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세기 39장] 요셉의 형통!

by 손재호 posted May 10, 20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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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 손재호
성경본문 창 39:1-23
성경본문내용 (1)요셉이 이끌려 애굽에 내려가매 바로의 신하 시위대장 애굽 사람 보디발이 그를 그리로 데려간 이스마엘 사람의 손에서 그를 사니라(2)여호와께서 요셉과 함께 하시므로 그가 형통한 자가 되어 그 주인 애굽 사람의 집에 있으니(3)그 주인이 여호와께서 그와 함께 하심을 보며 또 여호와께서 그의 범사에 형통케 하심을 보았더라(4)요셉이 그 주인에게 은혜를 입어 섬기매 그가 요셉으로 가정 총무를 삼고 자기 소유를 다 그 손에 위임하니(5)그가 요셉에게 자기 집과 그 모든 소유물을 주관하게 한 때부터 여호와께서 요셉을 위하여 그 애굽 사람의 집에 복을 내리시므로 여호와의 복이 그의 집과 밭에 있는 모든 소유에 미친지라(6)주인이 그 소유를 다 요셉의 손에 위임하고 자기 식료 외에는 간섭하지 아니하였더라 요셉은 용모가 준수하고 아담하였더라(7)그 후에 그 주인의 처가 요셉에게 눈짓하다가 동침하기를 청하니(8)요셉이 거절하며 자기 주인의 처에게 이르되 나의 주인이 가중 제반 소유를 간섭지 아니하고 다 내 손에 위임하였으니(9)이 집에는 나보다 큰이가 없으며 주인이 아무 것도 내게 금하지 아니하였어도 금한 것은 당신 뿐이니 당신은 자기 아내임이라 그런즉 내가 어찌 이 큰 악을 행하여 하나님께 득죄하리이까(10)여인이 날마다 요셉에게 청하였으나 요셉이 듣지 아니하여 동침하지 아니할 뿐더러 함께 있지도 아니하니라(11)그러할 때에 요셉이 시무하러 그 집에 들어갔더니 그 집 사람은 하나도 거기 없었더라(12)그 여인이 그 옷을 잡고 가로되 나와 동침하자 요셉이 자기 옷을 그 손에 버리고 도망하여 나가매(13)그가 요셉이 그 옷을 자기 손에 버려두고 도망하여 나감을 보고(14)집 사람들을 불러서 그들에게 이르되 보라 주인이 히브리 사람을 우리에게 데려다가 우리를 희롱하게 하도다 그가 나를 겁간코자 내게로 들어오기로 내가 크게 소리질렀더니(15)그가 나의 소리질러 부름을 듣고 그 옷을 내게 버려두고 도망하여 나갔느니라 하고(16)그 옷을 곁에 두고 자기 주인이 집으로 돌아 오기를 기다려(17)이 말로 그에게 고하여 가로되 당신이 우리에게 데려온 히브리 종이 나를 희롱코자 내게로 들어 왔기로(18)내가 소리질러 불렀더니 그가 그 옷을 내게 버려두고 도망하여 나갔나이다(19)주인이 그 아내가 자기에게 고하기를 당신의 종이 내게 이같이 행하였다 하는 말을 듣고 심히 노한지라(20)이에 요셉의 주인이 그를 잡아 옥에 넣으니 그 옥은 왕의 죄수를 가두는 곳이었더라 요셉이 옥에 갇혔으나(21)여호와께서 요셉과 함께 하시고 그에게 인자를 더하사 전옥에게 은혜를 받게 하시매(22)전옥이 옥중 죄수를 다 요셉의 손에 맡기므로 그 제반 사무를 요셉이 처리하고(23)전옥은 그의 손에 맡긴 것을 무엇이든지 돌아보지 아니하였으니 이는 여호와께서 요셉과 함께 하심이라 여호와께서 그의 범사에 형통케 하셨더라
강설날짜 2009-05-10

2009년 5월 10일 설교


요셉의 형통


말씀:창세기 39:1-23

우리는 창세기 36장에서 에서와 그 후손들의 형통을 살펴보았습니다. 에돔과 그 후손들의 형통이라는 것은 사람들의 관점 곧 세상적 관점에서의 형통이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백성들의 형통은 이러한 세상의 관점에서의 형통이 아니라, 하나님의 언약이 어느 쪽으로 역사하고 흘러가고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세상에서의 고난이냐 형통이냐 하는 것이 문제가 아니라, 하나님의 뜻이 누구에게 이루어지는가를 봐야 합니다. 우리는 요셉의 인생의 결과를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고진감래’라는 식으로 요셉의 인생을 보면 성경이 정작 말하고자 하는 바를 놓치게 됩니다. 그러면 요셉의 형통이 무엇입니까? 우리는 오늘 말씀을 통해 요셉의 형통이 무엇인지를 살펴보는 가운데 성경이 말하는 형통에 대해서 살펴보고자 합니다.

