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가복음 9장] 영광스러운 모습으로 변형되신 예수님

by 손재호 posted May 08, 2016
?

단축키

Prev이전 문서

Next다음 문서

ESC닫기

크게 작게 위로 아래로 댓글로 가기 인쇄
Extra Form

2016년 마가복음 공부

 

영광스러운 모습으로 변형되신 예수님

 

말씀:마가복음 9:1-13

 

오늘 말씀은 예수님께서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 등 세 사람만 데리고 높은 산에 올라가셔서 변형되신 사건입니다. 1절을 보면 “또 저희에게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여기 섰는 사람 중에 죽기 전에 하나님의 나라가 권능으로 임하는 것을 볼 자들도 있느니라 하시니라”고 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베드로의 신앙 고백을 들으신 후에 비로소 고난을 받고 종교지도자들에게 버림을 받아 죽임을 당하고 사흘만에 살아나야 할 것과 제자도에 대해서 말씀해 주셨습니다(막 8:27-38). 그러신 후에 오늘 본문 1절에서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죽기 전에 하나님의 나라가 권능으로 임하는 것을 볼 자들도 있을 것이라고 하십니다.

 

그러면 여기서 ‘하나님 나라가 권능으로 임한다’는 말은 무엇을 의미할까요? 이것은 예수님의 재림에 관한 말은 아닐 것입니다. 왜냐하면 만약 이 말씀이 재림에 관한 이야기라면 이 예언의 말씀은 이루어질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이 말씀을 들은 제자들 중에 재림을 본 사람은 한 명도 없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 나라가 권능으로 임한다’는 표현은 독자들의 선입관을 통해 이해되어서는 안됩니다. 그 표현이 사용된 용례를 통해서나 문맥을 통해 이해되어야 합니다. ‘하나님 나라’는 하나님의 통치를 가리키는 말이므로 문맥에 따라 다양한 뜻을 가리킬 수 있습니다. 본문에서 ‘하나님 나라가 권능으로 임한다’는 표현은 예언과 성취의 구조를 가진 것으로 볼 수 있는 1-8절의 문맥상 곧 이어지는 높은 산에서의 변화된 사건과 관계가 됩니다.

 

2-8절 말씀은 1절에 기록된 예언의 성취를 다루고 있습니다. 1절에서 언급된 하나님의 나라가 능력 있게 임함을 목격할 몇 명에 해당하는 자는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임이 2절에서 밝혀집니다. 그들은 죽기 전에 하나님의 나라가 권능으로 임하는 것을 볼 것이라는 예언대로 엿새 후에 이 예언된 사건을 목격합니다. 2-3절을 보면 “엿새 후에 예수께서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을 데리시고 따로 높은 산에 올라가셨더니. 저희 앞에서 변형되사 그 옷이 광채가 나며 세상에서 빨래하는 자가 그렇게 희게 할 수 없을 만큼 심히 희어졌더라”고 했습니다. 예수님은 자신이 예루살렘에 올라가 작정된 죽임을 당한 후 삼일 만에 다시 살아나실 것을 예언한지 엿새 후에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만 데리시고 따로 높은 산으로 올라가셨습니다. 병행구절인 누가복음 9:28-29절에 보면 “이 말씀을 하신 후 팔일쯤 되어 예수께서 베드로와 요한과 야고보를 데리시고 기도하시러 산에 올라가사 기도하실 때에 용모가 변화되고 그 옷이 희어져 광채가 나더라”고 했습니다. 여기서 보면 “이 말씀을 하신 후 여드레 후에”라고 되어 있습니다. 예수님과 세 제자가 높은 산으로 올라가신지 이틀의 시간이 지났음을 이야기 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 세 제자들을 데리고 높은 산으로 올라가신 이유는 기도하러 올라가셨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기도하는 동안 그들 앞에서 변형되셨습니다. 예수님의 모습이 영광스럽게 변한 것입니다. 그때 예수님의 모습은 광채가 났는데 얼굴은 해와 같이 빛나고 그 입으신 옷은 이 세상에서 빨래하는 자가 그렇게 희게 할 수 없을 만큼 눈부시게 희고 빛났습니다. 세 제자들은 영광스러운 모습으로 변형되신 예수님을 보았습니다.

