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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빌립보서 공부

두렵고 떨림으로 너희 구원을 이루라

말씀:빌립보서 2:12-18

 

우리는 지난 시간에 바울 사도가 빌립보교회 성도들에게 그리스도의 마음을 품을 것을 권면하는 것을 살펴봤습니다. 오늘도 우리는 계속해서 빌립보서 2장 말씀을 살펴보고자 합니다. 오늘 본문 12절부터 새로운 문단이 시작됩니다. 그래서 이 문단은 “그러므로”라는 말로 시작합니다. 그리스도의 낮아지심과 높아지심을 이야기한 다음에 그 사실을 빌립보교회에 적용하려고 하면서 “그러므로”라는 말을 쓰고 있는 것입니다. 이는 이제 그리스도의 낮아지심과 높아지심에 대한 교훈이 빌립보교회 성도들 가운데 적용되고 나타나야 하기 때문입니다. 바울 사도는 먼저 그리스도의 모범을 그들 앞에 생생하게 제시한 다음에 그들도 항상 주님께 복종하고 두려움과 떨림으로 그들 자신의 구원을 이루라고 권합니다. 우리가 오늘 본문 말씀을 살펴보는 가운데 이 말씀을 통해서 우리교회에 말씀하시는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수 있기를 바랍니다.

 

12절을 보면 “그러므로 나의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가 나 있을 때 뿐 아니라 더욱 지금 나 없을 때에도 항상 복종하여 두렵고 떨림으로 너희 구원을 이루라”고 했습니다. 여기서 ‘그러므로’라는 말은 12절 앞의 구절들 곧 5-11절에서 말하는 것의 결과 즉 하나님께서 하신 일에 대해서 우리가 마땅히 해야 할 행동에 대해 말씀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나의 사랑하는 자들아’라는 말도 바울 사도가 권면의 말을 할 때에 흔히 쓰는 표현입니다(참조. 빌 4:1, 3:1, 17 등). 그렇다면 12절과 앞의 절들 사이를 연결하는 핵심 단어 또는 개념은 무엇일까요? 즉 12절의 ‘너희 구원을 이루라’는 말씀은 앞에서 말한 그리스도의 높아지심과 어떻게 연결이 되는 것입니까? 그 연결고리는 ‘두렵고 떨림으로’라고 할 수 있습니다. 곧 지극히 높아지신 그리스도 앞에서 두렵고 떨림으로 너희 구원을 이루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너희 구원을 이루라’는 말이 무슨 뜻일까요? 우리 스스로 자신의 구원을 이루어야 한다는 말일까요? 아닙니다. 그것은 성경 전체의 가르침에 어긋납니다. 바울이 결코 그런 의미로 말했을 리가 없습니다. 따라서 이것은 우리 스스로의 행함으로 구원을 성취한다는 그런 의미가 아니라 우리가 이미 받은 구원을 ‘이루어 낸다, 성취해 낸다, 종국적인 구원에 이른다’는 말입니다. 여기에 사용된 ‘이루다’라는 단어는 원어로 보면 ‘카테르가조마이’(katergavzomai)인데 이 단어 앞 부분에 전치사 ‘카타’가 붙어 있어서 ‘에르가조마이’와 구별이 됩니다. 즉 우리가 우리의 구원을 우리의 힘으로 행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받은 구원을 성취하는 것 곧 완수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따라서 이것은 우리가 은혜로 받은 구원을 끝까지 잘 간수하고 지켜서 종국적인 구원에 도달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칼빈은 오늘 본문을 이렇게 주해했습니다. “하나님은 부르시고 구원을 주시는 분이시다. 그가 주시는 것을 믿음으로 받아들이고 그의 부르심에 순종함으로 응답하는 것이 우리의 임무이다. 그러나 그 둘 중의 어느 것도 우리에게서 난 것이 아니다. 따라서 그분이 친히 우리로 하여금 그렇게 행하도록 준비하셨을 때에 우리는 행하게 된다”고 했습니다(칼빈의 빌립보서 2:13절 주석 중에서).

