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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 최상범
성경본문 히 2:1-4
성경본문내용 (1)그러므로 모든 들은 것을 우리가 더욱 간절히 삼갈지니 혹 흘러 떠내려 갈까 염려하노라(2)천사들로 하신 말씀이 견고하게 되어 모든 범죄함과 순종치 아니함이 공변된 보응을 받았거든(3)우리가 이같이 큰 구원을 등한히 여기면 어찌 피하리요 이 구원은 처음에 주로 말씀하신 바요 들은 자들이 우리에게 확증한 바니(4)하나님도 표적들과 기사들과 여러가지 능력과 및 자기 뜻을 따라 성령의 나눠주신 것으로써 저희와 함께 증거하셨느니라
강설날짜 2012-06-24

2012년 6월 24일 한결교회 주일예배강설
히브리서 제4강

 

큰 구원을 등한히 여기면

 

말씀 : 히 2:1-4

 

1절을 보시면, “그러므로”로 시작합니다. 이것은 앞의 이야기(천사보다 우월하신 그리스도)를 받아서 그것을 토대로 오늘 본문의 권면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무엇을 권면하느냐 하면, “모든 들은 것을 우리가 더욱 삼가야 한다”는 것입니다. ‘삼간다’는 말은 무척 주의를 기울이고 관심을 집중한다는 말입니다. 그리고 이 ‘모든 들은 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우리가 이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에 깊은 주의를 기울여야 하는데, 왜냐하면 그렇지 않으면, 우리는 우리도 모르는 사이에 결국 흘러 떠내려가고 말 것이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흘러 떠내려간다’는 표현은 배가 항구의 정박지에 고정되지 못한 채 파도와 해류에 의해서 점차로 항구에서 멀어져 표류하는 이미지를 나타냅니다. 즉 구원의 은혜에서 떨어질 위험을 지금 이야기하고 있는 것입니다. 히브리서 수신자들은 지금 그리스도 예수의 복음을 등한히 여기고, 유대교와 타협하고 세상과 타협하면서 믿음의 길에서 후퇴하고 있는데, 이런 그들을 향해 히브리서 저자는 계속해서 그 길로 가면 결국 구원받지 못하고 영원한 멸망에 처해질 것이라고 강력하게 경고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런 경고가 히브리서에 총 5번이 나옵니다(2:1~4, 3:7~4:1, 5:11~6:8, 10:26~31, 12:25~29). 나중에 다 읽어보시면 아시겠지만, 굉장히 두려움을 주는 말씀들입니다. 그러면 이런 경고의 말씀 앞에서 우리가 가지는 질문이, 예수님을 믿어도, 내가 잘못하면 결국 구원이 취소되고 구원에서 떨어질 수 있느냐 하는 것입니다. 히브리서 저자는 “그럴 수 있다”고 지금 강력하게 경고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알고 있는 복음은 예수님을 믿기만 하면, 죄 사함을 받고, 의롭다 함을 얻고, 성령을 받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어서, 결코 구원이 취소되지 않는다는 것이 우리가 알고 있는 복음입니다. 그러면 우리가 알고 있던 복음이 틀린 것입니까? 아니라면, 오늘 본문과 같은 경고의 말씀을 어떻게 이해해야 하죠?


분명한 것은 우리가 예수님을 믿으면, 값없이 은혜로 온전히 그리고 영원히 구원받는다는 것입니다. 예수님 믿었는데도 덜 구원받는다든지, 아니면 거기에 행위를 덧붙여야 한다든지 하는 것은 있을 수 없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의 공로가 너무 충분하기 때문에 오직 믿음으로 온전히 구원받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렇게 구원받아서 한번 하나님의 사랑을 입는 하나님의 자녀로 입양되었으면, 결코 하나님은 우리를 버리지 아니하시는 것이고, 또한 그 사랑에서 우리를 끊을 자가 아무도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도의 견인 교리는 확실한 것입니다. 그러나 이 이야기하고 “예수님 믿으면 천국은 따 놓은 당상이다, 천국행 열차표 티켓을 가졌으니, 이제 염려 없다.”는 식의 이야기 하고는 다른 것입니다.


