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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 손재호
성경본문 요일 4:13-21
성경본문내용 (13)그의 성령을 우리에게 주시므로 우리가 그 안에 거하고 그가 우리 안에 거하시는 줄을 아느니라(14)아버지가 아들을 세상의 구주로 보내신 것을 우리가 보았고 또 증거하노니(15)누구든지 예수를 하나님의 아들이라 시인하면 하나님이 저 안에 거하시고 저도 하나님 안에 거하느니라(16)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시는 사랑을 우리가 알고 믿었노니 하나님은 사랑이시라 사랑 안에 거하는 자는 하나님 안에 거하고 하나님도 그 안에 거하시느니라(17)이로써 사랑이 우리에게 온전히 이룬 것은 우리로 심판날에 담대함을 가지게 하려 함이니 주의 어떠하심과 같이 우리도 세상에서 그러하니라(18)사랑 안에 두려움이 없고 온전한 사랑이 두려움을 내어 쫓나니 두려움에는 형벌이 있음이라 두려워하는 자는 사랑 안에서 온전히 이루지 못하였느니라(19)우리가 사랑함은 그가 먼저 우리를 사랑하셨음이라(20)누구든지 하나님을 사랑하노라 하고 그 형제를 미워하면 이는 거짓말 하는 자니 보는 바 그 형제를 사랑치 아니하는 자가 보지 못하는바 하나님을 사랑할 수가 없느니라(21)우리가 이 계명을 주께 받았나니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는 또한 그 형제를 사랑할지니라
강설날짜 2008-03-02

2008년 3월 2일 설교


두려움이 없는 사랑


말씀:요한일서 4:13-21

4:1-5:12절까지는 3:23절에 나타난 계명 곧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것과 우리에게 주신 계명대로 서로 사랑하는 것을 좀더 새롭게 확인해 가면서 더 풍성한 방향으로 발전시켜가고 있는 말씀입니다. 우리는 지난 두 주간에 걸쳐서 이 부분에 대해서 살펴봤습니다. 4:1-6절 말씀을 통해서는 믿음과 관련하여 믿음으로 영들이 하나님께로부터 온 것인지 아닌지를 잘 분별해야 함을 배웠고, 7-12절 말씀을 통해서는 또 다른 요소인 서로 사랑하라는 주제에 대해서 살펴봤습니다. 오늘 부터는 이 두 주제가 함께 복합시켜서 합주의 형태로 나타나는 부분(4:13-5:5)을 살펴보고자 합니다. 오늘은 이 부분 중에서 4:13-21절 말씀을 ‘두려움이 없는 사랑’이라는 제목으로 살펴보고자 합니다.

