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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 손재호
성경본문 눅 8:16-18

2020년 누가복음 공부

등불 비유

말씀:누가복음 8:16-18

 

우리는 지난 시간에 ‘씨 뿌리는 사람의 비유’에 대해서 살펴봤습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나님 나라 복음을 전하시는데 비유로 말씀하셨습니다. 그 이유는 알아듣는 사람은 알아듣게 하고 알아듣지 못할 사람은 알아듣지 못하게 하기 위함이었습니다(10). 하나님 나라 복음은 자신의 능력으로 알아들을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이렇게 되어야 하는 것은 “저희로 보아도 보지 못하고 들어도 깨닫지 못하게 하려 함이니라”고 하신 말씀이 성취 되어야 하기 때문입니다(10). 이사야 6:9-10절을 보면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가서 이 백성에게 이르기를 너희가 듣기는 들어도 깨닫지 못할 것이요, 보기는 보아도 알지 못하리라 하여 이 백성의 마음으로 둔하게 하며 그 귀가 막히고 눈이 감기게 하라. 염려컨대 그들이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마음으로 깨닫고 다시 돌아와서 고침을 받을까 하노라”고 했습니다. 이 말씀에 보면 여호와 하나님께서는 이사야 선지자로 하여금 이 백성에게 가서 이르기를 “너희가 듣기는 들어도 깨닫지 못할 것이요, 보기는 보아도 알지 못하리라 하여 이 백성의 마음으로 둔하게 하며 그 귀가 막히고 눈이 감기게 하라”고 합니다. 그 이유는 “그들이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마음으로 깨닫고 다시 돌아와서 고침을 받을까 하노라”고 합니다. 이 말씀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스스로 돌아올 능력이 없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에 대해서 이사야 선지자는 언제까지 이렇게 되는지를 묻고 있습니다. 이사야 6:11-13절을 보면 “내가 가로되 주여! 어느 때까지니이까? 대답하시되 성읍들은 황폐하여 거민이 없으며 가옥들에는 사람이 없고 이 토지가 전폐하게 되며 사람들이 여호와께 멀리 옮기워서 이 땅 가운데 폐한 곳이 많을 때까지니라. 그 중에 십분의 일이 오히려 남아 있을지라도 이것도 삼키운 바 될 것이나 밤나무, 상수리나무가 베임을 당하여도 그 그루터기는 남아 있는 것같이 거룩한 씨가 이 땅의 그루터기니라”고 했습니다. 이 말씀에 보면 여호와 하나님께서는 성읍들이 황폐하여 그 중에 십분의 일이 남아도 그 마저 베임을 당하게 되어도 그 그루터기가 남아 있을 것이라고 합니다. 이 말씀은 유다가 망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 망한 것으로 끝나지 않고 그 가운데서도 남은 자가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왜 유다가 망해야 하는 것입니까? ‘거룩한 씨’를 드러내기 위한 것입니다. 그들이 살게 된 것은 그들 자신의 능력으로 살게 된 것이 아니라 거룩한 씨로 인하여 살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그들은 그것을 무시하고 살기에 나라가 망함을 통하여 그들의 뿌리가 어디에 있는가를 보이고자 하신 것입니다. 밤나무, 상수리나무가 베임을 받아도 그 그루터기가 남아 있듯이 하나님의 약속이 이스라엘 가운데 남아 있는 것입니다. 그 약속의 실체가 바로 ‘거룩한 씨’가 되는 것입니다. 이 예언의 말씀대로 이스라엘 백성들이 눈이 감겨지고 귀가 가려져 있었습니다. 그러나 약속대로 거룩한 씨가 이 땅에 나타났습니다. 우리가 누가복음 1장에서부터 쭉 보아온 대로 그 거룩한 씨가 바로 예수님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성령으로 잉태되셨습니다. 거룩한 영으로 잉태하여 거룩한 씨가 이 땅에 오셨기에 이제는 눈이 열리고 귀가 열릴 때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아무나 다 눈이 열리고 귀가 열려서 예수님을 알아보는 것은 아닙니다. 모두가 다 소경이요, 귀머거리가 되어 있다는 것을 확인시키시면서 자기 백성을 골라내시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역사 방법입니다.

