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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울과 야고보의 칭의 개념 비교


가. 바울 서신과 야고보서 간의 논쟁


바울서신의 ‘이신칭의’와 야고보서의 ‘이행칭의’ 개념의 충돌은 오늘날까지도 치열하게 논쟁되고 있는 대표적인 난해 구절 중의 하나이다. 약 2:24절은 “이로 보건대 사람이 행함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고 믿음으로만 아니니라”라고 하고 있는 반면 롬 3:28은 “그러므로 사람이 의롭다 하심을 얻는 것은 율법의 행위에 있지 않고 믿음으로 되는 줄 우리가 인정하노라”라고 하고 있어서 표면적으로 이 두 구절은 정면으로 충돌되고 있다. 뿐만 아니라 바울이 이신칭의의 근거로 아브라함의 이야기를 들고 있는데(롬 4장, 갈 3:6), 야고보는 같은 아브라함의 이야기를 가지고 이행칭의의 근거를 삼는다(약 2:21). 이 같은 두 서신간의 충돌은 2000년 교회사 동안 성경의 독자들을 당혹스럽게 해 왔으며, 정경에 속하는가 하는 논란까지도 있었다. 이는 그리스도의 공생애 사역이나 죽음 부활 같은 기독론적인 언급이 야고보서 내에서 거의 나타나고 있지 않다는 것과 야고보 저작설에 대한 의심, 그리고 무엇보다도 야고보서가 행함을 강조하기 때문이다. 그러한 점 때문에 루터는 이 야고보서 서신을 정경으로 인정하기를 주저하였으며, 심지어 ‘지푸라기 서신’이라고 하면서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야고보서는 행위는 부인하고 믿음에만 의존했던 사람들을 반박할 목적으로 기록되었으며, 기독교인의 마음속에 자신이 해야 할 의무를 기억하게 하고 이해하게 하며, 말씀으로 간직하기에는 너무나 빈약하며 성경을 불완전하게 하고 있다. 그리고 사랑으로 말미암아 비로소 율법을 완전히 성취하게 된다는 관점에서 보고 있는 바울이나 성경 전체와 직접적으로 상반된다. 그러므로 나는 야고보서를 나의 성경에서는 정경의 위치에 놓지 않을 것이다. 야고보서는 로마서나 갈라디아서에 비교해 볼 때 하나의 보잘것 없는 <지푸라기 서신>이다.”


오늘날에 와서도 믿음과 행함의 관계에 대한 끊임없는 논쟁의 중심에는 이 야고보서가 자리하고 있다. 여전히 로마 가톨릭과 개신교 간에는 이 부분과 관련한 칭의론 논쟁이 계속되고 있으며, 더욱이 최근에 샌더스(Sanders)나 던(Dunn)에 의한 ‘바울의 새관점(New Perspective on Paul-줄여서 NPP)’이 등장하면서 율법에 대한 새로운 이해가 제시됨과 동시에 구원에 있어서 율법의 행위가 강조되기 시작하였다. 이 때 야고보서는 새관점의 견해를 지지할 더 없이 중요한 서신으로 떠오르게 된 것이다. 많은 주석가들이 이 영향아래서 행위를 구원의 본질적인 부분으로 귀속시키기를 서슴없이 하고 있으며, 다시금 로마 가톨릭의 세미 펠라기안적이고 알미니안적인 행위구원론이 성행하고 있는 실정이다.


이러한 정황 가운데서 우리는 야고보서가 과연 바울의 서신과 충돌되는지 면밀하게 살펴볼 필요가 있고 성경적인 이신칭의 교리를 시급히 정립해야할 필요가 있는 것이다. 과연 야보고서와 로마서는 서로 충돌되는가?


나. 이 충돌을 해결하기 위한 여러 가지 시도들


바울서신과 야고보서 서신간의 모순을 해결하기 위한 여러 가지 시도들이 있었다. 이 점에 대해서 4가지로 정리해보면 다음과 같다.


1) 바울과 야고보의 주장은 대립된다는 견해


다시 말해 바울은 야고보의 가르침에 동의하지 않아 그것을 수정하고 있거나 아니면 야고보가 바울의 메시지에 동의하지 않아 그것을 수정하고 있다고 보는 견해이다. 이 견해를 취하게 될 때에는 여러 가지 반응들이 나타날 수 있다. 먼저 루터처럼 야고보서의 정경성을 의심하게 될 수도 있고 아니면 성경에는 서로 상반되는 주장들이 동시에 있을 수 있다는 식으로 나아갈 수 있다. 대표적으로 구약학의 권위자인 월터부르그만은 바르트의 수사학적 양식을 따라서 성경 내부에는 많은 모순들이 존재하는데 그것들을 신학적인 카테고리로 일관화시켜서는 안되며, 그 모순된 채로 그대로 드러내야 된다고 주장한다. 따라서 이런 입장에 따르면 야고보서와 바울서신이 서로 모순되지만 이 두 진리를 모순된 채로 그대로 받아들이고 품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것을 하나의 일관된 신학적인 입장으로 조화시키는 것은 각 서신들의 고유한 메시지와 강조점이 희석시키는 오류를 범하는 것과 동일하다고 주장한다.


2) 야고보가 바울의 복음에 대한 도덕률 폐기론적인 오해를 바로 잡고 있다는 견해


야고보가 이신칭의 복음 자체를 반대하지는 않지만, 바울의 복음을 도덕률 폐기론으로 오해한 많은 유대인들처럼 야고보도 그렇게 오해하였고, 그래서 그러한 바울에 대해 반대했다는 것이다.


3) 바울과 야고보의 주장은 행위구원론으로 일치된다는 견해


전통적으로 바울은 행함과는 상관없이 오직 믿음으로, 오직 은혜로 구원받는 이신칭의 교리를 전한 것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바울에 대한 전통적인 시각을 전면적으로 뒤엎어버리고 새로운 관점으로 바울을 해석하고자 하는 학자들이 등장하게 되었다. 이름 하여 바울의 새관점(NPP) 학파들이다. 이들의 주장에 의하면 바울이 반대한 행위란 율법의 계명들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단순히 민족적 구별의 표지였던 의식법(할례, 음식법, 안식일 등)으로서의 행위라는 것이다. 그리고 바울 역시 구원에 있어서 행함(선행)을 강조했고, 이는 행함을 강조하는 다른 서신들, 예를 들어서 야고보서와 마태복음, 요한계시록, 요한일서 등의 서신과도 일치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언약과 율법과 행위에 대해 새로운 시각으로 바라보자는 이 견해는 현대판 세미 펠라기우스주의자들이라고 할 수 있다.


4) 바울과 야고보는 동일한 이신칭의 교리로 일치된다는 견해


전통적인 견해로서 야고보 역시 바울과 동일한 이신칭의를 주장하지만, 다만 그 의롭다 함을 받는 믿음이 행함을 나타내지 않는 죽은 믿음이 아니라 행함을 산출하는 살아있는 믿음임을 강조하고자 한 것이라고 보는 입장이다. 즉 모순처럼 보이는 상황은 바울과 야고보가 서로 다른 대적자들을 상대했기 때문이며, 따라서 같은 단어들(칭의, 믿음, 행함)을 사용했다 할지라도 그 의미(개념)에 있어서는 상당한 차이가 있다는 것이다.


다. 각 견해들에 대한 평가


1) 먼저 야고보와 바울이 서로 모순되고 충돌된다는 입장은 성경 전체의 문맥으로 볼 때 적절하지 않다. 우선 서신의 저작시기와 관련하여 생각해 볼 때, 전통적으로 야고보서가 로마서(53-56년)나 갈라디아서(50년경)보다 먼저 쓰였을 것이라고 보기 때문에, 야고보가 바울 서신을 보고서 바울의 견해를 반대하고자 야고보서를 쓴 것으로 보기는 어렵다는 것이 학자들 간의 지배적인 견해이다. 뿐만 아니라 야고보서가 바울서신을 인용한다거나 바울에게 중요했던 이슈들을 거의 다루지 않고 있는 것을 볼 때 첫 번째 견해는 근거가 부족하다. 반대로 야고보의 서신을 바울이 보고 그것을 반대하여 로마서나 갈라디아서를 썼다는 견해도 받아들이기 힘들다. 바울과 야고보의 관계(행 15:13; 21:18) 및 바울의 야고보에 대한 태도(갈 1:19; 2:9, 12)로 미루어 볼 때, 바울이 야고보를 대단히 존경했던 것이 분명하기 때문이다. 이에 대해서 한천설은 다음과 같이 논술해가고 있다:


성경의 기록을 미루어 볼 때 야고보와 바울과의 사이에는 네 차례의 만남이 있었다. 1차 방문(갈 1:18-20), 2차 방문(행 11:21-30), 3차 방문(행 15:6-29), 4차 방문(행 22:17-23). 이 기록을 통해서 볼 때 이들 사이에 대립적인 모습이 있었음을 시사해 주는 대목을 한 곳도 발견할 수 없다. 오히려 이 두 사람 사이에는 사상의 일치성이 존재하고 있었다. 특히 바울이 부조여행을 위하여 예루살렘을 방문했을 때(행 11:21) 바울은 예루살렘 교회의 지도자인 야고보에게 자신의 복음을 제출하였고, 야고보는 이 복음을 승인하였다. 또한 세 번째 방문인 예루살렘 회의에서도 야고보는 다시 한 번 바울의 복음을 재 승인했던 것을 분명히 알 수 있다. 특히 예루살렘 회의에서 사회를 보았던 야고보는 이방의 선교는 구약 예언의 성취임을 밝히면서, 이방인에게 할례를 비롯한 율법의 멍에를 메우는 것을 거부하면서 바울의 "할례와 율법 없는 복음"의 정당성을 인정하였다(행 15:13-22). 이렇게 하여 바울과 예루살렘 교회의 기둥 사도들, 특히 야고보 사이에는 믿음으로 의롭게 된다고 하는 "신학적인 합일점"이 이루어지게 되었던 것이다. 이 회의에서의 야고보의 태도를 통해 그가 "율법"을 구원의 수단으로 이해하고 있지 않다는 것을 분명히 보게 된다. 만약 야고보가 유대교에서 말하는 것처럼 "율법을 구원의 수단"으로 중요하게 여겼다면, 바울은 반대하여 이방인들에게도 이 율법의 행위를 요구하였을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율법의 요구들을 거부하였던 것은 결국 야고보는 이러한 율법의 행위가 구원과 관련되지 않았다는 것을 분명히 하고 있었음을 밝히는 것이다.


2) 야고보가 바울의 이신칭의 복음을 도덕률 폐기론으로 오해했다는 견해는 야고보가 바울의 이신칭의 복음에 있어서 핵심이 되는 이슈들(할례나 율법과 복음과의 관계 등)을 거의 다루고 있지 않다는 점에서 받아들이기 힘들다.


