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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 손재호
성경본문 행 10:34-43
강설날짜 2016-12-04

2016년 가을학기 특강


성신의 가르치심과 인도하심의 예(1)-베드로


말씀:사도행전 10:34-43


가. 고넬료가 베드로에게 사람을 보냄


사도행전 10장에는 고넬료의 집을 방문한 사도 베드로에 관한 이야기가 나옵니다. 여기에 나와 있는 베드로의 행동은 역사적으로 마치 큰 산을 넘는 것과 같은 의미가 있는 행동입니다. 이런 행동은 그저 베드로 혼자서 한 것이 아니고 성신님의 가르치심과 인도하심을 따라서 한 것입니다. 거기서 우리는 성신의 가르치심의 자취를 찾아보려고 합니다. 따라서 10장을 전부 강해하지는 않고, 성신께서 베드로를 어떻게 인도하셨는가, 또 고넬료에게 임한 그 거룩한 환상의 은혜는 어떤 것이었는가에 대하여 살펴보겠습니다.


구약에서 본문을 취하지 않고 신약에서 취하여 보는 이유는 구약보다 신약에서 성신의 특별한 역사의 양상을 좀더 명료하게 알 수 있기 때문입니다. 성신께서 처음에 교회를 세우실 때 새로운 오이코노미아(경륜-하나님의 특별한 계획)를 발전시키시는 일에 쓴 그릇들 즉 베드로나 다른 사도들 특별히 바울이나 혹은 이방인으로서 처음으로 거룩한 복음을 받은 고넬료와 같은 인물의 기록에서 이런 중요한 것들을 볼 수 있습니다. 사도행전은 하나님 나라의 거룩한 큰 초석을 어떻게 놓고 어떻게 발전시키는가 하는 문제에 집중해서 살펴보는 것이 중요하지만 이번에는 성신께서는 어떻게 가르치고, 어떻게 인도하시며, 사람들은 그에 대해서 어떻게 반응을 일으켰는가 하는 것을 베드로의 경우를 통해 살펴보겠습니다.


사도행전 10:1-8절의 내용은 고넬료가 환상을 본 다음에 욥바에 있는 피장이 시몬의 집에 우거하고 있는 베드로에게 사람을 보낸 이야기입니다. 그 이튿날 베드로는 한낮에 지붕에서 환상을 보았고 이것이 무슨 뜻일까 생각하고 있는 중에 고넬료가 보낸 사람들이 찾아왔습니다. 그래서 그 사람들이 온 내력을 듣고 그 거리가 상당히 멀어서 단숨에 돌아갈 수 없는 거리이므로 욥바에서 하루를 유숙하게 했습니다. 욥바에서 지중해를 옆으로 끼고 반듯이 올라가면 샤론의 들이라고 하는 잘 알려진 평야가 있습니다. 그 평야에는 장미와 비슷한 하바첼렛, 또 백합화와 비슷하고 수선화와도 비슷한 쇼샨나 꽃 등이 자랍니다. 그런 꽃이 아름답게 피는 비옥한 땅을 지나서 해안을 따라 위로 올라가면 가이사랴가 나옵니다.


그 당시 가이사랴에는 팔레스타인을 통치하고 있던 로마의 지역 총독이 있었습니다. 성경에 등장하는 빌라도나 베스도나 벨릭스가 그러한 사람들입니다. 이 사람들은 로마 원로원에서 보낸 사람이 아니고 황제가 직적 군인 가운데 유능한 사람을 임명해서 황제의 명령 하에서 다스리게 한 까닭에 훨씬 강력한 권력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 수부가 가이사랴였습니다. 말하자면 그 곳에 총독부가 있었고, 군대가 주둔하고 있었는데 그 주둔한 군대 가운데 백부장 즉 지휘관 장교로서 일을 하고 있는 사람이 고넬료입니다. 욥바에서 가이사랴까지 거리가 대략 150리 길이면 하루 반나절 거리이므로 고넬료가 오후 3시경에 환상을 보고 즉시 사람들을 보냈다고 하더라도 그 이튿날 낮쯤에나 도착했을 것입니다. 그러니까 베드로가 지붕에 올라가서 기도하다가 환상을 보고 난 다음에 바로 고넬료가 보낸 사람들을 만난 것인데 그들의 이야기를 듣고 떠나려면 그 이튿날 일찌감치 일어나 가는 것이 좋으므로 그 날은 거기서 우거하게 한 것입니다.


고넬료가 사람을 보낸 정황을 보면, 그것이 무엇일까 하고 망설이지 않고 천사가 나타나서 명령한 말을 듣고 바로 사람을 준비해서 석양녘에 선선할 때 떠나서 밤새 걸어서 그 이튿날 한낮에 욥바에 도착한 것 같습니다. 그렇게 먼 길을 온 사람들이 여기서 하룻밤을 지내며 노독을 풀고서 그 다음날 아침 일찍 일어나서 당일에 가이사랴에 당도하려고 했으면 부지런히 걸었어야 했을 것입니다. 베드로도 그냥 걷게 했는지는 알 수 없으나 모시러 왔으니까, 그냥 걸어가자 하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하여튼 그 날 베드로가 고넬료의 집에 도착했을 때 고넬료는 가까운 친적들과 친구들까지 불러 모아 놓고 베드로를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그 자리에서 베드로는 “당신이 아는 바와 같이 우리 유대인은 이방 사람과 서로 교제하는 것이 위법인 줄 알지만 내가 특별한 어떤 계시 곧 하나님이 정결케 한 것을 네가 부정하다고 하지 말라고 하신 것 때문에 부름을 사양치 않고 왔는데 무슨 까닭으로 나를 불렀는가”하고 물었던 것입니다. 그에 대해 고넬료는 환상을 본 것을 그대로 다 이야기 하고 마지막에 “이제 우리는 주께서 당신에게 명하신 모든 것을 듣고자 하여 다 하나님 앞에 왔다”고 말을 했습니다. 베드로 앞이 아니라 하나님 앞에 있다고 한 것입니다.


