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가복음 1장] 시몬의 장모와 많은 병자를 고치신 예수

by 손재호 posted Sep 27, 20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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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 손재호
성경본문 막 1:29-34
성경본문내용 (29)회당에서 나와 곧 야고보와 요한과 함께 시몬과 안드레의 집에 들어가시니(30)시몬의 장모가 열병으로 누웠는지라 사람들이 곧 그의 일로 예수께 여짜온대(31)나아가사 그 손을 잡아 일으키시니 열병이 떠나고 여자가 저희에게 수종드니라(32)저물어 해 질 때에 모든 병자와 귀신들린 자를 예수께 데려오니(33)온 동네가 문 앞에 모였더라(34)예수께서 각색 병든 많은 사람을 고치시며 많은 귀신을 내어 쫓으시되 귀신이 자기를 알므로 그 말하는 것을 허락지 아니하시니라
강설날짜 2015-09-27

2015년 마가복음 공부


시몬의 장모와 많은 병자를 고치신 예수님

 

말씀:마가복음 1:29-34

 

우리는 지난 시간에 예수님께서 안식일에 회당에서 가르치시고 더러운 귀신을 쫓아내신 사건을 공부했습니다. 오늘 말씀은 예수님께서 시몬의 장모의 열병을 고쳐 주시고 많은 병자를 고쳐 주신 사건입니다. 우리가 오늘 말씀을 살펴보는 가운데 예수님께서 시몬의 장모의 열병을 고쳐 주시고, 많은 병자를 고쳐 주신 사건을 통해서 무엇을 계시 하고자 하시는지를 배우고자 합니다.

 

오늘 본문 29-31절에 보면 “회당에서 나와 곧 야고보와 요한과 함께 시몬과 안드레의 집에 들어가시니. 시몬의 장모가 열병으로 누웠는지라. 사람들이 곧 그의 일로 예수께 여짜온대. 나아가사 그 손을 잡아 일으키시니 열병이 떠나고 여자가 저희에게 수종드니라”고 했습니다. 안식일에 회당에서 가르치시고 더러운 귀신을 쫓아내신 예수님께서는 회당에서 나와서 야고보와 요한과 함께 시몬과 안드레의 집에 들어가셨습니다. 시몬과 안드레는 형제입니다. 안드레가 결혼했는지는 성경이 말하고 있지 않기 때문에 우리가 정확히 알 수는 없지만 시몬은 이미 결혼을 하였습니다. 그리고 장모와 함께 살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시몬과 안드레의 집에 갔을 때 마침 시몬의 장모가 열병으로 누워 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집에 들어오시자 사람들이 시몬의 장모가 열병으로 누워있는 상황을 아뢰고 고쳐줄 것을 간절히 구하였습니다. 그때 예수님께서는 시몬의 장모에게 가까이 다가가서 그 손을 잡아 일으키셨습니다. 그러자 즉시 열병이 떠나가고 정상으로 회복이 되었습니다. 놀라운 기적이 일어난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열병을 고치기 위해 무슨 안수 기도나 신유의 행위를 하지 않으셨습니다. 다만 그녀의 손을 잡아 일으켰을 뿐입니다. 그런데 열병이 떠나가고 건강이 온전히 회복된 것입니다. 예수님의 병 고침으로 건강이 회복된 시몬의 장모는 예수님과 제자들에게 수종들었습니다. 곧 그들을 위해서 식사를 준비하여 대접을 한 것입니다. 시몬의 장모의 이와 같은 섬김은 예수님에 대한 감사와 경외심에서 나온 것입니다.

 

