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오늘방문자 : 
    36
  • 어제방문자 : 
    1,077
  • 전체방문자 : 
    1,305,830
Extra Form
설교자 손재호
성경본문 막 8:27-33
성경본문내용 (27)예수와 제자들이 가이사랴 빌립보 여러 마을로 나가실새 노중에서 제자들에게 물어 가라사대 사람들이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28)여짜와 가로되 세례 요한이라 하고 더러는 엘리야, 더러는 선지자 중의 하나라 하나이다(29)또 물으시되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 베드로가 대답하여 가로되 주는 그리스도시니이다 하매(30)이에 자기의 일을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라 경계하시고(31)인자가 많은 고난을 받고 장로들과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게 버린바 되어 죽임을 당하고 사흘만에 살아나야 할 것을 비로소 저희에게 가르치시되(32)드러내놓고 이 말씀을 하시니 베드로가 예수를 붙들고 간하매(33)예수께서 돌이키사 제자들을 보시며 베드로를 꾸짖어 가라사대 사단아 내 뒤로 물러가라 네가 하나님의 일을 생각지 아니하고 도리어 사람의 일을 생각하는도다 하시고
강설날짜 2016-04-24

2016년 마가복음 공부


신앙 고백과 죽으심과 부활 예고


말씀:마가복음 8:27-33

 

오늘 본문은 예수님께서 제자들의 신앙 고백을 들으신 후에 고난 받고 죽으시고 부활하실 것을 가르치신 말씀입니다. 27절을 보면 예수님께서는 제자들과 함께 가이사랴 빌립보 여러 마을로 나가실 때 노중에서 제자들에게 질문하셨습니다. “사람들이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 이때 제자들의 대답이 무엇입니까? 28절에 보면 “여짜와 가로되 세례 요한이라 하고 더러는 엘리야 더러는 선지자 중의 하나라 하나이다”라고 대답했습니다. 예수님이 엘리야라는 견해는 종말에 엘리야가 등장하리라는 말라기 말씀과 관련 있습니다. 말라기 4:5절을 보면 “보라. 여호와의 크고 두려운 날이 이르기 전에 내가 선지 엘리야를 너희에게 보내리니”라고 했습니다. 당시 어떤 사람들은 이 말라기 선지자의 예언에 따라 예수님을 엘리야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선지자 중에 하나’라는 말은 신명기 18장 말씀과 관련이 있습니다. 신명기 18:18절을 보면 “내가 그들의 형제 중에 너와 같은 선지자 하나를 그들을 위하여 일으키고 내 말을 그 입에 두리니. 내가 그에게 명하는 것을 그가 무리에게 다 고하리라”고 했습니다. 당시 어떤 사람들 중에는 이 신명기 말씀에 따라 모세나 이사야나 예레미야와 같은 옛 선지자 중에 하나라고 생각했습니다. 사람들은 예수님을 종말에 등장하는 선지자적 인물로 간주했습니다. 그들은 이제 종말이 왔다고 여겼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아직 메시아가 등장했다고 여기지는 않았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예수님을 메시아로 생각하지는 않았습니다. 그것은 아마도 예수님께서 자신들이 생각하는 군사적 표적을 행하지 않았기 때문일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다시 제자들에게 질문하셨습니다. 29절에 보면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 이에 대한 베드로의 대답이 무엇입니까? “주는 그리스도시니이다”라고 했습니다. 제자들은 군사적인 표적이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동안 베푸신 여러 가지 표적들을 통해서 예수님께서 메시아이심을 믿게 되었습니다. 이것이 제자들이 무리들과 다른 점입니다. 그렇지만 제자들은 무리들과 달리 예수님을 고난 받는 메시아로 믿었던 것은 아닙니다. 제자들도 여전히 예수님을 군사적인 메시아로 믿었습니다. 제자들은 예수님께서 군사적인 표적을 언젠가는 행하실 것이라고 믿었을 것입니다. 유대인들에게 군사적 승리를 가져오지 않는 메시아란 있을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유대인들에게 메시아는 당연히 군사적 메시아로서 기대되었습니다.