 

1절에서 예언한 “하나님 나라가 권능으로 임하는 것을 보리라”는 예언이 성취 되었습니다. 세 명의 제자들은 영광스러운 모습으로 변형되신 예수님의 모습을 보았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4절을 보면 엘리야와 모세가 변형되신 예수님과 더불어 말씀을 나누는 장면도 보았습니다. 그런데 8절에 보면 마가복음의 저자는 “문득 둘러보니 아무도 보이지 아니하고 오직 예수와 자기들뿐이었더라”고 합니다. 이 말씀은 그동안 제자들이 엘리야와 모세를 보았음을 전제로 한 표현입니다. 9절에 보면 예수님께서는 그 본 것을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 세 명의 제자들은 엘리야와 모세만 본 것이 아니라 영광스럽게 변형되신 예수님을 보았습니다. 엘리야와 모세가 변형되신 예수님과 대화하는 것을 봤습니다.

 

1절의 예언의 말씀이 2-8절에서 성취되었다면 제자들이 본 예수님의 변형되신 모습은 곧 하나님의 나라가 능력 있게 임하는 사건입니다. 예수님께서 천상적인 모습으로 변형되신 것이 어떻게 하나님 나라가 임함과 동일시 될 수 있는 것입니까? 9절에 그 단서가 있습니다. 9절을 보면 “저희가 산에서 내려 올 때에 예수께서 경계하시되 인자가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날 때까지는 본 것을 아무에게도 이르지 말라 하시니”라고 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세 제자들에게 산에서 내려올 때에 인자가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날 때까지는 본 것을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 것을 경계하셨습니다. 곧 세 명의 제자들은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죽으시고 부활할 때까지 변형되신 예수님을 본 것을 비밀로 해야 했습니다. 그런데 그들이 이 사실을 비밀로 해야 하는 기간이 예수님이 부활할 때까지라고 했습니다. 다시 말하면 예수님께서 부활하게 되면 제자들이 본 것이 더 이상 비밀이 되지 않는다는 말입니다. 그러므로 제자들이 높은 산에서 본 영광스럽게 변형되신 예수님의 모습은 예수님의 부활과 밀접한 관련이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세 제자들은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변화하시게 될 모습을 미리 본 것입니다. 하나님의 나라가 능력 있게 임하는 사건은 예수님의 부활과 관련됩니다. 부활은 하나님 나라가 능력 있게 임하는 사건입니다. 마가복음 1:15절에서 “하나님 나라가 가까이 왔다”는 선포는 예수님의 부활을 통하여 성취됩니다. 예수님의 부활과 함께 하나님의 통치의 새 시대가 열리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높은 산에서 세 제자들 앞에서 변형되신 이 사건에는 출애굽의 주제가 가득 담겨져 있습니다. 이 사건에는 예수님과 함께 산에 오른 세 명의 제자들 곧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이 특별히 언급되었습니다(2). 이것은 모세와 함께 여호와께 경배하러 올라간 자들 중에 아론과 나답과 아비후 세 명이 특별히 언급되는 것과 유사합니다. 출애굽기 24:1절에 보면 “또 모세에게 이르시되 너는 아론과 나답과 아비후와 이스라엘 장로 칠십인과 함께 여호와에게로 올라와 멀리서 경배하고”라고 했습니다. 또 출애굽기 24:9절에 보면 “모세와 아론과 나답과 아비후와 이스라엘 장로 칠십인이 올라가서”라고 했습니다.

 

오늘 본문 2절에 나오는 ‘엿새 후에’라는 표현도 출애굽기 24:16절에 언급되는 ‘육일 동안’이라는 말과 평행을 이루고 있습니다. 출애굽기 24:16절을 보면 “여호와의 영광이 시내산 위에 머무르고 구름이 육일 동안 산을 가리더니. 제 칠일에 여호와께서 구름 가운데서 모세를 부르시니라”고 했습니다. 오늘 본문 7절에 언급되고 있는 ‘구름’도 출애굽기 24:16절에 등장합니다. 출애굽기 25:1절부터는 하나님께서 직접 말씀하시는데 오늘 본문 7절에서도 하나님께서 친히 말씀하십니다. 7절을 보면 “마침 구름이 와서 저희를 덮으며 구름 속에서 소리가 나되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니. 너희는 저의 말을 들으라 하는지라”고 했습니다. 이러한 유사성으로 인해서 본문을 읽는 독자들에게는 특히 유대인들에게는 자연스럽게 출애굽기 24장의 사건이 생각나게 될 것입니다. 그리하여 본문에 담긴 예수님께서 변형되신 사건은 출애굽기 본문과의 연관 속에서 새 출애굽과 관련된 사건으로 이해하게 될 것입니다. 마가는 이 사건을 통해 독자들이 이렇게 이해하도록 본문을 기록했을 것입니다.

