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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 최상범
성경본문 히 9:11-14
성경본문내용 (11)그리스도께서 장래 좋은 일의 대제사장으로 오사 손으로 짓지 아니한 곧 이 창조에 속하지 아니한 더 크고 온전한 장막으로 말미암아(12)염소와 송아지의 피로 아니하고 오직 자기 피로 영원한 속죄를 이루사 단번에 성소에 들어 가셨느니라(13)염소와 황소의 피와 및 암송아지의 재로 부정한 자에게 뿌려 그 육체를 정결케 하여 거룩케 하거든(14)하물며 영원하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흠 없는 자기를 하나님께 드린 그리스도의 피가 어찌 너희 양심으로 죽은 행실에서 깨끗하게 하고 살아 계신 하나님을 섬기게 못하겠느뇨
강설날짜 2012-11-04

2012년 11월 4일 한결교회 주일예배강설

히브리서 제22강


그리스도의 피뿌림의 효력


말씀 : 히 9:11-14


우리는 지난 시간에 옛언약과 제사법에는 두 가지 근본적인 한계가 있다는 것을 배웠습니다. 그것은 하나님과 백성들 사이에 두꺼운 외벽이 겹겹이 쳐져 있기 때문에 그 수많은 장애물을 뚫고 하나님을 만나러 나아가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다는 것과, 설사 그것이 가능하다 하더라도 오직 대제사장만 1년에 딱 한번 대속죄일 날에만 나아갈 수 있었으며, 그것도 피 없이는 나아갈 수 없었다는 것입니다. 피를 뒤집어쓰고 나가야 했다는 것이 말해주는 것은 죄인이 거룩하신 하나님을 만나면 죽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피는 생명을 의미합니다. 땅의 성막은 하나님을 만날 수 있는 방법을 가르쳐주는 것이 아니라, 도리어 죄인은 하나님을 만날 수 없다 라고 하는 점을 인생들에게 천명하는 역할을 했습니다.

 

그러한 위험천만하고 매우 제한적인 하나님과의 만남은 결국 인간의 근본 죄 문제를 이 옛언약과 제사법이 해결해 주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동물의 피는 육체만을 정결하게 할뿐, 섬기는 자로 그 양심상 온전케 할 수 없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구약의 백성들은 그 내면의 양심의 부정함이 해결되지 않았기 때문에 하나님을 만날 수 없었고, 때문에 그 어떤 영적인 진전이 있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무슨 하나님을 만나야 그 다음에 은혜를 받고, 성령을 받아야 그 내면에서부터 고침을 받을 수 있는데, 일단 만날 방법이 없으니깐, 아무것도 안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구약의 백성들은 동물 제사를 통해서 그 어떠한 유익도 얻지 못하고, 다만 자기가 죽을 죄인이라는 사실을 다시금 기억할 뿐이었고, 그 모형을 통해 더 좋은 실체가 장차 올 것이라는 것을 바라볼 뿐이었던 것입니다.


(10)이런 것은 먹고 마시는 것과 여러가지 씻는 것과 함께 육체의 예법만 되어 개혁할 때까지 맡겨 둔 것이니라


그래서 이제 그리스도께서 이 세상에 오심으로 그 개혁할 때가 이른 것입니다. 그러므로 새언약은 두 가지 차원에서 옛언약과 근본적으로 다릅니다.


(11)그리스도께서 장래 좋은 일의 대제사장으로 오사 손으로 짓지 아니한 곧 이 창조에 속하지 아니한 더 크고 온전한 장막으로 말미암아(12)염소와 송아지의 피로 아니하고 오직 자기 피로 영원한 속죄를 이루사 단번에 성소에 들어 가셨느니라


