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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년 특강 : 개혁주의적 설교관(2)


설교가 하나님의 말씀이 되려면


이승구 교수(합동신학교 조직신학)

 

목회자들이 하는 설교가 하나님이 말씀이려면 그 설교가 성경의 의도를 통해 나타난 신적 저자인 하나님의 의도를 잘 전달해야 한다. 성경의 의도를 그리고 하나님의 의도를 제대로 전달하지 않는 설교는 하나님의 말씀이 아니다. 이를 흥미롭고도 명확하게 전달하기 위해 중세 말기의 교회의 모습을 생각해 보기로 하자.

 

당시 유럽 대부분의 지역에서는 마을 주민들 상당수가 주일예배에 열심히 참여하였고 상당히 많은 경우에는 라틴어로 진행되는 미사 순서를 잘 이해하지 못하고 참여했다. 미사를 집례하는 사제(제사장, priest)의 일거수일투족을 주시하면서 소위 하나님께 드리는 ‘제사’에 정성껏 참여하면서 소위 ‘은혜 받는’ 사람들도 있었고, 곳곳에서는 주일 아침 미사와는 달리 주일 저녁 예배 시간에 그들이 일상적으로 쓰는 말로 성경과 기독교의 의미를 설명해 주는 설교를 듣기도 했었다. 또한 야외에서 설교자들은 그들이 쓰는 언어로 종교적인 것에 대해 선포하는 것을 잘 듣기도 했었다.

 

이런 예시로 벨직 신앙 고백서의 초안을 쓴 귀도 더 브레의 어머니가 오늘날 벨기에의 남부 지역에 큰 도시인 몽스(Mons)에서 순회 이탈리아 제슈이트 수도사가 길거리에서 설교하는 것을 듣고서는 하나님께 “왜 이와 같은 아들을 주시지 않으십니까? 내 뱃속의 아기가 당신님의 말씀을 전하는 사람이 되기를 원합니다”라고 기도했었다고 한다. 그녀는 자신이 사용하던 중세 불어로 그 제슈이트 설교자의 설교를 들었음이 분명하다. 그때의 그 설교는 분명 하나님의 권위를 가지고 말씀을 전한다고 하는 것이었으나 결국 잘 따져 보면 성경에 있는 하나님의 뜻과는 다른 것을 선포하고 있었다. 이렇게 하나님의 의도와 달리 선포된 것은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하기 어렵다.

 

제2회 바티칸 공의회(1962-1965) 후에는 그 공의회의 결정에 따라서 많은 성당에서 모두 다 자국의 언어로 미사를 집례하며 강론도 자국의 언어로 한다. 성경을 풀어 설명하기도 하고 그곳에 있는 하나님의 의도를 설명하기도 한다. 그러나 전체적으로 살필 때 천주교의 미사 시간에 선포되는 강론을 과연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할 수 있을까?

 

바로 여기에 루터의 고민이 담겨 있었다. 만일 어떤 교회 안에서 성경이 가르치는 바른 가르침인 이신칭의의 복음이 바로 선포되지 않는다면 그곳은 과연 바른 교회일 수 있는가를 루터는 질문했다. 이런 고민 가운 속에, 그는 이신칭의 교리가 교회가 서고 넘어지는 교리라는 확신이 들었고, “이신칭의를 분명히 하지 않는 교회는 그 어떤 곳이든지 참된 교회가 아니다”라고 선언하게 되었다. 물론 이런 선언이 단기간에 쉽게 나온 게 아니라는 점을 주의해야 한다. 이 선언을 한 루터도 그렇고, 이런 가르침을 믿고 난 후에 성경적 가르침과 당대 교회의 가르침을 비교한 사람들은 오랫동안 심각하게 고민했다. 이것이야 말로 가장 중요한 영적 전투의 기간이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그들이 과연 성령께 속해 있고 그들 안에 성령의 역사가 있을 때, 그들은 기록된 말씀의 바른 의미를 떠나서 선포하는 것을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할 수 없었다. 그리하여 설교는 있으나 하나님의 말씀이 없는 교회에 그대로 속하여 있을 수 없다고 생각하여 천주교회와의 관계를 단절하고, 말씀의 밝은 빛이 비추는 데를 향해 나가기 시작했다. 일부는 제네바와 같이 하나님의 말씀이 가장 체계적으로 가르치는 곳을 향해 갔고, 일차적으로 성경을 읽고 루터나 다른 개혁자들의 글을 열심히 읽어 나갔다. 바르게 된 그리스도인들에게는 ‘그냥 설교’가 하나님의 말씀이 아니고 ‘성경의 가르침’을 잘 해석해서 선포해 주는 설교만이 하나님의 말씀이다. 참된 하나님의 백성들은 항상 하나님의 말씀을 갈구하고, 그 하나님의 말씀으로 사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런 정황 가운데서 예수님께서 시험받으시면서 인용하셨던 말씀의 참된 의미가 잘 드러나게 된다. “사람이 떡으로만 살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입으로부터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살 것이라 하였느니라”(마 4:4). 그리하여 어느 시대에 사는 하나님의 백성이든지 하나님의 말씀을 갈구하고, 그것이 없으면 주린다고 느끼는 것이다. 말씀이 없으면 죽게 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설교가 하나님의 말씀으로 작용하려면 근본적으로 성경을 영감하신 성령께서 설교도 사용하셔야만 한다. 개혁파에서는 항상 성령의 역사를 강조해 왔다. 칼빈은 시편 주석에서 이렇게 말한 바 있다. “만일 우리가 계명을 준수하는 능력이 하나님으로부터 온다는 사실을 인정한다면, 그와 동시에 하나님께서 이해와 깨달음의 눈을 열러 주시기 전까지는 우리 모든 인간들이 눈먼 장님일 뿐이라는 것도 기꺼이 인정해야 한다.”