 

그러면 이 놀라운 광경을 본 베드로의 반응이 어떠합니까? 5-6절을 보면 “베드로가 예수께 고하되 랍비여 우리가 여기 있는 것이 좋사오니. 우리가 초막 셋을 짓되 하나는 주를 위하여, 하나는 모세를 위하여, 하나는 엘리야를 위하여 하사이다 하니. 이는 저희가 심히 무서워하므로 저가 무슨 말을 할는지 알지 못함이더라”고 했습니다. 베드로가 이렇게 말한 것은 자기들 앞에 벌어진 놀라운 광경을 보고 너무 무섭고 놀라워서 뭐라고 표현해야 할지 몰라 자기도 모르게 튀어나온 말이었습니다. 다른 두 제자들도 모두 두려움에 사로잡혀 있었습니다. 여기서 초막을 만들자는 베드로의 제안도 출애굽과 연관됩니다. 초막절은 출애굽을 기억하는 절기이기 때문입니다. 레위기 23:41-44절을 보면 “너희는 매년에 칠일 동안 여호와께 이 절기를 지킬지니. 너희 대대로의 영원한 규례라. 너희는 칠월에 이를 지킬지니라. 너희는 칠일 동안 초막에 거하되 이스라엘에서 난 자는 다 초막에 거할지니. 이는 내가 이스라엘 자손을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내던 때에 초막에 거하게 한 줄을 너희 대대로 알게 함이니라. 나는 너희 하나님 여호와니라. 모세가 여호와의 절기를 이스라엘 자손에게 공포하였더라”고 했습니다. 그렇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초막에 거하는 절기를 지키는 것을 통해서 출애굽의 은혜를 기억하게 하시는 것입니다.

 

본문 속에 흐르는 출애굽 관련 주제는 7절에 담긴 하나님의 음성에서 절정에 달합니다. 7절을 보면 베드로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빛나는 구름이 그들을 덮더니 구름 속에서 음성이 들려왔습니다.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니. 너희는 저의 말을 들으라”(7). 여기서 ‘너희는 저의 말을 들으라’는 표현은 신명기 18:15절 말씀을 연상시킵니다. 신명기 18:15절을 보면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의 중 네 형제 중에서 나와 같은 선지자 하나를 너를 위하여 일으키시리니. 너희는 그를 들을지니라”고 했습니다. 여기서 ‘너희는 그를 들을지니라’는 말은 모세와 같은 선지자의 말을 들으라는 명령인데 오늘 마가복음의 본문 7절의 말씀 곧 ‘너희는 그의 말을 들으라’는 말씀은 예수님의 말을 들으라는 명령입니다. 그러므로 두 본문의 연관은 예수님을 모세와 같은 선지자 즉 새 모세로 이해하게 합니다. 예수님과 모세의 관련은 오늘 본문 4절에서 모세를 예수님의 대화상대로 언급하고 있는 점에서 더욱 분명히 드러납니다. 이제 모세와 같은 선지자가 등장하였습니다. 따라서 이제 새 출애굽이 발생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새 출애굽의 지도자 예수님은 단지 모세와 같은 선지자가 아닙니다. 하나님의 사랑하는 아들이십니다. 7절을 다시 보면 “마침 구름이 와서 저희를 덮으며 구름 속에서 소리가 나되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니. 너희는 저의 말을 들으라 하는지라”고 했습니다. 그렇습니다. 새 출애굽을 이루시는 예수님은 하나님의 사랑하시는 아들이십니다. 모세는 피조물에 불과하지만 예수님은 하나님이십니다. 시편 2:7절을 보면 “내가 영을 전하노라. 여호와께서 내게 이르시되 너는 내 아들이라. 오늘날 내가 너를 낳았도다”라고 했습니다. 이 말씀은 시편 2:2절에서 말씀하고 있는 ‘기름 부음 받은 자’를 ‘내 아들’이라고 부르고 있는 것입니다. 따라서 ‘하나님의 아들’은 메시아를 가리킵니다. 시편 2편에서 언급되는 이 메시아에게 하나님은 이방 나라를 유업으로 주신다고 하십니다. 시편 2:8절을 보면 “내게 구하라. 내가 열방을 유업으로 주리니. 네 소유가 땅 끝까지 이르리로다”라고 했습니다. 메시아는 그의 백성 곧 이스라엘을 해방시키는데 그치지 않고 온 세상을 통치하십니다. 메시아로 인하여 발생하는 새 출애굽은 옛 출애굽보다 더 크고 위대합니다.

