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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 손재호
성경본문 빌 3:17-21
강설날짜 2017-09-24

2017년 빌립보서 공부

너희는 함께 나를 본받으라

말씀:빌립보서 3:17-21

 

오늘 말씀은 바울이 빌립보교회 성도들에게 우리의 시민권이 하늘에 있음을 깨우치며, 하늘에 시민권을 가진 자로서 주 예수 그리스도를 기다리는 삶을 살 것을 권면하는 말씀입니다. 그 이유는 빌립보교회 성도들 중에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원수로 행하는 자들이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바울은 이들의 마침은 멸망이요, 이들의 신은 배라고 합니다. 이들은 땅의 일을 생각하는 자들이라고 합니다. 오늘 바울 사도의 빌립보교회 성도들을 향한 이 권면의 말씀을 통해서 우리 자신들의 모습을 돌아볼 수 있기 바랍니다. 그리하여 우리가 하늘에 시민권을 가진 자로서 그리스도의 재림을 기다리는 삶을 사는 자들이 될 수 있기를 원합니다.

 

오늘 본문 17절 말씀을 보면 “형제들아! 너희는 함께 나를 본받으라. 또 우리로 본을 삼은 것 같이 그대로 행하는 자들을 보이라”고 합니다. 여기서 ‘본받는 자’ 앞에 붙은 ‘함께’(sum)라는 말은 두 가지 해석이 가능합니다. 첫째는, 너희는 다른 사람들과 함께 나를 본받는 자가 되라는 의미입니다. 그렇다면 이것은 다른 성도들과의 연합을 강조한 것이 됩니다. 또 다른 하나의 가능성은 여기서 ‘함께’는 별 다른 의미가 없으며 그냥 강조하는 역할을 하는 것으로 보는 것입니다. 굳이 말하자면 바울과의 유대를 강조한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어쨌든 여기서 ‘함께’를 어떻게 해석하느냐 하는 문제는 그리 중요한 문제가 아닙니다. 어느 쪽을 택하든지 간에 그 의미는 큰 차이가 없기 때문입니다. 중요한 것은 그들이 바울을 본받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형제들아! 너희는 함께 나를 본받으라”(17). 바울은 빌립보교회 성도들에게 자신의 신앙과 행함과 자신의 삶 전체를 본받으라는 것입니다. 참으로 이것은 바울이 그리스도의 종으로써 하나님 앞에서 어떻게 살았는가 하는 것을 잘 볼 수 있습니다. 바울이 하나님 앞에서 신앙에 있어서나 행함에 있어서나 하나님 앞에서 온전한 삶을 살지 않고서는 이렇게 권면 할 수 없는 것입니다. 우리 중에 누가 이렇게 바울처럼 나를 본받으라고 할 수 있겠습니까? 바울은 하나님 앞에서 부끄러움이 없는 삶을 살았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빌립보교회 성도들에게 자신을 본받을 것을 권면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여기서 신앙생활에 있어서 모범이 얼마나 중요한가 하는 것을 배우게 됩니다. 가르치는 자가 아무리 하나님에 대한 지식이 뛰어나고 말을 잘한다고 할지라도 행함이 없으면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따라서 가르치는 자는 무엇을 가르치기 전에 먼저 자신의 행함이 바로 되어야 합니다. 바울은 신앙에 있어서나 행함에 있어서 먼저 본을 보였습니다. 지금도 그는 복음을 위하여 사슬에 매여 로마의 어느 셋집에 감금되어 있습니다. 그는 그런 상황 가운데서도 오직 복음의 진보를 인하여 기뻐하며, 함께 형제된 자들을 위해서 헌신하였습니다. 그는 하나님 앞에서 부끄러움이 없이 행하였습니다. 바울은 이처럼 신앙생활에 모범이 되었기 때문에 빌립보교회 성도들에게 자신을 본받으라고 권면하는 것입니다. 제가 바울의 삶을 본받기를 원합니다. 그리하여 바울과 같이 남을 가르치지 전에 먼저 신앙과 행함에 있어서 본을 보이는 자가 되기를 원합니다.

