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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 손재호
성경본문 요 10:1-10
성경본문내용 (1)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양의 우리에 문으로 들어 가지 아니하고 다른데로 넘어가는 자는 절도며 강도요(2)문으로 들어가는 이가 양의 목자라(3)문지기는 그를 위하여 문을 열고 양은 그의 음성을 듣나니 그가 자기 양의 이름을 각각 불러 인도하여 내느니라(4)자기 양을 다 내어 놓은 후에 앞서가면 양들이 그의 음성을 아는 고로 따라 오되(5)타인의 음성은 알지 못하는 고로 타인을 따르지 아니하고 도리어 도망하느니라(6)예수께서 이 비유로 저희에게 말씀하셨으나 저희는 그 하신 말씀이 무엇인지 알지 못하니라(7)그러므로 예수께서 다시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말하노니 나는 양의 문이라(8)나보다 먼저 온 자는 다 절도요 강도니 양들이 듣지 아니하였느니라(9)내가 문이니 누구든지 나로 말미암아 들어가면 구원을 얻고 또는 들어가며 나오며 꼴을 얻으리라(10)도적이 오는 것은 도적질하고 죽이고 멸망시키려는 것 뿐이요 내가 온 것은 양으로 생명을 얻게 하고 더 풍성히 얻게 하려는 것이라
강설날짜 2010-04-25

2010년 4월 25일 설교


양의 문 예수!


말씀:요한복음 10:1-10

요한복음 10장은 7장에서부터 계속되는 초막절 강화의 연장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22절에 보면 특별히 10장은 수전절과 연관되어 있습니다. 수전절은 ‘키스레브’라는 달의 25일에 시작하여 8일간 지켜졌습니다. 이 절기는 주전 165년에 유다 마카비를 중심으로 수리아의 폭군 안디오커스 에피파네스의 군대를 물리치고 그들의 만행으로 더렵혀진 성전을 정결케 한 것을 기념하여 드린 절기입니다. 10장에서는 선한 목자에 대한 상징적인 비유를 통해 예수님께서 누구신가 하는 것을 계시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자신이 양의 문이요, 양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는 선한 목자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특히 11절에서 ‘나는 선한 목자라’고 하셨는데 이 표현은 에스겔서 34장을 배경으로 하고 있습니다. 에스겔서 34장은 수전절에 유대인들이 읽는 표준 낭독 본문 중의 하나였습니다. 에스겔서 34장에 보면 하나님의 백성을 양떼라 부르고, 하나님을 백성의 목자로 부르고 있습니다. 이것은 언약신학적 표현으로 구약에 흔히 나타나는 그림입니다. 곧 다시 말하면 하나님은 목자시고, 이스라엘은 그 양이라는 것입니다. 또한 하나님께서는 자신을 대신하여 자기 백성을 돌보도록 이스라엘의 지도자들 특히 제사장들과 왕들을 백성의 목자로 세우셨습니다. 그러나 이들은 자신의 본래 목적과 사명을 잊어버리고 자기 이익을 위해 양떼들을 속이고 노략질한 것입니다. 이로 인해 양떼들은 흩어지게 되었습니다. 역사적으로 보면 바벨론 제국에 멸망당하여 포로로 끌려가게 되었습니다. 이런 상황 가운데서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의 이상적인 목자가 나타나셔서 그들을 돌보실 것을 약속하셨습니다. 곧 다윗의 후손으로 오실 약속된 메시아를 통해서 흩어진 양떼들을 다시 모으시고 친히 먹이실 것을 약속하십니다. 에스겔서 34장에서 약속되고 있는 그 메시아가 바로 오늘 요한복음 10장에서 양의 문이요, 선한 목자로 자신을 소개하시는 예수 그리스도이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요한복음 10장 말씀을 에스겔서 34장을 배경으로 이해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요한복음 10장에서 다루어지는 내용은 예수님께서 양의 문이 되시고, 선한 목자가 되심을 가르치시는 내용(1-21)과 수전절에 예루살렘에서 있었던 일을 기술하고 있습니다(22-42). 요한복음 10장은 9장을 배경으로 주어지고 있습니다. 9:35-41절에 보면 예수님께서는 눈 뜬 소경이 종교지도자들에 의해 출교 당했다는 소식을 듣고 그를 찾아오셔서 자신이 인자되심을 증거하셨습니다. 그러자 눈 뜬 소경이 ‘주여 내가 믿나이다’하며 예수님께 신앙 고백하며 그에게 경배하였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의 육신의 눈 뿐만 아니라 영적인 눈까지 뜨게 해 주신 것입니다. 그런 후 예수님께서는 자신이 세상을 심판하러 오셨다고 하셨습니다. 39절을 보면 “내가 세상을 심판하러 이 세상에 왔으니 보지 못하는 자들은 보게 하고 보는 자들은 소경되게 하려 함이라”고 하셨습니다. 여기서 ‘보지 못하는 자들’이란 자신이 영적으로 소경인 것을 아는 자들을 말합니다. 이런 자들에게는 보게 하신다고 하셨습니다. 날 때부터 소경된 자는 육신적으로 뿐 아니라 영적으로 소경이었습니다. 그는 예수님을 몰랐습니다. 그런데 그는 마침내 영적인 눈을 뜨고 예수님을 인자로 고백하였습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보는 자들은 소경되게 하려 함이라고 하셨습니다. 여기서 ‘보는 자들’은 스스로 본다고 생각한 바리새인들을 가리킵니다. 이들은 자신들이 소경됨을 인식하지 못했습니다. 이런 바리새인들은 예수님이 오심으로 인해 더욱 소경됨이 굳어지게 되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을 받아들이지 않고 배척하였습니다. 그들은 영적인 눈을 뜨지 못하고 메시아를 배척함으로 멸망을 받게 되었습니다.