첫 번째는 모형인 이 땅의 성소에 들어가신 것이 아니라, 실체인 하늘의 참 장막에 들어가셨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두 번째는 이 참 장막에 들어가기 위해 염소와 송아지의 피가 아닌 자기 피로 들어가셨다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옛언약과 제사법이 하지 못한 근본 문제를 해결하셨습니다. “영원한 속죄를 이루어 단번에 성소에 들어가셨다”라는 표현에서 ‘속죄’라는 말은 원문으로 보면, ‘구속’이라는 단어입니다. ‘구속’이라는 말은 일정한 돈을 대신 지불하여 노예에서 해방시켜주는 것을 말합니다. 즉 대제사장 예수님께서 자기 피로 죄값을 치루어 우리를 죄와 형벌의 노예에서 해방시켜주셨다는 것입니다. 그것을 영단번의 구속이라고 말씀합니다. 그러면 어떻게 동물의 피가 아닌, 그리스도의 예수의 피가 이러한 영단번의 구속을 이룰 수가 있습니까?

 

우리가 이를 위해 죄의 상대성 이론이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똑같은 행동이라고 할지라도 그 마주하는 당사자가 누구냐에 따라서 그 죄는 현저하게 달라집니다. 만일 어느 누가 여러분을 때린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해서 여러분의 재산에 무슨 손해를 입힌 것도 아니고, 여러분과 유감이 있는 어떤 이웃이 여러분들이 길거리를 지나가는데, 구두를 휙 집어던지면서 (맞추지도 못했습니다.) “저 재수 없는 놈...”하며 욕을 했다고 칩시다. 벌이 얼마큼쯤 될까요? 그걸 가지고 경찰서 데리고 가서 “저 사람이 나에게 구두를 던지면서 욕 했으니깐 당장 감옥에 쳐 넣으시오” 그러면 경찰이 웃을 것입니다. 그것이 굳이 처벌할 수 있을지 모르지만, 그렇게 큰 벌이라고 할 것이 없습니다. 그런데 몇 년 전에 이라크에 부시대통령이 왔을 때, 한 기자가 구두를 부시대통령을 향해서 던졌습니다. 순간적으로 잘 피해서 맞추지 못했습니다. 3년 징역형을 받았습니다. 부시대통령이니깐 3년 징역형을 받았지, 만일 그 자리에 중국의 황제가 있었으면 어떻게 될까요? 사형입니다. 사형정도만이 아니라 부모와 형제들까지도 다 죽일 것입니다. 우리나라는 반역하면 3족을 멸했는데, 중국은 9족을 멸했다고 합니다. 사돈의 팔촌까지 다 죽이는 것입니다. 그래서 도대체 누군지도 모르는 사람 때매 다 잡혀죽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죄의 상대적 성격입니다. 상대가 누구냐에 따라서 죄가 현저히 달라지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짓는 죄는 누구를 향해 짓는 죄입니까? 온 천지를 지으신 전지전능하신 하나님, 만유의 주권자이신 하나님을 향해 짓는 죄입니다. 그러므로 그런 무한하신 하나님께 짓는 죄는 그것이 지극히 작은 죄라고 할지라도 하나님에게는 무한한 크기의 죄가 되는 것이고, 때문에 거기에는 무한한 형벌이 따르는 것입니다. 우리가 절대로 작은 죄라고 가볍게 여길 수 없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그래서 이 땅에 살면서 수없이 죄를 지으며 살고 있는 우리 모든 죄인들은 다 하나님의 무한한 심판을 받을 수밖에 없는 자들인 것입니다. 그것이 지옥 형벌입니다. 모든 회심치 않은 죄인들은 다 지옥에 떨어지게 되는데, 지옥의 두 가지 근본적인 특징은 바로, 무한한 잔인성과 영원성입니다. 인간이 겪을 수 있는 최고로 잔인한 영육간의 고통이 주어지는 곳이고, 그러한 고통을 영원히 당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죄에 대한 하나님의 무한한 형벌입니다. 거기에는 어떠한 자비도 긍휼도 없습니다.

