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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 최상범
성경본문 히 11:32-40
성경본문내용 (32)내가 무슨 말을 더 하리요 기드온, 바락, 삼손, 입다와 다윗과 사무엘과 및 선지자들의 일을 말하려면 내게 시간이 부족하리로다(33)저희가 믿음으로 나라들을 이기기도 하며 의를 행하기도 하며 약속을 받기도 하며 사자들의 입을 막기도 하며(34)불의 세력을 멸하기도 하며 칼날을 피하기도 하며 연약한 가운데서 강하게 되기도 하며 전쟁에 용맹되어 이방 사람들의 진을 물리치기도 하며(35)여자들은 자기의 죽은 자를 부활로 받기도 하며 또 어떤 이들은 더 좋은 부활을 얻고자 하여 악형을 받되 구차히 면하지 아니하였으며(36)또 어떤 이들은 희롱과 채찍질 뿐 아니라 결박과 옥에 갇히는 시험도 받았으며(37)돌로 치는 것과 톱으로 켜는 것과 시험과 칼에 죽는 것을 당하고 양과 염소의 가죽을 입고 유리하여 궁핍과 환난과 학대를 받았으니(38)(이런 사람은 세상이 감당치 못하도다) 저희가 광야와 산중과 암혈과 토굴에 유리하였느니라(39)이 사람들이 다 믿음으로 말미암아 증거를 받았으나 약속을 받지 못하였으니(40)이는 하나님이 우리를 위하여 더 좋은 것을 예비하셨은즉 우리가 아니면 저희로 온전함을 이루지 못하게 하려 하심이니라
강설날짜 2013-01-27

2013년 1월 27일 한결교회 주일예배강설
히브리서 제33강

 

마지막 주자

 

말씀 : 히 11:32-40

 

(32)내가 무슨 말을 더 하리요 기드온, 바락, 삼손, 입다와 다윗과 사무엘과 및 선지자들의 일을 말하려면 내게 시간이 부족하리로다

 

32절은 여섯 명의 믿음의 선진들을 한꺼번에 열거하면서 그것을 끝으로 더 이상 믿음의 영웅들의 기사를 계속 언급할 수 없음을 말합니다. 구름과 같이 허다한 증인들이 있는데, 그 믿음의 증인들을 일일이 다 언급하려면 한도 끝도 없기 때문입니다. 다만 이제까지 믿음의 영웅들의 모습을 열거하는 것으로 믿음이 무엇인지 충분히 드러냈다고 히브리서 저자는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마지막으로 열거된 여섯 명의 인물 중 기드온, 바락, 삼손, 입다 이 4명은 우리가 사사기에서 배웠던 것처럼, 사실은 여러 가지로 허물과 실수가 많은 자들입니다. 그럼에도 하나님은 그들을 부르시고 믿음을 연단하시고 자라게 하셔서 이스라엘을 대적의 손에서 구원하시는데 귀하게 사용하셨습니다. 믿음의 영웅은 태어나는 것이 아니라 만들어지는 것입니다. 그리고 다윗과 사무엘도 그런 점에서 마찬가지인데, 특별히 다윗과 사무엘은 믿음의 영웅이라는 칭호가 가장 잘 어울리는, 어떻게 보면 가장 이상에 가까운 믿음의 모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어쨌든 이 마지막으로 언급된 여섯 명의 공통점은 어떤 위기의 상황, 또는 대적이 월등한 군사력으로 쳐들어오는 상황에서 믿음으로 도전하여 하나님의 초자연적인 역사로 말미암아 승리를 이루었다는 것입니다. 기드온은 믿음으로 32,000명을 300명으로 줄이라는 명령에 순종했고, 300명으로 12만5천명의 미디안 대군을 파하였습니다. 바락은 처음에는 드보라가 함께 가지 않으면 전쟁에 나아가지 않겠다고 함으로써 여자를 의지하는 겁쟁이로 나오지만, 결국 결정적인 순간에 철병거 900승을 두려워아니하고 믿음으로 진격하여 승리를 얻었습니다. 입다는 협상의 귀재이지만, 하나님과 협상을 벌이다가 그만 자기 딸을 하나님께 번제로 바쳐야 했던 인물입니다. 그런 연약한 믿음의 소유자이지만, 그러나 그도 믿음으로 전쟁에 나아감으로써 이스라엘을 이방의 압제에서 구원하였던 것입니다. 삼손은 하나님께 바쳐진 나실인으로서 사사 중에서 가장 형편없는 사사이지만, 마지막 죽을 때에 믿음으로 자기 자신을 하나님께 드려 신전을 무너뜨림으로써 수많은 블레셋 사람들을 죽였습니다. 그리고 다윗과 사무엘도 마찬가지로 믿음으로 수많은 전쟁에서 승리하여 이스라엘을 대적의 손에서 구원하였습니다.


