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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 최상범
성경본문 히 5:1-10
성경본문내용 (1)대제사장마다 사람 가운데서 취한 자이므로 하나님께 속한 일에 사람을 위하여 예물과 속죄하는 제사를 드리게 하나니(2)저가 무식하고 미혹한 자를 능히 용납할 수 있는 것은 자기도 연약에 싸여 있음이니라(3)이러므로 백성을 위하여 속죄제를 드림과 같이 또한 자기를 위하여 드리는 것이 마땅하니라(4)이 존귀는 아무나 스스로 취하지 못하고 오직 아론과 같이 하나님의 부르심을 입은 자라야 할 것이니라(5)또한 이와 같이 그리스도께서 대제사장 되심도 스스로 영광을 취하심이 아니요 오직 말씀하신 이가 저더러 이르시되 너는 내 아들이니 내가 오늘날 너를 낳았다 하셨고(6)또한 이와 같이 다른데 말씀하시되 네가 영원히 멜기세덱의 반차를 좇는 제사장이라 하셨으니(7)그는 육체에 계실 때에 자기를 죽음에서 능히 구원하실 이에게 심한 통곡과 눈물로 간구와 소원을 올렸고 그의 경외하심을 인하여 들으심을 얻었느니라(8)그가 아들이시라도 받으신 고난으로 순종함을 배워서(9)온전하게 되었은즉 자기를 순종하는 모든 자에게 영원한 구원의 근원이 되시고(10)하나님께 멜기세덱의 반차를 좇은 대제사장이라 칭하심을 받았느니라
강설날짜 2012-08-26

2012년 8월 26일 한결교회 주일예배강설
히브리서 제12강

 

고난으로 온전하게 되었은즉

 

말씀 : 히 5:1-10

 

대제사장이 하는 일은 희생 제사를 통하여 백성들의 죄를 구속하여서 하나님과 백성들을 화목케 하는 것입니다. 이를 위해서 대제사장은 사람 가운데서 취하여졌습니다. 즉 대제사장은 반드시 사람이어야 하는 것입니다. 왜 사람이어야만 합니까? 그것은 대제사장은 제3자로서 둘 사이를 중개하는 형식으로 중보하는 것이 아니라, 사람으로서, 사람의 대표가 되어, 사람 편에 서서, 사람을 위하여, 하나님께 속죄의 제사를 드려서 대제사장 본인이 하나님 앞에 나아감을 통해 자신을 포함한 백성들과 하나님을 화목케 하였던 것입니다.


그래서 대제사장이신 예수님께서도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자기를 비어 종의 형체를 가져 사람들과 같이 되시고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셨던 것입니다. 히브리서가 계속해서 강조하는 것이 바로 이것입니다. 그분은 2:14절에 “(14)자녀들은 혈육에 함께 속하였으매 그도 또한 한 모양으로 혈육에 함께 속하심은 사망으로 말미암아 사망의 세력을 잡은 자 곧 마귀를 없이 하시며”라고 하였고, 2:17절에 그분은 범사의 우리와 같이 되셨다고 하였고, 4:15절에는 모든 일에 우리와 한결같이 시험을 받으셨다고 말씀하였습니다. 왜 대제사장이 사람 편에서 사람의 대표로서 중보사역을 해야 하느냐 하면, 이 대표성이 결국 그리스도의 구속의 공로가 우리에게 전달되는 중요한 방식이기 때문입니다. 아담이 선악과를 따먹고 타락하게 되어졌을 때에 우리가 한 것이 무엇이 있었습니까? 우리는 그때 존재조차 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아담은 우리의 대표로서 범죄한 것이기 때문에 우리는 아담 안에서 동일한 죄책을 지고 태어나고, 그 죄의 비참한 결과들을 짊어지고 살아가야 했던 것입니다. 이것이 대표성인데, 그런데 이번에는 예수님이 이 세상에 사람으로 오시더니 우리의 대표가 되셔서 우리를 자기와 묶으시고는 그냥 죽어버리셨습니다. 그것은 우리를 위한 대속의 희생 제사였습니다. 이를테면 우리는 그 안에서 다 죽은 것입니다. 그렇게 해서 저주받을 아담의 후손으로서 우리는 이미 죽고 이 세상에 없는 것입니다. 법적으로 아담의 후손으로서 우리는 율법의 형벌을 받아 이미 죽은 사망상태인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는 우리를 묶으신 그 상태에서 다시 부활하시고 승천하셔서 하늘 보좌에 앉으셨습니다. 그리하여 우리는 바로 그분 안에서 새로운 인류로 부활하여 새롭게 탄생한 것입니다. 우리는 더 이상 저주 아래 있는 아담의 후손이 아니라 둘째 아담이신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축복 아래 있는 하나님의 백성인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아무것도 한 것이 없어도 둘째 아담으로 오신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은혜로 죄사함과 의롭게 됨과 구원 영생을 얻게 된 것입니다.

