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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 손재호
성경본문 시편 84편 1-12

2003년 특강
      
                                               하나님 집 문지기라도

말씀:시편84:1-12
요절:시편84:10  
   “주의 궁정에서 한 날이 다른 곳에서 천 날보다 나은즉 악인의 장막에 거함보다 내 하나님 문지가로 있는 것이 좋사오니”

   우리는 두 주 간에 걸쳐서 성경이 말하는 축복관에 대해서 배우고자 합니다. 어떤 축복관을 가지고 사는가 하는 문제는 매우 중요합니다. 왜냐하면 축복관은 그 사람의 삶을 결정해 주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은 자기 나름대로 사상과 신념을 가지고 살아갑니다. 그러나 중요한 인생의 고비에서 인간은 결국 행복을 선택합니다. 자신의 행복을 위해 살아간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사람들도 예외가 아닙니다. 많은 신학적 훈련과 성경공부가 중요하지만, 결정적인 순간 그들의 삶의 방향과 질을 형성하는 것은 결국 행복에 대한 이해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들은 성경이 말하는 행복 즉 축복이 무엇인가를 명확히 깨달아야 합니다. 곧 성경이 말하는 올바른 축복관을 소유해야 합니다. 한국교회의 심각한 문제 중에 하나가 바로 잘못 인식된 축복관입니다. 이를 통상 우리는 기복적 축복관이라고 부릅니다. 하나님 자신을 즐기려 하기보다는 하나님을 수단으로 이용해서 자기 혹은 집단의 행복을 추구하는 것을 말합니다. 기복적 축복관은 우리의 신앙을 세속화시켜왔습니다. 더 나아가 기독교를 교회교로 변질시켜 왔습니다. 즉 교회로 하여금 진실로 그리스도를 믿고 순종하게 만들기보다는 그리스도를 이용해서 교회의 물량적 세력 확장에 몰두하게 만들었습니다. 이렇게 진리를 자신의 세속적 행복의 수단으로, 교세 확장의 수단으로 전락시킨 교회의 진상을 세상이 먼저 알아차리고 외면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오늘날 우리 신앙의 위기의 본질이요, 한국교회 위기의 본질입니다.

   우리 자신과 한국교회는 성경이 말하는 진정한 축복관을 회복해야 합니다. 이점에서 오늘 시편이 매우 소중합니다. 시편 84편은 고라 자손의 시입니다. 저자인 무명 시인은 고라 자손 중에 한 사람으로, 성전에서 음악을 담당했던 사람입니다. 그는 아마도 다윗이 압살롬을 피해 요단을 건너갔을 때 그를 따라간 사람 중에 하나였을 것입니다. 그는 지금 원치 않는 유배생활을 하는 고통 가운데 있습니다. 그는 성전을 떠난 후 깊은 고통 속에서 성전에 거하는 것이 얼마나 소중한 것인가를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그는 “악인의 집에서 천 날을 지내는 것보다 성전에서 한 날을 있는 것이 더 낫다”고 고백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는 깊은 고통 속에서 비로소 진정한 축복이 무엇인가 깨달았습니다. 그리고 그것을 오늘 시로 옮긴 것입니다. 시인이 말하는 축복을 우리의 것으로 삼는 놀라운 은혜를 체험하는 시간이 되기를 바랍니다. 그래서 우리의 신앙이 하나님 앞에서 올바로 회복되어 한국 교회가 교회교에서 벗어나 진정한 그리스도의 정체성을 회복하는데 아름답게 쓰임받기를 바랍니다.