이렇게 믿음의 영웅들은 하나같이 하나님의 약속을 믿고 믿음으로 도전하여서 모든 불가능한 상황을 극복하고 구원의 역사를 이루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33절부터는 앞에서 언급된 모든 믿음의 영웅들과 더불어 언급되지 아니한 무명의 믿음의 영웅들까지 다 포함하여 그들이 믿음으로 어떤 일들을 행하였는지 종합적으로 열거합니다.

 

(33)저희가 믿음으로 나라들을 이기기도 하며 의를 행하기도 하며 약속을 받기도 하며 사자들의 입을 막기도 하며(34)불의 세력을 멸하기도 하며 칼날을 피하기도 하며 연약한 가운데서 강하게 되기도 하며 전쟁에 용맹되어 이방 사람들의 진을 물리치기도 하며

 

여기서 가장 중요한 단어는 “약속을 받기도 하며”라는 단어입니다. 구약의 믿음의 인물들은 약속의 성취를 받았습니다. 하나님이 불가능한 일을 약속하시고 명하실 때, 그들은 믿음으로 순종하였고, 그리고 그 믿음대로 그들은 불가능한 일을 극복하고 구원을 이루었습니다. 그것을 “약속을 받았다”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 구체적인 예들이 바로 “나라들을 이기기도 하고, 의를 행하기도 하고, 사자들의 입을 막기도 하고...” 등등 인 것입니다. 특별히 사자들의 입을 막은 이야기는 다니엘을 떠올리게 합니다. 그리고 34절에 “불의 세력을 멸하기도 하며”라는 문구는 다니엘의 세 친구인 사드락, 메삭, 아벳느고가 불타는 용광로에 떨어졌어도 살았던 사건을 말하는 것 같습니다. “칼날을 피하기도 하며”라는 문구는 아마도 다윗이 사울이 던진 창을 두 번이나 피한 것을 말할 것입니다. 그리고 “연약한 가운데서 강하게 되기도 하며”라는 말은 정확하게 누구를 염두에 둔 것인지 알 수 없으나, 아마도 삼손이 머리가 잘려 연약하게 되었으나, 다시 믿음으로 강하게 되었던 것을 말하는 것 같습니다. “전쟁에 용맹되어 이방 사람들의 진을 물리친 것”도 구약의 수많은 믿음의 영웅들이 이룬 구원의 역사를 떠올리게 합니다. 그리고 이어서 35절은 이렇게 말씀합니다.

 

(35)여자들은 자기의 죽은 자를 부활로 받기도 하며 또 어떤 이들은 더 좋은 부활을 얻고자 하여 악형을 받되 구차히 면하지 아니하였으며

 

35절은 특별한 구절입니다. 오늘 본문의 핵심 포인트가 여기에 있습니다. 35절 앞부분은 약속의 성취를 받은 경우의 마지막 예로서 여자들이 자기의 죽은 자를 부활로 받았다는 것입니다. 엘리야가 시돈의 사렙다 과부의 죽은 아들을 살려내고, 엘리사는 수넴 여인의 아들을 살려냈습니다. 여자들은 믿음으로 이 부활의 성취를 받았습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갑자기 접속사가 나오면서 문장이 끊어지고 중대한 전환이 이루어진다는 것입니다. 35절 후반부는 “더 좋은 부활을 얻기 위해 악형을 구차히 면하지 아니했다”고 하고 있습니다. 여기에 포인트가 있습니다. 이때까지는 믿음으로 이 세상에서의 어떤 중대한 위기 상황이나, 불가능한 상황을 극복하고, 그 어려움에서 구원을 받는 그런 믿음의 혜택을 누리는데 초점이 있다면, 지금부터는 다른 이야기입니다. 믿음으로 살았지만, 이 세상에서는 고난을 당한 사람들을 이야기 합니다. 이 사람들은 약속의 성취를 못 받은 것이 아니라, 더 나은 약속의 성취를 받기 위해 이 세상에서 고난 받는 삶을 선택한 것입니다. 사실 이 내용이 수신자들과 우리 신약의 성도들에게 의미가 있습니다.


히브리서 저자가 앞의 예를 들면서, “구약에서 믿음으로 행했더니 불가능한 역사를 이루고, 험한 꼴 보지 않았으며, 혜택들을 누렸다. 그러므로 오늘날에도 믿음으로 살면 우리도 그럴 수 있다.”라고 하는 것을 말하고자 한 것이 아닙니다. 앞의 예를 통해서는 보이지 않는 미래의 일을 보는 것 같이 하여 믿음으로 살았을 때, 하나님이 그들을 편드시고 책임져주셨다는 것을 말하고자 한 것입니다. 그리고 35절 후반부부터는 실질적으로 신약을 사는 수신자들에게 하고자 하는 말이 나오는데, 그것은 하나님이 그렇게 믿음으로 산자들을 책임져주시고 반드시 상 주실 것이므로 이 땅에서의 고난을 두려워하지 말고 회피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주시는 상은 이 땅의 것이 아니라, 하늘의 더 좋은 것들입니다.