3) 새관점 신학은 율법과 이스라엘의 옛언약에 대한 근본적으로 그릇된 이해에서 비롯된다. 그들이 말하는 언약적 율법주의는 이스라엘의 역사에 있어서 표면적으로 옳아 보이지만, 전체적으로는 율법을 긍정적으로만 보려고 하는 편향된 관점이다. 구약의 유대교는 은혜로 언약 안에 들어가지만(get in) 율법을 행함으로 그 언약 안에 머무를 수 있는(stay in) 그런 종교가 아니다. 이스라엘의 역사는 처음부터 끝까지 은혜언약 아래 있는 것이고, 그 은혜 위에 행위언약으로서 율법이 더해진 것이다. 그리고 그 율법에는 행위언약적 요소가 있고, 복음적인 요소도 함께 들어가 있다. 이 율법을 통해 하나님의 절대적 도덕적 표준으로서의 거룩과 공의가 나타나고, 율법에 명시된 언약적 저주를 통해 하나님의 심판으로서 공의가 나타나며, 인간의 전적무능력과 부패함을 알게 하고, 그리스도의 복음으로 사람들을 인도하는 몽학선생으로서 역할을 하며, 이미 율법 안에 복음이 증거되어 있는 것이다. 이렇게 율법은 선악과 금령과 마찬가지로 하나님의 도덕법으로서 행위언약적인 특성을 가진다. 그러나 이 율법이 약속과 은혜를 대체하거나 없이한 것이 아님을 우리는 이스라엘 역사를 통해서 보게 되는 것이다. 그들을 곧바로 율법을 따라 언약적 저주로 심판하지 않으시고 오래 참으시고, 선지자들을 보내셔서 회개를 요청하시고, 심판하셔도 언제나 남은 자를 두신다는 것은 그들이 여전히 은혜 아래 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이스라엘의 역사는 결코 언약적 율법주의가 아니다. 이러한 올바른 율법과 옛 언약에 대한 인식을 가지고 새관점을 보면 그 주장이 일관성이 없는 주장임을 쉽게 파악할 수 있다.
또한 바울이 율법 순종함을 반대한 것이 아니라 민족적 구별의 표지로서 할례만을 반대했다는 주장은 할례가 곧 옛 언약의 표지로서 할례 받는 자로 하여금 율법의 요구 아래 그들을 가둔다는 사실을 미처 인식하지 못한 주장이다. 할례를 받는다는 것은 단순히 민족적 우월주의에 빠져서 이방인과 유대인간의 하나 됨을 해치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율법을 순종하고 그 율법에 따라 상벌을 받아야 하는 옛언약의 이스라엘로 돌아감을 의미한다.


(5)바리새파 중에 믿는 어떤 사람들이 일어나 말하되 이방인에게 할례 주고 모세의 율법을 지키라 명하는 것이 마땅하다 하니라(10) ... 그런데 지금 너희가 어찌하여 하나님을 시험하여 우리 조상과 우리도 능히 메지 못하던 멍에를 제자들의 목에 두려느냐(행 15:5,10)


바울의 할례 없는 복음을 사도행전은 율법의 행함를 통한 구원을 배제하는 복음과 동일한 것으로 묘사하고 있다. 즉 할례는 율법 아래 있게 되어 율법을 행할 의무와 율법에 따라 상벌을 받을 것과 직결되는 사항이다. 따라서 성경을 전체적으로 공평하게 파악한다면 새관점은 결코 받아들여질 수 없는 해괴한 이론이며, 바울이 행위 구원론을 주장했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4) 아마도 이 견해가 가장 타당한 견해일 것이다. 바울과 야고보는 서로 다른 이슈를 다루고 있으며, 따라서 같은 용어라도 전혀 다른 의미로 사용한다. 이렇게 보는 것은 권연경 교수가 말하는 것처럼 바울신학이라는 강력한 다리미로 야고보서나 마태복음을 다림질하는 것이 아니다. 우리는 각 서신의 독특한 강조점과 메시지를 희석시키지 않으면서도 성경적인 구원론을 조화롭게 정립할 수가 있다.


라. 개혁파 견해 정리


야고보와 바울 사이의 모순적인 상황은 그들이 각기 다른 문제를 다루고 있다는 점에 기인한다. 바울이 직면한 문제는 바울 자신이 바리새인이었을 때 친히 행했던 것으로서, 구원을 위해 율법을 준수해야 한다는 입장이었다. 다시 말해 (부분적으로라도) 율법의 행위를 통해 스스로의 의를 세움으로써 칭의를 얻을 수 있다고 하는 율법주의 또는 자의적 경향과 싸웠던 것이다. 반대로 야고보는 기독교 진리에 대한 단지 지적인 동의로서의 신앙이 구원에 충분하다고 생각했던 사람들과 논쟁하였다. 즉 믿음에 합당한 행함이 나타나지도 않으면서 스스로 올바른 신앙생활을 하고 있고 또한 자신이 응당 구원을 받을 것이라고 착각하는, 다시 말해 오직 은혜로의 구원을 강조하면서 행함을 부정하는 도덕률폐기론적인 사상과 맞서 싸웠던 것이다.


이러한 상이한 대적자들 때문에 바울과 야고보는 동일하게 칭의, 행함, 믿음이라는 단어를 사용하지만, 그 의미(개념)는 각각에 있어서 차이가 나는 것이다.


1) 믿음


바울은 칭의가 부분적으로라도 율법의 행함에 기초해야 된다는 율법주의자들에 맞서서 율법의 행함을 배제한 오직 믿음으로, 오직 은혜로의 칭의를 말하였다. 바울에게 있어서 믿음이란 언제나 자신의 의를 세우는 율법의 행위와 대조되는 것으로서 십자가의 공로와 그리스도의 의만을 전적으로 의존하는 믿음이며, ‘사랑으로 역사하는 믿음’(갈 5:6)이고, 그리스도를 신뢰하고 헌신하는 참된 믿음을 말한다.


그러나 야고보서에서는 이와는 달리 세 가지 종류의 믿음이 소개되고 있다. 1) 행함이 없는 믿음 2) 귀신들의 믿음 3) 온전한 믿음이 그것이다. 이것은 바울서신에는 나타나지 않았던 부분이다. 다시 말해 바울의 관심은 ‘참된 믿음’이냐 ‘거짓된 믿음이냐’ 하는 구별에 있지 않고, ‘믿음으로의 칭의’냐 ‘행위로의 칭의’냐 하는 것에 관심이 있었던 반면, 야고보는 그 믿음이 ‘행함을 수반하는 참된 믿음’이냐, ‘행함이 수반되지 않는 가짜 믿음’이냐를 구별하는데 관심이 있었던 것이다.


내 형제들아 만일 사람이 믿음이 있노라 하고 행함이 없으면 무슨 이익이 있으리요 그 믿음이 능히 자기를 구원하겠느냐(약 2:14)
이와 같이 행함이 없는 믿음은 그 자체가 죽은 것이라(약 2:17)
영혼 없는 몸이 죽은 것같이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것이니라(약 2:26)


위 구절들에서 말하는 믿음은 모두 행함을 생산하지 않는, 지식적인 동의수준의 믿음으로서 사실상 가짜 믿음이요, 죽은 믿음이다. 바울에게 있어서 믿음 없는 행실이 죽은 행실이듯이(롬 14:23), 야고보에게 있어서 행함 없는 믿음은 죽은 믿음인 것이다. 이러한 종류의 믿음을 염두에 두변서 본문을 살펴야 하며, 본문에서 나오는 ‘믿음’이라는 단어가 이 세 의미 중에 무엇을 뜻하는지를 문맥에 따라 결정하고 선택해야 한다.


2) 행함


그리고 행함에 있어서도 차이가 있다. 바울이 “율법의 행위로 의롭다 함을 받지 못한다”고 했을 때 행함이란 죄인이 율법을 행함으로써 하나님 앞에서 의롭다 함을 얻고 용인되고자 하는 인간 스스로의 노력으로서의 행위를 말한다. 그러나 야고보가 말하고 있는 행함이란 이미 은혜로 의롭다 함을 받은 신자의 행위를 말하는 것이다. 이것은 믿음으로부터 나오는 모든 행위를 말하는 것으로서 믿음의 열매이며, 이것이 있어야 그 믿음이 참 믿음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이다. 야고보가 말한 행함은 바울의 말을 빌리면 성령의 열매로서의 행위이다(갈 5:22-23).


이러한 바울과 야고보의 믿음과 행함의 차이에 대해서 루터는 이렇게 말했다:


“그는(바울) 이런 행위들을 믿음과 은혜와는 상관없으며 형벌의 두려움이나 그에 상응한 보상이라는 매혹적인 약속 때문에 율법이 재촉하는 그런 율법의 행위들이라고 부른다. 그러나 신앙의 행위를 그는 자유의 영 안에서 행해지며 오직 하나님의 사랑에서 온 행위들이라 부른다. 이런 것들은 오직 신앙에 의해 의롭게 된 자들에 의해서만 행해질 수 있다. 그러나 율법의 행위들은 어느 누구도 의롭게 할 수 없으니 진실로 그것들은(율법들) 자신이 불의한 자이며 칭의가 필요한 자라는 것을 알게 하기에 그것들(율법의 행위들)에는 큰 장애가 있다.”


3) 칭의


우리는 흔히 바울과 야고보의 모순에 대해 답하기를 바울은 오직 믿음으로 의롭게 됨을 말하고 야고보는 그 의롭다 함을 받는 믿음이 행함이 없는 죽은 믿음이 아니라 행함을 산출하는 살아있는 믿음임을 말하는 것이라고 주장한다. 물론 이는 의심할 바 없는 사실이다. 그러나 야고보는 21절과 24절에서 행함으로 의롭다함을 얻는다고 분명하게 진술하고 있음을 주목해야 한다.


(21)우리 조상 아브라함이 그 아들 이삭을 제단에 드릴 때에 행함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은 것이 아니냐(24)이로 보건대 사람이 행함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고 믿음으로만 아니니라


이러한 진술 때문에 상기와 같은 답변이 모든 난관을 해소하는 것이 아니라는 반론에 봉착할 수도 있다. 그러면 여기서 야고보가 ‘의롭다 함을 받는다’고 표현했을 때 의도한 바가 무엇일까? 만일 야고보가 여기서의 ‘칭의’를 ‘죄인의 최초의 칭의’로 의미했다면 그것은 바울과 정면으로 충돌할 뿐만 아니라 자기 자신과도 모순된다. 왜냐하면 야고보는 아브라함이 창세기 15장에서 믿음으로 이미 의롭다 함을 받았다는 사실을 언급하고 있기 때문이다.


(23)이에 경에 이른바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으니 이것을 의로 여기셨다는 말씀이 응하였고 그는 하나님의 벗이라 칭함을 받았나니(약 2:23)


그러므로 야고보가 사용한 ‘칭의’ 개념은 바울이 말하는 죄인의 하나님 앞에서의 최초의 칭의를 의미하는 것이 아님이 분명하다. 보다 정확한 개념을 파악하기 위해서는 야고보가 이 단어를 어떻게 사용하는지에 주목해야 한다.


