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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 손재호
성경본문 미 1:1-16
성경본문내용 (1)유다 열왕 요담과 아하스와 히스기야 시대에 모레셋 사람 미가에게 임한 여호와의 말씀 곧 사마리아와 예루살렘에 관한 묵시라(2)백성들아 너희는 다 들을지어다 땅과 거기 있는 모든 것들아 자세히 들을지어다 주 여호와께서 너희에게 대하여 증거하시되 곧 주께서 성전에서 그리하실 것이니라(3)여호와께서 그 처소에서 나오시고 강림하사 땅의 높은 곳을 밟으실 것이라(4)그 아래서 산들이 녹고 골짜기들이 갈라지기를 불 앞의 밀 같고 비탈로 쏟아지는 물 같을 것이니(5)이는 다 야곱의 허물을 인함이요 이스라엘 족속의 죄를 인함이라 야곱의 허물이 무엇이뇨 사마리아가 아니뇨 유다의 산당이 무엇이뇨 예루살렘이 아니뇨(6)이러므로 내가 사마리아로 들의 무더기 같게 하고 포도 심을 동산 같게 하며 또 그 돌들을 골짜기에 쏟아 내리고 그 지대를 드러내며(7)그 새긴 우상을 다 파쇄하고 그 음행의 값을 다 불사르며 그 목상을 다 훼파하리니 그가 기생의 값으로 모았은즉 그것이 기생의 값으로 돌아가리라(8)이러므로 내가 애통하며 애곡하고 벌거벗은 몸으로 행하며 들개같이 애곡하고 타조 같이 애통하리니(9)이는 그 상처는 고칠 수 없고 그것이 유다까지도 이르고 내 백성의 성문 곧 예루살렘에도 미쳤음이니라(10)가드에 고하지 말며 도무지 호곡하지 말지어다 베들레아브라에서 티끌에 굴지어다(11)사빌 거민아 너는 벗은 몸에 수치를 무릅쓰고 나갈지어다 사아난 거민은 나오지 못하고 벧에셀이 애곡하여 너희로 의지할 곳이 없게 하리라(12)마롯 거민이 근심 중에 복을 바라니 이는 재앙이 여호와께로 말미암아 예루살렘 성문에 임함이니라(13)라기스 거민아 너는 준마에 병거를 메울지어다 라기스는 딸 시온의 죄의 근본이니 이는 이스라엘의 허물이 네게서 보였음이니라(14)이러므로 너는 가드모레셋에 작별하는 예물을 줄지어다 악십의 집들이 이스라엘 열왕을 속이리라(15)마레사 거민아 내가 장차 너를 얻을 자로 네게 임하게 하리니 이스라엘의 영광이 아둘람까지 이를 것이라(16)너는 네 기뻐하는 자식으로 인하여 네 머리털을 깎아 대머리 같게 할지어다 네 머리로 크게 무여지게 하기를 독수리 같게 할지어다 이는 그들이 사로잡혀 너를 떠났음이니라
강설날짜 2011-07-31

2011년 미가서 공부


너희는 다 들을찌어다!

말씀:미가서 1:1-16

 

마가서는 미가 선지자에게 임한 하나님의 묵시의 말씀입니다. 1:1절에 보면 “유다 열왕 요담과 아하스와 히스기야 시대에 모레셋 사람 미가에게 임한 여호와의 말씀 곧 사마리아와 예루살렘에 관한 묵시라”고 했습니다. 이 말씀에 보면 특히 미가서는 미가 선지자를 통해 사마리아와 예루살렘에 주시는 하나님의 묵시의 말씀입니다. 우리가 마가서를 살펴보는 가운데 미가 선지자를 통해 사마리아와 예루살렘에 주시는 하나님의 묵시의 말씀이 무엇인지 배우고자 합니다.

 

이 땅을 사는 모든 성도들의 최고의 소망이 무엇입니까? 요한계시록 22:20-21절에 보면 “내가 진실로 속히 오리라”는 말씀에 “아멘! 주 예수여! 오시옵소서”라고 합니다. 그리고 “주 예수의 은혜가 모든 자들에게 있을찌어다. 아멘!”으로 끝이 납니다. 우리는 이 말씀에서 이 땅을 사는 성도들의 최고의 소망이 무엇인지를 알 수 있습니다. 이 땅을 사는 모든 성도들의 최고의 소망은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입니다. 곧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을 통해 이루어질 성취된 하나님나라입니다. 오늘날 우리가 예수를 믿는다고 하면서 과연 주 예수 그리스도의 다시 오심을 간절히 소망하고 있습니까? 주님의 재림을 통해 이루어질 성취된 하나님나라를 소망하고 있습니까?