 

이제 오늘 본문을 보겠습니다. 16절을 보면 “누구든지 등불을 켜서 그릇으로 덮거나 평상 아래 두지 아니하고 등경 위에 두나니 이는 들어가는 자들로 그 빛을 보게 하려 함이라”고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씨 뿌리는 자의 비유를 말씀하신 후에 계속해서 ‘등불 비유’를 말씀합니다. 사람들이 등불을 켜는 것은 어두움을 밝히기 위해서 입니다. 그래서 등불을 켜서 그릇으로 덮어두거나 평상 아래 두지 않고 등경 위에 둡니다. 옛날에 전기가 없을 때는 등불을 켜고 살았습니다. 그때 보면 등불을 끌 때 그릇으로 덮어서 끕니다. 그러므로 등불을 켜서 그릇으로 덮거나 평상 아래 두지 않습니다. 등경 위에 둡니다. 그렇게 하여 들어가는 자들이 그 빛을 보게 합니다. 곧 온 방을 밝힙니다. 오늘 본문의 이 등불 비유도 누구나 다 알아들을 수 있는 말씀입니다. 그런데 그 안에 천국 복음을 담아두셨기 때문에 사람들이 그 말씀의 진의를 못 알아듣는 것입니다. 못 알아듣는다는 것은 사람들이 영적인 소경이며, 귀머거리라는 증거입니다. 곧 그들은 구원 받은 하나님의 백성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 16절을 다시 보면 “누구든지 등불을 켜서 그릇으로 덮거나 평상 아래 두지 아니하고 등경 위에 두나니 이는 들어가는 자들로 그 빛을 보게 하려 함이라”고 했습니다. 이 말씀은 성막의 내부를 밝혔던 등잔을 떠올리게 합니다. 출애굽기 25:37절에 보면 “등잔 일곱을 만들어 그 위에 두어 앞을 비추게 하라”고 했습니다. 아마도 성막의 등잔이 예수님의 이 말씀에 영향을 끼쳤을 것입니다. 등불의 이미지는 누가복음 11:33절과 12:35절에도 나오는데 ‘등불을 끄지 않는’ 것에 대한 히브리 비유를 반영하는 것일 수도 있습니다. 잠언 31:18절을 보면 “자기의 무역하는 것이 이로운 줄을 깨닫고 밤에 등불을 끄지 아니하고”라고 했습니다. 또한 레위기 6:12-13절을 보면 “단 위에 불은 항상 피워 꺼지지 않게 할지니 제사장은 아침마다 나무를 그 위에 태우고 번제물을 그 위에 벌여 놓고 화목제의 기름을 그 위에 사를지며 불은 끊이지 않고 단 위에 피워 꺼지지 않게 할지니라”고 했습니다.

 

사무엘상 3:3절과 사무엘하 21:17절에 보면 이스라엘에 등불이 꺼지지 않기를 소망하는 내용으로 표현됩니다. 사무엘상 3:3절을 보면 “하나님의 등불은 아직 꺼지지 아니하였으며 사무엘은 하나님의 궤 있는 여호와의 전 안에 누웠더니”라고 했습니다. 사무엘하 21:17절을 보면 “스루야의 아들 아비새가 다윗을 도와 그 블레셋 사람을 쳐 죽이니 다윗의 종자들이 다윗에게 맹세하여 가로되 왕은 다시 우리와 함께 전장에 나가지 마옵소서. 이스라엘의 등불이 꺼지지 말게 하옵소서 하니라”고 했습니다. 만일 오늘 본문 16절의 ‘등불’이 이와 비슷한 의미를 전달하고 문맥에 이런 의미를 내포한다면 본문은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복음의 빛을 숨기거나 끄지 않도록 권면하는 내용이 됩니다.

 

그런데 오늘 등불 비유 말씀에서 누가는 마가복음에는 없는 설명을 덧붙이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 16절에 보면 “들어가는 자들로 그 빛을 보게 하려 함이라”고 했습니다. 병행구절인 마가복음 4:21-25절에 보면 “또 저희에게 이르시되 사람이 등불을 가져오는 것은 말 아래나 평상 아래나 두려 함이냐. 등경 위에 두려 함이 아니냐. 드러내려 하지 않고는 숨긴 것이 없고 나타내려 하지 않고는 감추인 것이 없느니라. 들을 귀 있는 자는 들으라. 또 가라사대 너희가 무엇을 듣는가 스스로 삼가라. 너희의 헤아리는 그 헤아림으로 너희가 헤아림을 받을 것이요, 또 더 받으리니 있는 자는 받을 것이요, 없는 자는 그 있는 것까지 빼앗기리라”고 했습니다. 이 말씀에 보면 오늘 본문 16절의 “들어가는 자들로 그 빛을 보게 하려 함이라”는 말씀이 없습니다. 그러므로 오늘 본문에서 누가는 “들어가는 자들로 그 빛을 보게 하려 함이라”는 말씀을 덧붙이고 있습니다.