나. 베드로가 예수님을 증거함


베드로는 고넬료의 일족과 거기 앉아 있는 모든 사람들에게 34-43절에 나와 있는 메시지를 전했습니다. 먼저 자기가 받은 강렬한 인상을 ‘참으로 하나님께서는 사람을 외모로 취하지 아니하신다’고 표현하였습니다. ‘사람의 외모 즉 유대 사람이든지 이방 사람이든지 당신과 같이 로마 사람이든지 따지지 아니하시고 각 나라 사람 가운데서 하나님을 경외하고 의를 행하는 자를 취하신다는 것을 알았다’고 말했습니다. 하나님을 경외한다는 말은 히브리 종교의 대표적인 용어인데 진정으로 하나님을 공경하여 섬기고 또 두려워할 줄 안다는 것이고, 의를 행한다는 것은 자기가 마땅히 해야 할 일은 무엇이고, 어떻게 선을 행할 것인가를 알고 행했다는 것입니다. 성경에서는 남을 사랑하는 것도 의라는 말로 표현했습니다. 가령 어떤 사람이 자기의 재물을 흩어서 가난한 사람에게 다 주었다고 할 때 그것이 인류애에 근거한 행동이지만 성경에서는 그것을 단순히 자비라 하지 않고 ‘그 의가 영원히 있느니라’(시 112:9) 해서 의라는 말을 썼습니다. 이렇게 넓은 의미로 사랑이나 인자나 긍휼 혹은 인내나 용기 있게 나가는 것이나 옳게 판단하고 좇아가는 것 모두를 포괄해서 구체적으로 행동해 나갈 때 그것을 의라는 말로 표현했습니다. 구약에 특별히 그 말을 많이 썼습니다. 바른 품성을 가지고 바른 도덕적인 생활을 하는 사람들, 인간으로서 마땅히 해야 할 바른 일들을 바르게 하느라고 애쓰고 나가는 사람들을 가리켜서 의인이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아브라함도 의인이라고 했고 롯도 의인이라고 하고 노아도 의인이라고 한 것입니다.


베드로는 의를 행하는 사람은 하나님이 받으시는 줄을 깨달았다고 했습니다. 무엇보다도 강렬한 유대주의적 사상 가운데서 그냥 주저앉아서 이방 사람의 집에 출입하는 것을 지극히 꺼릴 것이 분명한 베드로를 고넬료의 집까지 인도하셔서, 이방 사람의 집에라도 와서 하나님께서 명하시는 대로 행할 수 있게 그의 사상적인 근거를 시정해 주신 일이 중요합니다. 너는 지금까지의 전통적인 관념 하에서 차별을 하지만 이제 하나님이 한번 손을 드사 정결케 하시면 네가 전통적으로 가진 관념으로 판단하는 것은 효과가 없는 것이다고 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베드로도, 하나님이 이미 정결케 한 것을 네가 부정하다고 하지 말라고 하신 까닭에 내가 여기에 왔다고 하고 고넬료에게 고백을 했던 것입니다. 그리고 자기가 하나님이 사람을 외모로 취하지 않으신다는 것을 알았노라고 했습니다. 외모라고 할 때에는 단지 눈앞에 보이는 시각적인 형식뿐만 아니라 그의 가지고 있는 어떤 생활의 스타일도 외모입니다. 유대적인 스타일로 살든지, 이교적인 로마 사람의 스타일로 살든지 그 사는 스타일 역시 외모입니다.


이렇게 하나님은 형식이나 양식으로 사람을 취하지 아니하신다는 사실에 강한 인상을 받았다고 서두를 꺼낸 후에 다음 이야기를 죽 해 나갔습니다. 그의 말에 몇 가지 중요한 것들이 있습니다. 첫째는, 예수 그리스도를 소개하되 제일 먼저 ‘만유의 주 되신 예수 그리스도’라고 했습니다. 이 말은 예수 그리스도를 얼마나 분명하게 하나님으로 믿고 살았는가 하는 것을 보여 줍니다. ‘만유의 주 되신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화평의 복음을 전하사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보내신 말씀을 당신이 알 것이다. 이스라엘 자손에게 화평의 복음을 전하사 보내신 말씀이란 요한이 세례를 반포한 이후로 갈릴리에서부터 시작되어 온 유대에 두루 전파된 하나님 나라의 복음이다. 그것은 당신네들도 이미 아는 바인데 하나님이 나사렛 예수에게 성신과 권능을 기름 붓듯 하셨다.’ 하나님의 권능과 하나님의 성신을 기름 붓듯이 부음 받아서 충만하였다고 합니다. 38절을 보면 “저가 두루 다니시며 착한 일을 행하시고 마귀에게 눌린 모든 자를 고치셨으니. 이는 하나님이 함께하셨음이라”고 했습니다. 여기서 ‘착한 일’이란 그 마음이 흑암에 눌렸든지 육신이 육체의 악에 눌렸든지 그것을 고쳐 주시는 일을 하신 것을 말합니다.


여기서 우리는 “하나님이 그와 함께하셨다”는 말에 주의해야 합니다. 이 말은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하신다’고 추상적으로 쓰는 말과는 다릅니다.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하신다는 것은 하나님의 보호가 함께했다든지, 하나님의 지시와 인도가 함께했다든지, 그렇지 않으면 조금 더 들어가서 하나님의 성신이 함께했다든지 하는 정도의 이야기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예수님과 함께하셨다고 할 때는 그는 사람이지만 하나님이 또한 늘 같이 계셨다는 말입니다. 그는 ‘시앤쓰로포스’이시다. 곧 하나님이요, 사람이시다. 신인이시다. 그래서 신인으로서 하셔야 할 일을 마땅히 하셨다는 의미입니다.


사도행전 10:39절을 보면 “우리는 유대인의 땅과 예루살렘에서 그의 행하신 모든 일에 증인이라”고 했습니다. 베드로는 자기가 그의 증인이라고 했습니다. 그는 그 예수님의 행하신 일에 직접 증참한 까닭에 그의 증인이라고 한 것입니다. “그렇지만 이러한 신령하고 숭고한 분을, 선을 행하고 마귀의 세력에서 사람을 건져내신 그분을 저들이 나무에 달아 죽였다”고 해서, 막연히 ‘저들’이라고 했지만 로마 사람 당신들이라는 말이기보다는 악당들 특히 유대 사람들을 가리켜서 그들이 죽인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을 이야기했습니다. 그 다음에 40-41절에서는 그의 부활을 이야기합니다. 이렇게 복음의 사실을 다 포함시켜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사흘 만에 다시 살리사 나타내시되 모든 백성에게 하신 것이 아니요, 오직 미리 택하신 증인 즉 그 나타내 보이신 사실을 후일에 증거해야 할 증인들에게 나타내신 것이다. 그 증인들은 누구냐 하면 곧 죽은 자 가운데서 일어나신 후 모시고 음식을 먹은 우리에게 하신 것이라”고 말합니다. 우리는 어떤 사람이냐 하면 무엇보다도 죽은 자 가운데서 일어나신 후 그분을 만나서 모시고 함께 음식을 먹을 만큼 같이 지낸 자라는 것입니다. 신인이신 예수님이 땅에서 생애를 보내시고 그들에게 붙들려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셨으나 하나님이 사흘 만에 그를 다시 살려내셨고, 그 다음에는 그것을 증거 할 사람들인 우리에게 보이셨다고 했습니다.