 

(18)그런즉 한 범죄로 많은 사람이 정죄에 이른 것같이 의의 한 행동으로 말미암아 많은 사람이 의롭다 하심을 받아 생명에 이르렀느니라(19)한 사람의 순종치 아니함으로 많은 사람이 죄인 된 것같이 한 사람의 순종하심으로 많은 사람이 의인이 되리라(롬 5:18-19)

 

결국 이 대표성이 우리를 구원하는 방식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께서 백성들의 죄를 대속할 대제사장이 되시기 위해서는 반드시 사람이 되셔서 사람을 대표하는 자가 되셔야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본문은 예수님과 구약의 대제사장들이 같은 사람이라도 근본적인 차이점이 있음을 말씀합니다. 그것은 구약의 대제사장은 연약한 죄인이라는 것입니다. 대제사장이란 백성들을 자기와 묶고 대표하여 하나님께 나아가야 하는데, 지금 그렇게 나아가야 할 대제사장 본인이 하나님께 나아갈 자격이 안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어떻게 해야 하느냐 하면, 백성을 위해 속죄제를 드릴뿐만 아니라 자기를 위하여서도 속죄제를 드려야만 했던 것입니다. 물론 이런 자신의 연약함이 무지하여 미혹에 빠진 백성들을 동정할 수 있는 근거로 작용하기도 하지만, 또한 그것은 대제사장으로서의 중보사역에 치명적인 결함으로서 작용하는 것입니다. 결국 대제사장 본인도, 자신의 죄를 구속할 또 다른 중보자를 필요로 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결국 본질적으로 구약의 대제사장의 중보사역에는 실질적인 효과가 없다는 것을 여실하게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들은 백성들의 육체를 정결하게 할뿐 그 마음의 양심을 씻어 깨끗하게 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본인도 죄인이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우물 안에 빠진 자가 우물 안에 빠진 자를 건져내줄 수 있습니까? 없습니다. 오직 우물 밖에 있는 자가 우물에 빠진 자를 건져줄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구약의 대제사장의 중보 사역을 통해서는 백성들이 하나도 죄사함과 구원을 받지 못하는 것입니다. 오히려 구약의 대제사장은 장차 오실 진정한 대제사장이신 예수님을 예표하는 그림자요 모형이었습니다. 장차 오실 진정한 대제사장의 참된 대속의 사역을 동물의 희생 제사를 드림으로써 예표하였던 것입니다. 바로 그 손가락질하여 가리키는 것을 바라봄으로써 (그 믿음으로) 구약의 백성들은 죄사함과 구원을 얻었던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죄 없으신 예수님은 구약의 대제사장 보다 나은 정도가 아니라, 오히려 유일하게 참된 대제사장이 되시는 것입니다. 그분은 죄가 없으시므로 자기를 위하여 속죄 제사를 드릴 필요가 없고, 자기를 단번에 드려 영원한 속죄를 이루시고 우리를 온전히 구원하실 수 있는 참 대제사장이 되신 것입니다. 이런 분을 우리가 소유하고 있으니 얼마나 감사한 일입니까? 그분의 대제사장으로서의 중보사역은 확실한 효과를 내고 또 우리에게 온전하고도 영원한 구원을 가져다주니 얼마나 든든합니까? 그러므로 우리는 이 온전하신 대제사장이신 예수님께서 우리 편에 서셔서 지금도 우리를 위하고 계신다는 사실을 믿고, 그 때를 따라 돕는 은혜를 얻기 위하여 은혜의 보좌 앞에 담대히 나아가야 하는 것입니다.


