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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년 11월 12일 설교


회개치 않는 도성에 대한 책망


말씀:마태복음 11:20-24
요절:마태복음 11:20    “예수께서 권능을 가장 많이 베푸신 고을들이 회개치 아니하므로 그때에 책망하시되”

오늘 말씀은 회개치 않는 도성에 대한 왕의 책망입니다. 고라신, 벳새다, 가버나움은 예수께서 특별히 많은 권능을 베푸신 도시들이었습니다. 주님은 그곳에서 많은 이적들을 통해 하나님 나라의 현존을 강하게 드러내셨습니다. 그 목적은 세상 백성으로 살아가던 삶에서 돌이켜 권능으로 임한 하나님 나라에 들어오도록 하기 위함이었습니다. 그러나 그 도시들은 하나님 나라를 거절했습니다. 여전히 자신들의 죄악 된 방식대로 살기를 고집했습니다. 예수님은 그들의 “회개치 아니”함을 보고 “책망”하시며 “화”를 선언하셨습니다. 오늘 말씀을 통해 회개하지 않는 도성을 향해 책망하시는 주님의 음성을 들을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리하여 우리가 회개하고 하나님 나라를 받아들이는 복된 자들이 되길 바랍니다.

20절을 보면 예수님께서 가장 권능을 많이 베푸신 고을들이 회개치 아니하므로 그때에 그들을 책망하셨다고 하고 있습니다. “그때에 책망하시되.” 이 말씀은 이제까지 예수님의 행적으로 볼 때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병든 자들을 고쳐 주시고 연약한 자들을 섬겨주셨습니다. 죄인들의 친구가 되어 주셨습니다. 이런 그분에게 있어서 책망하셨다는 것은 어울리지 않으며 그답지 않은 것 같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우리가 예수님의 책망의 이유와 의미를 피상적으로 이해하는데서 비롯된 것입니다. 만일 우리가 예수님께서는 사랑이 많으시며 온유한 분이시기 때문에 책망하거나 저주를 선언하는 것은 그분의 성품과 어울리지 않는 것이라고 생각한다면 우리는 예수님의 ‘사랑’의 의미를 오해하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사랑이십니다. 그러나 그 사랑은 언제나 온유하기만한 것이 아닙니다. 때로는 엄격하기도 한 것입니다. 오늘 본문을 보면 주님께서는 친히 고라신과 벳새다와 가버나움 이 세 도시의 이름을 부르고 있습니다. 주님께서 고라신을 언제 방문하셨는지 우리로서는 알 수가 없습니다. 또한 그곳에서 구체적으로 어떤 권능을 행하셨는지도 잘 알 수 없습니다. 그러나 오늘 본문을 통해서 볼 때 분명한 것은 주님께서 그곳을 방문하셨으며, 그곳에서 많은 권능을 행하셨다는 것입니다. 벳새다는 베드로와 안드레, 빌립의 고향입니다. 마가복음 8장이나 누가복음 9장에 보면 주님께서는 그곳을 자주 방문하셨습니다(막 8:22-26; 눅 9:10-11). 그리고 그곳에서 많은 병자를 고쳐주시고 권능을 행하셨습니다. 특히 주님께서는 그곳에서 베드로와 안드레와 빌립과 같은 제자들을 부르셨습니다. 그들은 주님의 부르심에 순종하였습니다. 주님의 부르심에 응답하며 회개하였습니다. 그들은 회개하고 순종함으로 하나님 나라의 도래를 보게 되었습니다. 가버나움은 주님께서 공생애를 시작하시고 활동하신 도시입니다. 마태복음 4:13절에 보면 왕이신 예수께서 하나님 나라의 공적인 사역자로서의 자신의 삶을 시작하셨을 때 가버나움에 가서 사셨습니다. 그러므로 가버나움은 예수께서 공생애 기간 상당히 오랫동안 머무셨던 제2의 고향이었습니다. 예수께서는 그곳을 중심으로 활동하셨습니다. 4:17절에 보면 예수께서는 가버나움에서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웠느니라”고 하시며 공생애를 시작하셨습니다. 이처럼 가버나움은 왕의 은혜롭고 부드러우며 말할 수 없는 달콤한 말씀을 처음으로 듣게 되었습니다. 이것은 큰 은혜요, 특권이 아닐 수 없습니다. 이처럼 주님께서는 이들 세 도시에서 그 어떤 도시들보다 많은 말씀과 권능을 행하셨습니다.

