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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 손재호
성경본문 호 6:4-11
성경본문내용 (4)에브라임아 내가 네게 어떻게 하랴 유다야 내가 네게 어떻게 하랴 너희의 인애가 아침 구름이나 쉬 없어지는 이슬 같도다(5)그러므로 내가 선지자들로 저희를 치고 내 입의 말로 저희를 죽였노니 내 심판은 발하는 빛과 같으니라(6)나는 인애를 원하고 제사를 원치 아니하며 번제보다 하나님을 아는 것을 원하노라(7)저희는 아담처럼 언약을 어기고 거기서 내게 패역을 행하였느니라(8)길르앗은 행악자의 고을이라 피 발자취가 편만하도다(9)강도 떼가 사람을 기다림 같이 제사장의 무리가 세겜 길에서 살인하니 저희가 사악을 행하였느니라(10)내가 이스라엘 집에서 가증한 일을 보았나니 거기서 에브라임은 행음하였고 이스라엘은 더럽혔느니라(11)유다여 내가 내 백성의 사로잡힘을 돌이킬 때에 네게도 추수할 일을 정하였느니라
강설날짜 2013-06-02

 
2013년 호세아서 공부

 

나는 인애를 원하고 제사를 원치 아니하며

 

말씀:호세아 6:4-11

 

우리는 지난 시간에 ‘오라. 우리가 여호와께로 돌아가자’라는 말씀을 살펴봤습니다. 우리는 여호와께로 돌아가야 합니다. 힘써 여호와를 알아가야 합니다. 그 길이 살 길입니다. 오늘도 계속해서 6장 말씀을 공부하겠습니다. 오늘 본문 말씀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것이 무엇인지 배우고자 합니다. 4a절을 보면 “에브라임아! 내가 네게 어떻게 하랴. 유다야! 내가 네게 어떻게 하랴”라고 합니다. 이것이 이스라엘을 향한 하나님의 마음입니다. 우리 부모들은 자식이 말을 듣지 않고 엇길로 갈 때 어떻게 합니까? 당근과 채찍을 사용하죠. 애원도 해 보죠. 그런데 그래도 안 되면 어떤 마음이 듭니까? ‘내가 너를 먹이고 입히고 힘들게 공부시켰는데 네가 어떻게 그럴 수 있느냐. 도대체 내가 너에게 어떻게 해야 하겠느냐?’ 이런 마음이 들지 않습니까? 그런데 우리가 이런 마음이 들 때 그 때 우리는 우리 자신들을 돌아봐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나를 어떻게 보시겠는가를 생각해 봐야 합니다. ‘내가 네게 어떻게 하랴?’ 이 하나님의 이 안타까운 탄식의 소리가 들리지 않습니까?

 

오늘 본문 말씀을 보기 전에 먼저 이사야 5:1-7절을 보겠습니다. “내가 나의 사랑하는 자를 위하여 노래하되 나의 사랑하는 자의 포도원을 노래하리라. 나의 사랑하는 자에게 포도원이 있음이여 심히 기름진 산에로다. 땅을 파서 돌을 제하고 극상품 포도나무를 심었었도다. 그 중에 망대를 세웠고 그 안에 술틀을 팠었도다. 좋은 포도 맺기를 바랐더니 들포도를 맺혔도다. 예루살렘 거민과 유다 사람들아 구하노니 이제 나와 내 포도원 사이에 판단하라. 내가 내 포도원을 위하여 행한 것 외에 무엇을 더할 것이 있었으랴. 내가 좋은 포도 맺기를 기다렸거늘 들포도를 맺힘은 어찜인고. 이제 내가 내 포도원에 어떻게 행할 것을 너희에게 이르리라. 내가 그 울타리를 걷어 먹힘을 당케 하며 그 담을 헐어 짓밟히게 할 것이요, 내가 그것으로 황무케 하리니 다시는 가지를 자름이나 북을 돋우지 못하여 질려와 형극이 날 것이며, 내가 또 구름을 명하여 그 위에 비를 내리지 말라 하리라 하셨으니. 대저 만군의 여호와의 포도원은 이스라엘 족속이요, 그의 기뻐하시는 나무는 유다 사람이라. 그들에게 공평을 바라셨더니 도리어 포학이요, 그들에게 의로움을 바라셨더니 도리어 부르짖음이었도다”라고 했습니다. 우리는 이 말씀을 통해서 이스라엘을 향한 하나님의 마음을 볼 수 있습니다. 여호와의 포도원은 이스라엘 족속이요, 그의 기뻐하는 나무는 유다 사람이라고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포도원을 위하여 모든 것을 다 행하셨습니다. 그로인해 부족한 것이 없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완벽하게 포도원을 만들어 놓으시고 극상품 포도가 맺히기를 바랬습니다. 그런데 그들은 들포도를 맺은 것입니다. 그러자 하나님께서는 뭐라고 하시는 것입니까? “내 포도원을 위하여 행한 것 외에 무엇을 더할 것이 있었으랴?”라고 했습니다(4). 더할 게 없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로 완벽한 포도원을 만들어 주시고 그들로 공평과 의로움의 열매를 맺기를 원하셨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도리어 포학과 부르짖음의 열매를 맺은 것입니다.