 

17절을 다시 보면 바울 사도는 “형제들아! 너희는 함께 나를 본받으라”고 권면한 후에 “또 우리로 본을 삼은 것 같이 그대로 행하는 자들을 보이라”고 합니다. 여기서 ‘보이라’는 말은 원어로 보면 ‘스코페오(skopevw)’라는 단어인데 이는 ‘주의 깊게 보다’, ‘주목하다’라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따라서 이 문장은 “너희가 우리로 본을 삼은 것같이 그대로 행하는 자들을 주목하라”는 뜻입니다. 곧 바울을 본받아서 신앙생활에 있어서 모범적인 삶을 사는 사람들을 주목하고, 그래서 함께 바울을 본받고 하나님을 섬기는 자가 되라는 의미입니다. 우리가 그리스도를 본받는다고 말하지만 그리스도는 지금 우리 눈으로 볼 수 없습니다. 그래서 그리스도의 말씀을 잘 지켜 행하는 자가 우리 곁에 있으면 우리가 그 모습을 보고 배워서 그리스도를 따르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 면에서 우리가 행함으로 본을 보이는 모범이 얼마나 중요한가 하는 것을 배우게 됩니다. 우리가 하이델베르그 교리문답과 벨직신앙고백서, 돌르트 신조, 웨스터민스터 신앙고백서 등을 배우고 있는데 이것은 매우 중요한 의미가 있습니다. 우리가 이런 신조들을 배우는 것은 단순히 믿음의 선배들이 고백한 진리를 배우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과 함께 믿음의 선배들이 그 진리를 따라 산 삶을 배우는 것입니다. 그래서 진리의 길을 간 그 믿음의 선진들의 삶을 본으로 삼아서 우리도 그 삶을 본받아 살고자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바울 사도와 같이 먼저 하나님의 진리를 따라 행함으로 좋은 모범을 보여 나갈 수 있기를 원합니다. 그리하여 많은 믿음의 후배들과 자녀들이 우리의 삶을 보고 배워서 그리스도를 따르는 역사가 우리 가운데 있게 하여 주시기를 원합니다.

 

오늘 본문 18-19절 말씀을 보면 “내가 여러 번 너희에게 말하였거니와 이제도 눈물을 흘리며 말하노니 여러 사람들이 그리스도 십자가의 원수로 행하느니라. 저희의 마침은 멸망이요, 저희의 신은 배요, 그 영광은 저희의 부끄러움에 있고 땅의 일을 생각하는 자라”고 합니다. 바울 사도는 이제 주제를 바꾸어서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원수로 행하는 자들에 대해서 경계합니다. 바울은 그리스도 십자가의 원수로 행하는 자들에 대해서 전에도 말했다고 하면서 이제도 눈물을 흘리며 말한다고 합니다. 여기서 ‘눈물을 흘리며 말한다’는 것은 그만큼 간절히 말한다는 것을 이렇게 표현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만큼 이들은 그리스도의 교회에 해악을 끼치는 존재요, 위험한 존재라는 것입니다. 이들은 바울의 개인의 원수가 아니라 그리스도 십자가의 원수들입니다. 곧 복음의 원수요, 교회의 원수들입니다.

