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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 손재호
성경본문 행 16:6-15

2016년 가을학기 특강 - 성신의 가르치심과 인도하심(7)


성신의 가르치심과 인도하심의 예(2)-사도 바울(I)


말씀 : 사도행전 16:6-15


오늘도 지난 시간에 이어서 하나님의 성신께서 우리 각 사람을 가르치시고 인도하신다는 도리를 다른 측면에서 생각해 보고자 합니다. 이 도리가 심오하고 혹은 어려운 데가 있는 까닭에 도리를 교리와 같이 엮어서만 이야기하면 얼른 다 알기가 쉽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교리적인 측면에서도 이해해야 하고 동시에 실제 예를 살펴보는 것이 중요하기 때문에 오늘은 바울의 예를 통해서 생각해 나가고자 합니다.  


지난번에 개괄적으로 먼저 큰 것 몇 가지를 말씀드렸습니다. 첫째는, 이 성신의 가르치심이라든지, 인도하심이라는 이런 역사는 우리 안에서 유기적으로 하는 것이라는 것이었습니다. 우리의 의식, 우리의 영혼의 기능 어떤 부분이든지 제한을 한다든지 탈취한다든지 하시는 일이 없이 오히려 그것을 가장 충실하게 잘 쓰셔서 하시는 것이라고 하는 것을 배웠습니다. 둘째는, 성신께서 가르치시고 인도하시는 데는 그냥 하는 것이 아니고 항상 어떤 큰 목적이 있어서 그 목적을 향하여 가도록 하는 것이라는 것입니다. 성신께서 어떤 목적이 있어서 그리로 끌고 가시기 위해서 그에게 가르쳐 주시고 또한 인도하시는 것이다고 하는 것이었습니다. 이 목적이라는 것이 반드시 원대한 한 가지만 가지고 이야기 하는 것이 아니고, 어느 때는 원대한 것에 붙여서 당면의 목표라는 것도 또 거기에 그걸 수반하고 있는 것들입니다. 이와 같이 해 나갈 때 거기는 하나님의 섭리의 역사로 성신이 거룩 되이 각 사람을 역사해 주시는데 따라서 조화 있게 일이 움직여 나가는 것이다라는 것입니다.


지난 시간에 우리는 성신의 가르치심과 인도하심의 실제 예로 베드로에 대해서 배웠습니다. 베드로가 고넬료의 집에 갔던 이야기를 우리가 공부를 했는데 성신님의 사역 가운데에는 베드로에게도 어떤 환상으로 계시를 하셨고, 고넬료에게도 환상으로 계시하셔서 결국 이런 것이 서로 합쳐서 그 큰 일을 이루어 나가는 것을 보았습니다. 동시에 발생 혹은 협조적으로 발생하는 것들을 여기서 보았습니다.

 

가. 성신의 인도하심을 받는 자의 정당한 생활 자태

 

그 다음에 우리는 이야기 하기를 성신님이 가르쳐 주시는 것을 우리가 받으려면 자기 욕심을 가지고 곧 자기 목적을 가지고 성신께서 좀 유리하게 인도 해 달라고 하는 그런 짓을 해 나가는 것이 아니다는 것을 배웠습니다. 그러면 자기 목적이나 자기의 욕심이라는 것이 없어야겠다면 얼마 만한 정도로 없어야겠느냐고 할 때 결국 한마디로 ‘나’라는 것, 곧 ‘옛사람’이라는 것이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다는 사실이 생생한 현실로 자기에게 있을 때 성신의 명확한 가르치심과 인도하심을 받고 살아갈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언제든지 아상(我想)이라는 것이 없어야 할 뿐더러 성신이 지시하는 데로 절대로 순종할 마음의 준비가 되어 있어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마음 가운데에 그 사실이 일어나기를 간절히 소원하면서 그와 같이 원하시는 때에 적시에 나를 가장 은혜롭게 가르쳐 주시고 인도하시기를 기다리는 대망의 신앙이라는 것이 늘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그뿐 아니라 우리는 주님의 뜻을 따르려고 하는 간절한 소원을 가진 마음 상태를 가지고 구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지혜가 부족하거든 구하라고 그랬습니다. “너희가 얻지 못하는 것은 구하지 아니함이오”라고 했습니다. “구해도 얻지 못하는 것은 너희 쾌락(헤이도네, ήδονή)으로 쓸려고 잘못 구함이라”고 했습니다. 야고보서 4:2-3절에 보면 “너희가 욕심을 내어도 얻지 못하고 살인하며 시기하여도 능히 취하지 못하나니. 너희가 다투고 싸우는도다. 너희가 얻지 못함은 구하지 아니함이요, 구하여도 받지 못함은 정욕으로 쓰려고 잘못 구함이니라”고 했습니다.

 

성신의 인도하심과 가르치심을 받기 위해서는 성신께서 나에게 단계적으로 감화하셔서 깨닫게 하시고 이끄는 사실을 어떤 도중에 그만두고 저지하고 마는 일이 있어서는 안된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성신을 소멸치 말라”고 하는 뜻입니다. 우리가 기도해서 구했으면 그 다음에 중요한 문제는 그 다음에 하라고 하는 일, 곧 당장에 목전에 알지 못하는 것이 딱 당해서 ‘이것 주시오, 저것 주시오’ 이러지 말고 성신께서 나에게 가르쳐 주시는 순서에 의해서 차례차례 터득해 가야 한다는 것입니다. 나는 당장에 이것이 몰라서 답답해서 물었지만 성신님 말씀이 ‘너는 그걸 알려면 그 이전에 벌써 알았어야 할 것들이 있는데 그 이전에 네가 깨닫고 알고 있어야 할 것들도 가지고 있지 못하니까 이걸 내가 일러준들 너는 깨닫지 못한다. 네 그릇을 준비하기 위해서 우선 이것부터 해야겠다 하고 우리에게 그 먼저의 단계, 먼저 주어야 할 것을 먼저 주시는 것입니다. 이렇게 해서 주님도 우리에게 구한 다음에는 찾아보라고 했고, 찾아본 다음에는 문을 두드리라’고 이렇게 해서 구하고 찾아보고 문을 두드리는 순서를 가르쳤습니다. 구하기만 하면 그것으로 다 끝나는 것이 아니다고 하는 것입니다.