그 다음에는 그분이 우리에게 명령하여 백성에게 전도를 하게 하셨는데 계속해서 42절에 보면 “하나님이 산 자와 죽은 자의 재판장으로 정하신 분이 곧 이 사람인 것을 증거하게 했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죄에 대하여 논합니다. 산 자나 죽은 자도 마지막에 각각 심판의 부활과 생명의 부활로 다 일어나서 그에게 재판을 받을 것이고 그 행한 대로 판단하실 것이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우리만 아니라 모든 선지자도 저에 대하여 증거하였는데 그들이 한 증거는 무엇이었느냐 하면 43절에 보면 “저를 믿는 사람들이 다 그 이름을 힘입어 죄 사함을 받는다 하였느니라”고 해서 사죄에 대하여 이야기했습니다. 베드로는 여기서 그런 예수를 소개하는 것입니다. 베드로가 여기에 좀더 보태서 무슨 말을 했는지 알 수 없습니다. 하지만 그것만으로도 메시지 내용은 충분했습니다. 이 말을 할 때 그 사람들 위에 성신님을 내려주셨는데 그분의 특별한 강림의 자태를 확인할 수 있게 내려주셨습니다.


사도행전 2장에 보면 항상 그런 방식으로 꼭 성신님이 내리신다는 것은 아니지만 오순절 때에는 성신 강림의 사실을 어떤 특별한 방식으로 보이셨습니다. 성신을 내려주시사 각국 방언을 하였는데 그 방언들을 예루살렘에 왔던 여러 나라 사람들이 알아들었습니다. 아무 소리라도 그냥 중얼거린 것이 아니고, 높으신 하나님을 찬송하는 할렐의 어떤 부분을 각국 방언으로 하였던 까닭에 그들이 곧 알아들은 것입니다. 그런데 사도행전 10장 여기서도 베드로가 여기까지 말을 했을 때 그 듣던 모든 사람에게 아이든지 어른이든지 친구든지 그의 식구든지 간에 그들 위에 성신님이 다 내렸고 그 사람들이 하나님을 찬송하는 말을 방언으로 하게 된 것입니다. 사도행전 10:44-48절을 보면 “베드로가 이 말 할 때에 성령이 말씀 듣는 모든 사람에게 내려오시니. 베드로와 함께 온 할례 받은 신자들이 이방인들에게도 성령 부어 주심을 인하여 놀라니. 이는 방언을 말하며 하나님 높임을 들음이러라. 이에 베드로가 가로되 이 사람들이 우리와 같이 성령을 받았으니. 누가 능히 물로 세례 줌을 금하리요 하고, 명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라 하니라. 저희가 베드로에게 수일 더 유하기를 청하니라”고 했습니다. 이것을 보고 베드로뿐 아니라 같이 온 할례 받은 사람들 즉 유대주의적 신자들도 깜짝 놀랐습니다. “하나님께서 할례 받지 않은 사람들에게도 이렇게 하나님의 나라로 받으셨다는 확실한 증거로서 성신을 내려주시다니!” 하고 이방 사람들에게 성신을 부어 주신 것을 인하여 놀랐습니다. 그래서 베드로는 “이 사람들이 우리와 똑같이 성신을 받았으니. 누가 능히 물로 세례 주는 것을 금할 수 있겠느냐?”고 하였습니다(47). 하나님께서 실질로 직접 증명하셨는데 사람이 제도로써 막을 법이 없다는 것입니다. 세례 줄 것을 금할 권위가 어디 있겠느냐 하고서 거기 같이 동행한 사람들에게 명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에 접붙이는 세례를 그들에게 주었습니다.


다. 유대주의적 장벽


이 사건은 성신께서 가르치시고 인도하시는 데에 어떤 명확한 목표가 있었다는 것을 가르쳐 줍니다. 베드로에게 환상으로 보이시고 생각하게 하셨고 생각하던 중에 고넬료가 보낸 사람들이 와서 그 사정 설명하는 것을 듣고 비로소 그 의미를 깨닫고 곧 그들과 함께 갈 작정을 하였습니다. 그들의 노독을 풀게 하려고 거기서 하루 쉬게 한 다음에 이튿날 함께 가이사랴로 가서 이방인 고넬료의 집에 이르러 “나는 유대 사람이다. 유대 사람의 법을 지켜 온 사람이지만 하나님이 정결케 한 것을 불결하다 하지 말라고 하셨기에 내가 왔는데 왜 나를 청했는가”하고 묻고 이야기를 하기 시작했습니다. 여기 보면 성신께서 베드로에게 환상으로 가르치셨고, 환경이 그에게 그 의미를 설명해 주었습니다. 그런 것을 그렇게 깨닫을 때에는 성신님의 유기적인 역사가 있어야 합니다. 그런 환상을 보았다고 할지라도 고넬료가 보낸 사람들이 와서 무어라고 말할 때 그것이 그 환상의 의미인지 아니면 환상의 의미는 별다른 곳에 있는지 의심을 하려면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절대로 의심할 여지없이 그것이라고 확정하기 어려운 것입니다. 그러나 베드로는 성신의 인도하심을 받고 주장하심을 받은 위치에서 기도하고 환상을 보았습니다. 환상 가운데 “보자기에 있는 여러 가지 짐승들을 일어나 잡아 먹으라”는 말씀을 들었으나 “속되고 깨끗지 않은 것들을 내가 먹은 일이 없다”고 하면서 자기가 유대주의를 잘 지킨 것에 대하여 이야기할 때 “그 유대주의 지켰다는 그것이 어느 때는 무용하게 된다. 내가 깨끗하게 한 것인데도 너는 더럽다고 하겠느냐? 대체 최초에 더럽다거나 깨끗하게 정하신 이가 누구냐? 내가 어떤 것을 깨끗하게 하면 그래도 네가 더럽다고 하겠느냐?”고 하는 논리로 말씀을 하셨습니다. 그제야 그는 ‘그렇다! 원래 깨끗하고 불결한 것의 가치 판단의 표준은 하나님이 정하시는 것이지 그것이 태어나면서 자연스럽게 비치되어 있는 것은 아니다’하고 깨닫게 되었습니다.


