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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 최상범
성경본문 히 4:14-16
성경본문내용 (14)그러므로 우리에게 큰 대제사장이 있으니 승천하신 자 곧 하나님 아들 예수시라 우리가 믿는 도리를 굳게 잡을지어다(15)우리에게 있는 대제사장은 우리 연약함을 체휼하지 아니하는 자가 아니요 모든 일에 우리와 한결 같이 시험을 받은 자로되 죄는 없으시니라(16)그러므로 우리가 긍휼하심을 받고 때를 따라 돕는 은혜를 얻기 위하여 은혜의 보좌 앞에 담대히 나아갈 것이니라
강설날짜 2012-08-19

2012년 8월 19일 한결교회 주일예배강설
히브리서 제11강

 

은혜의 보좌

 

말씀 : 히 4:14-16

오늘 본문을 올바르게 이해하기 위해서 꼭 생각해야 하는 세 가지 틀이 있습니다. 첫 번째는 전체 문맥의 흐름 속에서 오늘 본문의 위치가 무엇인지를 생각해야 합니다. 히브리서 전체의 주제는 결국 2:17에 언급된 것처럼 예수 그리스도께서 자비하고 충성된 대제사장이 되신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충성되심에 대해서는 앞서 3장에서부터 지난주 말씀인 4:13절까지 해서 살펴보았고, 오늘부터 배울 4:14에서부터 7:28까지의 말씀은 바로 예수님께서 대제사장으로서 얼마나 자비로우신 분이신가 하는 것에 관한 논증인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은 이러한 전체 흐름 속에서 자비하신 대제사장 예수라는 주제의 논증의 서론에 해당되는 부분이라는 것입니다.


두 번째로 우리가 본문을 잘 이해하기 위해 생각해야 할 틀은 오늘 본문이 지난주에 이어서 바로 은혜의 방도가 무엇인지에 대해서 서술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지난주는 말씀에 대해서 살펴보았고, 오늘 말씀은 결국 기도에 관한 말씀입니다. 은혜의 보좌 앞에 담대히 나아가라는 것은 기도하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히브리서는 히브리서 수신자들이 현재의 영적인 위기상황을 극복하기 위해서서는 결국 은혜를 받아야 하는데, 그 은혜를 받는 길로서 말씀과 기도에 힘쓸 것을 그들에게 제시하고 있는 것입니다.


또한 오늘 본문을 바로 이해하기 위해서 생각해야 하는 세 번째 틀은 오늘 본문이 앞선 경고의 말씀에 뒤이어진 위로의 말씀이라는 것입니다. 히브리서 저자는 경고만하지 않습니다. 아주 통렬하게 경고한 뒤에는 반드시 위로의 말씀도 따라옵니다. 왜냐하면 경고만 하면, 그 경고 앞에 좌절하고 절망할 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결코 히브리서 저자는 수신자들이 심판받을 수밖에 없는 운명이라는 것을 확인시켜주려고 이 편지를 쓰는 것이 아닙니다. 심판받을 위태로운 상황에 있으니 회개하고 돌아오라는 것이 히브리서의 목적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히브리서 저자는 통렬한 경고뿐만 아니라, 여전히 하나님께서 은혜의 팔을 벌려 그들을 기다리고 계신다 라고 하는 은혜와 위로가 넘치는 권면을 함으로써 주님의 은혜의 품으로 돌아올 것을 요청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계속되는 히브리서의 경고의 말씀 앞에서 우리 자신을 돌아보고 회개하고 참회하되 절망하고 낙심해서는 안 될 것입니다. 오히려 우리는 히브리서 저자가 우리에게 증거하는 위로의 말씀에 귀를 기울여서 은혜의 복음 위에 굳게 서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오늘 본문은 무슨 위로의 말씀을 합니까? 그것은 우리가 큰 대제사장을 소유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14)그러므로 우리에게 큰 대제사장이 있으니 승천하신 자 곧 하나님 아들 예수시라 우리가 믿는 도리를 굳게 잡을지어다(히 4:14)

 

