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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년 9월 17일 설교


금식에 대한 왕의 가르침


말씀:마태복음 9:14-17
요절:마태복음 9:15   “예수께서 저희에게 이르시되 혼인 집 손님들이 신랑과 함께 있을 동안에 슬퍼할 수 있느뇨 그러나 신랑을 빼앗길 날이 이르리니 그 때에는 금식할 것이니라.”

예수님의 두 번째 세 쌍의 기적 이야기 단락 이후에는 두 가지 마무리 이야기가 나옵니다. 우리는 지난주에 그 첫 번째 이야기인 ‘마태를 부르신 왕’에 대해서 공부했습니다. 오늘은 두 번째 마무리 이야기로 ‘금식에 대한 왕의 이야기’입니다. 죄인들과의 식사 이야기에 바로 뒤이어 자연스럽게 금식에 관한 가르침이 나오고 있습니다. 이것은 마태가 신학적 의도를 가지고 금식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금식에 대한 왕의 가르침을 통해 하나님 나라에 대해 바르게 이해하고 그 나라를 담을 수 있는 새 부대가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14절에 보면 바리새인들에 대한 가르침이 끝난 후 세례 요한의 제자들이 예수님께 나아와 물었습니다. “우리와 바리새인들은 금식하는데 어찌하여 당신의 제자들은 금식하지 아니하나이까?” 마가복음 2:18절을 보면 예수님께서 죄인들과 함께 식사하신 이 날은 바리새인들의 금식일 이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바리새인들은 구약에 명시된 속죄일 외에도 매주 월요일과 목요일 두 차례씩 금식하였습니다(참조. 눅 18:12). 바리새인들은 금식을 경건의 중요한 덕목으로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일주일에 두 번씩 금식을 한 것입니다. 경건한 유대인이라면 이것은 당연한 의무로 생각했습니다. 요한의 제자들도 바리새인들의 이러한 금식 규례를 따랐던 것 같습니다. 특히 스승 세례 요한은 약대 털옷을 입고 광야에서 메뚜기와 석청을 먹으며 메시야의 선구자로서의 사명을 감당하였습니다. 요한의 제자들은 이런 스승의 영향을 많이 받았던 것 같습니다. 그런데 자신들이 생각하는 금식에 대한 생각이 예수님의 제자들의 생각은 너무나 다른 것처럼 보였습니다. 자신들은 일주일에 두 번씩 금식하며 애통해 하는데 예수님의 제자들은 금식은 커녕 매일 먹고 마시며 희희낙락하였습니다. 요한의 제자들은 이런 예수님의 제자들의 모습이 도저히 이해가 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예수님께 나아와 ‘우리와 바리새인들은 금식하는데 당신의 제자들은 왜 금식하지 않느냐’고 물은 것입니다. 요한의 제자들은 바리새인들과 같이 예수님을 적극적인 대적하지는 않았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에 대한 이해가 부족한 자들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예수님을 대적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금식에 대한 규례를 알기 위해서 예수님께 질문했습니다.

그러면 요한의 제자들의 질문에 대한 예수님의 대답이 어떠합니까? 15절에 보면 예수님은 아주 멋진 예를 들어서 설명해 주셨습니다. “혼인집 손님들이 신랑과 함께 있을 동안에 슬퍼할 수 있느뇨 그러나 신랑을 빼앗길 날이 이르리니 그 때에는 금식할 것이니라.” 예수님은 금식이라는 무거운 주제를 무엇보다도 기쁨이 넘치는 결혼 비유를 사용하셔서 그들의 혼란에 답변해 주셨습니다. 근동지방에서의 결혼식은 보통 일주일간 계속되었다고 합니다. 그들은 일주일 내내 기쁨의 노래와 음악과 포도주로 흥겨운 잔치를 벌였습        니다. 잔치 기간에는 금식하지 않아도 되었습니다. 신랑과 함께 있는 친구들은 일주일간 마음껏 먹고 마시며 즐겼습니다. 예수님은 이같은 당시 결혼 문화를 예로 들어서 금식하지 않는 제자들을 변호해 주셨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신랑을 빼앗길 때가 오는데 그 때는 금식할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은 6:16-18절에서와 마찬가지로 금식을 적극적으로 명령하거나 권하지는 않으시지만 금식자체를 거부하지도 않으셨습니다. 다만 현재는 신랑과 함께 있기 때문에 금식하지 않는 것이 적절하다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현재 상황을 결혼 잔치로 비유하셨습니다. 여기서 결혼 잔치는 메시아적 잔치를 의미하는 것이 분명합니다(참조. 8:11; 9:10). 예수님은 그 잔치의 주인공인 신랑을 메시아이신 자신에 비유하시고, 그 잔치의 손님들을 자신의 제자들에 비유하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과 함께 있는 제자들은 신랑과 함께 있는 기쁨 때문에 금식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러면 ‘신랑을 빼앗길 때가 이른다’라는 것은 무엇을 의미할까요? 예수님께서 앞으로 당하실 일을 암시하는 것입니다. 16:21절에 보면 예수님은 제자들의 신앙고백을 들으신 후 비로소 예루살렘에 올라가 장로들과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게 많은 고난을 받고 죽임을 당한 후 삼일 만에 부활하실 것을 말씀하셨습니다. 이사야 53:8절에도 보면 “그가 곤욕과 심문을 당하고 끌려갔으니 그 세대 중에 누가 생각하기를 그가 산 자의 땅에서 끊어짐은 마땅히 형벌 받을 내 백성의 허물을 인함이라 하였으리요”라고 했습니다. 이런 말씀들을 참조해 볼 때 ‘신랑을 빼앗길 때가 이른다’는 말은 예수님께서 때가 되면 예수살렘에 올라가 유대 종교지도자들로부터 많은 고난을 받고 십자가에 죽임을 당할 것을 말씀하는 것입니다. 그 때 제자들은 슬퍼하며 금식을 할 것입니다.

