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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 손재호
성경본문 막 4:35-41
성경본문내용 (35)그날 저물 때에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우리가 저편으로 건너가자 하시니(36)저희가 무리를 떠나 예수를 배에 계신 그대로 모시고 가매 다른 배들도 함께 하더니(37)큰 광풍이 일어나며 물결이 부딪혀 배에 들어와 배에 가득하게 되었더라(38)예수께서는 고물에서 베개를 베시고 주무시더니 제자들이 깨우며 가로되 선생님이여 우리의 죽게 된 것을 돌아보지 아니하시나이까 하니(39)예수께서 깨어 바람을 꾸짖으시며 바다더러 이르시되 잠잠하라 고요하라 하시니 바람이 그치고 아주 잔잔하여지더라(40)이에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어찌하여 이렇게 무서워하느냐 너희가 어찌 믿음이 없느냐 하시니(41)저희가 심히 두려워하여 서로 말하되 저가 뉘기에 바람과 바다라도 순종하는고 하였더라
강설날짜 2016-01-10

2016년 마가복음 공부


풍랑을 잔잔케 하신 예수님


말씀:마가복음 4:35-41

 

마가복음 4장에서 예수님께서는 여러 가지 비유를 통해 하나님 나라의 비밀에 대해서 말씀해 주셨습니다. 예수님께서 비유로 말씀하신 것은 외인들 곧 하나님 나라의 비밀을 아는 것이 허락되지 않은 자들에게는 보기는 보아도 알지 못하며, 듣기는 들어도 깨닫지 못하게 하여 돌이켜 죄 사함을 얻지 못하게 하려 하심이었습니다(4:11-12). 마가는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네 가지 하나님 나라의 비유에 대해서 기술 한 후에 네 가지 기적 사건을 연이어서 소개하고 있습니다. 오늘 살펴볼 풍랑을 잔잔케 하신 사건(4:35-41)과 거라사 광인을 고쳐 주신 사건(5:1-20), 열두 해를 혈루증으로 고생하던 여인을 고쳐 주신 사건(5:25-34), 야이로의 죽은 딸을 살려 주신 사건(5:21-24, 35-43)입니다. 이들 기적 사건들은 예수님의 정체성에 대한 관심을 더욱 고조시켜 주는 역할을 합니다. 오늘 우리는 이 네 가지 기적 사건 중에서 첫 번째 사건인 예수님께서 풍랑을 말씀 한마디로 잔잔케 하신 사건을 공부하고자 합니다. 우리가 오늘 말씀을 살펴보는 가운데 이 말씀을 통해서 계시하시는 하나님의 계시가 무엇인지 배울 수 있기를 바랍니다.

 

35절을 보면 “그날 저물 때에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우리가 저편으로 건너가자 하시니”라고 하셨습니다. 말씀을 마치신 예수님께서는 날이 저물자 제자들에게 우리가 건너편으로 건너가자고 하셨습니다. 여기서 건너편은 예수님께서 무리들에게 비유로 하나님 나라의 비밀을 가르쳐 주셨던 갈릴리 바다 건너편을 말합니다. 5:1절에 보면 예수님께서 바다 건너편 거라사인의 지방에 이르렀다고 하고 있습니다. 갈릴리 바다는 사실은 호수인데 아주 큰 호수이므로 바다라고 표현하기도 하는 것입니다. 이 갈릴리 바다는 지대는 낮으며 주위에는 높고 험한 산으로 병풍처럼 둘러져 있어서 갑자기 기압의 교류가 생기면서 광풍이 일어나는 때가 많이 있다고 합니다. 그리고 갈릴리 바다는 제일 넓은 폭의 길이가 약 13Km쯤 되는데 그 폭이 아래 쪽으로 내려오면서 차츰 좁아집니다. 갈릴리 바다의 서북쪽에 있는 가버나움으로부터 서해안을 따라 약 15Km쯤 내려오면 헤롯 빌립이 로마의 디베료 황제의 이름을 기념하기 위해 건설한 디베랴라는 도시가 있습니다. 그리고 그 건너편 윗쪽에는 거라사라는 지방이 있습니다. 가버나움에 머물면서 말씀을 전하여 가르치시고 계셨던 예수님께서는 제자들과 함께 거라사인의 지방으로 가고자 하신 것입니다.