 

그러므로 이 사람의 죄값이라는 것이 무한한 것이기 때문에, 동물의 피가 그것을 해결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무엇으로도 대속할 수 없고, 오직 자기 자신이 죽어서 지옥 가서 형벌 받는 길 외에는 이 죄 값을 해결할 방법이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또 다른 방법이 있다면, 그것은 나대신 다른 사람이 형벌 받아서 이 죄값을 해결하는 방법입니다. 그러나 이 세상에 죄 없는 사람은 없습니다. 다 자기 죄 때문에 죽지 남을 위해 형벌 받을 수 있는 사람이 없습니다. 설사 죄 없는 사람이 있다 하더라도, 그 사람은 다른 사람 한 사람만을 살릴 수가 있지, 결코 수많은 사람들의 죄값을 다 치를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수많은 죄인들의 무한한 죄값을 치를 수 있는 유일한 길은 무한하신 하나님이 대신 값을 치러주시는 길 밖에는 없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형벌 받으실 수 없는 분이십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 하나님이 사람이 되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 땅에 내려오신 하나님이십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흠 없고 점 없고, 무한한 가지를 지니신 최고의 제물이 되신 것입니다. 그분의 목숨의 가치는 무한하고, 그분이 십자가에서 흘리신 피는 무한히 고귀하기 때문에, 바로 이 보혈이 이 땅에 당신을 믿는 모든 백성들의 죄를 다 대속하고도 남음이 있는 그런 충분한 대속이 되는 것입니다. 그 속죄는 영원한 속죄이고, 그 속죄는 단번에 모든 것을 이루는 속죄인 것입니다. 그래서 히브리서 저자가 궁극적으로 하고자 하는 말이 무엇입니까?


(13)염소와 황소의 피와 및 암송아지의 재로 부정한 자에게 뿌려 그 육체를 정결케 하여 거룩케 하거든(14)하물며 영원하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흠 없는 자기를 하나님께 드린 그리스도의 피가 어찌 너희 양심으로 죽은 행실에서 깨끗하게 하고 살아 계신 하나님을 섬기게 못하겠느뇨


염소와 황소의 피는 대속죄일 뿐만 아니라 일반적인 모든 속죄 제사를 말하는 것이고, 암송아지의 재를 뿌려서 정하게 한 것은 민수기 19장에 나오는 것으로서 의식적인 부정을 깨끗하게 하는 물을 만들어 뿌리는 것을 의미합니다. 시체를 만졌다든지, 의식적으로 부정하게 되었을 때, 그 물을 뿌려 정하게 하였습니다. 이렇게 구약의 모든 제사법과 이러한 정결예법들은 육체를 정결케 했습니다. 사람들을 외적으로, 의식적으로, 상징적으로 정결하게 하여 성막에 나아갈 자격을 구비하게 하여서 하나님께 예배드릴 수 있도록 하였습니다. 하찮은 동물의 피라도 이러한 하나님의 의식적인 용납을 가능하게 했다면, 하물며 그 고귀한 하나님의 아들의 피가 우리의 육체뿐만 아니라 우리의 내면의 양심까지도 깨끗하게 해서 능히 하나님을 섬기게 하지 못하겠느냐 하는 것입니다. 양심은 하나님과 관계하는 우리의 모든 전인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피뿌림을 받기 전까지 우리의 양심은 그야말로 죄로 완전히 오염되어서 더러워질 대로 더러워져 있었습니다. 그러나 더 좋은 언약의 중보자 되신 예수 그리스도의 피 뿌림으로 말미암아 우리의 양심이 정결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보혈이 우리의 수많은 죄를 다 씻어서 깨끗하게 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로 말미암아 구약에서는 결코 누릴 수 없었던 두 가지 결과를 우리가 얻게 되었는데, 그것이 바로 죽은 행실에서 벗어나게 되었다는 것과 살아계신 하나님을 섬기는 예배자의 인생이 되게 하셨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놀라운 은혜요 특권이 아닐 수 없습니다.

