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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 최상범
성경본문 히 8:8-13
성경본문내용 (8)저희를 허물하여 일렀으되 주께서 가라사대 볼지어다 날이 이르리니 내가 이스라엘 집과 유다 집으로 새 언약을 세우리라(9)또 주께서 가라사대 내가 저희 열조들의 손을 잡고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내던 날에 저희와 세운 언약과 같지 아니하도다 저희는 내 언약 안에 머물러 있지 아니하므로 내가 저희를 돌아보지 아니하였노라(10)또 주께서 가라사대 그날 후에 내가 이스라엘 집으로 세울 언약이 이것이니 내 법을 저희 생각에 두고 저희 마음에 이것을 기록하리라 나는 저희에게 하나님이 되고 저희는 내게 백성이 되리라(11)또 각각 자기 나라 사람과 각각 자기 형제를 가르쳐 이르기를 주를 알라 하지 아니할 것은 저희가 작은 자로부터 큰 자까지 다 나를 앎이니라(12)내가 저희 불의를 긍휼히 여기고 저희 죄를 다시 기억하지 아니하리라 하셨느니라(13)새 언약이라 말씀하셨으매 첫 것은 낡아지게 하신 것이니 낡아지고 쇠하는 것은 없어져 가는 것이니라
강설날짜 2012-10-21

2012년 10월 21일 한결교회 주일예배강설

히브리서 제20강


새 언약


말씀 : 히 8:8-13


지난주 말씀 6절에 보시면, “(6)그러나 이제 그가 더 아름다운 직분을 얻으셨으니 이는 더 좋은 약속으로 세우신 더 좋은 언약의 중보시라”에서 “더 좋은 언약의 중보시라”라는 말씀이 매우 중요한 말씀입니다. 여기서 처음으로 “중보”라는 말이 등장하는데, 이 중보라는 말에 대해서는 9장에 가서 보다 집중적으로 살펴볼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그냥 중보자가 아니라 더 좋은 언약의 중보자라는 것입니다. 즉 옛 언약도 좋은 것이지만, 그러나 새 언약은 더 좋은 것입니다. 그러면 더 좋은 새 언약이 왔으면, 옛 언약은 새 언약에게 자리를 양보하고 없어져야 하는 것입니다. 새 차를 샀으면, 낡은 옛날 차는 팔든지 폐차하든지 해야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에게는 너무나 당연해 보이는데, 히브리서 수신자들에게는 이 문제가 쉽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모세와 율법을 절대적으로 신봉하고, 오직 성전에 있는 대제사장의 중보를 통해서만 하나님을 만날 수 있다고 생각하는 유대교에 있다가 기독교로 개종한 자들입니다. 그래서 복음을 전해 듣고 기적들을 체험하면서 놀라운 감격 가운데 예수님을 믿어 영접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믿고 더 나은 신앙을 소유했다고 하는데, 신앙현실은 나아지는 것이 없고, 고난과 핍박이 몰려오고, 그러면서 영적인 게으름가운데 점차로 믿음을 잃어가면서, 저들의 마음 깊이 “예수를 믿고 오래도록 하나님의 뜻이라고 믿고 충성해온 모세와 율법을 버린 것이 과연 잘한 짓인지...” 그런 의심이 들고, 불안감이 생기는 것입니다. 그래서 어떤 이들은 아예 기독교 신앙을 포기해버리고, 유대교로 돌아가려는 자들도 있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히브리서 저자는 (우리에게는 너무나 당연한 이야기일 수도 있는 이 이야기를) 유대인 신자들에게 아주 집요할 정도로 강력하게 논증해가고 있는 것입니다. 옛 언약은 폐하여졌고, 새 언약이 도래하였으며, 옛 언약은 모형이고, 새 언약이 실체이고, 옛 언약은 한계가 있고 무익하지만, 새 언약은 온전한 구원의 효력을 가져다준다 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런 이야기들이 우리에게는 어떤 의미가 있을까요? 어떻게 보면 “히브리서 전체가 우리에게 주는 메시지가 뭐냐? 그리스도께서 더 좋은 새 언약의 중보가 되시고 대제사장이 되신다는 것이 도대체 우리에게 무슨 의미인가?” 하는 질문을 해볼 수 있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히브리서 수신자들처럼 유대교로 돌아갈 리도 없고, 새 언약이 옴으로써 옛 언약이 폐하여졌다는 것을 부인할 사람이 없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이 서신이 우리에게 어떤 적실성이 있어서 우리에게 어떤 메시지를 던져주고 있는가?” 히브리서를 계속 읽어가면서 이 질문을 계속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 질문의 답은 이렇습니다. 언뜻 보면 히브리서 수신자와 우리의 상황이 매우 다른 것처럼 보입니다. 그래서 히브리서 수신자들에게는 이런 이야기들이 중요했지만, 우리들에게는 별로 중요하지 않는, 좀 진부한 이야기로 들릴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겉만 보지 말고 본질을 들여다보면, 우리나 히브리서 수신자들이나 영적으로 비슷한 상황에 있다는 것을 발견하게 됩니다.

 

히브리서 수신자들이 기독교 복음에 대한 회의를 가지면서 유대교로 돌아가려고 하고 있는 것처럼, 마찬가지로 우리도 신앙의 길을 계속 걸어가는 것을 멈추고 세상으로 돌아가려고 하고 있지 않습니까? 그리고 믿음과 소망을 잃어버리고 영적 게으름 가운데 병적 유아상태에 머무르면서 신앙의 뒷걸음질 치고 있다는 점에서 우리와 히브리서 수신자들의 상황이 똑같지 않습니까? 그러므로 앓고 있는 영적 질병이 동일하므로, 처방도 동일한 것입니다. 히브리서 메시지는 다 아는 진부한 이야기가 아니라, 오늘날 우리들에게도 꼭 필요한 생명의 말씀이고, 우리의 신앙을 새롭게 하는 능력의 말씀으로 다가오는 것입니다.