우리가 잘못 이해하는 것 중의 하나가 ‘성도의 견인 교리’라고 했을 때, 이 ‘견인’을 자동차를 견인(牽引)해가는 그 견인을 생각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 견인은 그런 것이 아니라, 견디고 인내하게 한다는 견인(堅忍)입니다. 즉 예수님을 믿고 이 세상에서 신앙인으로서 살아간다는 것은 천국은 따 놓은 당상이기 때문에 발만 얹어놓으면 자동으로 천국에 이르게 되는 에스컬레이터에 탄 것이 아니라, 이제 예수님을 믿어 구원을 받아, 비로소 구원의 여정을 시작하게 되었고, 끝까지 견디고 인내하면서 구원의 종착점을 향해서 걸어가야만 하는 순례의 여정에 들어선 것입니다. 그래서 히브리서뿐 아니라, 성경전체가 말하는 구원은 세 가지 시제로 되어 있습니다. 예수님을 믿어서 이미 구원받았고, 또 이미 구원받은 자는 이 세상에서 두렵고 떨림으로 구원을 이루는 삶을 살아야 하고, 그리고 미래에 죽어서 하나님 나라에 이를 때에 종국적으로 구원을 받게 될 것이라는, 과거 현재 미래의 세 가지 시제로 구원이 표현되는 것입니다.

 

(24)운동장에서 달음질하는 자들이 다 달아날지라도 오직 상 얻는 자는 하나인 줄을 너희가 알지 못하느냐 너희도 얻도록 이와 같이 달음질하라(25)이기기를 다투는 자마다 모든 일에 절제하나니 저희는 썩을 면류관을 얻고자 하되 우리는 썩지 아니할 것을 얻고자 하노라(26)그러므로 내가 달음질하기를 향방 없는 것같이 아니하고 싸우기를 허공을 치는 것같이 아니하여(27)내가 내 몸을 쳐 복종하게 함은 내가 남에게 전파한 후에 자기가 도리어 버림이 될까 두려워함이로라(고전 9:24-27)

 

바울은 구원의 과정을 달리기 경주에 비유합니다. 운동선수가 상을 얻기 위해서 모든 최선의 노력을 기울여서 그 목적지를 향해 달려가야만 하듯이 구원의 과정도 그러하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흔히 “참가하는데 의의가 있다”이런 말을 하는데, 이 말은 지금 고린도전서 9장과는 맞지 않습니다. 우리가 신앙의 경주를 해서 얻는 상은 얻으면 좋겠지만 없어도 되는 그런 종류의 것이 아니라, 반드시 얻어야 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신앙의 경주는 그 달음질의 목표가 분명하기 때문에, 내가 꼴지가 되어도 된다 하고 어슬렁어슬렁 뛰는 것이 아니라, 그 상을 얻기 위하여 있는 힘을 다하여 달려가야 하는 경주인 것입니다. 특히 이 신앙의 경주에 영혼의 생사가 달려있기 때문에, 얼마나 절실하고 두렵고 떨리는 경주인지 바울은 27절에서 표현하기를, “내가 내 몸을 쳐 복종하게 함은 내가 남에게 전파한 후에 자기가 도리어 버림이 될까 두려워함이로라”라고 말하였습니다. 자신이 혹시 신앙의 경주를 완주하지 못해서 결국 멸망에 처해질까봐 두려운 것입니다. 그래서 이러한 두려움을 안고서 죽기 살기로 신앙의 경주를 달려가는 것입니다. 이러한 두려움은 거룩한 두려움으로서 우리도 반드시 가져야만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런 두려움을 안고서 우리도 사도바울처럼 이 목표를 향해서 뒤를 돌아보지 아니하고 앞에 있는 푯대를 향하여 열심히 달려가야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우리가 달려가야 하는 그 길이 쉽고 편하고 넓은 길이 아니라, 좁고 협착하고 어려운 길이라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도 좁은 길과 넓은 길 비유를 말씀하셨습니다.