그래서 구약에서 믿음으로 그러한 어려운 문제와 인생문제를 해결함 받은 것을 가지고서 우리도 그럴 수 있다 라고 하면서 곧바로 적용하는 것은 곤란합니다. 구약교회에는 상당히 물리적이고 육체적인 것들을 약속하시고 그것으로 상주셨습니다. 구약 어디에 믿음으로 살면 영생을 주신다거나, 혹은 영원한 하나님 나라의 기업을 주실 것이라고 약속한 적이 있었습니까? 다 이 세상의 가나안 땅을 약속하셨고, 가나안 땅에서의 물리적 풍요와 번영을 약속하셨던 것입니다. 그것은 칼빈이 말했듯이 신약의 영적인 풍요를 미리 손가락질하여 가리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구약의 사람들이 믿음으로 살았을 때 불가능을 극복했고 험한 꼴 보지 않았으며 풍요와 번영을 누렸던 것을 가지고서 우리도 믿음으로 살면 그렇게 된다고 적용하는 것은 성경은 심각하게 곡해하는 것입니다.


물론 오늘날에도 하나님이 우리의 문제들과 어려움들을 기적적으로 해결해주실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러한 기적의 역사들은 구약의 경우와는 상당히 다른 차원의 것입니다. 그것은 하나님이 약속하신 상급이 아니라, 주와 복음을 위해 보다 더 헌신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 베풀어주신 은혜입니다. 그래서 신약에서도 헤롯 아그립바 1세가 요한의 형제 야고보를 칼로 죽였고, 유대인들이 이를 기뻐하자, 베드로까지 죽이려고 잡아 옥에 가두었는데, 하나님이 기적을 베풀어주셔서 베드로로 하여금 탈옥하게 하셔서 그 칼날을 피할 수 있게 하셨습니다. 그렇게 하신 것은 아직 베드로가 교회를 위해 할 일이 남아있기 때문입니다. 믿음으로 험한 꼴 안보고, 문제 해결해서 이 땅에서 잘 먹고 잘살도록 하기 위해서 그렇게 하신 것이 아니라, 베드로는 이미 십자가에 죽기로 정해져 있는 상태이고, 그 정해진 때가 임하지 않았기 때문에, 그리고 그때까지는 해야 할 일이 있기 때문에 건져주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신약시대에서 믿음으로 산다는 것은 원수와 대적들이 칼로 교회를 박해하고 위협할 때, 구약처럼 그들과 전쟁하고 맞서 싸워서 승리하는 것이 아니라, 도리어 그 박해를 당하면서 믿음의 정절을 잃어버리지 않고, 견디는 것이 바로 믿음으로 사는 것입니다. 구약하고는 조금 다릅니다. 왜냐하면 신약시대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약속하신 상급은 이 땅의 것이 아니라, 하늘에 있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신약의 백성들은 그러한 하늘의 더 좋은 소망으로 말미암아 이 땅에서 고난을 구차히 면하지 아니하는 삶을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러한 더 좋은 소망을 위해 고난 받은 예가 이미 구약에서부터 있었습니다. 지금 히브리서 저자가 이 35절 후반부부터 묘사하는 사람들은 첫 순교자 아벨에서부터 신약시대 초기에 있었던(이 서신이 쓰인 당시) 박해까지 생각하면서 이 묘사를 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더 좋은 부활을 소망하면서 악형을 구차히 면하지 아니하였습니다. 여기서 “악형”은 “튐파논”이라는 단어인데, “몸을 비틀어 죽이는 고문대, 사람의 배를 때려 창자가 터져 죽음에 이르게 하는 말뚝 또는 몽둥이”를 의미합니다. 실제로 주전 160년경에 시리아의 왕 안티오쿠스 에피파네스가 예루살렘 성전에서 우상숭배하고, 백성들에게 우상을 강요했을 때, 많은 경건한 유대인들이 거부하면서 이 고문으로 순교 당했습니다. 아마도 히브리서 저자는 이것을 생각하면서 지금 이 말을 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하나님을 경외한 경건한 유대인들은 그러한 끔찍한 고문도 구차히 면하지 아니했습니다. 이 “구차히 면하지 아니했다”라는 말을 원어로 보면 “값을 주면 벗어날 수 있는데, 그 기회를 거부했다”는 말입니다. 즉 고문을 당했던 사람들은 믿음을 포기하는 대가로 자유를 얻을 수 있었으나, 그 기회를 단호히 거부했다는 것입니다. 어떻게 그렇게 할 수 있었습니까? 그것은 더 좋은 부활을 소망하였기 때문입니다. 36절을 보십시오.

 

(36)또 어떤 이들은 희롱과 채찍질 뿐 아니라 결박과 옥에 갇히는 시험도 받았으며

 

아마도 많은 믿음의 선진들이 이러한 고난을 받았지만, 특별히 예레미야가 떠오릅니다. 예레미야는 온 백성들로부터 조롱과 멸시를 당했고, 채찍질도 받았고, 옥에 갇히기도 했습니다. 그리고 37절에...