지금 베드로에게는 주께로부터 받은 거룩한 사명이 있습니다. 예루살렘으로부터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서 그리스도의 증인 노릇을 해야 합니다(행 1:8). 각 족속과 방언과 나라 가운데 있는 사람들에게 그리스도를 증거하라는 것이 예수님이 승천하시기 전에 사도들에게 내린 위대한 사명입니다(마 28:19-20). 그는 그 사명에 대해서 소홀히 하려고 한 사람이 아닙니다. 그런데 지금 그는 주님의 위대한 명령대로 다 행하고 있는 것은 아닙니다. 베드로에게 중대한 장벽이 하나 딱 걸려 있는데 그것은 한마디로 말하면 유대주의입니다.


당시에 유대 사람으로서 이방 사람과 어떻게 접촉하며, 거룩한 새로운 오이코노미아(경륜)의 어떤 조건 하에서 그들을 맞아들일 것인가 하는 문제 앞에서 발생한 이론이 바로 할례를 주자는 것이었습니다. 이방 사람도 마땅히 모세의 법대로 할례를 받고 일단 선민의 테두리에 들어와서 거룩한 하나님 나라의 도리를 새로 받으라는 것이 소위 유대주의화 운동자들의 주장입니다. 이들이 초대 교회에서 중대한 장벽 노릇을 했습니다. 유대주의라는 무서운 철벽 안에 복음을 딱 가두어 놓고 ‘여기로 들어오면 너희가 자유롭게 얻을 수 있지만 그것이 밖으로는 나가지 않는다’고 하는 무서운 주장과 그러한 행습이 하나의 큰 사회 세력을 형성하고 있었습니다. 이 때는 교회가 선지 10년쯤 된 때입니다. 교회가 주후 30년에 처음으로 섰다고 하면 40년경에 이런 일이 발생했으리라는 추측입니다.


이것이 10년 어간에 교회 안에서 자라난 사상적인 큰 경향과 상태입니다. 이렇게 유대주의화를 주장하는 사람들의 주도 하에 교회가 움직여 나갔다는 것은 참으로 무서운 사실입니다. 이것을 타파하려면 큰 충돌이 어떠한 방식으로든지 한번은 생겨야 할 것이었습니다. 이런 큰 격돌의 한가운데서 앞장서서 싸운 이는 물론 사도 바울입니다. 결국 이러한 사실에 대해서 판단을 하고 기독교 역사상 큰 획을 그은 회의가 사도행전 15장에 나오는 예루살렘의 공의회입니다. 그것은 주후 50년경 그러니까 교회가 선지 20년 만에 결국 곪고 곪았던 것을 터뜨린 일인데 거기에서 맹렬한 논쟁들이 있었습니다.


오늘날 기독교의 보편성이라는 관점에서 생각하면 그것이 그렇게 굉장한 논쟁이 될 만한 사실이겠는가 하겠지만 그 당시의 눈으로 볼 때는 그렇지 않았습니다. 무서운 유대주의적 세력이 기독교 전체를 독점하려고 쥐고 앉았던 시대였습니다. 사도들도 다 유대 사람입니다. 이방 사람이 하나라도 낀 일이 없습니다. 그런고로 그 세력은 유대주의로 다 흘러가고 만 것입니다. 이런 무서운 사실이 앞으로도 계속될 텐데 그럴지라도 하나님은 거룩한 경륜과 계획 하에서 이 때에 벌써 이런 초석을 놓기 시작하셨습니다. 말하자면 이것은 복음이 유대주의의 철벽을 무너뜨리고 바깥으로 나가기 시작하는 효시가 된 이야기입니다.


성신은 이러한 중대한 의미가 들어 있는 사건에 베드로를 선택해서 쓰셨습니다. 왜 베드로인가 하면 유대주의자가 아닌 다른 사람들이 하면 싸움이 안 되기 때문입니다. 사도들 가운데서 이런 문제가 발생해서 이 철벽을 뚫고 나가야만 합니다. 그러려면 유대주의자요, 사도 중에서 저명하고 적극적인 인물인 베드로를 선택해서 쓰셔야만 했습니다. 그것이 우리의 좁은 식견으로도 과연 그렇겠다고 느껴집니다. 요한이나 마태나 바돌로매나 다른 사람을 쓰지 않고 베드로를 쓰셔서 베드로 자신의 문제와 동시에 하나님의 새로운 오이코노미아(경륜)의 문제를 크게 부각시켜 주신 것입니다. 이렇게 해서 베드로로 하여금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케 하여 역사적인 행보를 하게 한 것이지만 그가 이 일이 있은 후에 유대주의에서 완전히 탈피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라. 베드로가 교회의 보편성에 관해 깨닫게 된 과정


대략 주후 44년쯤 바울이 예루살렘에 두 번째 올라왔다가 돌아갔습니다. 그 후에 베드로가 안디옥을 방문한 듯합니다. 갈라디아서 2:11-14절을 보면 바울이 “게바가 안디옥에 이르렀을 때에 책망할 일이 있기로 내가 저를 면책하였노라”고 했습니다. 여기서 책망할 일은 바로 유대주의화 문제에 대한 것이었습니다. 베드로가 안디옥에 왔을 때에 이미 이방 사람들은 교인이 되어 있었습니다. 이렇게 이방 사람들이 교인이 된지는 한 2년 전쯤 그러니까 42년경 일이었습니다. 이방 사람으로서 교회에 들어온 그들은 베드로를 아주 큰 사도로서 환영하고 같이 이야기도 하면서 자연스레 그들과 음식도 같이 먹게 되었습니다. 그러면 그때에 “당신은 이방 사람이니 안 되겠고, 아무리 기독교인이지만 더 중요한 것은 유대주의요”하고 유대주의를 내세워야 하겠는가? 아니면 그리스도의 가르침을 절대적인 진리로서 내세워야 하겠는가? 베드로는 그리스도를 증거 하는 사람이므로 모든 것을 따져 볼 때 그들과 음식 먹는 것을 절대로 회피하거나 사양할 처지가 못 되었습니다. 그래서 같이 음식을 먹었습니다.