 

히브리서는 우리를 향해 근본 두 가지 메시지를 담고 있습니다. 첫째는, 세상을 사랑하고 세상과 벗함으로 말미암아 신앙의 행진을 포기할 때에는 결국 흘러 떠내려가서 비참한 멸망에 이르고 말 것이다 라고 하는 경고의 말씀을 우리에게 줍니다. 두 번째는, 늘 자신의 연약함으로 인해서 낙심하고 절망할 수밖에 없는 우리를 멜기세덱의 반차를 따른 대제사장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가르침으로 위로하고 격려하여서, 우리로 하늘 소망을 가지고 믿음의 행진을 계속해 가도록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현재의 영적침체를 극복하고, 우리의 불신앙을 회개하고 다시 은혜를 받아 주저앉아 있던 자리에서 일어나서 다시금 신앙의 행진을 힘차게 해나갈 수 있게 하는 유일한 방법은 더 좋은 언약의 중보가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깊은 깨달음을 통해서만 되는 것입니다.

 

그냥 중보자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깨달음으로는 불충분합니다. 물론 이것만 알아도 구원은 받을 수는 있지만, 그러나 거듭난 신자가 장성한 분량에까지 자라가기 위해서는 반드시 구약과 비교해서 그분이 더 좋은 언약의 중보자 되신다는 것을 깨달아야 합니다.

 

색상 대비 중에 가장 눈에 띄는 효과를 내는 대비를 보색대비라고 합니다. 그 대표적인 예가 노란색과 검정색인데, 눈에 잘 띄기 때문에 교통 표지판이나, 과속방지턱에 주로 사용됩니다. 그냥 노란색만 있을 때는 눈에 잘 띄지 않지만, 그 옆에 검정색이 있는 노란색은 아주 눈에 확 들어오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히브리서가 반복적으로 하는 말씀, “곧 구약보다 신약이 더 우월하다. 옛 언약보다 새 언약이 더 좋다. 레위 대제사장보다 멜기세덱의 반차를 따른 대제사장 예수 그리스도께서 비교할 수 없이 탁월하시다...” 라는 말씀은 우리로 하여금 복음에 대하여 더욱 명확하고 깊이 깨닫도록 하는 말씀인 것입니다.

 

이런 이야기를 오늘도 하겠지만, 특별히 9장과 10장에 가면 많이 할 것입니다. 레위 대제사장이 제사 드리고 중보의 사역을 한 것과 예수 그리스도께서 대제사장으로서 중보의 사역이 어떤 차이가 있는지 중점적으로 논하게 될 것입니다. 이를 통해서 우리가 십자가 복음을 깊이 깨달을 때, “우리에게 허락된 이 구원이 그냥 구원이 아니라, 큰 구원이구나, 가볍게 여길 것이 아니구나” 하면서 그 가치를 깨닫게 되어지고, 우리에게 허락된 한없는 은혜들과 수많은 혜택들이 얼마나 대단한 것이고 놀라운 특권인가 하는 것을 알게 되어지는 것입니다. 그러할 때 우리가 바로 소위 영적으로 철이 드는 것입니다. 옛날에 철이 없었을 때에는 복음을 가볍게 여기고, 쉽게 그 은혜를 망각하면서 죄 가운데 살았는데, 영적으로 철이 들면 복음의 은혜의 위력을 알게 되고, 이런 복음을 듣고도 불신앙의 삶을 지속할 때 얼마나 큰 책임이 따르는지 깨닫고 정신을 바짝 차리게 되고, 또 하나님의 마음을 알게 되면서, 이제 죄 가운데 살던 삶을 청산하고 믿음과 오래 참음과 소망의 담대함을 끝까지 붙잡으면서 고난의 순례의 길을 계속하여 행진해 나아갈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장성하여 완전한 데로 나아간다는 것의 의미입니다. 우리가 히브리서를 통해 이런 은혜를 받을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그래서 히브리서의 핵심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더 좋은 언약의 중보자가 되신다는 것입니다. 중보에 대해서는 다음에 살펴보고 오늘은 먼저 언약에 대해서 얘기해보고자 합니다. 새 언약이 왜 옛 언약보다 탁월한가? 왜 옛 언약이 폐하여질 수밖에 없고, 새 언약이 와야만 했는가? 하는 것을 오늘 본문이 말씀하고 있습니다. 특히 오늘 본문 7절과 13절이 같은 이야기를 하면서 오늘 본문 전체를 감싸고 있습니다.


(7)저 첫 언약이 무흠하였더면 둘째 것을 요구할 일이 없었으려니와(히 8:7)

(13)새 언약이라 말씀하셨으매 첫 것은 낡아지게 하신 것이니 낡아지고 쇠하는 것은 없어져 가는 것이니라(히 8:13)


7절은 옛 언약이 흠이 있기 때문에 새 언약이 와야 했다는 것이고, 13절은 새 언약이 왔다는 것 자체가 바로 역으로 옛 언약은 낡고 쇠하는 것으로서 없어져야 한다는 것을 말해준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옛 언약은 폐하여지고 새 언약이 도래했다는 내용으로 인클루지오 구조를 이루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사이에 예레미야 31장의 새 언약을 약속하시는 말씀을 인용하는 것입니다. 이 말씀은 우리가 언약적 구속사를 배우면서 많이 다루었던 본문입니다. 이 구절은 옛 언약과 새 언약을 연결시키는 아주 중요한 구절이죠. 그런데 이 중요한 구절이 신약성경 어디에서도 단 한 번도 인용되지 않고 있는데, 오직 히브리서가 이 구절을 인용하고 있는 것입니다. 히브리서가 없었으면 어떻게 될 뻔했습니까? 다시 한 번 히브리서의 가치가 여실히 드러납니다. 예레미야 본문을 찾아서 읽어보십시다.