 

제자들은 예수님을 메시아로 믿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들 역시 당시 대부분의 유대인들처럼 예수님을 군사적인 메시아로 믿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베드로는 예수님께서 많은 고난을 받고 장로들과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게 버린바 되어 죽임을 당하고 사흘 만에 다시 살아날 것을 말씀하시자 드러내놓고 예수님을 붙잡고 책망을 한 것입니다(31-32). 그리고 사도행전 1:6절에 보면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승천하시기 전에 모였을 때에 예수님께 묻기를 “주께서 이스라엘 나라를 회복하심이 이때니이까?”하고 물었습니다. 그들은 오순절 성령 강림 전까지도 예수님을 정치적이고 군사적인 메시아로 믿었던 것입니다. 제자들은 예수님께서 시편 2:7-9절의 말씀처럼 군사적인 승리를 가져올 것을 기대했습니다. 시편 2:7-9절을 보면 “내가 영을 전하노라. 여호와께서 내게 이르시되 너는 내 아들이라. 오늘날 내가 너를 낳았도다. 내게 구하라. 내가 열방을 유업으로 주리니. 네 소유가 땅 끝까지 이르리로다. 네가 철장으로 저희를 깨뜨림이여 질그릇 같이 부수리라 하시도다”라고 했습니다. 제자들은 바로 이 시편 말씀처럼 예수님을 군사적인 승리를 가져다주는 메시아로 믿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러한 군사적인 메시아가 아니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세례 요한에게 세례 받을 때에 하나님으로부터 고난 받는 종의 사명을 감당하도록 명령 받은 메시아였습니다.

 

마가복음 1:11절을 보면 “하늘로서 소리가 나기를 너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라. 내가 너를 기뻐하노라 하시니라”고 했습니다. 이 말씀은 예수님이 누구신지를 알려주는 하나님의 계시의 말씀입니다. 하나님은 예수님을 ‘내 아들’이라고 하셨습니다. 즉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입니다. 하나님의 아들이란 마가복음 14:61절에 보면 메시아와 동일한 의미로 사용되고 있습니다. “잠잠하고 아무 대답도 아니하시거늘. 대제사장이 다시 물어 가로되 네가 찬송 받을 자의 아들 그리스도냐”라고 했습니다(막 14:61). 여기서 ‘네가 찬송 받을 이의 아들 그리스도냐’라고 했을 때 ‘찬송 받을 이’는 하나님을 가리킵니다. 그러므로 ‘찬송 받으실 이의 아들’이란 하나님의 아들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아들이란 메시아 곧 그리스도를 가리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예수님이 어떤 메시아입니까? 예수님이 어떤 메시아인가 하는 것은 “내가 너를 기뻐하노라”고 하신 말씀에서 알 수 있습니다. “내가 너를 기뻐하노라”는 이 말씀은 이사야 42:1절을 배경으로 하고 있습니다. 이사야 42:1절을 보면 “내가 붙드는 나의 종, 내 마음에 기뻐하는 나의 택한 사람을 보라. 내가 나의 신을 그에게 주었은즉 그가 이방에 공의를 베풀리라”고 했습니다. 여기서 하나님이 기뻐하는 자는 하나님의 종을 가리킵니다. 이 하나님의 종은 하나님의 영을 받은 존재입니다. 마가복음 1:10절에도 보면 예수님께서 성령을 받으셨음을 묘사하고 있습니다. “곧 물에서 올라오실새 하늘이 갈라짐과 성령이 비둘기 같이 자기에게 내려오심을 보시더니”라고 했습니다(막 1:10). 그러므로 이사야 42:1절이 마가복음 1:11절의 “내가 너를 기뻐하노라”는 배경이 되고 있음이 분명합니다.

 

그런데 이사야 선지자가 말하는 하나님의 종이란 어떤 존재인지 이사야 42:2-4절에서 자세히 알려 줍니다. “그는 외치지 아니하며 목소리를 높이지 아니하며 그 소리로 거리에 들리게 아니하며 상한 갈대를 꺾지 아니하며 꺼져가는 등불을 끄지 아니하고 진리로 공의를 베풀 것이며 그는 쇠하지 아니하며 낙담하지 아니하고 세상에 공의를 세우기에 이르리니 섬들이 그 교훈을 앙망하리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의 종은 세상의 정의를 세우는 분이신데 섬들 곧 이방나라들이 그 교훈을 소망할 것이라고 합니다. 하나님의 종은 온 세상에 영향을 미치는데 파괴적인 군사력이 아니라 “상한 갈대를 꺾지 아니하며 꺼져가는 등불을 끄지 아니하고 진리로 공의를 베풀 것이라”고 합니다. 따라서 “내가 너를 기뻐하노라”라고 하실 때 하나님은 예수님께서 군사적 메시아가 아니라 정의와 자비의 메시아이시며, 유대인만을 위한 메시아가 아니라 이방인들도 위하는 메시아이심을 밝히신 것입니다.