두 번째로 대제사장이 되기 위해 갖추어야 할 중요한 자격요건은 백성들을 향한 동정심이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범죄한 백성이 대제사장 앞에 왔는데, 이 대제사장이 그 범죄한 백성에 대해서 마음속으로 “어떻게 사람으로서 그런 죄를 지을 수 있냐” 하면서 마음속에서 분노와 격분의 감정을 가지고, 정죄하는 마음과 가혹한 마음을 품은 그런 상태로서는 그가 대제사장의 직분을 올바르게 감당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구약의 대제사장들은 백성들에 대하여 긍휼의 마음을 가질 수 있었는데, 그 이유는 본인 자신도 그런 연약함에 둘러 싸여 있는 죄인이기 때문입니다. 대제사장은 무지하고 미혹한 자, 곧 무지하여서 유혹에 빠져 죄를 범한 자를 용납할 수 있는 것입니다. 이런 마음은 오늘날 우리들에게도 그대로 이어져야 하는 마음가짐입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다 대제사장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왕 같은 제사장들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만이 죄 없는 대제사장이 되시고, 구약의 대제사장이나 우리 모든 신약의 백성들은 똑같은 연약한 죄인으로서 제사장인 것입니다. 우리는 다 똑같이 전적타락한 죄인들입니다. 얼마나 더 성화되었는가 하는 상대적인 차이만 있을 뿐이지, 전적부패한 본성을 가지고 있다는 점에서는 본질적으로는 다를 바가 없는 자들입니다. 그런데도 형제의 실수와 허물을 보고서 “어떻게 저럴 수 있나? 집사로서 어떻게 저런 행동을 할 수 있나? 목사로서 어떻게 저럴 수 있나?”... 물론 목사가 믿음의 모범을 보여야 하지만, 그러나 목사가 슈퍼맨은 아닙니다. 목사도 여러분과 똑같이 연약함으로 둘러싸여 있는 여러분들로부터 용납 받아야 할 죄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서로서로 마땅히 형제의 연약함을 긍휼히 여기고 용납할 수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죄 없는 자가 먼저 돌로 치라고 하셨습니다. 죄 없는 자만이 정죄할 수 있는 자격이 있습니다. 예수님만은 돌을 던질 자격이 있으신 분이십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나도 정죄치 아니하노니 가서 다시는 죄를 범치 말라” 하시고 용납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죄는 없으시지만 우리와 한결같이 시험을 받으신 분으시기 때문에 우리의 연약함을 능히 동정하실 수 있고 또 돕기 원하시는 긍휼의 대제사장이 되시는 것입니다. 우리가 다 이 긍휼하심을 입고 은혜를 받은 자들 아닙니까?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마땅히 서로의 허물과 약점을 용납하고 용서해야 할 것입니다. 우리가 근본 죄인임을 잊지 않고 살고, 또 우리 모두가 동일하게 예수님의 크신 은혜를 받은 것을 깨달아서 늘 형제의 허물에 대하여 관용할 수 있는 저와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세 번째로 대제사장의 자격요건은 하나님의 부르심을 입어야 하는 것입니다.

 

(4)이 존귀는 아무나 스스로 취하지 못하고 오직 아론과 같이 하나님의 부르심을 입은 자라야 할 것이니라(히 5:4)

 

아무나 하고 싶다고 해서 할 수 있는 직분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부르심을 입은 자만이 할 수 있습니다. 이와 같이 예수님도 하나님의 부르심을 입어 대제사장이 되신 것입니다.

 

“(5)또한 이와 같이 그리스도께서 대제사장 되심도 스스로 영광을 취하심이 아니요 오직 말씀하신 이가 저더러 이르시되 너는 내 아들이니 내가 오늘날 너를 낳았다 하셨고(6)또한 이와 같이 다른데 말씀하시되 네가 영원히 멜기세덱의 반차를 좇는 제사장이라 하셨으니”(히 5:5-6)

 