   시인은 주님이 거하시는 곳이 얼마나 사랑스러운가를 노래합니다. 1절을 보십시오. “만군의 여호와여 주의 장막이 어찌 그리 아름다운지요” 이 말은 성전 건물이 아름답다는 것이 아닙니다. 또한 세상을 등진 채 성전 중심으로만 활동하며 사는 것이 좋다는 이야기도 아닙니다. 그러면 이 말씀의 뜻이 무엇일까요? 2절에서 우리는 그 답을 알 수 있습니다. “내 영혼이 여호와의 궁정을 사모하여 쇠약함이여 내 마음과 육체가 생존하시는 하나님께 부르짖나이다” 시인은 압살롬의 반역으로 인해 다윗과 함께 예루살렘을 떠나 요단 건너편에 피신해 있었습니다. 그는 오래 동안 성전에 들어가지 못했습니다. 그는 먼 곳에서 성전에서 들어가지 못하게 되자 마음과 영혼으로 시온에 있는 주의 장막을 깊이 사모하며 갈망하게 되었습니다. 그는 먼 곳에서 주의 성전을 생각하면서 주의 장막이 너무도 사랑스럽게 느껴졌습니다. 사실 이 장막은 겉으로 보면 수달 가죽으로 만든 허름한 장막에 불과했습니다. 그러나 반역 사건으로 인해 성전을 떠나 있어야 만하는 경건한 성도에게 있어서 이 성전은 특별한 애정과 관심의 대상이 되었습니다. 시인은 성전을 떠나 있는 동안 마음과 영혼으로 성전을 사모하고 또 그리워하였습니다. 그는 여호와의 궁정 즉 성전 뜰 안을 너무 그리워한 나머지 그만 지쳐 쓰러질 지경이 되었습니다. 시인은 상사병에 걸렸습니다. 또한 시인은 “온 마음과 육신”으로 살아계신 하나님께 기뻐 외친다고 고백하였습니다. 시인은 몸과 마음을 다해 성전에 살아계신 하나님을 찬양하기를 원했습니다. 시인은 성전을 너무 사모한 나머지 지쳐 쓰러진 것입니다. 마치 어린 아이가 엄마가 보고 싶어 몸부림치며 울다 울다 지쳐 스러져 자는 것과 같았습니다.

   시인은 왜 이토록 하나님을 사모하고 있는 것입니까? 3절을 보십시오. 그 이유가 분명해 집니다. “나의 왕, 나의 하나님, 만군의 여호와여 주의 제단에서 참새도 제 집을 얻고 제비도 새끼 둘 보금자리를 얻었나이다” 시인은 하나님을 가리켜 “만군의 왕”, “나의 왕”, 그리고 “나의 하나님”이라고 외치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천군 천사를 거느리신 분으로서 어떤 대적의 손에서도 자기 백성을 구해 줄 수 있는 강한 분이십니다. 하나님은 언약을 통해 시인과 이스라엘의 왕이 되셨으며, 그들의 하나님이 되어 주셨습니다. 참새와 제비는 가장 흔한 새들입니다. 평범하고 보잘것없는 존재들입니다. 그러나 이런 미물에게도 하나님은 집을 허락하시고 새끼를 낳고 기를 수 있는 보금자리를 내주시는 분입니다. 하나님은 세상의 억압적인 왕들과는 현격히 다릅니다. 세상 왕들은 자신과 자국의 이익을 위해서라면 권력과 군사력으로 약한 자들과 나라들을 사정없이 짓밟아 버립니다. 우리는 그러한 모습을 이번 이라크 전쟁에서 두 눈으로 똑똑히 보았습니다. 그럴듯한 명분 배후에는 미국의 이기적인 패권주의와 무자비한 군사주의가 도사리고 있습니다. 미국은 아직도 이라크 내 대량 살상무기를 찾아내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를 적당히 넘어가려고 하고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이 세상에서는 참새와 제비처럼 보잘것없는 이들이 설자리가 별로 없습니다. 심지어 교회 안에서조차 따뜻한 시선을 받지 못하는 경우가 허다합니다. 그러나 만군의 여호와요 왕이신 하나님은 다릅니다. 성전 본래의 목적 수행에 실질적 도움이 전혀 되지 못하는 참새와 제비에게도 따뜻한 사랑을 베풀어 주시고 그들의 필요를 채워주시는 분이십니다. 이는 성경 전체에 흐르는 진리입니다. 예수님은 참새 한 마리가 땅에 떨어지는 것도 하나님의 허락 없이는 불가능하다고 말씀하십니다(마10:29-30; 눅12:6-7). 또한 하나님이 공중의 새를 먹이시고 들에 핀 백합화를 화려하게 옷 입히시는 분이심을 잊지 말라고 당부하십니다(마6:26-29). 본문의 시인 역시 이러한 하나님을 그리워하며 노래합니다.