결론적으로 말하자면 요셉의 형통은 하나님께서 함께하심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여기서 혼란을 느끼게 됩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생각하는 형통과 하나님의 형통이 다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일반적으로 형통하다는 것은 어떤 것입니까? 어려움이 없이 일이 잘 풀려가는 것입니다. 그러나 요셉의 인생을 보면 어떻습니까? 형들에게 미움을 받아 노예로 팔려가 종살이 합니다. 나중에 보면 억울한 누명을 쓰고 옥에 갇히기도 합니다. 우리가 생각하는 형통이라는 관점에서 보면 이런 요셉의 인생은 전혀 형통하지 않아 보입니다. 하나님께서 함께하시며 형통하다고 하는데 왜 요셉이 형들에게 팔려서 노예가 되고, 종살이를 하는가 하는 것입니다. 물론 결론적으로 요셉이 애굽의 총리가 되지만 우리가 그렇게만 보지 말고 지금 요셉의 입장에서 생각해 보자는 것입니다. 애굽의 총리가 될지를 전혀 모르는 상황에서 현재 고난당하는 요셉의 입장에서 보자는 것입니다. 우리는 성경을 볼 때 이미 그 결론을 가지고 보고 있기 때문에 성경의 풍성함을 맛보지 못할 때가 너무나 많습니다. 성경의 한 인물을 두고서도 하나님이 그를 어떻게 인도하셨으며, 그를 통하여 하나님의 뜻이 어떻게 나타나는가? 그리고 오늘날 우리에게 무엇을 말씀하시고 계시는가? 이런 면을 묵상하면서 보기보다 결론적으로만 보면 그 사건과 그 말씀을 통해 계시하시고자 하시는 하나님의 계시를 바르게 이해할 수 없는 것입니다. 또한 하나님의 계시를 풍성히 맛보지 못하게 됩니다. 그러므로 현재 요셉의 입장에서 보고자 합니다.

창세기 39:1-6절을 보면 요셉이 노예로 팔려간 집이 바로의 시위대장 보디발의 집입니다. 요셉이 이 집에 노예로 팔려간 때의 나이가 17세 정도로 봅니다. 37:2절에 보면 “그 형제와 함께 양을 칠 때의 나이가 십 칠세라”고 하고 있습니다. 그때에 꿈을 꾸었고, 그 꿈을 이야기하고 미움을 받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노예로 팔려간 나이가 17세나 아니면 그보다 한두 살 정도 더 되었을 것으로 봅니다. 그런데 이 요셉을 노예로 사서 그 집안에서 일을 시키니 꾀를 부리거나 하지 않고 성실하게 일하는 것입니다. 이 모습이 주인의 눈에 띄었습니다. 그리고 요셉이 들어오고서 보디발의 집이 복을 받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그 집주인이 요셉에게 모든 재산의 관리를 다 맡깁니다. 이렇게 되기까지는 약 10년 정도로 보고 있습니다.

우리는 요셉이 하루아침에 하나님이 함께 하시니 형통하여 주인의 인정을 받았다 이렇게 볼 수는 없는 것입니다. 그런 식으로 형통을 본다면 아예 노예로 팔리지 않는 것이 훨씬 형통한 것입니다. 그런데 요셉의 형통은 2-3절에서 보면 하나님이 함께 하심이며, 이것을 하나님을 알지도 못하는 보디발이 보아도 알 수 있을 만큼 요셉을 범사에 형통케 하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4-5절에 보면 주인에게 은혜를 입어 주인의 모든 가정을 맡아서 섬기는 총무가 되었습니다. 주인은 요셉에게 가정의 모든 살림을 맡기고 주관하게 하였습니다. 그때부터 여호와께서 요셉을 위하여 애굽 사람의 집에 복을 내리셨습니다. 여호와의 복이 그 집과 밭에 있는 모든 소유에 미치게 되었습니다. 6a절에 보면 주인은 자기 식료 외에 모든 소유를 요셉에게 위임하고 간섭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그러한 형통에도 불구하고 요셉은 여전히 노예 신분에서 벗어나지 못했습니다.