 

병행구절인 마태복음 8:28절에 보면 마태는 마가와는 달리 예수님께서 가다라 지방에 도착하셨다고 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마태와 마가가 각각 다르게 표현을 한 것은 가다라 지방은 베레아의 도성인데 가다라의 세력이 갈릴리 해변 각처에 미치고 있어서 갈릴리 해변에 있는 거라사가 가다라 지방의 관할 하에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마태는 넓은 지역 관념에 의해서 거라사가 속해 있는 가다라 지방을 언급한 것이고, 마가는 예수님이 타신 배가 도착한 지점인 갈릴리 해변 지방인 거라사를 언급한 것입니다.

 

36절을 보면 “저희가 무리를 떠나 예수를 배에 계신 그대로 모시고 가매 다른 배들도 함께 하더니”라고 했습니다. 제자들은 무리를 떠나 예수님을 배에 계신 그대로 모시고 갔습니다. 1절에서 본 것처럼 예수님께서 바닷가로 나가셨을 때 많은 무리가 몰려들었기 때문에 배를 띄워서 예수님은 배 위에 올라가서 가르치시고 무리들은 육지에서 가르침을 받았습니다. 그러므로 제자들은 배 위에 계신 그대로 모시고 건너편으로 간 것입니다. 그러자 다른 배들도 함께 예수님의 배를 뒤따라갔습니다. 그런데 37절을 보면 “큰 광풍이 일어나며 물결이 부딪혀 배에 들어와 배에 가득하게 되었더라”고 하고 있습니다. 가버나움에서 떠난지 얼마 안 되어서 갑자기 큰 광풍이 일어났습니다. 갑자기 큰 광풍이 일어났음을 알 수 있는 것은 큰 광풍에 헬라어 불변사 이두(idou)가 있기 때문입니다. 큰 광풍이란 아주 거센 폭풍을 말하는 것으로 큰 물결을 일으킵니다. 이럴 땐 작은 배를 타고 있는 사람은 금방이라도 배가 뒤집힐 것 같은 위기감을 느끼게 됩니다. 그런데 이런 일이 예수님과 제자들의 항해 도중에 일어났습니다. 마침 큰 물결이 예수님과 제자들이 탄 배를 덮쳐 배 안에는 물이 가득하였습니다. 제자들은 금방이라도 배가 뒤집힐 것 같은 아주 위태로운 지경에 처하게 되었습니다.

 

그런 위급한 상황에서 제자들은 아우성을 쳤습니다. 그것은 제자들이 이해 못할 상황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제자들이 이해하지 못할 상황이 무엇이었습니까? 38a절을 보면 그토록 위급한 상황에서도 예수님께서는 아랑곳하지 않으시고 배 고물에 곧 배의 뒤쪽 선미에 머리를 기대시고 평온하게 주무시고 계셨던 것입니다. 병행구절인 마태복음 8:24절과 누가복음 8:23절에 보면 행선할 때에 예수님은 잠이 드셨다고 했습니다. 이것을 볼 때 아마 예수님께서는 전도 여행으로 인해서 몹시 피곤하셨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배가 무리를 떠나 호수 건너편으로 출발하자마자 피곤하여 잠이 드셨던 것 같습니다. 38b절에 보면 제자들은 그 위급한 상황에서 고물에서 베개를 베시고 주무시는 예수님을 다급히 깨웠습니다. “선생님이여! 우리의 죽게 된 것을 돌아보지 아니하시나이까?” 제자들은 거센 풍랑 속에서도 아랑곳하지 않고 주무시는 예수님이 야속했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죽게 된 것을 돌아보지 않느냐며 원망을 했습니다. 제자들은 조금 전 배에 오르기 전까지도 예수님께로부터 하나님 나라에 대한 가르침을 여러 가지 비유를 통해서 들었습니다. 예수님의 제자로 있는 자신들에게 지금 하나님의 나라가 어떻게 진행되어 완성되어 가고 있는지를 알게 하셨으므로 하나님 나라의 주인으로 오신 예수님을 참 하나님으로 믿는 신앙의 자리에까지 이르러 그분을 온전히 믿고 자신을 그분께 내맡겨 의지할 수 있어야 했습니다. 그러나 제자들은 광풍 앞에서 그런 믿음이 다 날아가 버렸습니다. 평안히 주무시는 예수님께 도와주지 않는다고 원망하였습니다. 이 사건에서 제자들의 예수님에 대한 믿음 없음이 고스란히 드러나고 있습니다.