 

오늘 본문 말씀은 예수님을 메시아로 소개하고 있습니다. 이 메시아를 통해서 새 출애굽이 일어남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또한 이 새 출애굽이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을 통해서 일어남을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9절을 다시 보면 “저희가 산에서 내려 올 때에 예수께서 경계하시되 인자가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날 때까지는 본 것을 아무에게도 이르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은 8:31절에 이어서 다시 한 번 언급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이 사실을 다시 한 번 언급하시는 것은 당시 유대인들이 군사적인 메시아관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자신의 죽음과 부활을 다시 한 번 말씀하시는 것은 제자들도 군사적인 메시아로 오해 할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고난을 당하는 메시아이십니다. 예수님은 고난을 통해서 새 출애굽을 가져 옴을 본문 말씀을 통해서 다시 한 번 확인하시는 것입니다. 새 출애굽은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을 통해서 옵니다. 이 새 출애굽을 마가복음은 ‘하나님 나라’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새 출애굽의 시대가 시작됨을 하나님 나라가 권능으로 임한다고 표현하고 있는 것입니다(1).

 

마가복음은 예수님의 메시아적 정체성을 분명히 합니다. 이러한 메시아의 정체성에 대한 증인은 다름 아닌 하나님이십니다. 마가복음 1:9-11절에 보면 예수님께서 세례 요한에게 세례를 받으시고 물에서 올라올 때 하늘에서 하나님의 소리가 들려 왔습니다. “너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라. 내가 너를 기뻐하노라”(막 1:11). 그리고 오늘 본문에서도 하늘에서 음성이 들려왔습니다.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니 너희는 저희 말을 들으라”(막 9:7). 예수님의 고난은 예기치 못한 실패가 아닙니다. 이미 예수님께서 작정하셨고 예견하신 것입니다. 마가복음 8:31절을 보면 “인자가 많은 고난을 받고 장로들과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게 버린바 되어 죽임을 당하고 사흘 만에 살아나야 할 것을 비로소 저희에게 가르치시되”라고 했습니다(9:9, 12; 10:33-34, 45; 14:21). 이러한 고난의 길은 하나님께서 예수님께 주신 사명입니다. 예수님께서 세례 요한에게 세례를 받으실 때 하늘에서 들린 음성은 예수님께서 메시아이면서 동시에 고난 받는 종임을 알려주기 때문입니다. 마가복음 1:11절에서 “내가 너를 기뻐하노라”고 하는 선언은 이사야 42:1절을 연상시키며, 고난의 종으로서의 예수님의 정체성을 알려줍니다. 하늘에서 들린 음성은 하나님의 음성으로 간주되어야 합니다. 구약성경을 보면 하나님은 하늘로부터 말씀하시기 때문입니다. 출애굽기 20:22절을 보면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너는 이스라엘 자손에게 이같이 이르라. 내가 하늘에서부터 너희에게 말하는 것을 너희가 친히 보았으니”라고 했습니다. 신명기 4:36절 말씀도 보면 “여호와께서 너를 교훈하시려고 하늘에서부터 그 음성을 너로 듣게 하시며 땅에서는 그 큰 불을 네게 보이시고 너로 불 가운데서 나오는 그 말씀을 듣게 하셨느니라”고 했습니다.

 