   시인은 이제 어떤 자가 구체적으로 복이 있는 가를 노래합니다. 4절을 보십시오. “주의 집에 거하는 자가 복이 있나이다. 저희가 항상 주를 찬송하리이다.” 만군의 여호와요, 나의 왕이시요, 나의 하나님이신 하나님의 얼굴을 뵈오며 그의 손길을 느끼며 살아간다는 것은 얼마나 복된 일입니까? 또한 이 하나님을 성전에 거하며 항상 찬송할 수 있는 것이 얼마나 복된 일입니까? 그들은 압살롬의 반역 전에는 항상 성전에서 하나님을 찬양했습니다. 그 때는 그것이 얼마나 큰 축복인지 깨닫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먼 곳에서 쫓겨나서 주의 장막에 들어갈 수 없게 되었을 때 비로소 그 일이 얼마나 큰 축복인지 깨닫게 되었던 것입니다. 우리는 지금 시인이 느꼈던 기쁨과 하나님을 볼 수도 만질 수도 없습니다. 그러나 믿음을 통해 그 하나님을 만나고 경험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이 행복은 우리가 처한 삶의 각박한 현실을 초월하는 것입니다. 마치 베드로가 칭찬하였던 소아시아에 흩어진 거룩한 나그네들이 경험했던 것처럼 말입니다. 그들은 극심한 시련 가운데서 예수님을 볼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믿음으로 예수님을 경험하고 말할 수 없는 영광스러운 기쁨을 누렸습니다. 벧전1:6-9에 보면 “그러므로 너희가 이제 여러 가지 시험을 인하여 잠간 근심하게 되지 않을 수 없었으나 오히려 크게 기뻐하도다. 너희 믿음의 시련이 불로 연단하여도 없어질 금보다 더 귀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나타나실 때에 칭찬과 영광과 존귀를 얻게 하려 함이라. 예수를 너희가 보지 못하였으나 사랑하는 도다. 이제 보지 못하나 믿고 말할 수 없는 영광스러운 즐거움으로 기뻐하니 믿음의 결국 곧 영혼의 구원을 받음이라.”고 했습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의 사람들은 이러한 행복을 통해 현실을 이기고 변혁시켜 나갈 힘을 얻게 됩니다. 우리 모두 매일 아침 “하나님! 오늘 당신의 얼굴을 뵙지 못하면 제가 살 수 없습니다. 당신이 너무 그립습니다. 제게 임하여 주옵소서!”라고 눈물로 부르짖을 수 있기를 바랍니다.