 

거센 폭풍이 몰아치고 큰 물결이 일어나 생명을 위협하는 일은 제자들에게 한 시험의 방편으로 주어졌습니다. 그 시험을 통해 예수님의 제자들이 갖고 있는 예수님에 대한 인식이 아직도 부족한 상태에 있음을 드러내셨습니다. 제자들은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요, 구주이심을 인식하고 있다고 할지라도 그것이 반드시 참된 신앙에 이른 것은 아닙니다. 참된 신앙은 자신이 가지고 있는 올바른 인식에 따라서 자신의 삶 전체를 그분께 온전히 내맡기는 신뢰를 그 본질로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제자들은 아직도 그 상태에까지 이르지는 못했습니다. 그러므로 거센 폭풍이 불고 큰 물결이 일어나 배가 뒤집혀 침몰할 위기에 처했을 때 그들은 평안을 잃고 예수님을 원망했습니다. 제자들은 하나님 나라를 소유한 백성으로서 어떠한 폭풍 속에서도 예수님이 지녔던 그 내적 평온함을 지니고 주어진 그 위기를 지배할 수 있어야 했습니다. 또한 예수님의 제자로서 그분을 좇음으로 인해서 오는 어떤 위험 속에서도 두려워하지 않고 자신들의 생명은 예수님께로부터 나오고 또한 보호받음으로 예수님께 자신을 온전히 내맡기고 의지해야 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그렇게 하지 못했습니다. 두려움에 사로잡혀 예수님을 흔들어 깨우면서 지금 자신들이 죽게 되었는데 왜 돌아보아 구원해 주지 않느냐고 원망했습니다.

 

39절을 보면 “예수께서 깨어 바람을 꾸짖으시며 바다더러 이르시되 잠잠하라. 고요하라 하시니. 바람이 그치고 아주 잔잔하여지더라”고 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이 깨우는 소리에 일어나 바람을 꾸짖으시며 바다를 향해 말씀하셨습니다. “잠잠하라. 고요하라.” 그러자 어떻게 되었습니까? 언제 그랬느냐는 식으로 바람이 그치고, 거센 물결은 아주 잔잔해 졌습니다. 예수님의 말씀 한마디에 그렇게 날뛰던 바람과 바다가 순식간에 잠잠해 진 것입니다. 참으로 놀라운 기적이 아닐 수 없습니다. 40절을 보면 이에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말씀하셨습니다. “어찌하여 이렇게 무서워하느냐? 너희가 어찌 믿음이 없느냐?” 예수님께서는 풍랑 앞에서 무서워하며 호들갑을 떠는 제자들에게 믿음이 없다고 책망하셨습니다. 여기서 “어찌하여 이렇게 무서워하느냐”라는 말씀은 ‘왜 너희는 겁먹고 두려워하느냐?’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너희가 어찌 믿음이 없느냐”라는 말씀은 병행구절인 마태복음 8:26절에 보면 마태는 “믿음이 적은 자들아”라고 기록하고 있고, 누가복음 8:25절에 보면 누가는 “너희 믿음이 어디 있느냐”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 간주에 보면 어떤 사본에는 ‘어찌 아직도 믿음이 없느냐’로 기록되어 있다고 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예수님이 하신 이 말씀은 “너희가 아직도 믿음이 없느냐?”라는 말입니다.