 

(13)좁은 문으로 들어가라 멸망으로 인도하는 문은 크고 그 길이 넓어 그리로 들어가는 자가 많고(14)생명으로 인도하는 문은 좁고 길이 협착하여 찾는 이가 적음이니라(마 7:13-14)

 

우리가 가야하는 길은 고생길이고, 수많은 어려움과 고난이 기다리고 있는 길이고, 심지어는 목숨까지도 잃을 수도 있는 위험한 길입니다. 그래서 수많은 사람들이 천국에 들어가고는 싶어 하지만, 그 천국을 위해 치러야 하는 희생과 대가가 크기 때문에 막상 그 길을 향해 발걸음을 내딛지 못하고 주저하고 머뭇거리거나 심지어는 아예 중도에 포기하는 경우가 많은 것입니다. 이런 자들은 다 구원의 은혜가 없는 자들인데, 이런 자들에 대해서 예수님께서는 자기 목숨까지 미워하지 아니하면 능히 내 제자가 될 수 없다고 말씀하셨고, 손에 쟁기를 잡고 뒤를 돌아보는 자는 하나님 나라에 합당치 않다고 말씀하셨던 것입니다(눅 14:26; 눅 9:62). 이 좁은 길은 목숨을 버릴 각오가 있는 믿음의 용기가 있는 참된 신자만이 걸어갈 수 있는 길입니다. 즉 앞의 신앙의 여정에 많은 어려움이 있다하더라도 지금 나와 동행하시는 예수님을 믿고 의지해서 그 길을 쭉 진행하는 자만이 신앙의 경주를 완주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오늘날 한국교회 성도 수가 한 800만명 정도 되는 걸로 아는데, 그 중에 이러한 진정한 용기 있는 믿음을 가진 자가 과연 몇 명이나 되겠습니까? 아마 극소수일 것입니다. 우리 교회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 교회도 비록 50명 남짓하지만, 여기 모인 우리 모두가 교회에 나왔다고 해서 다 구원받는 것이 아닙니다. 분명 일부만 구원받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다 예수님을 믿는다하고, 다 교회 나오고, 다 자기 나름대로 영적 체험도 있고, 그래서 자기는 구원받았다고 확신해도 결국 주와 복음을 위해 헌신하는 일에 있어서 주저하고 뒷걸음질 치고, 중도에 포기하여 결국 완주하지 못할 사람들이 있는 것입니다. 그런 사람들은 믿음이 있었는데도 구원 못 받은 것이 아니라, 사실은 맨 처음부터 믿음이 없는 자인 것입니다. 단지 믿음이 있는 것처럼 보였고, 자기 자신도 스스로 믿음이 있다고 착각했을 뿐이지, 사실은 구원의 은혜가 전혀 없는 자인 것입니다.


그러나 구원의 은혜가 있는 사람들, 참된 믿음이 있는 사람들에게는 성령님의 은혜가 있기 때문에, 말씀을 통해 그 영혼이 끝까지 견디고 인내하게 하심으로 그 길을 걸어가게 하시는 것입니다. 즉 참된 신자라도 때로는 넘어지고 자빠지고, 뒷걸음질 치기도 하고, 잘못된 길로 들어설 때가 있는데, 그때그때마다 하나님께서는 말씀을 통해서 우리를 징계하시고 책망하시고, 그리하여 회개하여 돌이키게 하시고, 또 힘이 들 때면 위로하시고 독려하셔서 우리로 다시금 신앙의 경주를 끝까지 계속해서 갈 수 있도록 도와주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처음 구원받은 것도 은혜로 되고, 그 구원의 완성을 향하여 끝까지 걸어가는 과정도 결국 하나님의 은혜로만 되는 것입니다. 결국 구원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혜인 것입니다.