 

그런데 이 하나님의 종은 고난을 당하게 됨을 이사야 53장을 통해서 이사야 선지자가 예언을 하고 있습니다. 이사야 53:4-6절을 보면 “그는 실로 우리의 질고를 지고 우리의 슬픔을 당하였거늘. 우리는 생각하기를 그는 징벌을 받아서 하나님에게 맞으며 고난을 당한다 하였노라.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을 인함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을 인함이라. 그가 징계를 받음으로 우리가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우리가 나음을 입었도다. 우리는 다 양 같아서 그릇 행하여 각기 제 길로 갔거늘. 여호와께서는 우리 무리의 죄악을 그에게 담당시키셨도다”라고 했습니다. 그렇습니다. 성경에서 말하는 메시아는 고난 받는 메시아입니다. 우리 대신 채찍에 맞으시고 십자가의 길을 가시는 것입니다. 그러나 제자들은 예수님을 고난 받는 메시아가 아니라 그 당시 모든 유대인들이 가지고 있었던 군사적인 메시아로 생각했던 것입니다.

 

오늘 본문 30절을 보면 “이에 자기의 일을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라 경계하시고”라고 했습니다. 이 말씀에 보면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이 “주는 그리스도시니이다”고 고백 했을 때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라고 경계하셨습니다. 여기서 ‘경계하셨다’라는 말은 헬라어 원어로 보면 ‘꾸짖다’라는 의미를 나타내는 ‘ejpitimavw’(에피티마오)라는 동사를 사용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자신이 메시아임을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라고 하시며 꾸짖으셨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제자들이 예수님을 군사적 메시아로 믿고 있었기 때문에 그들이 예수님을 전파하면 사람들이 군사적 메시아로 오해하기 때문에 주는 그리스도라는 사실을 전하는 것을 엄히 꾸짖어 금지하신 것입니다. 우리는 여기서 예수님을 전하면 무조건 좋은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배우게 됩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바르게 전하지 않으면 침묵하는 것보다 못합니다. 우리 자신과 우리 교회가 예수님을 성경에서 말하는 메시아로 바로 전하고 있는지 우리는 우리 자신들을 깊이 돌아봐야 합니다. 우리가 예수님과 하나님을 성경에서 말하는 예수님과 하나님으로 전하지 않으면 그것은 하나님 앞에 범죄입니다. 주님의 책망을 받을 일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의 잘못된 메시아 관을 교정해 주시기 위해서 자신이 어떤 메시아인지를 알려 주십니다. 31절을 보면 “인자가 많은 고난을 받고 장로들과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게 버린바 되어 죽임을 당하고 사흘 만에 살아나야 할 것을 비로소 저희에게 가르치시되”라고 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자신이 많은 고난을 받고 장로들과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게 버린바 되어 죽임을 당하시고 사흘 만에 살아나야 할 것을 비로소 제자들에게 가르쳐 주셨습니다. 여기서 ‘비로소’ 가르쳤다는 말은 이제까지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자신이 많은 고난을 받으시고 종교 지도자들에게 버린바 되어 십자가에 죽고 다시 사흘 만에 부활한다는 사실을 가르치지 않았다는 것을 말해 줍니다. 예수님께서는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시는 길에 제자들의 신앙고백을 들으신 후에 비로소 이 사실을 가르쳐 주셨던 것입니다.