 

그러면 그리스도 십자가의 원수로 행하는 이들은 어떤 자들을 가리키는 것입니까? 2-3절에 보면 “개들을 삼가고 행악하는 자들을 삼가고 손할례당을 삼가라. 하나님의 성령으로 봉사하며 그리스도 예수로 자랑하고 육체를 신뢰하지 아니하는 우리가 곧 할례당이라”고 했습니다. 이 말씀에 기초해서 볼 때 바울 사도가 여기서 언급하고 있는 그리스도 십자가의 원수로 행하는 자들은 할례를 자랑하는 율법주의자들이었다고 생각이 됩니다. 계속해서 4-5절에 보면 바울은 “나도 육체를 신뢰할 만하다”고 합니다. “내가 팔일 만에 할례를 받았다”고 합니다. 이 말들을 볼 때 대적자들은 할례를 주장하는 유대주의자들임을 알 수 있습니다. 이들은 자기 스스로 그리스도인들이라고 주장하고 교회에 들어와 있지만 사실 그들은 그리스도인들이 아니었습니다. 바울에 의하면 이들은 십자가의 원수요, 저희의 마침은 멸망이요, 저희의 신은 배요, 저희의 영광은 부끄러움에 있고 땅의 일을 생각하는 자들 입니다. 따라서 이들은 분명 구원받지 못할 자들이며, 복음을 대적하는 자들이며, 미혹하는 자들입니다.

 

19절을 다시 보면 바울은 “저희의 마침은 멸망이요, 저희의 신은 배요, 그 영광은 저희의 부끄러움에 있고, 땅의 일을 생각하는 자라”고 합니다. 여기서 “저희의 마침은 멸망이요”라고 했을 때 ‘마침’(tevlo", 텔로스)이라는 단어는 ‘끝’, ‘제일 마지막’을 의미합니다. 곧 그들의 끝, 그들의 결국은 멸망이라는 말입니다. 그들은 비록 그리스도를 믿는다고 하지만 결국 영생을 얻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구원을 얻지 못하고 멸망하고 만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사람의 결국을 주목해야 합니다. 악인은 이 세상에서 사는 날 동안 형통한 것처럼 보일지라도 결국 일순간에 멸망하고 맙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인생을 길게 보고 그 결국이 어떻게 되는가에 주목해야 하는 것입니다. 악인이 인간적인 술수와 계략으로 일시적으로 형통해 보일지라도 우리는 그런 것에 미혹되지 말고 하나님의 말씀을 지켜 행해야 하는 것입니다. 복음을 따라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바울은 또 “저희의 신은 배라”고 합니다. 그러면 바울 사도가 여기서 말하는 “저희의 신은 배라”는 말이 무슨 뜻입니까? 고대 교부들은 이것을 음식법에 집착하는 자들에 대한 조소로 보았습니다. 유대인들은 정결한 음식과 부정한 음식을 가리는 것을 매우 중요하게 여겼습니다(참조. 막 7:15-19; 행 11:8). 그래서 여기서 ‘저희의 신은 배라’고 하는 자들은 유대주의자들을 가리키는 것으로 봅니다. 이들은 음식법을 지킴으로써 거기서 자기의 의를 찾았고, 그리하여 그리스도의 의에 손상을 가했던 것입니다. 이들은 하나님이 주신 음식법의 영적 의미를 모르고 그리스도와 관계없이 오직 물질적인 음식만 생각하였습니다. 그리하여 음식물 소화기관인 배만을 위하는 자들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의 배가 사실상은 그들의 신이 되었습니다. 먹는 것과 먹지 않는 것이 그들의 종교가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그들의 신은 그들의 배입니다.

 