그런데 이렇게 우리가 때때로 잘못된 길을 들어서고 주저하고 머뭇거리고 뒷걸음질 칠 때, 하나님께서는 두 가지 말씀을 통해서 신자들로 하여금 다시금 돌이켜서 이 구원의 완성을 향하여 달려가게 하시는데, 하나는 그리스도 안에서 허락된 구원과 영생의 상급이 얼마나 고귀한 것이고 놀라운 것인지를 보여주심으로써 우리 안에 믿음과 소망을 불러일으키시고, 또 다른 하나는 바로 신앙의 경주를 포기하게 되어질 때에 맞게 되는 치명적인 결과를 경고하심으로써 우리를 일깨워 돌이키게 하시고 거룩한 두려움을 가지고 계속해서 믿음의 길을 가게 하시는 것입니다.


오늘 말씀은 바로 그런 경고와 책망의 말씀입니다. 단순히 겁을 주고 절망하게 하기 위해서 이 말씀을 하시는 것이 아니라, 정신을 차리고 신앙의 경주를 계속해 나가도록 하시기 위한 하나님의 징계요 사랑의 채찍입니다. 여러분 우리가 우리 자신을 돌아보고, 내가 정말 주님이 기대하시는 그 좁은 길로 걸어가고 있는지를 돌아보아서, 혹시 그렇지 못하다면 우리가 정신을 차리고 회개하고 주님만을 의지해서 이 신앙의 경주를 힘써 해나가는 우리 모두가 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오늘 본문을 계속해서 보겠습니다. 결국 히브리서 저자가 히브리서 수신자들을 향해 강하게 책망하는 책망의 메시지는 바로 그리스도의 복음을 등한히 여기는 것입니다. 그것이 얼마나 큰 재앙을 초래하는지 앞의 논증을 토대로 권면하는 것입니다. 2절을 보십시오.

 

(2)천사들로 하신 말씀이 견고하게 되어 모든 범죄함과 순종치 아니함이 공변된 보응을 받았거든(3)우리가 이같이 큰 구원을 등한히 여기면 어찌 피하리요(히 2:2-3)

 

여기서 천사들로 하신 말씀은 곧 모세 율법을 말하는데... 이 점과 관련하여 우리는 흔히 율법은 하나님께서 직접 주신 것으로 생각하지만, 유대인들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유대인들은 신명기 33:2에서 하나님께서 일만 천사들과 함께 시내산에 강림하셔서 율법을 하사하셨다는 말씀을 근거로 해서 율법이 하나님께서 주신 것이기는 하지만, 그러나 천사들을 통해서 주신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사도행전에서도 스데반이 하는 말이 행 7:53에 “너희가 천사의 전한 율법을 받고도 지키지 아니하였도다”라고 하였고, 바울도 갈라디아서 3:19에서 “그런즉 율법은 무엇이냐 범법함을 인하여 더한 것이라 천사들로 말미암아 중보의 손을 빌어 베푸신 것인데...”라고 말씀하였던 것입니다. 그래서 이 천사들로 하신 말씀은 곧 율법을 의미하는데, 그러므로 오늘 본문이 말하고자 하는 바는, 결국 이 천사들을 통하여 주어진 율법을 이스라엘 백성들이 무관심하고 불순종했을 때 공변된 보응을 받았다라고 한다면, 하물며 그 천사보다 비교할 수 없이 탁월하시고 우월하신 아들을 통하여 말세에 최종적으로 말씀하신 그 말씀을 우리가 등한히 여길 때에는 얼마나 구약과는 비교할 수 없는 더 큰 재앙이 우리에게 임하겠느냐 하는 것입니다. 모세 율법에 대한 무관심이 적절히 벌을 받았다면, 복음에 대한 무관심은 우리에게 재앙이 될 것임이 틀림없다는 것입니다.


이 점과 관련하여 우리가 흔히 빠지기 쉬운 오류가 무엇이냐 하면 구약시대는 하나님이 죄에 대해서 즉각적으로 보응하시고 심판하시는, (행위에 따라 공의와 엄의로 벌하시는) 율법으로 다스리는 무서운 시대였고, 신약시대는 하나님께서 은혜와 사랑으로 다스리시는 은혜의 시대여서, 좀 죄를 지어도 구약처럼 그렇게 마음 졸이거나 형벌을 두려워하거나 그럴 필요가 없다는 식으로 생각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특히 우리가 오늘날 너무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 예수님의 십자가의 용서의 사랑만 강조하는데서 나타나는 오류인데, 그것은 은혜를 남용하는 것으로서 죄를 가볍게 여기는 풍조를 낳은 멸망 받을 이단사상인 것입니다.


