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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 손재호
성경본문 벧전 4:7-11
성경본문내용 (7)만물의 마지막이 가까왔으니 그러므로 너희는 정신을 차리고 근신하여 기도하라(8)무엇보다도 열심으로 서로 사랑할지니 사랑은 허다한 죄를 덮느니라(9)서로 대접하기를 원망 없이하고(10)각각 은사를 받은 대로 하나님의 각양 은혜를 맡은 선한 청지기같이 서로 봉사하라(11)만일 누가 말하려면 하나님의 말씀을 하는 것같이 하고 누가 봉사하려면 하나님의 공급하시는 힘으로 하는 것같이 하라 이는 범사에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이 영광을 받으시게 하려 함이니 그에게 영광과 권능이 세세에 무궁토록 있느니라 아멘
강설날짜 2012-02-19
동영상 http://flvs.daum.net/flvPlayer.swf?vid=bZo_QFM_7D8$

2012년 베드로전서 공부

 

물의 마지막이 가까왔으니


말씀:베드로전서 4:7-11

 

지난주에 우리는 “그리스도의 고난으로 갑옷을 삼으라”는 말씀을 공부했습니다(1-6). 성도가 그리스도의 고난으로 갑옷을 삼아야 하는 이유는 “육체의 남은 때를 정욕을 위하여 살지 않고 하나님의 뜻을 따라 살게 하기 위함이라”고 했습니다. 육체의 남은 때가 있다는 것은 마지막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한 개인의 육체의 남은 때만 있는 것이 아니라 오늘 말씀을 보면 만물의 마지막이 가깝다고 합니다(7). 모든 만물의 마지막이 있고 그 마지막 때가 가깝다는 것을 아는 것은 성도들에게만 주어진 지혜입니다. 세상 사람들은 평소에 살아가면서 마지막을 의식하며 살지 않습니다. 어떻게 하든지 현재를 더 행복한 삶으로 만들고 싶어 하고, 어느 정도 성취가 되면 그 행복한 삶이 영원히 지속되기를 바라며 사는 것입니다. 그러나 성도란 이 세상이 이미 끝장난 세상임을 알고 사는 것입니다. 그 마지막이 얼마나 남았는가 하는 역사적인 시간은 의미가 없습니다. 이미 예수 그리스도의 초림과 성령의 임하심이 종말인 것입니다. 구약에서 증거한 종말의 때가 이미 도래한 것입니다. 말세에 성령을 부어주시겠다는 약속이 성취가 되었고, 그 성령이 임한 자는 종말을 아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도란 늘 종말론적인 자세로 사는 자들인 것입니다.

 

구약에서 가장 종말론적으로 살았던 사람을 예로 들자면 에녹입니다. 유다서 1:14-15절을 보면 “아담의 칠세 손 에녹이 사람들에게 대하여도 예언하여 이르되 보라! 주께서 그 수만의 거룩한 자와 함께 임하셨나니. 이는 뭇사람을 심판하사 모든 경건치 않은 자의 경건치 않게 행한 모든 경건치 않은 일과 또 경건치 않은 죄인의 주께 거스려 한 모든 강퍅한 말을 인하여 저희를 정죄하려 하심이라 하였느니라”고 했습니다. 에녹은 예언자입니다. 그는 세상의 심판에 대하여 예언한 것입니다. 유다서에 보면 주께서 수만의 거룩한 자와 함께 임하신다고 합니다. 주께서 임하셔서 뭇사람을 심판하신다고 합니다. 모든 경건치 않은 자의 경건치 않게 행한 모든 경건치 않는 일을 심판하십니다. 경건치 않은 죄인의 주께 거스려 한 모든 강퍅한 말을 인하여 저희를 정죄하신다고 합니다.

 