 

구약의 이스라엘 백성들은 메시아가 임하기를 간절히 바라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메시아가 오면 모든 이방의 정치적인 억압에서 벗어나서 다윗 왕국과 같은 나라가 도래할 줄로 생각했습니다. 이스라엘이 모든 나라를 다스리는 나라가 될 줄로 알고 기다린 것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여호와의 날 곧 구원의 날을 간절히 사모하고 기다린 것입니다. 그런데 선지자들이 전하는 메시아가 임하는 날이 구원의 날이 아니라 심판의 날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이와 같은 선지자들의 메시지는 다윗시대와 같은 나라를 꿈꾸며 메시아를 기다려왔던 이스라엘 백성들의 소망에 찬물을 끼얹는 선포가 되는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도 예수님의 재림을 기다린다고 하지만 그러나 그 날에 우리가 주님 앞에 섰을 때 주님께서 ‘나는 너를 도무지 모른다’고 하는 말씀을 들을 수 있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그날이 무슨 날이 되는 것입니까? 구원의 날이 아니라 슬픔과 통곡의 날이요, 형벌의 날이 되는 것입니다. 아모스 5:18-20절에 보면 “화 있을찐저! 여호와의 날을 사모하는 자여! 너희가 어찌하여 여호와의 날을 사모하느뇨. 그 날은 어두움이요 빛이 아니라. 마치 사람이 사자를 피하다가 곰을 만나거나 혹 집에 들어가서 손을 벽에 대었다가 뱀에게 물림 같도다. 여호와의 날이 어찌 어두워서 빛이 없음이 아니며 캄캄하여 빛남이 없음이 아니냐”라고 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들어야 합니다. 우리가 하나님이 어떤 분이시며, 인간의 죄가 무엇인지를 알 수 있는 것은 오직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서만 알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믿음이란 하나님의 말씀을 들음에서 나는 것입니다. 로마서 10:17절에 보면 “그러므로 믿음은 들음에서 나며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말미암느니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오늘날 우리들은 어떻습니까? 하나님의 말씀 곧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을 잘 듣습니까? 아니면 잘 듣지 않습니까? 우리가 잘 들어야 하는데 실상은 잘 안 듣죠? 우리가 왜 하나님의 말씀을 잘 들으려고 하지 않습니까? 게임을 하거나 텔레비전을 보거나 세상 이야기를 하면 시간가는 줄 모르면서 왜 성경은 펼치기만 하면 잠이 오는 것입니까? 그것은 성경이 우리의 본성을 거스르기 때문입니다. 성경에서 말씀하시는 하나님의 말씀은 우리가 살아가는 일상적인 삶의 방향과 너무나 다른 것입니다. 내가 원하고 바라는 것들을 성경은 책망하고 있는 것입니다. 나는 이렇게 되었으면 좋겠다는 것들을 성경은 탐심이며, 우상숭배라고 고발하고 있는 것입니다. 골로새서 3:15절에 보면 “탐심은 우상숭배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말씀의 본의를 그대로 들어내는 말씀을 싫어합니다. 언약이나 하나님의 절대 주권, 은혜와 같은 말씀을 싫어합니다. 오늘날은 이런 하나님의 말씀의 본의를 드러내는 교회나 목사들이 도리어 이상한 교회나 사람으로 취급 받습니다. 오늘날은 많은 사람들이 자기들의 귀에 좋은 말을 하는 사람, 세상적인 복이나 성공을 가르치는 사람, 인간의 의지와 노력, 긍정을 가르치는 사람들이 인기가 있습니다. 사람들은 이런 사람들의 말을 쫓아갑니다. 이런 설교를 하는 교회로 사람들이 구름같이 몰려갑니다.