그분은 먼저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 여기 인용된 말씀 “너는 내 아들이니 내가 오늘날 너를 낳았다”는 말씀은 우리가 1장에서 배웠듯이 부활하여 승천하시고 하늘 보좌 우편에 앉으심으로써 명실 공히 하나님의 아들로 임명되신 것을 의미하는 것으로써, 곧 그분이 왕이 되셨음을 의미합니다. 그러나 그분이 아무리 하나님의 아들이시라도, 그리고 왕이시라도 스스로 대제사장의 직분을 취하실 수 없는 것입니다. 특히 히브리서 저자가 “예수님이 우리의 대제사장이시다”라고 주장할 때 가장 큰 걸림돌이 바로 이것입니다. 구약의 율법에 의하면 대제사장은 오직 레위 지파의 아론의 자손들만 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부르심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유다지파의 사람입니다. 그런 면에서 그분이 우리의 왕이실 수는 있고, 하나님의 아들이실 수는 있지만, 어떻게 그분이 우리의 대제사장이 되실 수 있는가 하는 질문을 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실제로 구약에 보면 고라 일당들이 모세와 아론을 대적하여, 본인들이야 말로 참된 제사장이라고 우겼을 때, 땅이 그들을 삼켜버렸고(민 16장), 사울 왕이 자기의 신분을 망각하고 스스로 제사장의 직분을 임의로 행했을 때, 그는 그 죄로 인해서 하나님께 버림을 받았습니다(삼상 13장). 또 웃시야 왕이 스스로 성전에 들어가 향을 사르려다가 문둥병에 걸렸습니다(대하 26:16-21). 절대로 하나님의 소명을 받지 아니하고서는 하나님의 제사장이 될 수 없는 것입니다. 오직 아론의 자손만이 하나님의 부르심을 입어 대제사장이 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구약에 딱 한번 이 법칙을 깨는 놀라운 일이 발생했는데, 그것이 사무엘을 제사장으로 세우신 사건입니다.

 

(35)내가 나를 위하여 충실한 제사장을 일으키리니 그 사람은 내 마음, 내 뜻대로 행할 것이라 내가 그를 위하여 견고한 집을 세우리니 그가 나의 기름 부음을 받은 자 앞에서 영구히 행하리라(삼상 2:35)

 

엘리가 제사장의 직분을 제대로 감당치 못하고, 그의 아들 홉니와 비느하스가 성막에서 간음죄를 범하자, 하나님은 엘리를 버리시고 새로운 제사장을 세우실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것은 일차적으로는 사무엘에게 해당되는 말씀이고 더 나아가 다윗과 솔로몬 시대에 대제사장직을 행할 사독의 사역을 미리 내다보고 있는 것입니다. 분명 사무엘은 아론 계통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직접 소명에 의해서 제사장으로 세움을 받았던 것입니다. 이러한 사건은 하나님의 직접 소명에 의해 대제사장 되신 예수님을 예표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중요한 것은 하나님이 사무엘을 부르신 것처럼 예수님을 직접 대제사장으로 부르신 증거가 어디 있느냐 하는 것입니다. 히브리서 저자는 바로 이 점과 관련하여 멜기세덱을 언급합니다.

 

(6)또한 이와 같이 다른데 말씀하시되 네가 영원히 멜기세덱의 반차를 좇는 제사장이라 하셨으니(히 5:6)

 

이 인용된 말씀은 시편 110편입니다. 이 시편 110편은 히브리서에 있어서 매우 중요한 말씀입니다.

 

(1)여호와께서 내 주에게 말씀하시기를 내가 네 원수로 네 발등상 되게 하기까지 너는 내 우편에 앉으라 하셨도다 ... (4)여호와는 맹세하고 변치 아니하시리라 이르시기를 너는 멜기세덱의 반차를 좇아 영원한 제사장이라 하셨도다(시 110:1,4)

 

