵고 떨림으로 섰던 시내산보다도 더 두렵고 떨림으로 서야하는 시온산이라는 것입니다. 겉으로는 허름한 빌딩건물에 모여서 어수선하게 예배드리고 말씀 듣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상은 어떻다는 것입니까? 천군천사와 시온산과 하늘의 예루살렘과 장자들의 총회와 온전케 된 의인들의 영들 앞에서 이 허물 많은 목회자의 강설을 통해 아들로 말씀하신 복음의 계시를 하나님께서는 우리 가운데 선포하고 계신 것입니다. 우리는 겉모습에 속아서는 안 됩니다. 우리의 영적인 눈을 떠서 우리가 이른 자리가 어떤 자리인지 볼 수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할 때, 우리가 예배시간에 졸 수 있습니까? 말씀을 통해 선포되는 하나님의 말씀을 우리가 가벼이 여길 수 있습니까? 없습니다. 우리는 두렵고 떨림으로 그 말씀을 들을 수밖에 없고 순종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우리는 누구나 할 것 없이 보이고 만져지는 것에 영향을 많이 받는 자들입니다. 보이지 않는 것은 쉽게 믿지 못합니다. 그래서 우리에게 그리스도가 허락되었음에도 불구하고 목회자들을 통해 그리스도의 복음이 밝히 증거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것은 영적인 것이기 때문에, 우리가 그것을 하찮게 생각하기 쉽고, 도리어 눈에 보이는 기적이 즉각적으로 일어나고 하나님의 음성을 직접 듣고 하나님을 보고 하는 그런 구약의 모세나 엘리야를 부러워할 때가 많은 것입니다. 특히 모세가 하나님과 대면하여 말하고 하나님의 영광을 보았던 것처럼 우리도 그런 경험하기를 얼마나 소원하고 바랍니까?

 

(8)그와는 내가 대면하여 명백히 말하고 은밀한 말로 아니하며 그는 또 여호와의 형상을 보겠거늘 너희가 어찌하여 내 종 모세 비방하기를 두려워 아니하느냐(민 12:8) -미리암과 아론이 모세를 비방할 때....

 

우리도 이러한 하나님과 대면하여 보고 친구처럼 대화를 나눈 모세를 부러워하고, 모세와 같은 은혜를 자기도 받았으면 하고 생각할 때가 많지 않습니까? 그래서 혼자 산에 올라가서 나무 하나 붙잡고 “하나님! 모세에게 보여주셨던 것처럼 하나님이 살아계심을 저에게도 보여주십시오. 하나님의 음성을 들려주십시오.” 그렇게 나무뿌리 뽑아가면서 기도해본 경험들이 아마 다들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여러분 만일 하늘에 있는 모세가 이런 우리의 모습을 본다면 뭐라고 생각하겠습니까? “참 믿음이 좋구나. 하나님을 찾고자 하는 열망이 뜨겁구나” 그렇게 생각할까요? 아니요. “왜 저러지?” 그렇게 생각할 것입니다. 왜요? “아니 예수님이 그들 안에 계시고, 목회자들을 통해 신구약 성경이 풀어 가르쳐지고 있는데, 왜 나를 부러워하고 나처럼 하나님 보기를 원할까?” 그렇게 생각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분명 하나님께서는 모세를 친구처럼 대하시고 대면하여 말씀하셨지만, (그래서 하나님이 이처럼 사람을 대우하신 것은 모세 이전에도 없었고, 모세 이후에도 없는 대우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신약의 우리에 비하면 하나님과의 관계에 있어서 모세는 우리보다 부족한 사람입니다. 우리가 이것을 알아야 합니다.


왜냐하면 모세와 대면하여 친구처럼 말씀하셨다 하더라도, 모세에게는 가르쳐주지 않으셨던 비밀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창세전에 감취어진 비밀인데, 그것이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모세에게는 희미하게 살짝 가르쳐주셨지만, 신약의 성도들에게는 아무것도 숨기지 아니하시고 밝히 드러내신 것입니다.