15-16절에 보면 “누구든지 예수를 하나님의 아들이라 시인하면 하나님이 저 안에 거하시고 저도 하나님 안에 거하느니라.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시는 사랑을 우리가 알고 믿었노니. 하나님은 사랑이시라 사랑 안에 거하는 자는 하나님 안에 거하고 하나님도 그 안에 거하시느니라”고 했습니다.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로 시인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 안에 하나님이 거하시고 그 사람도 하나님 안에 거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신 그 사랑은 예수님을 우리를 위해 화목제물로 내어 주신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로 이 사랑을 우리가 알고 믿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은 사랑이십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사랑 안에 거하는 자는 하나님 안에 거하고 하나님도 그 안에 거하시는 것입니다. 누구든지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이라 시인하면 하나님과의 진정하고 참된 사귐이 이루어지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으로부터 시작되어진 그 사랑이 우리가 서로 사랑하는 가운데 완성되어지는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가 시 공간 안에 거하는 몸을 가진 자로서 이 사실을 어떻게 알 수가 있는 것입니까? 13절에 보면 그의 성령을 우리에게 주심으로 알게 된다고 하십니다. “그의 성령을 우리에게 주시므로 우리가 그 안에 거하고 그가 우리 안에 거하시는 줄을 아느니라.” 요한복음 14:16-20절을 보면 “내가 아버지께 구하겠으니 그가 또 다른 보혜사를 너희에게 주사 영원토록 너희와 함께 있게 하시리니. 저는 진리의 영이라 세상은 능히 저를 받지 못하나니. 이는 저를 보지도 못하고 알지도 못함이라. 그러나 너희는 저를 아나니 저는 너희와 함께 거하심이요. 또 너희 속에 계시겠음이라. 내가 너희를 고아와 같이 버려두지 아니하고 너희에게로 오리라. 조금 있으면 세상은 다시 나를 보지 못할 터이로되 너희는 나를 보리니. 이는 내가 살았고 너희도 살겠음이라. 그 날에는 내가 아버지 안에, 너희가 내 안에, 내가 너희 안에 있는 것을 너희가 알리라”고 했습니다. 이처럼 보혜사 성령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사랑 안에 거하는 자는 하나님 안에 거하고 하나님도 그 안게 거하시는 것을 알게 된다는 것입니다. 14절을 보면 아버지가 아들을 세상의 구주로 보내신 것을 우리가 보고 또 증거 하였다고 합니다. 여기서 ‘우리는’ 사도들을 가리킵니다. 그러므로 성령이 임하심으로 사도들의 증거를 알게 되고 또한 믿게 되는 것입니다. 왜 아는 것과 믿는 것이 함께 가야 하는가 하면 예수님의 가르침과 사도들의 증거와 상관없이 내가 상상하는 바를 믿는다고 할 수가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성령이 임하여 예수님께서 가르쳐주신 것을 기억나게도 하시고 그 뜻을 알게도 하시며 믿게도 하신 내용이 무엇입니까?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시라는 것입니다. 더 구체적으로 말하면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신 예수님이 주와 그리스도시며,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것입니다. 이것을 시인하는 자는 하나님이 저 안에 거하고 저도 하나님 안에 거한다고 하는 것입니다. 이런 고백이 나오는 자들이 있다는 것은 예수님께서 요한복음 14장에서 약속하신 말씀을 이루고 계신다는 증거입니다. 이것을 요한일서 4:17절에서는 사랑이 온전하게 이루어졌다는 것입니다. 사랑이 우리에게 온전하게 이루어진 것은 예수님이 하나님 안에 거하시고 하나님이 예수님 안에 거하시는 그 온전한 사랑에 우리를 넣어주신 것입니다. 우리를 어떻게 그 사랑 안에 넣어주신 것입니까? 예수님께서 홀로 십자가를 지시고 부활 승천하셔서 약속하신 성령을 보내심으로 이제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 그리스도가 우리 안에 계시게 됨으로 온전한 사랑이 이루어진 것입니다. 우리는 이 사실을 성령이 오심으로 말미암아 알고 믿게 되었을 뿐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온전한 사랑을 이루어낸 것이 아니라 순전히 주님께서 온전한 사랑을 이루어내셨고 그 사랑 안에 우리가 들어오게 된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에게 온전히 이룬 이유가 무엇입니까? 17절에 보면 “이로써 사랑이 우리에게 온전히 이룬 것은 우리로 심판 날에 담대함을 가지게 하려 함이니. 주의 어떠하심과 같이 우리도 세상에서 그러하니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에게 온전히 이룬 것은 장차 올 심판의 날에 하나님을 대면하여서 부끄럽게 되지 않고 오히려 담대함을 가지고 하나님 앞에 서게 하려 하심입니다. 담대함에 대해서는 지난번에 살펴봤습니다만, 한마디로 하면 터놓고 예기하는 사이를 말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과 우리 사이에 온전한 사랑이 이루어지면 장차 올 심판 날에 우리는 주님 앞에 부끄러움 없이 담대하게 서게 될 것입니다. 사랑 안에는 두려움이 없습니다. 온전한 사랑이 두려움을 없게 하십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온전한 사랑은 두려움을 쫓아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사랑 안에 거하기만 하면 우리는 두려워 할 필요가 없습니다. 그러나 현실을 보면 어떠합니까?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두려워하면서 살아가고 있습니다. 왜 하나님을 섬기면서도 두려움이 있는 것입니까? 두려워하는 것이 왜 일어났느냐에 대해서는 다각적인 차원에의 접근이 필요할 것입니다. 왜냐하면 두려움이 일어나는 이유가 다양하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섬겨도 하나님을 제대로 알지 못하고 섬길 때에 두려움이 생깁니다. 존 오웬의 표현대로 하자면 율법적으로 섬길 때 하나님을 섬기면서도 늘 두려움이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은혜적으로 섬겨야 합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은혜적으로 섬기게 될 때 두려움이 없습니다. 그러나 율법적으로 섬길 때 우리는 하나님을 섬기면서도 늘 두려움에 사로 잡혀 살게 됩니다. 하나님을 잘 섬긴다고 생각할 때는 두려움이 덜 하지만 하나님을 잘 못 섬긴다고 생각하면 두려움에 시달리는 것입니다. 율법적으로 곧 벌이 두려워서 죄를 짓지 않으려고 의무적으로 하나님을 섬긴다든지, 다른 사람의 눈이 두려워서 죄를 짓지 않으려고 하나님을 섬긴다든지 이런 차원에서 하나님을 섬기면 하나님을 섬기면서도 늘 두려움 가운데 있을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진정으로 하나님의 은혜를 감사하고 그 분과 사랑의 교제를 막힘없이 이루어 나아갈 때 두려움이 없는 것입니다. 육신의 아버지와 아들이 사랑 가운데서 온전한 사귐을 이루어갈 때 무엇이든지 말할 수 있듯이 하나님의 온전한 사랑 가운데 행한다면 두려움이 없는 것입니다.