 

그런데 12절의 “두렵고 떨림으로 너희 구원을 이루라”고 했을 때 구원을 개인적으로만 이해해서는 안 되고 그리스도의 몸으로서의 구원 곧 교회로서의 구원으로 이해해야 합니다. 바울 사도가 ‘너희 구원’이라는 복수를 사용한 것은 여기에서 이야기 하는 구원이 개인의 영적인 구원이 아니라 다툼과 허영으로 하나 되지 못하고 분열 가운데 있는 빌립보교회가 전체적으로 회복되는 것을 가리키기 때문입니다. 빌립보교회가 다툼과 허영에서부터 벗어나서 한 마음으로 서서 협력하며 전진하는 것이 그들의 회복된 구원의 모습일 것입니다. 물론 여기에서도 개인적인 구원이 완전히 배제되는 것은 아닙니다. 신자들 한 사람 한 사람이 하나님을 두려워하면서 말씀을 순종하고 살지 않으면 교회가 전체적으로 영적인 건강함을 유지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렇지만 바울 사도의 관심사는 빌립보교회 안에 있는 분열과 다툼이었습니다.

 

바울 사도는 빌립보서에서 그것을 세 번이나 반복해서 언급하면서 가르칩니다. 1:27절에 보면 “오직 너희는 그리스도 복음에 합당하게 생활하라. 이는 내가 너희를 가보나 떠나 있으나 너희가 일심으로 서로 한 뜻으로 복음의 신앙을 위하여 협력하는 것과”라고 했습니다. 또 2:2-4절에서는 “마음을 같이 하여 같은 사랑을 가지고 뜻을 합하며 한 마음을 품어 아무 일에든지 다툼이나 허영으로 하지 말고 오직 겸손한 마음으로 각각 자기보다 남을 낫게 여기고 각각 자기 일을 돌아볼 뿐더러 또한 각각 다른 사람들의 일을 돌아보아 나의 기쁨을 충만케 하라”고 했습니다. 또한 4:2절에서는 “내가 유오디아를 권하고 순두게를 권하노니. 주 안에서 같은 마음을 품으라”고 했습니다. 바울 사도는 이처럼 세 번이나 반복해서 분열과 다툼이 더 뿌리를 내리지 않도록 부드럽게 그리고 한편으로는 강력하게 경고하면서 그리스도의 모범을 보여 주고 있는 것입니다.

 

바울은 빌립보교회 교인들이 하늘의 시민권을 가진 사람답게 한 마음 한 뜻으로 굳게 서서 구원을 이루어가기를 바랐습니다. 이를 위해 다툼과 헛된 영광을 버리고 그리스도의 겸손한 마음을 품기를 권면했습니다. 이를 위해서 그리스도의 겸손을 모본으로 제시한 것입니다. 우리는 빌립보교회에 있는 이 약한 모습이 오늘날 우리교회 가운데도 있음을 보게 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오늘 말씀을 우리교회에 주시는 말씀으로 받아야 합니다. 물론 우리가 이 말씀을 개인적으로 받아야 하지만 우리교회에 주시는 말씀으로 받아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낮아지심과 높아지심과 연합하여서 하늘의 시민권을 가진 사람들 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한 마음과 한 뜻으로 굳게 서서 로마 군대의 ‘팔랑크스’처럼 견고한 전열을 갖추고 나아가야 합니다. 온 교회가 그리스도의 모본의 은혜에 기초해서 한 마음과 한 뜻으로 협력하여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에까지 자라가야 합니다. 그럴 때 교회가 굳게 세워져 가게 되고 교회를 통한 구원이 이루어져 가는 것입니다. 우리교회 가운데 이와 같은 역사가 있게 해 주시기를 원합니다. 아멘!

 

구원은 전적으로 하나님께서 이루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주권이고 은혜입니다. 이점에 있어서는 조금의 이의도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구원을 이루어 가심에 있어서 우리를 사용하십니다. 우리의 모든 생각과 노력과 활동을 사용하시고 주장하시고 인도하십니다. 그래서 인간 측면에서 보면 우리가 열심히 노력하고 애써야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아무런 노력도 안 하는데 저절로 구원이 주어지도록 하시지는 않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절대주권으로 우리를 창세 전에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택하시고 주권적으로 구원을 이루어가십니다(엡 1장). 우리에게 믿음을 선물로 주셔서 은혜로 구원을 이루어가십니다(엡 2장). 하나님께서 우리를 구원하시고 종국적인 구원을 보장해 주셨지만 우리는 그 주신 구원을 확신하며 또한 그 약속된 구원을 얻을 때까지 조심스럽게 일구어 가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빌립보교회 성도들은 어떻게 노력해야 한다고 합니까? 바울은 이에 대해 “나 있을 때뿐 아니라 나 없을 때에도”라고 말합니다(12). 바울은 지금 로마의 어느 셋집에 감금되어 있기 때문에 ‘나 없을 때에도’라고 특별히 당부하고 있습니다. 사람들은 지도자가 그 자리에 없으면 느슨해지기가 쉽습니다. 학교 선생님이 교실 문을 나서는 순간 학생들이 떠들며 야단법석을 하는 것과 같습니다. 이와 같이 지금 바울 사도가 없을 때 그들이 영적으로 나태해 질 수 있었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빌립보교회 성도들이 자신이 있을 때나 없을 때나 하나님 앞에서 힘쓰고 노력하라고 권면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우리의 구원을 하나님 앞에서 두렵고 떨림으로 이루어가야 합니다.