 

구약의 백성들은 율법과 제사법으로 그 양심을 고쳐 새롭게 함을 받을 수 없었습니다. 그들은 근본 목이 곧은 백성으로서 그 죄인된 신분과 지위를 벗어날 길이 없었고, 율법은 그들을 정죄할 뿐 하나님의 뜻을 행할 능력을 주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새언약 백성들은 그리스도의 피뿌림의 공로로 말미암아 죄사함을 받고, 성령을 받아서 거듭남이라고 하는 놀라운 은혜를 얻게 된 것입니다. 거듭남이 무엇이라고 했습니까? 성령으로 말미암아 우리 내면에 근본 할례를 행해주심으로 마음에서부터 새롭게 되어 하나님을 사랑하고 자원하여 순종하게 만들어 주시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죽은 행실들, 곧 죽음에 이르게 하는 모든 죄의 종노릇 하던 데서 벗어나서 주님께 종노릇하는 자가 된 것입니다.


(21)전에 악한 행실로 멀리 떠나 마음으로 원수가 되었던 너희를(22)이제는 그의 육체의 죽음으로 말미암아 화목케 하사 너희를 거룩하고 흠 없고 책망할 것이 없는 자로 그 앞에 세우고자 하셨으니(골 1:21-22)

(18)너희가 알거니와 너희 조상의 유전한 망령된 행실에서 구속된 것은 은이나 금 같이 없어질 것으로 한 것이 아니요(19)오직 흠 없고 점 없는 어린양 같은 그리스도의 보배로운 피로 한 것이니라(벧전 1:18-19)


두 번째로 살아계신 하나님을 섬기는 예배자의 인생을 살게 하신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 앞서 하나님이 계시는 하늘의 지성소로 단번에 들어가셔서 이제는 누구든지 그리스도를 믿으면, 이 하나님의 면전 앞에 곧바로 나아갈 수 있는 길이 열린 것입니다.


(19)그러므로 형제들아 우리가 예수의 피를 힘입어 성소에 들어갈 담력을 얻었나니(20)그 길은 우리를 위하여 휘장 가운데로 열어 놓으신 새롭고 산 길이요 휘장은 곧 저의 육체니라(21)또 하나님의 집 다스리는 큰 제사장이 계시매(22)우리가 마음에 뿌림을 받아 양심의 악을 깨닫고 몸을 맑은 물로 씻었으니 참 마음과 온전한 믿음으로 하나님께 나아가자(히 10:19-22)


그 하늘의 지성소에 마음대로 들락날락할 수 있는 길이 열린 것입니다. 이제 하나님과 우리 사이에 어떠한 외벽도 존재하지 않게 되었습니다. 그것을 가장 잘 표현하는 것이 하나님의 자녀됨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저의 무릎은 전적으로 윤희를 위한 자리입니다. 다른 어느 누구도 제 무릎 위에 함부로 앉을 수 없습니다. 그러나 윤희는 제 무릎 위에 앉을 수 있는데, 앉을 때 물어보지도 않습니다. 당연하다는 듯이 와서 그냥 앉습니다. 자기 앉고 싶을 때는 언제라도 와서 앉습니다. 그리고 저는 단 한 번도 “누구마음대로 이렇게 함부로 앉느냐” 따지지 않습니다. 그 자리는 윤희를 위한 자리입니다. 마찬가지입니다. 이제 하나님의 보좌는 우리를 위한 자리가 되었습니다. 하나님께로 무제한적인 접근이 가능하게 되었습니다. 마음껏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습니다. 아니 접근할 수 있는 정도가 아니라, 아예 성령께서 우리 안에 오셨습니다. 그래서 이 성령으로 말미암아 우리는 예수님과 연합하였고, 성부 하나님과도 하나가 되었습니다. 여러분 우리가 삼위하나님과 연합하여 하나가 되었다는 것이 얼마나 놀라운 특권입니까? 그러면 이 하나 됨은 무엇을 목표로 하는 것입니까? 바로 하나님을 섬기는 예배가 목표입니다. 살아계신 하나님을 능히 섬길 수 있게 하셨습니다. 예배란 오직 성령을 받아 하나님의 자녀가 된 자만이 드릴 수 있는 특권입니다.