이어서 바울은 “그 영광은 저희의 부끄러움에 있다”고 합니다(19). 여기서 ‘그 영광’이란 그들의 영광을 말합니다. 그들은 그들의 영광을 그들의 부끄러움에 둔다는 말입니다. 이것은 언뜻 보기에 방탕한 생활을 뜻하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본문은 그런 뜻이 아닙니다. 여기서 ‘부끄러움’(aijscuvnh, 아이스퀴네)이라는 단어는 우선 칠십인 역의 용례에 보면 신체의 ‘부끄러운 부분’이라는 의미로 사용되었습니다(참조. 나 3:5; 사 47:3; 겔 16:36). 둘째로, 당시 빌립보교회에 들어온 이단들이 이처럼 방탕한 삶을 살았는지는 의문스럽습니다. 이들은 오히려 할례를 주장하고 율법을 지켜 행할 것을 주장하는 유대주의자들이었습니다. 셋째로, 갈라디아서 6:12-13절에도 보면 “무릇 육체의 모양을 내려 하는 자들이 억지로 너희로 할례 받게 함은 저희가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인하여 핍박을 면하려함 뿐이라. 할례 받은 저희라도 스스로 율법은 지키지 아니하고 너희로 할례 받게 하려 하는 것은 너희의 육체로 자랑하려 함이니라”고 했습니다. 여기서도 보면 육체의 모양을 내려고 하는 자들이 갈라디아교회 성도들로 하여금 억지로 할례를 받게 하려는 것은 그들의 육체로 자랑하려 함이라고 합니다. 여기서 ‘육체’는 할례를 말하는 것이며, 신체의 부끄러운 부분을 두고 말하는 것입니다. 빌립보교회의 대적자들도 이와 마찬가지로 신체의 ‘부끄러운 부분’에 할례 받는 것을 중요하게 여기고, 그것을 그들의 영광으로 삼았던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그들의 영광이 그들의 부끄러움에 있다고 조소적으로 말했던 것입니다.

 

바울 사도는 또한 이들을 “땅의 일을 생각하는 자들”이라고 합니다(19). 여기서 ‘땅의 일’이란 문자적으로는 하늘에 있는 것과 대비되는 것으로 땅에 있는 모든 것을 가리킵니다. 그러나 이것은 단지 장소적인 개념이 아니라 무엇보다도 윤리적인 개념으로서 땅 곧 이 세상에 속한 바 감각적인 것, 육신적인 것, 방탕한 것, 인간적인 명예를 추구하는 것 등을 나타냅니다(참조. 요일 2:16; 갈 5:19-21). 곧 타락한 인간이 육신적인 소욕을 따라 원하고 추구하는 것들을 말합니다. 또한 여기서 ‘생각한다’는 것은 단지 지식적인 생각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온 마음으로 생각하고 원하는 것을 말합니다. 곧 그들의 마음이 땅의 일들, 곧 육신적인 것들을 행하는 것을 말합니다. 바울은 이처럼 그리스도 십자가의 원수로 행하는 자들이 어떤 자들인지를 말합니다. 빌립보교회 성도들에게 이들을 삼가라고 눈물로 호소를 합니다.

 

오늘날 이 시대도 그리스도 십자가의 원수로 행하는 자들이 많습니다. 바울의 새관점을 주장하며 율법으로 돌아가고자 하는 가르침, 또한 칭의유보론을 주장하는 자들의 가르침이 유행합니다. 오늘날 한국교회가 윤리를 상실하다보니 윤리적인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행함을 강조하는 이런 사상들이 난무합니다. 이런 자들의 주장과 가르침은 인간의 관점에서 보면 그럴듯합니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이들의 가르침에 미혹됩니다. 그러나 결국 이런 그들의 모든 가르침들은 로마 카톨릭의 가르침으로 돌아가고자 하는 것들에 불과합니다. 이들은 자기들의 의로 그리스도의 의를 막고자 하는 자들입니다. 그리스도 복음의 원수로 행하는 자들입니다. 우리는 이런 거짓 교사들의 잘못된 가르침을 잘 분별해야 합니다. 철저히 대적하고 물리쳐야 합니다. 무엇보다도 사도들이 전한 복음 위에 굳게 서야 합니다. 이런 은혜가 우리 가운데 있게 하시기를 원합니다.