 

이와 같이 성신의 가르치심을 만일 구했으면 그 다음에는 그것을 찾는 단계의 태도가 필요한 것입니다. 자기 현재의 마음 상태를 잘 살피고 자기 분수를 알고서 크고 기이한 일을 바라는 것이 아니라 목전에 가장 정당한 일을 하고자 하는 심정을 가져야 한다는 말입니다. 이상을 품고 주를 위해서 ‘내가 이것을 하겠습니다’ 하고 스스로 떠들지 말고 그것이 다 자기에게서 나온 것인 이상에는 주께서 받지 아니 하시는 것인줄 알고 항상 분수를 지키고 살아가는 것이 중요한 것입니다. 만일 어떤 사람이 아직도 명확한 인생의 사명이라는 것이 없다면, 자기 일생에 주님께로부터 받은 사명이 없다면 지금 그의 단계는 자기가 정당히 더욱 장성하기 위하여 주력해야 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사명을 받을 만한 그릇이 없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만일 사명이 있다 할 것 같으면 충성으로 이것을 수행하기 위하여 바른길을 늘 찾아서 나갈려고 하는 것이 정당한 태도입니다. 자기 현재의, 다음에 자기 현재의 환경의 조건들을 늘 주의해서 찾아보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을 해석해서 무엇을 의미하고 있는가? 내 현재의 환경이란 나에게 무엇을 가르쳐 주고 있고 무엇을 의미하는 것인가? 그걸 해석해서 자기가 이 자리에서 믿는 사람답게 하나님을 믿고 의지하는 사람답게 가야 할 길을 가야한다는 것입니다. 그렇지 아니하면 하나님을 시험하는 것 밖에 안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 맡기고 비록 앞 길이 막막할지라도 보이시는 한 길을 전진해 나가는 이것이 정당한 생활로 성신의 가르치심과 인도하심을 받아가는 사람의 자세인 것입니다.

 

그 다음에 중요한 것은 성경에 보이신 원칙들에 의해서 원래 사상에 함축을 가지고 판단을 해야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성신께서 역사를 통해서 가르쳐 주셔서 역사의 고귀한 유산으로서 받아오게 한 것을 항상 터 삼아 가지고, 곧 중요한 근거지 삼아서 그런 튼튼하고 건전한 교리의 터 위에서 문제를 해석하는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서 그러한 걸 잘 가르치는 책이라든지, 좋은 친구라든지, 훌륭한 스승이라든지 이런 것들의 도움을 받아야 하는 것입니다. 이런 것이 대단히 도움이 되는 것입니다. 이렇게 해서 주님의 말씀을 물어서, 해명해서 가르치는 것에 근실하게 늘 참석하고 배워서 자기가 건전한 사상을 함축해 가지도록 해야 할 것입니다.

 

나. 오늘날의 율법의 효용

 

마지막에 하나 중요히 생각해야 할 것은 율법 곧 토라(torah)라고 하는 것이 단순히 믿는 사람에게 있어서 그것이 생명을 얻게 하는 길로서의 의미를 가지지 않습니다. 또한 정죄하는 기능을 우리에게는 가지지 않습니다. 또한 선행을 강요하는 강요자로서 존재하지도 않습니다. 하지만 생명의 성신의 법에 의해서 율법의 요구는 이루어져야 하는 것인 까닭에 율법의 요구가 이루어진다는 의미에 있어서는 그것이 우리의 인식에는 생활의 기준을 보여 주는 것인 까닭에, 동시에 그것이 하나님의 의라는 것은 인생의 생활에서 이렇게 드러내는 것이라는 것을 보여주는 까닭에, 우리 생활의 기준으로서, 규칙으로 도덕적인 것 즉 선악의 도덕적인 판단의 기준으로서 율법은 우리에게 중요한 것입니다. 둘째는 어떠한 나라를 구상하시고 이 법을 옛날 히브리 사람들에게 내리셨던가를 종합적으로, 대국적으로 잘 관찰하고 배우면 거기에서 하나님의 위대하고 아름다운 거룩한 나라의 자태를 우리가 찾는 것입니다. 우리가 이러한 것들을 잘 배워서 이 법이 가지고 있는 귀중한 기능을 살리는 것입니다. 이래서 우리는 구약과 신약을 다같이 존중히 여기는 것입니다.


그뿐만이 아니라 법이라 할 때에는 하나님이 하라든지, 하지 말라든지 모든 말씀을 포함해서 광범위의 법이라는 말로 씁니다. 꼭 모세의 율법 613조만 가지고 이야기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면 복음을 믿어라 하는 것도 하나님의 법입니다. 안 믿으면 멸망한다고 하는 것도 하나님의 법인 것입니다. 그런고로 이 법에 의하여서 우리가 복음을 믿고, 하나님의 명령에 의해서 복음을 믿고, 하지 말아라 하는 것에 의해서 불신의 생활을 하지 않는 것이라는 말입니다. 그런 까닭에 덮어놓고 법을 무시한다는 생활의 태도라는 것은 무법자요, 무정부적인, 정신적 무정부적인 인물이이라는 말입니다. 스피리츄얼 애너키즘(spiritual anarchism)이란 것은 무서운 타락인 것입니다.