 

다윗이 밧세바를 취하고 그의 남편 우리아를 죽였을 때 하나님께서는 선지자 나단을 통해서 다윗을 책망하셨습니다. 그 책망이 무엇입니까? 사무엘하 12:7-9절에 보면 “나단이 다윗에게 이르되 당신이 그 사람이라.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이처럼 이르시기를 내가 너로 이스라엘 왕을 삼기 위하여 네게 기름을 붓고 너를 사울의 손에서 구원하고 네 주인의 집을 네게 주고 네 주인의 처들을 네 품에 두고 이스라엘과 유다 족속을 네게 맡겼느니라. 만일 그것이 부족하였을 것 같으면 내가 네게 이것저것을 더 주었으리라. 그러한데 어찌하여 네가 여호와의 말씀을 업신여기고 나 보기에 악을 행하였느뇨. 네가 칼로 헷 사람 우리아를 죽이되 암몬 자손의 칼로 죽이고 그 처를 빼앗아 네 처를 삼았도다”고 했습니다. 이것이 다윗을 향한 하나님의 마음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내가 너를 이스라엘의 왕으로 삼고 사울의 집을 네게 주고 네 주인의 처들을 너의 품에 두었건만 무엇이 부족하여 그렇게 하였느냐는 것입니다. 만약 부족했으면 이것저것을 더하여 주었을 것이라고 합니다.

 

이제 오늘 본문 4절 말씀을 보겠습니다. “에브라임아! 내가 네게 어떻게 하랴. 유다야! 내가 네게 어떻게 하랴. 너희의 인애가 아침 구름이나 쉬 없어지는 이슬 같도다”라고 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에브라임과 유다를 향하여 “내가 네게 어떻게 하랴”라고 탄식하십니다. 왜냐하면 너희의 인애가 아침 구름 같고 쉬 없어지는 이슬과 같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여기서 ‘인애’란 히브리어로 ‘헤세드’라는 말인데 우리말 성경에서 번역할 때는 인애, 자비, 긍휼 등으로 번역했습니다. 하나님의 언약을 받은 자들에 대한 사랑이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열심, 충성이라는 뜻도 있습니다. 하나님의 열심과 하나님의 사랑이 자기 언약백성들에게 나타나는 것을 ‘헤세드’라고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이러한 ‘헤세드’를 받은 백성을 ‘헤싣’이라고 합니다. 우리 번역으로 경건한 자 또는 성도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도덕적으로 완벽하게 경건하고 거룩하여서 ‘헤싣’이라고 하는 것이 아니라 비록 결함이 있어도 하나님의 언약 밑에 있으면 하나님의 언약 백성이라고 불러주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이러한 은혜와 사랑과 자비와 긍휼, 즉 인애를 입었다면 당연히 그의 백성 안에서도 인애가 나오는 것이 당연한 것입니다. 용서를 받았으니 용서가 나오는 것입니다. 사랑을 받았으니 사랑이 나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러한 인애가 없다는 것은 하나님에 대한 인애도 없고, 이웃에 대한 인애도 없다는 것을 고발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당시 이스라엘의 모습이었고, 오늘날 우리들의 모습이기도 한 것입니다.

 

마태복음 18장에 보면 일만 달란트 빚진 자가 탕감을 받고 가다가 자기에게 백 데나리온 빚진 자를 탕감해 주지 않았을 때 그를 다시 붙들어 감옥에 넣어버리는 것을 보게 됩니다. 우리 모두는 일만 달란트 빚진 자들이었습니다. 그런데 주님께서 거저 주시는 인애로 말미암아 우리가 모두 탕감을 받은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가운데서 인애가 나와야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의 삶이 어떠합니까? 인애가 나올 틈이 없는 것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모든 것이 나의 힘씀과 애씀의 결과로 나온 것이라고 여기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장래도 내가 책임져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니 자비와 긍휼이 나올 틈이 없는 것입니다. 호세아 선지서의 말씀이 옛날의 말씀이 아니라 바로 오늘날 우리에게 하고 있는 말씀입니다. 우리에게 인애가 있습니까? 이름을 인애라고 짓는다고 해서 인애가 나오는 것이 아닙니다. 이러한 우리를 보시고 주님께서 탄식하시는 것입니다. ‘도대체 내가 네게 어찌하랴?’