(22)네가 보거니와 믿음이 그의 행함과 함께 일하고 행함으로 믿음이 온전케 되었느니라
(23)이에 경에 이른바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으니 이것을 의로 여기셨다는 말씀이 응하였고 그는 하나님의 벗이라 칭함을 받았나니


여기서 믿음이 행함과 함께 일하고, 행함으로 믿음이 온전케 되었다고 말하고 있다. 그리고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음으로 의롭게 되었다는 말씀이 응하였다고 하고 있다. 여기서 ‘온전케 되다’는 단어는 ‘충만한 발전에 이르렀다’는 의미이다. 곧 전에도 아브라함에게는 칭의함 받는 믿음이 있었지만 아직 초보적인, 유아적인 믿음에 불과했는데 이제 이러한 순종을 통하여 그의 믿음이 성숙한 단계, 견고한 단계에 이르렀다는 의미로 이해할 수 있다. 이처럼 야고보는 하나님을 처음 믿는 그 순간의 관점에서 말하는 것이 아니라 어떤 사람이 하나님을 믿고 나서 그 믿음이 성장하는 전 과정을 염두에 두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응하였다’는 말은 원래 ‘충만해졌다’는 의미로서 앞의 ‘온전케 되었다’는 말과 같은 의미로 이해할 수 있다. 즉 창세기 15장에서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받은 것이 창세기 22장에서 그의 순종으로 충분히 드러나고 하나님에 의해 인정되었다는 의미이다. 야고보는 아마도 창세기 22장의 다음 구절에 주목했을 것이다.


(12)사자가 가라사대 그 아이에게 네 손을 대지 말라 아무 일도 그에게 하지 말라 네가 네 아들 네 독자라도 내게 아끼지 아니하였으니 내가 이제야 네가 하나님을 경외하는 줄을 아노라(창 22:12)


하나님은 아브라함이 자신을 경외하는 줄을 정말 모르셨는가? 그때 되어서야 아셨는가? 하나님께서 이제야 아셨다고 하셨기 때문에 우리는 이 질문에 그렇다고 대답해야 할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참 믿음이 살아 역사하여 행함을 산출하는 것을 보시고서 아브라함이 자신을 경외한 줄을 아셨다. 물론 하나님께서는 그의 순종 전에 이미 그의 믿음을 아셨고 처음 믿을 때 이미 의롭다고 여겨주셨다. 그러나 아브라함의 순종을 통해 그 믿음이 참 믿음임이 분명하게 드러나게 되었고, 그것을 하나님께서는 인정해 주신 것이다. 김광열은 이 점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아브라함의 믿음은 언제나 산 믿음으로서, 행동하는 믿음이었고, 창 15장에서 하나님은 그의 행동을 모리아 산에서의 사건을 통해서(창 22장) 확인하시기 전에도 그의 믿음을 참 믿음으로 아실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인간의 차원에서는, 창 22장에서의 그의 행동으로 확인하고서야 그의 믿음의 온전성을 확신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야고보의 관점) 아브라함과 하나님 사이의 언약적 관계는 이미 창 15장에서부터 시작되었던 것이며, 아브라함은 그 때부터 산 믿음으로 반응하였으므로, 그 믿음은 이미 하나님에 의해서 확인되어 ‘의롭다함’을 얻을 수 있었던 것이나,(바울 서신의 관점) 그것이 모리아 산에서 순종으로 표현되는 가운데, 산 믿음으로 확증되었던 것이라고 볼 수 있다.”


따라서 야고보는 인간의 차원에서 믿음의 역사로 말미암아 행함이 산출되었을 때, 그 행함으로 그 믿음의 온전성과 진정성을 드러내고, 하나님께 인정받는다는 의미로 ‘칭의’라는 표현을 사용한 것이다.


바울과 야고보에게 있어서 ‘칭의’ 개념을 결론적으로 정리하면, 바울은 하나님을 믿지 않던 사람이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의 모든 죄를 사함받고 하나님 앞에 받아들여진다는 의미로 ‘칭의’라는 단어를 사용하였고, 야고보는 이 용어를 어떤 사람이 참 믿음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 하나님에 의해 인정된다는 의미로, 곧 참 믿음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 분명하게 드러난다는 의미로 사용하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이러한 차이에 대한 제임스 패커의 결론은 매우 타당한 것이다:


“야고보 2:21,24-25에서 그것(디카이오오)의 언급은 인간의 행위가 의롭다고 여기는 하나님께 살아있으며 역사하는 그런 신앙을 소유하고 있음을 보일 때 하나님께서 주신 것을 그가 받아들였다는 증거이다. 야고보에게 있어서 칭의는 하나님에 의해 신자를 최초로 용인함(original acceptance)이 아니라 신자의 생활에 의해 신앙의 공언을 한 그 후의 입증(the subsequent vindication)이다. 야고보와 바울간의 차이가 있는 것은 사고가 아닌 용어상이다.”


이러한 바울과 야고보의 ‘칭의’ 개념의 차이에 대해 칼빈은 칭의의 이중적 의미라고 하였고, 청교도인 제임스 뷰캐넌과 커닝햄은 그 두 종류의 칭의를 각각 실제적(사실적) 칭의와 선언적 칭의로 명명하였다. 그러면 뷰캐넌이 주장하는 실제적 칭의과 선언적 칭의가 구체적으로 무엇을 의미하는지 좀 더 자세히 살펴보자.


마. 실제적(사실적) 칭의와 선언적 칭의


뷰캐넌은 칭의가 법정적이며 사법적인 용어인 반면, 때때로 이 용어가 이미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받은 의인이 믿음으로 말미암는 행함을 통해 하나님과 사람들 앞에서 의롭다고 선언되고 확증될 때도 사용되고 있음에 주목한다. 뷰캐넌은 전자는 실제적 칭의로 후자는 선언적 칭의로 명명한다. 이 실제적 칭의와 선언적 칭의는 성경의 여러 구절들을 통해 잘 설명되고 있다. 우선 이 ‘칭의’라는 용어가 하나님께 사용될 때에는 언제나 선언적인 의미를 지닌다.


(29)모든 백성과 세리들은 이미 요한의 세례를 받은지라 이 말씀을 듣고 하나님을 의롭다 하되(눅 7:29)
(16)크도다 경건의 비밀이여, 그렇지 않다 하는 이 없도다 그는 육신으로 나타난바 되시고 영으로 의롭다 하심을 입으시고 천사들에게 보이시고 만국에서 전파되시고 세상에서 믿은바 되시고 영광 가운데서 올리우셨음이니라(딤전 3:16)
(19)인자는 와서 먹고 마시매 말하기를 보라 먹기를 탐하고 포도주를 즐기는 사람이요 세리와 죄인의 친구로다 하니 지혜는 그 행한 일로 인하여 옳다 함을 얻느니라(마 11:19)


하나님은 워낙 의로우신 분이시며, 모든 의의 원천이신 분이시다. 그럼에도 사람들은 하나님을 의롭다고 선포한다. 그것은 그때 비로소 의로워지신 것이 아니라, 이미 의로우신 하나님께서 사람들에게 의로운 분으로 드러나고 확증됨으로써 의롭다고 선언되어지는 선언적 칭의인 것이다.


뿐만 아니라 이미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얻은 신자가 선언적으로 의롭다 함을 받는 선언적 칭의에 대한 실례들을 우리는 성경 곳곳에서 발견할 수 있다. 대표적으로 ‘향유를 깨뜨린 여인’ 이야기를 그 예로 들 수 있다(눅 7:37-50). 뷰캐넌은 이 이야기에 대해서 이렇게 말했다:


“예수님께서는 향유를 깨뜨려 눈물과 머리로 예수님의 발을 씻었던 여인의 사랑을 지목하면서 그녀의 많은 죄가 사해졌다고 말씀하셨다. ‘내가 네게 말하노니 저의 많은 죄가 사하여졌도다’,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으니 평안히 가라 하시니라’ 이러한 경우에 그녀가 그리스도의 면전에 나아오기 전에 이미 그녀는 실제로 의로워진 것이다. 그녀의 사랑은 그녀의 죄 용서함의 원인이자 근거가 아니라 증거이자 결과였다. ... 향유를 그리스도께 가져올 수 있었던 것은 그녀의 사랑 때문이다. 사랑이 많은 것은 그녀의 많은 죄가 이미 사해졌기 때문이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그녀가 용인 받았음을 확신할 수 있도록 하시기 위해서 지금 의롭다고 선언해주신 것이다.”


실제적인 칭의와 선언적인 칭의의 차이에 대한 성경의 또 다른 예는 히브리서 11장이다. 히브리서 11장에 나오는 믿음의 선진들은 모두 이미 믿음으로 의롭게 된 자들이다. 그런데 11:2에 “선진들이 이로써(믿음으로써) 증거를 얻었다”고 표현하고 있다. 그들은 이미 의롭게 된 자들일 뿐만 아니라 그렇게 되었음이 증거 되고 선언되었던 것이다.


“믿음으로 아벨은 가인보다 더 나은 제사를 하나님께 드림으로 의로운 자라 하시는 증거를 얻었으니 하나님이 그 예물에 대하여 증거하심이라 저가 죽었으나 그 믿음으로써 오히려 말하느니라”(히 11:4)


이러한 선언적 칭의는 신자 편에서 그 믿음이 살아 있고 일하는 믿음으로 증거되는 믿음의 실제적인 열매들에 의하여, 그리고 하나님 편에서 그들의 용인을 증거하는 하나님의 선언에 의해서 좌우되는 것으로 제시되어 있다.


이 모든 예들에서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은 실제적으로 의롭다 함을 받게 한 그 믿음은 반드시 행함을 산출하며, 그 행함을 통해 그 믿음이 참 믿음임을 사람들 앞에 증거하고, 그리하여 그를 의인이라고 하나님께서 선언하심으로써 선언적인 칭의를 받게 된다는 것이다.


이러한 실제적 칭의와 선언적 칭의의 관계는 마지막 날 최후의 심판 때에 극명하게 나타난다. 이 세상에서 이미 의롭다 함을 받은 자, 곧 실제적 칭의를 받은 자는 그 믿음이 살아 있어서 반드시 행함을 산출하며 그 행함을 보시고 하나님께서는 최종적으로 의롭다고 선언해주시는 것이다. 다시 말해 하나님께서는 마지막 때에 각 사람의 행한 대로 심판하신다. 뷰캐넌도 “그때는 성도들의 믿음, 그리고 ‘사랑으로 역사하는 믿음’ 곧 행실을 따라 재판의 선고가 이루어진다”고 하였다.