(31)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보라 날이 이르리니 내가 이스라엘 집과 유다 집에 새 언약을 세우리라(32)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이 언약은 내가 그들의 열조의 손을 잡고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내던 날에 세운 것과 같지 아니할 것은 내가 그들의 남편이 되었어도 그들이 내 언약을 파하였음이니라(33)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그러나 그 날 후에 내가 이스라엘 집에 세울 언약은 이러하니 곧 내가 나의 법을 그들의 속에 두며 그 마음에 기록하여 나는 그들의 하나님이 되고 그들은 내 백성이 될 것이라(34)그들이 다시는 각기 이웃과 형제를 가리켜 이르기를 너는 여호와를 알라 하지 아니하리니 이는 작은 자로부터 큰 자까지 다 나를 앎이니라 내가 그들의 죄악을 사하고 다시는 그 죄를 기억지 아니하리라 여호와의 말이니라(렘 31:31-34)


오늘 본문 말씀하고 이 원본 말씀하고 대체적으로 일치하지만 조금씩 차이가 나는데, 그런 부분들은 우리가 눈 여겨 보아야 합니다. 그런 곳에 강조점이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러면 우선 우리는 이 예레미야 31장이 어떤 문맥에서 주어지고 있는지 알아야 합니다. 예레미야서는 이스라엘이 범죄하여 언약을 파기했기 때문에 결국 저주를 받아 바벨론에 함락되고, 바벨론 포로로 잡혀갈 것이라고 하는, 이스라엘을 향해 심판을 선고하는 말씀입니다. 어떻게 보면 이런 상황은 “이제 모든 것이 끝이구나” 하는 절망과 좌절의 상황인데, 그 가운데서 하나님께서는 예레미야에게 새 언약의 희망을 보게 하시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나라가 망했다고 해서 하나님 나라가 망한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계획이 실패한 것이 아닙니다. 사실은 이스라엘 나라가 망한 것도 하나님의 계획 하에 있었고, 그것을 통해서 옛 언약으로는 안 된다는 것을 드러내시고, 새 언약이 와야 한다는 것을 나타내신 것입니다.

 

그러면 왜 옛 언약으로는 안 되고 새 언약이 와야 합니까? 이 둘은 어떤 근본적인 차이가 있을까요? 이것이 오늘 본문의 포인트입니다. 먼저 옛 언약은 흠이 있다는 것입니다.


(7)저 첫 언약이 무흠하였더면 둘째 것을 요구할 일이 없었으려니와(8)저희를 허물하여 일렀으되 주께서 가라사대 볼지어다 날이 이르리니 내가 이스라엘 집과 유다 집으로 새 언약을 세우리라


어디에 흠이 있습니까? 8절에 “저희를 허물하여 일렀으되....”라고 하였습니다. 여기서 “저희는” 이스라엘 백성들입니다. “허물한다”는 말은 “탓하다, 나무라다”는 뜻입니다. 즉 옛 언약의 흠은 무엇입니까? 언약의 당사자인 이스라엘 백성들이 흠이라는 것입니다. 무슨 하나님이 잘못이 있다거나, 언약이 잘못된 언약이라거나, 언약의 내용상 잘못된 부분이 있는 것이 아니라, 다 흠이 없는 온전한 언약인데, 그 언약을 맺는 당사자인 이스라엘 백성들이 흠이 있는 것입니다. 무슨 흠입니까? 그들은 근본 목이 곧은 백성이라는 것입니다. 마음이 돌같이 굳어 있어서 근본 하나님을 사랑하지 아니하고 하나님의 뜻을 순종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아담이 타락한 이래로 모든 인생들이 그러합니다. 그래서 사람은 태어나면서부터 그 마음에 온갖 더러운 정욕과 추악한 탐욕으로 가득하고, 하나님에 대한 적개심으로 가득 차 있고, 하나님의 뜻에 전적으로 저항하고자 하는 악한 본성이 자리 잡고 있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도 다를 바 없는 그런 죄인들인데, 이런 사람들을 하나님이 그 애굽의 비참한 노예생활 하던 데서 손을 잡고 건져내어 놀라운 구원을 주시고 가나안 땅으로 인도해 가시면서, 낮에는 구름기둥으로, 밤에는 불기둥으로 보호하시고, 마실 물이 없으면 마실 물을 주시고, 하늘의 만나를 내려주셔서 먹이시고, 메추라기를 주셔서 고기도 배부르게 먹게 하시고, 신발이 해어지지 아니하도록 보호하셨고... 등등 일일이 다 말할 수 없을 만큼 하나님께서 놀라운 은혜와 자비와 권능으로 그들을 마치 독수리가 자기새끼를 업어서 날아가는 것처럼 그렇게 그들을 인도하셨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어떻게 합니까? 틈만 나면 하나님께 원망불평하고, 금송아지 만들고, 불순종하고 거역하고, 우상숭배하고, 모세한테 대들고, 가나안 땅에 가서도 들어가자마자 하나님 잊어버리고 우상을 숭배하며 음란하고 방탕한 삶을 살았던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이런 그들을 당장에 진멸하셔도 하나님은 의로우신 것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그들과 맺은 언약이 순종하면 복을 받지만, 불순종하면 저주를 받기로 그렇게 서로 언약을 맺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긍휼이 한이 없으신 하나님께서는 당장에 멸하지 아니하시고, 선지자들을 보내셨습니다. “돌아와라... 돌아오면 이때까지 지은 죄 없던 걸로 해주겠다. 돌아와라...” 아무리 외쳐도 돌아오지를 않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뭐라고 하십니까?