 

이러한 하나님의 탄식에 귀를 기울이지 않으면 어떻게 하시는 것입니까? 심판을 행하실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앞에서 보았던 이사야서의 포도원 노래처럼 포도원을 황폐하게 만들어 버리시는 것입니다. 다윗은 그 집안에 칼이 끊어지지 않고 자기의 처들이 백주에 아들에 의하여 범하여지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것을 거두어 가버리시는 것입니다. 지금 우리의 소유라고 여기는 것들이 모두 주님께로부터 온 것입니다. 그러한 것들을 다 불어버리실 때 우리가 그동안 의지하였던 모든 것들이 아무 것도 아님이 드러나게 됩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를 통해서 허무를 보게 하시는 것입니다. 세상의 헛된 영광과 화려함으로 뒤덮어져 있는 거짓된 것들을 태풍이 몰아치듯이 불어버리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다 날아가 버리고 텅 비게 되었을 때 적신으로 왔다가 적신으로 가는 인생임을 알게 되는 것입니다(욥 1:21).

 

5절을 보면 “그러므로 내가 선지자들로 저희를 치고 내 입의 말로 저희를 죽였노니 내 심판은 발하는 빛과 같으니라”고 합니다. 하나님의 인애가 없는 이스라엘은 이스라엘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선지자들을 보내어 그들을 치고 주님의 입의 말씀으로 그들을 죽이시는 것입니다. 주님의 심판이 발하는 빛처럼 임하시는 것입니다. 여기서 주님의 심판이 일차적으로 어떻게 임하시는 것입니까? 당신의 선지자들을 통하여 이스라엘 백성들을 치는 것입니다. 선지자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바르게 선포하는 것인데 이것이 백성들에게는 치는 것으로 들리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왜 평안을 빌고, 복을 빌어 주지는 않고 치는 설교만 하느냐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거짓 선지자들은 치는 설교가 아니라 그저 평안하다 평안하다고 하는 것입니다. 너희들이 제사를 잘 드리고 절기를 잘 지키니 하나님이 복을 주실 것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하는 선지자들을 죽여 버리는 것입니다. 그러자 하나님께서는 선지자를 죽여 버린 그들을 그 입의 말씀으로 친히 죽이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지 않는 자들은 결국 죽음에 넘겨지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최종적인 주님의 심판의 모습이 어떻게 나오는가 하면 요한계시록 1:16절에 보면 “그 오른손에 일곱별이 있고 그 입에서 좌우에 날선 검이 나오고 그 얼굴을 해가 힘 있게 비취는 것 같더라”라고 했습니다. 오늘 본문 5절 말씀과 같은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내가 선지자들로 저희를 치고 내 입의 말로 저희를 죽였노니 내 심판은 발하는 빛과 같으니라”(5). 하나님께서는 말씀의 검으로 심판하시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가 이 말씀을 듣고 있는 것은 장차 주님의 심판이 어떻게 임하게 되는지를 미리 보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지금 주님의 이 말씀을 듣고 회개하는 자가 복이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여전히 그 마음을 완강한 암소처럼 고집을 부린다면 하나님께서 심판을 하실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것이 무엇입니까? 6절을 보면 “나는 인애를 원하고 제사를 원치 아니하며 번제보다 하나님을 아는 것을 원하노라”고 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것은 인애입니다. 하나님을 아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스라엘 백성들은 우리가 제사를 드리고 번제를 드렸으니 복을 받을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제사를 드리고 번제를 드리면서 그들의 일상적인 삶은 여전히 자비가 나타나지 않는 것입니다. 끊임없이 바알의 영향으로 빈익빈 부익부가 심화되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정치권력과 종교권력이 손을 잡고 가난하고 약한 자들을 학대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어찌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인애의 나라이겠습니까?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이사야와 예레미야 선지자를 통하여 하나님께 받치는 제사와 제물의 헛됨을 고발하게 하시는 것입니다(사 1장, 렘 7장 등). 특히 예레미야 7:26절을 보면 “너희가 나를 청종치 아니하며 귀를 기울이지 아니하고 목을 굳게 하여 너희 열조보다 악을 더 행하였느니라”고 했습니다.