유대 사람이 이방 사람과 교제를 한다든지 음식을 먹는 것은 위에서 말한 바와 같이 유대법에 따르면 위법입니다. 그런데 그 때 예루살렘 감독 야고보, 예수님의 동생 야고보가 보낸 사람들이 그 곳에 이르렀습니다. 그들은 예루살렘에서 주 세력을 가지고 있던 할례당들 입니다. 이 사람들이 거기 이르니까 누가 와서 “야고보 감독한테서 사람이 왔습니다. 아무개 형제, 아무개 형제가 왔습니다”하는 이야기를 듣고서 베드로는 난처하게 된 것입니다. 예루살렘에 있는 사람들에게 나중에 얼마나 굉장한 비난을 받고 난처한 지경에 처할는지 알 수 없는 노릇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만 슬그머니 안 먹은 척하고 일어나 버렸습니다. 대 사도 베드로도 그렇게 했습니다. 그 속에 기독교가 가지고 있는 보편성에 대한 확실한 신앙이 아직 들어가 있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가 슬그머니 일어나니까 같이 음식을 먹던 이방 사람들에게는 그냥 기가 막힌 일이 되고 말았습니다. ‘그렇게 한 것이 가짜 사랑이었나? 저 친절이 가짠가? 아까는 그렇게 형제, 형제 하더니...’ 바나바도 거기 앉았다가 ‘이크, 그러면 나도 일어나야겠구나’해서 모두 다 일어나고 말았습니다.


그것을 가만히 보고 있던 바울은 분개하여 베드로를 면책(면전에서 책망)한 것입니다. 그러나 단순히 그 외식에 대하여 분개한 것이 아닙니다. 이것은 개인의 도덕성의 문제가 아니고 기독교의 큰 문제라고 생각한 것입니다. 바울은 예리한 사람인 까닭에 하나님 나라의 거룩한 진행의 내용이 무엇인가? 어떤 성격을 가졌는가? 유대주의적인 철벽 안에다 가두어야 할 것인가? 교회가 가지고 있는 보편성이 창달하고(거침없이 쑥쑥) 퍼져 나가야 하지 않겠는가? 하는 문제에 집중되어 있었습니다. 그에게는 교회의 보편성이 중요한 문제였습니다. 오늘날도 그것은 위대한 교리입니다. 만일 교회에서 이 보편성을 제하여 버린다면 금방 문제가 되는 것입니다. 교회는 거룩해야 하고, 교회는 통일성이 있어야 하고, 교회는 보편성이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것을 무시하고 유대주의라는 시대에 맞지 않는 옛 제도나 관습 따위 안에 꽉 가두어 둔 채 그것을 헐어 버리려 하지 않는다 말입니다. 그러므로 바울은 ‘이게 될 말이냐?’ 하고서 베드로를 면책했던 것입니다.


그러면 베드로 사도가 고넬료의 집을 방문하여 새로운 시대적인 큰 거보를 내디딘 것이 분명한데 그 후 한 4년이나 5년이 지난 지금에도 완전히 자유 하지 못하고 큰 세력에 밀려 부지불식간(미처 생각지도 알지도 못하는 사이)에 예루살렘에 있는 많은 유대주의적 신자들 속에 자기도 동화되어 들어간 것입니다. 말하자면 행동에 있어서는 발빠른 인물이었지만 사상적인 견지에서는 명확하지 못하여 그냥 질질 끌려간 것입니다. 그러나 그 후에 베드로는 회개를 했습니다. 주후 50년에 예루살렘 공의회에서 그런 문제를 가지고 굉장한 변론이 있을 때 베드로는 자기가 과거 한 10년이나 전에 고넬료 집에서 당한 일과 그 때 받은 거룩한 묵시에 관한 것을 가지고 맹렬하게 사도 바울의 논리를 뒷받침해 가면서, 여기서 일보도 양보를 못 한다 하고 버티었습니다. 이리하여 결국 공의회의 대세는 기독교의 큰 진리를 바르게 천명하는 데로 들어갔던 것입니다.


마. 성신의 가르치심에 대한 신자의 책임


우리는 베드로가 고넬료의 집에 간 사실을 들어서 성신의 가르치심과 인도하심을 받은 사실에 대하여 조금 추적해서 살펴보았습니다. 성신께서 교회의 보편성을 강렬하게 나타내셔서 새로운 오이코노미아(경륜)가 어떠한 것인가를 보여 주셨습니다. 그래서 베드로는 유대 사람의 전통적인 완고함 가운데서는 지금까지 도무지 생각할 수 없었던 큰 사실들이 발생한 것을 보고 깨달았던 것입니다. ‘각 나라 사람 가운데서 하나님을 경외하고 의를 행하는 사람은 하나님이 받으신다’하고 깨달아 알았던 것입니다. 성신의 가르치심으로 그런 깨달음을 가질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성신의 충만함을 받아 활동했던 대 사도 베드로도 자기가 밀착하여 견지하고 나가야만 할 일을 소홀히 하였을 때는 안디옥에 가서 그러한 실수를 한 것입니다.


성신의 가르치시는 일에 대한 것을 배울 때에는 항상 우리 자신의 책임이 크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성신께서 가르쳐 주시면 그것이 우리에게 사상의 한 초석이 되고 생명의 양식이 되어 생명력을 더 발휘하게 하는 중요한 재료가 되어야 합니다. 그 때는 감격해서 순종하고 획기적인(획기적-어떤 과정이나 분야에서 전혀 새로운 시기를 열어 놓을 만큼 뚜렷이 구분되는. 또는 그런 것) 거보를 내 딛기도 하지만 세월이 감에 따라서 희미해져서 그것이 자기의 전체 사상의 초석이 되지 못하고 한때의 감격과 한때의 교훈으로 멎어 버린다면 나중에는 다시 옛 보금자리로 돌아가기가 쉬운 것입니다. 정신적인 자세가 향상되지 못하고 도로 후퇴하기가 쉬운 것입니다. 성신님이 가르쳐 주신 것이라고 해서 절대로 후퇴하지 않는다는 보장이 있는 것은 아닙니다. 성신이 인도해서 이룬 일 그 자체는 역사적인 거보이지만 베드로에게 있어서는 그 계시의 사실이 무슨 연고로 귀중하게 발전하지 못하고 후퇴했다가 하나님의 은혜로 친구인 바울과 같은 하나님의 위대한 종의 강렬한 책망을 받았던 것입니다. 그리하여 정신을 차리고서 예루살렘 회의 때는 자기도 맹렬하게 함께 나서서 다시 전진을 했던 것입니다.