 

그런데 이때 베드로의 반응이 어떠합니까? 32절을 보면 “드러내놓고 이 말씀을 하시니 베드로가 예수를 붙들고 간하매”라고 했습니다. 베드로는 예수님께서 많은 고난을 받고 종교 지도자들에게 버림을 받고 십자가에 죽고 부활한다는 가르침을 받고 예수님을 붙들고 간했습니다. 여기서 ‘간했다’는 말은 ‘항변하다’가 아니라 ‘꾸짖다’라는 뜻입니다. 헬라어 원어로 보면 30절의 ‘경계하셨다’라고 했을 때 사용된 단어와 같은 ‘ejpitimavw’(에피티마오)라는 동사입니다. 베드로의 이러한 예수님을 꾸짖은 것은 예수님의 가르침에 대한 분명한 반대의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베드로의 반대는 예수님께서 메시아이므로 결코 죽임을 당할 수 없다는 생각에서 나온 것입니다. 이것은 당시 유대인이 가지고 있었던 군사적 메시아 사상에 토대한 것입니다. 우리가 앞에서도 봤습니다만 베드로를 위시한 제자들도 당시 유대인들이 가지고 있었던 군사적 메시아 관을 가지고 있었다는 것을 여기서도 확인 할 수 있습니다.

 

베드로와 다른 제자들은 예수님을 메시아로 믿기는 믿었는데 성경에서 말하는 고난 받는 메시아가 아니었습니다. 군사적인 승리를 가져다주는 군사적 메시아로 믿었습니다. 제자들이나 당시 유대인들이나 다를 바가 없었습니다. 당시 이런 군사적 메시아 사상에 의하면 예수님은 결코 죽임을 당할 수 없는 것입니다. 베드로가 보기에는 예수님은 분명 메시아이십니다. 따라서 예수님께서는 결코 죽임을 당할 수 없는 것입니다. 아니 죽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베드로는 예수님의 가르치심 곧 많은 고난을 받고 종교 지도자들에게 버림을 받고 십자가에 죽고 사흘 만에 다시 부활한다는 그 가르침을 받아들일 수 없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그는 예수님을 붙들고 꾸짖은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오늘 분문 31절에서 “인자가 많은 고난을 받고…”라고 하심으로 자신의 정체가 다니엘서에 나오는 ‘인자 같은 이’임을 암시하고 있습니다. 다니엘서 7:13절에 보면 “내가 또 밤 이상 중에 보았는데 인자 같은 이가 하늘 구름을 타고 와서 옛적부터 항상 계신 자에게 나아와 그 앞에 인도되매”라고 했습니다. 여기에서 언급되고 있는 ‘인자 같은 이’는 메시아처럼 권세를 받지만 여호와의 종처럼 고난도 당합니다. 다니엘서 7:21-22절을 보면 “내가 본즉 이 뿔이 성도들로 더불어 싸워 이기었더니. 옛적부터 항상 계신 자가 와서 지극히 높으신 자의 성도를 위하여 신원하셨고 때가 이르매 성도가 나라를 얻었더라”고 했습니다. 또 다니엘서 7:25절을 보면 “그가 장차 말로 지극히 높으신 자를 대적하며 또 지극히 높으신 자의 성도를 괴롭게 할 것이며 그가 또 때와 법을 변개코자 할 것이며 성도는 그의 손에 붙인바 되어 한 때와 두 때와 반 때를 지내리라”고 했습니다. 이 말씀들에 기초해서 볼 때 ‘인자 같은 이’는 많은 고난을 당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가 앞에서 살펴본 이사야 53장에서 이사야 선지자가 예언한 것처럼 구약 성경에 뿌리를 두고 하나님의 새 계시에 일치하는 고난 받는 메시아의 길을 가십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러한 길을 반대하는 베드로를 꾸짖으십니다. 33절을 보면 “예수께서 돌이키사 제자들을 보시며 베드로를 꾸짖어 가라사대. 사단아! 내 뒤로 물러가라. 네가 하나님의 일을 생각지 아니하고 도리어 사람의 일을 생각하는도다 하시고”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고난 받는 메시아의 길을 반대하는 베드로를 꾸짖으시며 “사단아! 내 뒤로 물러가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고난 받는 메시아아의 길을 가는 것을 반대한 베드로를 ‘사단’이라고 부르셨습니다. 그리고 “네가 하나님의 일을 생각하지 않고 사람의 일을 생각한다”고 책망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베드로를 사단이라고 부르신 이유가 무엇일까요? 베드로의 길은 사단이 예수님을 유혹한 길이었기 때문일 것입니다. 마가복음 1:13절에 보면 예수님께서는 세례 요한에게 세례를 받으신 후 광야로 나가서 사단에게 시험을 받으셨습니다. 사단은 아마도 군사적 메시아의 길을 택하라고 유혹했을 것입니다. 병행구절인 마태복음 4장에 보면 세 가지 시험을 하였습니다. 돌들로 떡덩이를 만들라고 하였고, 성전 꼭대기에서 뛰어 내리라고 하였고, 사단에게 절하라고 하였습니다. 이런 사단의 시험은 고난의 길을 가기보다 사람의 길을 가도록 유혹한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베드로의 주장을 듣고 ‘사단’이라고 부르셨던 것입니다. 베드로는 지금 사단이 원하는 일을 하고 있습니다. 물론 베드로의 의도는 예수님을 보호하는 것이었지만 그것은 사단이 원하는 것과 일치합니다. 베드로는 ‘사람의 일’을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그것은 사단의 일과 일치하고 있습니다. ‘사람의 일’이란 당시 사람들이 생각하는 메시아 사상을 가리키는 듯합니다. 이처럼 사단은 대다수 사람들이 빠진 시대정신 속에서 작용할 수도 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따르는 길은 사단의 길일 수 있습니다.