이 시편 110편은 구약에서 매우 중요하고 또 유일하고 독특한 내용을 담고 있는 독보적인 말씀입니다. 이 110편은 구약의 다른 곳에서 전혀 언급되지 않은 두 가지 사실을 유일하게 언급하는데 첫째는 장차 오실 메시아께서 원수를 이기시고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으실 것이라는 사실입니다. “여호와께서 내 주에게 말씀하시기를 내가 네 원수로 네 발등상 되게 하기까지 너는 내 우편에 앉으라 하셨도다” 다윗은 성령의 감동 가운데 여호와 하나님과 구별되시는 또 다른 주님을 인식하였습니다. 여호와 하나님은 하나이시고, 그분에게만 주님이라는 칭호가 돌려져야 하는데, 다윗은 여호와 하나님과는 구별되시는 또 다른 주님이 계신다는 것을 성령의 감동하심 가운데 깨달았던 것입니다. 삼위일체의 신비를 다윗에게 희미하게 계시하신 것입니다. 그 신비한 계시 앞에서 다윗이 깨달은 것은 그분이 바로 이스라엘의 구속을 위해 오실 메시아이시라는 사실이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다윗에게 이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메시아가 온 세상의 왕이 될 것임을 계시하신 것입니다. 신약성경에서는 예수님께서 부활 승천하여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으셨다고 자주 언급하지만, 구약에서 장차 메시아가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을 것을 예언하는 구절은 이 시편 110편이 유일합니다.


그런데 4절에 보면 두 번째로 구약에서 단 한 번도 언급된 적이 없는 또 다른 독보적인 언급을 하는데, 그것은 그 메시아가 멜기세덱의 반차를 따라 대제사장이 되신다는 것입니다. 창세기 외에 구약 성경 전체에서 멜기세덱을 언급하는 구절은 이 시편 110편이 유일합니다. 이 시편 110편이 없었다면, 멜기세덱은 아무런 구속사적인 의미를 갖지 못한 채 그냥 조용히 사라질 인물이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다윗은 장차 오실 메시아께서 하나님의 직접적인 소명으로 말미암아 아론의 반차가 아닌, 멜기세덱의 반차를 따른 대제사장이 되실 것을 내다보았습니다. 이러한 계시의 말씀은 다윗 자신에게 있어서도 너무나 충격적인 것이었습니다. “어떻게 주님이라고 불리시는 그분이 메시아로 오셔서 왕이 되실 뿐만 아니라, 그 왕이 멜기세덱의 반차를 따라 대제사장이 되실 수 있단 말인가?” 정말 놀라운 말씀입니다.


히브리서 저자는 바로 이 구약의 예언의 말씀을 근거로 해서 예수 그리스도께서 비록 아론의 반차는 아니지만, 하나님의 직접적인 소명을 통해서 멜기세덱의 반차를 따른 대제사장이 되셨음을 증거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 멜기세덱과 그리스도와의 더 깊은 연관성은 7장 이후부터 보다 자세하게 설명됩니다.)


그래서 히브리서 저자는 이제 7절부터 그렇게 하나님께 직접 임명받아 대제사장이 되신 그리스도께서 어떻게 실제적으로 대제사장의 자격요건들을 갖추셔서 온전한 대제사장이 되셨는지 그 과정을 설명합니다.

 

(7)그는 육체에 계실 때에 자기를 죽음에서 능히 구원하실 이에게 심한 통곡과 눈물로 간구와 소원을 올렸고 그의 경외하심을 인하여 들으심을 얻었느니라(8)그가 아들이시라도 받으신 고난으로 순종함을 배워서(9)온전하게 되었은즉 자기를 순종하는 모든 자에게 영원한 구원의 근원이 되시고(10)하나님께 멜기세덱의 반차를 좇은 대제사장이라 칭하심을 받았느니라(히 5:7-10)

 