 

(37)돌로 치는 것과 톱으로 켜는 것과 시험과 칼에 죽는 것을 당하고 양과 염소의 가죽을 입고 유리하여 궁핍과 환난과 학대를 받았으니

 

많은 구약의 믿음의 영웅들, 선지자들이 돌로 쳐 죽임을 당했습니다. 그 중에서 특별히 요아스 왕에 의해 죽임당한 스가랴가 떠오릅니다. 요아스는 초기에는 매우 하나님을 경외한 사람이었습니다. 제사장이 발견한 율법책을 읽고 회개하여서 이스라엘 가운데 종교개혁을 일으켰던 선한 왕이었습니다. 그러나 이 요아스가 제사장이 죽고 난 다음에는 하나님의 뜻대로 나아가지 아니하고 이상한 데로 나아갔습니다. 그래서 제사장이 죽은 다음에, 그 아들 스가랴에게 하나님의 성령이 임해서 스가랴가 왕과 백성들을 향해서 “너희가 화를 자초하는 도다. 하나님이 너희를 버리실 것이다.”라고 외쳤는데, 그때 격분한 유대사람들이 이 스가랴를 돌로 쳐서 죽입니다. 성경 본문에는 왕이 사람들을 뒤에서 조종해서 그들로 스가랴를 죽이게끔 하였다고 나옵니다. 그 왕이 바로 요아스 왕입니다.


그리고 “톱을 켜는 것”에 대해서 우리는 잘 알지 못합니다. 유대인의 전설에 의하면 이사야가 그렇게 순교당했다고 합니다. 물론 성경에 없는 이야기이기 때문에 확신할 수는 없습니다.


그리고 “칼에 죽었다” 라고 하고 있습니다. 앞에서는 믿음으로 칼날을 피했는데, 여기서는 믿음으로 칼에 죽임을 당합니다. 실제로 이세벨이 진노했을 때, 엘리야는 칼을 피해서 살았지만, 다른 선지자들은 칼날에 의해 다 죽었습니다.


그리고 “양과 염소의 가죽을 입고 유리하면서 궁핍과 환난과 학대를 받았다”는 것은 구약의 선지자들의 삶을 묘사한 것입니다. 엘리야 선지자는 털이 많은 사람이었고, 그를 따른 선지자들도 다 거친 털옷을 입고 다녔습니다. 그 거친 털옷을 양과 염소의 가죽을 입었다고 표현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구약의 선지자들은 늘 궁핍한 가운데 있었고, 왕과 백성들로부터 환난과 학대를 받으며 유리하는 삶을 살았습니다. 그들은 시편기자와 같이 이렇게 고백할 수밖에 없었을 것입니다. “우리가 종일 주를 위하여 죽임을 당케 되며 도살할 양같이 여김을 받았나이다.”(시 44:22)

 

(38)(이런 사람은 세상이 감당치 못하도다) 저희가 광야와 산중과 암혈과 토굴에 유리하였느니라

 

요약하기를 이런 사람들은 세상이 감당치 못하는 사람들이다 라고 합니다. 이 말은 매우 어려운 말입니다. 여기서 “감당하다”라는 단어는 원어로 보면, “가치 있다, 알맞다, 합당하다”라는 뜻입니다. 번역이 어려운데, 크게 두 가지로 번역됩니다. 먼저 “이런 믿음의 영웅들은 이 세상에 별 가치를 두지 않았다”고 해석하는 것 한 가지이고, 그리고 두 번째 해석은 “세상이 이런 믿음의 영웅들과 공존하는 것을 합당치 않게 생각했다”라고 보는 것입니다. 세상 사람들의 입장에서 이러한 믿음의 영웅들은 광신자요 미치광이이며, 세상과 어울리지 않는 사람들입니다. 한글 번역처럼 세상이 받아들일 수 없는, 감당이 안 되는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세상은 이런 사람들은 죽이든지, 아니면 사회 공동체에서 내쫓아서 광야와 산과 동굴과 땅굴을 헤매도록 했습니다.


어느 번역이 옳든지 분명한 사실은 세상과 교회는 가치관이 완전히 정반대이기 때문에, 서로 융합될 수 없고, 세상은 교회를 박해하려는 경향을 늘 가지고 있고, 교회는 늘 세상 사람들로부터 박해를 받고 따돌림을 받을 수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교회도 이 세상에 소망을 두지 않기 때문에, 그들 사회에 동조하기 위해서 신앙을 포기한다든지 하는 일이 없습니다.


그래서 구약의 교회에서부터 신약을 사는 오늘날 우리에게 이르기까지 교회의 역사는 언제나 핍박과 박해의 역사였습니다. 언제나 경건한 신자들은 복음 안에서 고난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지금도 이러한 박해와 고난 가운데 있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멀리 있지 않고, 우리 바로 위에 있는 북한의 성도들이 극심한 핍박과 박해를 지금도 당하고 있습니다. 북한에서는 예수님을 믿는 것이 범죄의 행위인데, 왜냐하면 김일성, 김정일, 김정은을 신처럼 받들고 있기 때문입니다. 북한은 기독교 교리에다 하나님 자리에 김일성을 넣어서 사상교육을 합니다. 김일성이 전능하신 하나님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기독교 신앙을 갖는다는 것은 곧 김일성의 신성을 거부하는 것이고, 그것은 곧 북한 정권에 대해 반기를 드는 것이 되기 때문에, 기독교 신자임이 발각되면, 적당히 감옥 가는 정도가 아니라, 정치 수용소에 끌려가는 것입니다. 갈 때 혼자만 가는 것이 아니라, 온 가족이 같이 갑니다.