 

그런데 여기서 ‘두렵고 떨림으로’라는 말이 의미하는 바가 무엇입니까? 이것은 그저 불안과 무서움으로 하라는 것이 아닙니다. 이것은 하나님을 경외하고 조심스럽게 행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우리는 늘 하나님 앞에서 신중하고 조심스럽게 서 있게 삶을 살아야 합니다. 성급하거나 덤벙거리면 안 됩니다. 에베소서 5:15절에서도 바울 사도는 “그런즉 너희가 어떻게 행할 것을 자세히 주의하라”고 하였습니다. 이처럼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두렵고 떨림으로 우리의 구원을 이루어가야 하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 13-14절을 보면 “너희 안에서 행하시는 이는 하나님이시니 자기의 기쁘신 뜻을 위하여 너희로 소원을 두고 행하게 하시나니 모든 일을 원망과 시비가 없이 하라”고 했습니다. 바울 사도는 우리가 왜 두렵고 떨림으로 구원을 이루어 가야 하는지 그 이유를 말하고 있습니다. 바울 사도는 “너희 안에서 행하시는 이는 하나님이시니”라고 말합니다. 이를 통하여 바울 사도는 우리가 종국적으로 구원을 이루기 위해서 노력할지라도 그것은 우리 자신의 고유한 능력으로 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우리 안에서 행하신 결과라는 것을 분명히 밝히고 있습니다. 비록 사람의 눈에는 보이지 않지만 하나님이 모든 것을 이끄십니다. 어떤 때에는 사람이 하는 것 같지만 결국 하나님이 인도하시는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언제나 기도하면서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따라 조심스럽게 행동해야 하는 것입니다. 또한 바울 사도는 하나님은 “자기의 기쁘신 뜻을 위하여 너희로 소원을 두고 행하게 하신다”고 합니다. 여기서 ‘소원을 두신다’는 것은 우리가 먼저 원하게 하신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은 먼저 우리 안에 소원을 불러일으키십니다. 그리고 나서 우리에게 힘을 주시고 역사하심으로 우리가 행하게 하십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기계처럼 부리지 아니하십니다. 인격적으로 역사하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자기의 기쁘신 뜻을 따라 우리로 하여금 선한 소원을 갖도록 하시고 그것을 행하게 하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 가운데 선한 뜻이 있으면 그것이 하나님이 주신 것임을 믿어야 합니다. 그리고 모든 일을 원망과 시비가 없이 해야 하는 것입니다(14). 여기서 ‘원망’이란 불평과 불만으로 수근 대는 것을 말합니다. 또한 ‘시비’는 변론하고 논쟁하는 것을 말합니다. 교회 안에 이런 원망과 시비가 있으면 안 됩니다. 그러면 사단이 역사합니다. 결국 교회가 무너집니다. 그러므로 교회는 무슨 일을 하든지 하나님 앞에서 화평 하는 가운데 원망과 다툼이 없이 행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빌립보교회 성도들이 원망과 시비가 없이 행해야 하는 목적이 무엇입니까? 15-16절을 보면 “이는 너희가 흠이 없고 순전하여 어그러지고 거스리는 세대 가운데서 하나님의 흠 없는 자녀로 세상에서 그들 가운데 빛들로 나타내며 생명의 말씀을 밝혀 나의 달음질도 헛되지 아니하고 수고도 헛되지 아니함으로 그리스도의 날에 나로 자랑할 것이 있게 하려 함이라”고 했습니다. 바울은 “너희가 흠 없고 순전하게 되기 위해”라고 말합니다. 여기서 ‘흠 없다’(a[memptoι)라는 것은 ‘책망할 것이 없다’라는 뜻입니다. 그리고 ‘순전하다’(ajkevraioι)고 하는 것은 ‘섞이지 않았다’는 뜻으로 ‘순수하다, 순결하다’라는 의미입니다. 바울 사도는 빌립보교회 성도들이 원망과 시비가 없이 행하여 어그러지고 거스리는 세대 가운데서 하나님의 흠 없는 자녀로 나타나기를 바라고 있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어그러지고 거스리는 세대 가운데서’라는 말은 빌립보교회 성도들이 처한 세상이 어떠하였는가 하는 것을 보여 줍니다. ‘어그러지고’(skoliov")라는 말은 ‘굽은’이라는 뜻입니다. 이 세상 사람들의 길은 하나님 앞에서 바르지 않고 굽은 길입니다. 그리고 ‘거스리는’(diastrαμμένη)이라는 말은 ‘뒤집어진, 전도된’이라는 뜻입니다. 이 세상은 진리와 거짓이 뒤바뀌고 선과 악이 뒤집히고, 창조주에게 돌아갈 영광을 피조물에게 돌리는 전도(顚倒)된 세상입니다. 이런 잘못된 세상 가운데서 하나님의 자녀인 성도들이 흠 없이 순결하게 나타나도록 하기 위해서는 성도들 사이에 원망과 시비가 없어야 한다는 것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바울은 이러한 세상에서 빌립보교회 성도들이 빛들로 비취고 있다고 합니다. 15절을 다시 보면 “세상에서 그들 가운데 빛들로 나타나며”라고 했습니다. 여기서 ‘빛’(fwsthvr)은 밝게 비추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것은 곧 성도는 이 세상을 밝게 비추는 빛과 같은 존재임을 말해 줍니다. 마태복음 5:14절에도 보면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을 향해서 “너희는 세상의 빛이라. 산 위에 있는 동네가 숨기우지 못할 것이요”라고 했습니다. 따라서 우리 성도들은 이 세상에서 더욱더 말과 행동에서 조심하여 모든 일을 원망과 시비가 없이 하도록 해야 하는 것입니다.