이상에서 볼 때 예수님께서 신랑을 빼앗기면 금식할 것이라고 하셨으므로, 금식 자체가 나쁘다거나 거부하신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요한의 제자들에게 예수님과 예수님을 통해 이루어지는 하나님 나라에 대한 이해가 부족한 것을 깨우쳐 주셨습니다. 요한의 제자들이 예수님께 금식에 대해서 물은 것은 예수님과 예수님을 통해 이루어지는 하나님 나라에 대해 잘 이해하지 못했기 때문이었습니다. 요한의 제자들이 예수님을 메시아의 혼인 예식에 신랑이 되신 분이시라는 사실을 알지 못했습니다. 만약 그들이 이 사실을 알았다면 금식에 대해 질문하지도 않았을 것입니다. 또한 그들은 예수님을 통해 이루어질 하나님 나라에 대해서도 잘 알지 못했습니다. 그들이 예수님을 통해 이루어질 천국 잔치에 대해서 바로 알았다면 그들은 금식하지 않는 제자들을 판단하지도 않았을 것입니다. 그들 자신들도 율법적으로 금식을 행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도리어 신랑 되신 예수님과 함께 그 잔치의 기쁨에 동참하였을 것입니다. 그들도 예수님과 함께 먹고 마시며 노래하며 춤추며 천국의 기쁨을 누렸을 것입니다. 예수님은 금식에 대한 질문에 대답하면서 요한의 제자들에게 자신이 어떤 자이며, 자신을 통해 이루어질 하나님 나라가 어떠한지를 깨우쳐 주셨습니다. 이를 통해 제자들이 왜 금식하지 않는지를 깨우쳐 주셨습니다.    
물론 경건을 위해서 금식은 중요한 일입니다. 예수님 자신도 중요한 일을 앞에 두고는 금식하며 기도하셨습니다. 그러나 금식이 우리의 경건을 위해서 필요하고 중요한 것이지만 그것이 율법이 되어버려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사실 우리가 신앙생활을 하다보면 원든 원치 않든 죄를 범하게 될 때가 있습니다. 그 죄로 인해 하나님 앞에 애통하며 금식하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입니다. 또한 하나님 앞에서 중요한 일을 결정해야 할 때가 있습니다. 그 때 금식하며 기도하며 하나님의 뜻을 구하는 것은 당연한 것입니다. 우리는 금식을 통해 하나님과의 바른 관계를 회복할 수 있고, 하나님의 뜻을 순종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금식을 생활화함으로서 그것을 통해 더 경건해질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문제입니다. 곧 금식이 경건의 척도처럼 생각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요즘도 금식을 경건의 척도처럼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그래서 예수님 당시 바리새인들처럼 정기적으로 금식하는 것을 자랑합니다. 심지어 목사들이 자신의 금식 경력을 자랑삼아 말합니다. 그것을 마치 경건의 보증수표처럼 생각합니다. 성도들도 금식을 자주하고 오래하면 경건한 사람이라고 생각합니다. 이처럼 예수님은 금식을 경건의 척도로 사용하는 것을 찬성하지 않으셨습니다. 금식하는 사람은 경건하고 금식하지 않는 사람들은 덜 경건하다고 판단하는 그런 것을 경계하셨습니다. 신앙생활에서 갖가지 규례들을 만들어서 그것들을 행하면 경건하고, 그렇지 않으면 경건하지 않다고 판단하는 것은 율법주의입니다. 신앙생활에 잡다한 규례들을 만들어 그것들을 지키도록 하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로 자유하게 하신 그 자유를 손상시키는 죄가 됩니다. 그래서 바울은 자신들의 서신에서 복음을 왜곡시키는 율법주의를 강력하게 반대했습니다. 우리가 금식의 진정한 의미를 바로 잘 이해하여 우리의 경건에 유용하게 사용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16-17절에 보면 예수님은 금식에 관한 가르침에 이어 ‘새 천조각과 새 포도주 비유’를 통해 메시아의 사역과 기존의 유대교 종교 체제 사이의 관계에 대한 일반적인 원리를 제시해 주셨습니다. “생베 조각을 낡은 옷에 붙이는 자가 없나니 이는 기운 것이 그 옷을 당기어 해어짐이 더하게 됨이요 새 포도주를 낡은 가죽 부대에 넣지 아니하나니 그렇게 하면 부대가 터져 포도주도 쏟아지고 부대도 버리게 됨이라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 넣어야 둘이 다 보전되느니라.” 낡은 옷은 유연성이 없어서 신축성이 좋은 생베조각으로 기우면 안 됩니다. 또 뻣뻣하게 굳어 있는 낡은 가죽 부대는 새 포도주가 발효될 때 팽창하는 힘을 감당하지 못하고 터지기 때문에 새 포도주는 반드시 새 부대에 넣어야 합니다. 이것은 누구나 잘 아는 상식입니다.