(23)아버지께 참으로 예배하는 자들은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할 때가 오나니 곧 이 때라 아버지께서는 이렇게 자기에게 예배하는 자들을 찾으시느니라(요 4:23)


구약은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하지 못했습니다. 성령이 임하지 않았고, 진리이신 예수님이 아직 오시지 않으셨기 때문에 하고 싶어도 그럴 권한이 없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리스도의 보배로운 피로 말미암아 그러한 길이 열리게 되었습니다. 우리가 어떤 죄인이었는데, 그리스도의 보혈로 어떤 은혜와 특권을 얻게 되었는지 늘 잊지 말고 살아야 합니다. 그 은혜에 감사하면서 그 은혜의 특권을 누리면서 즐거이 예배자의 인생을 살아가야 합니다. 로마서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1)그러므로 우리가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얻었은즉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으로 더불어 화평을 누리자(2)또한 그로 말미암아 우리가 믿음으로 서있는 이 은혜에 들어감을 얻었으며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고 즐거워하느니라(롬 5:1-2)


그리스도께서 화목제물이 되셔서 하나님과 화목하게 되었으니, 그 화평을 누리자라고 말합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영광으로 들어가서 즐거워할 수 있는 은혜를 얻었습니다. 이것이 거듭나 하나님의 자녀 된 자가 누리는 놀라운 특권이라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이러한 놀라운 특권을 누리며 살고 있습니까? 예배드리는 이 자리에 나아온 것에 대해 감사하면서 즐거움으로 나와 예배드립니까? 문제는 우리가 이 놀라운 특권을 누리지 못할 뿐만 아니라, 도리어 그 반대의 감정을 느낀다는 것입니다. 분명히 그리스도 예수를 믿어 모든 죄를 용서받고, 하나님과 화목했다고 하는데, 우리가 실제로 느끼는 것은 하나님이 멀리 계시는 것과 같은 갑갑함과 영적인 냉담함,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차가운 거절감, 심령의 고통, 영적인 메마름을 느끼는 것입니다. 그 이유가 무엇일까요?


1) 죄사함의 진리에 대한 무지로 양심의 자유를 잃어버림.


많은 신자들이 살면서 마음속에 늘 던지는 질문이 “이렇게 큰 죄를 지었는데, 내가 하나님 앞에 여전히 희망이 있습니까?” 라는 질문입니다. 신자가 죄 가운데 거하게 될 때 바로 이러한 절망감 속에서 영혼의 짓이겨지는 듯한 고통을 겪게 됩니다. “내가 너무 큰 죄를 지었다. 내가 이렇게 큰 죄를 짓고도 하나님 앞에 살아갈 수 있을까?” 하는 가책은 성령이 주시는 것입니다. 두 가지로부터 오는데, 하나는 율법으로부터 오고, 또 하나는 양심으로부터 옵니다. 성경이 명백하게 정죄하고 있고, 그것과 더불어 양심으로부터 송사가 오는 것입니다. 이것은 성령께서 우리로 회개로 나아오도록 하시는 은혜의 작업입니다. 그런데 신자들이 이런 고통 속에서 회개로 나아가는 것이 아니라 도리어 절망에 빠지는 경우가 허다합니다. 왜냐하면 신자가 죄를 범하게 되면, 곧바로 하나님과의 교제가 사라지고, 하나님이 모든 죄를 용서해주셨다는 것이 실감이 나지 않을 만큼 자신의 영혼이 냉담해지고, 기도할 때나 말씀을 들을 때나 하나님으로부터 차가운 거절감이 들기 때문입니다. 그것을 오해해서 자신이 버림받고 정죄 받았다고 생각하는 것이죠.