 

16절을 다시 보면 “생명의 말씀을 밝혀 나의 달음질도 헛되지 아니하고 수고도 헛되지 아니함으로 그리스도의 날에 나로 자랑할 것이 있게 하려 함이라”고 합니다. 여기서 ‘생명의 말씀을 밝혀’라고 했을 때 ‘밝혀’라고 번역한 헬라어 ‘에페콘테스’(ejpeχοντες)는 분사로서 그 원형은 ‘에페코’(ejpevcw)인데 ‘꽉 붙잡다’라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따라서 ‘생명의 말씀을 밝혀’라는 말은 ‘생명의 말씀을 붙들어’라고 번역하는 것이 정확한 번역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성도들이 이 세상에서 흠 없는 하나님의 자녀로, 곧 빛들로 나타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하나님의 말씀을 굳게 붙들어야 하는 것입니다. 생명의 말씀을 붙들어서 그 안에 굳게 설 때에 우리는 이 세상에 물들지 아니하고 빛들로 나타나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세상의 빛으로 나타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이 하나님의 말씀을 굳게 붙들어야 하는 것입니다. 성령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은혜를 주셔서 우리교회로 하여금 하나님의 말씀을 힘써 배워 나가게 하시고 그 말씀의 본의를 따라 말씀 가운데 굳게 서게 하여 주시기를 원합니다. 그리하여 우리교회 가운데 원망과 시비가 없게 하시고 우리가 흠 없는 하나님의 자녀로, 빛들로 세상 가운데 나타나게 하여 주시기를 원합니다.

 

그런데 바울 사도는 이렇게 하는 목적이 무엇이라고 합니까? “…나의 달음질도 헛되지 아니하고 수고도 헛되지 아니함으로 그리스도의 날에 나로 자랑할 것이 있게 하려 함이라”고 합니다(16). 바울 사도는 주님이 다시 오실 때에 빌립보교회에 대해 자랑할 것이 있도록 하기 위해서 그들이 생명의 말씀을 굳게 붙들어서 이 세상에서 빛들로 나타나야 한다는 것입니다. 바울 사도는 여기서 ‘자랑’에 대해서 보충 설명하고 있습니다. “나의 달음질도 헛되지 아니하고 수고도 헛되지 아니함으로”라고 말합니다. 만일 빌립보교회 성도들이 이 세상에 빛으로 나타나지 못하고 타락해 버린다면 바울이 수고한 모든 수고가 헛되고 말 것입니다. 그러면 마지막 날에 곧 주님이 재림하실 날에 바울은 자랑할 것이 없을 것입니다. 따라서 그들이 생명의 말씀을 굳게 붙들어서 이 세상 가운데서 빛들로 나타나는 것이 바울의 모든 수고가 헛되지 않게 하는 것이며, 또한 마지막 날에 주님 앞에 자랑할 것이 있게 하는 것입니다. 여기서 말하는 ‘자랑’은 주 안에서 하는 자랑이며, 하나님이 기뻐 받으시는 자랑을 말하는 것입니다. 이처럼 바울 사도는 빌립보교회 성도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굳게 붙들므로 세상에 빛들로 나타나기를 원하였습니다. 이를 위해 간절히 권면하고 있는 것입니다. 바울 사도의 빌립보교회를 향한 이 권면의 말씀이 오늘날 우리교회에 주시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을 수 있기를 원합니다. 그리하여 우리교회가 하나님의 말씀을 힘써 배우게 하시고, 그 말씀을 굳게 붙드는 역사가 있게 하여 주시기를 원합니다. 그리하여 우리교회가 하나님의 말씀 위에 굳게 서서 세상에 빛들로 나타나게 하여 주시기를 원합니다. 그리하여 주님이 다시 오실 때 ‘잘 하였다. 착하고 충성된 종아’하며 칭찬 듣는 교회가 되게 하여 주시기를 원합니다.