요컨대 베드로가 욥바에서 피장이 시몬의 집에 우거하면서 지붕에 올라가 환상을 본 것이라든지, 고넬료가 보낸 사람을 만난 것이라든지, 함께 고넬료의 집에 가서 사정을 자세히 알고 하나님이 이루시는 일을 이루어 나간 것이 다 성신께서 가르치시고 인도하신 결과로 된 일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언제든지 성신의 가르치심이 ‘아무개야! 네가 이것을 해라’하는 양식으로 올 것이라고 바라지 아니해야 합니다. 그런 양식이 우리의 정상적인 생활 가운데서 거의 없는 것입니다. 불교에서 말하는 성문(소리를 듣는 것)처럼 ‘아무개야!’ 하면 ‘네’하고 대답하고 ‘너는 이리 가거라’하면 ‘예’ 하는 식으로 되겠느냐 그 말입니다.


오늘날에는 하나님의 특별한 은혜로 성신을 우리 안에 보혜사로서 내주케 하시고, 내주하시는 성신의 역사로 감화하시고, 주장하셔서 깨닫게 하시고, 알게 하시는 일을 통해서 우리를 가르쳐 나가시는 것입니다. 고린도전서 2:12절에 보면 “우리가 받은 신은 이 세상 신이 아니고 오직 하나님께로부터 온 신이니. 이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은혜로 주신 것들을 알게 하려 하심이라”고 했습니다. 그 알게 하신다는 것이 반드시 나에게 속삭여서 알게 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자기의 환경을 주의해서 관찰하고 하나님의 말씀의 큰 뜻을 생각하여 자기 자신이 무엇을 받았는가를 알아가게 하는 것입니다.


바. 성신의 가르치심을 받을 때 고려해야 할 사실들


성신의 가르치심을 받을 때 늘 고려해야 할 중요한 것들이 있습니다. 첫째는, 자기 자신이 지금까지 하나님 앞에서 어떻게 부르심을 받고 어떤 은사를 받아서 무슨 자리에 세움을 입고 있는 자인가를 고려해야 합니다. 예를 들어, 베드로는 말씀을 전해야 할 사람이고 새로운 거룩한 경륜을 퍼뜨릴 사람입니다. 그것은 지금까지 없던 일이고 창조적인 사실입니다. 그러므로 사람들이 예기치 않고 준비하지 않은 일이라서 격렬한 반대에 부딪칠 가능성을 내포하고 있던 일입니다. 그런 일에 대해서 자기가 전면에 서 있는 사람이라는 것을 느꼈어야 하고 아마 느꼈을 것입니다. 이렇게 먼저 자기에 대하여 바로 생각해야 합니다. 자기를 생각할 때 아상이 없어야 합니다. 즉 자신의 공리적인 목적을 위하여 무엇을 한다는 생각이 없어야 합니다. 이렇게 자기를 생각하고 자기의 분수를 알고 있어야 합니다. 자기가 무엇을 하는 사람인가 또는 무엇을 할 수 있는가 하는 자기 분수도 모르고 그냥 부허하게(마음이 들떠 있어 미덥지 못함) 신기루 같은 이상을 꿈꾸고 앉아 있는 것은 정당한 일이 아닙니다.


자기가 지금까지 가지고 있고 준비한 것이 어느 정도인가를 생각하고, 크고 기이한 일을 도모하지 않는 것이 하나님의 종들의 태도였습니다. 모세는 한번 실패했던 원인을 반추하고 반성해 볼 때 ‘내가 그 임무에 마땅한 사람이 아닌 것을 안다. 너무나 일이 벅차고 크다. 그리고 나는 무엇보다도 이스라엘 사람의 마음을 얻지 못하고 있다. 이스라엘 사람이 나를 지지하지 않는데 어떻게 혼자 가서 지도자라고 하느냐’라고 생각하고 “주여! 보낼 만한 자를 보내소서”(출 4:13) 하고 말한 것입니다. 자기로서는 할 수 없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일이 너무 벅차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것은 아주 자명한 도리입니다. 그러니까 그냥 겸손해서 그런 것이 아니라, 할 수 없다는 것을 명확하게 인식하고 정직하게 고백한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출애굽기 4:14-17절을 보면 그를 책망하시며 보내시는 것입니다.


이렇게 사명을 받은 사람들도 처음부터 자기가 할 수 있다고 뽐내고 나선 일이 없습니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위험이 있을 때 이 위험을 무릅쓰더라도 너는 가겠느냐?" 할 때 그것은 내가 할 수 없습니다고 하지 않고, 내가 누구를 보내며 누가 우리를 위하여 갈꼬 할 때 이사야가 “주여! 저를 보내옵소서”(사 6:8)라고 한 것과 같이 희생을 각오하고 나가는 것입니다. 이사야는 죽음을 각오하고 갔고 과연 전설에 의하면 톱으로 켜서 죽임을 당한 사람입니다. 이렇게 어떤 큰 일에 대해서 ‘아! 이 일을 하면 보람이 있겠다. 내 인생이 가치가 있겠다’고 그런 생각을 함부로 하지 않고 항상 겸손한 위치에 서 있어야 합니다. 로마서 12:3절에 보면 “마땅히 생각할 그 이상의 생각을 품지 말고 하나님께서  각 사람에게 나눠 주신 믿음의 분량대로 생각하라”고 했습니다. 이 말씀과 같이 제 분수를 알고 생각해야 합니다.