 

오늘 이 비유의 말씀을 이해하는 사람들은 빛에 들어가서 빛을 보는 것을 정확히 행해야 합니다. 누가는 16절의 내용을 요나의 교훈에 이어서 나오는 11:33절에서 거의 같은 내용으로 반복합니다. 누가복음 11:33절을 보면 “누구든지 등불을 켜서 움 속에나 말 아래 두지 아니하고 등경 위에 두나니 이는 들어가는 자로 그 빛을 보게 하려 함이니라”고 했습니다. 이것은 비유의 깊은 의미를 파악하려면 그 이야기 안으로 들어가야 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따라서 ‘빛’은 일반적인 진리를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6:47절에서 “내게 오라”고 부르시는 예수님 자신을 가리킵니다. 그러므로 비유에 들어가는 것은 예수님에게로 가는 첫 걸음이 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의 일생과 하나님 나라의 나타남에 역설이 존재하는 것처럼 당연히 비유에도 역설이 존재합니다. 하나님 나라의 외형은 특별하지도 않고 평범합니다. 평범한 외형은 겉으로 보기에 특별한 의미를 담고 있지 않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세상에 시작하시는 일은 ‘숨겨져’ 있고 ‘감춰져’ 있습니다. 오늘 본문 17절을 보면 “숨은 것이 장차 드러나지 아니할 것이 없고 감추인 것이 장차 알려지고 나타나지 않을 것이 없느니라”고 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숨기시고 감추신 목적은 차단하기 위함이 아니라 드러내기 위함입니다. 그러므로 숨은 것이 장차 드러나지 않을 것이 없고 감추인 것이 장차 알려지고 나타나지 않을 것이 없다고 하시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 말씀을 통해서 예수님께서 하나님 나라를 비유로 말씀하시는 의도를 볼 수 있습니다. 비유는 감추는 방식의 가르침이지만 그 최종 목적은 감추는 것이 아니라 드러내는 것입니다. 이것은 마치 등불을 켜서 그릇으로 덮거나 평상 아래 두지 않고 등경 위에 두는 것과 같습니다.

 

그런데 씨 뿌리는 자의 비유에서처럼 모든 것은 듣는 것에 달려 있습니다. 지난 시간에 본 11-15절을 보면 “이 비유는 이러하니라. 씨는 하나님의 말씀이요, 길 가에 있다는 것은 말씀을 들은 자니 이에 마귀가 와서 그들로 믿어 구원을 얻지 못하게 하려고 말씀을 그 마음에서 빼앗는 것이요, 바위 위에 있다는 것은 말씀을 들을 때에 기쁨으로 받으나 뿌리가 없어 잠간 믿다가 시험을 받을 때에 배반하는 자요, 가시떨기에 떨어졌다는 것은 말씀을 들은 자니 지내는 중 이생의 염려와 재리와 일락에 기운이 막혀 온전히 결실치 못하는 자요, 좋은 땅에 있다는 것은 착하고 좋은 마음으로 말씀을 듣고 지키어 인내로 결실하는 자니라”고 했습니다. 이 말씀에 보면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열매 맺느냐 맺지 못하느냐는 듣는 것에 달려 있습니다. 그러므로 오늘 본문 18절을 보면 “그러므로 너희가 어떻게 듣는가 스스로 삼가라. 누구든지 있는 자는 받겠고 없는 자는 그 있는 줄로 아는 것까지 빼앗기리라 하시니라”고 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히브리 격언을 인용하면서 어떻게 듣는가 스스로 조심하라고 합니다. “누구든지 있는 자는 받겠고 없는 자는 그 있는 줄로 아는 것까지 빼앗기리라”는 이 말은 히브리 격언입니다. 하나님은 인간의 기준에 따라 역사하시는 분이 아니십니다. 여기서 ‘듣다’라는 말이 ‘아쿠에테’(ajkouvete)라는 말인데 현재 시제로서 지속적으로 듣는 것을 말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피상적인 태도로 받을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집중해야 하고, 숙고해야 하고, 깊이 생각해야 합니다.