 

그래서 개혁파 사람들은 “성령께서 말씀을 사용하셔서 은혜를 베푸신다”고 한 것이다. 여기 소위 ‘cum verbo의 원리’가 나타난다. 성령께서 우리가 선포하는 ‘말씀을 사용하셔서’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은혜를 베푸시는 것이다. 그러므로 용어 사용에 있어서 이런 용어를 유지하고 사용하는 것이 좋다. 과거 청교도들 일부와 그 전통을 따라 마틴 로이드 존스 목사님이 설교에 ‘기름 부으심’(anointing)이라는 용어를 사용하기도 하였다. 핵심은 성령께서 역사하셔서 우리의 심령을 하나님의 말씀의 의미에 부합하게 만드시는 일이다. 그러므로 설교자는 온전히 성령께 의존하는 수밖에 없다. 그것만이 설교가 은혜의 방도로 작용하는 방식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가장 근본적인 것은 성령의 역사하심, 성령께서 선포되는 말씀을 사용하셔서 은혜를 베푸심이다. 은혜를 주시는 주체가 성령 하나님이심을 아주 분명히 하고, 늘 의식하여 우리의 설교 가운데서 성령이 역사하시도록 해야 한다. 이것은 신비한 일이고, 우리가 도무지 조작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그렇기에 사역에 있어서 다른 방식으로 조작하는(manipulation) 시도나 그런 의도가 있지 않도록 해야 한다. 패커의 말이 적절한 것이다. “심리적 압박을 행사하여 무엇인가를 결심하게 만드는 모든 장치들을 제거해야 한다. 그것은 성령의 영역을 침범하는 뻔뻔스러운 짓이다.”

 

그러므로 이 일에 있어서 인간은 수동적이고 성령께서 역사하시도록 할 수밖에 없다. 패커가 잘 강조한 바와 같이 “전달된 메시지를 사용하여 인간을 믿음으로 인도하는 일은 오직 하나님의 영이신 성령께 맡겨야 한다.” 그렇기에 기도가 매우 중요하다. 설교 준비 할 때의 기도, 설교를 준비한 후의 기도, 설교하면서 내적으로 하는 기도, 설교 후의 기도 등 온전히 주님께서 역사하시도록 온전히 성령만을 의지해야 한다. 17세기 말과 18세기 초의 장로교 목사로 에딘버러대학교를 졸업하고 장로교 신념 때문에 호란으로 갔다가 돌아와 런던에 있는 스코틀란드 회중을 섬긴 아주 열정적인 설교자로 알려진 로버트 트레일(1642-1716)이 이렇게 말한 바가 있다고 한다. “많은 훌륭한 설교들이 효력을 발생시키지 못하는 것은 그것을 연구하고 준비할 때 기도가 부족했기 때문이다.”

 

또 의도적으로 조작하지 않더라도 설교자가 어떤 식으로 말하거나 행동해 성도들이 은혜 받는 듯한 감정을 주게 하는 방법을 추구하는 것은 매우 위험한 태도다. 오랫동안 설교하면서 이런 분위를 파악하고 추구해 가는 것은 결국 인위적 시도라는 점을 인식해야만 한다. 성실하게 목회하고 인위적 조작을 하지 않는 목사님들도 이런 분위기 형성을 성령의 역사라고 오해하기 쉽기에 매우 주의해야 한다.

 

그러므로 온전히 성령께 의존해서 성경에 나타난 하나님의 의도를 바르게 선언하는 설교는 하나님의 말씀이고, 우리는 그런 하나님의 말씀을 배우고 하나님의 뜻을 따라 가야 하는 것이다. 바로 여기에 하나님의 말씀을 중심으로 모이는 교회 공동체의 참된 의미가 드러나는 것이다. 부디 우리 교회들이 그런 교회이기를, 우리 목회자들이 이런 의미에서 하나님의 뜻을 선포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사람들이기를,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참으로 듣는 사람들이기를 간절히 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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