예수님께서 ‘보지 못하는 자는 보게 하고 보는 자는 소경되게 하려 함이라’고 하시자 바리새인 중에 예수와 함께 있던 자가 예수님께 반론을 제기하였습니다. “우리도 소경입니까?” 예수님은 이런 그들에게 무엇이라고 말씀하셨습니까? 41절에 보면 “너희가 소경되었더면 죄가 없었으려니와 본다고 하니 너희 죄가 그저 있느니라”고 하셨습니다. 바리새인들은 예수님의 가르침의 영적 의미를 분명히 알고 있었습니다. 그러함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예수님을 거절하였습니다. 그러므로 그들이 소경으로 예수님께서 가르치시는 영적인 의미를 알지 못했으면 죄가 없지만 알면서도 영접하지 않고 배척하였기 때문에 그들에게 죄가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날 때부터 소경된 자가 신앙 고백을 하고, 이런 그를 출교시켜버리는 종교 지도자들을 배경으로 한 비유를 들어 말씀해 주셨습니다. 10:6절에 보면 “예수께서 이 비유로 저희에게 말씀하셨으니”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10장 말씀은 9장에 대한 연속으로 예수님을 거절한 바리새인들이 절도며 강도라고 하시면서 그들과 대비하여 자신이 양의 문이요, 선한 목자이심을 선포하시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는 1-10절 말씀을 통해 양의 문되신 예수님에 대해서 살펴보고자 합니다.

그러면 예수님께서 스스로 소경이 아니라고 생각하는 유대인들에게 말씀하신 비유가 무엇입니까? 강도와 목자의 비유입니다. 1-5절에 보면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양의 우리에 문으로 들어가지 아니하고 다른 데로 넘어가는 자는 절도며 강도요, 문으로 들어가는 이가 양의 목자라. 문지기는 그를 위하여 문을 열고 양은 그의 음성을 듣나니 그가 자기 양의 이름을 각각 불러 인도하여 내느니라. 자기 양을 다 내어 놓은 후에 앞서 가면 양들이 그의 음성을 아는 고로 따라 오되 타인의 음성은 알지 못하는 고로 타인을 따르지 아니하고 도리어 도망하느니라”고 하셨습니다. 이 비유는 팔레스틴에서 목자가 양을 치는 것을 배경으로 주어지고 있습니다. 이 비유의 의미를 바르게 이해하기 위해서는 예수님 당시 양 우리의 모습을 아는 것이 필요합니다. 예수님 당시에는 두 종류의 양 우리가 있었다고 합니다. 마을이나 도시에 있는 것과 산간벽촌에 있는 양 우리입니다. 이들 양 우리는 조금 구조가 달랐다고 합니다. 마을의 양 우리는 나무로 잘 지어지고 문에는 문지기가 있었다고 합니다. 이에 반해 산간벽촌의 양 우리는 돌을 쌓아 담을 만들었는데 문이 따로 있지 않았고, 담의 한 부분을 터놓아 입구를 대신했다고 합니다. 그리고 밤이 되면 양치는 목자가 그 문을 가로 막고 있었다고 합니다. 1-6절의 비유는 큰 마을에 있었던 양 우리를 전제로 하고 있고, 7-10절은 산간벽촌의 양 우리를 염두에 두고 있는 것 같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양의 문으로 들어가지 아니하고 다른 데로 넘어가는 자는 절도며 강도라고 했습니다. 목자는 문으로 들어갑니다. 그러나 절도나 강도는 어떻게 합니까? 문으로 들어가지 않고 몰래 다른 곳으로 넘어 갑니다. 왜냐하면 문에는 문지기가 지키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문지기 몰래 다른 곳으로 들어가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양을 훔치기 위함입니다. 그러므로 양의 문으로 들어가지 않는 자는 절도며, 강도라고 하는 것입니다. 여기서 ‘절도며, 강도’라는 것은 그 당시 사람들뿐만 아니라 후세에 오고 올 많은 시대의 사람들도 생각하시고 하신 말씀입니다. 물론 직접적으로는 그 당시 날 때부터 소경된 자가 예수님을 주로 고백했다는 이유로 출교를 시킨 바리새인들과 서기관을 염두에 두고 하시는 말씀입니다.