또한 어떤 사람은 그리스도를 믿는 다고 하지만 자존의식, 자기의식이 빈약하기 때문에 늘 두려움 가운데 삽니다. 내가 정말 가치가 있는 사람일까, 하나님이 정말 나를 사랑하시는 걸까, 이런 온갖 종류의 두려움이 자기 속에서 일어나는 것입니다. 때로는 그 두려움이 사탄의 계략으로 말미암아 이루어지기도 합니다. 우리 속에서 온전히 주님 앞에 모든 것을 맡기고 살아가면 다른 차원이겠지만 그러하지 않고 우리가 자꾸만 뭔가를 내 것으로 구분해서 붙들고 하나님과 상관없이 살아가려고 하는 영역이 우리 안에 하나라도 남아있게 되면 사탄은 그것을 교묘하게 이용하는 것입니다. 그것 때문에 우리 속에 두려움이 일어나게 될 것입니다. 그런 것들이 때로는 우리의 욕망에 의해서 증폭이 되기도 할 것입니다. 내가 뭔가 좀 추구하고, 좀 취하고 싶은 것이 있는데 하나님 뜻대로 살아가려면 원치 않게 그것도 자꾸 포기를 해야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계속해서 이런 삶을 살아가다보면 그것이 우리 안에 더 큰 두려움을 불러일으키기도 합니다.

또한 때로는 우리가 육신적 삶을 이 세상 속에 살아가는 그런 성도들이기 때문에 현실적인 많은 문제들로 인해 끊임없이 두려움이 몰려오고 있습니다. 내가 가지고 있는 것을 빼앗길까봐서 두렵습니다. 또 내가 원하는 것을 이루지 못할까봐 두려운 것입니다. 더 나아가 궁극적으로는 죽음도 두렵고, 죽음 이후의 심판도 두려운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의 현실입니다. 그러나 어떤 종류의 두려움이든지간에 근본적으로 온전한 사랑 곧 하나님의 온전한 사랑은 우리 안에 이런 두려움을 몰아냅니다. 하나님은 사랑이십니다. 사랑이신 하나님께서 자기 아들을 우리에게 주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사 독생자를 십자가에 내어 주시기까지 사랑하셨는데 우리에게 무엇을 주시지 아니하시겠습니까? 하나님이 독생자까지 주셔서 우리를 사랑하시고 우리 편이 되어주시는데 누가 우리를 무너뜨릴 수가 있겠습니까? 우리를 넘어뜨릴 수 있는 자는 아무도 없습니다. 범죄 한 죄인들을 위해 독생자를 내어 주신 사랑은 최고의 사랑입니다. 이것은 이 세상에서 찾아볼 수 없는 신기하고 이질적인 진정한 사랑입니다. 이처럼 하나님은 자기의 독생자를 우리에게 주셨습니다. 이로써 우리가 사랑을 알게 되었고, 이 사랑 안에 거하게 되었습니다. 이 사랑 가운데서 서로 사랑하게 되었습니다. 이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 가운데서 온전케 되었습니다. 이 하나님의 온전케 된 사랑이 우리를 모든 두려움에서 자유케 하십니다. 심판의 날 우리가 담대하게 주님 앞에 서게 합니다.  