육체에 계신다는 말은 단순히 사람이 되신 것을 넘어서서, 죄 빼고 우리와 동일한 연약한 인성을 취하셨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예수님은 성육신하시기 전에도 하나님이셨고, 성육신하셔서 이 세상에 사시는 동안에도 하나님이셨고, 또 영광스러운 몸으로 부활하시고 승천하셔서 하늘 보좌 우편에 앉아 계신 지금도 변함없는 하나님이십니다. 그러나 사람의 몸을 입으시고 이 세상에 사시는 동안에는 예수님은 하나님 되신 신성을 초라한 인간의 성품의 아래에 감추신 것입니다. 하나님으로서는 모르시는 것이 없고 연약한 것이 없으셨지만, 예수님은 사람의 몸을 입으시고 이 세상에 내려오실 때는 스스로 모르는 것이 있도록 당신 자신이 선택하셨고, 스스로 인성의 연약한 부분을 짊어지셨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으로서 주님의 재림의 때를 모르셨을 리가 없지만, 예수님은 스스로 그 지식에서 감추어진 존재가 되셨습니다. 아들도 모르고 천사도 모르고 하나님 아버지만 아는 지식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육체의 연약함으로 때로는 우물가에서 죄 많은 여인에게 한 사발의 물을 청하셔야 했고, 갈릴리 바다를 배타고 건너실 때는 그 배안에서 피곤하여 골아떨어지기도 하셨던 것입니다. 그렇게 죄 있는 육신의 모양을 취하시고 연약한 인성에 온전히 참여하신 것입니다. 왜냐하면 우리의 대표가 되시기 위해서는 죄 빼고 모든 면에서 우리와 똑같은 사람이 되셔야 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렇게 온전히 인성을 취하신 것이 가장 절정으로 나타난 때가 바로 겟세마네 동산에서 눈물과 통곡으로 기도하실 때였습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의 죽음을 앞두고 그 십자가의 고난이 얼마나 무겁고 큰 것인지 겟세마네 동산에서 할 수만 있거든 이 잔을 내게서 지나가게 해달라고 하나님께 기도하셨습니다. 그냥 간절히 기도하신 정도가 아니라, 눈물과 통곡으로 기도하셨습니다. 통곡이라는 말은 절규하면서 고통 속에 신음하며 부르짖는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복음서의 기록을 보면...

 

(37)베드로와 세베대의 두 아들을 데리고 가실새 고민하고 슬퍼하사(38)이에 말씀하시되 내 마음이 심히 고민하여 죽게 되었으니 너희는 여기 머물러 나와 함께 깨어 있으라 하시고(39)조금 나아가사 얼굴을 땅에 대시고 엎드려 기도하여 가라사대 내 아버지여 만일 할만하시거든 이 잔을 내게서 지나가게 하옵소서 그러나 나의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 하시고(마 26:37-39)

 

심히 낙담하고 두려워하고 슬퍼하고 심지어는 죽을 정도로 고민하고 고뇌하셨던 것입니다. 마가복음의 기록을 보면 “심히 놀라시며 슬퍼하사”라고 되어 있고, 누가복음에서는 땀방울이 피방울이 되기까지 기도하셨다 라고 증거하고 있습니다. 그만큼 예수님은 십자가 앞에서 죽음의 공포로 벌벌 떠시면서, 극심한 고뇌와 고통 가운데서 절규하시면서, 자기를 죽음에서 능히 구원하실 이에게 할 수만 있으면 이 잔이 지나가게 해달라고 기도하셨던 것입니다.


이 기도 앞에서 우리가 혼란을 느끼는 것은 예수님은 하나님이신데, 어떻게 이런 고뇌와 갈등을 하시는가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렇게 생각하는 것은 그분이 우리와 똑같은 사람이라는 것을 깊이 생각하지 않은 것입니다. 비록 오류와 죄는 없으셨지만, 그분도 사람이셨기 때문에 이 십자가에서 참혹한 죽음을 당하시는 것이 너무나 두렵고 무서운 것이었습니다. 죄로 말미암아 영적으로 죽어 사망이 본질인 우리도 죽는 것이 그렇게 무섭고 두려운 일이 아닙니까? 그래서 사형수가 죽기 전에 너무 죽는 것이 두려워서 매우 낙담하면서 오줌을 지리는 경우가 많은 것입니다. 죽어 마땅한 우리 인간도 죽는 것이 그렇게 두렵고 무서운데, 하물며 생명이신 그분이 죽는다는 것은 그분의 본성을 전면으로 거스르는 것이기 때문에 예수님께도 죽는 것은 무서운 것입니다. 예수님이 하나님이라고 해서 죽음이 달콤할 리는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럴지라도 정말 예수님을 그렇게 낙담하게 하고 두렵게 하였던 것은 이 육체적인 죽음의 고통이 아니었습니다. 예수님이 그토록 고통스러워하시고 무서워하신 것은 그 죽음이 저와 여러분의 모든 죄를 다 짊어지시고 하나님으로부터 그 죄에 대한 진노가 쏟아 부어짐을 당해야 하는 저주의 죽음이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즉 하나님이 늘 함께 동행 하시고 하나님의 무한한 사랑의 대상이셨던 그분이 그분으로부터 버림을 받고 그분의 진노와 저주의 대상이 되는 것이야말로 예수님이 그렇게 낙담하고 무서워하셨던 이유인 것입니다. 이것은 그분이 하나님의 아들이시라도 전혀 경험해 본적이 없는 무서운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 안에 있는 인성의 의지는 이 잔이 지나가기를 세 번씩이나 기도하셨던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자신이 죽으시지 아니하고는 우리의 모든 죄를 속할 수 없다고 하는 사실을 알고 계셨습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 바로 이 일을 위해서 이 세상에 친히 오셨음도 알고 계셨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그러나 나의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뜻대로 하옵소서” 하고 기도하신 것입니다. 그렇게 겟세마네 동산에서 간절히 자기를 쏟아 부어 통곡과 눈물로 기도하시면서 예수님께서는 자기 인성의 의지를 누르고 하나님의 뜻에 온전히 굴복하심으로 당신 자신을 하나님 앞에 바치셨습니다. 그것은 자기 꺾음의 기도인 것입니다.


