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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년 마가복음 공부


중풍병자를 고치신 예수님


말씀:마가복음 2:1-12

 

오늘 말씀은 예수님께서 지붕을 뚫고 달아 내린 중풍병자를 고쳐 주신 사건입니다. 우리가 오늘 말씀을 살펴보는 가운데 이 사건을 통해서 계시하시는 하나님의 계시가 무엇인지 배울 수 있기를 바랍니다.

 

1절을 보면 “수일 후에 예수께서 다시 가버나움에 들어가시니 집에 계신 소문이 들린지라”라고 했습니다. 여기서 ‘수일 후에’(δίי ήμερών 디 헤메론)라는 말은 문자적으로 ‘여러 날 후에’라는 말로서 얼마간의 긴 시간을 암시 해 주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상당히 많은 시간이 흐른 뒤에 다시 가버나움으로 돌아오셨습니다. 사람들이 예수님께서 집에 계신다는 소문을 들었습니다. 2절에 보면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께서 집에 계신다는 소문을 듣고 예수님께로 모여들었습니다. 너무 많은 사람들이 모여들어서 집에 가득할 뿐만 아니라 대문 앞에도 용신할 수 없을 정도였습니다. 이들은 다 예수님께서 행하시는 이적을 보고 찾아왔을 것입니다. 그들은 능력 많으신 예수님께 자신들의 문제를 해결 받기 위해 나아왔을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자신을 찾아 나온 그들에게 도를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도는 아마도 하나님의 복음이었을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자신에게 나아온 자들에게 하나님의 나라가 임하였음을 말씀하셨으며, 죄 사함 받는 회개의 은혜에 관하여 말씀하심으로 모든 죄인들에게 그리스도가 오셨음을 알게 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열심히 자기에게 몰려온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도를 말씀하고 계실 때 어떤 일이 일어났습니까? 3-4절에 보면 “사람들이 한 중풍병자를 네 사람에게 메워 가지고 예수께로 올새. 무리를 인하여 예수께 데려갈 수 없으므로 그 계신 곳의 지붕을 뜯어 구멍을 내고 중풍병자의 누운 상을 달아내리니”라고 했습니다. 예수님께서 몰려온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도를 말씀하고 계실 때 한 중풍병자를 네 사람이 침상에 메워 나왔습니다. 그런데 그들은 너무 많은 사람들로 인해서 예수님 앞에 데려갈 수 없었습니다. 그때 그들은 포기하지 않고 예수님이 계신 지붕 위로 올라갔습니다. 지붕을 뚫어서 큰 구멍을 낸 후에 중풍병자가 누운 상을 예수님 앞에 달아 내렸습니다.

 

인간적으로 보면 이들의 행동은 무모하고 비난을 받을 수 있는 일이었습니다. 그런데 마가는 이것을 ‘믿음’이라고 합니다. 5절을 보면 “예수께서 저희의 믿음을 보시고 중풍병자에게 이르시되 소자야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 하시니”라고 했습니다. 중풍병자와 그의 친구들의 행동은 예수님에 대해 가진 믿음에서 나온 것입니다. 우리는 예수님께서 “저희의 믿음을 보셨다”라고 하신 말씀에 주목해야 합니다. 중풍병자는 중풍병에 걸려 있음으로 인해서 병의 원인인 죄와 죄의 결과인 사망에 대해 누구보다도 절실하게 의식하고 있었을 것입니다. 그는 예수님에 대한 소문을 듣고 자신을 병의 원인인 죄에서 구원하여 주실 분이심을 믿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런 그의 그 믿음을 아셨습니다. 이러한 믿음을 예수님께서는 중풍병자를 침상에 메고 나온 친구들에게서도 봤습니다. 그들에게는 선지자들이 증거 해 온 메시아에 대한 바람 곧 예수님에게 죄를 사하는 권세가 있으며, 죄로 말미암아 인생이 겪는 모든 병과 귀신들림도 능히 고치시는 권세가 있음을 믿는 믿음이 있었습니다. 그들이 이러한 믿음을 가지고 있었던 것은 예수님께서 갈릴리 지역을 돌아다니시면서 하신 전도를 전해 들었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과 귀신을 쫓아내시며 병을 고치시는 권세를 행하시는 것을 통해 인간을 죄에서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자비의 베푸심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께서 자신들을 만나 주시고 돌아보아 친구의 병을 고쳐주기를 바라며 믿음으로 나아왔습니다.