둘째로, 자기 환경을 읽고 해석하는 것이 중요한 문제입니다. 자기 환경이 전체의 하나님의 거룩하신 뜻 안에서 무엇을 의미하는가를 해석할 줄 알아야 합니다. 환경 혹은 일 전체에 대한 자기의 해석이 있으려면 그것을 해석할 수 있는 여러 가지 재료를 가지고 있어야 합니다. 평소부터 하나님의 말씀을 잘 배워서 거룩한 내용을 체계 있는 사상으로 자기 안에 가지고 있어야지 편언척구(몇마디 안 되는 짧은 말)가 와서 갑자기, 이건 이렇게 하고 저건 저렇다 하고 결정을 해 주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런고로 하나님의 말씀을 부지런히 배워서 여러 가지 사상적인 기초를 다져야 합니다. 하나님은 인간을 어떻게 보시는가? 가정은 어떻게 보시는가? 사회라는 것은 어떻게 보시는가? 경제는 어떻게 보시는가? 정치 또는 문화의 여러 양식은 무엇이고, 그것을 어떻게 보시는가? 우리는 어떤 도덕적인 사회에서 살고 있는가? 어떤 전통에서 살고 있는가? 그것은 바른가 그른가? 하나님이 우리에게 요구하시는 것은 무엇인가? 이런 것이 모두 다 사상입니다. 이런 하나님 나라의 건전한 사상 속에서 자꾸 자라가야 합니다. 그래서 각 사람의 장성한 분량에 따라서 성신님의 가르침을 받는 것이지 덮어놓고 모두 똑같이 성신의 인도나 가르침을 받는 것이 아닙니다. 그 사람의 그릇에 따라서 받는 것입니다. 그 그릇이 얼마만큼 크고 얼마만큼 유용한가에 따라서 각각 다릅니다.


요컨대 아상이 없어야 하고, 분수를 알아야 하고, 또 자기에게 주신 사명을 알고 그리스도적 품성으로 자기가 무엇을 해야 할 것인가를 바로 생각하고 자기 환경이 무엇을 의미하는 것인가를 바로 생각해야 합니다. 특히 어떤 환경이 왔을 때 여기서는 어떻게 하나님의 뜻이 나타나야 할 것인가를 늘 바로 생각해야 합니다. 자칫 잘못 해석하면 환경을 가장 권위 있는 하나님의 인도인 것처럼 생각하게 됩니다. 환경이 나와 상관없이 조성되는 것이 아닙니다. 내 잘잘못이 다 붙어 다니면서 내 환경을 이루는 것입니다. 그런데 자기 잘못에 대해서는 반성하지 않고, 어떤 환경을 덮어놓고 하나님의 뜻이라고 맹종한다면 큰 잘못입니다. 제가 잘 드는 예인데, 어떤 사람에게 ‘어떻게 해서 신학교에 오게 되었느냐?’ 하고 물으니까 ‘다른데 시험을 봐서 다 떨어지고 문이 다 닫혀서 할 수 없이 그 문만 열려서 들어왔습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뜻이라고 생각합니다’하고 대답을 해서 ‘소명 있느냐?’하고 물었더니 ‘그것이 소명입니다’고 했습니다. 참 기가 막힌 이야기입니다. 다른 사람보다 더 똑똑해야 하고 더 사명 의식이 분명해야 하고 남의 인생의 길을 가르쳐야 할 사람이 제 길도 모르고 앉아서 거기 들어가서 공부하겠다고 한다면 무엇이 되겠는가? 그런 사람이 목사가 된다면 교회는 어떻게 되겠는가 생각할 때 참 답답한 이야기요, 슬픈 이야기입니다. 그러므로 사명에 대하여 이렇게 그릇된 해석을 해서는 안 됩니다.


어떤 문제가 그렇게 된 데에 대해서 우선, ‘내가 그 때 좀더 부지런하고 좀더 근실했다면 지금 이렇게 안 되었을 것이다’고 하는 반성이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은 나에게 백을 주시려고 했지만 내가 잘못해서 이만큼 가지고 있는 것이다 하는 생각을 할 줄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겨우 그 정도로 움직이려고 한 것이 아니었지만 내 잘못이 많아서 내 부채가 그렇게 많게 된 것이다. 그렇게 부채를 지고 말았지만, 내 부채를 용서하시옵소서 하고 그런 문제를 예수님께 맡기는 것입니다. 부채 때문에 발생하는 모든 빈곤이나 잘못을 나에게서 토죄(죄상을 들추어 꾸짖음)하실 수밖에 없지만 예수님의 공로로 용서를 받아야 합니다. 그래서 용서를 받으면 진 부채가 홀연히 다 충족되느냐 하면 충족되는 것은 아닙니다. 그런 것이 결국은 나라는 한 인간을 만들어 내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나라는 인간의 오늘이 하나님께서 바라시고 원하시던 위치는 아니라는 것이 분명합니다. 이보다는 훨씬 더 하나님 앞에 충실하고 하나님께서 맡기신 일을 할 수 있는 사람이어야 하지만 겨우 이 정도라는 것을 느끼고 살라는 것입니다. 그렇더라도 하나님이 쓰실 때에는 기이하신 손으로 역사하시는 것입니다. 거기에 하나님의 은혜가 있습니다.


사. 성신의 기묘하신 인도


그러한 인간의 부족과 결핍이 있다고 해서 하나님께서 당신의 일을 실패하시는 법은 없습니다. 나를 들어서 쓰시고 비록 내가 쓰인 부분은 몇 백분의 몇, 몇 천분의 몇이 되는 정도이겠지만 마치 내가 다 한 것같이 상을 주십니다. 이것이 이 현세에서 해결될 수 없는 우리의 부채이지만 주께서는 우리를 불쌍히 여기시고 영화를 입히시고 상을 주셔서 영광의 세계에서 계속적으로 주를 봉사하게 하시는 것입니다. 우리 주님은 상을 받는 것과 벌을 받는 것에 대하여 여러 번 이야기하셨습니다. 땅 위에서 하늘에 보물을 쌓아 둔 축적이 있을 때 그만큼 영광의 세계에서 “착하고 충성된 종아! 네가 작은 일에 충성하였으매 내가 많은 것으로 네게 맡기리니. 네 주인의 즐거움에 참여할찌어다”(마 25:23) 하실 것입니다.


이런 거룩한 도리에 의해서 자기를 늘 반성해야 합니다. 현재 내가 성신님의 가르치심을 받아서 일을 할 자격은 이런 정도밖에 되지 않는다. 그러면 이 환경과 이 용량 안에서 내가 해야 할 것은 무엇인가? 이것을 냉정하게 현실적으로 생각해야 합니다. 탄식만 하고 앉아서는 아무 소용이 없기 때문입니다. 앞으로 다시 자꾸 반복해서 큰 잘못을 저질러서 그릇된 역사적인 원인을 자꾸 심지 않도록 하는 것이 유효한 일이지 그냥 앉아서 탄식만 하는 것은 아무 소용이 없는 일입니다. 내가 가지고 있는 자본은 이것뿐입니다. 이것으로라도 최선을 다하자 할 때 하나님은 우리를 기이하신 손으로 인도하십니다. 그것도 우리가 믿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있는 그것만 가지고 전부인 양 쓰라는 것이 아니고, 못나고 힘이 없지만 하나님의 전능하신 손에 맡기면 어리고 유치할지라도 세상의 지혜자에 능가하는 거룩한 일을 자꾸 해 주십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자녀로 특별히 선택함을 받은 특권입니다.