3절에 보면 문으로 들어가는 자가 목자라고 합니다. 목자가 자기 양을 불러 인도하여 내기 위해서는 문으로 들어갑니다. 목자가 문으로 들어갈 때 문지기는 그를 위하여 문을 열어 줍니다. 그러면 목자는 우리에 들어가 자기 양의 이름을 각각 불러 인도하여 냅니다. 목자는 자기 양을 다 내어 놓은 후에 앞서가면 양들이 그 음성을 아는 고로 따라 옵니다. 양은 자기 목자의 음성을 압니다. 그래서 양은 자기 목자의 음성을 듣고 따라갑니다. 다른 양은 결코 따라오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자기 목자의 음성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도리어 타인의 음성을 알지 못하는 고로 타인을 따르지 아니하고 도망갑니다.

지금 예수님 앞에서 있는 자들이 누구입니까? 자기들은 본다고 하는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이런 그들에게 소경이라고 하셨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참된 목자의 음성을 듣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참된 목자의 음성을 듣고 따르기는커녕 목자의 음성을 듣고 도망가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오늘날 교회의 모습을 우리는 이 말씀에 비추어 살펴봐야 합니다. 주님의 양인지, 아닌지는 어떻게 알 수 있습니까? 주님의 음성을 듣는가, 듣지 않는가를 보면 알 수 있습니다. 주님의 양이 아닌 자는 주님의 음성을 들으면 어떻게 합니까? 도망갑니다. 그러나 주님의 양은 어떻게 합니까? 주님을 따르게 됩니다. 그런데 주님의 음성은 무엇입니까? 십자가에서 만나자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러한 주님의 음성을 듣고서도 좋다고 따라 나설 자가 누구입니까? 눈에 보이는 것을 위하여 살지 말고 영원한 것을 위하여 살자는 말씀을 누가 따르겠습니까? 먹을 것과 입을 것이 있는 즉 족한 줄 알고, 범사에 감사하라는 말씀을 누가 좋다고 따르겠습니까? 돈을 사랑함이 일만 악의 뿌리라는 말씀을 듣고 누가 따르겠습니까? 갈라디아서 6:14절을 보면 “그러나 내게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 결코 자랑할 것이 없으니.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세상이 나를 대하여 십자가에 못 박히고 내가 또한 세상을 대하여 그러하니라”고 했습니다. 바울은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는 자랑할 것이 없다고 합니다. 그러나 세상에서 보면 이 십자가는 어떤 것입니까? 어리석은 것입니다. 그러나 주님의 양은 어떠합니까? 십자가를 자랑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주님의 양인지 아닌지를 어떻게 구별할 수 있습니까? 십자가 복음을 통해 구별할 수 있습니다. 십자가 복음을 전할 때 받아들이고 따르는 자는 주의 양이고, 따르지 않고 도망가면 주님의 양이 아닌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비유로 말씀하시고 계실 때 그 앞에 있던 유대인들은 자기 스스로 본다고 하는 자들입니다. 스스로 눈을 떴다고 생각하고 소경의 인도자라고 하는 자들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바로 그들이 소경이라고 하셨습니다. 왜냐하면 참된 목자의 음성을 듣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참된 목자되신 예수님의 음성을 듣고 따르기는커녕 도망을 가는 것입니다. 그들은 주님의 양이 아니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그들은 이스라엘 백성들의 목자도 아니었습니다. 도리어 그들은 절도며, 강도였습니다. 날 때부터 소경된 자가 영육간에 눈을 뜨고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고백했을 때 그들은 도리어 그를 출교시켜버렸습니다.