 

호세아 선지자 당시 사회의 모습도 이와 다를 바가 없었습니다. 7-9절을 보면 “저희는 아담처럼 언약을 어기고 거기서 내게 패역을 행하였느니라. 길르앗은 행악자의 고을이라 피 발자취가 편만하도다. 강도떼가 사람을 기다림 같이 제사장의 무리가 세겜 길에서 살인하니 저희가 사악을 행하였느니라”고 합니다. 아담처럼 언약을 어겼다는 것입니다. 아담이 하나님의 언약을 어기게 되니 하나님에 대한 인애도 없어진 것입니다. 아담이 하나님의 피조물로서 얼마나 엄청난 사랑을 입었습니까? 흙덩이가 하나님의 호흡을 부여받았습니다. 그렇다면 평생 하나님을 사랑하고 그의 한 몸인 아내를 사랑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언약을 어긴 아담은 하나님을 피하여 숨은 것입니다. 죄의 책임을 아내에게 전가시키는 것입니다. 이것이 아담 이후 인간의 속성입니다. 세상은 인애가 없는 세상이 된 것입니다. 가는 곳마다 이기심과 탐욕을 뭉쳐진 세상이 된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한 사람을 택하시고 한 나라를 만드시어 하나님이 원하시는 세상을 만들어 내시기 위해서 아브라함을 부르신 것입니다. 그리고 이 나라를 통하여 하나님의 뜻을 드러내신 것입니다. 그러나 택함을 받은 이스라엘 역시 하나님의 인애가 나오기 보다는 포학과 살육이 거듭되는 것입니다. 그 모습이 길르앗이 행악자의 고을이 되고 피 발자취가 편만한 것입니다. 곧 피 흘리기에 빠른 발이 된 것입니다. 그러면 제사장들이라도 바르게 서야 하는데 제사장들까지 함께 결탁이 되어서 강도처럼 변하여 있는 것입니다. 9절을 다시 보면 “강도떼가 사람을 기다림 같이 제사장의 무리가 세겜 길에서 살인하니 저희가 사악을 행하였느니라”고 했습니다. 세겜이란 도피성이 있는 곳입니다. 제사장이 거하는 곳입니다. 그런데 이곳에서 제사장들이 강도떼들이 기다리는 것처럼 살인하고 사악을 행하였다는 것입니다. 마피아 영화를 보면 성당에서 마피아들과 거래하는 것을 보게 됩니다. 신부들과 미파아가 손을 잡은 것입니다. 이러한 모습처럼 제사장들이 도적들과 한패가 되어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이스라엘의 모습이었습니다.

 

10-11절을 보면 “내가 이스라엘 집에서 가증한 일을 보았나니 거기서 에브라임은 행음하였고 이스라엘은 더럽혔느니라. 유다여 내가 내 백성의 사로잡힘을 돌이킬 때에 네게도 추수할 일을 정하였느니라”고 했습니다. 이스라엘은 강포와 사악 뿐만 아니라 행음하고 더럽혀진 것입니다. 이스라엘만이 아니라 이를 고발하면서 동시에 유다도 고발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런 그들에게 추수 때가 정하여졌다는 것입니다. 곧 심판의 때가 정하여 졌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정신을 차리라는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에게도 동일한 경고가 주어지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추수 때는 정해져 있습니다. 추수 때는 두 가지로 나누어집니다. 알곡과 가라지입니다. 그러면 그 기준이 무엇입니까? 인애가 있는가? 없는가? 하는 것입니다. 인애의 유무에 따라 알곡과 가라지로 나누어지는 것입니다. 곧 인애의 유무에 따라 심판이 좌우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의 삶의 현장에서 인애가 나오고 자비가 나오고 긍휼이 나오는 삶을 살고자 하면 순교를 각오해야 합니다. 세상은 인정사정 볼 것 없다고 합니다. 남의 사정 다 봐주다가 어떻게 사느냐고 합니다. 자기 밥그릇 확실히 챙기라고 합니다. 예수 믿는 것은 일요일 하루만 교회 나가서 믿어주고 나머지 시간은 자신을 위해 열심히 살라고 합니다. 오직 경쟁 속에서 살아남으려면 남보다 앞서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유치원도 극성이고, 영어 학원도 극성인 것입니다. 이런 세상 속에서 인애를 찾기란 모래밭에서 바늘 찾기 보다 더 어려운 것입니다.