 

또 법이라는 성격상 필연이 거기 무엇이 있는가를 생각해야 합니다. 통치 대권의 발휘라는 것이 거기 있는 것을 생각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법은 권위를 의미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비통치자가 거기 있는 것을 생각해야 되는 것입니다. 그 관계가 무엇인가를 법은 보여 주는 것입니다. 하나님과 우리와의 관계에 정당한 것을 인식하려면 하나님의 법을 잘 알고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또 거기 통치권이 행사되는 사회, 그 영역이라는 것이 어떤 레벨(level)의 양상을 띠고 있어야 할 것인가를 가르쳐 주는 것입니다. 그러면 법과 성신께서 우리에게 요구하시는 선의 심상과 행위도 다만 도덕의 완성을 위한 것만 아니라 궁극적으로 하나님 나라의 바른 자태를 드러내기 위하여 그 나라의 사명을 완수하기 위하여 있는 것이다는 그런 말입니다. 이와 같이 법은 중요한 것입니다. 법에 대한 그릇된 생각 때문에 우리는 은혜시대에 속하고 율법시대에 속하지 안했다는 이상한 구분을 해 놓은 그런 것 때문에 하나님의 내신 법이 가지고 있는 오늘날의 중요한 효용이라는 것을 때때로 등한히 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이걸 우리는 심히 중요하게 생각해야 합니다.

 

다. 성신의 유기적 역사와 영혼의 기능 작용

 

이제 오늘은 너무 이 교리적인 문제만을 가지고 이야기하는 것이 딱딱한 이야기인 까닭에 그 여타의 다른 실례를 들어서 성신님의 가르치심과 인도하심이라는 것이 어떠한 것인가를 생각하겠습니다.

 

첫째, 지난번 말씀대로 성신의 유기적인 역사라고 그랬습니다. 그 사람의 모든 의식 활동, 다른 말로 말하면 영혼의 기능들을 충분히 구사 활동시켜서 성신의 가르치시는 도리대로 그가 나가도록 하시는 것입니다. 그런식으로 가르쳐 주신다는 말입니다. 그의 인격과 그의 영혼의 기능들을 충분히 활용하시는 것이다는 것입니다. 이 경우에 그 사람에게 가장 기본적으로 중요한 것이 무엇이냐 하면 그 사람의 영혼의 기능 활동에 기본적으로 중요한 것은 감정이 아닙니다. 또한 기본적으로 중요한 건 덮어놓고 나가겠다고 하는 의지의 활동도 아닙니다. 제일 먼저 바르게 인식한다는 사실인 것입니다. 무얼 바로 알아야 그 바로 안 것 때문에 정당한 정서도 작용하고 지적인 감정이나 정당한 정서도 생기는 것입니다. 그 사람이 좋은 사람인줄 알았을 때는 호감을 가지는 것이고, 그 사람이 나쁜 사람인 줄 알았을 때는 그의 일에서 증오감을 가질 수 있는 것입니다. 이 일이 가치 있는 일로 바로 알았으면 좋은 정서가 움직이는 것이고, 무가치하고 타기 곧 더럽게 여기거나 업신여겨 돌아보지 않고 버리는 그런 일로 알았으면 좋은 정서로 움직여 나가지 않는 것입니다. 기본적으로 바른 인식을 가진다는 건 가장 중요한 것입니다. 따라서 바른 인식 하에서 해야 할 일이라는 인식이 왔을 때는 비로소 자기 의지라는 것이 그리로 향해서 움직이는 것입니다. 이렇게 그 사람의 인식, 이것이 여타의 정서나 의지의 활동에 앞서서 있는 것이므로 그 사람의 인식 내용이 정당해야만 할 것이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중생할 때에 성신께서는 우리에게 새로운 생명을 주셨을 뿐아니라 이 새로운 생명이 한 인격을 형성해서 인간으로 발휘되기 위해서는 우리 인간으로 가지고 있던 영혼의 기능이라는 것을 수선을 하시되 극단적으로 변화를 시켜서 과거에 알지 못하고 생각지 못하고 느끼지 못하던 것을 알고 생각하고 느낄 수 있도록 적어도 그런 기능을 주셨습니다. 성신이 그걸 비취셔야 ‘아, 이것이 그것이구나’ 하고 아는 것이지마는 적어도 그걸 알 수 있는 반응을 일으킬 수 있는 기능 활동은 있어야겠다는 말입니다. 이렇게 해서 성신님이 ‘아, 예수님은 동정녀에게서 나셨다’고 할 때에는 과거에는 한사코 반대하던 사람이, 그럴 수가 없다고 완전히 무시해 버리던 사람이 과연 진리입니다고 하고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이것이 그 영혼의 기능을 극단적으로 변화시켜 과거에는 깨달을 수 없던 인간적인 영역에서, 자연인인 영역에서부터 끄집어 올려서 하나님의 성신의 조명을 받고 진리를 깨달을 수 있는 사람을 만드신 것이라는 말입니다. 이 영혼의 기능의 극단적인 변화라는 것이 새로운 진리를 비로소 깨달을 수 있고, 알 수 있고, 느낄 수 있고, 따라서 하고자 할 수 있게 만들어 놓으셨다는 말입니다. 성신의 이 유기적인 가르치심과 인도하심을 받기 위하여서는 그의 인식 내용을 성신께서 먼저 바로 잡아 주시는 일을 하시는 것이라는 말입니다. 성신의 가르치심은 오늘 어떤 문제 앞에서 “요건 요렇고 저건 저렇다”고 가르쳐 주시는 것으로만 기대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원래 그 쌓아진 것이 부족하고 그릇되어 있으면 그것부터 고쳐져야 하는 것입니다. 그의 사상이나 그의 생각이나 그것이 편협하고 동굴 속에 갇힌 것같이 많은 사람이 하니까 저도 따라가는 종족의 우상같이 그렇게 되었으면 그것부터 두드려 고쳐 주셔야만 바로 생각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래야 유기적으로 바른 생각과 바른 관념, 바른 사상을 가질 수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먼저 고쳐져야 하는 것입니다. 덮어놓고 고쳐지지 아니하고 아주 이렇게 편협하고 편견이 있고 잘못된 정신 속에 성신님이 가르쳐 주시면 무엇이든지 안다고 그렇게 생각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건 유기적인 활동이 아닙니다. 가지고 있는 그 사람 논리의 그 시발점, 말하자면 여러 가지 전제들! 이런 것을 그냥 놓아두고 성신님이 가르쳐 주면 된다는 것은 말도 안되는 것입니다.