 

여러분 우리가 영혼의 번뇌와 고통 가운데, 회개로 나아가야지 않고 절망으로 나아가는 것은 근본 우리의 교만에서 비롯된 것임을 알아야 합니다. “내가 이렇게 큰 죄를 범했으니 이제 주님이 나를 버리실거야” 라고 하는 절망은 사실 그리스도 예수의 십자가를 모독하는 말입니다. 여러분 주님이 이루신 속죄는 영단번의 속죄입니다. 과거 현재 미래의 모든 죄에 대한 속죄를 의미합니다. 이것이 우리에게는 어려운 이야기인데, 왜냐하면 우리는 언제나 현재를 살아가는 자들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앞에 무슨 일이 있을지 모릅니다. 그러나 한번 강원도 산길을 처음 운전해가는 차를 생각해보십시오. 꼬불꼬불 길을 지나면서 이 코너를 돌면 앞에 무엇이 있을지 운전자는 알 수 없습니다. 그러나 하늘 위에 비행기를 타고서 내려다보는 사람은 이 차가 왔던 길, 그리고 현재 가는 길, 그리고 “이 코너를 돌면 저 언덕길을 맞이하고, 몇 분간 차가 정체되겠지만, 저기만 지나면 직선도로로 쭉 달릴 수 있겠구나...” 모든 것이 다 보이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렇게 시간을 초월해서 우리 인생을 보십니다. 그리고 우리가 태어나서 죽을 때까지의 전 인생을 두고서 대속의 피를 흘려 영단번에 속죄하셨고, 전 인생을 두고 의롭다고 선언하신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흔들 수 없는 우리에게 허락된 죄사함의 은혜입니다. 그래서 사도바울은 뭐라고 말했습니까?


(1)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2)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너를 해방하였음이라(롬 8:1-2)


그러므로 한번 거듭나 하나님의 자녀가 된 자는 때때로 하나님께 범죄하여 일시적으로 화목을 일어버릴 수는 있어도 결코 버림을 받거나 정죄 받지 아니하는 것입니다. 부모 자식 간에도, 자식이 부모가 싫어하는 일을 수시로 하게 되면, 부모는 그 자녀로 인해서 근심하게 되고, 자녀는 슬슬 부모를 피하고 하는 어색한 관계가 되어집니다. 그렇다고 부모와 자식 간의 인연이 끝난 것은 아닙니다만, 부모 자식 간의 관계는 유지되지만, 화목은 깨트려지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우리도 그럴 수 있습니다. 하나님과 근본 화목지만, 우리가 하나님의 뜻을 져버리고 죄 가운데 거하게 되면, 일시적으로 화목이 깨어질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이 하나님과의 관계를 깨트리게 할 수는 없습니다. 많은 죄를 짓고, 심령이 곤고해지고, 양심과 율법의 송사를 끊임없이 받는다고 하더라도 그는 이미 원칙적으로 하나님과 화해가 이루어진 자이고, 그래서 그는 정죄함이 없고 죄 용서함을 받은 자이기 때문에, 다시금 하나님을 찾을 수 있고, 주님 앞에 나아가면 얼마든지 용납될 수 있고, 주님의 이름을 부를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어떤 죄를 지었든지, 어떤 큰 불순종을 했든지 간에, 진실로 참회하며 나아간다면 주님이 차갑게 거절하실 리가 없고, 감당 못하실 죄가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우리가 그것을 다 알고 있습니다. 그거 모르는 사람 없습니다. 그런데도 문제는 우리가 안 나간다는 것입니다. 사실 “내가 이렇게 큰 죄를 범했는데, 주님이 과연 나를 받아주실까”하면서 절망에 빠지는 이유는 아이러니하게도 주님께 나아가기 싫기 때문에 그렇게 핑계 대는 것입니다.


2) 자기 사랑 때문


왜 나가기 싫어합니까? 자기 사랑 때문입니다. 이 자기 사랑 때문에 스스로 하나님과의 바깥 외벽을 겹겹이 만들어서 나아가지 아니하는 것입니다. 자기 사랑은 두 가지입니다. 자신의 명예를 사랑하는 마음, 그리고 죄를 사랑하는 마음입니다.

 

자신의 명예를 사랑하는 마음... 우리가 우리 자신의 명예를 얼마나 깊이 사랑하는지 아십니까? 예를 들어서 여러분 중 한 분을 세워놓고 제가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 공개적으로 잘못을 꾸짖고 책망하면, 기분이 어떻습니까? 정말 기분 나쁩니다. 자존심에 큰 상처가 됩니다. 그래서 사람들 앞에서의 내 명예가 짓밟혔다고 생각하고 그 책망한 사람에 대해 분노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명예가 조금만 짓밟혀도 그렇게 분노하는 것이 우리 인간입니다.