우리가 예수님을 우리의 큰 대제사장으로 가지고 있다는 것이 어떻게 위로의 메시지가 됩니까? 제사장이라는 직분은 하나님과 사람 사이를 중재하는 직분을 말합니다. 즉 범죄함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을 멀리 떠나 하나님의 원수 된 죄인으로 하여금 죄 용서함을 받아 심판받지 아니하고 하나님과의 관계를 회복하여 구원에 이르도록 하기 위하여 하나님께서 세우신 직분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구약 이스라엘 가운데 제사장을 세우신 것 자체가 바로 범죄하여 원수된 우리 인생들을 그 죄대로 갚지 않으시고, 도리어 그 죄를 용서하며, 우리를 은혜와 긍휼과 자비로 대우하시겠다고 하는 하나님의 의지의 표현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인생들에게 제사장이 허락되었다는 것만큼 위로가 되고 소망이 되는 말씀은 없는 것입니다. 그것이야 말로 죄인된 인생들에게 있어서 가장 기쁜 소식이고 구원의 복음인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그냥 대제사장을 소유한 것이 아니라, 큰 대제사장을 소유한 것입니다. ‘크다’는 말은 ‘위대하다, 탁월하다’는 말입니다. 즉 그분은 구약의 아론 대제사장과는 비교할 수 없는 탁월하고 위대한 대제사장이 되신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분은 단순한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의 아들로서 사람이 되신 분이시고, 불완전한 인간 제사장들과는 달리 완전한 중보자가 되시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이 땅에서 십자가에서 죽으심으로 단번에 자기를 드려 영원한 속죄를 이루시고 하늘로 승천하셔서 하나님 보좌 우편에 좌정하셨습니다. 즉 온전한 구속사역을 이루시고, 하늘의 참 성소에 들어가셔서 우리를 위해 중보의 사역을 감당하시는 대제사장이 되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이런 완벽한 예수님을 우리의 대제사장으로 소유하고 있기 때문에, 이를 통해서 우리가 얼마나 구약의 백성과는 비교할 수 없는 온전한 죄사함과 구원과 하나님과의 화목함과... 등등의 여러 가지 은혜의 유익들을 누릴 수 있게 되었는가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을 대제사장으로 소유했다는 것이야말로 참으로 위로와 소망을 주는 메시지인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죄인들을 향한 은혜의 복음인 것입니다. 히브리서 저자는 바로 이 복음의 진리를 굳게 붙잡으라고 권면합니다. 왜냐하면 이 복음 진리를 굳게 믿어서 은혜와 위로를 많이 받는 길만이 오직 현재의 영적 위기를 극복하고, 주님이 가라고 하신 믿음과 소망과 인내의 삶을 살아갈 수 있게 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15절은 이러한 우리를 위한 대제사장으로서 예수님의 긍휼과 자비의 마음을 보다 자세하게 언급합니다.

 

(15)우리에게 있는 대제사장은 우리 연약함을 체휼하지 아니하는 자가 아니요 모든 일에 우리와 한결 같이 시험을 받은 자로되 죄는 없으시니라(히 4:15)

 

그분은 우리의 연약함을 체휼하지 아니하시는 분이 아니십니다. 말이 아주 어려운데, 체휼하다는 말은 기본적으로 ‘동정하다’는 의미이고, 더 나아가 단순한 심리적인 동정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실질적인 도움을 주는 것까지 포함하는 단어입니다. 그렇게 우리를 동정하신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것이 이중부정으로 표현되어서 아주 강조되고 있습니다. 왜 이 점을 강조하느냐 하면, 그분이 하늘에 계시고 초월적이고 하나님이신 분이심을 생각할 때, 우리가 받는 인상이라는 것이 우리와 너무 동떨어져 계시고, 우리의 처지와 상황을 이해하지 못하시는 다른 차원에 계신 분처럼 느껴지는 것입니다. 마치 예수님은 굳은 궁궐 속에서 보고나 받으시고, 현장에 있는 현실은 이해하지 못하신 채 올라오는 서류에 결제나 하시는 분 같은 느낌을 받는 것입니다. 실제로 이 세상에서도 높은 위치에 있는 사람들이 그런 오류에 빠지기가 쉬운 것입니다. 그래서 옛날의 왕들이 궁궐에만 살고, 신하들만 대하고 살아가니깐 민심을 알지 못하는 위험에 빠지기가 쉬워서 옛 왕들은 미복잠행이라는 것을 가끔씩 했습니다. 즉 평민의 옷을 입고 직접 백성들이 사는 곳을 방문하여서 민심을 살피는 것입니다.


