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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 최상범
성경본문 히 9:15-28
성경본문내용 (15)이를 인하여 그는 새 언약의 중보니 이는 첫 언약 때에 범한 죄를 속하려고 죽으사 부르심을 입은 자로 하여금 영원한 기업의 약속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16)유언은 유언한 자가 죽어야 되나니(17)유언은 그 사람이 죽은 후에야 견고한즉 유언한 자가 살았을 때에는 언제든지 효력이 없느니라(18)이러므로 첫 언약도 피 없이 세운 것이 아니니(19)모세가 율법대로 모든 계명을 온 백성에게 말한 후에 송아지와 염소의 피와 및 물과 붉은 양털과 우슬초를 취하여 그 책과 온 백성에게 뿌려(20)이르되 이는 하나님이 너희에게 명하신 언약의 피라 하고(21)또한 이와 같이 피로써 장막과 섬기는 일에 쓰는 모든 그릇에 뿌렸느니라(22)율법을 좇아 거의 모든 물건이 피로써 정결케 되나니 피 흘림이 없은즉 사함이 없느니라(23)그러므로 하늘에 있는 것들의 모형은 이런 것들로써 정결케 할 필요가 있었으나 하늘에 있는 그것들은 이런 것들보다 더 좋은 제물로 할지니라(24)그리스도께서는 참 것의 그림자인 손으로 만든 성소에 들어가지 아니하시고 오직 참 하늘에 들어가사 이제 우리를 위하여 하나님 앞에 나타나시고(25)대제사장이 해마다 다른 것의 피로써 성소에 들어가는 것같이 자주 자기를 드리려고 아니하실지니(26)그리하면 그가 세상을 창조할 때부터 자주 고난을 받았어야 할 것이로되 이제 자기를 단번에 제사로 드려 죄를 없게 하시려고 세상 끝에 나타나셨느니라(27)한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하신 것이요 그 후에는 심판이 있으리니(28)이와 같이 그리스도도 많은 사람의 죄를 담당하시려고 단번에 드리신 바 되셨고 구원에 이르게 하기 위하여 죄와 상관 없이 자기를 바라는 자들에게 두번째 나타나시리라
강설날짜 2012-11-11

2012년 11월 11일 한결교회 주일예배강설

히브리서 제23강


언약과 피


말씀 : 히 9:15-28


1) 새 언약의 중보 - 대속의 죽음으로 부르심을 입은 자에게 구원과 기업을 상속받게 하심.


(15)이를 인하여 그는 새 언약의 중보니 이는 첫 언약 때에 범한 죄를 속하려고 죽으사 부르심을 입은 자로 하여금 영원한 기업의 약속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


“이를 인하여”라는 말은 앞의 말을 받는 것입니다. 즉 예수님이 바로 자신의 피를 우리의 양심에 뿌려 정결케 하여서 우리로 죽은 행실에서 벗어나 살아계신 하나님을 섬기는 예배자의 자리로 나아오게 하셨다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예레미야에서 약속한 새 언약을 성취하신 새 언약의 중보자가 되신다는 것입니다. 이 새 언약의 중보이신 예수님께서 첫 언약 때에 범한 죄, 곧 첫 언약이 해결할 수 없었던 죄를 자신의 죽음으로 대속하셔서 영원한 하나님 나라의 기업을 상속받게 하셨습니다. 누구에게 이 놀라운 은혜를 주십니까? 부르심을 입은 자에게 주십니다. 교회 나온다고 다 주시는 것이 아니고, “주여 주여” 한다고 주시는 것도 아니고, 오직 주님께서 부르신 자만 받을 수 있는 것입니다. 학교에서 선생님이 학생들에게 “지금부터 내가 호명하는 사람만 앞으로 나와라 상을 주겠다” 라고 말할 때에, 호명도 안 되었는데, 일어나서 나오면 어떻게 됩니까? 한 대 맞고 “다시 들어가라”고 하는 것입니다. 호명이 되어야 나올 수가 있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하나님이 이 세상에 수많은 사람들이 있지만, 다 구원하신 것이 아니고, 이름을 하나하나 호명하셔서 불러 세우신 자만 구원받고, 이 영원한 기업의 약속을 받을 수가 있는 것입니다.


(2)곧 하나님 아버지의 미리 아심을 따라 성령의 거룩하게 하심으로 순종함과 예수 그리스도의 피 뿌림을 얻기 위하여 택하심을 입은 자들에게 편지하노니 은혜와 평강이 너희에게 더욱 많을지어다(벧전 1:2)


그래서 우리가 장차 하나님 나라를 기업으로 받는 것은 오직 택하심의 은혜로 말미암는 것입니다. 우리가 부르심을 입은 자라면 이 은혜위에 굳게 서야 합니다.


2) 유언? 언약?