(34)그 때에 임금이 그 오른편에 있는 자들에게 이르시되 내 아버지께 복 받을 자들이여 나아와 창세로부터 너희를 위하여 예비된 나라를 상속하라(35)내가 주릴 때에 너희가 먹을 것을 주었고 목마를 때에 마시게 하였고 나그네 되었을 때에 영접하였고(36)벗었을 때에 옷을 입혔고 병들었을 때에 돌아보았고 옥에 갇혔을 때에 와서 보았느니라(마 25:34-36)
(20)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의가 서기관과 바리새인보다 더 낫지 못하면 결단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리라(마 5:20)
(21)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천국에 다 들어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마 7:21)
(27)인자가 아버지의 영광으로 그 천사들과 함께 오리니 그 때에 각 사람의 행한 대로 갚으리라(마 16:27)
(8)그러나 두려워하는 자들과 믿지 아니하는 자들과 흉악한 자들과 살인자들과 행음자들과 술객들과 우상 숭배자들과 모든 거짓말하는 자들은 불과 유황으로 타는 못에 참예하리니 이것이 둘째 사망이라(계 21:8)
(9)불의한 자가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할 줄을 알지 못하느냐 미혹을 받지 말라 음란하는 자나 우상 숭배하는 자나 간음하는 자나 탐색하는 자나 남색하는 자나(10)도적이나 탐람하는 자나 술 취하는 자나 후욕하는 자나 토색하는 자들은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하리라(고전 6:9-10)


이러한 구절들은 마지막 날 최후의 심판 때에 각 사람의 행위에 따라 심판받을 것을 말하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구절들은 행함으로 구원받는다는 사실을 말해주는 것이 결코 아니다. 오히려 이런 구절들은 참된 믿음이 행함을 반드시 산출한다는 사실을 말해주고 있다. 다시 말해 죄인의 사면과 하나님 면전에서 의로운 자로 하나님의 용인을 받는 것으로서의 칭의는 오직 믿음으로 말미암는 것이다. 그러나 심판은 행위로 말미암는데 이 때 하나님께서 신자들에게 선언하시는 칭의는 로마 가톨릭이 말하는 행위로 말미암는 두 번째 칭의가 아니다. 그것은 이 현세의 삶에서 실제적으로 수여받은 것이요, 마지막 날 심판의 자리에서 권위 있게 선언되고 증거 되는, 하나의 동일한 칭의인 것이다.


“마지막 심판의 날에 모든 신자들은 공개적으로 재판장의 무죄 선고를 받고, ‘선언적’으로 의롭다함을 받을 것이다. 그러나 그 누구도 전에 죄를 용서받지 못하고 하나님의 용인을 경험하지 못한 자들은 죽어서 마지막 심판의 날에도 죄를 용서받지 못하고 하나님의 품에 안기지 못할 것이다. 죽은 후에는 회개도 용서도 존재하지 않는다. ‘불의를 하는 자는 그대로 불의를 하고 더러운 자는 그대로 더럽고 의로운 자는 그대로 의를 행하고 거룩한 자는 그대로 거룩되게 하라’(계 22:11) 그러나 이미 지상의 삶에서 의롭다함을 받고 거룩해진 의인들은 ‘마지막 종말의 날’에 공개적으로 ‘복 있는 자들’이라고 선언되어질 것이다.”


뷰캐넌은 “실제적 칭의와 선언적 칭의의 구분이 산 믿음과 죽은 믿음의 관점에서 볼 때 바울과 야고보의 명백한 모순에 대한 충분한 설명을 제공한다”고 주장한다. 즉 바울은 실제적 칭의를 다루고 있으며, 야고보는 선언적 칭의를 다루고 있다는 것이다. 뷰캐넌은 이렇게 말한다:


“바울은 죄인이 율법을 통해 칭의를 얻고자 하는 노력이 소용없음을 선언함으로써 인간의 의를 완전히 배제했다. 아울러 바울은 ‘하나님의 의’로 나타난 완전히 다른 의를 말한다. 그것은 율법과 선지자들의 증거를 받은 의로서 믿음으로 말미암는 의이다. 하나님의 은혜로 무조건적으로 의롭다 함을 받는 의인 것이다. ... 바울의 의도는 하나님의 면전에서 이루어지는 죄인의 실제적 칭의의 방법과 근거, 심지어 그 근본적 이유와 이론적 해석을 설명하는 것이었으며, 하나님께서 어떻게 그리고 왜 죄인을 의롭다고 간주해 주시고 용인하시는 지를 보여 주는 것이다. 또한 바울은 이 실제적이며 사실적인 칭의의 방법과 근거를 자신들의 인간적 의를 신뢰하는 모든 신뢰를 포기하고 ‘하나님의 의’에 복종하는 모든 믿는 신자들에게 직접적으로, 그리고 즉각적으로 이루어지는 특권으로 제시했다. 반면 야고보는 선언적 측면의 칭의를 말한다. 이 선언적 칭의는 그들의 실제적 칭의가 증거되고 증명되는 신자들의 실제적 증거를 예증하는 것이다.”


따라서 사도바울과 야고보 사이의 모순은 실제적 칭의와 선언적 칭의의 구별을 통해 설명해낼 수 있다. 특히 야고보가 실제적 칭의(약 2:23)와 선언적 칭의(약 2:21,24)를 동시에 언급한 것은 살아있는 믿음과 죽은 믿음 사이의 대조에 초점을 맞추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살아있는 믿음과 죽은 믿음의 관계 속에서 이 실제적 칭의와 선언적 칭의를 이해할 때 비로소 이 두 서신은 조화롭게 이해되어진다.


뷰캐넌은 이러한 실제적 칭의와 선언적 칭의의 신학적이 구분이 필요하며 중요함을 주장하였다. 즉 실제적 칭의는 죄인의 양심의 즉각적인 구원과 안심을 위해, 선언적 칭의는 신자의 행실을 위한 규정으로서 반드시 필요하다는 것이다. 또한 실제적 칭의는 바울이 상대했던 대적자들로서 인간의 교만과 의를 자랑하는 율법주의의 위험을 경계하기 위한 것이고, 선언적 칭의는 야고보가 상대했던 대적자들로서 율법폐기론을 경계하기 위한 것이다.


바. 바울과 야고보의 통일성


바울과 야고보가 서로를 반대하지 않는다는 보다 분명한 증거는 야고보서와 바울서신의 다른 부분에서 믿음과 행함에 대하여 서로가 일치된 견해를 보이고 있다는 점일 것이다.


우선 야고보가 행함을 매우 강조하지만, 전체적으로 보면 바울서신과 마찬가지로 죄의 심각성과 보편성, 믿음의 중요성, 이신칭의, 은혜로 받는 구원에 대해서도 강조하고 있다.

 
(15)욕심이 잉태한즉 죄를 낳고 죄가 장성한즉 사망을 낳느니라(약 1:15)


죄에 대한 야고보의 이해를 보면 죄란 전적으로 인간의 책임으로서 사망의 형벌을 초래하는 것이다. 다시 말해 죄는 하나님에게서 온 것이 아니라 전적으로 인간의 정욕에서 비롯된 것인데(약 1:13-15), 마치 태아가 잉태된 후로 일정시간이 지나면 반드시 태어나는 것처럼 죄에는 반드시 죽음이 뒤따른다는 것이다. 이 점은 바울이 죄의 삯은 사망이라고 선언한 것과 일치한다(롬 6:23). 뿐만 아니라 야고보는 죄의 보편성에 대해서도 시사하고 있다.


(2)우리가 다 실수가 많으니 만일 말에 실수가 없는 자면 곧 온전한 사람이라 능히 온 몸도 굴레 씌우리라(약 3:2)
(10)누구든지 온 율법을 지키다가 그 하나에 거치면 모두 범한 자가 되나니(약 2:10)
(9)만일 너희가 외모로 사람을 취하면 죄를 짓는 것이니 율법이 너희를 범죄자로 정하리라(약 2:9)
(1)내 형제들아 너희는 선생 된 우리가 더 큰 심판 받을 줄을 알고 많이 선생이 되지 말라(약 3:1)
(17)이러므로 사람이 선을 행할 줄 알고도 행치 아니하면 죄니라(약 4:17)


이런 구절들은 야고보가 죄를 모든 인류에게 보편적 현상이라고 보았음을 보여준다. 특히 약 3:2-12에서 혀의 죄에 대해 논하고 있는데, 이는 사실상 우리 모두를 정죄하고 있는 것이나 다름없는 것이다. 이러한 죄에 대한 철저한 인식은 곧, 사람이 자신의 구원을 위해 자신의 의나 행위가 아니라 다른 이, 곧 예수 그리스도의 의에 의지해야 함을 함의하고 있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야고보는 그의 몇몇 부분에서 구원의 전적인 은혜성을 말하고 있다.


(18)그가 그 조물 중에 우리로 한 첫 열매가 되게 하시려고 자기의 뜻을 좇아 진리의 말씀으로 우리를 낳으셨느니라(약 1:18)


여기서 낳는다는 비유를 쓴 것이나 말씀을 그 동인으로 말한 것은 요한복음의 중생을 연상시킨다. 우리가 태어나는 것이 우리의 뜻이나 노력과는 상관없이 이루어지는 것과 마찬가지로 영적인 출생 역시 하나님의 전적인 주권과 은혜로 말미암아 이루어지는 것임을 야고보는 말하고 있는 것이다. 특히 여기 하나님께서 “자기 뜻을 좇아” 하신다고 명백히 말하고 있는 것은 구원이 사람이 행함으로써 사람이 주도권을 잡고 이루는 구원이 아님을 분명히 보여주는 것이다.


(1)내 형제들아 영광의 주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을 너희가 받았으니 사람을 외모로 취하지 말라(약 2:1)


또한 야고보는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을 우리가 받았다고 선언한다. 이것은 믿음이 인간 스스로의 심리적 의지적 결단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주권적으로 주시는 은혜임을 보여준다.


이와 비슷하게 야고보는 그의 독자들에게 권면하기를, “(21)그러므로 모든 더러운 것과 넘치는 악을 내어 버리고 능히 너희 영혼을 구원할 바 마음에 심긴 도를 온유함으로 받으라”고 하였다(약 1:21) 여기서도 사람 스스로 어떻게 한다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사람 안에서 무엇을 하시느냐 하는 것이 나타나 있다. 그 외 여러 구절들이 구원의 은혜성에 대해 증거하는데 이에 대해서 레온 모리스는 다음과 같이 요약적으로 정리해주고 있다:


“같은 심령으로 야고보는 ‘위로부터 오는 지혜’를 바랄 수 있고(약 3:17), ‘하나님이 ...  겸손한 자에게 은혜를 주신다’는 것을 기억할 수 있었다(약 4:6). 그는 사람들로 하여금 ‘주의 강림하시기까지’ 길이 참으라고 권면한다(약 5:7). 이는 주님에 대한 그의 깊은 확신과 재림 때에 울릴 나팔소리에 대한 그의 확신을 나타내주는 것이다(5:11).”


이러한 야고보의 논지를 모리스는 다음과 같이 정리하였다:


“이렇게 야고보는 모든 사람들이 절박하게 구원을 필요로 한다는 것을 분명히 지적한다. 그들은 죄인이고, 죄인으로서 하나님의 진노의 대상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야고보는 또한 하나님께서 그의 자비와 중생케 하시는 말씀으로써 구원을 제공하실 준비를 갖추셨다는 것도 분명히 한다. 그런데 그가 또 한 가지 확신하고 있는 것은 구원이 가만히 앉아서 게으르게 기다리고 있는 이들에게 자동적으로 오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사람은 반드시 구원하시려는 하나님의 뜻에 반응해야만 한다. 그것은 명령이라고 할 수도 있다. 사실 야고보가 그의 서신에서 이를 매우 강조하고 있기 때문에, 때로 그의 서신이 행위로 말미암는 구원을 강조하는 것이 아니냐는 오해를 받을 때가 많이 있다. 그러나 야고보서는 그런 종류의 서신이 아니다. 단지 야고보는 하나님의 구원에 대한 사람의 반응을 강조하고, 이를 약화시켜서는 안된다고 말할 뿐이다. 이것이 야고보에게는 아주 중요한 것이었다. 그리고 이는 오늘 우리에게도 아주 중요하다.”