오늘 본문 10절을 보면 “저희가 이 말씀을 마음에 두며 서로 문의하되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는 것이 무엇일까 하고”라고 하고 있습니다. 이 말씀을 볼 때 아직까지 제자들은 메시아가 고난 받아야 한다는 것을 이해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예수님이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난다고 하신 말씀이 무슨 뜻인지 몰라 서로 의논했습니다. 제자들이 메시아가 고난 받는다는 사상을 쉽게 받아들일 수 없었던 이유 중에 하나는 당시 서기관들의 잘못된 가르침 때문이었습니다. 11절에 보면 제자들이 예수님께 묻기를 “어찌하여 서기관들이 엘리야가 먼저 와야 하리라 하나이까”라고 했습니다. 당시 서기관들은 엘리야가 먼저 와야 한다고 가르쳤습니다. 이것은 예수님의 가르침과 모순되는 것처럼 보였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엘리야가 먼저 와서 길을 예비한다면 그 뒤에 오시는 메시아가 고난 받을 이유가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제자들은 예수님께 “어찌하여 서기관들이 엘리야가 먼저 와야 하리라 하나이까”하고 물은 것입니다. 하나님의 계시의 음성을 귀로 듣고, 예수님의 영광스러운 변형되신 모습을 눈으로 확인한 제자들이 이러한 질문을 하는 이유는 예수님의 메시아 되심을 의심해서가 아닙니다. 메시아가 고난 받아야 하는 이유를 이해 할 수 없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서기관들의 가르침과 전혀 다른 가르침을 들었을 때 그것이 메시아의 가르침이라 할지라도 쉽게 받아들일 수 없었으며, 이해하기는 더 어려웠을 것입니다. 이처럼 고정관념을 깨기는 어렵습니다. 하나님의 계시의 말씀을 들어도 당시의 신학과 다르면 받아들이지 못하고 주저하게 됩니다. 심지어 곡해하기도 합니다.

 

예수님의 메시아 되심을 증언하는 하나님의 계시와 자신의 고난을 예언하는 메시아의 말씀 앞에서 제자들은 당시 신학자들 곧 서기관들의 주장을 언급하였습니다. 하나님과 메시아 앞에 당시 신학자들이란 아무 것도 아닌 인간에 불과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제자들이 그들의 주장을 언급하는 것은 그들의 주장이 하나님의 말씀인 구약 성경에 토대하기 때문입니다. 변함없는 구약성경의 말씀에 토대한 서기관들의 주장과 하나님의 계시의 음성이 서로 모순된다면 무엇을 택해야 하는 것입니까? 기록된 말씀입니까? 아니면 계시의 음성입니까? 이 둘 중에 어느 것을 택해야 할지는 참으로 고민되고 어려운 문제입니다. 이러한 문제에 봉착한 제자들에게 예수님께서는 질문을 던지시면서 답하십니다. 12-13절을 보면 “가라사대 엘리야가 과연 먼저 와서 모든 것을 회복하거니와 어찌 인자에 대하여 기록하기를 많은 고난을 받고 멸시를 당하리라 하였느냐. 그러나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엘리야가 왔으되 기록된 바와 같이 사람들이 임의로 대우하였느니라 하시니라”고 했습니다.

 

우리는 이 말씀을 수사적 의문문으로 읽을 때 그 의미를 정확히 이해할 수 있습니다. 이 본문을 수사적 의문문으로 읽으면 이런 뜻입니다. “엘리야가 먼저 와서 모든 것을 회복 한다고? 그렇다면 어찌하여 인자에 대하여 기록하기를 많은 고난을 받고 멸시를 당하리라 하였느냐?”입니다. 서기관들의 주장은 기록된 말씀에 토대한 듯하지만 잘못된 해석을 담고 있으며, 기록된 말씀에 모순됩니다. 엘리야가 먼저 온다(말 4:5)는 가르침은 맞는 말이지만 그가 모든 것을 회복하므로 메시아가 고난 당하지 않는다는 것은 구약성경에 기록된 말씀에 근거하지 않습니다. 이 가르침은 인자의 고난을 암시하는 성경 말씀에 모순됩니다(참조. 단 7:13, 21, 25; 사 53:3-6 등). 말라기 선지자의 예언대로 엘리야는 이미 왔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그를 임의로 대하였습니다(13). 말라기 선지자가 예언한 엘리야는 엘리야의 심령과 능력으로 오는 세례 요한입니다. 그들은 세례 요한을 알아보지 못하고 핍박했습니다. 메시아 전에 오는 엘리야가 고난을 받았습니다. 이처럼 메시아 전에 오는 엘리야 고난을 받았으므로 엘리야 뒤에 오는 메시아도 고난을 받을 것입니다. 성령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은혜를 주셔서 변형되신 예수님을 통해서 계시하시는 하나님의 계시를 바르게 깨달아 알게 하여 주시기를 원합니다. 그리하여 고난을 받으시고 십자가 죽으시며 사흘 만에 부활하시는 예수님을 나의 메시아로 믿고 영접하게 하여 주시기를 원합니다. 그리하여 우리들 가운데 새 출애굽의 역사가 충만케 하여 주시기를 원합니다. 아멘!

TAG •

Articles

1 2 3 4 5 6 7 8 9 10 11 12 13 14 15 16 17 18 19 2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