   또한 시인은 주님으로부터 힘을 얻어 시온을 향해 순례 길을 나선 사람이 복이 있다고 노래합니다. 5절을 보십시오. “주께 힘을 얻고 그 마음에 시온의 대로가 있는 자는 복이 있나이다” 이 순례 길은 꼭 눈에 보이는 길만이 아닙니다. 마음에 놓여져 있는 길도 의미합니다. 시인은 이제 마음으로 성전을 향해 올라가는 순례자들을 생각하고 있습니다. 자신이 성전에 올라 갈 수 없게 된 지금, 그는 마음으로 성전을 향해 순례하는 사람들이 부러웠던 것입니다. 시인은 “주 안에서 힘을 얻고 그 마음에 대로가 있는 자는 복이 있다”고 고백합니다. 시인은 아무리 주님께 나아가기를 원해도 하나님께서 힘주시지 않으면 주님께 나아갈 수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이는 성전을 찾아오는 것이 인간의 뜻으로 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주시는 은혜와 힘으로 가능하기 때문입니다. 순례의 길을 걸어가는 사람은 눈물 없이는 통과 할 수 없는 힘겨운 골짜기를 지날 때가 많습니다. 그런데도 이들이 복된 이유가 무엇입니까? 6,7절을 보십시오. “저희는 눈물 골짜기를 통과 할 때에 그곳으로 많은 샘의 곳이 되게 하며 이른 비도 은택을 입히나이다. 저희는 힘을 얻고 더 얻어 나아가 시온에서 하나님 앞에 각기 나타나리이다” 성전을 찾아 시온으로 가는 사람들은 여러 가지 어려운 길을 통과해야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 길을 지켜주셔서 그 어려움을 축복의 기회로 바꾸어 주십니다. 시온으로 가는 길은 때로 물도 없고, 위험이 계속되는 사막과 같은 길을 통과해야만 합니다. 특히 여리고에서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는 길은 매우 가파르고 모래 바람이 세차게 불어서 “눈물의 골짜기”라고 부를 정도였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순례자들이 이러한 눈물의 골짜기를 지날 때에, 그곳을 샘이 솟아나는 오아시스가 되게 만들어 주십니다. 하나님은 하나님의 전을 향해 가는 자들에게 역경과 재난을 덮어 축복으로 바꾸어 주십니다.  

   실컷 두들겨 맞고 빌립보 감옥에 처박혀 있는 바울과 실라의 초라한 모습을 마음에 그려 보십시오. 그들은 한밤중에 일어나 하나님께 기도하고 찬양하였습니다. 그러나 어두운 감옥은 로마 간수와 그 가족을 구원하는 은혜의 샘터로 변화되었습니다(행16:19-34). 요셉은 어떻습니까? 그는 형들의 시기로 애굽에 팔려가는 기구한 운명의 길을 걸어가야 했습니다. 그러나 마음의 중심에 하나님을 잃지 않았습니다. 그는 결국 애굽을 심한 흉년으로부터 건져냅니다. 자기 가족을 기근에서 건져냄으로 하나님의 구속사가 이어지게 합니다. 애굽은 요셉의 눈물 골짜기였지만 요셉은 애굽의 많은 사람들에게 축복의 샘터로 만들었습니다. 그 마음의 깊은 곳에는 언제나 하나님을 향해 가는 아름다운 순례자의 길이 있었기 때문입니다(창50:24-25). 이것이 또한 예수님의 삶의 원리입니다. 예수님은 겟세마네 언덕에서 너무나 고통스러워했습니다. 오죽했으면 제자들에게 “내 마음이 심히 고민하여 죽게 되었다”고 고백했겠습니까(막14:34). 거기서 예수님은 피가 땀에 섞여 나올 정도로 고통스럽게 기도하셨습니다. 눈물을 흘리시며 심하게 통곡하셨습니다(히5;7). 마침내 십자가에서 육체적인 고통은 말할 것도 없고 사랑하는 제자들과 심지어는 하나님 아버지로부터 철저히 버림받는 절대고독을 겪습니다. 그럼에도 예수님은 운명의 순간에 큰 소리로 자신을 아버지의 손에 의탁하셨습니다(눅23:46). 하나님을 향한 마지막 순례의 길을 떠나신 것입니다. 그 순간 십자가의 슬픈 현장은 축복의 샘터로 놀랍게 변화되었습니다. 성전의 휘장이 찢어져 모든 죄인이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는 길이 활짝 열렸습니다. 십자가 옆에 있던 백부장이 눈이 열려 그 비참한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로 고백합니다(마15:38-39). 지금도 예수님이 통과한 눈물의 골짜기에서 메마른 광야에서 생수가 흘러나오고 있습니다. 얼마나 아름다운 복된 모습입니까? 또한 하나님께서 친히 눈물의 골짜기에 단비를 내리셔서 복을 부어 주십니다. 이러한 축복을 경험하며 순례자는 힘을 얻고 더 얻어 마침내 시온에 도착하여 하나님을 뵙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러한 완전한 감격을 부활의 주님이 다시 오실 때 반드시 맛보게 될 것입니다. 한편 이 땅에 머물며 순례의 길을 걸어가는 와중에도 그 기쁨의 예고편을 맛볼 수 있습니다. 인내심을 가지고 순례의 길을 걸어가는 이들에게 주님이 임하시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이러한 순례자의 복을 사모해야겠습니다.