(24)그들이 청종치 아니하며 귀를 기울이지도 아니하고 자기의 악한 마음의 꾀와 강퍅한 대로 행하여 그 등을 내게로 향하고 그 얼굴을 향치 아니하였으며(25)너희 열조가 애굽 땅에서 나온 날부터 오늘까지 내가 내 종 선지자들을 너희에게 보내었으되 부지런히 보내었으나(26)너희가 나를 청종치 아니하며 귀를 기울이지 아니하고 목을 굳게 하여 너희 열조보다 악을 더 행하였느니라(렘 7:24-26)


그래서 결국 하나님께서 칼을 드시고 언약법에 정해진 대로 그들을 심판하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당시 유대인들 가운데 거의 대부분이 칼에 진멸당하여 죽었습니다. 어른이든 아이든 갓난아기든 상관없이 다 칼로 처참하게 도륙을 당해 죽임을 당하였고, 예루살렘 성벽은 무너지고, 성전은 파괴되어지고, 남은 자는 포로로 잡혀갔습니다. 포로로라도 살아서 잡혀가게 하시는 것이 진노 중에라도 긍휼을 잊지 아니하시는 하나님의 큰 은혜인데, 어쨌든 하나님은 그렇게 그들을 향하여 진노하셨던 것입니다.


(9)또 주께서 가라사대 내가 저희 열조들의 손을 잡고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내던 날에 저희와 세운 언약과 같지 아니하도다 저희는 내 언약 안에 머물러 있지 아니하므로 내가 저희를 돌아보지 아니하였노라


저희가 내 언약 안에 머물러 있지 아니하는 것이 바로 옛 언약의 한계인 것입니다. 그들은 근본 목이 곧은 백성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자주 말씀하시기를 “너희는 목이 곧은 백성이니, 고추에다가 할례를 행하지 말고, 마음에 할례를 행해라.” 그렇게 말씀하셨습니다. 그런데 사람 스스로가 자신의 마음에 할례를 행할 수 있습니까? 이런 고질병을 스스로 고칠 수 있습니까? 안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 이 언약은 처음부터 실패가 뻔히 보이는 언약인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도 처음부터 그것을 아셨습니다. (그것을 아시면서도 언약을 맺으신 것이 놀라운 섭리의 은혜인데),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모세를 통해서 처음부터 그것을 예고하셨습니다. 나중에 신명기 29장 이후부터 한번 읽어보십시오. 특히 31장에 나오는 모세의 노래를 보십시오. 그들이 결국 불순종함으로 언약의 저주를 당하여 진멸당하고 대적의 포로로 잡혀갈 것을 예언을 하고 있습니다. 너희가 목이 곧은 백성이기 때문에 결국 실패할 수밖에 없다는 것을 하나님께서는 처음부터 일러주신 것입니다. 그러나 그런 절망적인 말씀으로 끝이 아닙니다.


(5)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를 네 열조가 얻은 땅으로 돌아오게 하사 너로 다시 그것을 얻게 하실 것이며 여호와께서 또 네게 선을 행하사 너로 네 열조보다 더 번성케 하실 것이며(6)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 마음과 네 자손의 마음에 할례를 베푸사 너로 마음을 다하며 성품을 다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게 하사 너로 생명을 얻게 하실 것이며(7)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 대적과 너를 미워하고 핍박하던 자에게 이 모든 저주로 임하게 하시리니(신 30:5-7)


하나님께서 놀라운 회복의 은혜를 약속해주시는데, 하나님께서 다시 이스라엘을 가나안 땅으로 돌아오게 하시고, 하나님이 직접 그들의 마음에 할례를 행해주시겠다고 약속해주시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새 언약입니다. 새 언약의 약속이 벌써 모세 때에 주어진 것입니다.

 

그래서 중요한 것은 이스라엘의 근본 목이 곧은 문제로 인해서 이 옛 언약은 오래가지 못하고, 파기될 수밖에 없었다는 것이고, 그러나 새 언약은 그렇지 않다는 것입니다. 새 언약은 저들의 손을 잡고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내던 날에 저희와 세운 언약과 같지 않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다른 것입니까?


(10)또 주께서 가라사대 그날 후에 내가 이스라엘 집으로 세울 언약이 이것이니 내 법을 저희 생각에 두고 저희 마음에 이것을 기록하리라 나는 저희에게 하나님이 되고 저희는 내게 백성이 되리라(히 8:10)


새 언약은 옛 언약과는 다르게 하나님의 법(율법)을 마음에 기록했다는 것입니다. 우선 우리가 여기서 먼저 확인해야 할 것은 새 언약은 내용면에서 옛 언약과 다르지 않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새 언약도 언약법이 율법(하나님의 법)입니다. 율법이 옛 언약에만 해당되는 것이고, 새 언약에 와서는 이제 필요 없기 때문에 공중 분해되어서 사라졌다라고 생각하면 안 됩니다. 옛 언약이나 새 언약이나 언약법은 율법으로 동일합니다. 그리고 약속도 동일합니다. “나는 그들의 하나님이 되고 그들은 내 백성이 될 것이라” 유일한 차이는 그 언약을 성취하는 방법에서 차이가 납니다.