예수님도 하늘 높이 계시니 그렇지 않느냐는 것입니다. 그러나 히브리서 저자는 결코 그럴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분은 우리의 연약함을 충분히 동정하시는 분이시라고 증거합니다. 왜냐하면 그분은 사람으로서 이 땅을 사셨고, 2:17 말씀처럼 범사에 형제들과 같이 되셨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죄 빼고 우리가 겪은 모든 아픔들과 괴로움들을 친히 겪으셨기 때문에 아픔과 고통 가운데 있는 우리를 능히 공감하고 동정하실 수가 있는 것입니다.


특별히 본문은 우리의 무엇을 동정하시고 도우시고자 하신다고 말씀합니까? 우리의 연약함입니다. 여기서 말하는 연약함은 육체의 연약함이나 경제적인 연약함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물론 주님은 우리가 병들어서 아픈 고통도, 그리고 가난 속에서 헐벗고 굶주리는 고통도 다 아시고 동정하십니다. 그러나 그것이 예수님의 동정하시는 것의 궁극적인 내용이 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우리 인생이 근본적으로 불행하고 고통스러우며 비참한 이유는 내가 가난하기 때문도 아니고 병들었기 때문도 아니고, 삶의 여러 가지 인생문제들 때문에 그런 것도 아니고, 바로 내 안에 있는 죄 때문에 우리가 불행한 것입니다. 인간을 불행하게 하는 모든 문제의 본질은 바로 죄입니다. 예수님의 마음은 근본 죄를 범할 수밖에 없는 우리의 연약함을 향해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본문은 이러한 점을 말하기 위해서 특별히 예수님께서 우리와 동일하게 한결 같이 시험을 받으셨다고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시험은 결국 유혹과 핍박으로 오는데, 그 시험에 굴복하게 되어졌을 때, 그것이 결국 죄가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세상에 사시는 동안 끊임없이 여러 가지 유혹과 핍박의 시험을 당하셨기 때문에, 비록 죄는 없으시나, 시험 앞에서 굴복하여 죄짓기 쉬운 우리의 연약함을 친히 동정하시는 것입니다.


히브리서 저자가 예수님께서 우리의 연약함을 동정하시는 분이심을 강조하는 이유는 히브리서 수신자들이 시험 앞에서 굴복하여 죄를 범하는 영적인 연약함 가운데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 때문에 여러 가지 고난과 핍박, 순교를 직면하게 되었고, 이러한 시련을 통해 신앙을 포기하도록 압박을 받고 있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사단마귀는 세상의 좋은 것들을 가지고서 유혹하여서 신앙을 위해 고난 받기보다도, 자기 살길을 꾸려나가고 세상의 행복과 쾌락을 추구해가도록 유혹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유혹과 핍박의 시험 앞에서 히브리서 수신자들은 굴복하고 말았고, 그래서 세상과 타협하고 신앙의 뒷걸음질을 치고 있는 가운데 있었던 것입니다. 이런 그들을 향해 히브리서 저자는 통렬하게 경고함과 아울러서, 시험 앞에서 굴복하여 죄짓기 쉬운 그들의 연약함을 동정하시고 돕기를 원하시는 예수님의 은혜와 자비를 바라보도록 요청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메시지는 오늘날 우리들에게도 동일하게 필요한 말씀입니다. 왜냐하면 우리도 세상의 수많은 시험 앞에서 죄짓기 쉬운 연약한 죄인들이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우리 자신의 삶을 한번 돌아보십시오. 우리가 매일의 삶 속에서 수없이 찾아오는 세상의 수많은 유혹들과 고난의 시험을 믿음으로 극복하고 오직 주와 복음만을 위해서 죽기까지 충성하며 살아가고 있습니까? 솔직히 그렇게 살지 못하고 시험에 굴복하여 죄 지을 때가 많고, 우리도 세상과 타협하고 신앙의 뒷걸음질을 치는 삶을 살 때가 많지 않습니까? 정말 우리가 매일의 삶 속에서 깊이 깨닫는 것은 우리 자신이 세상의 유혹과 핍박 앞에서 얼마나 연약하지, 또 우리 안에 불 일 듯이 일어나는 죄의 정욕 앞에서 얼마나 무능력한지 고백치 않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우리나라에서 산불이 가끔 나는데, 산불은 참으로 안타까운 자연재해입니다. 왜냐하면 그 산림을 가꾸기 위해서는 짧아도 50-60년, 길면 몇백년 동안을 공을 들여서 가꾸어 온 것인데, 그것이 한 순간에 아무런 경제적인 이익을 주는 것도 없이 다 불타 없어지기 때문입니다. 정말 아까운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나라에서 나는 산불은 그렇게 큰 규모의 산불이 아닙니다. 몇 년 전에 있었던 아마존 지역에서 일어났던 산불이나 이틀 전에 미국에서 일어났던 산불(우리나라 영토 20%해당되는 지역을 불태움), 호주에서 있었던 산불, 옛날에 인도네시아에서 7개월가량 계속된 산불 같은 경우는 정말 엄청난 피해를 내는 산불이고, 그런 산불은 인간의 힘으로는 도저히 끌 수 없는 무지막대한 산불입니다. 보통 헬리콥터가 한 번 물을 뜰 때, 3톤의 물을 뜨는데, 그렇게 몇 십대의 헬기로는 도저히 이 불길을 잡을 수가 없습니다. 약을 살포하고 뭔 별짓을 해도 안 꺼집니다. 그런 산불은 사람이 끄는 것이 아니라, 결국 무엇이 끕니까? 비가 끕니다. 비는 산지사방에 동시에 내리기 때문에 불길이 확 잡히는 것입니다.