요셉이 하나님께서 함께 하심으로 주인에게 인정을 받고 가정 총무가 되었지만 그로 인해 그에게 또다른 유혹이 닥칩니다. 6b절에 보면 “요셉은 용모가 준수하고 아담하였더라”고 했습니다. 한마디로 꽃미남이라는 것입니다. 아마 ‘꽃보다 남자’의 구준표를 뛰어넘었던 것 같습니다. 당시 요셉의 나이가 20대 중반으로 본다면 얼마나 젊음의 열기가 왕성할 때 입니까? 이때 주인의 아내가 유혹을 합니다. 7절에 보면 보디발 여사가 요셉에게 은근한 눈짓을 합니다. 요셉이 거절하자 더욱 더 노골적으로 접근을 합니다. 한두 번이 아니라 날마다 요셉에게 동침을 요구합니다. 이때 요셉의 반응이 어떠하였습니까? 8-10절을 보면 “요셉이 거절하며 자기 주인의 처에게 이르되 나의 주인이 가중 제반 소유를 간섭지 아니하고 다 내 손에 위임하였으니. 이 집에는 나보다 큰이가 없으며 주인이 아무 것도 내게 금하지 아니하였어도 금한 것은 당신뿐이니 당신은 자기 아내임이라. 그런즉 내가 어찌 이 큰 악을 행하여 하나님께 득죄하리이까. 여인이 날마다 요셉에게 청하였으나 요셉이 듣지 아니하여 동침하지 아니할 뿐더러 함께 있지도 아니하니라”고 했습니다. “내가 이 큰 악을 행하여 어찌 하나님께 득죄하리이까?” 이것이 요셉의 자세입니다. 요셉은 하나님 앞에 득죄하지 않기 위해 아예 여주인과 함께 있지도 않았습니다. 상종치도 않고 피해 버렸습니다.

그런데 보디발 여사는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이에 보디발 여사가 어떻게 합니까? 11-12절에 보면 “그러할 때에 요셉이 시무하러 그 집에 들어갔더니 그 집 사람은 하나도 거기 없었더라. 그 여인이 그 옷을 잡고 가로되 나와 동침하자 요셉이 자기 옷을 그 손에 버리고 도망하여 나가매”라고 했습니다. 보디발 여사가 아예 요셉에게 육탄 돌격을 한 것입니다. 보디발 여사가 종들을 다 집안에서 내보냈는지 아니면 무슨 일이 있어서 다 바깥으로 나갔는지 마침 집에 요셉 외에 아무도 없었습니다. 보디발 여사는 그 틈을 이용하여 요셉에게 육탄 돌격을 한 것입니다. 그러나 요셉은 보디발 여사가 옷을 붙잡고 늘어지자 그 겉옷을 벗어두고 도망쳐버렸습니다.

요셉이 겉옷을 벗어두고 도망가는 것을 보고 보디발 여사가 자존심이 몹시 상하였습니다. 그 때 보디발 여사가 무엇을 하였습니까? 이제 끝났다고 생각하고 사랑이 증오로 바뀌어 요셉을 모함하는 것입니다. 14-18절에 보면 “집 사람들을 불러서 그들에게 이르되 보라 주인이 히브리 사람을 우리에게 데려다가 우리를 희롱하게 하도다. 그가 나를 겁간코자 내게로 들어오기로 내가 크게 소리질렀더니. 그가 나의 소리질러 부름을 듣고 그 옷을 내게 버려두고 도망하여 나갔느니라 하고, 그 옷을 곁에 두고 자기 주인이 집으로 돌아오기를 기다려 이 말로 그에게 고하여 가로되 당신이 우리에게 데려온 히브리 종이 나를 희롱코자 내게로 들어 왔기로 내가 소리질러 불렀더니. 그가 그 옷을 내게 버려두고 도망하여 나갔나이다”고 하였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볼 때 요셉이 잘못한 것이 있습니까? 요셉이 무엇을 잘못한 것입니까? 여호와 하나님 앞에 죄를 짓지 않고자 한 것뿐입니다.