 

옛 언약은 외적인 간섭입니다. 나 “밖에” 있는 돌판에 율법을 기록하셨습니다. 우리 “밖에서” 하나님께서 우리의 손을 잡고 우리의 남편이 되어 우리를 간섭하시고 인도하시는 것이 옛 언약의 본질입니다. 그러나 새 언약은 그렇지 않습니다. 새 언약은 외부로부터의 간섭이 아니고 내면의 간섭입니다. “내가 나의 법을 그들의 속에 두며 그 마음에 기록하여” 그러면 하나님의 율법을 마음에 기록한다는 것이 도대체 무슨 의미입니까? 이 점에 대해서 에스겔서가 보충설명을 합니다.


(19)내가 그들에게 일치한 마음을 주고 그 속에 새 신을 주며 그 몸에서 굳은 마음을 제하고 부드러운 마음을 주어서(20)내 율례를 좇으며 내 규례를 지켜 행하게 하리니 그들은 내 백성이 되고 나는 그들의 하나님이 되리라(겔 11:19-20)


굳은 마음은 돌 같은 마음입니다. 하나님께 대하여 완고하고 하나님을 대적하는 돌 같은 마음을 제거하고, 하나님을 사랑하고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는 부드러운 마음을 준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들로 율법을 지켜 행하게 하신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께서 율법을 우리 마음에 기록한다는 것의 의미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해서 돌 같은 마음이 제거되고, 마음에서부터 하나님을 사랑하고, 경외하고 그분의 뜻에 자원함으로 순종할 수 있도록 만들어주시는 것입니까? 그것이 바로 새 신, 곧 성령을 주심으로 가능하다는 것입니다.

 

앞에서 마음의 할례도 같은 개념입니다. 할례는 남자 성기의 겉 표피를 잘라내는 의식을 말하는데, 이것은 더러운 것을 제거해서 정결케 하였다는 의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신명기 말씀에서 내가 친히 마음에 할례를 행해주시겠다고 약속하셨는데, 그것이 바로 이 에스겔 말씀과 동일한 말씀인 것입니다. 성령으로 마음의 할례를 행해주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 니고데모에게 뭐라고 말씀하셨습니까?


(5)예수께서 대답하시되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사람이 물과 성령으로 나지 아니하면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느니라(요 3:5)


물과 성령으로 다시 태어나지 아니하면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다고 말씀하셨는데 이것이 매우 중요한 말씀입니다. 물은 더러운 것을 씻어서 깨끗하게 한다는 것입니다. 바로 성령이 우리 마음 안에 더러운 것을 제거하여 깨끗하게 만들어주신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거듭남, 중생이고, 이 물과 성령으로 거듭나는 중생의 은혜가 바로 새 언약과 옛 언약의 근본 차이점입니다.

 

여러분 우리가 거듭남의 은혜를 가볍게 생각하는데, 왜냐하면 예수 믿는 사람은 다 거듭난 사람이니깐, 거듭남이라고 하는 것을 우리가 경험하는 은혜 중에 가장 낮은 수준의 기초적인 은혜라고 생각하는데, 그것은 큰 착각입니다. 예수 믿는 자마다 누구나 누리는 이 거듭남의 은혜라는 것이 구약의 백성들은 꿈도 꾸지 못한 은혜입니다. 이런 거듭남의 은혜를 누릴 수 있다는 것, 새 언약 백성이라는 것이 결코 가볍게 볼 수 없는 은혜임을 우리는 알아야 합니다.

 

어? 그러면 구약의 백성들은 전혀 거듭나지 못했고, 그러면 구원받지 못했습니까? 구약 백성들이 다 지옥 갔을 리는 없습니다. 그러나 구원받은 구약의 백성들이 다 거듭난 자냐? 그렇게 말할 수 없습니다. 엄밀하게 말하면 그들은 그 거듭나게 하시는 성령이 오시기를 기다리는 믿음 안에서 살았고, 바로 그 믿음으로 우리를 구원하는 성령의 사역과 본질적으로는 동일한 은혜를 그들도 받았던 것입니다. 그래서 성령이 모든 언약의 백성들에 다 임한 것이 아니라, 제한적으로 몇몇 사람들에게 임했던 것이고, 우리와 동일한 임하심이 아니라, (질적으로는 동일하지만) 그것은 어떻게 보면 임시적이고 잠정적인 성격이 많은 것입니다. 그들은 옛 언약에 계시된 복음의 모형과 흔적을 통해서 그리스도를 바라보았고, 하나님 나라가 임하기를 소망하는 그 믿음으로 그들은 구원받았고, 하나님과의 깊은 친교를 누렸던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의 마음은 늘 희미하고 답답할 수밖에 없고, 질적인 면에서는 동일하지만, 양적인 면에서 그들이 받은 은혜가 우리보다 풍성하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그런 희미한 모형을 보고도 하나님께 감사하고 찬양한 다윗의 시편의 고백들을 보십시오. 우리는 그들의 고백을 보고 부끄러워해야 합니다. 모형을 보고 그렇게 기쁨으로 감사하고 찬양했다면, 우리는 그들이 그렇게 보고 싶어 했던 실체이신 예수님을 보았으니, 얼마나 더 기뻐하고 감사하고 찬양해야 하겠습니까? 그러나 다윗만큼도 감사하지 못할 뿐만 아니라, 우리는 매일을 살아도 별로 감사한 것이 없고, 기쁘지 않고, 행복하지 않은 것입니다. 우리가 거듭남의 은혜를 받았다는 것, 새 언약의 백성이 되었다는 것에 대한 감사가 없습니다. 도리어 우리가 얼마나 복음을 우습게 여기면서 살 때가 많습니까? 주님이 우리를 위해 십자가에 죽으신 것이 장난입니까? 우리를 거듭나게 하서 우리 안에 성령을 주신 것이 장난입니까? 과연 우리가 병적인 유아상태에 머무르면서 지속적으로 하나님을 거스르면서 사는 것이 가합니까? 사도 바울이 고린도 교회에 이렇게 외쳤습니다. “너희 몸은 너희가 하나님께로부터 받은바 너희 가운데 계신 성령의 전인 줄을 알지 못하느냐 너희는 너희의 것이 아니라”(고전 6:19) “너희가 구약 백성들이 누리지 못했던 그런 성령의 거듭나게 하시고 우리 안에 내주하고 계시는 놀라운 은혜를 받았는데, 너희가 그 은혜를 가볍게 여기고 음란과 방탕에 몸을 내어주느냐... 너희가 지금 제정신이냐”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지금 그렇게 살고 있지 않습니까?