우리의 신앙생활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 안에 죄의 정욕은 바로 이러한 산불처럼 시시때때로 우리 안에서 불타오르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의 힘으로는 결코 이것을 이겨낼 수 없고, 우리의 어떠한 노력도 다 소용없는 것입니다. 어마어마하게 죄가 불길처럼 내 마음 속에 번져가고 있는데, 그것을 막아보려고 신자가 애를 써본들, 그것은 마치 엄청나게 타오르는 산불 앞에 바가지로 물을 끼얹는 것처럼 영향력이 미미한 것입니다. 이 죄를 항거할 수 있는 능력이 근본적으로 없는 것이 바로 우리의 연약함인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하루에도 수십 번 수백 번 일어나는 죄의 정욕의 유혹과 시험 앞에서 수시로 굴복하며 죄를 짓는 것입니다. 이런 우리 안에 불타오르는 죄의 정욕의 불은 나의 의지나 결단으로 끄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하늘로부터 내려오는 은혜의 비가 끄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연약한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 없이는 한 시도 살아갈 수 없는 사람들인 것입니다. 그래서 히브리서 저자는 16절에 “그러므로 우리가 긍휼하심을 받고 때를 따라 돕는 은혜를 얻기 위하여 은혜의 보좌 앞에 담대히 나아갈 것이니라”(히 4:16)라고 기도할 것을 명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도 이 은혜를 받기 위해서 말씀도 안 읽고, 기도도 안 하는 사람은 어떤 사람들입니까? 두 가지입니다. 하나는 하나님의 은혜 없이도 씩씩하게 잘 살아갈 수 있다고 하는 교만의 극치를 달리는 사람입니다.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조차도 기도하셔야만 했는데, 연약한 죄인이 기도 없이 살아갈 수 있다는 것은 그것은 교만의 극치인 것입니다. 그래서 포사이스라는 학자는 기도하지 않는 것이야말로 모든 죄의 근원이고, 실제적 무신론의 죄를 최악의 형태로 범하는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기도 안 하는 것은 하나님을 안 믿고 나를 믿는 삶인 것입니다. 두 번째로 기도하지 않는 사람은 하나님보다 죄의 낙이 더 좋기 때문에 그런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죄의 지배를 받게 되었을 때 이르는 무서운 결과인 것입니다. 사람이 반복적으로 죄에 굴복하게 되면 결국 죄의 지배를 받는 비참한 상황에 이르는데, 그것은 신자 안에 있는 은혜의 질서가 파괴됨에 따라서 죄에 대한 저항력을 잃고 도리어 자발적으로 그리고 수시로 죄에 굴복하게 되는 상태를 말하는 것입니다. 물론 신자는 그 죄로 인해서 큰 죄책감과 혼돈을 느끼면서 고통합니다. 이 상황에서 그가 위로를 받을 수 있는 길은 둘 중에 하나인데, 하나는 하나님과 관계성을 회복하여 하나님의 평화가 그를 위로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것은 현실적으로 불가능하니깐, 그렇게 되면 그 다음으로 진통제처럼 그를 위로할 수 있는 것이 있는데, 그것이 죄의 낙인 것입니다. 그래서 한편으로는 죄 때문에 괴로워하고, 자책감을 느끼면서도, 또 한편으로는 그 괴로움을 잊기 위해서 다시 죄를 범하면서, 잠시 죄를 짓는데서 오는 달콤한 즐거움으로 영혼의 번민들을 잊고자 하는 것입니다. 마치 알콜중독증을 치료하다가 너무 괴로우니깐 그 괴로움을 잊기 위해 다시 술을 찾는 것 같은 원리인 것입니다. 그래서 교회 와서는 눈물 흘리며 회개하고, 돌아서서는 다시 그 죄를 범하고, 또 교회 와서는 눈물 흘리고... 그것이 계속 반복되는 것입니다. 그렇게 계속 반복이 되면, 죄의 세력이 그를 사로잡아가고 그렇게 죄에 길들여지게 되면, 이제는 자원하는 마음으로 죄를 좇아가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죄의 지배를 받게 되는 상태인 것이고, 이것이 하나님의 은혜 없이 살아갈 때에 결과 되어지는 인간의 비참한 모습인 것입니다. 누구도 예외 없습니다. 말씀 안 읽고 기도하지 않는 영적으로 게으른 신자는 반드시 이러한 상태로 빠질 수밖에 없습니다. 이것이 바로 히브리서 수신자들의 삶이었고, 그런데 또한 이것이 우리의 삶이지 않습니까?