창세기 5장에 보면 에녹이 므두셀라를 65세에 낳았습니다. 그때부터 300년을 하나님과 동행하였다고 합니다. 에녹은 므두셀라를 낳을 때에 하나님의 계시를 받았습니다. 그 계시란 므두셀라가 죽으면 이 세상에 심판이 임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므두셀라가 죽던 해가 노아 600세 되던 해가 됩니다. 그러므로 에녹은 심판의 날을 늘 의식하며 산 것이 바로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이었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시대도 성령이 임한 성도라면 늘 마지막을 생각하면서 살아야 합니다. 마지막이 가깝다는 것을 아는 사람은 지금 염려와 근심과 걱정들이 부질없는 것임을 알게 됩니다. 지금 이루고 싶어 하고 꼭 해결하고 싶은 문제들이 있다고 하더라도 그것이 오늘 밤에 내가 죽는다면 무슨 소용이 있는 것입니까? 아니 오늘 밤에 이 세상의 종말이 온다면 그것이 무슨 의미가 있는 것들입니까? 그러므로 만물이 마지막이 가까이 왔다는 것을 아는 사람이 지혜로운 자이며, 그런 자들만이 이 종말을 믿음으로 살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베드로 사도가 만물의 마지막이 가깝다고 한 것은 벌써 2000년이 다 되어 가는데 무엇이 그렇게 가까운 것입니까 할지 모르지만 그러나 하루가 천년 같고 천년이 하루 같은 이 사실을 있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베드로후서 3:8-10절에 보면 “사랑하는 자들아! 주께는 하루가 천년 같고 천년이 하루 같은 이 한 가지를 잊지 말라. 주의 약속은 어떤 이의 더디다고 생각하는 것 같이 더딘 것이 아니라 오직 너희를 대하여 오래 참으사 아무도 멸망치 않고 다 회개하기에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 그러나 주의 날이 도적 같이 오리니 그 날에는 하늘이 큰 소리로 떠나 가고 체질이 뜨거운 불에 풀어지고 땅과 그 중에 있는 모든 일이 드러나리로다”고 했습니다. 이 세상의 시간 개념과 하나님의 시간 개념이 다릅니다. 하나님께서는 하루가 천년 같고 천년이 하루 같은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은 도적 같이 옵니다. 그 날에는 하늘이 큰 소리로 떠나가고 체질이 뜨거운 불에 풀어지고 땅과 그 중에 있는 모든 것이 드러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 마지막 날이 도적 같이 임한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하는 것입니다. 이 땅에서 우리가 경험하는 시간은 진리가 아닙니다. 자기 신체의 변화에 불과한 것입니다. 자기 신체가 편하면 시간은 짧게 여겨지고 자기 신체가 괴로우면 시간은 길게 여겨지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경에서 마지막이 이런 것이라고 하면 그 말씀에 아멘 할 뿐입니다.

 

디모데후서 3:1-5절을 보면 “네가 이것을 알라. 말세에 고통 하는 때가 이르리니. 사람들은 자기를 사랑하며 돈을 사랑하며 자긍하며 교만하며 훼방하며 부모를 거역하며 감사치 아니하며 거룩하지 아니하며 무정하며 원통함을 풀지 아니하며 참소하며 절제하지 못하며 사나우며 선한 것을 좋아 아니하며 배반하여 팔며 조급하며 자고하며 쾌락을 사랑하기를 하나님 사랑하는 것보다 더하며 경건의 모양은 있으나 경건의 능력은 부인하는 자니 이 같은 자들에게서 네가 돌아서라”고 했습니다. 이 말씀에서 바울은 말세는 고통 하는 때라고 합니다. 그런데 아담의 범죄 후에 이러한 고통의 때가 아닌 적이 있었습니까? 없었습니다. 그러므로 늘 말세의 고통 하는 때였습니다. 그래서 심판과 저주가 가득하여 사람의 일평생이 수고와 슬픔 가운데 지나가는 것입니다. 아담의 범죄 후의 모든 인간의 삶이 말세요, 고통 하는 때요, 심판의 때인 것입니다. 그래서 노아 홍수의 심판도 일어나고 소돔과 고모라성의 멸망도 일어난 것입니다. 그러나 아무도 그 사실을 알지 못하였습니다. 그래서 계속하여 인간들은 고통에서 벗어나 보려고 몸부림 쳐온 것이 인간의 역사입니다. 그러나 인간 스스로의 능력으로는 이 고통을 해결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이것이 아담 이후의 종말의 상황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구원이란 인간의 힘으로 일어날 수가 없고 오직 하나님의 언약하신 대로 그 아들의 영광을 위하여 일하여 오신 것입니다. 그래서 그 아들이 임하시고 성령을 보내심으로 종말을 알게 된 자들이 바로 성도인 것입니다.