 

이런 모습은 오늘날만의 문제는 아니었습니다. 구약에서도 마찬가지였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임한 선지자들의 외침은 늘 외면당하였습니다. 우리가 아모스서에서도 봤습니다만 북 이스라엘은 아모스 선지자의 말을 듣지 아니하였습니다. 그들은 배척했습니다. 특히 아마샤는 아모스에게 예언하지 말라고 했습니다. 자기 땅에 가서나 예언하고 거기서 빌어 먹어라고 했습니다(암 7:12-13). 이처럼 이스라엘은 하나님께서 보내신 선지자들의 말씀을 듣기를 싫어하였습니다. 그래서 선지자들을 배척하고 핍박하였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거짓 선지자들의 말은 잘 들었습니다. 자기 마음의 생각들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위장하여 전하는 거짓 선지자들의 말은 인기가 있었습니다. 많은 무리가 따랐습니다. 그들이 전하는 메시아사상은 언제나 자기 나라가 잘된다는 소식이었습니다. 아무리 적군이 쳐들어온다고 하여도 하나님이 보우하신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이 제대로 임한 선지자들은 한결 같이 심판의 소식을 전하는 것입니다. 여호와의 날이 구원의 날이 아니라 심판의 날이라는 것입니다. 그로인해 하나님께서 보낸 참 선지자들은 사람들로부터 외면을 당하고 핍박을 당하였던 것입니다.

 

미가 선지자도 예외가 아닙니다. 미가서 1:1절을 다시 보면 미가 선지자가 활동한 시대는 유다 왕 요담과 아하스와 히스기야 시대입니다. 요담은 웃시야 왕의 아들입니다. 웃시야는 정직하게 행하였으나 나중에 교만하여 성전에서 제사지내다가 문둥병이 들어서 별궁에 거하고 그 아들 요담이 왕이 되는데 요담은 아버지의 경우를 보아서 그랬는지 성전에 나아가지 않았습니다. 왕은 정도를 행하였으나 백성들은 사악을 행하였습니다. 요담의 아들인 아하스는 아주 악한 왕이었습니다. 온갖 우상숭배를 다 한 왕입니다. 그에 반해 그 아들 히스기야는 아버지와 달리 정직한 왕으로 우리가 알고 있습니다. 이런 시대에 미가 선지자가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 선포한 것입니다. 지난번 수요강설 때 보았던 요나서와 나훔서가 앗수르의 수도인 니느웨 성의 회개와 멸망을 선포하는 것을 보았는데, 미가서는 그 중간시기로 보면 됩니다. 미가 선지자가 북 이스라엘 곧 사마리아와 남 유다의 심판을 선포하는데, 그 심판의 도구가 앗수르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미가 선지서는 북 이스라엘이 앗수르에 망하는 주전 722년 전의 기록으로 볼 수 있습니다.

 