정치수용소는 북한 전역에 10개 정도가 있고, 현재 약 20만명 정도가 복역하고 있는데, 큰 도시 전체를 사방으로 철조망으로 막아 거기에 가두어서, 평생 거기서 강제노역 시키면서 살다 죽게 하는 곳입니다.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교도소 같은 감옥이라기보다는 하나의 울타리가 쳐져 있는 도시이고 마을입니다. 거기에는 학교도 있고, 병원도 있고, 자기 집도 있고 가게도 있습니다. 거기서 결혼도 하고 자식도 낳고 삽니다. 다만 거기서 평생 강제노역하면서 통제 하에서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거기에는 반동분자들, 정치권력 싸움에 밀린 사람들, 그리고 기독교인들이 와서 평생 복역하고 있습니다.


거기서 탈주한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한 일입니다. 탈주 방지를 위해 철저히 감시하고 있으며, 외곽 경계선에는 3-4m높이의 4-6중 철책 울타리가 설치되어 있습니다. 탈주가 용이한 곳에는 전기 철조망, 지뢰밭, 함정들을 설치해놓았고 탈주하다 발각되면 경비원들에 의해서 무차별 사살됩니다. 살아서 체포되면, 유격대 훈련장에 산채로 군인들의 살인훈련용으로 제공됩니다. 수용자들은 새벽5시에 일어나 저녁 8시까지 강제노역을 한 후 사상교육을 받고 인원점검 후에 10시쯤에 잠을 잡니다. 그리고 식량으로는 강냉이와 감자, 밀, 보리 등을 수용소 내에서 재배해서 그것으로 먹게 하는데, 그 양이 너무 작아 하루 한 끼도 먹기 힘듭니다. 북한 일반 주민들도 3끼를 먹지 못하는 상황에서 수용소 사람들이 3끼를 다 먹는다는 것은 불가능한 것입니다. 때문에 수용소 주변에서 나는 나물과 풀뿌리를 캐먹고 심지어 소똥 속의 옥수수 알이나 콩 같은 것으로 배를 채우다가 경비원에 걸려서 맞아 죽는 경우도 있습니다. 주로 배급받는 식량은 옥수수뿐입니다. 옥수수만 먹으면, 어떤 영양소 결핍으로 인해서 몸이 빨갛게 부어오르고, 폐렴이나 급성 질환에 걸리기 쉽습니다. 그들이 유일하게 몸을 보양할 수 있는 음식은 들쥐나 뱀인데, 불을 피울 수 없는 상황이고 몰래 먹어야 하는 상황이기 때문에 생식을 합니다. 그래서 회충으로 죽는 사람도 많습니다. 쥐도 귀한 형편이어서, 어떤 수용소 내에서는 쥐가 거의 멸종되었다고 합니다. 그들은 우리가 상상도 못할 비참한 처지에 있고, 짐승만도 못한 대접을 받으면서 비참하게 살아가고 있습니다. 대부분 5-6년을 견디지 못하고 죽는데, 죽는 이유의 제일 많은 것이 영양실조입니다. 대부분의 수감자들이 심각한 영양실조에 걸려있기 때문에 약간의 설사증상만 있어도 곧바로 사망합니다. 그리고 육신이 매우 연약한 상태에 있기 때문에 조금만 맞거나 고문을 당해도 그 자리에서 죽게 됩니다. 공포감을 조성하기 위해 한해에도 수십 명이 공개적으로 총살당하고, 고문당해서 죽습니다. 이 지옥 같은 생활에서 대부분 수감자들은 자살을 생각하는데, 경비원들은 그들이 자살하지 못하도록 하기 위해 늘 3명씩 짝을 지워 다니도록 해서 서로 감시하게 하고, 자주 옷을 발가벗기고 옷의 단추와 고무줄, 철제품을 모두 제거하고 허리띠까지도 회수합니다. 그리고 심하게 구타해서 자살조차 생각하지 못하게 만듭니다.


그런데 그러한 수용소에서 가장 심한 고문과 박해의 대상은 기독교인들입니다. 고문하고 박해할 때, 다른 정치수감자들은 고통을 모면하기 위해 고분고분하게 말을 듣고, 자기가 잘못했다고 빕니다. 그러나 유독 기독교인들은 자신의 뜻을 굽히지 않는 것입니다. 수용소에서 극적으로 탈출하고, 탈북해서 한국에 온 어떤 사람이 간증에 의하면 수용소 내에서의 기독교인에 대한 박해가 매우 심하다고 합니다.