(16)유언은 유언한 자가 죽어야 되나니(17)유언은 그 사람이 죽은 후에야 견고한즉 유언한 자가 살았을 때에는 언제든지 효력이 없느니라


이 구절은 매우 논쟁이 되는 구절입니다. 이 구절의 ‘유언’ 부분의 난하주를 보면 ‘언약’이라고 되어 있습니다. 즉 원어로 보면 이 ‘유언’이라는 단어는 앞에서 계속해서 언급되었던 ‘언약’이라는 단어와 동일한 단어입니다. 이 단어는 ‘디아데케’라는 단어인데, 기본적으로는 ‘처리하다’라는 뜻을 가진 단어이고, 그 당시에는 ‘유언’을 뜻하는 단어로 사용되었으며, 성경에서는 주로 ‘언약’이라는 뜻으로 사용되었습니다. 이런 단어를 ‘다의어’라고 합니다. 동음이의어가 아닙니다. 동음이의어는 철자는 같지만 그 의미가 완전히 다른 다른 단어를 말합니다. 예를 들어 사람 인체의 ‘배’나 바다 위를 떠다니는 ‘배’나 과일 ‘배’나 다 철자가 같지만 완전히 다른 뜻의 다른 단어입니다. 그러나 다의어는 같은 단어에서 그 중심 의미에서 발전하여 변형된 의미로 사용되는 경우를 말합니다. 예를 들어 “너 요즘도 도박하냐?” “거기서 발을 뺀지 오래다.” 또는 “도박에서 손 씻고 착실하게 살아가고 있다.” 여기서 ‘발’과 ‘손’은 우리 몸의 발과 손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본래 의미에서 보다 발전되고 변형되어서 “어떤 일이나 관계를 완전히 끊고 물러나다”라는 뜻으로 사용된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이 ‘디아데케’라는 단어도 그러한 다의어입니다. 원래 본 뜻은 ‘(자기 자신을 위해 스스로) 처리하다(처분하다)’는 뜻인데, 그 당시 사람들은“ 재산을 자녀들에게 처분하다, 처리하다”는 뜻에서 ‘유산’을 의미하는 단어로 사용했습니다. 그런데 성경이 이 용어를 갖다가 ‘언약’을 뜻하는 단어로 차용하여 사용하기 시작했습니다.

 

구약에 ‘언약’이라는 단어는 ‘베리트’라는 단어인데, 알렉산더 대제에 의해서 이스라엘이 헬라화 되면서, (헬라어를 주로 쓰게 되면서) 성경을 헬라어로 번역해야 할 필요성이 생겼습니다. 그래서 나온 성경이 바로 70인역(LXX)입니다. 그때 히브리어 ‘베리트’라는 단어를 헬라어로 번역할 때, 그 당시 ‘유언’을 뜻하던 ‘디아데케’로 번역했습니다. 왜 그렇게 했을까요? 분명히 ‘계약, 합의, 약속’이라는 뜻의 단어인 ‘쉰데케’라는 헬라어 단어가 버젓이 있는데, 그것으로 번역하지 않고, ‘유언’으로 사용되던 단어를 사용한 것일까요? 이것은 아주 의도적인 것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우리 인생들과 맺으시는 언약은 ‘쉰데케’가 의미하는 ‘계약, 합의, 약속’하고는 다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과 우리가 서로 의논하고 조건을 따져가며 협약하고 협정을 체결한 것입니까? 아닙니다. 하나님을 떠나 원수 노릇하던 우리 인생들에게 하나님이 친히 찾아오셔서 일방적으로 은혜로 맺어주시는 것이 언약입니다. 그래서 이 ‘베리트’라는 단어를 ‘쉰데케’로 번역할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그러면 무슨 단어로 번역해야 할까요? 70인역 번역자들이 아마도 고민을 많이 했을 것입니다. “무언가 일방적인 성격을 강조할 수 있는 단어가 어디 없을까?” 하는 차에 발견한 단어가 바로 헬라어 ‘디아데케’입니다. 이 ‘디아데케’는 그 당시 유언을 의미하는 단어로 사용되었는데, 본래의미는 ‘무언가를 자기를 위해 스스로 또는 일방적으로(주권적으로) 처리하다’라는 의미가 있습니다. 유언이 바로 그런 식이지 않습니까? 유언의 주된 목적은 자식들에게 재산분배하기 위해서 하는데, 그렇게 유언을 할 때, 무슨 자녀들과 서로 의논해서 타협과 협상과정을 통해 결정하는 것입니까? 아닙니다. 부모 마음대로 결정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본인이 그렇게 정하고 법적으로 확증이 되었으면 그것으로 끝입니다. 다른 사람들이 그것에 대해서 어떻게 변경을 가하거나 폐하지 못하고 그대로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그리고 부모가 유언을 해서 재산을 물려주도록 정했으면, 그대로 자식들에게 재산이 물려지게 됩니다. 무슨 자식들이 어떤 조건을 내놓고, 무언가 대가를 지불해야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부모가 유언했으면, 그 부모가 죽는 즉시로 바로 그 사람에게 주어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러한 ‘유언’의 일방적인 성격 때문에 사람들은 ‘자기 자신을 위해 스스로 처분하다’라는 뜻을 지닌 ‘디아데케’를 ‘유언’을 의미하는 용어로 사용한 것입니다. 그리고 바로 이런 의미가 성경의 언약 개념을 잘 표현하기 때문에, 신약성경은 구약의 ‘베리트’를 이 단어로 번역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신약성경에서 33번 사용되어서 오늘 읽은 구절의 두 경우를 제외한 모든 경우에서 언약이라는 의미로 사용되었습니다.