2절을 보겠습니다. “백성들아! 너희는 다 들을지어다. 땅과 거기 있는 모든 것들아! 자세히 들을지어다. 주 여호와께서 너희에게 대하여 증거하시되 곧 주께서 성전에서 그리하실 것이니라”고 했습니다. 1절에 보면 사마리아와 예루살렘에 관한 여호와의 말씀이라고 했는데, 2절에서는 이스라엘 백성들만 말씀하시는 것이 아니라 땅과 거기에 있는 모든 것들아 다 들으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여호와 하나님은 이스라엘만의 하나님이 아니라 온 땅의 모든 것들의 주인이십니다. 그러므로 사마리아와 예루살렘에 대한 심판의 소식은 모든 세상에 대한 심판의 소식이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미가 선지자는 ‘주 여호와께서 너희에게 대하여 증거 하시되 성전에서 그렇게 하신다’라고 하는 것입니다. 곧 ‘성전에서 나오신다’고 하십니다. 구약의 성전이란 여호와 하나님께서 거하시는 곳입니다. 성전은 성소와 지성소로 구분되는데 지성소 안에 언약궤를 두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언약궤 뚜껑인 속죄소에서 이스라엘을 만나시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출 25:20-22). 하나님께서는 언약을 따라 일하십니다. 그러므로 ‘성전에서 나오신다’는 것은 언약을 따라 일하심을 말씀하시면서 동시에 그 성소란 단지 땅의 성소만이 아니라, 하늘에서 강림하신다는 내용입니다. 3-4절을 보면 “여호와께서 그 처소에서 나오시고 강림하사 땅의 높은 곳을 밟으실 것이라. 그 아래서 산들이 녹고 골짜기들이 갈라지기를 불 앞의 밀 같고 비탈로 쏟아지는 물 같을 것이니”라고 했습니다. 여호와께서 그 처소에서 나오시고 강림하시면 어떻게 된다고 합니까? 땅의 높은 곳을 밟으시는데 그러면 그 산들이 불에 녹는 초와 같고 비탈로 쏟아지는 물과 같을 것이라고 합니다. 마치 거인이 모래성을 밟아버리는 것과 같은 모습으로 임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렇게 무서운 모습으로 임하시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5절을 보면 “이는 다 야곱의 허물을 인함이요, 이스라엘 족속의 죄를 인함이라. 야곱의 허물이 무엇이뇨. 사마리아가 아니뇨. 유다의 산당이 무엇이뇨. 예루살렘이 아니뇨”라고 했습니다. 하나님께서 무서운 심판자의 모습으로 임하시는 것은 야곱의 허물과 이스라엘의 죄악 때문이라고 말씀합니다. 야곱의 허물은 사마리아이며, 유다의 산당이 예루살렘이라고 합니다. 북 이스라엘의 수도 사마리아가 우상의 도시가 된 것은 남북으로 나누어진 직후부터 여로보암 왕이 우상숭배를 하게 하였기 때문이었습니다. 여기에는 역사적인 배경이 있습니다. 우리가 잘 알듯이 북 이스라엘은 앗수르에 의해 멸망당한 후 이주 정책으로 사마리아는 혼혈이 되었습니다. 그로 인해 북 이스라엘 곧 사마리아는 이스라엘로부터 소외를 당하고, 철저히 교제에서 배제 되었습니다. 그 결과 여로보암이 단과 벧엘에 금송아지 우상을 만들어 놓고 우리를 애굽에서 인도하여 낸 여호와 하나님이라고 하면서 섬기게 한 것입니다. 곧 자신의 정치적인 욕망을 위해 단과 벧엘에 성전을 지어놓고 북 이스라엘 백성들이 남 유다의 예루살렘의 성전에 가서 제사 지내지 못하도록 한 것입니다. 우리가 아모스서에서도 배웠지만 이와 같은 북 이스라엘의 죄악으로 인해 하나님의 심판을 받는 것입니다.

 

그러면 남쪽 유다의 예루살렘은 괜찮은 것입니까? 아닙니다. 그곳도 역시 우상을 숭배하는 산당이 되어버린 것입니다. 5b절에 보면 “유다의 산당이 무엇이뇨. 예루살렘이 아니뇨”라고 했습니다. 예루살렘이 이방 잡신을 섬기는 산당이 되어 버린 것입니다. 이런 이스라엘을 보시고 하나님께서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6-7절을 보면 “이러므로 내가 사마리아로 들의 무더기 같게 하고 포도 심을 동산 같게 하며, 또 그 돌들을 골짜기에 쏟아 내리고 그 지대를 드러내며, 그 새긴 우상을 다 파쇄하고 그 음행의 값을 다 불사르며, 그 목상을 다 훼파하리니. 그가 기생의 값으로 모았은즉 그것이 기생의 값으로 돌아가리라”고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심판하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사마리아를 어떻게 심판하시는 것입니까? 돌무더기로 만들어 버리신다고 하십니다. 그리고 새긴 우상을 다 부수어 버리고 기생의 값으로 모은 신상들이 약탈당하여 다른 나라의 기생의 값이 될 것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 선지자의 예언처럼 사마리아는 돌무더기가 되어 버렸습니다. 앗수르에 의하여 모든 금은들이 다 탈취당한 것입니다. 그러나 그 앗수르 마저 결국은 다 황폐케 됩니다.