 

그런데 너무 많은 사람들이 몰려나와 있어서 도저히 예수님 앞에 나아갈 수가 없었습니다. 중풍병자를 데리고 온 친구들에게 장애물은 예수님께 먼저 나아온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 주변을 차지하고 다른 사람들이 오는 것을 막고 있었습니다. 많은 사람들은 문으로 들어가야 한다는 고정관념 때문에 예수님께 나아가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그런 고정관념을 깨고 그 장애물을 새롭게 생각함으로써 극복 하였습니다. 그들은 지붕에 올라가 지붕을 뚫고 중풍병자를 예수님 앞에 달아 내리고자 하였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그것을 즉시 행동으로 옮겼습니다. 그들은 생각을 바꿈으로써 예수님께 나아갈 수 있었습니다. 이러한 행함은 예수님께서 이 병자를 고쳐 주실 것이라는 확신이 없이는 불가능한 것입니다. 그들에게는 예수님께서 중풍병자를 고쳐 주실 것을 믿는 믿음이 있었습니다. 그 믿음이 그들로 하여금 지붕을 뚫고 달아 내리는 새로운 생각을 하게 하였고, 그것을 행동으로 옮기게 하였습니다.

 

마가는 행동을 동반하지 않는 지적 믿음을 믿음이라고 부르지 않습니다. 오늘날 우리의 믿음이 ‘증거가 없어도 그저 하나님을 믿기만 하라’는 틀 속에서 정보에 대한 확신으로 전락되고 있지는 않습니까? 우리는 하나님이 살아계신다는 것을 믿어야 합니다. 또한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아들이시라는 것을 믿어야 합니다. 그러나 그것이 지식에 그쳐서는 안됩니다. 귀신들도 하나님을 압니다.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압니다. 그러나 그들은 예수님과 상관하지 않았습니다. 마가복음 5:7절을 보면 “큰 소리로 부르짖어 가로되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의 아들 예수여 나와 당신과 무슨 상관이 있나이까. 원컨대 하나님 앞에 맹세하고 나를 괴롭게 마옵소서 하니”라고 했습니다. 이 말씀은 예수님께서 거라사인의 지방에 이르렀을 때에 더러운 귀신들린 사람이 무덤 사이에서 나와서 예수님께 절하며 하는 말입니다. 더러운 귀신은 예수님이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의 아들임을 알았습니다. 그래서 멀리서 예수님을 보고 달려 나와 절하며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의 아들 예수여”라고 한 것입니다. 더러운 귀신은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과 관계를 맺고자 하지는 않았습니다. 우리가 여기서 알 수 있듯이 지식적인 앎이 믿음이 아닙니다. 믿음은 행함을 동반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지식 이상의 믿음 곧 행함이 따르는 믿음을 가져야 합니다. 그런 자가 예수님을 만나게 되고 죄 사함을 받는 은혜의 역사가 있게 되는 것입니다.

 