우리가 지난 시간에 살펴본 대로 예수님께서는 시몬의 장모의 열병을 고쳐 주시기 전에 가버나움 회당에서 가르치시는 일을 하시며, 더러운 귀신들린 자를 고쳐 주셨습니다. 예수님은 이와 같은 이적을 통해서 자신이 누구인지 곧 자신이 하나님의 거룩한 자이심을 알게 하셨습니다. 귀신은 예수님이 하나님께서 보내신 그리스도 곧 메시아이심을 알아보았습니다. 24절 말씀에 보면 “나사렛 예수여! 우리가 당신과 무슨 상관이 있나이까. 우리를 멸하러 왔나이까. 나는 당신이 누구인 줄 아노니 하나님의 거룩한 자니이다”라고 했습니다(막 1:24). 예수님께서는 귀신이 자신에 대하여 스스로 말하는 것을 통하여 그 귀신을 꾸짖어 쫓아냄으로써 예수님 자신이 회당에서 가르치신 말씀이 어떠한 권세를 가지고 있는지를 드러내어 알게 하셨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은 하나님의 거룩하신 자로서 신적 권위가 있는 말씀입니다. 예수님은 사단의 세력과 그 나라를 멸하시기 위하여 권세를 행하십니다. 그 사실을 회당에 모인 모든 사람들에게 더러운 귀신을 쫓아내시는 사건을 통해서 알게 하셨습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예수님께서 행하시는 이 이적을 보고 놀라워 하였지만 귀신이 예수님에 대하여 한 말과 예수님이 행하신 이 이적의 의미를 제대로 이해하지는 못했습니다. 곧 예수님이 하나님의 거룩하신 자로서 그리스도이신 메시아 되심에 대한 믿음을 가지지 못했습니다. 예수님 자신의 가르침과 이적을 인하여서 예수님이 누구신가를 보지 못하고 알지 못하는데 귀신이 말하는 것에서 예수님을 보고 알 수 있겠습니까? 없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께서는 귀신이 자신에 대해서 말하는 것을 허락지 아니하시고 금하셨습니다. 오늘 본문 34절에 보면 “예수께서 각색 병든 많은 사람을 고치시며 많은 귀신을 내어 쫓으시되 귀신이 자기를 알므로 그 말하는 것을 허락지 아니하시니라”고 하셨습니다(참조. 눅 4:41). 예수님은 귀신의 도움을 받아서 자신이 메시아이신 것을 나타내시지 않으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시몬의 장모의 열병을 고쳐 주신 것은 단지 그녀를 측은히 여겨서 고쳐 주신 것이 아닙니다. 또한 시몬이 자신을 좇는 제자로 있었기 때문에 그 수고를 덜어주기 위해서도 아닙니다. 오늘 본문 30절을 다시 보면 “… 사람들이 곧 그의 일로 예수께 여짜온대”라고 하고 있습니다. 마가복음 저자는 “사람들이 그의 일로 예수께 여짜온대”라고 간략하게 소개하고 있지만 우리는 이 말을 통해서 예수님께서 시몬의 장모의 열병을 고쳐 주신 의도를 볼 수 있습니다. 곧 예수님이 누구신가 하는 것을 알게 하고자 하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회당에서 가르치시며 더러운 귀신을 쫓아내는 이적을 행하여 주셨지만 사람들이 예수님의 메시아 되심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그러므로 그들을 떠나셔서 예수님 자신을 믿고 따르는 첫 제자들을 데리시고 시몬의 집으로 가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회당에서 가르치시고 행하신 이적을 통해서 사람들이 놀랐습니다. 그들이 알고 있는 예수님의 메시아관이 성령 강림 이후에 깨달은 지식과 같은 온전한 상태에 있는 것은 아닐지라도 미미하게나마 깨닫고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께서 시몬의 집에 들어오시자 사람들이 예수님께 시몬의 장모의 열병을 고쳐 달라고 간청을 한 것입니다. 그들은 예수님께서 행하신 이적에 대해 듣고 알고 있었습니다. 그 이적을 행하신 권세가 무엇을 나타내고 있는지를 알고 있었습니다. 그 사실을 알고 있기에 열병을 고쳐 주기를 바랐습니다.

 

예수님은 그들의 그러한 믿음을 알고 있었으며, 그들이 원하고 있는 것도 알고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그들이 알고 있는 예수님에 대한 메시아관과 그 권세를 확인시키시며, 확증시켜 주시기 위해서 그들의 간청에 응하셨습니다. 그래서 시몬의 집에 들어가셔서 장모의 열병을 고쳐주셨습니다. 궁극적으로 예수님이 시몬의 장모의 열병을 고치신 일은 시몬의 집에 있는 사람들의 믿음을 생생하게 하여 견고하게 세워 주시기 위해서 예수님 자신이 친히 그 집에 오셨고, 열병을 앓고 있는 시몬의 장모의 손을 잡아 일으키신 것입니다. 이렇게 하심으로써 거기에 있다가 그 광경을 본 사람들에게도 그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생각하게 하셨습니다. 예수님의 행하시는 일은 단순히 직접 당사자에게만 한하지 않고 항상 주위의 사람들에게도 증거가 됩니다. 그것은 예수님이 누구시냐 하는 것을 좀 더 깨닫게 하는 증거로서의 의미를 가집니다. 나아가서는 예수님을 믿고 따르는 제자들의 믿음을 한층 더 강화시켜주는 유익을 가져다주었습니다.