 

여러분 우리는 정신을 차려야 합니다. 주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이 은혜가 얼마나 큰 것인지를 깨달아야 합니다. 이 큰 구원을 우리가 등한히 여기면 받게 될 형벌이 얼마나 중하겠습니까? 우리는 이 점을 늘 주의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은혜를 주셔서 우리로 이 새 언약 축복이 얼마나 큰 것인지를 깨닫는 은혜를 허락하여 주시기를 기도합니다. 그리하여 우리를 이 새 언약의 은혜 위에 굳게 세워주시기를 기도합니다.

 

그런데 한 가지 문제가 있습니다. 성령의 거듭나게 하시는 사역으로 말미암아 우리 안에 근본 하나님을 대적하는 죄악된 본성을 제거하셨지만, 그러나 다 제거하신 것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죄악된 본성이 여전히 한 쪽 구속에 남아있는 것입니다. 주도적으로 흐르는 감정은 하나님의 법을 즐거워하고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이 있지만, 그러나 또 다른 내가 있는데, 육체의 정욕대로 살고자 하는 옛 사람의 본성이 남아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둘이 우리 안에서 항상 싸우는 것입니다.

 

십자가의 은혜로 늘 이 죄가 죽어있지 않으면, 그 죄의 정욕은 언제라도 우리를 엄습해서 옛사람의 본성대로 살아가게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믿어도 때때로 순종하는데 실패하고 범죄하곤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여기서 생기는 중대한 질문은 그렇다면, 새 언약도 결국은 파기되는 것 아닌가 하는 것입니다. 옛 언약도 이스라엘이 신실하지 못해서 파기되었는데, 새 언약도 그렇게 되지 말라는 법이 어디 있습니까? 그러나 새 언약은 옛 언약처럼 실패할 수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그리스도의 중보사역 때문에 실패할 수가 없습니다.

 

옛 언약은 조건적인 언약이고, 행위언약입니다. 물론 은혜 언약적인 측면이 그 저변에 흐르고 있지만, 그러나 옛 언약은 근본적으로 행위언약입니다. 행위언약은 순종하면 복 받고, 불순종하면 저주를 받는다는 것입니다. 언약의 존폐여부가 이스라엘 자신의 신실함에 달려있습니다. 그러나 새 언약은 그렇지가 않습니다. 우리의 행위에 달려있지 않습니다. 왜요?


(12)내가 저희 불의를 긍휼히 여기고 저희 죄를 다시 기억하지 아니하리라 하셨느니라(히 8:12)


하나님께서 우리의 죄를 기억지 아니하시기 때문입니다. 옛 언약은 그들의 죄를 기억하셨고, 그래서 그들의 죄에 대해서 보응하셨습니다. 그러나 새 언약은 죄를 기억지 아니하시는 것입니다. 나의 과거 현재 미래의 모든 죄뿐만 아니라, 여전히 내 안에 있어서 평생을 투쟁해 나갈 필요가 있는 나의 죄된 본성까지도 하나님은 기억지 아니하시고, 나에게 문책하지 아니하시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우리의 모든 죄에 대하여 그리스도께서 대신 짊어지시고 십자가에서 모든 죄값을 다 치루심으로 죄를 없이 하셨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우리가 믿는 바가 아닙니까? 그래서 그리스도께서 모든 의를 이루셨고, 바로 이 그리스도의 중보사역의 공로에 새 언약의 존폐여부가 달려있기 때문에, 이 그리스도의 공로로 말미암아 새 언약은 절대로 실패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쉽게 설명하면 이런 것입니다. 우리가 남남이면, 뭔가 상대방이 나한테 큰 해를 입혔을 때, 복수합니다. 법정에 고소해서, 잘잘못을 따져서 벌을 내려 복수하고 또 적절한 보상을 받습니다. 그러나 부모와 자식 간에는, 자식이 뭔가 잘못하면, 아무리 큰 잘못을 해도 법적으로 고소해서 복수하는 부모가 있습니까? 부모가 얼굴을 찡그리고 고함을 치면서 매를 들고 둘러 패는 수는 있어도, 고소해서 징역을 살게 하고, 벌금형을 메기고, 그렇게 복수하는 부모는 이 세상에 없습니다.