 

그러면 신약성경에서 늘 ‘언약’이라고 번역했던 ‘디아데케’를 왜 여기서만 ‘유언’이라고 번역했을까요? “그것이 잘못된 번역 아니냐? 그냥 늘 그러했듯이 여기서도 언약으로 번역해야 옳지 않느냐?” 하는 논쟁이 있습니다. 그러나 유언 대신에 언약을 놓고 읽어보십시오. 의미가 완전히 이상해집니다.


“언약은 언약한 자가 죽어야 되나니 언약은 그 사람이 죽은 후에야 견고한즉 언약한 자가 살았을 때에는 언제든지 효력이 없느니라”


무슨 말인지 이해가 되십니까? 하나님이 우리와 언약을 맺으실 때 하나님이 죽으셔야지만 언약이 효력이 생긴다는 것인데, 하나님이 죽으실 수도 없을 뿐만 아니라, 하나님이 맺으시는 언약은 맺으시는 즉시 그 효력이 나타나는 것입니다. 그러니깐 여기서 말하는 것은 ‘언약’이라기보다는 ‘유언’이 맞습니다.

 

그러면 히브리서 저자는 유언에 대해서 갑자기 왜 이야기합니까? 두 가지 개념을 이끌어오기 위해서입니다. 첫 번째로 유언은 무조건적이고 일방적입니다. 앞에서 영원한 하나님 나라의 유산을 우리에게 주시는데, 그것이 하나님의 일방적이고 주권적인 은혜로 주어진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불러주시면 값없이 은혜로 그 유산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또한 두 번째로 유언이 효력을 가지기 위해서는 죽음을 필요로 합니다. 마찬가지로 이러한 값없는 새 언약의 축복을 우리에게 주시기 위해서 주님께서는 죽으셔야만 했습니다. 이 점에 이후에 논증의 핵심입니다.


3) 첫 언약도 피 없이 세운 것이 아니다.


이렇게 언약이 세워지기 위해서 죽음이 필요했다는 사실은 새 언약뿐만 아니라, 옛 언약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18)이러므로 첫 언약도 피 없이 세운 것이 아니니(19)모세가 율법대로 모든 계명을 온 백성에게 말한 후에 송아지와 염소의 피와 및 물과 붉은 양털과 우슬초를 취하여 그 책과 온 백성에게 뿌려(20)이르되 이는 하나님이 너희에게 명하신 언약의 피라 하고


이 말씀은 출애굽기 24장 사건을 인용하는 것입니다.


(3)모세가 와서 여호와의 모든 말씀과 그 모든 율례를 백성에게 고하매 그들이 한 소리로 응답하여 가로되 여호와의 명하신 모든 말씀을 우리가 준행하리이다(4)모세가 여호와의 모든 말씀을 기록하고 이른 아침에 일어나 산 아래 단을 쌓고 이스라엘 십 이 지파대로 열 두 기둥을 세우고(5)이스라엘 자손의 청년들을 보내어 번제와 소로 화목제를 여호와께 드리게 하고(6)모세가 피를 취하여 반은 여러 양푼에 담고 반은 단에 뿌리고(7)언약서를 가져 백성에게 낭독하여 들리매 그들이 가로되 여호와의 모든 말씀을 우리가 준행하리이다(8)모세가 그 피를 취하여 백성에게 뿌려 가로되 이는 여호와께서 이 모든 말씀에 대하여 너희와 세우신 언약의 피니라(출 24:3-8)


시내산에서 하나님께서 이스라엘과 언약을 맺으시는 장면인데, 모세가 언약법인 율법을 낭독하자, 백성들이 “다 지켜 행하겠습니다.” 그렇게 말합니다. 이것은 이스라엘 백성들의 1차 건방입니다. 죄인이 율법을 지킬 수 있습니까? 할 수 없는 것을 하겠다는 것이죠. 1차 건방은 2차 건방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다음날 모세가 아침 일찍 일어나서 소로 번제와 화목제를 드리고 피를 취하여서 반은 여러 양푼에 담고 반은 단에 뿌렸습니다. 그리고 다시 언약법인 율법을 낭독하자, 2차 건방을 떱니다. “다 지켜 행하겠습니다.” 그때 모세가 백성들에게 피를 뿌렸습니다. 왜 피를 뿌렸을까요? 모세가 무엇이라고 하면서 피를 뿌립니까? “여호와께서 이 모든 말씀에 대하여 너희와 세우신 언약의 피니라” 피를 뿌려 언약을 세웠다는 말입니다.

 

우리가 결혼식을 하면, “서로 부부로서 의무를 다할 것을 서약합니까? 네. 서약합니다.” 그 다음에 무엇을 합니까? 예물교환하고, 주례자는 이 둘이 부부가 되었음을 공적으로 선포합니다. 결혼은 언약의 대표적인 케이스입니다. 결혼식은 세 가지 단계로 되어 있다. “서약 -> 의식 -> 성혼 선포” 이 서약과 성혼 선포 가운데 있는 의식은 서로의 의무를 다하기로 언약을 맺었음을 인준하는 의식입니다. 마찬가지로 시내산 언약도 먼저 약속을 하고, 그 다음에 피 뿌리는 의식을 행하여 언약을 인준한 다음에 “이것은 너희와 세우신 언약의 피다” 라고하면서 언약이 맺어졌음을 공적으로 선언하였습니다.