 

32-34절을 보면 “저물어 해 질 때에 모든 병자와 귀신들린 자를 예수께 데려오니. 온 동네가 문 앞에 모였더라. 예수께서 각색 병든 많은 사람을 고치시며 많은 귀신을 내어 쫓으시되 귀신이 자기를 알므로 그 말하는 것을 허락지 아니하시니라”고 했습니다. 28절에서 본 것처럼 예수님께서 회당에서 가르치신 교훈과 더러운 귀신을 쫓아내신 소식이 온 갈릴리 사방에 퍼졌습니다. 시몬의 장모의 열병을 고쳐 주시기 전에 이미 갈릴리 온 사방에 예수님에 대한 소문이 널리 퍼져 있었습니다. 그런 상황에서 예수님께서 시몬의 집에 오셔서 열병에 걸려 앓아누운 그의 장모를 고쳐 주셨습니다. 아마 이 소식도 금방 온 갈릴리에 퍼졌을 것입니다. 이 소식을 들은 갈릴리 온 동네 사람들이 저물어 해가 질 때에 모든 병자와 귀신들린 자를 데리고 예수님께 나아왔습니다. 우리는 여기서 ‘저물어 해가 질 때에’라는 말을 통해서 예수님께서 시몬의 장모의 열병을 고쳐 주신 날이 안식일이었던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유대인들은 안식일에 병을 고칠 수 없습니다. 물건을 옮길 수도 없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예수님에 대한 소문을 듣고 해 지기를 기다렸다가 몰려왔습니다.

 

그러면 예수님께서는 이들을 어떻게 하셨습니까? 34절을 다시 보면 예수님은 각색 병든 많은 사람을 고치시며, 많은 귀신을 내어 쫓으셨습니다. 오늘날 소위 ‘신유’라고 말하는 사역은 병의 종류나 그 증세의 강약에 따라 고치기도 하고 못 고치기도 합니다. 암이나 심각한 질병은 어쩌다가 가끔 낫는 정도입니다. 그리고 그런 정도의 신유는 다른 종교에서도 많이 나타납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병의 종류나 병증의 심각한 정도와 상관없이 단번에 고치셨습니다. 귀신의 종류나 수와 상관없이 그 자리에서 내어 쫓으셨습니다. 그날의 사역을 위해 특별히 금식 기도로 준비하시거나 병자들로 밤샘 기도를 하도록 주문하실 필요도 없으셨습니다. 오늘날 신유를 행하고 축귀를 하는 그 어떤 사람도 본 받을 수 없는 근본적인 차이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예수님의 치유와 귀신을 쫓아내는 사역은 그분이 하나님 나라를 건설하시는 메시아임을 드러내는 구속의 행위였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모든 구속의 행위는 누구도 본받을 수 없고, 다만 믿음으로 영접해야 할 문제입니다. 이사야 선지자는 이사야 53:4절에서 메시아가 “실로 우리의 질고를 지고 우리의 슬픔을 당하였도다”라고 예언하였습니다. 여기서 ‘질고와 슬픔’은 앞 구절 곧 이사야 53:3절의 ‘질고와 간고’와 같은 단어를 다르게 번역한 것인데, 정확하게 말하면 ‘질병과 고통’을 뜻합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질병과 고통을 대신 담당하셨습니다.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병 고침을 받고 귀신이 쫓겨남을 받은 많은 사람들은 단지 병 나은 것과 귀신이 나간 것으로 인해 기뻐하였을 것입니다. 그러나 사실 그들이 깊이 생각해야 할 점은 그들이 누린 ‘나음과 평화’는 어떻게 주어진 것일까를 성경에 비추어서 생각하는 일이었습니다. 그들이 받은 은혜는 능력이 넘쳐나는 분이 선심 쓰듯이 던져준 값싼 은혜가 아닙니다. 예수님께서 친히 질병과 고통의 저주를 대신 담당하시고서 주신 은혜입니다. 이 은혜는 거저 베풀어 주셨지만 예수님께서는 자신을 십자가에 내어주셔야 주실 수 있는 은혜인 것입니다. 우리는 주님께서 그 마음에 품고 계셨을 그 사랑의 깊이와 넓이와 높이와 길이를 다 표현할 길이 없습니다.