예를 들어 수용소 내에는 많은 임산부가 있는데 유독 기독교인 임산부의 아기는, 그 부모가 기독교인이라는 이유만으로 죽임을 당했다고 합니다. 독물주사로 낙태시킬 때도 있고, 때로는 태어난 아기를 산모가 보는 앞에서 죽이는 경우도 있다고 합니다. 그리고 기독교인들은 하늘을 보며 기도하거나 묵상하면 안 된다는 이유로 언제나 무릎을 꿇고 쪼그리고 앉아야 했고, 벽을 등지고, 땅바닥만 쳐다보게 했습니다. 그들에게는 음식도 거의 주지 않았고 더러운 물을 먹게 했습니다. 또 그들은 하루에 다른 사람들에 비해 더 많은 시간 동안 더 힘든 노동을 해야 했으며, 그들의 몸은 뻘겋게 붓고 만신창이가 되었지만, 수백 명의 기독교인들은 여전히 예수님을 믿으며 살고 있다는 것입니다.


특히 그 탈북자는 간증하면서 기독교인들이 고문당하는 장면을 자신은 평생 잊을 수 없다고 말했습니다. 경비원들은 자주 기독교인을 고문했는데, 기독교인들은 목숨이 다하는 마지막 순간에도 서로의 손을 굳게 잡고 기쁨으로 찬송을 불렀다는 것입니다. 어떻게 그런 끔찍한 상황에서 기쁨의 찬송을 부를 수가 있는지 그 간증한 사람은 이해할 수 없었던 것입니다. 간수들이 찬송소리를 듣고 달려와서 그들의 얼굴을 곤봉으로 때리고 발로 차면서 기독교인들의 믿음을 꺾으려고 했으나, 그들은 고난 속에서도 주님을 부인하지 않았고 하나님을 굳게 믿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사람이 처음에는 기독교인들이 정신이상자라고 생각했는데, 그런 모습을 보면서 충격을 받은 것입니다. 그래서 탈북하고 한국에 와서 지금은 교회를 나오고 신앙인이 되었습니다.


이것이 먼 나라의 이야기이거나, 과거 수천 년 전의 이야기도 아니고, 설교하고 있는 지금도 우리나라 바로 위에 있는 북한의 성도들에게서 벌어지고 있는 참상입니다. 약 5만명 가량이 수용소에서 말로 다할 수 없는 고난과 박해를 당하고 있고, 그러한 박해의 고난 가운데서도 20-30만명 가량이 북한의 지하교회에서 신앙생활하고 있습니다. 오히려 성령의 능력과 위로 가운데 그 수가 점차로 많아지고 있습니다. 그들이 그러한 비참한 고난 속에서도 절망하지 않고, 기쁨의 찬송을 부르며 죽을 수 있는 이유는 바로 더 좋은 부활을 소망하였기 때문입니다. 그것이 살아있는 신앙입니다. 북한의 교회는 살아있고, 성령충만하며, 하늘을 소망하며, 더 좋은 부활을 얻고자 악형을 구차히 면하지 아니하는 삶을 살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사람들을 구원하셔서 이 세상에 나타내려고 하시는 믿음의 모습이 바로 이것입니다. 세상이 감당치 못할 사람들입니다.


반면에 우리 한국교회는 이렇게 평안하고 먹을 것 걱정 없이 단정하고 평안하게 신앙생활 할 수 있는 대도, 물론 교회도 많고 성도 수도 많지만, 그러나 대부분이 영적인 잠에 빠져서 이 세상을 소망하며 살고 있고, 경건의 능력을 잃어버리고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것이 한국교회의 모습이요, 또한 우리의 모습입니다.


그래서 교회는 고난이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뱀의 후손을 살려두신 이유가 분명합니다. 뱀의 후손을 통한 고난이 없으면, 여자의 후손들은 하나님을 찾지 않는 것입니다. 신앙이 자라지 않습니다. 하나의 진주가 탄생하기까지 조개는 많은 고통을 감내해야 하는데, 그래서 로마인들은 진주를 조개의 눈물이라고 말했습니다. 마찬가지로 고난 속에서 교회는 빛이 나고, 그 믿음은 순전한 믿음이 됩니다. 그러나 배부르고 등 따시면 교회는 언제나 세상과 결탁하여 타락합니다. 이것이 교회사의 반복되는 교훈입니다.


우리가 북한을 위해서 기도해야 합니다. 북한의 교회를 위해서 우리가 정말 기도해야 합니다. 그들에게 하루속히 자유를 허락해주셔서 자유롭게 예수그리스도를 믿고, 전하는 날이 속히 오게 해달라고, 북한 정권을 무너뜨려 달라고 기도해야 합니다. 그리고 북한의 이 믿음의 모습, 순교의 열전을 보고, 그 믿음 앞에서 우리 자신을 돌아보고, 우리의 안일함과 나태함을 회개하고, 우리도 그들처럼 깨어 신앙의 길을 전진해 나가야 합니다.