 

이를테면 옛 언약은 법의 관계이고, 새 언약은 부모와 자식의 관계인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바울은 “너희가 법아래 있지 아니하고 은혜 아래 있다”고 말하였던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법대로 다스리지 아니하시고, 우리를 은혜로 다스리십니다. 징계의 매는 있어도 결코 정죄함이 없습니다. 우리가 연약하여 죄를 범하면, 그 죄에 대해 책임을 물으시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불쌍히 여기시는 것입니다.


(12)내가 저희 불의를 긍휼히 여기고 저희 죄를 다시 기억하지 아니하리라 하셨느니라


원문에서는 “내가 저희 불의를 긍휼히 여기고”로 되어 있지 않고, “저희 죄를 사하며”라고 되어 있는데, 일부로 바꾸었습니다. 여기에 강조점이 있습니다. 우리의 연약함을 체휼하시는 분이심을 강조하고자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은혜를 받기 위해서 은혜의 보좌 앞에 담대히 나아가야합니다. 우리의 확신이 흔들리고, 내가 불안하고, 내가 나에게 합격점을 줄 수 없을 때에라도, 내가 주를 찾는 이상 주께서 나를 외면치 아니하심을 주의 자비하심을 근거로 믿으십시기 바랍니다. 나의 모습을 보지 말고, 나는 못났어도 예수님은 자비로운 대제사장이시기 때문에, 그 십자가의 공로를 바라보고 나아가십시오. 그렇게 믿음으로 나아갈 때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결코 외면하지 아니하시고 반드시 우리의 신앙을 회복시키시고 은혜 위에 세워 튼튼하게 하실 것입니다. 그것이 새 언약 백성들에게 주어진 놀라운 특권이고 하나님의 은혜인 것입니다. 이러한 은혜를 누리는 저와 여러분들이 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그리고 은혜의 보좌 앞에 담대히 나아갈 뿐만 아니라, 또한 새 언약 백성답게 은혜로 살아야 합니다. 히브리서 수신자들이 유대교로 돌아가려고 했던 것처럼, 우리도 끊임없이 옛 언약으로 돌아가고 싶어 합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천성적으로 지독한 율법주의이기 때문입니다.

율법주의는 옛날 우리 할머니들이 새벽에 정화수 떠놓고 정성을 들여서 “비나이다. 비나이다...” 하는 것과 같습니다. 내 정성을 들이면 신이 받아줄 것이다는 것입니다. 불교도 자기가 열심히 정성을 들여서 부처에게 절하고 기도하고, 108번뇌를 수행을 통해 없애고, 속세의 욕심을 벗어던지고, 열심히 선하게 살면, 소위 성불하면 부처가 됩니다. 이 세상의 모든 종교가 다 그렇습니다. 다 자기 열심, 자기 결단, 내 헌신, 희생이 근거가 되고 공로가 되어서 모든 것을 이룹니다.

 

그런데 이런 식으로 우리가 교회에서 종교활동 할 수가 있습니다. “기도 열심히 해야지, 말씀 열심히 읽어야지... 예배 빠지지 않고 참석하고, 십일조도 하고, 열심히 전도해야지...” 그렇게 생각하면서 삽니다.

 

물론 우리가 기도 열심히 하고 말씀 열심히 읽고, 전도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절대로 그렇게 하지 말라는 말이 아닙니다. 그런데 그 모든 행위들이 새벽에 정화수 떠놓고 “내 정성을 들이는 차원”에 있는 것이라면, 그것은 기독교가 아닙니다. 그것이 옛 언약입니다. 사도바울이 뭐라고 합니까?


(6)이제는 우리가 얽매였던 것에 대하여 죽었으므로 율법에서 벗어났으니 이러므로 우리가 영의 새로운 것으로 섬길 것이요 의문의 묵은 것으로 아니할지니라(롬 7:6)

(6)저가 또 우리로 새 언약의 일군 되기에 만족케 하셨으니 의문으로 하지 아니하고 오직 영으로 함이니 의문은 죽이는 것이요 영은 살리는 것임이니라(고후 3:6)


“우리가 율법에서 벗어났으니”라고 했습니다. “우리가 법아래 있지 않고, 은혜 아래 있으니” 라는 말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섬길 때, 영의 새로운 것으로 섬겨야지 의문의 묵은 것으로 하면 안 된다는 것입니다. 의문(돌비에 새긴 글자)의 묵은 것은 옛 언약 때에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을 섬기듯이 섬기는 것을 말합니다. 언약의 존폐여부가 자신의 행위에 달려있다고 생각하고, 열심히 정성을 드리는, 나의 행위로 공로를 쌓으려는 식으로 신앙생활 하는 것입니다.

 

쉽게 설명하면 탕자의 비유에서 맏아들과 같습니다. 맏아들이 나중에 아버지가 동생을 영접하고 잔치를 베풀었다는 소식을 듣고 원망 불평합니다.