바울은 죄에 지면, 죄의 종이 되고, 죄의 종으로 살면 반드시 사망에 이른다고 분명히 경고했습니다. 그리고 영으로써 몸의 행실을 죽이는 삶을 살지 않으면, 결국 자기 자신이 죽게 될 것이라고 바울은 로마서를 통해 경고했습니다. 우리는 정말로 정신을 차리고 참으로 회개하여서 이 죄의 지배에서 벗어나야 합니다. 그러면 우리가 어떻게 해야 이 죄의 지배에서 벗어날 수 있습니까? 은혜의 보좌 앞에 나아가서 긍휼하심을 얻고 때를 따라 돕는 은혜를 받는 길 외에는 없습니다. 결국 은혜의 비가 우리 마음속에 활활 타오르며 번지는 죄의 정욕의 산불을 끄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은혜를 받기 위해 은혜의 보좌 앞에 나아가고자할 때, 여러 가지 방해하는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사단의 송사입니다. 신자가 죄의 지배를 받고 있어도, 그가 결코 행복할 수 없는 이유는 신자의 마음속에는 하나님의 통치를 받고 하나님의 뜻대로 살고자하는 주도적인 소원이 그 내면에 흐르고 있기 때문입니다. 죄의 지배로 인해서 약화될 뿐이지 그것이 결코 없어지지는 않습니다. 그래서 신자는 죄의 지배를 받으면서 반복해서 죄에 굴복하는 이 지긋지긋하고 배은망덕한 모습에서 벗어나기를 원합니다. 그러나 그렇게 죄의 지배에서 벗어나고 싶어도, 당장에 드는 생각이 무엇입니까? 결국 사단의 송사인데, “니가 그렇게 잘못을 하고도 어떻게 그렇게 뻔뻔하게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느냐? 하나님이 너를 받아주실 것 같으냐? 너 저번에도 그렇게 간절히 기도하고도 또 그러지 않았느냐? 하나님이 그것을 모르실 것 같으냐?” 그런 송사를 우리 마음속에 주는 것입니다. 그리고 사단 마귀는 예수님을 율법의 공의와 정의로 무장한 마치 피도 눈물도 없는 냉혹한 재판장으로 보게 합니다. 그래서 예수님께 감히 나아가지 못하게 역사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죄의 지배가 우리를 율법의 속박으로 이끄는 과정입니다. 그래서 이 율법적인 생각을 통해서 좌절과 절망의 쳇바퀴 속에 머물도록 하는 것입니다.


이럴 때 우리는 무엇을 생각해야 되느냐 하면, 바로 우리의 연약함을 동정하시고 우리를 긍휼히 여기시는 대제사장 되신 예수님을 바라보아야 하는 것입니다.