16절을 다시 보면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시는 사랑을 우리가 알고 믿었다고 합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시는 그 사랑이 어떤 사랑입니까? 이미 9-10절에서 살펴보았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에게 이렇게 나타난바 되었으니 하나님이 자기의 독생자를 세상에 보내심은 저로 말미암아 우리를 살리려 하심이니라. 사랑은 여기 있으니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요. 오직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사 우리 죄를 위하여 화목제로 그 아들을 보내셨음이니라.”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셔서 자기의 독생자를 화목제물로 보내셨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신 것입니다. 우리는 우리만 사랑했던 사람들입니다. 하나님을 부르고 예수님을 불러도 그저 내 지옥 안가고 천국 가기를 바랬던 것입니다. 예수 믿고 복 받기를 바랬던 것입니다. 이것은 엄밀한 의미에서 자기 사랑입니다. 주님의 사랑 앞에서 자기 사랑은 부인되어 지는 것입니다. 나는 나 밖에 모르는 인간이었구나! 이런 죄로 인하여 주님께서 대신 죽으시는 길 외에는 다른 사랑의 길이 없었다는 것을 알게 되고 믿게 되는 것 까지 몽땅 다 하나님의 사랑이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온전한 사랑입니다.

18절을 보면 그러므로 이런 사랑 안에서는 두려움이 없는 것입니다. 온전한 사랑이란 내가 무엇을 잘하고 못하고의 문제가 아닌 것입니다. 우리가 죄인 되었을 때에, 하나님과 원수 되었을 때에 우리를 사랑하셔서 자기 아들을 화목제물로 내어주신 하나님께서 그 아들의 피로 값을 주고 사신 자기 백성들을 끝까지 온전하게 구원하시는 것입니다. 이것은 자기 아들의 피의 공로를 헛되게 하지 않으시는 아버지 하나님의 사랑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사랑이 최종목표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자기 아들을 사랑하시니 자기 아들의 피를 보고서 우리를 끝까지 사랑하시는 것입니다. 이 사랑 안에서 더 이상 두려움이 없습니다. 때로 두려워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아직 그 사랑을 알지 못하여 그럴 수는 있을 것입니다. 마치 유월절 밤에 어린 양의 피를 바르고서도 두려워한 자들이 있을 수 있습니다. 어린 양의 피를 바르지 않은 애굽의 옆 동네에서 곡소리가 들려올 때에 비록 어린 양의 피를 발랐지만 자기 집에도 죽음의 천사가 들어오지 않을까 두려웠을 것입니다. 그러나 완전히 죽음의 천사가 물러갔을 때에 그들이 무엇을 믿었을까요? 어린 양의 피의 효력을 알고 믿게 되었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사랑, 자기 아들의 피로 인한 사랑 안에는 두려움이 없습니다. 온전한 사랑이 두려움을 내어 좇습니다. 두려움에는 형벌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두려워하는 자는 사랑 안에서 온전히 이루지 못하였습니다. 요한계시록 21:8절에 보면 “그러나 두려워하는 자들과 믿지 아니하는 자들과 흉악한 자들과 살인자들과 행음 자들과 술객들과 우상 숭배자들과 모든 거짓말 하는 자들은 불과 유황으로 타는 못에 참예하리니 이것이 둘째 사망이라”고 했습니다. 새 하늘과 새 땅에 참예하지 못한 자는 불과 유황으로 타는 못에 참예하는데 이것이 둘째 사망입니다. 이 둘째 사망에 들어가는 첫 번째 목록이 두려워하는 자들입니다. 그 다음이 믿지 아니하는 자들입니다. 우리는 평소에 지옥에 가는 자들을 흉악한 자들이라고 여깁니다. 물론 흉악한 자들과 살인자들과 행음 자들과 술객들과 우상 숭배 자들과 모든 거짓말 하는 자들이 다 불과 유황 불 못에 들어갈 것입니다. 그러나 이런 모든 죄들은 우리도 다 행하는 죄들입니다. 마음의 동기를 행위와 같이 보시는 주님 앞에 우리는 얼마나 흉악합니까? 남을 미워하는 것이 살인인데 얼마나 많이 살인하였습니까? 그럴지라도 예수님의 십자가 보혈을 믿음으로 다 용서를 받습니다. 그러나 믿지 아니하는 자들은 사함을 얻지 못합니다. 그러므로 믿음이 없는 자들은 근원적인 두려움에서 벗어나지를 못하는 것입니다.