그렇게 간절히 기도하시고 눈물과 통곡으로 간구와 소원을 올려드렸을 때, 하나님께서 어떻게 응답하셨습니까? 오늘 본문에 보면 “경외하심을 인하여 들으심을 얻었느니라” 라고 말씀합니다. 즉 하나님께서는 그 기도에 응답하시고, 그로 하여금 그 십자가의 잔을 마실 수 있도록 도와주셨던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숨을 거두시기 전까지 그렇게 하나님께 신음하며 부르짖으시고, 그분께 자신의 영혼을 온전히 의탁하셨을 때, 그 부르짖는 기도에 응답하셔서 그를 죽음에서 건져내셔서 삼일 만에 부활시키시고 하늘 보좌 우편에 앉히사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을 주시고, 만물로 그 앞에 절하게 하셨던 것입니다. 경외하심을 인하여 들으심을 얻은 것입니다. 여기서 경외하심이란 겸손과 절대적인 복종을 의미합니다.


이렇게 온전히 순종하심으로써 그분은 비로소 대제사장으로서 온전한 자격을 구비하게 되신 것입니다. 오늘 본문은 그분이 고난으로 말미암아 순종을 배워 온전하게 되었다고 말씀합니다. 하나님의 아들이시라도 이렇게 십자가 죽음의 고난 앞에서 자기 뜻을 꺾어 순종하는 법을 배우셔야 하셨던 것입니다. 그리하여 온전하게 되셨는데, 이 온전하다는 말이 사실 히브리서에서 매우 중요한 단어입니다. 온전하다는 말은 꽉 채워진 상태, 완전한 상태, 어떤 목적을 이루고 완성하여 끝내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 단어가 우리에게 사용될 때는 분명 도덕적인 차원에서 사용된 것입니다.

 

(14)저가 한 제물로 거룩하게 된 자들을 영원히 온전케 하셨느니라(히 10:14)

 