 

그런데 십자가는 무엇입니까? 십자가는 사소한 책망 정도가 아니라, 아예 우리가 더럽고 부패한 쓰레기 같은 존재이고, 죽어 마땅한 죄인임을 온 세상에 까발리는 것이 십자가입니다. 그래서 자기의 명예를 사랑하는 자는 자기가 그런 더러운 죄인이라는 것을 사람들 앞에 시인하기가 싫기 때문에, 그 십자가를 받아들일 수가 없는 것입니다. 자기를 자랑하고자 하고, 자기가 괜찮은 사람이라는 것을 드러내고자 하고, 사람들로부터 인정과 영광을 받기를 원했던 바리새인들을 보십시오. 그들은 자기 의를 드러내기 위해서 힘써 하나님의 의를 복종치 아니하는 것입니다. 바로 우리 마음속에도 그러한 자기 명예에 대한 사랑이 있기 때문에 십자가를 마음에 받아들이기 싫어하는 것입니다.

 

두 번째로 죄에 대한 사랑이 하나님과 우리 사이의 외벽을 만드는 것입니다. 지난번에 배웠듯이 은혜의 보좌 앞에 나아간다는 것은 곧 그분의 은혜의 통치를 받겠다는 말인데, 그 통치를 받는 것이 싫으니깐 나아가지 않는 것입니다. 죄의 낙을 사랑하고, 이 세상의 것들을 즐거워하는 마음이 우리에게 있으면, 그것을 포기하기 싫기 때문에 온갖 핑계를 대면서 나아가지 않는 것입니다.

 

이러한 자기 사랑이 자기 스스로 하나님 사이에 담을 쌓고, 외벽을 만드는 것입니다. 바로 여기서 하나님으로부터의 거절감, 차가운 냉냉함, 영적인 침체, 영적인 메마름 등의 모든 것들이 나오는 것입니다. 여러분 구약은 들어가고 싶어도 들어갈 수 없었습니다. 하나님을 만나고 싶어도 하나님을 만날 수 없었고, 그리고 순종하고 싶어도 내면에서부터 변화를 받아 순종할 수 있게 하는 성령이 주어지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우리에게는 모든 길이 열렸고, 성령이 주어졌습니다. 그럼에도 우리가 구약백성들과 같이 죽은 행실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하나님을 섬기는 삶을 살지 않는다는 것은 무엇으로 설명할 수 있겠습니까? 그것을 설명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은 하나님의 크신 은혜를 멸시하고 그 하나님을 대적하며 살고자 하는 신성모독적인 악한 고집이 우리 마음에 있다는 것 외에는 없습니다. 내 신앙이 이렇게 된 것은 내 악함에서 비롯된 것이지 다른 데 있지 않습니다. 우리는 그 어떠한 핑계도 댈 수 없습니다.

 

여러분 우리가 우리의 악함으로 말미암아 이 큰 구원을 등한히 여기고 이 놀라운 은혜를 가볍게 여긴다면, 우리가 받을 형벌이 얼마나 클 것인지 깊이 생각하시기 바랍니다. 여러분 우리가 이 자기 사랑 때문에 날마다 이 놀라운 은혜와 특권을 내 팽개치고 그것을 사장시키면서 살아갈 때에, 마지막 날 주님 앞에 설 때에 그 큰 책임을 어떻게 감당할 것인지 생각하시기 바랍니다. 여러분 우리는 정신을 차려야 합니다. 우리는 반드시 이 자기 사랑의 외벽을 깨트리고 하나님께 나아가서 은혜를 받아야 합니다.

 

그러면 우리가 어떻게 하면 이 자기 사랑을 깨트려서 새언약의 은혜와 특권들을 누리면서 살아갈 수 있습니까? 이것이 관건인데, 오늘 본문을 다시 보시기 바랍니다.