 

예수님의 이 말씀을 뒤집어 보면 예수님께서 풍랑 가운데서도 그토록 평안하셨던 까닭은 믿음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어떤 믿음일까요? 시편 4:8절을 보면 다윗은 곤란 중에 하나님을 신뢰하고 기도하면서 “내가 평안히 눕고 자기도 하리니 나를 안전히 거하게 하시는 이는 오직 여호와시니이다”라고 고백했습니다. 예수님은 이처럼 성부 하나님을 전적으로 신뢰하셨습니다. 예수님은 폭풍 속에서도 평안히 주무심으로써, 언제나 그분을 온전히 신뢰하고 계심을 구체적인 행위 속에서 드러내셨습니다. 반면, 제자들은 무서워함으로써 예수님과 한 배에 있다는 사실을 무색하게 만들어버렸습니다. 제자들은 예수님과 아무런 관계성 없이 살아가는 외인들이나 보일 반응을 보임으로써 주님과 동행하는 삶의 차이를 드러내지 못했습니다. 제자들은 아직 예수님의 본질이 하나님이란 사실을 깨닫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단지 ‘선생님’과 함께 타고 있을 뿐입니다. 그러니 그들이 무서워하고 원망하는 마음을 충분히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러면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어떤 믿음이 없다는 말씀입니까? 예수님의 제자가 아닌 다른 사람들에게서는 거센 폭풍과 큰 물결이 분명히 무서운 대상임은 틀림이 없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제자들은 하나님 나라의 백성이요, 예수님의 제자로서 어떤 상황 속에 있을지라도, 그러니까 이보다 더한 현실을 만나서 큰 곤경에 처했을지라도 자신들은 주의 전능하신 능력으로 항상 보호를 받으리라는 것을 확신하고서 믿음으로 감당할 수 있어야만 했습니다. 더구나 지금 배 안에서는 자신들의 주이신 예수님께서 평안히 주무시고 계십니다. 그렇다고 하면 예수님께서 자신들과 배에 함께 계시므로 주님의 전능하신 권세가 자신들을 보호하리라는 것을 깨닫고 풍랑이 이는 바다 속에서도 안심하여 안식을 취할 수 있어야 했습니다. 사실 예수님 안에서는 죽는 것이 사는 것입니다. 영원한 생명이 그들을 기다리고 있는 것이 아닙니까? 그런데 제자들은 풍랑이 이는 바다의 현실을 만나자 예수님께 대한 그들의 생각이 심히 적었습니다. 더구나 예수님이 깨어 계셨던 것이 아니라 곤히 주무시고 계셨으므로 아예 믿음을 갖지를 못하였습니다. 사실 예수님이 주무시든 아니면 깨어있든 그것이 제자들의 믿음에는 아무런 차이가 없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깨어 계셨을지라도 예수님이 어떠한 조치를 취하시지 아니하시면 역시 그들은 예수님에게 자신들을 구원해 달라고 간청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그들의 믿음 없음을 책망하신 것입니다.

 