 

유기적일려면 그 사람 사상 자체가 자연스럽게 그걸 구하고 조화되어야 할터인데 곧 성신의 가르침과 조화되어야 할터인데 그 사람의 사상이나 논리가 자연스럽게 조화될려면 그 사람이 서있는 삐뚜러진 전제나 삐뚜러진 논거가 수정되어야 한다는 말입니다. 이러기 위해서 원래 중생한 사람에게 성신께서 가르쳐 주심으로 깨닫게 하사 과거에 가지고 있던 누습(나쁜 버릇이나 풍습)의 사상과 누습의 주관이라는 것, 편견이라는 걸 자꾸 털어버리게 하시는 것입니다. 사회관도 그렇고, 인생관도 그렇고, 혹은 도덕관도, 혹은 그 여타의 여러 가지 사상적인 여러 내용에 대해서 자꾸 고쳐져야 한다는 말입니다. 즉 그러기 위해서 하나님의 말씀을 먹여서 말씀에 의해서 과거에 가지고 있던 전통적이고 고질적이고 완고했던 생각을 뒤집어 고쳐 놓아야 하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이 이 사회에 나가서 사람들을 위하여서 봉사를 하겠다면, 성경에서 가르치는 기본적인 도리인 사람에 대한 사랑이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인류애가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인류애가 있으려면 인류는 무엇이다고 하는 인생에 대한 바른 가치 판단이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이런 바른 가치 판단이란 것은 그 인생관이 성경에서 나온 바른 것으로 형성되어야만 하는 것이지 그 여타의 인간적인 생각은 철학적인 관점에서의 인생관으로 하나님 나라의 관점과 같은 동일한 관점을 가지기가 어려운 것입니다. 이렇게 해서 그의 사상은 세례를 받아야 하고, 그의 정신은 다 씻음을 받아야 하고, 그대신 신령하고 건전한 정신으로 충족한 것으로 다시 건설되고 채워져야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심히 중요한 것입니다.

 

그렇지 않고 앉아서 때 묻고 완고하고 누습에 젖고 편견이 있는 데서 성신의 가르치심을 원합니다고 해서 어디다 무엇을 가르쳐 주시겠습니까? 가르쳐 줄 때 너 이것도 아니라, 저것도 아니라고 가르쳐 줄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런 것은 안 가르치시는 것입니다. 성경을 보면서 아닌 것을 깨닫는 것입니다. 이게 성신이 가르치는 것입니다. ‘너 지금까지 가지고 있던 그 사상도 고쳐라, 지금까지 가지고 있던 인간관을 고쳐라, 지금까지 가지고 있던 가정관도 고쳐라, 지금까지 가지고 있던 사회관도 다 고쳐라.’ 이렇게 자꾸 고치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고 그것을 교회는 교회대로 또 하나님의 말씀을 해명해서 가르쳐야 하는 것입니다.

 

성신의 이러한 거룩한 가르침의 실례로서는 우리가 무엇이 있느냐 할 것 같으면 하나님 나라를 위하여 어떤 사람이 유용한 일을 할려고 한다면 먼저 하나님 나라에 대하여 특히 자기의 그 봉사의 면에 대하여 정당한 인식이 반드시 있어야만 하는 것입니다. ‘내가 하나님 나라를 향하여서 그를 위해 무슨 일이든지 하겠습니다. 성신님 가르쳐 주십시오.’ 이렇게 한다면 ‘네가 하나님 나라가 무엇인지 알아야 할 것이고, 네가 일 하려는 그 방면에 하나님 나라의 거룩한 내용이 무언가를 알아야 할 것 아니냐, 그걸 먼저 알아야겠다’고 보이는 것입니다.

 

교회에서 어떤 일을 맡아서 바로 하려고 할 것 같으면 교회에 대해 그 활동, 교회 활동이나 교회의 존재 등에 관해서 정당한 인식이 먼저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이것 없이 교회를 위해 일을 한다고 하면 자기 딴엔 자기 나름대로 교회관을 가지고 떠드는 것이 되지 하나님의 교회에 진정으로 보탬이 될지, 손해가 될지 측량 할 수 없는 것입니다. 인류사회에 무슨 봉사를 하고자 하더라도 먼저 그 인간관이 바로 서 있어야 하고, 바른 봉사를 위하여는 그 인간관이 항상 정당한 데서 흘러와야 합니다. 사람을 사랑한다 하더라도 진정한 사랑은 또한 그 대상의 진가와 그 인격을 바로 인식하는데 있는 까닭에 인식치 못하고서는 바른 사랑을 못 가져나가는 것입니다. 우리가 주님께 대한 바른 사랑을 가지고 다 살지라도 주께 대한 바른 인식이 필요한 것입니다.

 

그런고로 성신께서 한 사람을 하나님 나라에서 유용히 가치 있게 쓰시고저 하실 때에는 성신의 이 유기적인 역사로서 그 사람이 자기 할 일과 일터를 바로 알고 바로 보도록 하시되 그러한 주관, 그런 판단과 평가가 나올 수 있는 그의 인식 내용에 먼저 바르고 넉넉하게 되어 있도록 하실 것이다는 말입니다. 인식 내용이 바르고 넉넉하게 된다는 건 논리가 정연하고 풍요한 사상이 형성되는 것입니다. 그 사람이 좋은 그릇으로 쓰이기 위해서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가르침을 받아서 그 사람이 정상히 장성해 가지고 그가 자기의 맡은 일에 확신과 불굴의 뜻으로서 전진할 수 있도록 그의 인식이 깊고 체계가 있는 한 큰 사상으로 바르고 볼품이 있게 육성되어야 한다는 말입니다. 이것을 무시하고, 하나님 나라의 사상도 성경이 가르친바 여러 가지 바른 사상도 무시하고, 단편적인 편언척구(片言隻句, 짤막한 말)의 하나님 말씀만 가지고 뭐한 것 같이 생각하는 것은 정당한 일이 아닌 것입니다.