 

그러면 이런 성도는 어떻게 이 마지막 때를 살아야 합니까? 7절을 보면 “만물의 마지막이 가까웠으니 그러므로 너희는 정신을 차리고 근신하여 기도하라”고 했습니다. 성령이 임하여 만물의 마지막이 가까운 줄을 아는 성도들은 정신을 차리고 근신하여 기도해야 합니다. ‘정신을 차리고 근신하라’는 것은 ‘세상에 취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세상에 취하여 사는 사람은 세상의 종말을 생각하지 않습니다. 이 세상은 영원하리라고 보고 이곳에서 영원히 안정적이고 평안하게 살고 싶어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깨어 기도를 하는 것은 세상이나 세상에 속한 것들을 사랑하여 그것을 달라고 기도하는 것이 아닙니다. 만물의 마지막을 알기에 불타 없어질 것들을 구하지 아니하는 것입니다. 곧 위엣 것을 사모하며 사는 것입니다. 만물의 마지막이 가까운 줄 아는 우리 성도들은 정신을 차리고 기도해야 합니다. 이 땅에 소망을 두지 않고 영원한 하나님 나라를 소망하며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8절을 보면 “무엇보다도 열심히 서로 사랑할찌니 사랑은 허다한 죄를 덮느니라”고 했습니다. 베드로 사도는 무엇보다 우리 성도가 말세에 열심히 서로 사랑하라고 합니다. 종말의 특징이 디모데후서 3장에서 보았던 대로 자기만을 사랑하는 것이 특징입니다. 물론 이 자기 사랑이란 아담의 범죄 이후에 모든 인간의 보편적인 죄악된 모습입니다. 그러나 종말이 가까울수록 자기를 사랑하는 것이 더 심화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종말의 영인 성령이 임한 우리 성도들은 서로 사랑해야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그 보배피로 한 형제가 된 자들을 사랑해야 하는 것입니다(요일 3:16). 그 사랑은 허다한 죄를 덮는 것입니다. 여기서 ‘죄를 덮는다’는 것은 자신의 죄가 덮어진 것을 아는 사람에게서만 나올 수 있는 모습입니다. 자신의 허다한 죄가 덮어지고 가려진 적이 없거나 있는데도 그것을 무시하는 사람은 결코 남의 죄를 덮어줄 줄을 모르는 것입니다.

 

창세기 9장에 보면 노아가 술에 취하여 벌거벗고 장막에 누워 있을 때에 함은 그 아비의 수치를 드러내었습니다. 그러나 셈과 야벳은 그 수치를 덮어 주었습니다. 노아가 술에서 깨어났을 때에 그 사실을 알고 함을 저주하였습니다. 그 저주는 형제들의 종의 종이 될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자신이 술 취해서 벌거벗었는데 왜 아들을 저주한 것입니까? 함이 노아 홍수에서 살아난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덮어주셨기에 살아남은 것입니다. 노아 방주의 덮어줌, 정결한 짐승의 희생으로 자신의 부정함이 가려졌는데 그 아비의 허물을 덮어주지 못하여 저주를 받은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마지막 때의 복은 허물의 사함을 얻고 그 죄의 가림을 받은 자가 복이 있는 것입니다. 그 복을 받은 사람은 다른 사람의 허물을 덮어줍니다. 이것이 열심히 서로 사랑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자기 죄를 모르는 사람에게 너의 죄를 덮어줄게 하는 것은 말이 안 됩니다. 성령이 임하여 자신의 죄와 비참함을 알고 그 죄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가리움을 받은 사람에게 해당되는 내용입니다. 이것이 종말을 아는 사람이 열심히 서로 사랑할 내용인 것입니다.

 

그런데 지금 베드로 사도가 열심히 서로 사랑하라고 하면서 그 사랑은 허다한 죄를 덮는다고 말씀하는 이유가 있습니다. 베드로는 자신이 예수님을 믿는다고, 죽도록 충성하겠다고 따라나섰지만 세 번이나 저주하고 맹세하면서 부인한 경력이 있는 사람입니다. 그런데 그런 자신을 예수님께서 다 덮어주신 것입니다. 베드로는 자신이 바로 이 덮어 줌의 사랑을 입었기 때문에 지금 허물을 덮어주는 이야기를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형제의 허물을 덮어줄 수 있는 사람은 자신이 얼마나 죄인인지를 알고 주님의 그 덮어주심의 은혜를 아는 자만이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주님의 덮어 주심의 은혜를 알면 알수록 그 덮어줌의 사랑이 나타나는 것입니다.