그런 점에서 야고보는 구원에 대한 반응으로서 우리의 의무를 강조하고 있는 것이지, 행함으로 구원받음을 말하는 것이 아닌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러한 관점에서 야고보의 행함에 대한 강조를 이해해야 한다. 예를 들어서 다음과 같은 구절들도 구원에 대한 반응으로서 사람이 행해야 할 회개를 의미하는 것이지, 구원받기 위한 조건으로서 회개가 아니다.


(8)하나님을 가까이 하라 그리하면 너희를 가까이 하시리라 죄인들아 손을 깨끗이 하라 두 마음을 품은 자들아 마음을 성결케 하라(약 4:8)
(1)들으라 부한 자들아 너희에게 임할 고생을 인하여 울고 통곡하라(약 5:1)
(16)이러므로 너희 죄를 서로 고하며 병 낫기를 위하여 서로 기도하라 의인의 간구는 역사하는 힘이 많으니라(약 5:16)
(15)믿음의 기도는 병든 자를 구원하리니 주께서 저를 일으키시리라 혹시 죄를 범하였을지라도 사하심을 얻으리라(약 5:15)
(20)너희가 알 것은 죄인을 미혹한 길에서 돌아서게 하는 자가 그 영혼을 사망에서 구원하며 허다한 죄를 덮을 것이니라(약 5:20)


신약성경 기자들은 모두가 사람이 자기 자신의 힘에 의존하는 한, 사람의 운명이 희망이 없는 것이라고 여긴다. 이 점에 있어서는 야고보도 다른 신약의 기자들과 동일한 태도를 지닌다. 즉 사람은 그가 근본적으로 죄인이며, 따라서 자신의 악한 길에서 돌이켜야만 하나님의 구원이 그의 삶에 유효하게 미칠 수 있다는 것을 인정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것이 변개와 회개요, 기도요, 용서이다.


한편으로 야고보는 행함만 강조하는 것이 아니라 믿음도 강조한다.


(6)오직 믿음으로 구하고 조금도 의심하지 말라 의심하는 자는 마치 바람에 밀려 요동하는 바다 물결 같으니(약 1:6)
(1)내 형제들아 영광의 주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을 너희가 받았으니 사람을 외모로 취하지 말라(약 2:1)
(5)내 사랑하는 형제들아 들을지어다 하나님이 세상에 대하여는 가난한 자를 택하사 믿음에 부요하게 하시고 또 자기를 사랑하는 자들에게 약속하신 나라를 유업으로 받게 아니하셨느냐(약 2:5)
(15)믿음의 기도는 병든 자를 구원하리니 주께서 저를 일으키시리라 혹시 죄를 범하였을지라도 사하심을 얻으리라(약 5:15)
(18)혹이 가로되 너는 믿음이 있고 나는 행함이 있으니 행함이 없는 네 믿음을 내게 보이라 나는 행함으로 내 믿음을 네게 보이리라 ... (22)네가 보거니와 믿음이 그의 행함과 함께 일하고 행함으로 믿음이 온전케 되었느니라(23)이에 경에 이른바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으니 이것을 의로 여기셨다는 말씀이 응하였고 그는 하나님의 벗이라 칭함을 받았나니(약 2:18,22,23)


이런 구절들을 볼 때 야고보도 믿음을 강조했음을 알 수 있고, 믿음으로 의롭게 되고 구원받는다는 것을 야고보가 부인하지 않았음을 알 수 있다. 다만 야고보는 그리스도께서 사람의 구원을 위해 필요한 모든 일을 다 하셨으니, 사람은 이제 그것을 믿기만 하면 된다는 식의 도덕률 폐기론적인 견해를 반박하고자 한 것이다. 패커의 말처럼 야고보와 바울의 차이는 용어상이지 결코 사상의 차이는 아닌 것이다.


그러면 이신칭의를 강조하는 바울서신은 어떠한가? 우리는 바울서신을 대략적으로만 살펴보아도, 바울서신 역시 신자의 행함을 강조하고 있다는 사실을 쉽게 알 수 있다. 우선 바울은 자주 우리의 구원의 목적이 우리의 거룩함에 있다고 진술한다.


(11)모든 사람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은혜가 나타나(12)우리를 양육하시되 경건치 않은 것과 이 세상 정욕을 다 버리고 근신함과 의로움과 경건함으로 이 세상에 살고(13)복스러운 소망과 우리의 크신 하나님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영광이 나타나심을 기다리게 하셨으니(14)그가 우리를 대신하여 자신을 주심은 모든 불법에서 우리를 구속하시고 우리를 깨끗하게 하사 선한 일에 열심하는 친 백성이 되게 하려 하심이니라(딛 2:11-14)
(31)그런즉 우리가 믿음으로 말미암아 율법을 폐하느뇨 그럴 수 없느니라 도리어 율법을 굳게 세우느니라(롬 3:31)
(1)그런즉 우리가 무슨 말 하리요 은혜를 더하게 하려고 죄에 거하겠느뇨(2)그럴 수 없느니라 죄에 대하여 죽은 우리가 어찌 그 가운데 더 살리요(3)무릇 그리스도 예수와 합하여 세례를 받은 우리는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세례 받은 줄을 알지 못하느뇨(4)그러므로 우리가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세례를 받음으로 그와 함께 장사되었나니 이는 아버지의 영광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심과 같이 우리로 또한 새 생명 가운데서 행하게 하려 함이니라(5)만일 우리가 그의 죽으심을 본받아 연합한 자가 되었으면 또한 그의 부활을 본받아 연합한 자가 되리라(6)우리가 알거니와 우리 옛 사람이 예수와 함께 십자가에 못박힌 것은 죄의 몸이 멸하여 다시는 우리가 죄에게 종노릇 하지 아니하려 함이니(롬 6:1-4)
(21)전에 악한 행실로 멀리 떠나 마음으로 원수가 되었던 너희를(22)이제는 그의 육체의 죽음으로 말미암아 화목케 하사 너희를 거룩하고 흠 없고 책망할 것이 없는 자로 그 앞에 세우고자 하셨으니(골 1:21-22)
(26)이는 곧 물로 씻어 말씀으로 깨끗하게 하사 거룩하게 하시고(27)자기 앞에 영광스러운 교회로 세우사 티나 주름잡힌 것이나 이런 것들이 없이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려 하심이니라(엡 5:26-27)
(3)하나님의 뜻은 이것이니 너희의 거룩함이라 곧 음란을 버리고(4)각각 거룩함과 존귀함으로 자기의 아내 취할 줄을 알고(7)하나님이 우리를 부르심은 부정케 하심이 아니요 거룩케 하심이니(살전 4:3,4,7)
(29)하나님이 미리 아신 자들로 또한 그 아들의 형상을 본받게 하기 위하여 미리 정하셨으니 이는 그로 많은 형제 중에서 맏아들이 되게 하려 하심이니라(롬 8:29)
(4)곧 창세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사 우리로 사랑 안에서 그 앞에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려고(5)그 기쁘신 뜻대로 우리를 예정하사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자기의 아들들이 되게 하셨으니(엡 1:4-5)
(8)너희가 그 은혜를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었나니 이것이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9)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니 이는 누구든지 자랑치 못하게 함이니라(10)우리는 그의 만드신 바라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선한 일을 위하여 지으심을 받은 자니 이 일은 하나님이 전에 예비하사 우리로 그 가운데서 행하게 하려 하심이니라(엡 2:8-10)
(12)이는 너희를 부르사 자기 나라와 영광에 이르게 하시는 하나님께 합당히 행하게 하려 함이니라(살전 2:12)


이런 구절들은 하나님의 궁극적인 관심이 우리가 “죄사함을 얻고 무죄방면되어서 자유를 얻고 심판에서 구원받는 것”에 있는 것이 아님을 분명히 보여준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죄와 심판에서 구원하시는 것이 매우 중요한 목표이고 목적이지만, 그것은 보다 중요한 목적의 과정가운데 있는 하나의 목적인 것이다. 하나님의 보다 중요한 목적은 우리의 거룩한 삶의 열매이다. 그리고 이 목적은 궁극적 목적인 하나님의 영광과 연결되어 있다.


뿐만 아니라 바울은 행위에 따른 심판을 강조하고, 심지어는 행함으로 구원받는다고 까지 하고 있다.


(7)스스로 속이지 말라 하나님은 만홀히 여김을 받지 아니하시나니 사람이 무엇으로 심든지 그대로 거두리라(8)자기의 육체를 위하여 심는 자는 육체로부터 썩어진 것을 거두고 성령을 위하여 심는 자는 성령으로부터 영생을 거두리라(갈 6:7-8)
(10)이는 우리가 다 반드시 그리스도의 심판대 앞에 드러나 각각 선악간에 그 몸으로 행한 것을 따라 받으려 함이라(고후 5:10)
(10)네가 어찌하여 네 형제를 판단하느뇨 어찌하여 네 형제를 업신여기느뇨 우리가 다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 서리라(11)기록되었으되 주께서 가라사대 내가 살았노니 모든 무릎이 내게 꿇을 것이요 모든 혀가 하나님께 자백하리라 하였느니라(롬 14:10-11)
(8)이는 각 사람이 무슨 선을 행하든지 종이나 자유하는 자나 주에게 그대로 받을 줄을 앎이니라(엡 6:8)
(12)그러므로 형제들아 우리가 빚진 자로되 육신에게 져서 육신대로 살 것이 아니니라(13)너희가 육신대로 살면 반드시 죽을 것이로되 영으로써 몸의 행실을 죽이면 살리니(롬 8:12-13)
(19)육체의 일은 현저하니 곧 음행과 더러운 것과 호색과(20)우상 숭배와 술수와 원수를 맺는 것과 분쟁과 시기와 분냄과 당 짓는 것과 분리함과 이단과(21)투기와 술 취함과 방탕함과 또 그와 같은 것들이라 전에 너희에게 경계한 것같이 경계하노니 이런 일을 하는 자들은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할 것이요(갈 5:19-21)
(16)너희가 하나님의 성전인 것과 하나님의 성령이 너희 안에 거하시는 것을 알지 못하느뇨(17)누구든지 하나님의 성전을 더럽히면 하나님이 그 사람을 멸하시리라 하나님의 성전은 거룩하니 너희도 그러하니라(고전 3:16-17)
(15)그러나 여자들이 만일 정절로써 믿음과 사랑과 거룩함에 거하면 그 해산함으로 구원을 얻으리라(딤전 2:15)


이러한 구절들뿐만 아니라 거룩한 삶을 향한 명령들(롬 6:12-13; 골 3:3-5; 갈 5:16; 갈 5:1; 딤전 3:11; 롬 12:1-2; 롬 6:19; 엡 4:1; 빌 1:27; 골 1:10; 딤후 2:21 등)은 구원에 있어서 행함이 얼마나 중요한 것인가 하는 것을 보여주고 있다. 그것이 마치 야고보의 이행칭의와 비슷하여, 행함이 아닌 은혜로 구원받는다고 하는 바울 자신의 이신칭의와도 모순되는 것처럼 보이기까지 한다. 그러나 이 두 측면은 서로 전혀 모순되지 않는데, 왜냐하면 바울은 반대하고 배제하고자 하는 ‘행함’은 하나님 앞에 의롭게 인정받고 용인되고자 하는 인간 스스로의 행함이지, 신자의 믿음의 열매로서 행함이 아니기 때문이다. 오히려 바울은 야고보와 마찬가지로 성령의 열매로서의 행함이 믿음과 불가분의 관계에 있음을 드러냄으로써 신자의 행함을 강조한 것이다.