1-6절의 비유에서 예수님께서는 양의 문으로 들어가지 않는 자가 절도요, 강도라고 말씀하신 후 이제는 자신이 양의 문이기에 자신을 통하여 들어가지 않으면 강도요, 절도라는 것입니다. 7-10절을 보면 “그러므로 예수께서 다시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말하노니 나는 양의 문이라. 나보다 먼저 온 자는 다 절도요 강도니 양들이 듣지 아니하였느니라. 내가 문이니 누구든지 나로 말미암아 들어가면 구원을 얻고 또는 들어가며 나오며 꼴을 얻으리라. 도적이 오는 것은 도적질하고 죽이고 멸망시키려는 것뿐이요, 내가 온 것은 양으로 생명을 얻게 하고 더 풍성히 얻게 하려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예수님은 자신이 양의 문이라고 하십니다. 사도 요한은 전형적인 ‘에고 에이미’ 용법(나는~이다)을 통해 예수님께서 양의 문이심을 선언하고 있습니다. ‘나는 양의 문이라.’ 예수님께서는 양의 문되신 자신을 통해서 들어가야만 구원을 얻는다는 것입니다. 양의 문되신 예수님을 통하지 않고서는 어느 누구도 구원을 얻을 수 없습니다. 어느 누구도 참된 안식을 누릴 수 없습니다. 이것이 기독교의 핵심 진리입니다. 예수님만이 생명을 주시는 분이라는 것입니다. 예수님만이 구원자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만이 생명을 주시는 분이심을 거부하는 자는 모두가 강도요, 절도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예수님의 이 말씀을 듣는 일차적인 대상은 누구입니까? 유대인들입니다. 유대인들의 생각은 다른 이방인들은 구원을 못 받아도 자기들을 다 구원을 받는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자기들을 선택하시고 선지자를 보내시고 율법을 주시고 세계 열방 중에서 자기들에만 계시를 주셨기에 자기들만이 구원을 받는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리고 현실적인 어려움도 메시아만 오면 모든 정치 경제 등의 현실적인 문제들을 해결하여 줄 것을 기대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 예수님이 병을 고치시고 오병이어의 기적을 일으키시자 예수님을 임금 삼으려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도망가시는 것입니다. 나는 그런 왕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런 왕은 이미 사단의 세 가지 시험 중에서 거절한 것입니다. 그런데도 오늘날 기독교라는 이름으로 이런 것을 준다는 것이 사단의 유혹에 넘어간 것입니다. 예수님이 거절한 것을 자기들이 준다고 하는데 그런 것을 잘 분별하셔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유대인 때나 지금이나 방법의 차이는 있을지 몰라도 끊임없이 생명에 관심을 가지지 못하도록 하는 것입니다.

유대인들이 못 알아듣는 이유를 조금 더 살펴보고자 합니다. 자기들은 다 구원받는다고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혹시 이방인이라도 구원을 얻으려면 자기들처럼 할례를 행하고 안식일을 지키고 율법을 지키는 유대인으로 개종을 하여야 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그들을 다 불러내시는 것이 아니라 일부만 불러내신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못 알아듣는 것입니다. 유대인들이 생각하는 구원 얻는 문이란 한마디로 말하면 율법입니다. 율법의 울타리 안에 있어야 구원이 주어지는 것입니다. 그러니 율법을 모르는 이방인은 이미 저주 받은 자요, 또 유대인이라고 하여도 율법의 기준에 들지 못하면 저주받은 자로 여기는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이러한 율법의 문을 말씀하시는 것이 아니라 다른 문을 말하고 있으니 유대인들이 못 알아듣는 것입니다. 그런데 못 알아듣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다른 이야기를 하니 이런 자를 죽여야 마땅하다는 것입니다. 율법의 문을 거부하는 이단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율법이 가입한 것은 죄를 더하게 하기 위함이라는 것을 그들은 알지 못하였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스라엘을 선택하고 율법을 주신 것은 어느 인간도 인간의 노력으로 구원 얻을 자가 없다는 것을 보여주시기 위하여 율법을 주셨는데 오히려 자기들은 율법이 있으니 구원받았다고 착각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미 하나님이 은혜로 아브라함을 의롭다 하신 것이 율법보다 400년이나 앞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400년 후의 율법이란 왜 은혜로만 구원이 되는지를 보여주는 차원에서 율법이 개입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율법이 온 것은 죄가 무엇인지 알게 하는 것입니다.