즉 우리가 죄를 사함 받고, 온전히 의롭게 되어서 하나님 앞에 나아가기에 전혀 하자가 없고 완벽한 자격을 갖춘 그런 자가 되었다는 것을 온전케 되었다고 표현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사함 받아야 할 죄가 없으셨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이 온전케 되셨다는 것은 그런 도덕적 차원에서 하는 말이 아니라, 그분이 대제사장이 되시는 것과 관련해서 사용되고 있는 것이죠. 즉 예수님께서 고난으로 순종함을 배워서 비로소 대제사장으로서 자격을 온전히 구비하신 것입니다. 그리하여 예수 그리스도는 십자가에서 대속의 죽음을 죽으심으로 말미암아서 누구든지 자기에게 나아오는 자에게 온전한 죄사함과 구원을 주실 수 있는 참 대제사장이 되신 것입니다. 이러한 대제사장을 우리가 소유하고 있는 것이고, 때문에 우리가 그분으로 말미암아 온전한 죄사함과 영원한 구원을 누리게 된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 “자기를 순종하는 모든 자에게 영원한 구원의 근원이 되시고”라고 하였습니다. 주님이 우리에게 주신 구원은 불완전한 구원이라든지, 행위가 덧붙여져야 하는 구원이라든지, 반쪽짜리 구원이라든지 그런 것이 아니라, 영원히 온전한 구원입니다. 한번 구원받으면 영원히 취소될 수 없는 그런 구원인 것입니다. 우리가 바로 이런 구원의 은혜를 얻은 것이고, 뿐만 아니라, 지금도 예수님께서는 우리를 향한 긍휼과 자비의 마음으로 동정하시고 우리로 신앙의 길을 계속해서 걸어갈 수 있도록 도움을 주시기를 원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우리에게 허락된 대제사장을 믿는 마음으로 담대하게 은혜의 보좌 앞에 나아가서 그러한 은혜를 날마다 누리는 삶을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주목해야 할 것은 이러한 영원한 구원의 은혜가 누구에게 주어지느냐 하는 것입니다. 순종하는 자에게 영원한 구원의 근원이 되신다고 했습니다. 솔직히 우리는 본문이 ‘순종하는 자’에게가 아니라 ‘오직 믿는 자’에게 영원한 구원의 근원이 되신다 라고 기록되었으면 하는 바람이 있습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순종에는 자신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히브리서 저자는 믿는 자는 반드시 순종할 것임을 알았기 때문에, 오직 순종하는 자에게 이 구원의 은혜가 주어진다고 말씀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히브리서 저자는 순종하는 자만이 예수 그리스도께서 고난으로 순종함을 배워서 이루신 대속의 공로를 누릴 수 있음을 말함으로써 예수님을 우리의 순종의 모범으로 제시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믿는 우리는 이 주님의 순종을 본받아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주님의 뜻에 순종하는 것이 쉽습니까? 어렵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뜻대로 살려하면 이 세상에서 반드시 여러 가지 대가를 치러야 하고, 또 고난을 받아야 하기 때문입니다. 히브리서 수신자들도 바로 이 고난 앞에서 주저하면서 순종의 삶에서 후퇴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자기 꺾음이 없기 때문입니다. 자기 꺾음 없이는 절대로 순종할 수가 없습니다. 나는 이것이 정말 하기 싫은데, 하나님께서는 너무 원하시는 것일 때, 우리는 이것을 하기 싫은 자기 뜻을 분질러 버리는 자기 꺾음을 통해서만 그 뜻에 순종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만 자기를 부인하고 십자가 지시고 순종하신 것이 아니라,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말씀하시기를 “아무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을 것이니라” 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우리도 예수님처럼 날마다 자기 뜻을 꺾고 하나님의 뜻에 자기를 복종시키는 삶을 살아가는 것이 바로 예수님의 제자로서 살아가야 하는 삶인 것입니다.


이러한 자기 꺾음은 예수님께서 눈물과 통곡으로 기도하셨던 것처럼 그렇게 눈물과 통곡으로 간절하게 기도하는 것을 통해서만 가능합니다. 즉 나의 무능력함과 죄 때문에 눈물과 통곡의 기도를 드리고, 또 이러한 나의 죄 때문에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셨다는 것으로 인해서 통곡하며 울 때, 그 십자가의 은혜가 우리의 죄를 죽이고, 꺾는 것입니다.


주님은 여러분들을 구원하시기 위해서 겟세마네 동산에서 땀방울이 피방울이 되기까지 눈물과 통곡으로 기도하시고 그렇게 자기의 뜻을 꺾어 십자가의 길을 가셨는데, 여러분은 이 주님을 위해서 얼마나 눈물과 통곡으로 기도하고 날마다 자기 꺾음을 통해 순종의 삶을 살아가십니까? 우리는 우리 자신을 돌아보고, 우리의 기쁨을 애통으로, 우리의 즐거움을 통곡으로 바꾸어야 합니다. 애통하는 자가 복이 있다고 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은혜를 주셔서 우리로 먼저 이 주님의 겟세마네 기도에서 나타나는 우리를 향한 크신 은혜와 사랑을 깊이 깨닫게 하여 주시기를 기도합니다. 그리하여 그 은혜를 힘입어 십자가를 지신 주님의 순종을 본받는 저와 여러분들이 되게 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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