이것은 분명 신구약에 대한 그릇된 이해에서 비롯합니다. 여러분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과 시내산 언약을 맺으시고 율법을 주셨는데,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이 율법을 주신 목적이 무엇입니까? 율법을 주어서 지키나 안 지키나 살펴본 다음에 지키면 복을 주고 불순종하면 벌을 주시려고 율법을 주신 것입니까? 아닙니다. 타락한 인간이 이 율법을 지킬 수 없을 뿐만 아니라, 율법을 받을 때 이미 율법을 범한 죄인의 상태였던 것입니다. 그러면 이것이 무엇을 말합니까? 지켜서 복을 받으라는 말이 아니라, 너희는 죄인이고, 따라서 너희는 율법의 저주를 받을 수밖에 없는 존재라는 것을 확인시키는, 다시 말하면 죄를 깨닫게 하고 하나님의 심판 아래 있게 하는 사형선고나 다름없는 것입니다. 그런데 율법에 이것만 있습니까? 동물의 희생 제사 제도가 있어서 죄사함을 받는 길을 허락하셨습니다. 이것이 바로 복음입니다. 그리스도의 예수의 복음이 희미하게 계시된 것입니다. 그러니깐 시내산 언약은 율법만 있는 것이 아니라, 율법 안에 이미 복음이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의도는 바로 이것입니다. 율법 앞에서 죄인 됨을 깨닫고 이 복음을 붙잡도록 하신 것입니다. 그런데 이스라엘 백성들은 겸손히 복음을 붙잡지 아니했을 뿐만 아니라, 자신들이 이 율법을 지키겠다고 큰 소리를 뻥뻥 칩니다. 그리고 그렇게 지키겠다고 해놓고서는 결국 지키지 않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계속해서 선지자들을 보내셔서 경고하시고 책망하시고 구원의 손길을 주셨는데도 그들은 듣지 아니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그들에게 율법의 저주가 임하고 말았던 것입니다. 오늘 본문의 공변된 보응이 바로 이것입니다. 얼마나 철저하고 정확한 보응이었냐 하면, 신명기 28장에 보면 율법을 불순종하면 받게 될 저주의 목록이 수십 가지가 나오는데, 그 저주의 목록들이 하나도 빠짐없이 이스라엘 역사 가운데 다 성취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공변된 보응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은 구약이나 신약이나 복음의 내용의 본질에 있어서는 하등의 차이가 없다는 것입니다. 구약에 천사들을 통해 하신 율법도 결국 구원의 복음인 것입니다. 그런데 차이는 구약은 천사들을 통해, 그리고 선지자들을 통해 부분적이고 희미하게 구원의 복음이 계시되었다는 것이고, 오늘날 우리들에게는 아들을 통해 온전히 밝히 계시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같은 불순종이라도 신약시대의 성도들에게 더 큰 책임이 따르는 것입니다. 이것을 잘 보여주는 비유가 있습니다.

 

(1)예수께서 비유로 저희에게 말씀하시되 한 사람이 포도원을 만들고 산울로 두르고 즙 짜는 구유 자리를 파고 망대를 짓고 농부들에게 세로 주고 타국에 갔더니(2)때가 이르매 농부들에게 포도원 소출 얼마를 받으려고 한 종을 보내니(3)저희가 종을 잡아 심히 때리고 거저 보내었거늘(4)다시 다른 종을 보내니 그의 머리에 상처를 내고 능욕하였거늘(5)또 다른 종을 보내니 저희가 그를 죽이고 또 그 외 많은 종들도 혹은 때리고 혹은 죽인지라(6)오히려 한 사람이 있으니 곧 그의 사랑하는 아들이라 최후로 이를 보내며 가로되 내 아들은 공경하리라 하였더니(7)저 농부들이 서로 말하되 이는 상속자니 자 죽이자 그러면 그 유업이 우리 것이 되리라 하고(8)이에 잡아 죽여 포도원 밖에 내어 던졌느니라(9)포도원 주인이 어떻게 하겠느뇨 와서 그 농부들을 진멸하고 포도원을 다른 사람들에게 주리라(막 12:1-10)