 

이러한 심판의 소식을 들은 미가 선지자의 반응이 어떠합니까? 8절에 보면 “이러므로 내가 애통하며 애곡하고 벌거벗은 몸으로 행하며 들개 같이 애곡하고 타조 같이 애통하리니”라고 했습니다. 미가 선지자는 애통하며 벌거벗은 몸으로 행하며 들개같이 애곡하고 타조같이 애곡하는 것입니다. 들개와 타조의 울음소리를 들어 보셨습니까? 저는 직접 듣지는 못했습니다만 동물의 왕국을 통해서 들어 본적이 있습니다. 들개와 타조의 우는 모습의 특징은 처절한 울부짖음입니다. 오늘 우리는 이 선지서를 보면서 이러한 애통이 나옵니까? 우리가 사는 모습을 보면서 미가 선지자의 울부짖음이 나오는가 하는 것입니다. 사마리아의 멸망의 소식은 남의 이야기가 아니라 바로 예루살렘의 이야기가 되는 것입니다. 9절을 보면 “이는 그 상처는 고칠 수 없고 그것이 유다까지도 이르고 내 백성의 성문 곧 예루살렘에도 미쳤음이니라”고 했습니다. 통곡이 일어나는 것은 사마리아의 멸망의 소식이 남의 이야기가 아니라 바로 예루살렘의 이야기가 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 상처는 고칠 수 없이 되어서 유다까지 이르고, 예루살렘까지 미쳤다는 것입니다. 이 심판의 소식이 바로 오늘날 우리에게까지 미치는 것입니다.

 

10-15을 보면 “가드에 고하지 말며 도무지 호곡하지 말찌어다. 베들레아브라에서 티끌에 굴찌어다. 사빌 거민아 너는 벗은 몸에 수치를 무릅쓰고 나갈찌어다. 사아난 거민은 나오지 못하고 벧에셀이 애곡하여 너희로 의지할 곳이 없게 하리라. 마롯 거민이 근심 중에 복을 바라니 이는 재앙이 여호와께로 말미암아 예루살렘 성문에 임함이니라. 라기스 거민아 너는 준마에 병거를 메울찌어다. 라기스는 딸 시온의 죄의 근본이니 이는 이스라엘의 허물이 네게서 보였음이니라. 이러므로 너는 가드모레셋에 작별하는 예물을 줄찌어다. 악십의 집들이 이스라엘 열왕을 속이리라. 마레사 거민아 내가 장차 너를 얻을 자로 네게 임하게 하리니 이스라엘의 영광이 아둘람까지 이를 것이라”고 했습니다. 여기서 보면 유다의 심판 소식을 가드에 알리지 말라고 합니다. 이는 마치 다윗 왕이 사무엘하 1:20절에서 사울의 죽음을 가드에 알리지 말라고 한 것처럼 유다의 심판 소식을 가드에 알리지 말라고 합니다. 그리고 호곡하지 말라고 합니다. 왜냐하면 수치의 날이기 때문입니다. 여호와께서 임하시는데 그 날이 구원의 날이 아니라 심판의 날이 되어버린 것입니다.

 

이어서 나오는 성읍의 이름들은 성읍의 이름을 빗대어 심판을 말하고 있습니다. 베들레아브라는 먼지의 집이라는 뜻이므로 먼지에서 구를 것이라는 것입니다. 사빌은 아름다운이라는 뜻인데 벌거벗고 수치스럽게 될 것이라는 것입니다. 벧에셀은 가까이 있는 집인데도 방비하러 가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마롯은 근심 중에 복을 바라나 재앙이 임한다는 것입니다. 라기스는 그 지방에서 준마가 나오는데 심판에서 도망가기 위하여 말을 준비해 보라는 것입니다. 그 힘을 의지한 것이 죄의 근원이라는 것입니다. 가드모레셋은 예물로 앗수르 왕에게 주어질 것을 말합니다. 악십은 속임이라는 뜻인데 이스라엘의 열왕이 속임을 당하게 될 것이라는 것입니다. 마레사는 소유한다는 뜻인데 산헤립이 소유하게 될 것이라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의 영광이 아둘람까지 이를 것이라고 하는 것은 마치 다윗에 아둘람 굴로 사울을 피하여 도망가듯이 그렇게 피하여 갈 것을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16절을 보면 “너는 네 기뻐하는 자식으로 인하여 네 머리털을 깎아 대머리 같게 할찌어다. 네 머리로 크게 무여지게 하기를 독수리 같게 할찌어다. 이는 그들이 사로잡혀 너를 떠났음이니라”고 했습니다. 그들의 기쁨이었던 어린아이들조차 사로잡혀가게 된다는 것입니다. 이스라엘백성들이 슬픔을 표시할 때 머리를 풉니다. 그런데 슬픔이 지나쳐 아예 머리를 대머리같이 밀어버리는 것입니다. 이는 그들이 사로잡혀 갔기 때문입니다. 이 심판의 소식을 지금 우리에게 임한 것으로 받는 것이 선지자의 말을 듣는 것입니다. 선지자들의 소식은 이런 심판의 소식이 주종을 이룹니다. 우리가 기대하는 복을 주고 평안을 주고 하는 이야기들은 거의 없습니다. 다만 이러한 심판을 통과한 후에 하나님께서 은혜로 남기신 자들을 돌이켜 주신다고 하십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자기 언약을 이루시기 위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오늘날 우리가 이러한 성경의 말씀을 듣지 아니하면 자기가 섬기는 하나님이 이스라엘이 섬겼던 우상과 같은지도 모르고 속을 수가 있는 것입니다.