 

(26)이 비밀은 만세와 만대로부터 옴으로 감취었던 것인데 이제는 그의 성도들에게 나타났고(골 1:26)

 

관계의 가까움은 비밀을 얼마만큼 공유할 수 있느냐로 결정됩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우리 신약성도들을 대우하실 때는 모세처럼 대면하여 친구처럼 말씀하시는 정도가 아니라 아예 우리 안에 거하셔서 모든 비밀을 터놓고 교제하시는 분으로 우리를 대우하시는 것입니다. 이 말씀을 듣는 강설 시간도 바로 이러한 하나님께서 창세전에 감취었던 비밀, 곧 모세와 아브라함과 구약의 모든 종들이 보기를 원하고 듣기를 사모했던 그 엄청난 비밀을 하나님께서 터놓으시면서 우리를 그의 교제 가운데로 초청하시는 자리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이 자리가 얼마나 영광스럽고 자랑스러우며, 또한 무거운 책임을 느끼는 자리입니까? 모세가 하나님을 대면하여 본 것보다 그리스도 예수의 복음을 듣는 것이 얼마나 더 놀라운 특권이고 영광인지를 바울은 다른 곳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6)저가 또 우리로 새 언약의 일군 되기에 만족케 하셨으니 의문으로 하지 아니하고 오직 영으로 함이니 의문은 죽이는 것이요 영은 살리는 것임이니라(7)돌에 써서 새긴 죽게 하는 의문의 직분도 영광이 있어 이스라엘 자손들이 모세의 얼굴의 없어질 영광을 인하여 그 얼굴을 주목하지 못하였거든(8)하물며 영의 직분이 더욱 영광이 있지 아니하겠느냐(9)정죄의 직분도 영광이 있은즉 의의 직분은 영광이 더욱 넘치리라(10)영광되었던 것이 더 큰 영광을 인하여 이에 영광될 것이 없으나(11)없어질 것도 영광으로 말미암았은즉 길이 있을 것은 더욱 영광 가운데 있느니라(12)우리가 이같은 소망이 있으므로 담대히 말하노니(13)우리는 모세가 이스라엘 자손들로 장차 없어질 것의 결국을 주목치 못하게 하려고 수건을 그 얼굴에 쓴 것같이 아니하노라(14)그러나 저희 마음이 완고하여 오늘까지라도 구약을 읽을 때에 그 수건이 오히려 벗어지지 아니하고 있으니 그 수건은 그리스도 안에서 없어질 것이라(15)오늘까지 모세의 글을 읽을 때에 수건이 오히려 그 마음을 덮었도다(16)그러나 언제든지 주께로 돌아가면 그 수건이 벗어지리라(17)주는 영이시니 주의 영이 계신 곳에는 자유함이 있느니라(18)우리가 다 수건을 벗은 얼굴로 거울을 보는 것같이 주의 영광을 보매 저와 같은 형상으로 화하여 영광으로 영광에 이르니 곧 주의 영으로 말미암음이니라(고후 3:6-18)

 

모세가 하나님을 대면하여 보았을 때, 하나님으로부터 율법을 계시 받았을 때, 그 얼굴에 광채가 나서 그 영광 때문에 사람들이 그 얼굴을 보지 못하였고, 그래서 모세가 수건으로 자신의 얼굴을 가렸습니다. 왜 가렸습니까? 그것이 옛 언약의 영광이기 때문에... 새 언약이 오면 장차 없어질 영광이기 때문에 사람들로 주목치 못하도록 하기 위해서 가렸습니다. 없어진다기보다는 엄밀히 말해서 새언약이 오면 그 새언약의 영광의 빛이 너무 찬란해서 이 옛 언약의 영광이 무색해지는 것입니다. 마치 대보름날 밤에 달이 아무리 밝게 비추어도 태양이 떠오르면 그 밝음이 무색하게 되듯이 그렇게 옛 언약의 영광이 무색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10절에 “영광되었던 것이 더 큰 영광을 인하여 이에 영광될 것이 없으나”라고 했던 것입니다.