바울이 말하는 믿음이란 사랑으로 역사하는 믿음이기 때문에(갈 5:6), 바울은 그 믿음과 아울러 사랑의 수고와 소망의 인내를 함께 말할 수 있었다(살전 1:3; 살후 1:3). 리더보스는 이 믿음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따라서 로마서 4장에서 ‘일하지’ 않으면서 경건치 않은 자들을 의롭다 하시는 이를 믿는 자에게는 그의 믿음이 의로 여기신바 되었다고 말할 때에는, 그러한 말이 결코 믿음 자체가 갖는 ‘사역적’ 성격과 반대의 뜻을 갖게 되도록 해서는 안 되며, 마찬가지로 행위에 따라 믿는 자를 심판하심과 반대의 의미를 갖게 해서도 안 된다. 왜냐하면 믿음이 다른 어떤 것에 의해서도 아니고 하나님의 은혜로 절대적으로 칭의에 포함되어지는 것과 마찬가지로, 행위는 이 동일한 믿음에서 나오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것은 공허하고 행위가 결여된 믿음인 채로 있는 것이 아니라, 바로 행위 안에서 믿음이라 알려지는 것이다.”


그러므로 바울이 말하는 믿음은 그리스도 안에서 새생명 가운데 있는 신자의 살아있는 믿음으로서 반드시 새로운 순종을 낳는 믿음이다.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부활을 분리해서 생각할 수 없는 것과 같이 믿음으로 말미암는 죄 사함의 칭의와 그 믿음의 열매인 새생명 가운데의 삶을 분리하여 이해할 수가 없는 것이다. 따라서 바울 역시 야고보와 마찬가지로 믿음과 행함의 불가분리성을 강조하고 있다.


이제까지의 논의를 통해서 우리는 바울과 야고보가 서로 다른 주장을 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 주장들이 놀랍게 통일되어 있음을 발견할 수 있었다. 이러한 사실은 우리에게 많은 교훈과 도전을 준다. 우리는 바울서신에만 치중해서 공동서신이나 마태복음과 같은 본문에서, 심지어는 바울서신조차도 강조하는 행함의 요소들을 무시할 수가 있다. 그래서 바울이 말하는 믿음을 단순한 지적인 동의 수준으로 이해함으로써 행함이 없는데도 스스로 신앙이 있다고 얼마든지 착각할 수가 있는 것이다. 우리와 우리 한국교회를 볼 때 행함으로 그 믿음의 진정성을 증명하는 신자들이 극히 드물다고 느끼는 현실은 우리가 알고 있는 믿음의 상당수가 사실상 참된 믿음이 아님을 반증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배태영은 그의 석사학위논문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오늘날의 문제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게 된다는 이신칭의 복음을 의롭게 만든다고 가르침으로써 의로움 위에 율법주의라는 가면을 뒤집어 씌워 놓았다는 것이다. 반면에 "믿음"은 순종을 생산해 내지 못하는 값싼 것으로 만들어 놓았다. 수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온전한 '의로움'과 온전한 '믿음'을 보지 못한 채, 가짜 의와 가짜 믿음을 받아들이고 있다. 수많은 교회 안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의가 값없이 별 볼일 없는 것으로 둔갑 되어 있으며, 믿음이 값싼 감정에 불과한 것으로 추락되었다.”


이러한 지적은 오늘날 우리들에게 진지한 자기 성찰을 요구한다. 나의 믿음은 진정한 구원받는 믿음인가? 다른 말로 하면 나의 삶 속에 사랑의 실천이 나타나는가? 하는 것이다. 이 질문 앞에 우리는 회개할 것과 참된 믿음의 삶을 향해 도약할 것을 도전받는다.


사. 믿음과 행함의 관계


한편으로 우리는 또한 이와 관련하여 두 가지 의문을 가지게 된다. 먼저 행함을 통해서 믿음의 진정성이 드러난다고 할 때, 행함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하는 것이며, 우리의 믿음의 진정성을 증명하는데 충분한 행함은 어느 정도이어야 하는가 하는 점이다. 특히 후자의 질문은 믿음이 연약한 신자가 내는 행함과 믿음이 성숙한 자가 내는 행함에는 차이가 나는데, 그러한 차이를 믿음과 행함의 관계속에서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지에 관한 것이다.


우선 우리가 우리 자신의 행함을 살피면서 믿음을 점검해야 하는데, 그 행함은 무엇인가? 일차적으로 믿음의 열매인 행함은 종교적인 행위나 또는 외적인 열심이나 업적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전도하는 것이나 예배를 빠지지 않고 잘 드리는 것 등은 행함의 본질에 속한다고 할 수 없다. 믿음의 진정성을 드러내는 행함이란 오히려 성령의 열매로서 외적인 것이라기보다는(물론 외적인 것을 포함하지만) 내적인 것이다. 하나님을 신뢰하며 믿고 사랑하는 마음, 구속의 은혜를 알고 감사하는 마음과 그분께 즐거이 복종하고 순종하고자 하는 마음, 그분을 경외하며, 그분의 말씀을 사랑하고, 배우기 위해 힘쓰며, 기도하기 힘쓰며, 기도를 가장 즐거운 시간으로 여기며, 주를 위해서라면 고난도 불사하고 목숨까지도 버리는 각오가 있는 것과 같은 내적인 요소들을 말한다. 이러한 내적인 행위는 반드시 외적으로 나타나게 마련이다. 그것은 형제를 용서하고 사랑하며, 자기를 날마다 죽이고 주의 말씀에 자기를 쳐 복종시키는 삶을 살며, 무엇보다도 주와 복음을 위해 충성하는 모습으로 나타난다. 그러므로 자신의 행함을 살필 때는 일차적으로는 외적인 행위를 보지 말고, 우리 내면을 점검해야 한다. 내 마음에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이 있는지, 형제자매를 사랑하고 용서하는 마음이 있는지, 잃어버린 양떼들을 향한 상한 목자의 심정이 있는지 살펴보아야 한다. 없다면 우리는 우리 자신의 믿음에 대해서 심각하게 고민해 보아야 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 길에서 회개하고 돌이켜야만 하는 것이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우리는 이렇게 질문한다. 우리가 과연 완전하게 하나님을 사랑하고, 형제 자매를 용서하고 사랑하며, 주와 복음을 위해 충성하는 삶을 항상 살아갈 수 있는가, 과연 전적부패한 인간이 그런 삶을 항상 지속할 수 있는가 하는 의문이다. 이 질문에 대하여 우리는 일차적으로 이 세상에 가장 성숙한 신자라 하더라도 그의 행함에는 부패의 잔재가 섞여 있으며, 항상 지속하지 못하고 자주 실패를 경험한다는 사실이다. 만일 이렇게 행함에 대한 절대적 기준을 가지고 우리 자신의 믿음을 재어 보려고 한다면, 우리는 십중팔구 절망에 빠질 수밖에 없다. 우리는 우리 자신의 믿음을 의심할 수밖에 없고, 자신이 믿음이 가짜 외에 다른 것이 아니라는 인식을 하게 될 수밖에 없는 것이다. 무엇보다도 믿음이 성숙하지 못하고 초보적이며 유아적인 믿음을 가지고 있는 초신자들은 더더욱 구원에 대한 확신을 가질 수 없게 된다.


이 점과 관련하여 우리는 야고보서 전체 내용을 다시금 되새길 필요가 있다. 야고보는 결코 행함의 완전주의를 주장하지 않았다. 그는 우리가 다 말에 실수가 많다는 것을 인정하였다. 그리고 그는 믿음과 행함의 관계를 기계적으로 적용하지 않고 있으며, 믿음의 성장 과정을 염두에 두고 있다. 그는 아브라함이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받았다고 하는 말씀이 30년 후에 이삭을 바치는 사건을 통해서 응하였다고 말하고 있다. 이 두 사건 사이에는 30년이라는 긴 세월이 자리하고 있다. 이 30년간 아브라함은 수많은 선행도 행했지만 또한 많은 실패와 실수를 범하기도 했을 것이다. 그럼에도 야고보는 그런 실수와 실패 때문에 그의 믿음이 가짜라고 말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는 아브라함의 믿음이 살아있는 참 믿음이기 때문에 행함에 지속적으로 영향을 주고 역사하여서 결국에는 이삭을 바치는 행함이 나타나기까지 성장하게 되었음을 말하였던 것이다. 참 믿음은 반드시 성장하고 결국에는 열매 맺는다는 것이 야고보의 주장인 것이다. 무엇보다도 야고보가 “아브라함이 행함으로 의롭다 함을 받았다”고 했을 때 이 행함이라는 단어가 복수의 형태를 취하고 있는데, 그것은 행함이 단순히 이삭을 바치는 행위만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이삭을 바치는 사건을 절정으로 하는 그의 전 인생의 모든 선행을 포괄하는 행함이라는 것이다. 즉 아브라함이 이삭을 바칠 때에만 행함이 있었던 것이 아니라 그가 믿기 시작한 이후로부터 행함이 계속해서 간헐적으로 나타났던 것이다.


우리가 이 점을 이를테면 참된 믿음은 그 믿음이 아무로 초보적이고 유아적이라 하더라도 반드시 그 믿음의 분량에 따르는 어느 정도의 행함이 나타난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우리가 갓 태어난 아기를 생각해 볼 때, 그 아기는 분명 말도 하지 못하고 자기 똥오줌도 제대로 가리지 못하는 그야말로 사람구실을 못하는 존재이다. 그러나 그렇다고 아기는 전적으로 부모에게 받기만 하고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은 아니다. 갓난아기는 비록 사람 구실은 못하지만, 웃음과 애교로서 사람들에게 기쁨을 준다. 갓난아기도 우리에게 주는 것이 있다. 그들이 하는 일이 있다. 갓난아기에게는 그렇게 웃고 애교를 부리는 것 자체가 자기들의 위치에서의 직업이요 사명이고 그 자신의 일이라고 할 수 있다. 즉 살아있다는 것은 반드시 움직이게 마련이듯이, 참된 믿음은 그 믿음이 어떤 성숙도에 이르렀든지 간에 그에 합당한 어느 정도의 행함을 나타내게 마련인 것이다.


그러므로 믿음과 행함의 관계는 분명 불가분의 관계이지만, 기계적으로 연결시켜서는 곤란할 수가 있는 것이다. 다시 말해 믿음과 행함을 동전의 양면으로 이해하면 안 된다는 것이다. ‘동전의 양면’의 비유는 믿음과 행함의 불가분리성은 잘 설명되지만, 영혼이 시험에 들고 죄를 범할 때는, 곧 행함이 없을 때는 그 믿음은 가짜가 되었다가, 반대로 은혜 가운데서 행함이 나타날 때는 믿음이 진짜가 되버리는 식의 상당히 제멋대로의(arbitrary) 설명이 되어버린다. 믿음과 행함의 관계는 나무와 열매의 관계로 보는 것이 적합하다. 믿음의 나무는 반드시 행위의 열매를 맺는다. 물론 어떤 나무는 성장하여 열매를 맺는데 긴 시간이 걸리기도 한다. 그러나 그 나무가 사과나무인지 아니면 포도나무인지 구별하는 데는 단 하나의 열매만으로도 충분하다. 그러나 나무는 생명체이기 때문에 성장하고 반드시 해가 갈수록 더욱 풍성한 열매를 맺어간다.