 

당시 대부분의 유대인들이 구약 성경에 토대하여 기대한 메시아 사상을 따르며, 예수님의 주장에 반대하다가 ‘사단’이라 불리고, ‘사람의 일을 생각한다’고 책망을 들은 베드로는 억울했을 것입니다. 예수님의 그런 책망이 이해가 되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베드로는 예수님의 가르침에 반대하기 전에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일을 하고 계실 가능성을 고려했어야 했습니다. 동시대 사람들이 알고 있는 성경 지식에 토대하여 섣불리 메시아의 가르침에 반대하는 것이 얼마나 어리석은 것인지 고려했어야 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예수님에게 더 심오한 계시를 주셨을 가능성을 고려하고 예수님께 깨우쳐 달라고 질문했어야 했습니다. 그러나 베드로는 당시 유대인들이 가지고 있는 군사적 메시아 사상에 기초해서 예수님의 가르침을 받아들이지 않고 책망했다가 도리어 사단이라 불리우고 하나님의 일을 생각하지 않고 사람의 일을 생각한다고 책망을 들었습니다. 우리는 이 사건이 오늘날 우리에게 주는 의미에 대해서 생각해 봐야 합니다. 우리도 베드로와 같이 행하고 있지 않은지 자신을 돌아봐야 합니다. 성경에서 말하는 고난의 길을 가는 메시아가 아니라 승리를 가져다주는 군사적 메시아를 생각하고 있지 않는지 우리 자신을 돌아봐야 합니다. 그리고 주님의 책망의 음성을 들어야 합니다.

 

베드로의 행동은 인본주의가 어떤 것인지를 잘 보여 주고 있습니다. 인본주의는 하나님의 길 대신에 인간의 길을 택합니다. 성경 대신에 자신의 판단을 택합니다. 성경 말씀에 따르기보다 사람들의 합의에 따릅니다. 그런데 인본주의가 늘 이렇게 명확한 것은 아닙니다. 베드로의 경우처럼 신본주의의 탈을 쓴 교묘한 인본주의도 있습니다. 성경에 토대하고, 성경을 믿는 많은 사람들의 합의에 토대하지만 하나님의 일에 위배될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보여 주신 십자가의 도를 부정한다면 아무리 성경을 이야기하고, 성경에 토대한 주장을 한다고 할지라도 그것은 인본주의입니다. 오늘날 성공주의 신학이나, 은사주의 신학이 다 성경에 기초해서 말하고 주장하지만 그것은 하나님의 일이 아니라 사람의 일입니다. 그러므로 그것은 인본주의입니다. 우리는 오늘날 우리 교회가 얼마나 인본주의에 물들어 있는지 알아야 합니다. 우리의 신앙이 얼마나 인본주의에 빠져 있는지 알아야 합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고, 예수님의 이름을 부르며, 성경에 토대해서 말하지만 그것이 사람의 일이라면 그것은 인본주의입니다. 우리 주님과 아무런 상관이 없는 것입니다.