그런데 요셉에게 어떤 일이 일어나는 것입니까? 19-20절에 보면 보디발이 보디발 여사의 거짓말을 듣고 심히 노하여 요셉을 잡아 옥에 넣어버렸습니다. 하나님 앞에서 죄를 짓지 않으려고 하는데 왜 이런 일이 일어나는 것입니까? 하나님이 함께 하셔서 형통케 하신다고 하시면서도 왜 이런 일이 일어나는 것입니까? 그러므로 여기서 형통이란 무엇입니까? 우리는 여기서 말하는 형통이 하나님이 함께 하심이 형통이고, 하나님이 함께 하심으로 하나님 앞에서 죄를 범할 수 없다고 하는 것이 형통임을 알 수 있습니다. 곧 그로 인하여 애매히 고난 받는 것이 형통입니다. 우리가 이런 것이 형통이라고 할 때 언듯 잘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우리 머리 속에 기억하고 있는 형통이라는 개념과 다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성경에서 말하는 하나님의 함께 하심의 형통이란 반드시 악한 세상에서 모함을 받고 핍박을 받고 죽임을 당하는 것으로 나타납니다. 디모데후서 3:12절에 보면 “무릇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경건하게 살고자 하는 자는 핍박을 받으리라”고 했습니다.  

결국 요셉은 보디발 여사의 모함을 받아 감옥에 갇히게 되었습니다. 왕의 죄수들을 가두는 감옥에 갇히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사실 요셉이 감옥에 갇힌 것은 하나님의 놀라운 은혜요, 섭리였습니다. 사실 요셉은 감옥에 갇힐 수도 없었던 자였습니다. 감히 노예가 여주인을 농락했다는 것은 즉결처분하여도 누가 뭐라고 말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놀라운 은혜와 섭리로 요셉이 왕의 죄수들이 갇히는 옥에 갇히게 된 것입니다. 보디발이 요셉을 바로 죽이지 않고 감옥에 가두어 버린 것은 아마 평소에 요셉의 신실함을 보았기 때문일 것입니다. 또한 아내의 말을 온전히 믿지 않았기 때문이었을 것입니다. 어찌되었든 요셉은 하나님 앞에서 죄를 범하지 않으려고 하다가 감옥에 갇히게 된 것입니다. 혹시 우리는 이런 일을 당하지 않았습니까? 하나님 앞에서 바르게 살려고 하다가 고난을 당한 경험이 없습니까? 말씀대로 살려고 하다가 당하는 고난이 없었습니까? 지금은 핍박을 받는 시대가 아니라서 그런 고난이 없다고 생각하십니까? 결코 아닙니다. 지금도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아보십시오. 당장 고난이 산더미처럼 밀려 올 것입니다. 우리에게 고난이 없는 것은 아직 믿음이 연약하여 감당치 못하기에 오지 않든가, 아니면 아예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지 않기 때문에 오지 않던가, 둘 중에 하나일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다가 고난을 당했을 때 어떤 마음이 들었습니까? 하나님이 살아계신다면 어찌 이런 일이 일어나는가 하지 않았습니까? 지금 요셉은 하나님 앞에서 죄를 범하지 않으려다가 억울하게 옥살이를 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성경은 이런 상황을 두고서 무어라고 하고 있습니까? 21-23절을 보면 “하나님이 함께 하시고 전옥에게 은혜를 입게 하시고 감옥에서 하나님이 요셉과 함께 하시니 그의 범사에 형통하였더라”고 했습니다. 성경은 이러한 사실을 두고 ‘형통하였더라’고 합니다. 그런데 이것이 무슨 형통입니까? 우리가 생각하는 형통이란 노예로 팔리지도 않고, 감옥에도 안가야지 노예로서 형통한들, 감옥에서 형통한들 그것이 무슨 형통으로 보이는 것입니까? 요셉의 입장이 되어 보시기 바랍니다. 지금 이 성경을 요셉이 기록하지 않습니다. 우리가 알기로는 모세의 기록으로 압니다. 그런데 요셉의 이런 감옥에서의 일을 모세가 하나님의 감동을 받아서 기록할 때 형통하였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이러한 요셉의 형통이란 개인의 성공과 출세의 문제가 아니라,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는 것이 형통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요셉에게 두신 그 뜻이 무엇입니까? 