 

그런고로 성신의 가르치심과 인도하심은 먼저 하나님의 말씀을 근실하게 배워서 거룩한 사상이 그 인물을 이루어 가도록 해야 할 것입니다. 그러한 확신의 터 위에 서도록 또 그 사람 안에 충일하도록 하는 것이 소망스러운 일이고 반드시 있어야 할 일입니다. 먼저 성신께서 나를 이끄사 하나님의 말씀을 배울 수 있게 하시고, 조명하심을 감사하면서 좋은 말씀을 바르게 해명 받고 배울 수 있는 기회를 잃지 말고 낭비하지 말고 근면하게 배워서 그 사람이 가지고 있는 여러 관찰이라든지 사상을 고귀하게, 논리 정연하게, 풍요하게 가지도록 목표를 세우고 나가는 것이 옳다는 말입니다. 그러고서 성신의 가르치심을 더욱 받겠다고 하라는 것입니다.


이런 경우에 좋은 예가 하나 있습니다. 그 예는 사도 바울의 생애입니다. 그 일례로서 바울이 오늘 읽은 하나님의 말씀에 의해서 나타낸 중요한 태도 하나를 우리가 보고자 합니다.


사도 바울가 어떻게 성신의 가르치심을 받고 나갔는가? 이 구절은 우리가 여러 번 읽어서 잘 아는 것입니다. 바울 사도의 두 번째 여행 때의 일입니다. 우리는 오늘 읽은 본문을 가지고 제목을 삼아서 성신의 가르치심에 대한 것을 배울려고 하는데, 제목을 붙이자면 ‘성신께서 바울을 어떻게 가르치시고 인도하셨는가?’입니다. 여기서 첫째는 ‘그의 세계관과 거기에 의한 그의 복음의 행진은 어땠는가?’입니다.


바울 사도가 복음을 듣고 일차, 이차, 삼차 전도여행을 하고 마지막엔 로마로 항해를 했습니다. 우리는 이 사실을 다 잘 알고 있습니다. 바울 사도는 아마 주후 31년경 즈음에 회개를 하고(30년이나 31년이라고 하더라도) 45년에 제1차 여행을 떠나서 대체로 48년까지, 그러고 50년에서 53년까지 제2차 여행을 했고, 그 다음에는 54년에서 57년까지 제3차 여행을 했고, 그 다음에는 58년에는 고린도에서 돌아와 가지고 예루살렘에 와서 잡혀 가이사랴에서 2년이나 옥살이를 하고 있다가 60년 혹은 61년 그 겨울에 로마로 항해를 했습니다. 그리고 로마의 가이사에게 상고를 해서 상고심에서 결국 바울은 석방이 되었습니다. 그후에는 다시 옛날 교회를 찾아보러 마게도냐 지경으로 왔다가 혹은 그렇지 아니하면 아시아에 와서 드로아 근방에서 잡혔습니다. 그것은 벌써 네로의 박해 곧 64년부터 시작된 박해가 사방으로 로마제국 사방에 미친 때이니까 잡혀서 로마로 가서 마침내 66년이나 67년경에 로마에서 순교를 하신 것입니다.

 

이와 같은 바울 사도의 생애의 움직임을 볼 때에 바울 사도가 주님을 만나서 회개를 한 이래로부터 성신의 가르치심과 인도하심을 받아 나가는 자태라는 것은 역력했습니다. 그의 가지고 있는 사상과 성신이 그것을 쓰셔서 인도하시는 내용과는 아주 좋은 조화를 이루고 움직이고 있습니다. 이것이 그에게 있어서 유기적인 역사라고 하는 어떤 현실, 곧 어떤 사실을 강하게 나타내는 것입니다. 바울에게 어떤 직접적인 환상이나 계시가 없는 것은 아니었지만 환상 그것 자체를 계시로서 받아들이지 아니 했습니다. 오늘 본문의 이 성경 말씀을 볼지라도 마게도냐 사람의 환상을 보고서 곧 마게도냐로 가기로 힘썼지만 바울이 이 환상을 본 후에 “우리가 곧 마게도냐로 떠나기를 힘쓰니. 이는 하나님이 저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라고 우리를 부르신 줄로 인정함일러라”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이 이렇게 부르신다고 그 내용은 그렇게 인정한 것이지 환상 그것 자체가 곧 계시다고는 생각은 하지 아니하였습니다.