예수님께서 이 비유들을 통해 유대인의 낡은 종교 관습과 전통들로서는 예수님께서 새로 시작하시는 복음을 수용할 수 없음을 말씀하셨습니다. 헌옷이 새 천 조각을 수용할 수 없고, 헌 가죽 부대가 새 포도주를 담을 수 없는 것처럼, 기존의 유대교 종교 체제는 예수의 메시아적 사역을 통해 도래한 하나님 나라의 현존을 수용할 수 없습니다. 왕께서 질문하는 요한의 제자들에게 대답하신 이 말씀의 취지는 ‘새 것을 옛 것으로 측정하려고 하지 말라. 옛 것은 그것이 유지되는 동안은 옳다. 그러나 이것은 새 것이다. 이제 사람들은 옛 것이라는 좁은 제한 속에 새 것을 가두려 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 분명히 선언하는 바는 자신이 친히 오셔서 주도하는 새 언약은 새로운 방법의 표현을 요구한다는 것입니다. 즉 슬픔의 삼베 옷 대신에 왕의 자주 옷을 입어야 하며, 패배의 슬픔 대신에 승리의 옷을 입어야 하며, 십자가의 날 대신에 부활의 아침을 바라봐야 한다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이루어진 새로운 역사 곧 구약의 성취로 이루어진 하나님 나라는 유대인들의 굳어진 율법적이고 금욕적인 틀로서는 도무지 이해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바리새인들은 굳어진 종교적 전통 때문에 이러한 새로운 신앙 체계를 수용하지 못했습니다. 오히려 그들은 예수님을 대적하고 십자가에 못 박고 말았습니다. 굳어진 형식적, 율법적이고, 금욕적 종교관이 깨어지지 않으면 본인이 생각할 때는 누구보다 경건하게 신앙생활하고 있는 것 같을지라도 하나님의 원수노릇만 하는 것입니다.

바리새인들은 형식적이고 피상적인 종교 체계 속에 머물러 있었습니다. 세례 요한의 제자들도 마찬가지였습니다. 그러나 하나님 나라는 금욕주의적인 투쟁을 통해서 쟁취하는 나라가 아닙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를 누릴 때 자연스럽게 나타나는 현상입니다. 곧 은혜로 주어지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삼베 옷을 입는 방법을 모르고서는 결코 자주 옷을 입을 수 없습니다. 패배를 통하지 않고서는 결코 승리를 얻을 수 없습니다. 금요일의 수난의 길을 통하지 않고서는 결코 부활의 아침에 이를 수 없습니다. 기독교의 특징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왕께서 수난의 길을 가심으로써 우리에게 영원한 부활의 영광을 주셨습니다. 왕께서 삼베 옷을 입으므로 그것이 변하여 우리에게 자주 옷이 되었습니다. 왕께서 포도주 틀을 밟음으로써 우리는 주님의 왕국이라는 새 포도주가 가득한 잔을 갖게 되었습니다. 새 포도주는 힘이 있습니다. 그래서 새 포도주는 낡은 가죽부대에 담을 수 없습니다. 그러면 부대가 터져 함께 버리게 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 담아야 합니다. 우리가 왕을 통해 이루어지는 새로운 역사를 깊이 경험하고 체험함으로 우리의 낡은 옷과 틀을 벗어 버릴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리하여 새 부대가 되어 왕을 통해 이루어지는 새로운 복음을 담는 복된 자들이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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