이러한 성장의 관점을 잘 염두에 두면서 믿음과 행함의 관계를 생각하고, 또 야고보의 행함에 대한 메시지를 해석해야 할 것이다. 이 때 한가지 주의할 점은 행함이 약한 미성숙한 신앙도 참된 신앙일 수 있다는 사실이 우리로 그리스도의 형상을 닮아서 그 장성한 분량에까지 자라가고자 하고, 아버지의 온전하심과 같이 온전해지고자 하는 목적의식을 희석시키거나 약화시키게 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우리는 어떤 성숙도에 있든지 간에 야고보의 경고의 말씀 앞에 자신의 행함이 없음을 깊이 깨닫고, 진지하게 자신을 돌아보고, 주님께로 온전히 돌이켜서 회개해야 한다. 그리고 성장과 성화와 완전을 향해 전진해 나아가야 한다. 마치 바울이 아직 잡은 것으로 생각하지 아니하고 푯대를 향하여 부름의 상을 위해 좇아갔던 것처럼 예수님처럼 온전하게 되기까지 전진해 나아가야 하는 것이다. 물론 이 세상에서는 그것이 완전히 이루어지지는 않겠지만, 그럼에도 완전을 추구해야 하는 것이다.


아. 칭의와 성화의 관계


믿음과 행함의 관계는 곧 칭의와 성화의 관계로 연결된다. 믿음의 열매가 행위이고, 그 둘 사이가 불가분의 관계인 것처럼 칭의와 성화의 관계 역시 불가분리적인 관계에 있다. 일반적으로 칭의란 죄책으로부터 구원이라고 말해지고, 성화란 죄의 오염과 세력으로부터의 구원이라고 일컬어진다. 즉 죄에는 죄책과 오염이 있는데, 그리스도의 대속으로 죄책을 면제받고 의롭다 함을 받은 자는 또한 그리스도의 성화시키는 은혜로 말미암아 신자 내면에 남아있는 죄성을 죽이고 그리스도의 새생명을 더욱 풍성하게 하는 성화의 삶을 살게 된다.


이러한 칭의와 성화의 관계는 하나님 나라의 ‘이미’와 ‘아직 아니’와 관련하여 생각해야 한다. 즉 구원도 이미와 아직 아니의 측면이 있는 것이다. 우리는 칭의함을 받음으로써 이미 구원받았다고 말할 수 있다. 그러나 그 구원은 아직 완성되지 않았고, 점진적으로 성장하여 극치가 이를 때에 완성될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처음 주어진 구원을 불완전한 구원이라고 하지 않고 온전한 구원이라고 말한다. 왜냐하면 우리의 운명과 신분에 대해서는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심으로 이미 결정이 났기 때문이다. 칭의함 받은 신자는 다시금 하나님께 쫓겨날 수 없고, 주님의 능력의 손에 의해서 견인된다. 한번 하나님의 자녀됨은 영원한 자녀됨이다. 우리의 운명과 신분은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심으로 끝이 났다. 그러나 이것이 모든 구원을 이룬 것은 아니다. 그것은 오히려 구원의 시작인데, 구원의 완성을 위해 성장해가야 한다. 이것이 어떻게 보면 앞에서 살펴보았던 것처럼 우리를 구원하신 목적인 것이다. 농부가 수고하여 땅에 씨를 뿌리는 것은 그저 그 씨앗에서 생명이 싹트는 것만을 보기 위해서 그런 것이 아니다. 농부는 그 식물이 자라서 맺을 열매를 바라보면서 씨를 뿌린다. 마찬가지로 하나님께서 우리를 구원하셔서 이 땅에 주님의 몸된 교회로 심으신 것은 우리의 선행과 성령의 열매를 통해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고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게 하기 위함이다. 그러므로 이미 구원얻은 신자는 성화를 목적으로 지속적으로 성장해가야만 한다.


그러면 성화로의 성장은 어떻게 이루어지는가? (1) 성장을 위한 자양분은 그리스도의 피와 살이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피와 살이라는 참된 음료와 양식을 먹고 자라난다. 따라서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건은 우리의 구원의 처음 시작에만 역사하는 것만이 아니라, 구원의 완성(성화)을 위한 토대와 기초이기도 한 것이다. 이미 얻은 구원은 구원의 완성을 위한 첫 출발이라는 과정일뿐만 아니라 전 구원의 토대를 이룬다. 우리는 이미 얻은 칭의의 은혜를 기억하고 기념함으로써 영적인 힘을 얻고 성장하게 되는 것이다. (2) 또한 성화의 방법은 하나님의 거룩한 말씀이다. 말씀으로 우리는 거룩하게 된다. (3) 마지막으로 성화의 동인은 성령님이시다. 성령께서 우리를 거룩하게 하신다. 그러므로 신자는 이 성령님의 거룩하게 하심에 책임있게 반응함으로써 지속적으로 자라가야 한다. 오직 은혜의 방도인 말씀과 기도에 집중함으로써 성화를 위해 실제적으로 노력해야 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은혜가 없이는 진정한 성장도 없기 때문이다. 먼저 은혜가 우리를 정복해야 우리가 죄를 정복한다는 유명한 말이 있다. 이미 얻은 칭의의 은혜, 구원의 은혜위에 굳게 서야 진정한 성장을 이룰 수가 있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보면 로마 가톨릭의 주장은 그 순서를 역전시키고 있다. 즉 칭의의 은혜를 받기 위해 우리가 죄를 이기는 삶, 곧 신실한 삶을 살아야 한다는 것이다. 그들은 그렇게 행함을 강조하지만, 그러나 실상은 행함을 산출할 은혜가 없기 때문에 경건의 능력이 전혀 나타나지 않고 오히려 (그들의 의도와는 정반대로) 방탕을 조장하는 결과가 나타나는 것이다. 금욕적으로 죄와 싸우기 위해서 들어가는 수도원에서 가장 심각한 성적 타락이 나타났다는 것은 우리에게 여러 가지로 시사하는 바가 많다. 그러므로 칭의와 성화를 혼동하는 로마가톨릭의 의화론은 신자로 하여금 율법주의적인 신앙생활로 내모는 지옥 교리이다. 우리는 칭의와 성화를 분명히 구별해야 한다. 그러나 칭의와 성화를 분리해서는 안된다. 그리스도께서는 하나님께로서 오셔서 우리의 지혜와 의로움와 거룩함이 되셨다고 했다(고전 1:30). 우리가 그분에게서 칭의를 받았다면, 마찬가지로 성화도 받는 것이다. 이 둘을 갈라놓는 것은 한분 그리스도의 인격을 갈라놓는 것과 같다.


자. 야고보서 본문의 해석 및 적용


[약 2:14-약 2:26]
(14)내 형제들아 만일 사람이 믿음이 있노라 하고 행함이 없으면 무슨 이익이 있으리요 그 믿음이 능히 자기를 구원하겠느냐(15)만일 형제나 자매가 헐벗고 일용할 양식이 없는데(16)너희 중에 누구든지 그에게 이르되 평안히 가라, 더웁게 하라, 배부르게 하라 하며 그 몸에 쓸 것을 주지 아니하면 무슨 이익이 있으리요(17)이와 같이 행함이 없는 믿음은 그 자체가 죽은 것이라(18)혹이 가로되 너는 믿음이 있고 나는 행함이 있으니 행함이 없는 네 믿음을 내게 보이라 나는 행함으로 내 믿음을 네게 보이리라(19)네가 하나님은 한 분이신 줄을 믿느냐 잘하는도다 귀신들도 믿고 떠느니라(20)아아 허탄한 사람아 행함이 없는 믿음이 헛 것인 줄 알고자 하느냐(21)우리 조상 아브라함이 그 아들 이삭을 제단에 드릴 때에 행함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은 것이 아니냐(22)네가 보거니와 믿음이 그의 행함과 함께 일하고 행함으로 믿음이 온전케 되었느니라(23)이에 경에 이른바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으니 이것을 의로 여기셨다는 말씀이 응하였고 그는 하나님의 벗이라 칭함을 받았나니(24)이로 보건대 사람이 행함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고 믿음으로만 아니니라(25)또 이와 같이 기생 라합이 사자를 접대하여 다른 길로 나가게 할 때에 행함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은 것이 아니냐(26)영혼 없는 몸이 죽은 것같이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것이니라


14절의 “행함이 없는 믿음이 능히 자기를 구원하겠느냐”는 질문은 행함 없는 믿음의 무용론에 관한 앞으로의 논지에 있어서 배경을 제공하고 있고, 15절부터 해서 4가지의 예증을 제시한다.


- 15~17절 : 헐벗고 굶주린 형제자매를 그대로 돌려보내는 그리스도인
- 18~20절 : 믿지만 불안해하는 귀신들
- 21~24절 : 하나님의 벗 아브라함
- 25~26절 : 여호수아의 정탐꾼들을 환영했던 라합


그리고 각각의 예증의 끝에는 요약하는 설명이 있고, 처음 두 예증은 부정적인 측면의 예증으로서, 뒤의 두 예증은 긍정적인 측면의 예증으로서 제시되고 있다.


우선 우리가 주목해야 할 것은 14절의 도입부 부분이다. 14절은 “내 형제들아 만일 사람이 믿음이 있노라 하고 행함이 없으면 무슨 이익이 있으리요”라고 하고 있다. 이 질문은 서론을 위한 적절한 도입구적 질문이면서도 앞으로의 내용의 올바른 해석을 위한 초석 역할을 하고 있다. 지금 야고보가 비판하고자 하는 자는 “믿음이 있지만 행함이 아직까지 나타나지 않는 연약한 신자”가 아니라 “믿음이 있다고 말은 하지만 행함이 나타나지 않는 자”를 가리킨다. 칼빈은 이 점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궤변가들은 미형성된 믿음과 형성된 믿음이라는 식으로 구분하는데 이것은 잘못된 해석이다. 야고보는 이렇게 이해하지 않았다. 그는 거짓 신앙고백을 말하고 있을 뿐이요, 그의 말은 이 점을 명백히 해주고 있다. 그는 ‘어떤 사람이 신앙이 있으면’ 하는 식이 아니라, ‘어떤 사람이 자기는 신앙이 있다고 말하면서’하는 뜻으로 시작하고 있다.”


즉 야고보는 믿음은 살아있지만 연약해서 행함이 없을 수도 있는 그런 상황을 말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야고보가 볼 때 그런 믿음은 초보적이고 유아적인 믿음이 아니라 아예 믿음이 아니다. 행함이 없는 믿음은 가짜이며, 죽음 믿음이지, 살아있으나 미미한 수준에 있는 미성숙한 믿음이 결코 아니라는 것이다. 반대로 말하면 초보적이고 유아적인 믿음이라도 그 믿음이 진짜 믿음이라면 반드시 어느 정도 그 믿음에 합당한 행함이 나타나게 마련이라는 것이다. 아예 행함이 나타나지 않는 믿음은 이 세상에 없다.