(14)하물며 영원하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흠 없는 자기를 하나님께 드린 그리스도의 피가 어찌 너희 양심으로 죽은 행실에서 깨끗하게 하고 살아 계신 하나님을 섬기게 못하겠느뇨


이 말씀을 할 때 히브리서 저자의 의도는 우리가 처음 예수님을 믿을 때, 성령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의 피뿌림을 얻어 정결케 되어 이런 은혜를 얻게 되었다는 것만을 말하려는 것이 아니라, 그 이후에 혹여나 죄로 인해 그 화목이 깨어졌을 때에도 역시 동일하게 성령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의 피뿌림을 통해서 그 하나님과의 화목을 회복할 수 있다는 것을 말하고자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중요합니다. 여러분 우리 안에 자기 사랑을 죽이는 일, 죄 죽이는 일의 핵심이 무엇이라고 했습니까? 십자가의 현재적 체험이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때때로 주님을 멀리 떠나 세상을 방황하며 살다가도, 은혜를 받아서 눈물을 흘리며 회개할 때, 결국 어디에서 그렇게 눈물을 흘리며 참회합니까? 십자가 밑에서 이런 쓸모없는 죄인을 위해 십자가에서 대신 죽어주신 예수님의 사랑 앞에서 우리 자신이 완전히 깨어지고 부서지고 회개하게 되어지는 것을 경험하는 것입니다. 주님을 떠날 때는 각자 다 다른 방향으로 떠났지만(돈, 명예, 권력, 쾌락), 돌아와 회개할 때는 오직 한 곳에서만 하는데, 그것이 바로 십자가라는 것입니다. 회개는 벌을 두려워하면서 지은 죄를 나열하는 것이 아니라, 십자가 사랑을 아는 가운데서 아파하며 눈물을 흘리는 것입니다. 바로 이 십자가 사랑을 통해서 우리의 죄의 정욕이 죽어지는 것입니다. 이런 경험을 어쩌다가 한 번씩 하는 것이 아니라 바로 매일 계속되어져야 한다는 것입니다. 날마다 십자가의 은혜로 그리고 성령으로 육체를 죽여야지만 우리는 새언약 안에서 허락된 하나님과의 화목이라는 놀라운 은혜와 특권을 계속해서 유지할 수 있고, 계속 누리면서 살아갈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두 가지에 힘써야 합니다. 말씀을 통해 십자가 복음에 대한 선명한 지식을 쌓아야 합니다. 그리고 그 지식에 성령이 역사하도록 기도해야 합니다. 성령의 역사가 없으면, 암만 십자가 복음에 대해서 듣고 배워도 아무런 삶의 변화가 일어나지 않습니다. 여러분 매주 십자가 복음이 우리 교회에서 얼마나 많이 선포되고 있으며, 우리나라의 모든 교회에서 얼마나 많이 십자가 복음이 선포되고 있습니까? 그럼에도 왜 진정한 회개와 삶의 변화가 수반되지 않습니까? 그것은 성령의 역사가 없기 때문입니다.

 

히브리서는 영원하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피뿌림을 받는다고 분명히 말하고 있습니다. “증거하는 이가 셋이니 성령과 물과 피라 또한 이 셋이 합하여 하나이니라”(요일 5:8) 여러분 예수님의 보혈과 성령은 하나입니다. 성령은 보혈의 공로로 우리 가운데 역사하고, 또한 보혈은 성령으로 말미암아서만 우리의 양심을 정결케 하여 죽은 행실을 벗어나 살아계신 하나님을 섬기게 하는 놀라운 능력의 보혈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기도해야 합니다. 날마다 이 십자가 복음을 묵상하면서, 그리고 그 묵상에 성령께서 역사하셔서 진정한 피뿌림이 되도록 기도해야 할 것입니다. 그렇게 우리가 말씀과 기도에 힘쓸 때, 우리는 십자가의 은혜로 말미암아 우리의 심령이 새롭게 되어 죽은 행실에서 벗어나 하나님을 예배하는 삶을 살아가게 되어질 것입니다. 이러한 은혜가 우리 모든 한결 지체들 가운데 충만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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