그들과 우리가 처한 상황은 달라도 신앙의 본질은 동일합니다. “그들은 그러한 핍박과 순교와 박해가 있기 때문에 신앙 생활하는 것이 어렵고, 우리는 그런 박해가 없으므로 신앙생활이 쉽다...” 그럴 수 없습니다. 예수님은 단 한 번도 신앙생활 하는 것이 쉽다고 말씀하신 적이 없습니다. 겉으로 드러난 양상은 다르지만, 결국 신앙생활이란 자기 목숨 걸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 지고, 주님 가신 고난의 길을 따라가는 것입니다. 그들은 창과 칼의 위협 앞에서 신앙의 정절을 지켰지만, 우리는 돈과 쾌락의 유혹 앞에서 신앙의 정절을 지켜야 합니다. 그리고 둘 다 자기 목숨을 미워하면서 “죽으면 죽으리라”는 일사각오의 신앙으로만 이길 수 있습니다. 우리가 참으로 깨어 기도하여서 날마다 순교의 정신으로 돈과 쾌락의 유혹을 거부하고, 신앙의 정절을 지키며 사는, 그리하여 세상이 감당치 못할 사람들이 다 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39-40절은 11장 전체의 결론입니다. 아벨서부터 해서 구약의 선지자들과 수많은 무명의 인물들까지 포함하여 최종결론을 내립니다. 그들은 바라는 것들을 실상으로 소유하고, 보이지 않는 미래의 일을 사실 확인하여 보는 믿음으로 살았던 자들입니다. 그들은 이 땅에서 나그네로 살았고, 때로는 그 믿음을 위해 박해와 순교를 당하기도 하였습니다. 이러한 믿음의 열전, 순교의 열전을 보면서 우리는 우리 자신이 그들에 비해 얼마나 부끄럽고 연약한지를 보게 됩니다. 우리에게도 그들처럼 고난과 박해 앞에서도 두려워 아니하고 당당히 맞서는 믿음이 있습니까? 참으로 우리 자신이 부끄러울 수밖에 없습니다. 신실했던 구약의 믿음의 영웅들 이야기 앞에서 우리들은 한없이 작아지는 것을 느껴지게 됩니다. 그런데 성경본문과 그 배후에 있는 하나님의 평가는 그렇지 않다고 하는 것이 우리를 놀라게 합니다.

 

(39)이 사람들이 다 믿음으로 말미암아 증거를 받았으나 약속을 받지 못하였으니(40)이는 하나님이 우리를 위하여 더 좋은 것을 예비하셨은즉 우리가 아니면 저희로 온전함을 이루지 못하게 하려 하심이니라

 

이 사람들은 “증거를 받았습니다.” 믿음이 있는 사람이라고 하는 증거를 받았습니다. 그러나 약속은 받지 못하였습니다. 한국말이 조금 어려운데, 그들이 약속의 성취를 못받았다는 말입니다. 즉 약속은 받았지만, 그 약속이 이루어지는 것은 보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왜 이 사람들의 삶 가운데 약속이 성취되지 못했습니까? 그것은 아직 그리스도가 임하지 아니하셨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그들에게 약속하신 것들의 본질은 결국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그것은 옛 경륜이 아닌 새 언약 아래서만 성취될 약속입니다. 그러므로 그들은 다만 믿음으로 멀리서 보며 환영했을 뿐, 약속의 성취를 받지 못한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그들보다 더 좋은 것을 예비하셨습니다. 여기서 “예비하셨다”라는 단어는 두 가지로 해석됩니다. “(이미) 제공하다”라는 뜻과 더불어, “준비하다, 예비하다”라는 뜻도 있습니다. 그리고 이 두 가지 뜻 모두가 이 구절에서 의미가 있습니다. 즉 이 구절은 두 가지 차원에서 해석됩니다. 먼저 우리는 그들보다 더 좋은 것을 (이미) 제공받았습니다. 우리는 그 믿음의 영웅들이 보고자하여도 보지 못하고 듣고자 하여도 듣지 못한 예수 그리스도를 보고 듣고 소유한 백성들입니다. 우리들은 이미 더 좋은 시대, 곧 약속의 성취의 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우리를 위해 더 좋은 것을 또한 예비하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사역으로 말미암아 ‘이미’ 이루어진 것도 있지만, ‘아직 아니’의 측면도 있습니다. 주님의 재림과 부활과 하나님 나라가 극치에 이르는 것은 아직 이루어지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위해 이런 좋은 것들을 예비하셨습니다.


그래서 더 놀라운 말은 “우리가 아니면 저희로 온전함을 이루지 못하게 하려 하심이니라”라고 하신 것입니다. 이것은 우리가 상상하지 못했던 하나님의 평가입니다. 우리가 아니면, 저희, 곧 구약의 믿음의 사람들이 온전하게 되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무슨 말입니까?


이것은 400m 계주를 생각하면 됩니다. 마지막 주자가 바로 우리입니다. 100m씩 뛰는데, 앞에 3명이 다 잘했습니다. 구약의 믿음의 영웅들이 다 이겨 나아갔습니다. 이제 맨 마지막 주자인 우리가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서 이것을 이기느냐 마느냐가 결정됩니다. 앞에 3사람이 다 잘했다 하더라도 맨 마지막 주자인 우리가 잘 못하면, 우리는 이 게임에서 지는 것입니다. 바로 “우리가 아니면 저희로 온전함을 이루지 못하게 하려 하심이니라”라는 말씀은 이런 상황을 말하는 것입니다.