 

그런데 이 가운데 있는 의식이 왜 하필 피 뿌리는 것일까요? 나중에 여호수아가 죽기 전에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언약을 갱신하는데, 그때는 피를 뿌리지 않고 돌을 세우는 의식을 행해서 언약을 갱신했습니다. 이를테면 그런 의식을 행하지 않고, 왜 피를 뿌리는 의식을 행했을까요? 우리는 이 점을 출애굽기 전체 문맥을 생각해야 합니다. 출애굽기 1장에서 23장까지는 출애굽의 과정과 이스라엘 백성들이 율법을 수여받는 것에 관한 말씀이고, 25장부터 끝장까지는 성막에 대해서 말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 언약체결식인 24장은 그 사이에 샌드위치 되어 있는 단락입니다. 이것이 말해주는 바가 무엇입니까? 율법으로는 죄를 깨달을 뿐 구원받지 못한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율법만 가지고는 죄인이 하나님을 만날 수 없고, 하나님이 그들과 언약을 맺어 그들의 남편이 되실 수가 없습니다. 언약이 체결이 안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피를 뿌려서 그들을 죄와 부정에서 정결케 하여야지만 하나님이 그들 가운데 거하시고 그들의 남편이 되실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피를 뿌려 언약식을 체결한 것입니다. “이 피는 너희와 세우신 언약의 피니라” 그러면서 언약을 맺으신 것입니다. 그리고 25장부터는 이러한 피 뿌리는 예에 대한 말씀, 곧 성막에 대한 말씀이 이어져 나오는 것입니다.

이렇게 옛 언약도 바로 모세가 백성들에게 피를 뿌려 그 육체를 정결케 하여 하나님과 백성들간의 언약을 세웠던 것이고, 그리고 그 옛 언약의 성취인 새 언약도 마찬가지로 피를 뿌려서 세운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도 성만찬을 제정하시면서, 포도주를 나눠주시면서 뭐라고 하셨습니까?


(28)이것은 죄 사함을 얻게 하려고 많은 사람을 위하여 흘리는바 나의 피 곧 언약의 피니라(마 26:28)


모세가 하나님과 이스라엘의 중보자로서 언약을 세울 때에 동물의 피를 백성들에게 뿌려 세웠듯이, 예수님께서도 하나님과 우리사이의 중보자가 되어 언약을 맺게 하실 때에 동물의 피가 아닌 자기 피를 뿌려 언약을 맺게 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피 흘림이 없이는 어떠한 언약도 성립할 수가 없습니다.


4) 피 뿌리는 속죄제


(21)또한 이와 같이 피로써 장막과 섬기는 일에 쓰는 모든 그릇에 뿌렸느니라(22)율법을 좇아 거의 모든 물건이 피로써 정결케 되나니 피 흘림이 없은즉 사함이 없느니라


피를 뿌렸다는 것과 관련해서 우리는 오늘 본문과 출애굽기의 언급이 많이 다른 것을 보게 됩니다. 출애굽기는 소를 번제와 화목제로 드렸고, 그 피를 백성들에게만 뿌렸다고 되어 있는데, 히브리서에서는 염소의 피와 정결케 하는 물, 붉은 양털, 우슬초를 취하여 백성들에게 뿐만 아니라 책에도 뿌렸고, 그 피로써 장막과 섬기는 일에 쓰는 모든 그릇에 뿌렸다라고 되어 있습니다. 모세오경에서는 기름으로 성막의 기구를 정결케 했다는 말은 있지만, 피를 뿌렸다는 말은 나오지 않습니다.

 

이것은 분명 모세오경의 언급과 다르지만, 히브리서 저자가 잘못 알고 실수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그 당시 유대인들은 다 그렇게 생각했습니다. ‘미드라쉬’나 ‘미쉬나’ 또는 요세푸스의 기록 등에도 이런 기록들을 찾아볼 수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히브리서 저자가 모세가 백성들에게 피를 뿌리는 의식에다가 민수기 19장에 나오는 염소의 피와 정결케 하는 물로 정결케 하는 정결예법과 붉은 양털과 우슬초로 시체 만진 자, 피부병 앓는 자 등 여러 가지 원인으로 부정한자에게 뿌려 정결케 하는 정결예법 의식을 연결시키고 있다는 것은 모세가 언약을 비준하며 뿌린 피가 바로 그들을 정결케 하는데 목적이 있음을 보여줍니다.

 