41절을 보면 “저희가 심히 두려워하여 서로 말하되 저가 뉘기에 바람과 바다라도 순종하는고 하였더라”고 했습니다. 예수님께서 말씀 한마디로 바람과 바다를 꾸짖어 잔잔케 하셨습니다. 제자들의 믿음 없음을 꾸짖으시자 제자들은 자기들 눈 앞에서 되어진 일을 보고 심히 두려워하면서 이상히 여겨 서로 수군거리기를 “저가 뉘기에 바람과 바다라도 순종하는고”라고 하였습니다. 40절에서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어찌하여 이렇게 무서워하느냐”라고 하셨을 때 ‘무서워’라는 단어가 ‘deilov"’(데일로스)입니다. 이 단어는 겁내고 비겁해지는 태도와 관련해서 쓰였습니다. 그런데 41절에서 “저희가 심히 두려워하여 서로 말하되”라고 했을 때 사용된 ‘두려워’라는 단어는 ‘fobevw’(포호베오)라는 단어인데 이 단어는 전혀 예상치 못했던 거대한 공포에 압도되어 경외하는 태도와 관련되어 있습니다. 그러므로 제자들은 새로운 종류의 두려움에 심히 압도 되어서 서로 말했습니다. “저가 뉘기에 바람과 바다라도 순종하는고”(41b). 비로소 제자들은 예수님의 본질에 대해 진지한 관심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단순히 선생님이 아니라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사건을 통해서 자신이 삼위 하나님으로서 여호와 하나님께서 하실 수 있는 놀라운 일을 행하신 분이심을 나타내신 것입니다.

 

시편 89:8-9절에 보면 “여호와 만군의 하나님이여 주와 같이 능한 자가 누구리이까. 여호와여 주의 성실하심이 주를 둘렀나이다. 주께서 바다의 흉용함을 다스리시며 그 파도가 일어날 때에 평정케 하시나이다”라고 했습니다. 이 시편은 여호와 하나님이 바다를 잔잔케 하시는 분으로 소개합니다. 그런데 이 표현이 오늘 본문의 예수님에게도 정확히 일치하게 사용되고 있는 것을 발견하게 됩니다. 이를 통해서 예수님께서는 자신이 신적존재이심을 암시하고 있습니다. 지금 제자들은 자신들 눈 앞에서 예수님이 자연의 힘을 다스리신 것을 보았습니다. 바람과 바다도 예수님의 말씀 한마디에 순복하고 잠잠해졌음을 보았습니다. 제자들은 이 놀라운 사건 앞에서 자신들의 믿음 없음을 인정하고 돌이켜 이제는 예수님을 온전히 믿고 따르려는 순복이 그 마음에서 부터 나오고 몸이 따랐어야 했습니다. 그러나 “저가 뉘기에 바람과 바다라도 순종하는고”라고 한 말에서 알 수 있듯이 제자들은 아직도 예수님을 올바르게 인식하고 있지를 못하였습니다. 그러므로 제자들이 가지고 있는 믿음은 아직도 예수님이 온 세상을 주권적으로 다스려 가시는 분이심을 믿는 그 상태에까지는 이르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갈릴리 바다에 있는 예수님의 제자들에게는 거센 폭풍과 큰 물결이 그들의 믿음을 시험하는 요인으로 작용했습니다. 그러나 이런 자연적이고 물리적인 방법 외에 오늘날 우리들에게는 유, 무형으로 시험이 주어집니다. 우리가 주님과 더불어 살아가는 삶을 살았음에도 불구하고 주님을 올바르게 인식하고 있지 못하고 있을 때 우리가 가진 믿음은 정말 보잘 것 없게 됩니다. 그동안 우리가 가진 믿음이 어디로 갔는지 보이질 않게 됩니다. 우리에게 예상치 못한 질병이나 사고가 닥쳐왔을 때 무엇을 해야 할지,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를 때 우리는 긴장과 불안의 폭풍 속에 휩싸이게 됩니다. 이때 우리는 어찌할 바를 모르고 예수님을 찾으며 ‘주님 이제 나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 ‘주님은 나에게 무엇을 하게 하시려 합니까?’라고 기도하게 됩니다. 그러나 진정한 비극과 불행은 우리가 무엇을 해야 좋을지 모르는데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겸손히 자신을 주께 맡기고 주의 인도하심에 순복하지 않는다는데 있습니다. 우리가 하루아침에 망했을지라도 자신의 삶을 인도해 가시는 주님께 자신을 온전히 맡기고 주님 안에 있음으로 말미암아 평안한 가운데 주님의 뜻이 자기 안에 이루어지기를 순복해야 합니다. 그런데 우리는 어떻습니까? 당장 눈앞에 닥친 폭풍과 풍랑만을 면해 보려고 주님을 찾고 있지는 않습니까? 그러나 우리가 알아야 합니다. 폭풍과 풍랑 속에서 내 안에 갖고 계신 주님의 뜻에 순복하는 것이 평안의 길입니다. 참으로 인생의 폭풍과 풍랑으로 자기 안에 실현된 하나님 나라가 자라 결실을 맺는다고 하면 자신의 인생에 주어진 문제를 주님께 온전히 내맡기고 의지하여 믿음의 시련으로 받아들일 것입니다. 거기에서 평안함을 가지며, 인내가 생기며, 연단을 받을 것입니다. 인내와 연단은 소망을 이루는데 꼭 필요합니다.