 

우리의 삶에도 질병과 고통이 있습니다. 그런 때에 우리는 주님을 찾습니다. 그리고 문제가 해결되면 그 나음과 평화가 어떻게 생겼는지 깊이 생각해 보지 않습니다. 단지 문제가 해결 된 것으로 인해 기뻐합니다. 그러므로 예수님과의 관계에서 더 이상의 진전이 없는 것입니다. 또다시 질병이 재발하고 새로운 고통이 생겨야 다시 주님을 찾습니다. 그러한 태도의 반복은 우리 주님께서 주신 은혜를 너무 값싸게 즐기는 것입니다. 이러한 태도는 우리 삶에 자발적인 섬김이 나타나지 않게 만듭니다. 당면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주님을 찾았으니 문제가 해결되면 끝입니다. 만일 우리에게 주어진 은혜에 대해서 조금만 더 깊이 생각하기 시작한다면, 우리의 삶에는 반드시 그 은혜에 합당한 반응이 나타나게 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병든 자와 귀신들린 자를 고치신 이적을 행하신 것은 하나님의 거룩하신 자로서 사단 마귀보다 절대적인 권세를 가지고 계시다는 사실을 명백히 증거 하여 주고 있습니다. 마태는 예수님께서 병든 자와 귀신들린 자를 고치신 이적을 행하신 것을 이스라엘을 대신하여 고난을 짊어지신 여호와의 고난 받는 종에 관한 예언서에서 인용하여 그것이 이사야 선지자의 예언이 성취된 것이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마태복음 8:17절을 보면 “이는 선지자 이사야로 하신 말씀에 우리 연약한 것을 친히 담당하시고 병을 짊어지셨도다 함을 이루려 하심이더라”고 했습니다. 예수님께서 자기에게 나아온 모든 병자와 귀신들린 자를 고치신 것은 자신이 구약 시대로부터 소망하고 기대해 온 하나님의 백성의 구원자이심을 드러내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스라엘의 물리적이고 영적인 고난을 짊어지셨으며, 그 죄에 대한 징벌을 친히 담당하셨습니다(사 55:4-5). 예수님의 구원이란 단지 ‘영혼’에만 국한되는 것이 아닙니다. 또한 ‘내세’만 소망하게 만드는 것도 아닙니다. 예수님의 구원이란 인간의 영혼과 몸, 즉 인간을 온전히 구원하는 것이며, 구원받는 인간의 삶의 모든 환경까지 포함하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예수님의 구원 안에 들어온다는 것은 지금 이 땅에서의 삶 전체가 하나님의 통치와 보호 아래 놓이는 것을 의미합니다.

 

우리가 이사야 선지자의 예언에서 보는 것은 구원자이신 예수 곧 그리스도는 고난 받는 종의 모습을 취하십니다. 그것은 다음과 같은 이유에서 입니다. 하나님께 범죄한 첫 사람 아담에게서 난 모든 인간은 정죄에 이르러 죄인이 되었기 때문에(롬 5:18) 하나님의 진노가 하늘로 좇아 나타납니다(롬 1:18). 그것은 인간에게 저주 받은 모습으로 나타납니다. 미가서 7:6절을 보면 미가 선지자는 예수님의 오심으로 되어질 일을 예언하기를 “아들이 아비를 멸시하며 딸이 어미를 대적하며 며느리가 시어미를 대적하리니 사람의 원수가 곧 자기의 집안 사람이로다”라고 하였습니다. 마태복음 10:34-36절을 보면 “내가 세상에 화평을 주러 온 줄로 생각지 말라. 화평이 아니요 검을 주러 왔노라. 내가 온 것은 사람이 그 아비와, 딸이 어미와, 며느리가 시어미와 불화하게 하려 함이니. 사람의 원수가 자기 집안 식구리라”고 했습니다. 마태는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오신 목적을 미가 선지자의 예언을 인용하여 말하였습니다. 이는 마태가 예수님으로 인하여 집안 식구끼리 불화하게 되고 다투게 된다는 사실을 알려 주는 것을 위하여 인용하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의 오심은 구약의 미가 선지자가 예언한 재앙의 형벌을 성취하시기 위함이라는 사실을 지적해 주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구원하는 일을 하러 오신 이후로는 그분의 복음을 거부하는 자에게는 하나님의 재앙과 형벌이 임하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재앙과 형벌 곧 저주는 죄인된 인간을 심판하시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구원은 인간을 죄에서 구원하신다는 것인데 하나님의 저주에서 놓임을 받는 것을 뜻합니다. 그런데 그 일을 어떻게 해서 이루시는가 할 때에 이사야 선지자는 고난 받는 종으로 묘사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사야 53:4-5절을 보면 “그는 실로 우리의 질고를 지고 우리의 슬픔을 당하였거늘 우리는 생각하기를 그는 징벌을 받아서 하나님에게 맞으며 고난을 당한다 하였노라.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을 인함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을 인함이라. 그가 징계를 받음으로 우리가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우리가 나음을 입었도다”고 했습니다. 이사야 선지자는 예언하기를 “그는 실로 우리의 질고를 지고 우리의 슬픔을 당하였다”고 했습니다.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을 인함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을 인함이라”고 했습니다. 시편 기자는 고난 받는 종의 모습을 하나님으로부터 버림 당하는 것으로 말하였습니다. 시편 22:1-2절을 보면 “내 하나님이여! 내 하나님이여! 어찌 나를 버리셨나이까. 어찌 나를 멀리하여 돕지 아니하옵시며, 내 신음하는 소리를 듣지 아니하시나이까. 내 하나님이여 내가 낮에도 부르짖고 밤에도 잠잠치 아니하오나 응답지 아니하시나이다”고 했습니다. 이 모두는 하나님께서 죄인된 인간을 반드시 징벌하신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 하나님의 징벌하심이 얼마나 엄한 것이며, 그래서 반드시 모든 인간에게 내려지는 것인가 하는 사실을 예수님에게서 보이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죄악을 그에게 담당시키셨습니다. 예수님은 도수장에 끌려가는 어린 양과 같이 되어 곤욕과 심문을 당하셨습니다. 이사야 53:6-8절을 보면 “우리는 다 양 같아서 그릇 행하여 각기 제 길로 갔거늘 여호와께서는 우리 무리의 죄악을 그에게 담당시키셨도다. 그가 곤욕을 당하여 괴로울 때에도 그 입을 열지 아니하였음이여 마치 도수장으로 끌려가는 어린 양과 털 깎는 자 앞에 잠잠한 양같이 그 입을 열지 아니하였도다. 그가 곤욕과 심문을 당하고 끌려 갔으니. 그 세대 중에 누가 생각하기를 그가 산 자의 땅에서 끊어짐은 마땅히 형벌 받을 내 백성의 허물을 인함이라 하였으리요”라고 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나님이 인간을 징벌하시는 그 심판에 순종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그리하신 것은 거기에 하나님의 계획과 뜻이 있음을 아셨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이스라엘을 대신하여 고난을 짊어지심으로써 그들이 치료받는 일이 있게 되고, 평화를 누리게 되기 때문입니다.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을 인함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을 인함이라. 그가 징계를 받음으로 우리가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우리가 나음을 입었도다”(사 53:5). 할렐루야!