 

오늘 본문 20-21절을 보면 바울 사도는 우리의 시민권이 하늘에 있다고 합니다. “오직 우리의 시민권은 하늘에 있는지라. 거기로서 구원하는 자 곧 주 예수 그리스도를 기다리노니. 그가 만물을 자기에게 복종케 하실 수 있는 자의 역사로 우리의 낮은 몸을 자기 영광의 몸의 형체와 같이 변케 하시리라”(20-21). 여기서 “우리의 시민권이 하늘에 있다”는 문장으로 시작되는 20절 말씀은 19절의 말씀과 대비가 됩니다. 특히 19절 끝에 나오는 ‘땅의 일들’과 대비해서 ‘하늘’을 말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시민권’으로 번역된 헬라어가 ‘폴리튜마(polivteuma)’라는 단어인데 ‘폴리튜마’라는 명사는 원래 ‘폴리튜오’(polivteύω)라는 동사에서 온 것입니다. 이 ‘폴리튜오’는 시민으로서 생활하는 것을 뜻합니다. 따라서 ‘폴리튜마’는 문자적인 의미로는 시민으로서의 생활을 한 것의 산물을 가리킵니다. 그런데 오늘날 대부분의 성경들과 영어 성경들은 이것을 ‘시민권’으로 번역하고 있습니다. ‘시민권’이란 어떤 나라의 시민으로서의 권리뿐만 아니라 넓은 의미로 시민 됨 곧 시민으로서의 신분, 자격, 권리, 의무 등을 총괄한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이것은 우리가 하늘나라의 시민이라는 것을 잘 나타내지만 그러나 너무 좁은 개념입니다. ‘폴리튜마’는 이보다 훨씬 넓은 개념입니다. 단지 우리의 시민권만이 아니라 우리를 다스리는 나라가 하늘에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 사실을 오늘 본문의 문맥에서 분명히 알 수 있습니다. 20절을 다시 보면 바울은 “오직 우리의 시민권은 하늘에 있는지라”고 한 후에 이어서 “거기로서 구원하는 자 곧 주 예수 그리스도를 기다리노니”라고 합니다. 많은 사람들은 자연스럽게 여기서 ‘거기’는 앞에 나온 ‘하늘’을 가리킨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원문에 보면 ‘거기로서’(ejξ οὗ)는 단수로 되어 있습니다. 반면에 ‘하늘’(oujranοῖv")은 복수로 되어 있습니다. 따라서 여기서 ‘거기’는 ‘하늘’을 가리킬 수 없고 그 앞에 있는 단수 명사인 ‘폴리튜마’를 가리킵니다. 그런데 ‘폴리튜마’를 시민권으로 해석한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그러면 “시민권으로부터 구원하는 자를…기다린다”고 되어서 말이 안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시민권은 장소 개념이 될 수 없습니다. 따라서 우리는 여기서 ‘폴리튜마’를 ‘국가, 나라, 정부’로 이해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거기로서 구원하는 자 곧 예수 그리스도를 기다리노니”라는 말은 ‘우리 그리스도인들을 다스리는 국가 곧 나라는 하늘에 있는데 우리는 그 나라로부터 구원하는 자를 기다린다’는 말입니다. 여기서 ‘기다린다’(ajpekdevcomai, 아페크데코마이)는 말은 단지 시간적으로 기다리는 것만이 아니라 간절한 소망을 가지고 기다리는 것을 말합니다.

 

우리가 기다리는 것은 다름 아닌 구원자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우리 성도들은 하나님 나라의 시민권을 가진 자로서 하늘나라를 바라봐야 합니다. 우리의 참된 나라는 하늘에 있습니다(참조. 골 3:1; 요 18:36). 거기에 우리의 왕이신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가 계시며, 거기에서는 하나님의 완전한 통치가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바울은 지금 빌립보교회 성도들은 로마시민이라는 사실을 자랑스럽게 여기고 있지만 그들의 참된 국가는 하늘에 있으며, 그들은 하늘나라의 백성임을 깨우쳐 주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의 본향은 하늘에 있습니다(히 11:16). 그러므로 우리가 이 세상에 있을 때는 외국인과 나그네로 살아가는 것입니다(히 11:13). 우리는 이와 같은 자기 자신의 신분을 분명히 인식해야 합니다. 그럴 때 우리가 그리스도의 원수로 행하는 자들과 같이 멸망의 자식으로 행하지 않게 되는 것입니다. 하늘나라를 소망하며, 거기로부터 구원하는 자 곧 주 예수 그리스도를 기다리는 삶을 살게 되는 것입니다. 성령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은혜를 베풀어 주셔서 우리 가운데 이런 은혜의 역사가 있게 하여 주시기를 원합니다. 우리가 하늘나라의 시민으로서의 분명한 신분 인식을 하고 하늘나라를 소망하며, 거기로서 구원하는 자 곧 주 예수 그리스도를 기다리는 삶을 사는 자들이 되게 하여 주시기를 원합니다.