 

(17)예수께서 들으시고 저희에게 이르시되 건강한 자에게는 의원이 쓸데 없고 병든 자에게라야 쓸데 있느니라 내가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부르러 왔노라 하시니라(막 2:17)

 

병이 든 사람이, 나는 병들었기 때문에 병원 갈 자격이 없다, 그럴 수 없습니다. 병자야 말로 병원에 가야할 참으로 합당한 사람이 아닙니까? 병원은 병자를 위한 것입니다. 예수님을 병을 고치러 오신 의사이시고, 죄인된 우리의 연약함을 도우시기 위해 오신 대제사장이십니다. 그러므로 역설적으로 바로 내가 그렇게 더러운 죄인이고 추악한 죄인이기 때문에 주님 앞에 나아와야 하는 것입니다. 주님은 이런 우리 죄인을 향한 은혜와 긍휼의 마음으로 가득한 분이라는 것을 우리는 기억해야 합니다.


여러분 우리의 죄가 아무리 크고, 아무리 많은 죄를 지었다 하더라도 주님이 감당치 못할 죄가 무엇이 있겠습니까? 바리새인들은 정죄 받고, 세리와 창기들은 의롭다 함을 받은 것이 죄의 양 때문에 그런 것이었습니까? 아닙니다. 주님의 긍휼을 바라보고 나온 믿음의 유무 때문이었습니다. 믿음으로 주님 앞에 나아오면 어떤 죄를 얼마큼 지었든 그것은 아무 문제가 되지 않는 것입니다. 여러분 예수님께서 이 지상에 계실 때에 수많은 죄인들과 세리와 창기들을 어떻게 대하셨는지 한번 생각해보십시오.


요 8장에 보면 간음하다 현장에서 잡힌 여인의 이야기가 나오는데, 그때 예수님께서 뭐라고 말씀하셨습니까? “너는 인간으로서 가치도 없다. 너는 쓰레기 같은 존재다. 모세의 율법에 정한대로 돌을 던져라” 그러셨습니까? 아닙니다. “나도 너를 정죄하지 아니하노니 가서 다시는 죄를 범하지 말라” 그렇게 말씀하시고 죄를 용서해주셨습니다. 예수님은 그렇게 자기에게 나아온 수많은 죄인들, 세리와 창기들을 다 용납해주셨고, 용서해주셨고, 그들과 동고동락하셨습니다.


예수님의 마음은 언제나 우리 안에 있는 99마리의 양보다는, 길을 잃고 헤매는 한 마리의 양을 향해 있었고, 바로 그들을 죄에서 구원하시기 위해서 이 땅에 오셔서 자신의 목숨을 그들을 위한 대속물로 주셨던 것입니다. 이것이 죄인들을 향해서 주님이 가지시는 긍휼과 자비의 마음입니다. 그리고 지금도 바로 이러한 긍휼의 마음으로 죄에 쉽게 넘어지고 고통하는 우리를 깊이 동정하시고 또 우리를 긍휼과 자비로 도우시고자 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면 예수님께서는 왜, 무엇 때문에 이렇게 하나님께 원수 노릇하는 우리 죄인들에게 이런 한량없는 은혜를 베풀어주십니까? 그것은 창세전에 우리를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택하셨고, 이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말미암아 우리의 모든 죄를 도말하시고 우리를 하나님의 자녀 삼아주셨기 때문입니다. 부모와 자식의 관계를 그 무엇으로 끊을 수 있겠습니까? 자식들의 잘못들이 잠시 부모의 얼굴을 찡그리게 할 수는 있을지언정, 결코 자녀를 향한 무조건적인 사랑과 긍휼의 마음을 없앨 수는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자식이 아무리 허물이 많고 실수가 많아도 부모의 도움을 바라고 나아오는 자식을 거부하거나 뿌리칠 부모는 아무도 없는 것처럼, 하나님께서는 더욱 자기에게 나아오는 자에게 반드시 은혜를 주시고 상을 주시는 것입니다.

 

(6)믿음이 없이는 기쁘시게 못하나니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는 반드시 그가 계신 것과 또한 그가 자기를 찾는 자들에게 상 주시는 이심을 믿어야 할지니라(히 11:6)

 

우리에게 바로 이러한 믿음이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내가 비록 지금은 이렇게 죄 가운데서 비참한 삶을 살고 있고, 하나님 앞에 면목 없지만, 예수님의 긍휼만을 바라보며 하나님께 나아가기만 하면, 주님께서 은혜의 비를 내려주셔서 나를 이 죄에서 건져주시고, 죄를 이길 수 있는 은혜를 주실 것이다.” 그런 믿음이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이것을 히브리서 저자는 은혜의 보좌 앞에 담대히 나아가자라고 말한 것입니다.