사실 히브리서는 구약의 동물제사를 생각할 때 항상 이 점을 염두에 둡니다. 구약의 율법에 의하면 제사에는 5가지가 있다고 하였다. 번제, 소제, 화목제, 속죄제, 속건제가 있습니다. 흔히들 번제는 속죄의 제사이고 소제는 감사의 제사이고 화목제는 화목한 것에 대한 감사의 제사이고... 그렇게 아는데, 그것은 틀린 생각입니다. 5가지 모든 제사는 다 죄사함을 위해 드리는 속죄의 기능이 있습니다. 심지어는 동물이 아닌 곡물로 드리는 소제도 속죄를 위해 드리는 경우가 있습니다. 하지만 각 제사의식의 독특한 점들은 각 제사의 강조점과 목적이 무엇인지를 잘 보여줍니다. 번제는 제물 전체를 각을 떠 사름으로써 죄의 사악함과 그 영향의 심각성을 보여주고, 그 번제를 불태워 향기로 하나님이 받으심을 통해 하나님과의 관계가 다시 회복되었음을 보여줍니다. 한편으로 소제는 유일하게 피 없는 제사로서 곡식과 기름과 유황 그리고 포도주와 함께 드려졌는데, 그 곡식은 제사장들의 주식입니다. 그래서 사실 성막에서 가장 많이 행해진 제사는 소제입니다. 왜냐하면 이 소제가 단독으로 죄사함을 위해 드려진 경우도 있지만, 주로 감사의 제사로서 다른 제사를 드린 후 마지막에 마무리로 드리는 제사였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소제는 속죄의 의미를 기본으로 해서 감사를 표현함과 아울러 중보 사역하는 제사장들의 쓸 것을 공급한다는 의미가 있습니다. 화목제는 번제를 드린 다음에 드리는 제사로서 기본적으로 속죄의 의미가 있고, 그와 아울러서 하나님과의 관계 회복의 결과로 주어지는 평화와 구원을 감사하며 그 제물을 이웃과 함께 먹고 즐기는 제사입니다. 속죄제는 부지중에 지은 죄에 대해 속죄하는 제사입니다. 알고도 지은 죄는 번제이지만, 모르고 지은 죄는 속죄제입니다. 그런데 속죄제는 단순한 율법을 범한 죄뿐만 아니라, 부정을 깨끗케 하는 제사입니다. 그리고 속건제는 보상제라고 달리 말할 수 있는데, 제사를 드린 후에 후속조치가 필요한 제사일 경우 속건제를 드렸습니다. 갑자기 이 이야기를 왜 하느냐 하면, 히브리서는 바로 그 다섯 가지 종류의 제사 가운데 속죄제에 초점을 맞추고 있기 때문입니다.

 

다른 제사와는 달리 속죄제만의 독특한 특징은 피 뿌리는 예식이 강조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개인과 때로는 공동체, 제사장과 온 이스라엘의 모든 부정과 죄악을 정결케 하고 사하는 제사인 것입니다. 그런데 이 피를 모세가 백성들에게 뿌렸듯이 속죄제를 드리는 사람에게 뿌리는 것이 아니라, 성막의 기구에 뿌렸습니다. 이것이 우리에게 매우 생소한 개념입니다. 우리는 그 사람에게 뿌려야 그 사람을 정결케 한다고 생각하는데, 율법은 성막의 기구에 뿌리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그 드리는 사람의 신분이 어떠하냐에 따라서 성막의 어디어디에다가 뿌려야 하는지가 다 달라집니다. 일반 백성이 와서 속제죄를 드리면, 그 피를 단에만 뿌렸습니다. 그러나 제사장과 대제사장은 그 피를 가지고서 성소 안에 들어가서 향단의 뿔과 휘장에 뿌려야 합니다. 그리고 그렇게 세월이 지나면서 부지불식간에 범한 죄와 부정이 이스라엘 가운데 축적되다가, 대속죄일날에 대제사장이 지성소에 들어가서 그 피를 언약궤 위에 뿌려서 모든 이스라엘의 죄와 부정을 깨끗케 하였던 것입니다. 그러면 왜 사람에게 뿌리지 않고, 성막의 기구에 뿌렸습니까?


(31)너희는 이와 같이 이스라엘 자손으로 그 부정에서 떠나게 하여 그들로 그 가운데 있는 내 장막을 더럽히고 그 부정한 중에서 죽음을 면케 할지니라(레 15:31)

(19)또 손가락으로 그 피를 그 위에 일곱번 뿌려 이스라엘 자손의 부정에서 단을 성결케 할 것이요(레 16:19)

(13)누구든지 죽은 사람의 시체를 만지고 스스로 정결케 아니하는 자는 여호와의 성막을 더럽힘이라 그가 이스라엘에서 끊쳐질 것은 정결케 하는 물을 그에게 뿌리지 아니하므로 깨끗케 되지 못하고 그 부정함이 그저 있음이니라(민 19:13)


이상의 구절은 죄와 부정이 사람을 더럽힐 뿐 아니라 하나님의 성소까지 오염시킨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인간이 죄를 짓고 이를 속죄하지 않거나, 부정하게 되었는데 그 부정을 제거하지 않았을 때, 거룩하신 하나님은 진노하실 뿐 아니라 죄로 인해 오염된 성소에 거하시지 못하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의 위대한 소명은 바로 그들 가운데 하나님이 머무시는 거룩한 하나님의 백성이 되는 것이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거룩해야 하는 이유는 그들 가운데 거하시는 하나님이 거룩하시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이스라엘 가운데 가장 중요한 날은 대속죄일날입니다. 가장 중요한 사람 대제사장이 가장 중요한 곳 지성소에 들어가서 그 지성소의 언약궤에 피를 뿌려 성막을 이스라엘의 부정으로부터 깨끗하게 하여서 하나님이 이스라엘 가운데 거할 수 있게 하는 의식입니다.