이러한 도입구의 예증의 첫 번째로서 야고보는 궁핍한 자에 대한 구제 문제를 거론한다.


(15)만일 형제나 자매가 헐벗고 일용할 양식이 없는데(16)너희 중에 누구든지 그에게 이르되 평안히 가라, 더웁게 하라, 배부르게 하라 하며 그 몸에 쓸 것을 주지 아니하면 무슨 이익이 있으리요(17)이와 같이 행함이 없는 믿음은 그 자체가 죽은 것이라


야고보는 성령 안에 있다고 말하고 믿음이 있노라고 말하는 사람이 어려운 자들을 돕지 아니하고, 자신의 것을 희생하여 그들의 필요한 것을 주지 아니하는 것은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일이라고 말하고 있다. 즉 믿는다고 했을 때는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사람에게 나타내 보이신 무한하신 긍휼하심을 맛보았다는 말인데, 이런 은혜를 알고서도 형제가 어려움과 고통에 직면했을 때, 해결하여 주려는 욕망과 힘이 결여되었다는 말은 그 은혜의 경험을 아직 안했다는 말이요, 다시 말해 그 믿음이 가짜요 죽은 믿음임을 증명하는 것 외에 다른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두 번째 예증은 귀신의 믿음이다.


(19)네가 하나님은 한 분이신 줄을 믿느냐 잘하는도다 귀신들도 믿고 떠느니라(20)아아 허탄한 사람아 행함이 없는 믿음이 헛 것인 줄 알고자 하느냐


귀신은 정교하고 정확한 신학 이론을 지니고 있었으며, 귀신의 믿음은 지적인 믿음의 절정이라고 말할 수 있다. 복음서에서 예수님을 대면했을 때의 귀신들의 대답들을 보면 한결같이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의 아들 예수여”라고 하고 말하다. 이것은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께 대한 정확하고 합당한 고차원적인 고백으로서 그 당시 제자들도 그렇게 고백하지 못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귀신들의 놀라운 신지식에도 불구하고 그 지식이 그들을 구원할 수 없었다는 사실은 지식적인 동의로서의 믿음이 얼마나 헛것이며, 무의미한 것인지를 역설적으로 보여주는 것이다. 아무리 뛰어나고 정교한 신학적인 지식이 있고, 그것을 성경적으로 정확하게 변증해 낸다 하더라도 자원함과 사랑함에 기초한 순종의 행위를 산출해내지 못한다면 그 믿음은 아무런 쓸모가 없는 죽은 믿음이다.


이제 야고보는 보다 긍정적인 예증을 통해 살아있는 참 믿음의 본질에 대해 증거한다.


(21)우리 조상 아브라함이 그 아들 이삭을 제단에 드릴 때에 행함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은 것이 아니냐(22)네가 보거니와 믿음이 그의 행함과 함께 일하고 행함으로 믿음이 온전케 되었느니라(23)이에 경에 이른바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으니 이것을 의로 여기셨다는 말씀이 응하였고 그는 하나님의 벗이라 칭함을 받았나니(24)이로 보건대 사람이 행함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고 믿음으로만 아니니라


야고보는 선언적 칭의를 말하면서 행함을 강조하고 있다. 아브라함은 할례 받기 전에 이미 의롭게 된 자이나, 이삭을 바치는 순종의 행위를 통해서 하나님께 의롭다 하시는 선언적 칭의를 받게 되었다는 것이다. 중요한 것은 여기서 ‘행함’이 복수로 기록되어 있다는 것을 볼 때 단순히 이삭을 바친 행위만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아브라함의 삶의 전반에 있는 믿음으로 말미암는 모든 선한 행위들을 통칭하고 있고 그 절정으로서 이삭을 바친 사건을 가리키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렇게 참된 믿음은 살아있어서 그 내면에 지속적으로 역사하고 그리하여 계속적으로 행함을 산출하는 그런 믿음인 것이다. 이렇게 행함이 나타남으로써 그 믿음의 진정성을 드러내는 믿음만이 참 믿음인 것이다.


23절에서 아브라함이 믿음으로 의롭게 되었음을 언급하고 또한 행함으로 의롭게 되었다고 언급한 것은 야고보가 두 가지 다른 개념의 칭의를 말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그가 ‘행함으로 의롭게 된다’고 말한 것은 바울이 말하는 ‘죄인이 처음으로 받는 칭의’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그 믿음이 참 믿음임을 드러내고 확증하는 선언적인 칭의를 말하는 것이다. 따라서 야고보는 죄인의 칭의에는 믿음만으로는 부족하고 행함이 더해져야 됨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죄인이 믿음으로 의롭게 된 이후에 그 믿음은 반드시 행함을 산출해야 함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두 번째 긍정적인 측면의 예증을 제시한다.


(25)또 이와 같이 기생 라합이 사자를 접대하여 다른 길로 나가게 할 때에 행함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은 것이 아니냐(26)영혼 없는 몸이 죽은 것같이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것이니라


이 구절 역시 믿음과 행함의 불가분리적인 성격을 강조하고 있다. 변종길은 이 점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했다:


“우리가 듣자 곧 마음이 녹았고 너희의 연고로 사람이 정신을 잃었나니 너희 하나님 여호와는 상천 하지에 하나님이시니라(수 2:11). 이 고백만 보아도 우리는 라합에게 구원받을 만한 믿음이 있었다고 생각할 수 있다. 그러나 만일 라합이 입으로는 이렇게 고백하고서 실제 행동으로는 이스라엘의 사자들을 숨겨 주지 아니하고 도리어 당국에 신고해서 죽게 만들었다면, 그에게 어찌 믿음이 있다고 말할 수 있겠는가? 그가 고백한 모든 고백은 결국 거짓 고백이요 그의 믿음은 거짓 믿음이었다고 볼 수밖에 없지 않겠는가? 따라서 라합의 경우에서도 우리는 참믿음에는 그에 상응하는 행함이 따라야 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러한 본문의 행함에 대한 강조점은 믿음과 행함의 관계가 불가분리적임을 말하는 것이지 구원에 있어서 행함이 본질적인 부분임을 말하고자 하는 것이 아님이 분명하다.


야고보는 행함을 강조하면서 결국 하고 싶은 말은 사랑을 실천하는 삶을 살아야 한다는 것이다. 야고보서는 전체적으로 가난한 자들에 대한 구제 문제를 자주 다루고 있고, 사랑의 실천을 최고한 법으로 말하고 있으며, 믿음과 행함에 관한 문제의 예증으로 바로 가난한 자들에 대한 구제 문제와 관련하여 제시하고 있다. 그러므로 야고보 말하는 행함의 구체적인 형태는 바로 자기를 희생하여 옆의 형제를 도와주는 사랑의 실천이다. 이러한 자기 희생적인 사랑이 나타나지 않는 믿음은 가짜요 죽은 믿음이라는 것이다. 이러한 행함을 강조하는 야고보서 말씀은 그 당시 수신자들에게 큰 도전을 주었던 것과 마찬가지로 오늘날 우리에게도 동일하게 큰 도전을 주는 말씀이다.


야고보 당시의 많은 그리스도인들은 이미 폭넓게 전파되었던 바울의 이신칭의의 은혜의 복음에 대해서 잘못 이해하고 있었다. 값없이 은혜로 구원을 받았으니 신자의 행함은 있어도 되고 없어도 되는, 그래서 구원과는 아무 관련이 없는 첨가물 정도로 간주하였다. 그들은 믿음과 행함이 분리될 수 있는 것으로, 또는 그저 구원에 있어서 믿음만이 중요하고 믿음만 있으면 된다는 식의 오해를 한 것이다. 그들은 살아있는 믿음은 사랑으로 역사하며 반드시 행함으로 열매 맺는 것이라는 것을 바로 알지 못했던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오해는 필시 그 당시만의 오해가 아니라 오늘날 우리들의 오해이기도 하다. 우리도 값없이 은혜로 구원받았으니 신자의 선행은 있으면 좋겠지만 없어도 구원 받는데는 하자가 없는, 그래서 구원과는 아무 관련이 없는 첨가물 정도로 간주하고 있지는 않는가? 우리의 삶에서 사랑의 실천과 복음적 순종의 행위들이 나타나지 않는데도 건전한 교리에 대해 지적으로 동의하고 입술로 고백한다는 사실 때문에 스스로 신앙생활을 바르게 하고 있다고 생각하지는 않는가?


오늘날 많은 한국교회 성도들이 바로 이러한 그릇된 생각으로 신앙생활을 하고 있다. 믿음을 지식적인 동의나 일시적인 감동, 피상적인 감흥으로 봄으로써 행함을 산출하지 못하는 값싼 믿음으로 전락시켜 버린 것이다.


우리는 위의 질문들로 스스로에게 자문함으로써 스스로를 점검해야 한다. 나의 믿음은 참된 믿음인가 아니면 사실상 죽은 믿음인가? 나에게 자기를 희생하여 남을 돕고 섬기는 사랑의 실천이 나타나고 있는가? 만일 우리가 이 질문에 확신 있게 답하지 못한다면 우리는 행함 없는 믿음은 사실상 죽은 믿음이라고 하는 야고보서의 말씀을 우리에게 주시는 경고요 도전의 말씀으로 진지하게 받아들여야 한다. 그리고 죽은 믿음을 회개하고 진정한 믿음의 삶을 향해 전진해 나아가야 한다.


우리는 이제까지 바울서신과 야고보서의 비교 연구를 통해서 이신칭의 복음과 믿음과 행함의 불가분리적인 관계에 대해 정리하였다. 결론적으로 말하면 이 둘 사이의 모순적인 상황은 바울과 야고보가 상대한 대적자들이 서로 달랐음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바울은 율법주의자들을 반대하여 행함을 배제한 오직 믿음으로 오직 은혜로 의롭게 됨을 주장하였던 것이고, 야고보는 도덕률폐기론을 반대하여 의롭다 함을 받는 참된 믿음은 반드시 행함을 산출함을 주장하였던 것이다. 이러한 맥락을 잘 이해하면서 서로 간의 용어상의 차이를 염두에 두어야만 이 난해 구절들을 올바르게 해석할 수 있는 것이다.


우리는 바울서신이 말하는 죄인의 최초의 칭의로서 ‘실제적 칭의’와 야고보서가 말하는 이미 의롭다 함을 받은 의인이 하나님과 사람 앞에서 의롭다고 선언되는 ‘선언적 칭의’ 개념 모두를 함께 강조해야 할 필요가 있다. 왜냐하면 율법주의와 도덕률폐기론적 사상은 오늘날의 세상과 교회와 우리 내면에 여전히 존재하는 경향들이기 때문이다. 우리가 아무리 이론적으로는 율법주의와 도덕률폐기론을 배격하더라도, 실제 삶 속에서 자기 의를 주장하든가 아니면 자신의 욕망을 주체하지 못하고 죄를 범하는 모든 곳에서 바로 율법주의와 도덕률폐기론적인 경향을 발견하게 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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