 

하나님 나라는 숨겨지고 감추어져 있습니다. 그래서 복음서에서 나타나는 천국의 비유들이 감추어져 있다는 특징들이 나타납니다. 마태복음 13:44절에 보면 “천국은 마치 밭에 감추인 보화와 같으니 사람이 이를 발견한 후 숨겨 두고 기뻐하여 돌아가서 자기의 소유를 다 팔아 그 밭을 샀느니라”고 했습니다. 이 말씀에 보면 천국은 밭에 감추어진 보화와 같다고 합니다. 마태복음 13:31-32절에 보면 “또 비유를 베풀어 가라사대 천국은 마치 사람이 자기 밭에 갖다 심은 겨자씨 한 알 같으니 이는 모든 씨보다 작은 것이로되 자란 후에는 나물보다 커서 나무가 되매 공중의 새들이 와서 그 가지에 깃들이느니라”고 했습니다. 이 말씀에 보면 천국은 마치 자기 밭에 심은 겨자씨와 같다고 합니다. 또한 마태복음 13:33절에 보면 “또 비유로 말씀하시되 천국은 마치 여자가 가루 서말 속에 갖다 넣어 전부 부풀게 한 누룩과 같으니라”고 했습니다. 이 말씀에서는 천국은 마치 가루 서말 속에 갖다 넣어 전부를 부풀케 하는 누룩과 같다고 합니다. 밭에 감춰진 보화, 겨자씨, 누룩 이와 같은 것은 겉으로 볼 때 보이지 않습니다. 그러나 엄청난 것으로 드러납니다. 이처럼 숨겨지고 감추어진 하나님 나라가 반드시 드러나게 됩니다. 어떻게 드러나는 것입니까? 예수님이 전하신 하늘나라의 복음으로 드러나게 됩니다. 사람들이 평소에 빛을 좋아하였는지 어두움을 좋아하였는지 복음이 증거 되면 다 드러나게 됩니다. 복음이란 인간의 모든 가능성을 다 폐기처분합니다. 인간의 선함과 착함을 인정하지 않습니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피 뿌림만으로 의에 이르게 하시는 것입니다. 이 예수님이 이 땅에 찾아오실 때에 빛으로 오신 것입니다. 곧 등불로 오신 것입니다. 그런데 이 빛과 등불이 사람들이 좋아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당시 사람들이 예수님을 함부로 대했습니다. 예수님께서 어떻게 오셨습니까? 이사야 선지자의 예언대로 마른 땅에서 나온 줄기 같아서 고운 모양도 풍채도 흠모할 만한 아름다운 것도 없었습니다(사 53:1-3). 그런데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셔서 자기 죄가 아니라 하나님의 백성의 죄를 대신 담당하시고 십자가를 지신 것입니다. 이사야 53:4-6절을 보면 “그는 실로 우리의 질고를 지고 우리의 슬픔을 당하였거늘. 우리는 생각하기를 그는 징벌을 받아서 하나님에게 맞으며 고난을 당한다 하였노라.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을 인함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을 인함이라. 그가 징계를 받음으로 우리가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우리가 나음을 입었도다. 우리는 다 양 같아서 그릇 행하여 각기 제 길로 갔거늘 여호와께서는 우리 무리의 죄악을 그에게 담당시키셨도다”고 했습니다. 예수님은 바로 이 예언의 말씀대로 십자가에서 우리의 질고를 지고 우리의 슬픔을 당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찔림은 우리의 허물을 인함이요, 예수님께서 상하심은 우리의 죄악을 인함입니다. 예수님께서 우리의 죄와 허물을 대신지시고 십자가의 길을 가심으로 우리가 평화를 누리고 나음을 받았습니다. 이 예수님이 바로 이 세상의 등불이며, 빛이십니다. 세상 영광을 보는 눈으로 예수님을 보면 캄캄한 어두움입니다. 그러나 세상의 영광이 헛된 영광으로 보이는 사람은 예수님의 십자가가 하늘의 영광으로 보입니다.

 