형제들의 주가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형제들의 주가 되는 그 길은 섬기는 주, 희생당하는 주가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요셉은 노예로 팔려갔지만 그 집이 요셉까닭에 잘되는 것입니다. 이러한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는 것을 성경은 형통이라고 합니다. 그런데도 우리는 하나님이 함께 하시니 노예라도, 감옥에 가더라도 잘된 것 아닌가 그렇게 생각합니다만 그러나 요셉의 고난을 시편에서는 어떻게 말합니까? 시편 105:16-19절을 보면 “그가 또 기근을 불러 그 땅에 임하게 하여 그 의뢰하는 양식을 다 끊으셨도다. 한 사람을 앞서 보내셨음이여! 요셉이 종으로 팔렸도다. 그 발이 착고에 상하며, 그 몸이 쇠사슬에 매였으니. 곧 여호와의 말씀이 응할 때까지라. 그 말씀이 저를 단련하였도다”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이 한사람을 먼저 보내셨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어떤 모습입니까? 하나님이 함께 하시고 먼저 보내시는 사람이라면 좀더 우아하고 멋있게 보내셔서 구원하셔도 되실 텐데 왜 꼭 그런 고난 받는 모습으로 보내시는가 하는 것입니다. 종으로 팔리고, 그 발이 착고에 상하며, 그 몸이 쇠사슬에 매였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하나님의 일하심을 보게 될 때 우리가 어떻게 하나님의 은혜를 입게 되는가를 알게 됩니다. 요셉은 착고에 상하고 발을 쇠고리로 묶어서 도망 못 가게 하는 것입니다. 노예들을 쇠사슬에 묶어서 끌고 가서 팔지 않습니까? 그리고 감옥에서도 착고와 쇠사슬에 묶이는 것입니다. 그러나 나중에 간수장의 인정을 받아서 제반 사무를 보게 됩니다만 그러나 요셉의 고난이란 이루 말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고난을 말하면서 성경은 형통하였더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러한 형통이란 무엇입니까? 시편 105:19절을 다시 보면 “곧 여호와의 말씀이 응할 때까지라. 그 말씀이 저를 단련하였도다”라고 했습니다. 요셉의 형통이란 하나님의 말씀이 저에게 응하는 것입니다. 그 말씀이 요셉을 단련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요셉의 형통입니다. 요셉이 형제들의 주가 되었을 때 그 말씀의 단련의 결과가 어떻게 나타났습니까? 창세기 45:5절에 보면 “당신들이 나를 이곳에 팔았으므로 근심하지 마소서 한탄하지 마소서 하나님이 생명을 구원하시려고 나를 당신들 앞서 보내셨나이다”라고 했습니다. 형님들이 악하게 나를 파셨지만 그러나 하나님이 그렇게 허락하신 것은 나를 통하여 형들을 살리기 위함이라고 그 고난의 의미를 알게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이러한 요셉의 고난을 보면서 그 고난이 하나님의 형통이라고 보아야 예수님의 고난의 의미를 제대로 알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고난은 자신의 잘못으로 인한 고난이 아닙니다. 요셉이 자신의 잘못으로 노예로 팔린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계시를 인하여 팔리게 된 것입니다. 그러므로 요셉의 고난이란 하나님의 말씀의 성취를 인한 대속적 고난인 것입니다. 이것을 요셉을 통하여 보여 주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오늘날 성도들에게도 이러한 고난이 얼마든지 오게 됩니다. 그런데 그 고난이 무엇을 하기 위한 고난입니까? 하나님의 말씀이 응하기 위하여, 곧 하나님의 말씀이 이루어지기 위하여 닥치는 고난인 것입니다. 주님을 사랑하여야 하는데 자꾸만 세상을 사랑할 때 고난을 주시는 것입니다. 주님보다 귀한 것들이 있다면 그런 것을 제거하시는 고난인 것입니다. 마치 포도나무가 과실을 잘 맺게 하기 위해 가지를 치듯이 그런 고난인 것입니다.