이것은 우리가 이 다음에 다시 생각할 문제이지만은 여기서 우리가 중요하게 볼 것은 바울 사도는 복음을 들고 복음을 전도하고 교회를 세우면서 나가는데 지리적으로 볼 때 항상 시작을 수리아 안디옥에서 했지만 항상 서쪽으로 갔습니다. 사도 베드로와 같이 동쪽 바벨론을 향해 간 일이 없습니다. 북쪽 빅트리아나 엘람도나 이란 쪽으로 올라간 일이 없습니다. 알르메니아로 간 일도 없고 소아시아로 들어가 소아시아에서 다시 동북쪽으로 갈려고 한 일이 한번 있지만 곧 비두니아로 갈려고 오늘 기록에서 한번 있지만 예수의 영이 딱 막고 못 가게 하니까 다시 서진(西進)해서 드로아까지 갔습니다. 드로아는 에게 해에 있는 해안입니다. 아시아에 있는 항구입니다. 고대에 그 트로이 유적이 있는 자리는 아니지만 거기서 멀지 않은 곳에 있어서 이름이 그 이름대로 트로이입니다. 이에 호머의 시 가운데 나오는 트로이란 말을 그대로 인용해서 드로아라고...거기서부터 성신님의 거룩하신 인도를 받고 비로써 마게도냐 헬라로 갔고, 그리고 자기가 원하는 대로 결국은 로마로 가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복음을 들고 바울 사도는 서쪽으로 나갔다는 것입니다. 서쪽으로 나가되 지중해 서쪽으로 자꾸 나가되, 지중해 연안으로 해서 아프리카로 가지 않고 항상 이쪽 헬라 즉 마게도니아와 아가야, 그 다음에는 에게 해를 넘어서 저쪽 아드리아 앞 바다를 넘어서 로마로 갔습니다. 바울의 당면의 목표는 로마였습니다. 왜 바울 사도가 이렇게 했습니까? 바울은 거기에 대해서 자기 자신은 아무런 상념이 없는데 성신께서 그리로 가거라 하고 밀어대서 그렇게 했는가 하면 그것은 아니고, 성신이 그 안에서 역사하시는 까닭에 바울 사도에게는 그런 사상이 움직였고, 이 사상의 움직임 하에서 이것이 하나님의 뜻이라고 생각하고 그렇게 나가는 것이 당연히 해야 할 일이다, 당위다 하고 그러고 나갔던 것입니다.

 

성신의 가르치심과 인도하심을 받을 때에 이와 같이 하나님의 거룩한 나라의 사상을 품은 사람은 그 사상 자체가 필연적으로 요구하는 사실들이 생기는 것입니다. 가령 사람이 인간관을, 곧 고귀한 인간의 존엄성이란 것을 인정한 사람은 필연적으로 인간을 학대한다든지 인간을 천시한다든지 무시하는 일은 반대하고 나설 것입니다. 그런 일이 자기에게 닥칠 때는 맹렬하게 반대하는 것이 필연적인 것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그 사상이 그런 인간관을 가진 까닭에 그렇습니다. 선조를 신화화하는 가정관을 다 불식시켜 버리고 다같이 하나님 앞에서는 하나님의 자녀로서 일대일로 서 있다는 걸 안사람은 자녀들의 인격에 대해서 자기 소유물과 같이 생각하던 누습을 버릴 것입니다. 그리고 자기의 행복이나 자식의 행복을 전제로 하고 나가던 유디모니즘(eudaemonism) 사상에서 벗어난 사람이면 오직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다는 것 때문에 자식들을 기르고 그 사상을 부여해 줄 것입니다. 이와 같이 그 사상이 어떠한가에 따라서 그 행동이 나오는 것이고, 그 언어가 나오는 것입니다. 따라서 그것은 정당한 사상과 성신께서 그에게 함축해 주신 거룩한 도리가 그 속에 있으면 거기에 의해서 움직일 때 성신께서 힘을 보태어 주셔서 그 일이 이루어 나가도록 해 주시는 것이라는 말입니다. 그러한 거룩한 사상을 가지고 나가는 사람 앞에 장애가 있을 때에는 장애를 물리치고 가는 것이지 장애에 타협하고 넘어지고 되돌아서는 법이 없는 것입니다. 이와 같이 기계적이 아니고 인간적으로, 가장 영혼의 기능을 충분히 활용하는 인간답게 나가는 이 사람에게 정당하게 성신의 가르치심과 인도하심을 받는 생활이 나타날 것입니다.

 

사도 바울에게 내리신 성신의 가르치심과 인도하심은 그의 사상과 그의 세계관, 그의 사관, 그런 것들과는 밀접한 관계를 늘 가지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성신의 은연(隱然)한 주관 하에서, 곧 하나님의 섭리 하에서 그는 그 사상이 육성되어 왔던 것입니다. 이것이 하루 이틀에 금방 된 것은 아닙니다. 다만 그는 예수님을 만난 다음에는 과거에 가지고 있던 헤브라이즘에 일대 수정을 가할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헤브라이즘도 계시에 터를 두고서 구성되 나온 것이지만 그것이 가지고 있는 편협성과 편견과 잘못된 것들을 일단 다 한번 불식해 버렸다는 것입니다. 이 바울 사도의 가치의 전도(顚倒)라고 할지, 사상자체의 정리라는 것이 그의 입신 이후에 있었다는 걸 우리가 충분히 알 수 있습니다. 또한 사명 받은 후에 그의 사명수행의 길은 그의 사상의 터 위에서 그의 진로를 정해 주었고, 거기에 의해서 전진하게 한 것입니다.

 

성신께서 바울 사도를 들어서 이방의 사도로 쓰실 때에 하나님의 그 만세전의 경영을 따라서 이미 준비해 놓으신 바울이라고 하는 그릇, 그러한 사상가를 만들어 주신 후에 쓰신 것입니다. 그냥 갑자기 쓰신 것은 아니다는 것입니다. 기독교의 신학을 가령 바울 사도의 일을 보십시다. 기독교의 신학을 체계 있게 세워서 후대에 가장 정연하게 전수하도록 바울 사도를 들어 쓰셨음을 우리는 보는데 이런 바울이 가지고 있는 그런 논리적인 은사가 움직인 것만 아니라 그가 가지고 있던 교육과 그의 사색과 또한 그의 사상가로서의 함축을 다같이 써서 그렇게 만든 것입니다.