 

하나님께서는 불순종하고 자기를 거역하는 백성들을 얼마든지 당장에 벌하실 수 있으시지만, 그러나 은혜를 베푸셔서 벌하지 아니하시고 계속해서 선지자들을 보내셔서 그들로 돌이키도록 하신 것입니다. 계속해서 보내셨다는 것은 그들을 포기치 아니하시는 하나님의 사랑과 긍휼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러나 결국 듣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종들이 갔기 때문에 아무래도 좀 내 의중을 충분히 전달하지 못한 것은 아닌가?” 해서 그러면 “이제 내 하나밖에 없는 아들이 가면, 좀 정신을 차리고, 회개하고 돌아오겠거니” 하고 아들을 보내시는 것입니다. 아들을 보내시는 것은 사실상 자신이 직접 가는 것과 동일한 것입니다. 왜냐하면 이 아들이 곧 포도원의 상속자로서 사실상 실질적인 주인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종들은 때려죽였지만, 아들이 가면 정신을 차리고 회개하고 돌아오리라” 그렇게 기대하고 보냈는데, 이 농부들이 뭐라고 합니까? “이 아들은 상속자 아닌가? 이 아들을 죽이고 이 포도원을 우리 것으로 만들자...” 그러고서 이 아들을 죽였습니다. 자! 그 다음에 하나님께서 또 후속타로 누구를 보내십니까? 보낼 사람이 있습니까? 없습니다. 아들까지 보냈으면, 그것으로 끝인 것입니다.


그래서 아들로 하신 말씀과 그를 통해 계시된 구원의 복음은 모든 면에서 최종적이고 궁극적인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구원하시려는 하나님의 사랑이 얼마나 밝히 증거 되었습니까? 원수 되었던 우리를 향한 자신의 사랑을 이 아들의 죽음으로 하나님께서는 확증하신 것입니다. 여러분 자신의 독생자를 십자가에 내어주실 때에 하나님의 마음이 어떠했겠습니까? 우리도 다 자식이 있는데, 우리가 우리 자식들을 얼마나 사랑합니까? 여러분, 만일 제가 나라에 꼭 필요한 인물이라고 했을 때, 여러분의 아들과 제가 물에 빠졌는데, 한 사람만 구해야 한다면 누구의 손을 잡겠습니까? 아들을 뿌리치고 저를 구해줄 자신이 있습니까? 아마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 아들을 십자가에 못 박아 죽이셨습니다. 그러면 그것으로 다 끝난 이야기인 것입니다. 더 이상 어떻게 하나님의 사랑을 이 이상으로 표현할 길이 없고, 이보다 더 긍휼과 자비가 풍성히 나타난 구원의 손길이란 있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이것을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요 3:16) 아들을 주신 것은 우리 인생들을 향한 하나님의 최상의 사랑 표현인 것이고, 최후의 구원의 손길인 것입니다. 더욱이 예수님 안에서 하나님이 온전히 계시되었고, 구속의 경륜이 밝히 드러났고, 또 그 분 안에서 우리가 누리는 온전한 죄 사함과 구원과 영생이라든지 구약과는 비교할 수 없는 신약성도로서 누리는 탁월한 특권과 지위들이라든지... (우리가 지난 시간에 배웠던 것들인데) 이 모든 것들 앞에서 우리는 “와~!” 소리가 나올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입이 다물어지지 않는 것입니다. 그분 안에 있음으로 해서 우리는 하나도 답답할 것이 없고, 하나도 아쉬울 것이 없는 그런 충만을 경험하게 된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히브리서 저자는 이 복음을 말하기를 “이같이 큰 구원”이라고 했습니다. 그냥 구원이 아닙니다. “큰 구원”입니다. 그러므로 그렇게 이같이 큰 구원을 만일 누군가가 거부한다면, 그 사람에게는 더 이상 답이 없는 것입니다.