특히 우리는 맨 마지막 주자로서 그들보다 더 높은 위치에 있고 더 큰 책임을 지고 있습니다. 작년 영국 올림픽 때, 400m 계주에서 자메이카가 세계신기록으로 금 매달을 목에 걸었는데, 맨 마지막에 뛴 선수가 누구였습니까? 아무도 모르는 사람이 없을 것입니다. 바로 우사인 볼트입니다. 계주에 있어서 불문율은 바로 가장 승부욕이 강하고 가장 잘 뛰는 선수를 마지막에 배치하는 것입니다. 왜일까요? 그것은 마지막에 지고 있더라도 제일 잘 뛰는 선수가 그 상황을 역전시킬 수도 있고, 또 이기고 있으면, 그 격차를 더 벌일 수 있기 때문입니다.


마찬가지로 마지막 주자인 우리에 대해서 하나님은 더 높은 평가를 내리시고, 더 많은 것을 기대하시며, 우리에게 가장 책임이 무거운 자리를 주셨습니다. 그리고 우리를 그만한 책임을 감당할 수 있는 자들로 생각하셨습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세례요한에게 하신 말씀을 다 기억하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세례요한을 굉장히 높아주셨는데, “여자가 낳은 자 중에 저보다 큰 자가 없느니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세례요한은 정말 그런 사람입니다. 그러나 천국에서는 지극히 작은 자라도 저보다 큽니다. 신약의 사는 이 성도들은 세례요한보다 큽니다. 왜요? 우리가 구약의 백성들보다 나은 사람이고, 훌륭한 사람들이기 때문에 그렇습니까? 아닙니다. 우리나 구약백성들이나 다 똑같은 죽을 죄인들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신약성도들을 아주 높게 평가하시고 고귀하게 대하십니다. 왜입니까? 그것은 우리가 성취를 보았고, 성취의 시대를 살고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소유했고, 그분을 질그릇에 담고 있기 때문인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의 능력 때문에 우리를 신약의 성도들로 세우셔서 지극히 작은 자이지만, 세례요한보다 크다고 말씀하신 그 반열에 올라와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소유했기 때문에, 구약의 성도들에 비해서 비교할 수 없는 탁월한 지위와 특권과 모든 권세를 부여받고 있는 것입니다. 그것이 이제까지 히브리서를 통해서 배운 것들 아닙니까?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구속의 경륜의 비밀들을 밝히 알고 있고,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구속으로 말미암아 영원히 온전케 되었으며, 은혜의 보좌 앞에 담대히 나아갈 수 있는 권세가 있고, 성령이 우리 안에 내주하고 계시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얻었고... 등등 모든 면에서 구약백성들과는 비교할 수 없는 그런 탁월한 지위와 특권을 누리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신약의 성도들은 구약의 어떤 성도들보다도 가장 탁월한 일을 할 수 있을만한 자질과 능력과 여건들을 갖춘 것입니다. 그리고 앞에 구약의 성도들은 자신들의 임무를 완수하고 이겨 나아갔습니다. 이제 가장 중요한 순간에 우리가 마지막 주자로 서 있는 것입니다.


지금 메인스타디움에는 구름과 같이 허다한 믿음의 증인들이 마지막 주자인 우리를 바라보며 흥분과 기대 가운데 지켜보고 있습니다. 우리가 아니면 이 게임은 지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어떻게 할 것입니까?


우리는 지금 어떤 삶을 살고 있습니까? 구약의 백성들은 고난과 박해 앞에서 담대하게 맞섰는데, 신약의 성도들인 우리가 혹시 고난 앞에서 두려워하며 후퇴하고 뒷걸음질 치고 있지는 않습니까? 세상의 유혹에 무릎 꿇고, 이 세상을 소망하며 살아가고 있지 않습니까? 여러분, 우리는 그렇게 살아갈 수 없고 그렇게 살아가서도 안 됩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우리를 그렇게 놔두지 않으실 것입니다. 하나님은 반드시 신약의 교회를 통해 구속의 경륜을 완성하시고 이 게임을 승리하게 하셔서 당신의 뜻을 이루실 것입니다. 다만 우리는 말씀 앞에서 자기를 돌아보아 회개하고, 우리에게 허락하신 주님의 은혜와 특권과 지위를 깨닫고, 깨어 근신하여서, 하나님이 하시는 이 일에 순복해야 합니다. 그리하여 마지막 주자로서 책임 있게 이 신앙의 길을 경주해 나아가야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은혜를 주셔서 우리로 이 믿음의 영웅들의 신앙을 본받게 하여주시기를 기도합니다. 더 나아가 우리에게 허락하신 더 좋은 것을 알게 하셔서, 마지막 주자로서 믿음과 인내로 끝까지 신앙의 길을 완주하는 우리 한결교회가 되게 하여주시기를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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