 

라. 제2차 전도 여행 중의 성신의 인도

 

그 일단의 예를 우리가 오늘 읽은 사도행전 16:6-15절에서 보는 것입니다. 6-15절까지 여기서의 이야기는 두번째 여행입니다. 두 번째 여행 기록은 사도행전 16장부터 18장까지 있는 기록입니다. 장소는 마게도냐, 헬라 이것이 중요한 여행지였습니다. 주후 50년으로부터 53년까지 해수로 한 4년간 한 것입니다. 같이 간 사람들은 누구냐 하면 바울과 바나바가 마가의 일로 서로 다투고 나누어서 바나바는 수리아 안디옥에서 마가 요한을 데리고 자기 고향 땅 구브로로 가서 거기서 전도를 하고, 바울 사도는 실바누스라는 사람 실라라고 하는 사람을 택해서 데리고 먼저는 수리아에서 북쪽으로 올라가서 도보로, 육로로 북쪽으로 가서 소아시아로 들어가서 주로 갈라디아 땅으로 나갔습니다.

 

그런데 갔다가 루스드라에 가서 더베, 루스드라로 갔지만 루스드라 땅에서는 일찍이 제 일차 여행 때 루스드라에서 바울이 죽을뻔 했습니다. 돌로 맞아서 죽은 줄 알고 사람들이 곧 유대사람들이 끌어다가 성밖에다 내친일이 있었습니다. 그렇지만 제자들이 둘러섰을 때 기적으로 그는 회생해서 일어나서 성으로 들어갔다가 그 다음에 이고니온으로 갔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이런 루스드라에서 제자를 하나 만났는데 아버지는 헬라 사람이고 어머니는 유대사람인 디모데입니다. 바울은 디모데를 할례를 행해 가지고 데리고 갔습니다. 바울, 실라, 디모데, 그 다음에 드로아에서 볼 것 같으면 아까 읽은 말씀 곧 바울이 마게도냐 환상을 본 후에 “우리가 곧 마게도냐로 떠나기를 힘쓰며”라고 했을 때 우리라는 말을 썼습니다. 이 말씀을 기록한 사람은 누가인데 여기서부터 누가가 가담한 것을 표시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드로아에서부터 우리라고 말할 때 자기를 포함한 일행 누가, 빌립보 사람인 듯한 사람인데 마게도냐에 빌립보 사람 헬라 사람입니다. 그도 거기 가담을 해서 일행이 바울과 실라(바울이나 실라는 다같이 로마의 시민권을 가진 사람들입니다). 그 다음에는 디모데 그리고 누가 이와 같은 사람들입니다.

 

이 사람들이 한 여행인데 누가는 드로아에서부터 출발했습니다. 바울과 실라는 육로로 수리아 안디옥을 떠나 가지고서 타우르스 산과 길리기아 문을 지나가지고 들어왔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성신이 그들을 인도해서 나가는데 이 바울이 갈라디아 땅에서 어디로 갈려고 했느냐하면 서쪽에 있는 로마의 도(道), 프라빈스(province), 아시안 프라빈스(Asian province)라고 여기에 아시아(도)라는 말은 로마의 도의 이름입니다. 이쪽으로 갈라디아가 있고 하는데, 여러 도의 이름이 있는데 가장 서쪽으로 붙어서 에게 해에 접해 있는 도, 그 수부가 에베소인데, 그것이 아시아도입니다. 이 아시아도 곧 에베소를 향하여 갈려고 했던 것 같은데 성신이 아시아(도)에서 복음을 전하지 못하게 하셨다고 했습니다.

 

우리는 성신이 어떤 방식으로 이를 막으셨는가 하는 것을 알 수는 없습니다. 알 수가 없으나 어찌하든지 나중에 바울 사도는 누가하고 이야기를 할 때 보면 성신께서 가기를 막으셨다고 했습니다. 성신께서 막으신 일이 아니라면 그 후에 발생한 여러 가지 일에 일치성이 없습니다. 그 후에 발생한 여러 가지 일의 역사적인 중요성을 우리가 관찰할 때는 분명히 하나님의 뜻이 거기 있은 까닭에 이것은 하나님의 뜻으로 막으신 것이다고 해서 막은 것을 이야기했습니다. 그 막았다는 것을 확언(確言)할 수 있는 것은 바울일 것입니다. 왜냐하면 자기가 아시아에 가서 어떻게 하려고 했는가를 자기가 생각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자기의 아는 대로 되지 아니한 것입니다. ‘아, 내 안 대로 그 때 아시아에 가서 이렇게 이렇게 했더라면 빌립보의 일과 이 마게도냐 일과 아가야 일과 나중에는 이 헬라 전체에 일어난 일, 이런 일들이 어떻게 발생할 수 있을까? 다른 때 해서도 꼭 되리라고 장담 못한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하나님의 섭리를 믿는 그는 아무 때 해도 된다는 생각을 한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의 원하시는 그 때에 나가서 그 일을 해야 한다는 것을 그는 믿었습니다.

 

복음은 내가 전하면 되는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이 그 사람을 적시(適時)에 쓰시고 적시에 건져서 원하시는 그 시간에 거기 거룩한 교회를 형성하고 그 나라를 세워 나가시는 것입니다. 이러한 것을 확연히 믿는 그 신학을 가진 바울로서는 자기가 아시아에서 지체하고 방황하는 일을 했더라면 이런 일은 이렇게 이런 양식으로 발전하지 못했을 것이다고 하는 사실을 알고 있는 까닭에 과연 그것을 막아주셨고, 막아 주셨기에 우리가 아무 것도 아니지만 이런 큰 일을 하게 되었다고 한 것입니다. 이런 까닭에 아시아로 들어가지 않은 것은 그때의 형편 때문에 못 들어 갔다고 하더라도 훗날 회고할 때는 그 형편이 될 수 없게 만들었다는 것, 불가능하게 만들었다는 것부터 성신의 역사라 하는 것을 믿었던 것입니다.