 

9절을 보면 베드로 사도는 서로 대접하기를 원망 없이 하라고 합니다. “서로 대접하기를 원망 없이하고”(9). 이 말씀은 우리가 형제를 대접할 때 원망이 일어날 수 있음을 전제로 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형제를 대접할 때 늘 감사함으로 합니까? 처음에는 감사함과 기쁨으로 합니다. 그러나 계속해서 형제를 대접하는 삶을 살고자 할 때에 원망이 생기게 됩니다. 왜 그렇습니까? 자기만 희생하고 고생한다는 생각이 들기 때문입니다. 누가복음 10장에 보면 예수님께서 길 가실 때 한 촌에 들어갔는데 마르다라 이름하는 한 여자가 예수님 일행을 자기 집으로 초청하여 대접했습니다. 그녀에게는 마리아라는 여동생이 있었습니다. 마르다는 예수님과 제자들을 대접하느라 정신이 없는데 마리아는 언니를 도와주지 않고 예수님 발 앞에 앉아서 말씀만 듣고 있는 것입니다. 이 때 마르다의 마음에 마리아를 향한 원망이 나온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에게 나가서 말하기를 “주여 내 동생이 나 혼자 일하게 두는 것을 생각지 아니하시나이까. 저를 명하사 나를 도와주라 하소서”라고 했습니다. 이처럼 우리가 열심히 형제를 대접할 때 원망이 나오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러나 베드로 사도는 성도들이 서로 형제를 대접할 때에 원망 없이 하라고 합니다.

 

그러면 우리가 어떻게 원망 없이 할 수 있습니까? 10절을 보면 각각 받은 은사대로 하라는 것입니다. “각각 은사를 받은 대로 하나님의 각양 은혜를 맡은 선한 청지기 같이 서로 봉사하라”(10). 우리가 원망 없이 봉사하는 비결은 각각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은사를 따라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은사가 없이 할 때 원망이 나오게 됩니다. 우리가 ‘은사를 받은 대로 한다’는 것은 사람들에게 보이기 위해 곧 자기 인정과 자기 과시를 위해 하는 것이 아님을 말해 줍니다. 우리가 사람들 앞에 보이기 위한 것이나 자기를 과시하기 위한 것이라면 누가 알아주지 않을 때에 원망이 나오게 됩니다. 그러나 받은 은사대로 한다면 원망이 나올 수가 없는 것입니다. 교회에서의 봉사란 모두가 은사대로 하여야 합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맡은 선한 청지기 같이 서로 봉사하라는 것입니다. 성도란 은사가 없는 사람이 없습니다. 모두가 은사를 받았기에 청지기입니다. 주인이 따로 있고 자신은 집사인 것입니다. 선한 청지기처럼 서로 봉사하는 것이 마지막 때를 사는 우리 성도들의 모습입니다.

 