(21)또한 이와 같이 피로써 장막과 섬기는 일에 쓰는 모든 그릇에 뿌렸느니라(22)율법을 좇아 거의 모든 물건이 피로써 정결케 되나니 피 흘림이 없은즉 사함이 없느니라


왜 피를 사람에게만 뿌리는 것이 아니라, 성막의 거의 모든 기구에도 뿌려야 했는지 이해가 되십니까? 사람의 부정이 성막에 있는 모든 것을 더럽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사람도 정결케 되어야 하지만, 성막의 기구들도 정결케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정결케 되어야 하나님이 성막에 거하실 수 있습니다.


율법을 좇아 피로 정결케 되었다. = 피 흘림이 없으면 사함이 없다.


이것은 구약이나 신약이나 동일한 원리입니다. 구약은 동물의 피 흘림 없이는 외적인 사함이 없습니다. 신약은 그리스도의 피 흘림 없이는 영원한 죄사함은 없는 것입니다.


5) 하늘 성소에서 피 뿌리심


이러한 땅의 성소는 동물의 피로 정결케 할 필요가 있었습니다.


(23)그러므로 하늘에 있는 것들의 모형은 이런 것들로써 정결케 할 필요가 있었으나 하늘에 있는 그것들은 이런 것들보다 더 좋은 제물로 할지니라(24)그리스도께서는 참 것의 그림자인 손으로 만든 성소에 들어가지 아니하시고 오직 참 하늘에 들어가사 이제 우리를 위하여 하나님 앞에 나타나시고


모형이니깐 동물의 피로 정결케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 실체인 하늘성소는 동물의 피로 할 수 없고 더 좋은 피로 해야 하는 것입니다. 바로 그리스도께서 자기 피를 가지고 하늘 성소에 우리를 위하여 들어가셔서 우리의 죄악으로 인해 더러워진 하늘 지성소에 피를 뿌려 정결케 하시는 것입니다. 제가 방금 한 말이 상당히 오해의 소지가 있는 말입니다. 여러분 예수님께서 하늘 성막의 기구에 자기 피를 뿌린다는 말이 의미하는 바가 무엇입니까? 진짜 하늘에 올라가면 눈에 보이는 성막이 있고, 그 성막에 여러 기구가 있어서 거기다가 뿌린다는 것으로 오해하면 절대로 안 됩니다. 그것은 상징적인 표현입니다. 무엇에 대한 상징적인 표현입니까? 깨끗해질 필요가 있는 하늘 성막의 기구는 결국 더러워진 사람의 양심을 상징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 하늘 성막에 자기피를 가지고 들어가셔서 그 피를 우리의 양심에 뿌리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땅의 성막에 계실 때에는 성막과 그 모든 기구에 피를 뿌려서 정결케 해야 했던 반면, 이제 새언약에서는 우리가 곧 하나님의 집이요, 우리의 마음이 성령이 계시는 하늘 성전입니다.


(6)그리스도는 그의 집 맡은 아들로 충성하였으니 우리가 소망의 담대함과 자랑을 끝까지 견고히 잡으면 그의 집이라(히 3:6)

(22)그러나 너희가 이른 곳은 시온산과 살아 계신 하나님의 도성인 하늘의 예루살렘과 천만 천사와(히 12:22)

(6)또 함께 일으키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함께 하늘에 앉히시니(엡 2:6)


구약의 백성들은 하나님께 나아가기 위해 외적인 더러움에서 깨끗하게 되어야 했지만, 이제 새언약 백성들인 우리는 하나님의 합당한 거처가 되기 위해서 바로 우리 내면이 정결케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22)너희도 성령 안에서 하나님의 거하실 처소가 되기 위하여 예수 안에서 함께 지어져 가느니라(엡 2:22)

(5)너희도 산 돌 같이 신령한 집으로 세워지고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이 기쁘게 받으실 신령한 제사를 드릴 거룩한 제사장이 될지니라(벧전 2:5)


우리 마음이 하나님의 성령이 계시는 성전입니다. 우리 마음에 그리스도의 피를 뿌려 정결케 하여 성령 하나님이 임재하여 계시는 것입니다.


(18)너희가 알거니와 너희 조상의 유전한 망령된 행실에서 구속된 것은 은이나 금 같이 없어질 것으로 한 것이 아니요(19)오직 흠 없고 점 없는 어린양 같은 그리스도의 보배로운 피로 한 것이니라(벧전 1:18-19)

(22)너희가 진리를 순종함으로 너희 영혼을 깨끗하게 하여 거짓이 없이 형제를 사랑하기에 이르렀으니 마음으로 뜨겁게 피차 사랑하라(23)너희가 거듭난 것이 썩어질 씨로 된 것이 아니요 썩지 아니할 씨로 된 것이니 하나님의 살아 있고 항상 있는 말씀으로 되었느니라(벧전 1:22-23)


그러므로 인생이 이와 같은 신령한 집이 되기 위해서는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피 뿌림으로 새로 거듭나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물과 성령으로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나님 나라를 볼 수 없느니라” 라고 말했습니다. 예수님에 대해서 안다고, 머리로 알고 입으로 고백한다고 구원받은 것이 아닙니다. 교회에 열심히 나온다고 구원받은 것이 아닙니다. 내 마음이 근본 거듭나야 합니다. “나는 당연히 거듭났죠.” 아닐 수도 있습니다. 우리 자신을 깊이 돌아보아야 합니다. “내가 과연 정말 내 양심이 그리스도의 피 뿌리는 경험을 통해 정결케 됨을 얻은 자인가? 그리하여 성령이 내 안에 계시는가? 그리스도께서 내 안에 계시는가?” 확인해 봐야 합니다.