그런데 주님께서는 이 도시들을 향해 무엇을 하셨습니까? 책망하셨습니다. 그러면 주님께서 가장 많은 권능을 행하시며 사랑을 베푸신 도시들이 왜 책망을 받는 것입니까? 그들이 회개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이 세 도시들을 향해 노여워하신 것은 단지 그들이 복종하지 않았기 때문만이 아니었습니다. 예수님의 분노가 주님께 대한 그들의 배척으로 말미암았다고 할 수 있지만 그것이 분노의 근본적인 이유는 아니었습니다. 주님의 분노는 자신이 거절당했기 때문에 발생한 자기중심적 분노가 아니라 그보다 훨씬 더 깊은 이유가 있었습니다. 그것은 그들이 회개하지 않았기 때문이었습니다. 우리는 이 말씀의 의미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주님께서는 공생애를 시작하시면서 처음으로 하신 말씀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웠느니라”는 말씀으로 돌아가서 생각해 봐야 합니다. ‘회개하라’는 말씀은 마음을 바꾸라는 것입니다. 사람의 마음이 변할 때 사고가 변화되고, 사고가 변할 때 행동이 변합니다. 예수님께서 공생애를 시작하시면서 ‘회개하라’ 즉 ‘마음을 바꾸라’는 말씀은 단순하지만 깊이 있고 통찰력 있는 말씀이었습니다. 즉 이 말씀은 사람들의 행동이 변화되고 마침내 성품까지 변화되기 위해서는 먼저 옛 생각이 바뀌어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웠느니라”는 말씀은 단순히 회개만 하는 것이 아니라 마음이 하나님 나라에 복종하는 방향으로 바뀌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예수님 당시나 오늘날이나 사람들의 삶이 잘못되는 근본 요인은 바로 ‘불 경건’입니다. 불 경건이란 하나님을 모든 일에서 제외시키는 것입니다. 고라신과 벳새다, 가버나움뿐 아니라 그 당시 모든 도시들이 다 그러하였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런 도시를 향하여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웠느니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특히 고라신과 벳새다, 가버나움에서 많은 권능을 행하셨습니다. 그 권능을 통해서 하나님 나라의 실존을 보여 주셨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회개하지 않았습니다. 예수님께서는 회개하지 않은 그들을 책망하신 것입니다.

그러면 예수님께서 왜 그들을 책망하셨을까요? 곧 그들을 책망하신 목적이 무엇이었을까요? 미워서 그랬을까요? 아닙니다. 21절에 보면 주님께서는 그들을 책망하시며 “화가 있을 진저 고라신아 화가 있을 진저 벳새다야”라고 하셨습니다. ‘책망’과 ‘화’란 단어는 서로를 설명해 주고 있습니다. ‘책망하셨다’는 말은 문자 그대로 ‘꾸짖었다’는 뜻입니다. 우리가 사람을 꾸짖을 때 두 가지의 경우가 있을 것입니다. 사랑의 마음으로 누구를 꾸짖을 수 있고, 아니면 미워하는 마음으로 누구를 꾸짖을 수 있을 것입니다. 사랑하는 마음으로 꾸짖는다면 그것은 순수한 것입니다. 그러나 미워하는 마음으로 꾸짖는 것은 순수하지 못합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미워하는 마음으로 그들을 꾸짖으신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은 그러실 수 없는 분이십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들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꾸짖으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주님의 이 책망의 말씀을 순수한 의미로 받아들여야 합니다. 예수님은 “화가 있을 진저 고라신아, 화가 있을 진저 벳새다야”라고 그 도시들을 꾸짖으셨습니다. 이 말씀은 극도로 화가 나서 미움으로 호통 치는 것이 결코 아니었습니다. 또한 그들에게 어떤 재앙이 곧 내릴 것이라는 경고도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그 도시들이 회개하지 않고 제멋대로 행동함으로써 어떤 결과를 맞이할 것인가를 예고하는 것이었습니다. 주님께서는 너무나 안타까운 마음으로, 통곡으로 호소하신 것입니다. ‘너희들은 회개하기를 거절하였다. 너희는 스스로 화를 선택하였으므로 그 화가 너희에게 임하리라. 너희는 스스로 빛을 거절하고 어둠을 택하였다. 그리고 생명을 거절하고 죽음을 택하였다’는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그들이 진정으로 회개하고 하나님 나라를 받아들이기를 간절히 바라시는 마음으로 그들을 책망하신 것입니다.