마가복음 5:34절에 보면 예수님께서는 자신의 옷에 손을 댄 열두 해를 혈루증으로 앓던 여인에게 “딸아!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으니. 평안히 가라. 네 병에서 놓여 건강할찌어다”라고 하셨습니다. 여기서 ‘믿음’은 예수님의 옷에 손을 대면 자신의 병이 나을 것이라는 확신과 그 확신을 따라 예수님의 옷에 손을 댄 행위 모두를 포함합니다. 이 여인이 이러한 믿음을 통해 극복한 장애물은 중풍병자의 경우처럼 문 앞을 가로막고 있는 군중들과 같은 물리적인 것이 아니라 율법이었습니다. 구약 성경에 의하면 혈루증 앓는 사람에게 접촉되면 부정해 집니다. 레위기 15:7절에 보면 “유출병 있는 자의 몸에 접촉하는 자는 옷을 빨고 물로 몸을 씻을 것이며, 저녁까지 부정하리라”고 했습니다. 열두 해를 혈루증 앓던 여인은 이러한 율법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의 옷에 손을 댈 때 불결이 전염되지 않고 오히려 예수님의 정결함이 전해지리라는 것을 확신하고 예수님의 옷에 손을 댄 것입니다. 이처럼 믿음이란 단지 어떤 것을 확신함이 아니라 그 확신에 따라 포기하지 않고 행동하는 것입니다. 그러한 행동 과정에 장애물이 있어도 그것을 극복하는 것입니다. 믿음의 증거는 포기하지 않는 집요함입니다. 중풍병자를 지붕을 뚫고 예수님 앞에 달아내리는 집요함입니다. 이러한 집요함을 예수님께서 믿음으로 간주하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그들의 믿음을 보시고 중풍병자를 바라보셨습니다. 그리고 그를 죄로부터 용서하여 구원하셨습니다. 5절을 다시 보면 “예수께서 저희의 믿음을 보시고 중풍병자에게 이르시되 소자야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많은 사람들 앞에서 중풍병자를 향하여 “소자야!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고 선언하셨습니다. 여기 ‘소자야!’라고 하는 말은 어린 아들 곧 어린 사람으로 낮추어 말하는 표현인데 여기서는 어린 사람을 이르는 말입니다. 예수님께서 그를 자기의 백성이요, 자기의 아들로 여기셨음을 의미합니다. 그래서 ‘소자야 곧 내 아들아’하고 부르신 것입니다. 이것은 중풍병자를 불쌍히 여기셔서 부르시는 말씀입니다. 예수님은 중풍병자를 ‘내 아들아!’하고 부르시면서 그에게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고 그의 죄가 사함 받았다는 사실을 선언하셨습니다. 그럼으로써 예수님께서는 자신을 믿고 나아온 그에게 죄를 사하시는 분이심을 확증시켜 주셨습니다.

 