구약에 심판받은 백성들은 그래도 “우리는 구원의 계시가 희미했기 때문에 잘 몰라서 그럴 수밖에 없었다”라는 핑계 아닌 핑계라도 할 수 있지, 우리는 더 이상 핑계조차 할 수 없는 자리에 와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구약을 읽으면서 늘 하는 생각이... 구약의 이스라엘 백성들의 끊임없는 불순종과 우상숭배를 보면서 혀를 차면서 “어떻게 저렇게 지독하게 말을 안 듣고 우상숭배를 고집하면서 사나? 나 같으면 저렇게 안 한다.” 그렇게 생각합니다. 그러나 거꾸로 생각해보면, 구약의 성도들은 우리를 보면서 이렇게 말할 것입니다. “우리가 만일 당신이 들었던 그 동일한 복음을 우리도 들었다면 우리는 당신처럼 그렇게 신앙생활 하지는 않을 거다.” 이 이야기가 제가 한 말이 아니라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입니다.

 

(21)화가 있을진저 고라신아 화가 있을진저 벳새다야 너희에게서 행한 모든 권능을 두로와 시돈에서 행하였더면 저희가 벌써 베옷을 입고 재에 앉아 회개하였으리라(22)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심판날에 두로와 시돈이 너희보다 견디기 쉬우리라(23)가버나움아 네가 하늘에까지 높아지겠느냐 음부에까지 낮아지리라 네게서 행한 모든 권능을 소돔에서 행하였더면 그 성이 오늘날까지 있었으리라(24)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심판 날에 소돔 땅이 너보다 견디기 쉬우리라 하시니라(마 11:21-24)

 

만일 예수님이 소돔 땅에 가셔서 우리에게 하셨듯이 그들에게 이 복음을 전하셨으면, 그들이 이 복음을 듣고 회개하고 예수님을 영접했을 것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에게는 이런 귀한 기회가 주어지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오늘날 우리들에게 그 기회가 주어졌습니다. 그런데도 우리가 그 복음을 거부한다면 우리에게 어떤 결과가 주어지겠습니까? 소돔과 고모라보다 더 크고 무서운 심판이 우리에게 임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어떻게 보면 듣고 불순종해서 더 큰 심판을 받느니, 차라리 들어보지 못하고 형벌 받는 것이 훨씬 나은 것입니다. 그런데 여러분은 이미 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들었습니다. 이제 빼도 박도 못하게 되었습니다. 여러분은 이제 피할 길이 없습니다. 그러면 우리가 갈 길은 둘 중의 하나입니다. 복음의 주의를 기울이지 아니하고 복음에 헌신하지 아니해서 결국 세상과 타협하면서 살다가 흘러 떠내려가서 소돔과 고모라보다 더 큰 심판을 받아 멸망당하든지, 아니면, 이 복음이 귀한 줄 알고, 또 이 복음에 큰 책임이 있다는 것을 알고, 복음의 주의를 기울이고 복음에 헌신하는 삶을 살든지 둘 중의 하나입니다. 우리가 어디로 가야하겠습니까? 당연히 우리는 후자의 길을 가야 하는 것입니다. 이 복음에 주의를 기울이고 이 복음에 헌신하는 삶을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하면 좋고 안 해도 괜찮은 것이 아니라 반드시 복음에 주의를 기울이고 그 복음에 헌신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그렇지 아니할 때 우리는 흘러 떠내려갈 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오늘 본문에 보면 주의를 기울이지 않았기 때문에 ‘흘러 떠내려간다’라고 하였습니다. 흘러 떠내려가는 것이 배가 항구의 정박지에 고정되지 못해서 점차로 멀어지면서 표류하는 것이라고 말했는데, 그런데 배가 그렇게 뒤로 밀려가는 것이 것이 본인이 뒤로 노를 저었기 때문에 후퇴한 것입니까? 아닙니다. 닻을 내리거나 줄로 정박지에 고정하지 아니하면 해류에 의해서 자동적으로 뒤로 흘러가는 것입니다.