그러면 이 재앙의 말씀이 어떻게 성취되었습니까? 오늘날 고라신은 전혀 찾아볼 길이 없습니다. 벳새다의 위치가 어디인지에 대해서도 의견이 분분합니다. 예수님 당시 이들 도시들은 가장 번창한 도시들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회개치 않으므로 인해 그 흔적조차 찾아볼 수 없게 되었습니다. 화는 법에서 벗어날 때 임하게 됩니다. 사람이나 그 도시가 어느 쪽을 선택하느냐에 따라서 그 운명이 결정됩니다. 예수님은 최고의 권위자이시며, 절대권을 갖고 계십니다. 엄위가 충만하신 분이십니다. 예수님께서 사람이나 도시를 직시하실 때 그들은 그 분의 오심을 깊이 생각하고 방향을 선택해야만 합니다. 만일 그 도시가 돌이켜 회개하면 하늘까지 높아질 것입니다. 그러나 그 도시가 그 분의 말씀을 듣지 않고 회개하지 않으면 어둠 속으로 던져질 것입니다. 주님의 손이 그 도시를 던져버리는 것이 아니라 그 도시가 스스로 하나님의 나라를 거절함으로써 스스로를 죽이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몸소 오래 동안 머무르셨던 가버나움을 유달리 강조하여 말씀하셨습니다. 23절에 보면 “가버나움아 네가 하늘에까지 높아지겠느냐 음부에까지 낮아지리라”고 하셨습니다. 가버나움은 모든 다른 도시들이 바라는 것처럼 하늘나라에 참여하기를 바랐습니다. 그러나 하늘나라의 위대한 이상을 바라보면서도 그들은 회개하기를 거절하였습니다. 그 결과 예수님의 예언대로 결국 가버나움은 지옥으로 내려갔습니다.

그러면 우리는 이 세 도시를 향해 책망하시는 예수님을 통해 배워야 할 교훈이 무엇입니까? 계시가 많으면 많을수록, 곧 은혜가 많으면 많을수록 거기에 따르는 책임도 크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자신이 가장 많은 권능을 베푸신 고라신과 벳새다와 가버나움의 죄가 심각함을 구약의 세 도시 곧 두로와 시돈과 소돔에 비교하셨습니다. ‘두로’와 ‘시돈’은 구약에서 하나님을 대적하는 교만한 도시로 자주 언급되었습니다. 특히 구약의 예언자들은 이 도시들이 바알 숭배를 했기 때문에 그 도시들을 책망했습니다(사 23장; 겔 26-28장; 욜 3:4; 암 1:9-10; 슥 9:2-4). ‘소돔’은 고모라와 함께 온갖 폭력과 극심한 성적 타락으로 무법천지가 되어 하나님께서 유황불을 내려 멸망시켰던 도시입니다(창 19장). 그런데 예수님의 방문을 많이 받고 예수님의 권능을 가장 많이 경험하고 체험한 고라신과 벳새다와 가버나움의 죄가 교만과 불신앙의 중심지였던 두로와 시돈보다 그리고 사악한 범죄가 난무했던 소돔보다 훨씬 심각하다고 지적하셨습니다. “너희에게서 행한 모든 권능을 두로와 시돈에서 행하였더면 저희가 벌써 베옷을 입고 재에 앉아 회개하였으리라”(21). “네게서 행한 모든 권능을 소돔에서 행하였더면 그 성이 오늘날까지 있었으리라”(23).