그런데 한걸음 더 나아가서 내가 잘못하지 않았는데도 고난이 닥칠 수 있습니다. 나의 희생을 통하여 하나님의 하실 일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이유 없이 고난이 닥치더라도 놀라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러한 고난을 통하여서 하나님은 자신의 뜻을 이루시기에 우리 안에 주님의 뜻이 이루어지는 것이 형통입니다. 우리는 그동안 만사형통이라는 말을 그저 내하는 일이 어려움 없이 술술 잘 풀려 나가는 것으로만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만사형통이란 하나님의 뜻이 내 안에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경에서 말하는 형통이란 세상의 실패와 성공의 문제가 아닙니다. 주님의 뜻이 내안에 이루어지는 것이 형통인 것입니다. 우리가 잘 아는 찬송가 434장에서 ‘나의 갈길 다가도록 예수 인도하시니. 내 주안에 있는 긍휼 어찌 의심하리요. 믿음으로 사는 자는 하늘위로 받겠네. 무슨 일을 만나든지 만사형통하리라. 무슨 일을 만나든지 만사형통하리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이 찬송을 작사한 사람이 누구인지 아십니까? ‘크로스비’라는 사람인데 어려서 장님이 된 여인입니다. 그런데 장님이 되었는데 무슨 만사가 형통하겠습니까? 만사가 불통하지요. 그런데 크로스비 여사는 무슨 일을 만나든지 만사형통하리라고 노래하는 것입니다. 그녀는 주님의 긍휼을 안 것입니다. 주님의 은혜가 족한 줄 안 것입니다. 육신은 고난 가운데 있지만 반석에서 샘물이 나게 하시는 주님을 안 것입니다. 그러므로 영영 부를 나의 찬송이 주님이 인도하셨다는 것을 인하여 만사형통하다는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는 무엇에 불평과 원망이 있습니까? 우리가 믿는 하나님과 크로스비 여사가 믿는 하나님이 다릅니까? 장님이 되어도 주의 은혜가 족한 줄 알고 주님의 긍휼에 감사하면서 만사 형통하다고 감사하면서 가는데, 우리는 두 눈 뜨고 원망하고 가니 이 어찌 같은 주를 믿는다고 할 수 있는 것입니까? 우리는 눈을 뜨고 있습니다. 사지가 멀쩡합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크로스비 여사보다 훨씬 더 감사해야 하는 것 아닙니까? 장님이 안 되고도 주님의 은혜를 알았다면 얼마나 더 큰 감사를 하여야 합니까? 우리는 우리 앞에 닥치는 세상의 사소한 일들로 인하여 하나님의 은혜를 놓쳐서는 안 됩니다. 우리의 당하는 어떠한 고난과 환난들이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기에 모든 것들 가운데서도 우리는 만사형통을 노래해야 하는 것입니다. 로마서 8:18-28절을 보면 “생각건대 현재의 고난은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과 족히 비교할 수 없도다. 피조물의 고대하는 바는 하나님의 아들들의 나타나는 것이니. 피조물이 허무한데 굴복하는 것은 자기 뜻이 아니요, 오직 굴복케 하시는 이로 말미암음이라. 그 바라는 것은 피조물도 썩어짐의 종노릇 한데서 해방되어 하나님의 자녀들의 영광의 자유에 이르는 것이니라. 피조물이 다 이제까지 함께 탄식하며 함께 고통하는 것을 우리가 아나니. 이뿐 아니라 또한 우리 곧 성령의 처음 익은 열매를 받은 우리까지도 속으로 탄식하여 양자 될 것 곧 우리 몸의 구속을 기다리느니라. 우리가 소망으로 구원을 얻었으매 보이는 소망이 소망이 아니니 보는 것을 누가 바라리요, 만일 우리가 보지 못하는 것을 바라면 참음으로 기다릴찌니라. 이와 같이 성령도 우리 연약함을 도우시나니 우리가 마땅히 빌 바를 알지 못하나 오직 성령이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를 위하여 친히 간구하시느니라. 마음을 감찰하시는 이가 성령의 생각을 아시나니 이는 성령이 하나님의 뜻대로 성도를 위하여 간구하심이니라. 우리가 알거니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고 했습니다. 지금 당하는 고난은 장차 나타날 영광과 족히 비교할 수 없습니다. 성도에게 일어나는 모든 일은 합력하여 선을 이룹니다. 만사형통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선이란 무엇입니까? 아들의 형상을 본받는 것입니다. 이것이 요셉의 형통이며, 우리의 형통입니다. 성령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은혜를 주셔서 성경이 말하는 진정한 형통의 의미를 알게 하여 주시기를 원합니다. 그리하여 모든 것을 합력하여 선을 이루실 하나님을 믿고, 어떤 상황 가운데서도 믿음으로 살게 하여 주시기를 원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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