(5)너희가 믿음에 있는가 너희 자신을 시험하고 너희 자신을 확증하라 예수 그리스도께서 너희 안에 계신 줄을 너희가 스스로 알지 못하느냐 그렇지 않으면 너희가 버리운 자니라(고후 13:5)


그리고 이미 거듭난 자는 날마다 “예수 그리스도의 피 뿌림”을 받아서 그 정결을 유지해야만 성령 안에서 하나님과 사귀어 살고, 하나님을 예배하는 자의 삶을 살아갈 수가 있습니다. 우리가 하루를 살면서 십자가에 대해서 얼마나 생각하고 삽니까? 일주일동안 그 십자가에 대해 묵상하고, 그 십자가의 은혜에 감사하는 마음으로 감사기도를 얼마나 드립니까? 사실 우리가 그냥 잊고 살다가 주일날 와서 죄 회개하면서 잠간 생각하는 정도로 살 때가 얼마나 많습니까?

 

여러분 우리가 그렇게 살 수 없습니다. 주님께서는 이 새 언약의 놀라운 축복을 주시기 위해서 십자가에서 그 참혹한 지옥형벌을 받으셨습니다. 우리가 이 은혜를 잊어버리면 안 됩니다. 늘 마음에 기억하고, 살아야 합니다. 그래서 이 벌레같이 쓸모없는 죄인을 위해서 죽으신 주님의 사랑 앞에서 날마다 자기가 깨어지고 그 은혜 아래서 감사의 기도를 드려야 합니다. 그렇게 날마다 우리의 심령에 피뿌림을 받아야 우리가 성령의 인도함을 받으면서, 성령 안에서 새 언약의 모든 축복과 은혜의 혜택들을 누릴 수가 있는 것입니다. 성령께서 은혜를 주셔서 우리 안에 십자가의 은혜를 깊이 깨닫게 하시고, 우리가 성령이 거하시는 성전이라는 사실을 깊이 깨닫게 하여주시기를 기도합니다. 그리하여 날마다 이 은혜를 잊지 않고 피뿌림을 받아 새 언약의 놀라운 축복들을 누리며 살아가는 우리 모든 한결지체들이 되게하여주시기를 기도합니다.


6) 반복될 수 없다.


(24)그리스도께서는 참 것의 그림자인 손으로 만든 성소에 들어가지 아니하시고 오직 참 하늘에 들어가사 이제 우리를 위하여 하나님 앞에 나타나시고(25)대제사장이 해마다 다른 것의 피로써 성소에 들어가는 것같이 자주 자기를 드리려고 아니하실지니(26)그리하면 그가 세상을 창조할 때부터 자주 고난을 받았어야 할 것이로되 이제 자기를 단번에 제사로 드려 죄를 없게 하시려고 세상 끝에 나타나셨느니라(27)한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하신 것이요 그 후에는 심판이 있으리니(28)이와 같이 그리스도도 많은 사람의 죄를 담당하시려고 단번에 드리신 바 되셨고 구원에 이르게 하기 위하여 죄와 상관 없이 자기를 바라는 자들에게 두번째 나타나시리라


모형과 그림자인 땅의 성막에는 대제사장이 지성소에 들어가서 피를 뿌리고 사죄의 기도를 드렸으면, 이제 나와야 합니다. 거기 계속 머물러 있을 수 없습니다. 할 일 다 했으면, 계속 있고 싶어도 나가야 합니다. 어떻게 보면 하나님의 집에서 나가야 하는 어떤 서러움이 구약 백성들에게는 항상 있는 것입니다. 1년에 한번 잠간 하나님을 뵙고 다시 그 집에서 나가야 한다는 것이 옛언약의 한계입니다. 그러나 그리스도께서는 그렇게 아니하셨습니다. 하늘에 있는 성막에 우리를 위하여 들어가셔서 하나님 앞에 기쁨으로 받아들여지셨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과 우리를 화목케 하시는 일을 완성하시고 다시 나오십니까? 아닙니다. 이제 그러실 필요가 없습니다. 이제는 그곳이 그분이 영원히 거하실 처소가 되었습니다. 그분의 피의 가치가 무한하기 때문에 단번에 모든 백성들의 죄를 사하고, 영원히 거룩하게 하시고, 단번에 하늘의 지성소에 들어가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반복될 필요가 없습니다. 만일 반복이 되어야 했다면, 아주 불합리한 현상이 나타납니다. 그가 역사 가운데서 자주 고난을 받고 죽으셔야 한다는 말이 되는 것입니다. 이것은 논리상 말이 안 됩니다. 왜냐하면 사람은 한번 죽는 것으로 하나님이 정하셨기 때문입니다. 사람이 죽었다가 불교처럼 다시 환생해서 태어났다가 또 죽고 다시 환생했다가 죽고 반복하는 것이 아니라, 한번 죽으면 끝이고, 그 이후에는 심판이 있습니다. 그걸로 끝입니다. 그래서 우리 인생은 한번밖에 없는 인생이고, 죽은 후에는 모든 것을 하나님 앞에서 우리의 행실에 대해 결산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사람에게 정하신 질서인데, 예수님도 범사에 우리와 같이 되신 온전하신 사람이십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이 고난당하셔서 죽으시고 다시 살아나셔서 또 고난당하시고 죽으시고 하는 것은 말이 안 되는 것입니다. 반복될 수도 없고, 또 반복해서도 안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날 이것을 반복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오늘날 천주교는 매주 이 그리스도의 희생 제사를 반복합니다. 그래서 그들은 주일예배를 예배라고 안하고 미사라고 합니다. 구약에서 제사로 예배드렸으니, 신약도 그리스도께서 예배가운데 피를 흘리시는 제사의 형식으로 예배드려야 한다고 하면서, 매 예배마다 그리스도의 희생의 제사를 재현하면서 예배드립니다. 그것이 사실상 그리스도의 피를 얼마나 모독하는 것인지 모릅니다. 절대로 그럴 수 없습니다. 그리스도의 희생제사는 영단번의 제사로 끝이 났습니다. 우리가 이것을 잘 기억해야 합니다.