그리고 예수님께서는 이런 그들에게 분명하게 선언하십니다.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심판 날에 두로와 시돈이 너희보다 견디기 쉬우리라”(22).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심판 날에 소돔 땅이 너보다 견디기 쉬우리라”(24). 참으로 이 같은 주님의 선언은 충격적이 아닐 수 없습니다. 두로와 시돈은 하나님의 심판을 받아 역사상에서 사라져 버렸습니다. 소돔은 의인 열 명이 없어서 하나님으로부터 유황불 세례를 받았습니다. 창세기에 보면 소돔과 고모라에 임한 하나님의 불심판은 참으로 끔찍하고 무섭습니다. 하나님의 택한 자 외에 아무도 구원을 받지 못했습니다. 소돔보다 더 나뿐 상태가 있을 수 있겠습니까? 그런데 주님께서는 권능을 가장 많이 경험하고 체험한 고라신과 벳새다와 가버나움이 심판 날에 이 도시들이 받은 심판보다 더 무서운 심판을 받을 것이라고 하십니다. 이 사실이 말해주는 바가 무엇입니까? 이것은 계시가 크면 클수록, 곧 은혜가 크면 클수록 거기에 따르는 책임이 크다는 것을 말해 줍니다. 이것이 그리스도께서 죄에 대해서 심판하시는 원리입니다.      
구약의 두로와 시돈과 소돔에 비하면 당시 고라신과 벳새다, 가버나움은 풍성한 은혜 속에 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 고라신과 벳새다와 가버나움에 보여주었던 권능들은 하나님의 나라가 임했음을 인정하고 회개하기에 충분했습니다. 그들은 선지자들이 희미하게 예언했던 그림자와 모형을 붙들고 산 것이 아니라, 하나님 나라의 실체를 실제로 보며 체험했습니다. 그것은 참으로 큰 은혜요, 축복이 아닐 수 없습니다. 이들에게 주어진 하나님의 특별한 특권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회개하지 않았습니다. 도리어 완악한 마음으로 예수님을 배척하며 거절했습니다. 그들은 주어진 특권을 잘 감당하지 못했습니다. 그 결과 그들은 특권을 받지 못했던 사람들보다 훨씬 더 엄중한 심판을 받을 수밖에 없게 된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 도시들은 고라신과 벳새다와 가버나움보다 훨씬 더 풍성한 하나님의 계시를 가지고 있습니다. 우리들은 고라신과 벳새다와 가버나움이 예수를 알았던 것보다 훨씬 더 그를 잘 알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당시 이 도시들은 육체의 한계 속에 계신 예수를 봤습니다. 아직 성령을 보내어 주시지 않을 때였습니다. 그러나 오늘날은 예수님께서 부활 승천하시고 성령을 보내어 주셨습니다. 특히 개혁파 교회인 우리들은 하나님에 대해서 보다 바르고 보다 일관성 있는 계시를 가지고 있습니다. 우리 교회가 그 대열에 참여하게 된 것은 우리가 선한 삶을 살았거나 더 똑똑했기 때문이 아니었습니다. 주님의 일방적인 은혜요, 축복이었습니다. 그런데 은혜가 풍성한 만큼 하나님의 뜻에 합당하게 반응해야 할 책임이 크다는 것을 우리는 항상 명심해야 합니다. 큰 은혜를 경험한 사람은 많은 복을 누릴 수 있는 가능성과 동시에 바르게 반응하지 않을 때 훨씬 더 엄중한 심판을 받을 가능성도 함께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주님께서 우리에게 보여주신 계시를 따라 순종하며 왕께 영광의 면류관을 돌려 드리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우리가 복음을 받은 자로서 그리스도인의 의무를 감당해 갈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리스도인의 의무는 복음을 전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통치를 받으며, 그리스도께 복종하는 삶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은혜를 주사 우리로 하여금 은혜가 큰 만큼 책임도 막중하다는 것을 늘 기억하게 하시고 은혜를 잘 감당하게 하여주시기를 원합니다. 그리하여 하나님 나라를 소유한 복된 자들이 되게 하여 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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