오늘날 우리가 빛이신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은 예수님의 공로로 새롭게 살아난 자들입니다. 사람들이 예수님의 말씀을 듣지 않으려고 하는 것은 어두움을 더 사랑하기 때문입니다(요 3:18-19). 그러므로 빛이신 예수님께로 오지 않는 것입니다. 그러나 진리를 쫓는 자는 빛으로 옵니다. 빛으로 오는 자는 그 행위가 하나님 안에서 행한 것임을 나타내는 것입니다. 이처럼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복음을 비유로 말씀하시는 것은 드러내기 위함이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지난 시간에 본 10절을 보면 “가라사대 하나님 나라의 비밀을 아는 것이 너희에게는 허락되었으나 다른 사람에게는 비유로 하나니 이는 저희로 보아도 보지 못하고 들어도 깨닫지 못하게 하려 함이니라”고 했습니다. 이 말씀에서 예수님께서 하나님 나라를 비유로 말씀하시는 이유를 우리가 알 수 있습니다. 이 말씀에서 보는 것과 같이 비유의 첫 번째 기능은 숨기고 감추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하나님 나라의 비밀을 아는 것이 허락되지 아니한 자들에게는 보기는 보아도 보지 못하며 듣기는 들어도 깨닫지 못하게 하려 함이었습니다. 그런데 비유의 근본 목적은 드러내고 나타내는 것입니다. 하나님 나라의 복음은 빛을 사랑하는 자와 어둠을 사랑하는 자를 선명하게 구별합니다. 우리 인생은 빛에 거하든지 아니면 어두움에 거하든지 둘 중에 하나입니다. 예수님은 하나님 나라의 비밀을 아는 것이 허락된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복음을 드러내기를 원하십니다. 이를 위해서 예수님께서는 하나님 나라를 비유로 말씀하여 숨기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너희가 어떻게 듣는가 스스로 삼가라”고 합니다.

 

오늘날 우리는 복음을 어떻게 듣습니까? 나의 세계가 무너지고 나의 뜻이 깨어지고 주님의 뜻이 이루어져야 한다고 고백합니까? 내가 살고자 하는 것이 죽는 것임을 압니까? 그런데도 우리는 날마다 부르짖는 아우성이 무엇입니까? 나를 살려달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우리가 소경이기에 그렇습니다. 귀머거리이기에 그렇습니다. 생명의 빛이 그 사람 안에 있는 사람은 더 받겠지만 없는 자는 그 있다고 여기는 것조차 빼앗기게 될 것입니다. 그러면 있는 자는 더 받고 없는 자는 그 있다고 여기는 것조차 빼앗긴다는 것이 무엇입니까? 예수님의 말씀을 들을 귀가 있는 사람은 복음을 듣고서 더 받아 풍성하지만 들을 귀가 없는 사람은 자신들이 평소에 가지고 있다고 여긴 그들의 의로움이라고 여기는 것조차 다 빼앗기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성경 말씀을 통하여 무엇을 보고 무엇을 듣고자 하는지 스스로 삼가야 합니다. 성경을 통해서 세상의 영광을 구하는 것이라면 이것은 잘못 듣는 것입니다. 허무에 굴복할 것들을 성경을 통해서 준다고 약속하는 것은 엉터리입니다. 믿음은 보이는 세계의 것이 아니라 보이지 아니하는 세계입니다(히 11:1-2).

 

예수님 당시나 오늘날 이 시대나 사람들은 자기들이 평소에 듣고 싶어 하는 이야기만 들으려고 합니다. 보고 싶은 것만 보고자 합니다. 디모데후서 4:1-4절을 보면 “하나님 앞과 산 자와 죽은 자를 심판하실 그리스도 예수 앞에서 그의 나타나실 것과 그의 나라를 두고 엄히 명하노니 너는 말씀을 전파하라.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항상 힘쓰라. 범사에 오래 참음과 가르침으로 경책하며 경계하며 권하라. 때가 이르리니 사람이 바른 교훈을 받지 아니하며 귀가 가려워서 자기의 사욕을 좇을 스승을 많이 두고 또 그 귀를 진리에서 돌이켜 허탄한 이야기를 좇으리라”고 했습니다. 예수님 당시만이 아니라 오늘날도 사람들은 바른 교훈을 버리고 자기의 사욕을 좇을 스승을 많이 두고 그 귀를 진리에서 돌이켜 허탄한 이야기를 좇습니다.

 

그러면 오늘 이 등불 비유를 통해서 계시하고자 하는 바가 무엇일까요? 비유의 목적을 말해 줍니다. 등불은 숨기려는 것이 아니라 밝히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등불을 켜서 그릇으로 덮거나 평상 아래 두지 않고 등경 위에 둡니다. 이처럼 비유의 목적은 숨기는 것이 아니라 드러내는 것입니다. 비유의 메시지를 깨닫고 실천하는데 성공하면 하나님 나라를 얻게 됩니다. 하지만 그렇지 못할 경우 실패한 씨앗의 모습으로 전락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무엇을 듣는가 스스로 조심해야 합니다. 성령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은혜를 주셔서 우리로 무엇을 듣는지 스스로 삼가 하는 은혜가 있게 하여 주시기를 원합니다. 그리하여 우리가 하나님의 복음을 바르게 듣고 깨달아 하나님 나라를 소유하는 복된 자들이 되게 하여 주시기를 원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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