예수님의 이 사죄의 선언으로 말미암아 중풍병자는 죄 사함을 받게 되었습니다. 모든 인류가 노예처럼 놓여 있던 죄의 종에서 구원함을 받았습니다. 마가복음 1:22절에 보면 예수님은 그 가르치시는 것이 권세 있는 자와 같고 서기관들과 같지 아니하다고 하였습니다. 이 말씀은 예수님의 입에서 나오는 말씀은 권세 그 자체라는 말입니다. 예수님의 말씀은 권세 그자체가 되십니다. 그러하기에 예수님이 하시는 말씀은 권위가 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말씀이 듣는 자들에게 권세 있게 들어가서 그 듣는 사람들로 하여금 그 말씀에 복종하게 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것이 허락된 자에게는 그 말씀에 복종하여 죄를 회개하며, 하나님의 나라가 죄를 회개한 그의 마음속에 세워집니다. 그에게서 그동안 강력히 활동하였던 사단은 더 이상 힘을 발휘하지 못하고 쫓겨납니다. 그동안 그를 사단의 나라의 영역으로 삼고 지배하였던 사단은 패하여 쫓겨나고 더 이상 그를 다스리지 못합니다. 예수님은 죄를 사하는 권세가 있으신 분입니다. 중풍병자에게 네 죄가 사해졌다고 하신 선언은 중풍병자의 죄를 없이하고 그를 지배하였던 사단을 쫓아내셨음을 의미합니다. 이제 그에게 하나님 나라가 세워지고, 하나님이신 예수 그리스도가 주가 되셔서 다스리시는 평화의 나라의 한 부분을 이루게 되었음을 의미합니다. 그런 권세를 예수님이 행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중풍병자에게 그의 죄 사함을 선언하심으로써 그 집에 모인 많은 사람들에게 자신의 신적 권능을 나타내셨습니다. 그래서 예수님 자신이 누구신가를 드러내셨습니다. 예수님은 오직 하나님만이 하실 수 있는 죄를 사하는 권세를 가지신 분이심을 나타내셨습니다. 이를 통해서 지금 그들과 함께 있는 예수님이 하나님이심을 계시하시고 있는 것입니다. 곧 하나님의 신성을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중풍병자를 고치시는 이적을 행하셨으나 이를 본 율법학자들의 반응은 어떠했습니까? 그들은 예수님께서 죄를 사하시는 분이심을 수긍하고 받아들이려 하지 않았습니다. 6-7절을 보면 “어떤 서기관들이 거기 앉아서 마음에 의논하기를 이 사람이 어찌 이렇게 말하는가? 참람하도다. 오직 하나님 한 분 외에는 누가 능히 죄를 사하겠느냐”라고 하였습니다. 예수님이 집에 계신다는 소문을 듣고 온 많은 사람들 가운데는 예수님의 말씀을 들으려고 하고, 예수님이 어떤 분이신가를 알려고 하는 사람들이 있었는가 하면 이처럼 예수님을 비난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도 있었습니다. 그 사람들은 갈릴리 여러 동네에서 또는 예루살렘이나 유대에서 온 종교 지도자들입니다. 그 사람들이 왜 예수님께 왔는가 하면 예수님이 하시는 말씀에서 구원의 진리를 깨닫기 위해서가 아닙니다. 그들이 예수님을 찾아 온 데에는 숨은 목적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예수님에게서 책잡을 빌미를 찾고자 함이었습니다. 그래서 서기관 몇 사람이 예수님이 중풍병자를 고치는 그 현장의 자리에 앉아서 보고 있다가 마음 속으로 수군거리며 생각하기를 “이 사람이 어찌 이렇게 말하는가. 참람하도다. 오직 하나님 한 분외에는 누가 능히 죄를 사하겠느냐”라고 했습니다. 이것은 그들이 예수님께서 죄를 사하시는 일을 하시는 것을 용납하지 않는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그들은 예수님께서 죄를 사하시는 선언의 말씀을 오히려 하나님을 모독하는 말을 하고 있다고 여겼습니다. 하나님만이 죄를 사하실 수 있는데 죄사함을 선언하는 그런 말을 하는 예수는 마치 자기가 하나님이나 되는 것처럼 행동하고 있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예수님은 중풍병자의 죄를 사하시고 병을 고쳐 주시는 일을 하시기 전에 이미 그들이 마음에 어떤 생각을 품고 있는지를 아셨습니다. 그들은 처음부터 예수님이 하나님의 거룩하신 자이심을 인정 하려고 하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이 하시는 말씀에서 하나님의 뜻을 발견 하려고 하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이 행하신 이적에서 하나님의 권능을 보려고 하지 않았습니다. 다만 그들은 책잡을 기회만 보고 있었습니다. 그런 그들의 생각을 아시고 계신 예수님께서는 중풍병자의 죄를 사하여 주신다는 말씀을 통해서 그들에게 예수님 자신이 인간의 죄를 사하는 절대적인 신적 권세가 있음을 증거 하고자 하셨습니다. 그리고서는 이어서 그들이 품고 있는 생각이 얼마나 악한 마음에서 나오는 것인가를 다음과 같은 비교를 통해서 폭로하셨습니다. 8-9절을 보면 “저희가 속으로 이렇게 의논하는 줄을 예수께서 곧 중심에 아시고 이르시되 어찌하여 이것을 마음에 의논하느냐. 중풍병자에게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 하는 말과 일어나 네 상을 가지고 걸어가라 하는 말이 어느 것이 쉽겠느냐”고 하셨습니다. 우리의 생각에는 어느 것이 쉽겠습니까?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하는 말입니까? 아니면 “일어나 네 상을 가지고 걸어가라”고 하는 말입니까? 일반적으로 사람들은 “일어나 네 상을 가지고 걸어가라”는 말이 어렵다고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네 죄사함을 받았느니라”고 하는 말은 당장 그 증거가 나타나지 않지만 “일어나 네 상을 가지고 가라”고 하는 말은 당장 그 증거가 나타나기 때문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이러한 비교의 말씀을 하시는 것은 둘 중에서 어느 것이 더 쉽고 어느 것이 더 어렵다는 것을 말하기 위해서가 아닙니다. 예수님께서 이렇게 두 말씀을 비교해서 말씀하시는 것은 ‘말로서 중풍병자를 고치는 일이란 죄를 사하는 것만큼 사람이 할 수 없는 일이다. 사람의 능력 밖인 오직 하나님만이 할 수 있는 일이다. 그것을 이제 너희가 두 눈으로 똑똑히 보게 될 것인데 보거든 인자가 땅에서 죄를 사하는 권세가 있는 줄을 알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둘 다 사람으로서는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다시 말해서 서기관들의 생각은 하나님만이 죄를 사하실 수 있다는 것인데 예수님은 그들이 생각하고 있는 대로 과연 그렇다고 인정하고 들어가는 것입니다. 그리고서는 그것처럼 중풍병자에게 일어나 걸어가라고 할 수 있는 것도 하나님의 능력이 아니고서는 할 수 없는 일임을 예수님은 알게 해 주고자 하시는 것입니다. 이를 통해서 예수님 자신이 죄를 사하는 권세가 있음을 보이시고자 하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중풍병자에게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고 선언하셨습니다. 그런데 이제는 그 선언을 하신 예수님 자신이 땅에서 죄를 사하는 권세가 있는 줄을 그들로 알게 하려고 한다고 하시면서 중풍병자에게 말씀하셨습니다. 11절을 보면 “내가 네게 이르노니 일어나 네 상을 가지고 집으로 가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중풍병자가 일어나 그가 이제까지 누워 있던 상을 들고 집으로 걸어가게 하시는 것을 통해서 예수님 자신이 세상에서 죄를 사하는 권세를 가지신 분이심을 실증해 보이고자 하셨습니다. 사람들로 하여금 눈으로 보고 확인시켜 주고자 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그들로 더 이상 부인하지 못하게 하시고자 하셨습니다. 자신이 중풍병자의 죄를 사한다고 한 말이 거짓이 아닌 진실임을 증명해 보이고자 하신 것입니다.