이것은 무엇을 말해주느냐 하면, 계속해서 물살은 우리가 가야 할 길의 반대방향으로 흐르고 있다는 것을 말해줍니다. 그러니깐 우리가 그 물살을 거슬러서 올라가는 발걸음을 단 한 순간이라도 쉬게 된다면, 우리는 그 쉬는 동안 그 자리에 그대로 현상유지하면서 있는 것이 아니라, 자동적으로 뒤로 후퇴하고 흘러 떠내려가게 되어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주의하지 아니하고 복음에 헌신하기 위해 힘쓰지 아니하면, 우리는 자동적으로 세상을 향해서 멸망을 향해서 흘러 떠내려갈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로 뒤로 후퇴하도록 만드는 물살의 정체가 무엇입니까? 그것은 결국 사단의 유혹인데, 사단은 두 가지로 유혹합니다. 하나는 돈과 세상의 쾌락과 세상의 행복과 이 세상에서의 성공을 지향하도록 자꾸 우리를 유혹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또 다른 하나는 믿음의 길을 가고자 할 때 그 앞에 있는 어려운 일들과 고난들을 부풀려서 보여줌으로써 우리 마음에 두려움을 갖게 해서 그 길을 가지 못하게 막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두 가지를 통해 바로 우리를 끊임없이 복음에 헌신하지 못하도록 하고, 복음에 주의를 기울이지 못하게 결국은 그냥 세상을 좇아서 살아가도록 하는 것입니다.


세상을 향해 마음이 가 있으면, 말씀에 대한 관심이 없고, 말씀을 들어도 깨달을 수 없고, 그래서 그 말씀이 우리의 삶에서 결실을 맺을 수가 없습니다. 아무리 그리스도 예수의 복음이 고귀하다 하더라도 결국 말씀을 받는 마음 밭이 옥토 밭이 되어야만 결실을 맺을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영적으로 깨어서 혹시 내가 흘러 떠내려가고 있지는 않는지 자신을 살피고 그 들은 바 복음에 삼가 주의를 기울여야 합니다. 교회의 공적인 가르침에 절대적으로 참석을 하여 말씀을 듣고 배우는데 힘을 써야 합니다. 시간을 내어서 기도에 힘을 써야 합니다. 여러분 우리가 세상에 돈 되는 일이라면 자다가도 일어나고 눈이 번쩍 뜨이고, 잠을 줄여가면서까지 열심히 일하는데, 하물며 우리의 영혼을 위해서는 얼마나 더 노력하고 시간을 들이고 애쓰고 수고해야 하겠습니까? 이 세상에 하나님의 말씀보다 더 중요한 것이 무엇이 있습니까? 그러므로 우리는 말씀의 닻을 내리고 정박지에 우리의 배를 고정시키기 위해 기도의 줄을 던져야 합니다. 영적인 게으름과 싸우면서 말씀과 기도에 힘써야 합니다. 그리고 매 순간 주님을 의지하여 주와 복음에 헌신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그런데 이러한 헌신의 삶은 결국 우리에게 주어진 복음이 얼마나 귀한 것이며, 또 거기에 얼마나 큰 책임이 따르는 것인가 하는 것을 깊이 깨달을 때에만이, 이러한 노력과 투쟁의 삶이 가능합니다. 그래서 우리가 말씀을 통해서 이 사실을 깊이 깨달아 가야 하는 것입니다. 말씀을 통해서 주님의 사랑의 넓이와 높이와 깊이를 계속해서 알아가야 합니다. 주님께서 은혜를 주셔서 이 귀한 그리스도의 복음의 말씀에 우리의 최고의 주의를 기울이고, 마음에 간직하고, 그 복음에 헌신하는 삶을 살아가게 하여주시기를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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