   8,9절을 보면 시인은 하나님께 간절히 기도하고 있습니다. “만군의 여호와 하나님이여 내 기도를 들으소서 야곱의 하나님이여 귀를 기울이소서(셀라) 우리 방패이신 하나님이여 주의 기름부으신 자의 얼굴을 살펴보옵소서” 그의 간절한 소원이 무엇입니까? 10절을 보십시오. “주의 궁정에서 한 날이 다른 곳에서 천 날보다 나은즉 악인의 장막에 거함보다 내 하나님 문지기로 있는 것이 좋사오니” 시인은 다른 곳에서 천 날을 사느니 하루만이라도 주의 궁정에서 살 수만 있다면 그것이 더 좋다고 고백합니다. 악인의 호화로운 장막에서 호의호식하는 것보다 하나님 집 문 곁에 서있기만 해도 그것이 더 좋다고 말합니다. 참으로 놀라운 고백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그는 하나님이 어떤 분인지를 경험했기 때문입니다. 11절을 보십시오. “여호와 하나님은 해요 방패시라 여호와께서 은혜와 영화를 주시며 정직히 행하는 자에게 좋은 것을 아끼지 아니하실 것이라” 하나님은 우리에게 어둠을 뚫고 모든 사물을 밝히 이해 할 수 있는 빛을 주십니다. 따뜻한 사랑을 우리에게 부어주셔서 삶의 에너지를 공급해 주십니다. 우리를 원수들의 공격으로부터 보호해 주시는 방패의 역할을 해주십니다. 우리는 늘 부족하고 넘어지지만 한결같이 참아주시고 용서하십니다. 은혜 위에 은혜를 부어 주십니다. 낮고 천한 우리에게 하나님의 영광을 부어 주십니다. 그래서 우리의 삶이 찬란하게 빛나게 됩니다. 하나님 앞에서 온 마음을 다하여 정직하게 살려고 하는 자에게 좋은 것을 아끼지 않고 다 주십니다. 그러니 이러한 하나님을 의지하며 사는 삶이란 너무나 복된 삶입니다. 이것이 바로 오늘 시인의 마지막 고백입니다. 우리 모두 이런 고백을 우리의 고백으로 삼을 수 있기를 바랍니다.

   결론적으로 우리 모두 시인처럼 하나님의 집 문 곁에 서서 살아도 행복하다고 고백할 수 있었으면 합니다. 하나님의 사람들이 이러한 경지에 도달하지 못하고 악인의 화려한 장막에 대한 미련에 얽매여 있다면 우리에게는 소망이 없습니다. 오래 교회는 소망이 없습니다. 한국 교회는 더 이상 소망이 없습니다. 우리는 하나님 한 분만 내 곁에 있다면 세상 모든 것을 다 잃어도 행복하다는 시인의 고백을 기필코 회복해야 합니다. 주 안에 거하는 것, 순례자의 길을 걸어가는 것, 그리고 주님을 의지하는 것이야말로 우리에게 가장 위대한 복입니다. 이 복을 믿는다면 하나님 집 문지기로도 행복하게 살 수 있습니다. 우리에게 시인의 이 진정한 축복관을 허락해 주시기를 원합니다. 시인의 축복관이 바의 축복관이 되길 바랍니다. 그리하여 우리가 주 안에 거하며, 순례자의 길을 가며, 주님을 의지하는 삶을 살므로 가장 복된 삶을 사는 자들이 되길 바랍니다. 더 나아가 우리 교회와 한국 교회를 살려내는데 아름답게 쓰임 받을 수 있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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