 

그러면 “일어나 네 상을 가지고 집으로 가라”고 하신 예수님의 말씀에 대한 중풍병자의 반응이 어떠합니까? 12절을 보면 “그가 일어나 곧 상을 가지고 모든 사람 앞에서 나가거늘. 저희가 다 놀라 영광을 하나님께 돌리며 가로되 우리가 이런 일을 도무지 보지 못하였다 하더라”고 했습니다. 참으로 놀라운 일이 일어났습니다. 중풍병자는 예수님께서 일어나 네 상을 가지고 집으로 가라고 하신 말씀에 즉시 일어나 이제껏 누워있던 상을 가지고 모든 사람 앞에서 나아갔습니다. 예수님의 말씀 한마디에 중풍병자가 나음을 받았습니다. 평생 누워 있던 상을 들고 집으로 가는 놀라운 기적의 역사가 일어났습니다. 이 광경을 본 모든 사람들이 놀라며 영광을 하나님께 돌렸습니다. 곧 이런 일을 행하신 하나님께 감사를 드리며, 하나님의 이름을 경배한 것입니다. 이를 통해서 예수님은 자신이 죄 사함의 권세가 있음을 모든 사람 앞에서 나타내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중풍병자의 병을 고치시는 이적을 행하신 것은 순전히 그리고 전적으로 자신을 계시하시는 한 방편으로 사용하신 것입니다. 자신이 가르친 말씀을 온전히 세워 나가시는 일로서 행하신 것입니다.

 

예수님이 말씀하신 대로 중풍병자가 나아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집으로 돌아간 것을 목격한 사람들은 너무나 놀랐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두려움을 느꼈습니다. 그래서 모든 사람이 놀라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심히 두려워하여 말하기를 “우리가 전에는 이기이한 일을 도무지 보지 못하였는데 오늘 우리가 보았도다”라고 하였습니다. 예수님에게서 하나님의 신적 권능이 행하여짐을 보고 놀라워하며 두려움을 느낀 것입니다. 그들은 이제까지 모두지 보지 못한 신비한 일을 보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예수님이 중풍병자의 죄를 사하고 병을 고치신 것에서 우리 자신이 알고 있는 지식과 믿음의 수준이 “예수님은 하나님이시다. 예수님은 그리스도로서 신적 권능이 있다”는 것을 인정하고 그분의 말씀에 순종하여 나가는 데로 들어가도록 해야 합니다. 그러한 믿음이 우리로 하여금 더욱 예수님께로 가까이 나아가게 하며 그분만을 바라보며 의지하게 할 것입니다. 그래서 어느 믿음에까지 이르러야 하는가 하면 부활의 권능에까지 이르러야 합니다. 성령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은혜를 베풀어 주셔서 우리로 하여금 예수님이 죄를 사하는 권세가 있음을 알게 하여 주시기를 원합니다. 또한 중풍병자와 그 친구들의 믿음을 허락 하여 주시기를 원합니다. 그리하여 우리가 믿음으로 예수님께 나아가 죄사함을 받는 은혜의 역사가 우리 가운데 충만케 하여 주시기를 원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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