7) 다시 오실 것이다.


(28)이와 같이 그리스도도 많은 사람의 죄를 담당하시려고 단번에 드리신 바 되셨고 구원에 이르게 하기 위하여 죄와 상관 없이 자기를 바라는 자들에게 두번째 나타나시리라


두 번째 나타나신다고 말합니다. 이것은 대속죄일날 의식을 염두에 두고서 하는 말입니다. 대제사장이 지성소로 들어가서 백성들의 시야에서 사라집니다. 대속죄일에는 방울달린 옷을 안 입고 피묻은 하얀 세마포 옷만을 입고 들어갑니다. 그러면 백성들은 대제사장을 더 이상 볼 수도 없고 소리도 들을 수 없습니다. 완전히 차단된 체 밖에서 기다리는 것입니다. 다시 나오기를 숨죽이며 바라보면서 간절히 기다리는 것입니다. 그리고 대제사장이 모든 의식을 필하고 나오면, 비로소 환희의 기쁨을 가지고서 하나님께 감사기도를 드렸습니다. 대제사장이 다시 나왔다는 것은 모든 중보의 의식을 하나님께서 기뻐 받으셨다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대제사장이 나오면 뭐합니까? “우리의 모든 죄와 부정이 사함을 받았다”는 것을 선언하는 토라를 죽 낭독하면서, 죄사함을 선포합니다. 그리고 온 백성들은 거기서 축제를 즐기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하늘의 지성소에 올라가셨습니다. 우리는 그분을 눈으로 볼 수 없고 만질 수도 없고 만날 수도 없습니다. 우리 눈앞에 보이는 현실은 수많은 어려움과 고난밖에 보이지 않습니다. 그러면 주님이 우리와 함께 하신다는 것을 어떻게 알 수 있습니까? 오직 영으로만 그분을 뵈옵고, 오직 믿음으로만 그분을 느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인간이란 영혼만 있는 존재가 아닙니다. 육체와 영혼이 하나로 되어 있는 존재입니다. 영으로는 그분을 느끼고 뵐 수 있지만, 육체로는 그분과 따로 거한다는 것이 어떻게 보면 몹시 답답하고 어려움이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바울은 차라리 죽어서 주님과 함께 거하고 싶다고까지 말했습니다. 왜냐하면 이 땅에 육신을 입고 살면, 육신으로는 주님과 따로 거하는 줄 알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이 세상에서 육신을 입고 사는 한 우리의 감각으로는 주님을 전혀 느끼지 못한 채 살아갈 수밖에 없습니다. 답답하고 때때로 의심이 들 수가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기억해야 할 것은 그분은 분명히 이 세상에 다시 오실 것이라는 것입니다. 2000년 전에 육신을 입고 오셔서 제자들이 눈으로 보고 손으로 만지고 대화했듯이, 그렇게 영으로뿐만 아니라 우리 육신으로도 그분을 뵈올 날이 올 것입니다. 그날에 주님께서는 죄와 상관없이 구원이라는 선물, 영원한 하나님 나라의 기업이라는 선물을 가지고 다시 오실 것입니다.

 

제가 아침에 교회 갈 때 윤희가 “올 때 맛있는거 사와. 과자 사와.” 그럽니다. 그러면 윤희는 아빠가 맛있는 거 사 올 때까지 기대하면서 기다립니다. 아빠가 지금 교회 가셔서 눈앞에 안보이지만, 맛있는 거 사올 줄 믿고 기다립니다. 그것이 바로 재림의 소망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도 답답함이 있어도 참음으로 기다려야 합니다. 이 세상에서 고난 당해도 더 좋은 상급을 바라면서 우리는 믿음과 소망을 잃지 않고 다시 오신다는 이 약속을 굳게 붙잡아야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믿음과 소망 가운데 참음으로 기다려야 합니다. 세상과 타협하지 않고, 죄와 피 흘리기까지 싸우면서 기다려야 합니다. 주님이 우리를 위해 죽어주셨으니, 이제는 우리가 죽을 차례입니다. 주님의 십자가 사랑을 깊이 깨닫고 그 은혜 아래서 충성헌신하며 살아가시는 주의 성도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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