은혜와 보좌는 사실 잘 어울리지 않는 단어입니다. 은혜의 보좌라는 표현은 사실 매우 놀라운 표현입니다. 왜냐하면 보좌라는 것은 하나님의 위엄과 엄위를 상징하고 죄인들을 공의롭게 심판하는 것을 상징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마치 에스더가 이스라엘을 구원하기 위해 아하수에로 왕의 보좌 앞에 나아가야 했을 때, “내가 죽으면 죽으리라” 그렇게 하고 나아갔듯이, 어떻게 보면 그보다 더한 곳이 하나님의 보좌입니다. 왜냐하면 보좌 앞에 죄인이 함부로 나아가면 죽을 수가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공로와 대제사장 사역으로 말미암아서 이 보좌가 은혜의 보좌가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더 이상 에스더가 그러했던 것처럼 “죽으면 죽으리라” 그렇게 하고서 나아갈 필요가 없고, 도리어 “그 보좌는 반드시 나에게 은혜를 내려주시는 보좌이다.” 그렇게 믿고서 나아가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히브리서 저자는 담대하게 나아가라고 말씀합니다. 이 “담대하게”라는 단어는 ‘파레시아’라는 말인데, 거리낌 없이 자유롭게 그리고 솔직하게 자신의 의견을 개진하는 것을 말합니다. 거리낌 없이 그리고 솔직하게 나가는 것입니다. 히브리서 문맥을 고려하면서 조금 속되게 말하면 “뻔뻔하게, 얼굴에 철판을 깔고” 나아가자는 것입니다. 우리는 죄인이고, 연약해서 늘 배은망덕의 죄를 범하기 때문에 하나님 앞에 정말 면목이 없지만, 그래도 주님 앞에 나아가는 것입니다. 이것이 어떻게 보면 뻔뻔한 것 같고, 또 얼굴에 철판을 깐 것 같습니다만, 주님은 이러한 믿음의 용기를 요구하시는 것입니다.


우리가 우리를 긍휼히 여기시는 우리의 대제사장 되시는 예수님을 믿고 바라봄으로써 은혜의 보좌 앞에 담대히 나아가시는 저와 여러분들이 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그런데, 실제적으로 이 말씀을 우리에게 적용할 때, 한 가지 당황스러운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우리가 우리의 죄를 참회하면서 하나님 앞에 은혜를 구하며 나아가고자 마음을 먹고, 기도를 해도, 하나님의 은혜가 주어지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당장에 막 응답이 있고, 은혜가 막 임해서 삶이 확 변화고 그러면 좋을 텐데 그렇지 않은 것이 우리의 현실입니다. 오히려 앞이 막막하고, 냉냉하고, 내 기도가 하나님께 상달되지 않고 허공에 떠도는 것 같은 느낌이 듭니다. 말씀에는 은혜를 바라고 은혜의 보좌 앞에 나아가면 반드시 은혜를 주신다고 했는데, 은혜를 구하며 기도해도 은혜를 받지 못할 때가 많은 것입니다.


기도를 해도 은혜가 없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답은 하나입니다. 내가 구했는데, 하나님이 안주실리는 없는 것이고, 답은 내가 안 구했다는 것이죠. 겉은 은혜를 구하는 기도를 드렸지만, 실제로는 은혜의 보좌 앞에 나아가지 않은 것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은혜를 받으면 하나님의 뜻대로 살아야 하는데, 하나님의 뜻대로 살기 싫기 때문에 은혜의 보좌 앞에 나아가지 않는 것입니다. 보좌는 왕권을 상징합니다. 은혜의 보좌 앞에 나아간다는 것은 바로 주님의 은혜의 통치에 내가 항복하겠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내 뜻대로 살고 싶은 내가 살아있으니 은혜의 보좌 앞에 나아가지 않는 것입니다. 겉으로는 기도하면서 은혜의 보좌 앞에 나아가는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나아가지 않는 것입니다. 우리가 죄를 회개하는 기도할 때, 혹시 은혜의 통치를 받는 것에는 관심이 없고, 당장에 죄로 인한 번민과 고통만을 해결함을 받고 싶어서 기도하는 것은 아닌지 우리 자신을 잘 살펴보아야 합니다. 여러분은 정말 하나님의 은혜의 보좌 앞에 나아가서 은혜를 받기를 원하십니까? 은혜 받으면 주님의 뜻대로 살아야 하는데, 정말 은혜를 원하십니까? 먼저 자신에게 자문해 보아야 하는 것입니다.