 

그런데 우리가 그러지를 못할 때 염려를 갖게 됩니다. 한치 앞을 내다볼 수 없는 곧 내일 일을 알 수 없는데 대한 염려와 불안, 그 밖에 우리들 자신에 대한 염려와 불안, 사랑하는 사람에 대한 염려와 불안을 갖습니다. 그것은 주님에 대해 믿음을 갖지 못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예수님께서 산상수훈에서 “염려하지 말라”고 하시면서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고 하신 말씀을 듣습니다(마 6:33). 우리가 염려하지 않는 것은 우리가 주님을 믿고 그분 안에서 살아가고 있는데 대한 신뢰입니다. 또한 적극적인 면에서 우리가 구하면서 살아가야 할 것이 무엇인지를 잘 알고 있는데 대한 성실함입니다. 무엇이 우리에게 문제로 있습니까? 우리의 믿음이 어디에 있습니까? 주님께 대한 의지에 있습니까? 아니면 세상 염려에 가 있습니까? 지금 우리가 죽을 지경에 놓였다고 할지라도 주님만을 믿고 따르며 온전히 의지하는 자들이 되기를 원합니다. 주님께서 이 시간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너희 믿음이 어디 있느냐?” “너희가 어찌하여 믿음이 없느냐?”

 

오늘 우리는 이 사건이 왜 있게 되었는지를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예수님이 행하신 사역은 우연히 되어진 것이 없습니다. 예수님은 이 사건에서 뭔가 의도를 가지고 계셨음이 분명합니다. 그것은 제자들에게 이 사건을 통해서 예수님 자신이 어떤 분이신지를 보고 깨닫게 하여 예수님에 대한 믿음을 갖게 해 주시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자기 계시의 방편으로 본 사건을 갖게 하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이 사건을 자기 계시의 방편으로 삼으신 것은 앞서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여러 가지 비유로 하나님 나라에 관해 가르쳐 주셨는데, 제자들이 하나님 나라에 대해 깨달았다고 하면 하나님 나라에 소망을 두고 살아가는 제자로서 그 나라의 주인이신 예수님을 주로 모시고 섬길 뿐만 아니라 예수님의 제자로서 앞으로 어떤 희생이 요구되더라도 기꺼이 감수하고 예수님께 자신을 전적으로 내맡기고 온전히 의지하여 살아가야 할 것이었습니다. 그러므로 그에 합당한 믿음을 제자들에게 요구하여 제자들이 하나님 나라의 백성이며, 예수님의 제자인 자기들이 어떤 사람이 되기를 원하시고 또 기대하고 계시는지를 깨닫고 거기에 걸맞는 믿음을 소유해 나가게 하신 것입니다. 성령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은혜를 주셔서 말씀 한마디로 바람과 풍랑을 잔잔케 하신 예수님을 삼위 하나님으로 믿는 믿음을 허락하여 주시기를 원합니다. 그리하여 우리가 어떤 상황과 형편 가운데서도 요동치 않고 주님의 제자로 살며, 주님 안에서 참된 평안을 누리는 자들이 되게 하여 주시기를 원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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