로마서 3:19-20절을 보면 “우리가 알거니와 무릇 율법이 말하는 바는 율법 아래 있는 자들에게 말하는 것이니. 이는 모든 입을 막고 온 세상으로 하나님의 심판 아래 있게 하려 함이니라. 그러므로 율법의 행위로 그의 앞에 의롭다 하심을 얻을 육체가 없나니 율법으로는 죄를 깨달음이니라”고 했습니다. 율법은 모든 입을 막고 하나님의 심판아래 있게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율법의 행위로는 구원 얻을 자가 하나도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율법 외에 하나님의 한 의가 나타난 것입니다, 로마서 3:21-22절에 보면 “이제는 율법 외에 하나님의 한 의가 나타났으니 율법과 선지자들에게 증거를 받은 것이라. 곧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모든 믿는 자에게 미치는 하나님의 의니 차별이 없느니라”고 했습니다. 이것이 바로 양의 문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어떠한 행위로도 스스로의 구원을 이룰 수가 없는 것입니다. 시체가 가만히 있으면 냄새라도 덜 날 텐데 무언가 선한 일을 한다고 움직이면 악취만 더 날 뿐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유대인을 선택하시고 율법을 주신 것은 인간의 수준이 어느 정도인가를 확인하시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 9-10절을 다시 보면 “내가 문이니 누구든지 나로 말미암아 들어가면 구원을 얻고 또는 들어가며 나오며 꼴을 얻으리라. 도적이 오는 것은 도적질하고 죽이고 멸망시키려는 것뿐이요, 내가 온 것은 양으로 생명을 얻게 하고 더 풍성히 얻게 하려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예수님은 자신이 문이라고 합니다. 곧 구원의 문이라고 합니다. 이 문을 통하여 들어가고 나오며 꼴을 얻는다고 하십니다. 그러나 도적이 오는 것은 죽이고 멸망시키려는 것뿐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자신이 온 것은 양으로 생명을 얻게 하고 더 풍성히 얻게 하려 하심이라고 하십니다. 그렇습니다. 예수님은 에스겔서 34장에 약속된 선한 목자가 되십니다. 예수님은 양의 문이 되십니다. 예수님을 통하여서만이 우리가 구원을 얻고 참된 안식을 누릴 수 있습니다. 양의 문이 되신 우리 주님을 찬양합니다.

그러면 예수님께서 잃어버린 양들에 생명을 주시기 위하여 어떻게 하신 것입니까? 자기의 생명을 십자가를 통해서 주신 것입니다. 유월절 밤에 어린양을 잡아 그 피를 문설주에 바름으로 무엇이 보호를 받게 되었습니까? 생명이 보호를 받게 되었습니다. 누가복음 15:1-7절을 보면 잃어버린 양의 비유가 나옵니다. 어느 사람에게 양 일백 마리가 있었는데 그 중에 하나를 잃어버렸습니다. 그는 아흔 아홉 마리를 들어 두고 그 잃은 것을 찾도록 찾았습니다. 찾은 후 너무 기뻐서 찬치를 합니다. 이처럼 잃어버린 양을 누가 찾아 나섭니까? 목자가 나섭니다. 우리는 양의 문이 되시고 선한 목자 되신 주님으로 인해 찾아진바 된 자들입니다. 우리는 이 주님을 인해 구원함을 얻게 생명을 얻게 되었습니다. 양의 문되신 예수님께서는 우리를 십자가에로 초대하십니다. 주님께서 십자가에 함께 죽자고 초대하십니다. 누가 이 초대에 응하겠습니까? 놀랍게도 이러한 십자가의 부름에 응하는 자들이 있습니다. 그들이 바로 주님의 양인 것입니다. 아직 예수님의 재림이 임하지 않은 것은 아직도 주님의 양이 있다는 증거입니다. 주님은 지금도 전도를 통해 십자가 복음을 증거하시고 주님의 양이 누구인지 분리하고 계십니다. 성령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은혜를 주셔서 우리로 하여금 양의 문되신 예수님을 알게 하여 주시기를 원합니다. 십자가 복음의 능력 안에서 주님의 음성을 듣고 그 분을 따라가는 자들이 되게 해 주시기를 원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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