11절을 보면 “만일 누가 말하려면 하나님의 말씀을 하는 것 같이 하고 누가 봉사하려면 하나님의 공급하시는 힘으로 하는 것 같이 하라. 이는 범사에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이 영광을 받으시게 하려 함이니. 그에게 영광과 권능이 세세에 무궁토록 있느니라. 아멘!”이라고 합니다. 이 말씀을 새 번역으로 보면 “말을 하는 사람은 하나님의 말씀을 전파하는 사람답게 하고, 봉사하는 사람은 하나님께서 주시는 힘으로 봉사하는 사람답게 하십시오. 그리하면 하나님께서 모든 일에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영광을 받으실 것입니다. 영광과 권세가 영원무궁 하도록 그에게 있습니다. 아멘!”이라고 했습니다. 이 말씀은 우리 성도들이 말씀을 전파하는 원리와 봉사하는 원리가 어떠해야 하는 가를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이 말씀에 보면 말씀을 전파하는 사람과 봉사하는 사람을 따로 말하고 있지만 사실 그 원리는 같은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전파하는 사람은 자신의 말을 전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자신의 사상이나 뜻을 이루기 위하여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면 안 됩니다. 말씀을 전하는 것도 은사이기에 하나님의 말씀을 전파하는 사람답게 하여야 하는 것입니다. 자신의 야망을 이루기 위하여 전하는 것도 안 되지만 사람들의 비위를 맞추려고 하여서도 안 되는 것입니다. 마치 아모스 선지자가 전하는 것처럼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니 어찌 말하지 아니할 수가 있겠느냐는 자세여야 하는 것입니다. 아모스 7장에 보면 벧엘의 제사장 아마샤가 하나님의 말씀을 예언하는 아모스에게 벧엘에서 예언하지 말고 유다 땅으로 도망하여 거기서나 예언하고 빌어먹으라고 했습니다. 그 때 아모스가 아마샤에게 하는 말이 아모스 7:14-17절에 보면 “아모스가 아마샤에게 대답하여 가로되 나는 선지자가 아니며 선지자의 아들도 아니요 나는 목자요 뽕나무를 배양하는 자로서 양떼를 따를 때에 여호와께서 나를 데려다가 내게 이르시기를 가서 내 백성 이스라엘에게 예언하라 하셨나니. 이제 너는 여호와의 말씀을 들을찌니라. 네가 이르기를 이스라엘에 대하여 예언하지 말며 이삭의 집을 향하여 경계하지 말라 하므로 여호와께서 말씀하시기를 네 아내는 성읍 중에서 창기가 될 것이요, 네 자녀들은 칼에 엎드러지며 네 땅은 줄띄워 나누일 것이며 너는 더러운 땅에서 죽을 것이요, 이스라엘은 정녕 사로잡혀 그 본토에서 떠나리라 하셨느니라”고 했습니다. 이 말씀에 보면 아모스는 자신은 선지자도 아니고 선지자의 아들도 아니라고 합니다. 자신은 짐승을 키우는 목자고, 뽕나무를 키우는 농부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자신을 데려다가 하나님의 백성인 이스라엘에게 예언하라고 하니까 한다는 것입니다. 아모스는 하나님으로부터 말씀을 전하라는 은사를 받은 대로 말씀을 전하는 것입니다. 이와 같이 말씀을 전하는 자는 은사를 받은 대로 하나님의 말씀을 전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베드로 사도는 각양 봉사하는 것도 하나님이 공급하시는 힘으로 봉사하는 사람답게 봉사하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힘으로 봉사하는 것은 반드시 자기가 부인되어지고 오직 하나님의 은혜가 드러나게 됩니다. 하나님께서 공급하시지 않는 자기 과시나 자기 힘으로 하게 되면 누가 알아주지 않으면 섭섭해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교회에서 여러 가지 봉사를 하는 것이 참으로 하나님께서 은사로 주셔서 하게 되는 일이기에 귀한 것입니다. 누가 알아주든지 알아주지 아니하든지 간에 주님이 주시는 은혜대로 봉사하는 것이 만물의 마지막이 가까움을 아는 사람들의 마땅한 자세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말씀을 전하든지, 청소를 하든지, 어떤 봉사를 하든지 간에 자기가 부인되어지고 주님의 은혜가 드러나는 봉사는 우리의 자랑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영광이 되는 것입니다.

 

고린도전서 15:9-11절을 보면 “나는 사도 중에 지극히 작은 자라. 내가 하나님의 교회를 핍박하였으므로 사도라 칭함을 받기에 감당치 못할 자로라. 그러나 나의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이니 내게 주신 그의 은혜가 헛되지 아니하여 내가 모든 사도보다 더 많이 수고하였으나 내가 아니요, 오직 나와 함께하신 하나님의 은혜로라. 그러므로 내나 저희나 이같이 전파하매 너희도 이같이 믿었느니라”고 했습니다. 이 말씀에 보면 바울은 오직 하나님의 은혜에 기초해서 그 은사를 따라 봉사했기에 모든 사도들보다 더 많이 수고했지만 그 수고한 것이 자신이 아니요, 오직 자신과 함께 하신 하나님의 은혜라고 고백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 성도가 가져야할 봉사하는 자세인 것입니다.

 

만물의 마지막이 가까웠습니다. 우리가 처음 믿을 때보다 주님의 오심이 더 가까워졌습니다. 우리가 이 사실을 믿을 진데 정신을 차리고 근신하며 기도해야 합니다. 또한 열심히 서로 사랑해야 합니다. 서로 사랑하는 것은 허다한 죄를 덮어주는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우리는 대접하기를 원망 없이 하고 각양 받은 은사대로 선한 청지기로 봉사해야 합니다. 이것은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것입니다. 성령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은혜를 주셔서 우리로 주님의 다시 오심이 가까움을 알게 하여 주시기를 원합니다. 그리하여 우리로 정신을 차리고 기도하게 하여 주시기를 원합니다. 무엇보다 열심을 품고 서로 사랑하게 하여 주시기를 원합니다. 그리하여 서로의 허물을 덮으며 주님의 주되심을 나타내 가게 하여 주시기를 원합니다. 또한 주님께서 주신 은사를 따라 원망 없이 봉사하게 하여 주시기를 원합니다. 우리 주님의 이와 같은 은혜가 우리 가운데 충만케 하셔서 오직 우리 주님의 은혜만이 드러나게 하여 주시기를 원합니다. 그리하여 오직 주님께 영광과 권능이 세세에 무궁히 있게 하여 주시기를 원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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