 

예수님께서 고난 당하는 종으로 묘사되고 있는 데에는 고난 당하는 그 사실 자체에 있지 않습니다. 마태는 그것을 알려주고자 했습니다. 하나님의 징벌을 받아서 질고를 당하며 슬픔을 당하는 고난의 종은 또한 하나님의 주권적인 능력에 의해서만 그의 백성을 구원하여 가신다고 하는 사실을 계시하여 주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많은 병자와 귀신들린 자를 고치신 일이 왜 있는가를 이사야 선지자의 예언을 이루기 위함이라고 하였습니다. 예수님께서 이적을 행하시는 능력에서 그 사실을 말해 주고자 했던 것입니다. 이사야 선지자도 그 사실을 말했습니다. 이사야 53:10절을 보면 “여호와께서 그로 상함을 받게 하시기를 원하사 질고를 당케 하셨은즉 그 영혼을 속건 제물로 드리기에 이르면 그가 그 씨를 보게 되며 그 날은 길 것이요, 또 그의 손으로 여호와의 뜻을 성취하리로다”라고 했습니다. 이사야 선지자는 하나님의 뜻이 어느 때인가를 내다보았습니다. 도수장으로 끌려가는 어린 양, 그리고 속건제물이란 말에서 보여 주고 있는데 예수님께서 제사장으로서 제사를 집행하여 나가신다고 하는 것입니다(히 7장). 예수님은 자신의 몸을 드려 희생당함으로써 제사에 언약된 하나님의 뜻을 다 이루셨습니다. 따라서 마태가 예수님의 이적 행함과 함께 기록하고 있는 “우리 연약한 것을 친히 담당하시고 병을 짊어지셨도다”(마 8:17)고 하는 말씀은 예수님께서 그리스도로서 하나님의 주권적인 능력을 행하여 마귀의 권세를 물리치시고 죄에서 구원하여 나가시는데 그리스도로서 또한 십자가의 고난과 죽음에 의한 구속에 비추어 말하여 주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은 궁극적으로 십자가의 구속 사역에서 그 모든 사실을 보고 알아야 했습니다. 성령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은혜를 베푸사 우리로 예수님이 우리의 구속주가 되심을 알게 하여 주시기를 원합니다. 그리하여 우리가 이 예수님을 믿음으로 구속함을 받고 우리 가운데 하나님의 나라가 충만히 임하게 하여 주시기를 원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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