 

마태복음 7:21-23절을 보면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천국에 다 들어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 그 날에 많은 사람이 나더러 이르되 주여! 주여! 우리가 주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하며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며 주의 이름으로 많은 권능을 행치 아니하였나이까 하리니. 그 때에 내가 저희에게 밝히 말하되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하니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내게서 떠나가라 하리라”고 했습니다. 이 말씀을 볼 때 우리가 주의 이름을 부른다고 해서 그것이 참된 신앙이 아닙니다. 하늘에 계신 아버지의 뜻을 행해야 합니다. 우리가 주님의 이름을 부르며, 선지자 노릇하며,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며, 주의 이름으로 많은 권능을 행한다고 해서 참된 선지자가 아닙니다. 하나님의 뜻대로 행하지 아니하면 아무리 주의 이름을 부르며 선지자 노릇하고, 귀신을 쫓아내며, 권능을 행한다 할지라도 주님과 아무런 상관이 없습니다. 주님께서는 이런 자를 모른다고 하시며 불법을 행하는 자라고 물리치십니다. 우리가 예수님의 이름을 부르며 하나님을 믿는다고 교회를 출석하고 예배에 참석하지만 사단의 자식일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일을 행한다고 하지만 사람의 일을 행하고 있을 수 있습니다. 우리가 자신을 돌아 볼 수 있기를 원합니다. 베드로의 모습이 나의 모습은 아닌지, 주여! 주여! 하는 자가 우리 자신이 아닌지 돌아 볼 수 있기를 바랍니다. 성령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은혜를 주셔서 우리가 말씀에 기초해서 예수님을 메시아로 믿는 자들이 되게 하여 주시기를 원합니다. 그리하여 십자가로 가신 예수님을 나의 메시아로 고백 하게 하여 주시기를 원합니다. 그리하여 새 출애굽에 참예하는 복된 자들이 되게 하여 주시기를 원합니다. 아멘!

TAG •

List of Articles
번호 제목 성경본문 설교자 강설날짜 조회 수
148 [마태복음 13장] 집주인 비유 마 13:51-52 손재호 2007-03-18 4528
147 [마태복음 13장] 씨 뿌리는 자의 비유 마 13:1-23 손재호 2007-01-28 6449
146 [마태복음 13장] 누룩 비유 마 13:33 손재호 2007-02-18 4804
145 [마태복음 13장] 그물 비유 마 13:47-50 손재호 2007-03-11 4223
144 [마태복음 13장] 고향에서 배척당한 그리스도 마 13:53-58 손재호 2007-03-25 3224
143 [마태복음 13장] 겨자씨 비유 마 13:31-32 손재호 2007-02-11 4229
142 [마태복음 13장] 값진 진주 비유 마 13:45-46 손재호 2007-03-04 3740
141 [마태복음 13장] 감추인 보화 비유 마 13:44 손재호 2007-02-25 3799
140 [마태복음 13장] 가라지 비유 마 13:24-30, 36-43 손재호 2007-02-04 4950
139 [마태복음 12장] 왕의 표적 논쟁! 마 12:38-45 손재호 2007-01-14 3228
138 [마태복음 12장] 왕의 진정한 가족! 마 12:46-50 손재호 2007-01-21 3386
137 [마태복음 12장] 왕의 기적 논쟁! 마 12:22-37 손재호 2007-01-07 3658
136 [마태복음 12장] 안식일 논쟁! 마 12:1-21 손재호 2006-12-10 4330
135 [마태복음 11장] 회개치 않는 도성에 대한 책망! 마 11:20-24 손재호 2006-11-12 3547
134 [마태복음 11장] 왕의 은혜로운 초청! 마 11:25-30 손재호 2006-12-03 3158
133 [마태복음 11장] 세례 요한의 질문과 왕의 대답! 마 11:1-19 손재호 2006-11-05 4257
132 [마태복음 10장] 제자와 선생은 하나! 마 10:24-42 손재호 2006-10-29 3421
131 [마태복음 10장] 열두 사도의 파송! 마 10:1-23 손재호 2006-10-15 3460
130 [마가복음 9장] 잘못된 제자도를 교정하신 예수님 file 막 9:33-50 손재호 2016-05-22 1519
129 [마가복음 9장] 영광스러운 모습으로 변형되신 예수님 file 막 9:1-13 손재호 2016-05-08 1612
목록
Board Pagination Prev 1 ... 21 22 23 24 25 26 27 28 29 30 31 32 33 34 35 36 37 38 39 40 Next
/ 4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