 

미가 선지자는 2절에서 “백성들아! 너희는 다 들을지어다. 땅과 거기 있는 모든 것들아! 자세히 들을지어다”라고 합니다. 그러면 이스라엘 백성들이 무엇을 들어야하는 것입니까? 3절에 보면 주께서 강림하신다는 것입니다. 그 강림은 구원의 소식이 아니라 심판의 소식이었습니다. 그렇다면 오늘날 우리가 과연 주님의 강림을 기다리고 있습니까? 주님이 강림하신다는 이 소식을 듣기를 좋아하고 있습니까? 주님이 임하시면 세상을 심판하십니다. 우리가 평소에 좋아하던 것들이 다 불태워질 것입니다. 베드로후서 3:1-13절을 보면 “사랑하는 자들아! 내가 이제 이 둘째 편지를 너희에게 쓰노니 이 둘로 너희 진실한 마음을 일깨워 생각하게 하여 곧 거룩한 선지자의 예언한 말씀과 주되신 구주께서 너희의 사도들로 말미암아 명하신 것을 기억하게 하려 하노라. 먼저 이것을 알찌니 말세에 기롱하는 자들이 와서 자기의 정욕을 좇아 행하며 기롱하여 가로되 주의 강림하신다는 약속이 어디 있느뇨. 조상들이 잔 후로부터 만물이 처음 창조할 때와 같이 그냥 있다 하니. 이는 하늘이 옛적부터 있는 것과 땅이 물에서 나와 물로 성립한 것도 하나님의 말씀으로 된 것을 저희가 부러 잊으려 함이로다. 이로 말미암아 그때 세상은 물의 넘침으로 멸망하였으되 이제 하늘과 땅은 그 동일한 말씀으로 불사르기 위하여 간수하신바 되어 경건치 아니한 사람들의 심판과 멸망의 날까지 보존하여 두신 것이니라. 사랑하는 자들아 주께는 하루가 천년 같고 천년이 하루 같은 이 한 가지를 잊지 말라. 주의 약속은 어떤 이의 더디다고 생각하는 것 같이 더딘 것이 아니라 오직 너희를 대하여 오래 참으사 아무도 멸망치 않고 다 회개하기에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 그러나 주의 날이 도적 같이 오리니 그 날에는 하늘이 큰 소리로 떠나가고 체질이 뜨거운 불에 풀어지고 땅과 그 중에 있는 모든 일이 드러나리로다. 이 모든 것이 이렇게 풀어지리니 너희가 어떠한 사람이 되어야 마땅하뇨. 거룩한 행실과 경건함으로 하나님의 날이 임하기를 바라보고 간절히 사모하라. 그 날에 하늘이 불에 타서 풀어지고 체질이 뜨거운 불에 녹아지려니와 우리는 그의 약속대로 의의 거하는바 새 하늘과 새 땅을 바라보도다”고 했습니다. 하나님의 날이 임하기를 바라보고 간절히 사모하라고 합니다. 그 날에 하늘이 불에 타서 풀어지고 체질이 뜨거운 불에 녹아진다고 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의 약속대로 의의 거하는바 새 하늘과 새 땅을 바라본다고 합니다. 주님의 재림으로 이루어질 새 하늘과 새 땅! 이것이 우리의 진정한 소망입니다. 성령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은혜를 주셔서 우리로 하나님의 말씀을 듣게 하여 주시기를 원합니다. 그리하여 하나님의 약속에 거하며, 새 하늘과 새 땅을 소망하며, 주님의 다시 오심을 사모하는 삶을 살게 하여 주시기를 원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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