사실 죄의 지배를 오랫동안 받게 되면, 우리 안에 은혜가 꺼져가는 심지처럼 약화되고, 그러다보면 자연스럽게 하나님을 대적하고 내 뜻대로 살고 싶은 욕망이 강하게 자리 잡게 되는 것입니다. 이런 마음이 신자에게도 있을 수가 있습니다. 아니, 내 마음대로 살고 싶은 마음이 없는 사람은 없습니다. 다만 죄를 죽이는 은혜가 없기 때문에 이 죄의 욕망이 꺾이지 아니하고 내 안에 강하게 역사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오늘 본문처럼 은혜의 보좌 앞에 담대히 나아가라는 말씀을 우리에게 적용할 때, 무조건 한 번에 뭔가 될 것으로 생각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특히 죄의 지배 가운데 은혜가 약화된 신자의 경우는 더욱 그렇습니다. 그 과정이 꼭 꺼진 불을 다시 살리는 것과 비슷합니다. 불이 꺼진 잿더미를 뒤져보면 아직 불씨가 남아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 불씨로 우리가 불을 다시 살릴 수 있는데, 불을 다시 살릴 때, 처음부터 큰 장작 갖다놓으면 불이 붙습니까? 안 붙습니다. 처음에는 나뭇잎이나, 종이 같은 것, 그리고 나무를 잘게 조각조각 낸 것들을 넣고, 입으로 후~ 불어야 합니다. 그렇게 불면 연기로 인해서 눈에서는 눈물이 나지만, 눈물을 머금으면서 그렇게 참고 계속해서 불면, 불이 조금씩 붙기 시작하고, 그렇게 타기 시작하면, 그 다음에는 조금씩 큰 장작을 놓고, 또 불이 더 커지면 큰 장작을 넣는 것입니다. 그러면 나중에는 이 불이 커져서 웬만한 것들은 다 태우는 큰 불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깐 이러한 과정이 필요한 것이지, 당장에 죄의 지배를 받고 아프고 괴롭다고, 갑자기 철야기도로 돌격을 해서 한방에 해결하려고 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많은 신자들인 한방에 해결이 안 되니깐 낙심해서 기도하기를 그만두고, 말씀읽기를 그만두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오늘부터 마음을 가다듬고, 진실 되게 이 말씀과 기도에 집중을 해나가야 합니다. 그렇게 은혜를 바라보면서 말씀과 기도에 집중하게 되어질 때에, 비로소 우리는 말씀의 찔러 쪼개는 역사로 말미암아 내 자신이 얼마나 더러운 죄인인지 깨닫게 되고, 주님의 은혜 없이는 살 수 없는 자인지 깨닫게 되는 것이고, 기도를 통해서 두손 두발 다 들고 완전히 항복하여 은혜의 보좌 앞에 나아갈 수 있게 되어지는 것입니다. 그때 하나님은 죄를 용서해주시는 긍휼과 죄를 이기게 하는 돕는 은혜를 주십니다. 이것이 바로 때를 따라 돕는 은혜인 것입니다. 이 말은 정확한 타이밍이라는 뜻입니다. 하나님은 그냥 무턱대고 은혜 달라고 하면, 무조건 주시는 것이 아니라, 최고의 타이밍에 주십니다. 왜냐하면 이러한 항복의 자세가 아닌 상황에서 은혜를 주면, 그 사람은 그 은혜를 가볍게 여기고 또 배은망덕의 죄를 범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오늘부터 말씀과 기도에 힘쓰고, 끈질기게 이 은혜의 방도에 매달려서 은혜의 보좌 앞에서 때를 따라 돕는 은혜를 얻어서 죄 된 삶에서 벗어나서 죄를 이기는 삶을 살아가는 저와 여러분들의 삶으로 변화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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