그렇게 그리스도의 복음의 계시가 너무나 영광스럽고 그 영광의 빛이 너무나 찬란한 것입니다. 그래서 복음을 듣고 예수님을 만나고 예수님을 믿어 그 마음에 모신 신약의 성도들은 하나님의 영광의 광채이신 그리스도의 영광을 목도했기 때문에 성령으로 말미암아 우리도 저와 같은 형상으로 화해서 영광으로 영광에 이르는 것입니다. 그래서 복음의 증인이요 일꾼들인 신약의 성도들은 모세가 하나님을 대면하였을 때 얼굴에서 광채가 나왔던 것과는 비교할 수 없는 더 찬란한 영광의 광채가 우리의 영혼의 얼굴에서 나오는 것입니다(중세의 성자들의 그림들). 이를테면 모세는 달을 소유했고, 우리는 태양을 소유한 것입니다. 누가 누구를 부러워해야 합니까? 그리고 우리는 우리의 얼굴의 광채를 모세처럼 수건으로 가릴 필요가 없습니다. 왜요? 영원한 영광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신약성도로서 그리스도 예수의 복음을 들을 수 있다는 것에 대한 자부심과 자랑을 가져야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런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에 대한 가치를 깨닫지 못하는 문제에 대해서 바울은 모세가 수건을 덮은 것을 가지고서 계속해서 설명해갑니다. 즉 모세는 자신의 없어질 영광을 주목치 못하도록 하기 위해서 수건을 썼는데, 이 수건이 유대인들의 마음의 눈까지 덮어서 가렸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유대인들이 영적인 장님이 되어버렸습니다. 그래서 유대인들은 예수님을 보고서도 예수님을 알아보지 못하고, 결국 갖다 십자가에 못 박아 죽여 버리고 말았던 것입니다. 2000년이 지난 지금도 유대인들은 이 수건이 그대로 덮어져 있어서 아직도 구약을 읽으면서 그 구약에서 그리스도를 발견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현상이 히브리서 수신자들에게도 있었던 것입니다. 처음에는 예수님을 기쁨으로 믿어 환영했지만, 영적인 게으름과 고난 앞에서 점차로 그들의 눈에 수건이 덮어지기 시작한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가치를 모르고,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의 가치를 깨닫지 못하고, 그 복음의 가르침을 등한시 여기면서 유대교로 돌아가려고 했던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는 어떻습니까? 혹시 우리 마음속에도 수건이 덮여져 있어서 이 그리스도 예수의 복음의 가치를 깨닫지 못하고 우리에게 주어진 이 큰 계시와 큰 구원을 하찮게 여기고 있지는 않습니까? 하나님의 말씀 듣는 이 강설 시간을 하찮게 여기고 있지는 않습니까? 히브리서 수신자들이 복음을 져버리고 유대교로 돌아가려했듯이, 우리도 이 하나님의 경고의 말씀을 가벼이 여기고 세상을 추구하며, 세상과 타협하며 살고 있지는 않습니까? 우리는 우리 자신을 깊이 돌아보아야 합니다.


여러분 우리는 정신을 바짝 차려서 이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절대성을 회복해야 합니다. 이 시간 함께 모여서 그리스도의 복음의 교리를 배울 수 있다는 것이 얼마나 놀라운 특권이요 지위인지를 깨달아야 하는 것입니다. 신약성도로서 자랑과 자부심을 가지고, 소망의 담대함으로 기쁨과 즐거움으로 이 시간에 참여해야 하는 것이고 또한 두렵고 떨림으로 이 자리에 참여해서 주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여야 하는 것입니다. 이 모든 날 마지막에 아들로 하신 이 하나님의 말씀을 나의 생명보다 존중하고 그 말씀에 귀 기울이는 한결교회 모든 지체들이 될 수 있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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