 

오늘 본문 21절을 보면 “그가 만물을 자기에게 복종케 하실 수 있는 자의 역사로 우리의 낮은 몸을 자기 영광의 몸의 형체와 같이 변케 하시리라”고 합니다. 바울 사도는 우리를 구원할 구원자 예수님이 어떤 분이시며, 그 예수님이 우리에게 어떤 역사를 이루어 주시는지에 대해서 말하고 있습니다. 우리의 구원자 예수 그리스도는 어떤 분이십니까? 바울은 “우리의 낮은 몸을 자기 영광의 몸의 형체와 같이 변케 하시리라”고 합니다. 여기서 ‘낮은 몸’을 직역하면 ‘비천함의 몸’입니다. 우리의 몸, 육체는 약하고 병들고 죄에 물들어 있으며, 유혹에 잘 빠지는 몸입니다. 마음은 원하지만 행함은 없는 연약한 몸입니다. 그래서 결국 죽을 수밖에 없으며, 썩고 멸망 받을 수밖에 없는 비천한 몸입니다. 이러한 우리의 낮은 몸을 그리스도의 영광의 몸의 형체와 같이 변화시키실 것이라고 합니다. 여기서 ‘영광의 몸’은 그리스도께서 부활로 말미암아 입으신 몸인데, 우리 성도들이 장차 주님이 재림하실 때에 이와 같은 몸을 입게 될 것입니다(고전 15:43). 이것이 우리 그리스도인들의 진정한 소망입니다.

 

우리는 여기서 우리의 부활의 몸과 그리스도의 영광의 몸 사이에 동질성이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우리의 변화될 그 몸은 다시 썩지 아니할 ‘강한 몸’이며, ‘신령한 몸’입니다. 고린도전서 15:43-44절을 보면 “욕된 것으로 심고 영광스러운 것으로 다시 살며 약한 것으로 심고 강한 것으로 다시 살며, 육의 몸으로 심고 신령한 몸으로 다시 사나니 육의 몸이 있은즉 또 신령한 몸이 있느니라”고 했습니다. 그렇습니다. 이 몸은 신령한 몸으로 다시 죄를 짓지 아니하며, 병들지 않고, 죽지 아니하는 몸입니다. 마음의 선한 소원을 좇아 다 행하는 몸이며, 완전히 영화롭게 된 몸입니다. 그런 몸으로 변화될 때에 우리는 육신의 연약함의 문제에서 완전히 벗어나게 될 것입니다. 우리를 이렇게 변화시켜 주실 분은 바로 우리의 구원자 곧 주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그러므로 하늘의 시민권을 가진 우리 성도들은 하나님 나라를 소망하며, 거기로서 우리 몸을 이렇게 변화시켜 주실 구원자 예수 그리스도를 기다리는 것입니다. 우리에게는 바로 이와 같은 소망이 있습니다. 이 소망이 우리에게 있는 진정한 소망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기다림으로 이 소망을 따라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성령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은혜를 주셔서 우리 가운데도 이와 같은 소망을 허락해 주시기를 원합니다. 이 소망 가운데 하늘나라의 시민권을 가진 자로서 그리스도 예수의 십자가의 원수들과 싸우며, 바울을 본받아 오직 믿음으로 사는 자들이 되게 하여 주시기를 원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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