 

우리에게서 인애가 나오고 있습니까? 세상은 원래 그렇다고 하여도 교회 안에서는 하나님의 자비와 긍휼이 나와야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볼 때는 어떻습니까? 용서와 사랑이 있습니까? 남을 나보다 낫게 여기고 있습니까? 아니면 자기의 정당성을 주장하고 있습니까? 자기의 옳음을 입증하기 위하여 여러 사람을 동원하고 있는 것은 아닙니까? 심지어 목사까지 동원하고 성경까지 동원하면서 자기의 자존심을 세우려고 하지는 않습니까? 한 걸음 더 나아가 우리가 하나님의 자비와 긍휼을 입은 자로서 우리가 있는 가정에서는 어떻습니까? 하나님의 인애가 흘러나오고 있습니까? 직장에서는 어떻습니까? 우리의 이웃에게 예수 믿는 자로서 무엇이 나오고 있는 것입니까? 일요일에 교회에 잘 나온다고요? 십일조 잘 한다고요? 성경도 보고 기도도 열심히 한다고요? 봉사도 한다고요? 그런데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것이 무엇이라고 하셨습니까? 인애를 원하고, 하나님 알기를 원하신다고 하셨습니다. 우리가 얼마나 하나님의 인애를 원하고 있습니까? 우리가 하나님을 알고자 합니까?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조차 자기의 자존심을 세우려고 한다면 우리는 하나님의 인애를 발로 차버리고 있는 것입니다.

 

마태복음 9:9-13절을 보면 “예수께서 거기서 떠나 지나가시다가 마태라 하는 사람이 세관에 앉은 것을 보시고 이르시되 나를 좇으라 하시니 일어나 좇으니라. 예수께서 마태의 집에서 앉아 음식을 잡수실 때에 많은 세리와 죄인들이 와서 예수와 그 제자들과 함께 앉았더니. 바리새인들이 보고 그 제자들에게 이르되 어찌하여 너희 선생은 세리와 죄인들과 함께 잡수시느냐. 예수께서 들으시고 이르시되 건강한 자에게는 의원이 쓸데없고 병든 자에게라야 쓸데 있느니라. 너희는 가서 내가 긍휼을 원하고 제사를 원치 아니하노라 하신 뜻이 무엇인지 배우라 내가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부르러 왔노라 하시니라”고 했습니다. 여기서 주님께서 인용하신 말씀이 호세아 6:6절의 말씀입니다. 긍휼을 원하고 제사를 원치 않는다는 말씀이 죄인을 구하러 오신 주님을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주님의 긍휼과 자비가 나타나고 있는 현장에서 주님의 인애를 긍휼을 배척하고 있는 모습입니다.

 

마태복음 12:1-8절을 보면 “그 때에 예수께서 안식일에 밀밭 사이로 가실쌔 제자들이 시장하여 이삭을 잘라 먹으니. 바리새인들이 보고 예수께 고하되 보시오 당신의 제자들이 안식일에 하지 못할 일을 하나이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다윗이 자기와 그 함께한 자들이 시장할 때에 한 일을 읽지 못하였느냐. 그가 하나님의 전에 들어가서 제사장 외에는 자기나 그 함께한 자들이 먹지 못하는 진설병을 먹지 아니하였느냐. 또 안식일에 제사장들이 성전 안에서 안식을 범하여도 죄가 없음을 너희가 율법에서 읽지 못하였느냐.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성전보다 더 큰 이가 여기 있느니라. 나는 자비를 원하고 제사를 원치 아니하노라 하신 뜻을 너희가 알았더면 무죄한 자를 죄로 정치 아니하였으리라. 인자는 안식일의 주인이니라 하시니라”고 했습니다. 바리새인들이 안식일에 제자들이 밀 이삭을 잘라 먹은 일을 가지고 시비를 걸자 예수님께서는 호세아 6:6절 말씀을 인용하여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나는 자비를 원하고 제사를 원치 아니하노라.”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것은 인애와 긍휼입니다. 그런데 이것을 이루신 분은 예수님뿐이십니다. 그래서 우리가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은 주님의 긍휼을 덧입고자 함입니다. 나의 의가 없기에 우리 주님의 인애만 의지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자들에게서는 사람에게서 나오는 자비함이 아니라 우리 주님의 인애와 긍휼이 나오게 되어 있습니다. “에브라임아! 내가 네게 어떻게 하랴. 유다야! 내가 네게 어떻게 하랴.” 하나님의 이 탄식이 들리십니까? 오늘날 우리 안에 주께서 원하시는 인애가 있습니까? 하나님을 알고자 하는 열망이 있습니까? 우리는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이 탄식을 들어야 합니다. 성령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은혜를 주셔서 우리로 주님의 인애를 알게 하여 주시기를 원합니다. 하나님을 알고자 하는 열망을 덧입혀 주시기를 원합니다. 그리하여 우리 가운데서 주님의 인애가 나타나게 하여 주시기를 원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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