“아버지! 내가 여러 해 아버지를 섬겨 명을 어김이 없거늘 내게는 염소 새끼라도 주어 나와 내 벗으로 즐기게 하신 일이 없더니 아버지의 살림을 창기와 함께 먹어버린 이 아들이 돌아오매 이를 위하여 살진 송아지를 잡으셨나이다”(눅 15:29-30)


마음이 근본 아버지의 마음을 모르고 아버지를 사랑하지 않는 것입니다. 마음은 근본 할례를 받지 않았는데, 겉으로만 순종하는 것입니다. 거기서 나올 수 있는 것은 결국 자기 행위의 공로를 자랑하고 동생을 정죄하는 것밖에는 없는 것입니다. 자기가 잘한 거는 하나도 빼먹지 않고 다 기억하고 있고, “내가 이러 이렇게 했으니 하나님이 나에게 이렇게 해주어야 한다.” 그런 식으로 생각하고, 자기처럼 살지 못하는 사람들에게는 “나는 이거 이거 했는데, 왜 너는 안하느냐?” 정죄하고 자랑하고... 이것이 의문의 묵은 것으로 순종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탕자는 어떠했습니까? 탕자는 오랜 세월동안 방황하고 고생하면서 아버지 집에서 아버지의 다스림을 받는 것이 진정한 행복이라는 것을 알았고, 그렇게 회개하고 돌아왔을 때 아버지는 그를 따뜻하게 맞아주셨습니다. 이제는 아버지의 마음을 알고, 사랑을 알고, 그것이 행복이라는 것을 아는 것입니다. 이것이 철이 들은 것입니다. 그래서 마음을 알기 때문에 아버지를 사랑하기 때문에 기쁨으로 자원함으로 순종했을 것입니다. 마음의 변화로부터 나오는 진정한 순종이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영의 새로운 것으로 하나님을 섬기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무엇을 하든지, 하나님이 주시는 은혜에 기초해서, 하나님의 마음을 알고, 하나님을 사랑함으로, 그리고 성령을 힘입어서 해야 합니다. 그것이 새 언약 백성이 지녀야 할 삶의 모습이고, 자태인 것입니다. 이 시간 우리 자신을 돌아보십시다. 우리가 새언약 백성이라는 것에 대한 감사와 자부심이 있습니까? 우리 안에 하나님을 향한 사랑이 있고, 하나님의 마음을 아는 마음이 있습니까? 성령을 힘입어 은혜에 기초하여 자원하여 헌신하고자 하는 마음이 있습니까? 만일 우리안에 이러한 마음이 없다면, 우리의 모든 종교활동은 아무런 의미가 없는 것입니다. 아무런 의미가 없는 정도가 아니라 우리는 지금 신앙의 길을 벗어나 멸망의 길을 향해 걸어가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이러한 상황에 있다면, 말씀 앞에서 자신을 돌아보고 돌이켜 회개해야 합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이 없는 것은 두 가지 경우 밖에 없습니다. 근본 거듭나지 아니했거나(이것은 당연한 이야기입니다) 아니면 설사 거듭났다 하더라도 병적인 유아상태에 오래도록 머물러 있든지 둘 중의 하나일 것입니다. 사람이 거듭났어도, 오래도록 병적인 유아상태에 머무르게 되면, 우리의 마음이 거듭나지 아니한 돌같은 마음까지는 아니더라도 거의 딱딱하게 굳어진 마음이 되기 때문에 영적으로 무뎌질 수밖에 없고, 그래서 말씀을 깨닫는다든지, 하나님의 마음을 느낀다든지, 하나님을 사랑하여 순종한다든지, 그런 것들을 거의 볼 수 없게 되는 것입니다. 거듭난 신자가 날마다 십자가의 은혜로 남아있는 죄성을 억누루고 죽이는 삶을 살아야 하는데, 영적인 게으름으로 오래도록 죄성을 방치하게 되면 결국 이렇게 죄성에 강력하게 영향을 받는 상태가 되어지는 것입니다. 이것이 히브리서 수신자들의 상황이었고, 또한 오늘날 우리의 상황이지 않습니까?

 

그러면 우리가 어떻게 하면 이런 병적인 유아상태에서 벗어나서 장성한 분량에까지 자라갈 수 있을까요? 어떻게 하면 딱딱하게 굳어진 마음이 녹아져서 부드러운 마음이 되어 하나님의 마음을 알고 하나님을 사랑하여서 그 은혜에 기초해서 순종하는 삶을 살아갈 수가 있는 것일까요? 다른 길이 없습니다. 더 좋은 언약의 중보자 되시는 예수님을 깊이 깨닫고, 그 주님을 만나서 은혜를 받는 길 외에는 없습니다. 성령으로 말미암아 그 주님의 십자가의 은혜를 통해서 다시금 우리의 굳은 마음을 제하고 부드러운 마음으로 변화되어지는 은혜를 받아야 하는 것입니다. 다시 거듭나야 된다는 말이 아니라, 이미 태어난 사람은 또 다시 태어날 필요가 없습니다. 다만 우리 안에 거의 죽어있는 영적인 생명을 소생하는 역사는 거듭 계속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가만히 놔두면 자동적으로 영적으로 생명을 잃어가게 되어있습니다. 우리 안에 남아있는 죄성을 가만히 놔두면 그것이 자라서 우리를 지배하게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끊임없이 성령으로 말미암아 십자가의 피 뿌림을 받아야지만, 영혼이 소생하게 되어지고 강건하게 되어져서 자라가게 되는 것입니다. 이런 은혜를 날마다 받아야 합니다. 그러할 때 우리의 굳었던 마음이 녹아져서 부드러운 마음이 되어지고, 그런 부드러운 마음이 될 때에, 우리는 하나님 말씀을 듣거나 기도를 할 때에 그 말씀 안에서 하나님의 마음을 알게 되어지고, 또 하나님의 사랑을 알아서, 우리 내면에서부터 하나님을 사랑하고 경외함으로 순종하는 삶을 살아갈 수가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은혜를 주셔서 우리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베푸신 크신 은혜를 깊이 깨달아서, 하나님의 마음을 알고, 하나님을 내면에서부터 사랑함으로 말미암아 순종하는 축복된 저와 여러분들이 되게 하여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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