 

이제 오늘 본문 17-18절을 보겠습니다. “만일 너희 믿음의 제물과 봉사 위에 내가 나를 관제로 드릴지라도 나는 기뻐하고 너희 무리와 함께 기뻐하리니 이와 같이 너희도 기뻐하고 나와 함께 기뻐하라”(17-18). 이 말은 바울 사도가 빌립보교회 성도들을 얼마나 사랑하는지를 제의(祭儀)적인 표현을 통해서 보여주고 있습니다. 바울 사도는 빌립보교회 성도들을 위해서라면 자기 자신을 ‘관제’로 드릴지라도 기뻐하겠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관제’란 구약 시대의 제사의 일종으로서 소제와 함께 포도주를 부어 드리는 의식을 말합니다. 바울 사도는 관제처럼 자신이 다 쏟아 부어질지라도 자기는 기뻐하고 기뻐하겠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바울이 빌립보교회 성도들을 위해서 자신을 아낌없이 다 주고 소모하겠다는 사랑과 헌신의 마음을 이렇게 표현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너희 믿음의 제물과 봉사 위에”라는 표현이 덧붙여져 있습니다. 여기서 ‘제물’로 번역된 ‘튀시아(qusiva)’라는 단어는 소나 양 또는 곡물과 같은 ‘제물’을 뜻할 수도 있고, 그러한 것을 드리는 ‘제사 행위’를 뜻할 수도 있습니다. 그리고 ‘봉사’로 번역된 ‘레이투르기아(leitourgiva)’는 원래 헬라세계에서는 개인적인 섬김과는 구별되는 국가나 공적인 제의를 위한 봉사를 가리키는데 사용되었습니다. 성경에서는 거의 종교적인 의미로 사용되었습니다. 구약 성경에서는 대부분 제사장 또는 레위인의 성전 봉사에 대해 사용되었습니다. 바울 사도가 이러한 제의적 용어를 통해 나타내고자 하는 것은 물론 문자적인 의미가 아니라 비유적인 의미입니다. 곧 바울은 빌립보교회 성도들이 믿음으로 드린 제물과 봉사 곧 바울을 위해 선교헌금을 하고 기도함으로써 그의 복음 사역에 헌신한 그들을 위해 자신이 다 쏟아 부어져도 기뻐하고 기뻐하겠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17절에서 ‘기뻐하리니’라고 미래형으로 번역되어 있지만 원문에 보면 현재형입니다. 곧 바울은 지금 기뻐하고 있으며 또한 그들 모두와 함께 기뻐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나서 바울은 18절에 보면 “이와 같이 너희도 기뻐하고 나와 함께 기뻐하라”고 합니다. 바울 사도는 자신의 기쁨이 빌립보교회 성도들의 기쁨이 되기를 바라고 있습니다. 우리는 여기서 빌립보교회 성도들을 향한 바울의 사랑과 기쁨이 어떠했는가 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자신이 전제와 같이 다 부어질지라도 기뻐하고 기뻐하겠다는 것입니다. 참으로 우리는 바울 사도를 통해서 참 목자상을 배우게 됩니다. 성령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은혜를 주셔서 바울 사도의 빌립보교회 성도들을 향한 기쁨이 우리의 기쁨이 되게 하여 주시기를 원합니다. 그리하여 우리가 함께 주 안에서 형제 된 자들을 위해서 자신을 온전히 쏟아 부어드리며, 함께 주 안에서 기뻐하는 역사가 우리교회 가운데도 충만케 하여 주시기를 원합니다. 그리하여 우리교회가 하나님 앞에서 두렵고 떨림으로 구원을 이루어가게 하시고, 우리교회가 이 세상 가운데서 빛으로 나타나게 하여 주시기를 원합니다. 이런 은혜가 우리교회 가운데 있게 하여 주시기를 원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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