우리도 다 두려움에 사로잡혀 살던 사람들입니다. 시험에 떨어질까 두렵고, 다른 사람들이 알아주지 않을까 두렵고, 이유 없이 두려움이 몰려오고, 그래서 종교를 가져 보기도 하지만 두려움을 떨쳐 버릴 수가 없는 것입니다. 오직 주님의 사랑, 그 십자가의 피 안에서만 더 이상의 두려움이 없습니다. 그 안에서는 자신이 죽어야 마땅하다는 것을 아는 자리입니다. 자기 죄가 무엇인지를 아는 자리입니다. 자기의 죄로 인하여 왜 예수님이 죽으셨는지를 아는 자리에서 더 이상의 두려움은 없는 것입니다. 아직도 사는 일에 두려움이 있다면 하나님 안에 나타난 사랑을 몰라서 그렇습니다. 주님의 사랑을 알면 알수록 두려움이 사라질 것입니다.

바울사도는 에베소서 3:18-19절에서 “그 사랑의 넓이와 길이와 깊이와 높이가 어떠함을 알아가라”고 하였습니다. 그 사랑을 알아가는 길이 무엇입니까? 4:19-21절을 보면 “우리가 사랑함은 그가 먼저 우리를 사랑하셨음이라. 누구든지 하나님을 사랑하노라 하고 그 형제를 미워하면 이는 거짓말하는 자니 보는 바 그 형제를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보지 못하는바 하나님을 사랑할 수 없느니라. 우리가 이 계명을 주께 받았나니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는 또한 그 형제를 사랑할지니라”고 했습니다. 눈에 보이는 형제를 사랑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사랑할 수 있는 것은 그가 우리를 먼저 사랑하셨기에 그렇게 됩니다. 연못 한 가운데 돌멩이를 던지만 그 물결이 끝까지 밀려갑니다. 주님으로부터 나온 사랑이 우리를 밀치면 반응이 일어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므로 눈에 보이는 형제를 사랑하지 않으면서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사랑한다고 하는 것은 거짓말입니다. 이 말씀 앞에 우리는 또 두렵습니다. 그러나 이 두려움도 이길 수 있는 능력이 주님의 온전한 사랑 안에 다 들어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셔서 독생자를 주셨다는 같은 고백을 하는 형제를 어찌 사랑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성령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은혜를 주셔서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을 더하여 주시고, 독생자를 주신 하나님의 사랑 안에서 형제를 사랑하게 하여 주시기를 원합니다. 이를 통해 하나님과 더 깊은 사귐을 이루며, 온전한 하나님의 사람으로 세워져 가게 하여 주시기를 원합니다. 그리하여 주님께서 재림하셔서 하나님 나라가 극치에 이를 때 우리가 하나님 앞에 담대히 서게 하여 주시기를 원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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