성신께서는 우리 자신에게서 이룰 바를 우리 내부에서도 인도하시지만 동시에 우리 외부에서도 역사하셔서 나의 용량 때문에 감히 손대지 못하는 일도 하나님이 당신의 일을 하시려고 할 때는 이루십니다. 성신께서는 일을 시키시는데 그치지 않고 함께 일하십니다. 여기에 은혜로우시고 감사하신 주님의 준비가 있는 것입니다. 결국 내 자신이 가지고 있는 것을 써서하는 것은 대단히 적은 부분이지만 주께서는 마치 내가 많은 부분을 한 것같이 돌려서 일을 이루어나가시는 것입니다.


여러분! 그런 간단한 예를 하나 들어봅시다. 우리가 무슨 일을 할 때 그 일을 내가 스스로 하면 내가 가지고 있는 에너지나 용량으로는 어떤 일정한 정도밖에 못 합니다. 그러나 어떤 자연적인 세력이 가담해서 큰일을 이룰 수도 있습니다. 사람들은 이것을 우연이라거나 재수가 좋았다고 하거나 운세가 좋았다고 말합니다. 세상 사람은 모르는 가운데, 재수가 좋으면, 운수가 좋으면, 하고 그런 것을 많이 기대합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섭리 가운데서 하나님께서 마치 내 자신을 그 일에 올라타고 할 수 있도록 주위를 주장하시고 타고 갈 수레를 만들어 주시면 나는 그것을 타는 것입니다. 말하자면 그 전체의 환경과 역사적인 흐름 위에다 올려 앉히시면 나는 타고 갈 수 있습니다. 그러지 못할 때는 못갑니다. 모든 일이 이처럼 하나님의 기묘하신 손안에서 움직이는 까닭에 성신님의 가르치심과 인도하심은 나에게 있지만 동시에 어떤 일의 계획과 운영은 나 이외에까지 다 미쳐서 전체 위에 역사해 나갑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자녀의 생애 가운데 나타나는 큰 도리인 것입니다.


우리가 가령 거룩한 도리를 알았다고 하자. 거룩한 도리를 알아서 그것을 남에게 전달하려고 할 때 가령 책을 써서 냈다고 하자. 책이 얼마만큼 나갈지 우리는 아무 예측도 못하는 것입니다. 어떤 예상을 한다고 하지만 바다에 뭘 뿌리는 것과 같은 일이라서 어디서 어떤 세력이 어떻게 움직여서 많이 나갈 수도 있고, 어떤 세력이 움직여서 다시 말하면 그 때의 시세가 불리해서 아주 잠겨 버릴 수도 있습니다. 그것을 다 알 수 없는 것입니다. 꼭 같이 유용하고 똑같은 정도의 것인데도 시세가 좋아서 모두 나가는 일도 있고 시세가 불리해서 갇혀 버리는 일도 있는 것입니다. 그것을 내가 어떻게 하는가? 내가 아무리 지혜 있다고 하더라도 그것을 미리 알고 미리 조치할 수 없습니다. 그런 까닭에 전능하신 손에 딱 맡기고 나의 당위를 하고 나는 내 길을 갈 뿐입니다. 그러니까 아까 말한 것과 같이 하나님께서는 이것을 싣고 갈 거대한 역사적인 현실이든지, 각 사람들의 마음이든지, 어떤 큰 움직임을 밀고 나가시는 것입니다.


여러분! 그런 일을 생애 가운데서 많이 당해 보지 않았습니까? 하나님의 기묘하신 손으로 그 때 그런 일이 없었다면 도저히 이렇게 될리가 없었다고 하는 것이 많이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그런 혜택을 많이 받고 삽니다. 하나님의 섭리에 적시발생(알맞은 때)이라는 것이 있습니다. 그것이 우리에게는 우연인 것 같으나 하나님께는 필연적인 것인데 이것이 하나님의 거룩한 통치의 한 방법입니다. 즉 하나님의 섭리 가운데 동시에 발생해서 서로 협조하여 일이 되도록 만드시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어떤 사람이 어떤 시기에 어떤 사람을 만나지 않았다면 그 일생이 전연 다른 길로 갈 뻔한 일도 많이 있습니다. 인생의 길을 가다가 누구를 만난 것이 인생을 아주 중대하게 완전히 바꿔 놓습니다. 인생의 행로가 그렇게 달라지는 것입니다. 그런 일을 우리는 얼마든지 생각할 수 있습니다. 언제든지 그 사람이 기다리고 앉았다가 만나는 것은 아닙니다. 우연히 만나는 것입니다. 만난 그것 때문에 그 때부터 그의 인생은 전연 새로운 것으로 시작하는 것입니다. 이런 것을 볼 때 하나님의 기묘하신 손으로 우리를 인도하시고 가르쳐 주시는 배후에는 하나님의 기묘하신 준비와 은혜의 배치가 있는 것입니다. 이렇게 인도  받는 자와 더불어 일 해 나가십니다.


오늘 살펴본 본문에서도 하나님께서 고넬료의 집안도 준비하게 하셨고 또 베드로에게도 환상으로 준비하게 하셨습니다. 그리고 결국 베드로가 가이사랴에 가서 역사적인 거보를 내딛게 하신 것입니다. 그 때 베드로가 욥바 피장이 시몬의 집에서 길을 떠나 가이사랴를 향해서 걸어간 그 걸음이 역사적인 거보가 될 줄 누가 알았겠습니까? 베드로 자신도 몰랐을 것입니다. 이렇게 자기 자신도 생각하지 못했던 큰 의미를 자기 발걸음 하나하나로 남기게 된 것입니다. 이러한 데서 우리는 성신의 인도하심의 기묘한 점을 보게 됩니다. 이러한 성신님의 기묘한 인도하심을 바로 받고 나가려면 먼저 우리들 자신이 아상(我想)이 없이 자기 분수를 알고 하나님의 말씀의 거룩한 뜻을 늘 찾되, 그 거룩한 말씀의 뜻을 누가 개인적으로 해석하는 것을 따르지 않고 교회가 고귀한 유산으로서 전통적으로 받아 내려온 것을 받아서 그 테두리 안에서 생각하고 나아가야만 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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