 

마. 마게도냐 사람의 환상

 

혹 사가(史家)들은 생각하기를 바울이 가지고 있는 큰 병이 있었습니다. 바울에게는 안질도 있었고 또한 고질병이 있었는지 우리가 알 수 없으나 그는 고린도에서 자주 말하기를 사탄의 사자라고, 자기는 자기의 몸을 찌르는 가시를 육체에 가졌다고 했습니다. 우리는 그것이 뭔지 잘 모르지만 바울은 분명히 눈병이 있었던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나는 눈이 잘 안보여 가지고서 편지할 때도 디모데에게 거의 다 대필(代筆)하고 자기가 인사는 큰 글자로 써서 인사를 하고 그랬습니다. 그러나 무엇이 되었던지 바울에게 혹시 그 때 어떤, 그냥 전체 몸에 병이 생겨서 전도할 수 없는 처지가 있어가지고 산간 고지대인 갈라디아 땅에서 그냥 쉴 수 없었었는지도 모릅니다. 그래서 아시아로 가서 일을 할려고 하던 것을 못하였습니다.

 

그러면 병이 나으면 아시아로 들어 갈려고 했을 터인데 병상에서 그는 묵상하고 생각하는 도중에 그렇게 할 것이 아니라 계획을 좀 고쳐보자 생각하고 그 둘째 계획이라는 것이 그대로 아시아의 북쪽을 그냥 통과를 해 가지고 무시아 앞에서 비두니아로, 곧 흑해 연안에 있는 비두니아 쪽으로 올라 갈려고 했습니다. 비두니아로 자꾸 올라가면 그 다음에는 어디로 갑니까? 아마 알메니아로 올라가겠지요. 그런데 비두니아로 올라 갈려고 하는 것을 예수의 신이 또한 허락지 아니 하셨습니다. 그때 또 무슨 사건이 생겼는지 모르나 막았습니다. 바울에게는 또 직접적인 계시가 있던 까닭에 혹은 바울 사도에게 밤에나 낮에라도 어느 시간에 주의 성신이 나타나서 그리로 가지마라, 이것이 내 뜻이 아니다라고 가르쳐 주었고 바울은 그것을 혼동 없이, 곧 착오 없이 알아들을 수 있는 그런 하나님과 밀접한 관계에 있는 사람인 까닭에 그것을 하나님께서 가르치시는 도리로 확신하고 그걸 통해서 드로아로 갔을런지도 알 수 없습니다.

 

그러니까 여기서 이러고저러고 하는 것은 분명한 기록이 없기 때문에 더 이상 생각할 필요가 없습니다. 그가 형편이 그렇게 됐든지 혹은 직접적인 계시에 의해서 였던지 좌우지간 아시아도와 비두니아로 가지 않은 것은 분명합니다. 그 후에 바울 사도는 그것이 ‘하나님의 성신이 혹은 예수님의 영이 막아서 못갔다, 가지 말라고 했다. 즉 예수님의 신이 그리로 가는 것을 원치 아니하는 의사를 표시하는 것이 분명하다’고 하는 것으로 확실히 인정한 것입니다.

 

그래서 여기 드로아에 왔는데 여기 드로아에 와 가지고 누가가 여행에 가담을 했습니다. 여기서 마게도냐 사람의 환상을 본 것입니다. 이 환상을 바울에게 보여 주었는데 그러니까 이건 여행하던 첫해의 환상인 것입니다. 아직 어디 멀리 간 때가 아닌 까닭에 주후 50년경 일일 것입니다. 그 환상에 마게도니아 사람의 환상이 나타나 “마게도니아로 건너와서 우리를 구하라”고 했습니다. “바울이 이상을 본 후에 우리, 즉 누가를 포함한 일행은 곧 마게도니아로 떠나기를 힘쓰니 이는 하나님이 우리에게 저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라고 부르신줄로 인정함이러라”고 했습니다. 여기서 그렇게 판단한 것이 무엇이 되었든지, 그것이 자연 현상이든지 아니면 특이한 환경이든지 우리의 시각을 통해서나 우리의 촉각이나 우리의 감각 기능을 통해서 무엇이 되었든지간에 온 것입니다. 그것은 항상 마음을 모아서 하나님의 성신의 뜻을 알고자 하고 가르침을 받고자 하는 사람에게는 그걸 해석할 필요가 있는 것이지 덮어놓고 ‘아, 이건 그렇습니다’하고 따라가는 것은 아니다는 말입니다.

 

왜냐하면 가상(假想), 곧 헛된 상도 많은 것입니다. 이 사람들이 환상을 봤으니까 우리도 환상만 보면 하나님의 환시다 하고 생각했다가는 큰 야단이 날 수가 있습니다. 이 사람들은 다 환상을 보되 환상에서 방황하지 않을 크라이테리아(criteria)가 풍부하고 그리고 경험도 풍부하고 또 하나님과의 교제가 가까운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리고 아직 시대가 계시 시대였습니다. 계시의 시대인 까닭에 특이한 계시의 내용이라는 것은 아직도 끊이지 않고 많이 있지마는 계시 시대가 지난 이후부터 사람은 함부로 환상을 본다든지 묵시를 받았다든지 계시 받았다든지 이렇게 해서 성경적인 권위로, 하나님 나라의 거룩한 지침으로서의 권위 있는 소리를 다시 할 수는 없는 것입니다. 이것을 오해하고서 자기도 같은 레벨(level)에서 환상을 받는 것같이 마치 바울이 환상을 보고 베드로가 환상을 봤으니 나도 보니까 묵시를 받았다고 하면 안 되는 것입니다.

 

그들에게는 하나님의 말씀이 주어지고, 계시가 곧 특별계시가 완성되기 위하여 자꾸 내리는 시대의 사람인 까닭에 그들을 도구로 잡아서 특별계시를 자꾸 내리시는 것이지마는 오늘날 우리에게는 그런 것이 없습니다. 그러므로 오늘날 우리에게 있어서 함부로 계시를 받으려고 해서도 안 되고, 또 감각적으로 오는 것이 우리의 가지고 있는 연약 때문에 얼마든지 잘못 될 수가 있다는 것을 늘 생각해야 합니다.

 

바울 사도에게도 이 마게도냐의 환상은 환상 그 자체를 계시라고 하지 않고 그것을 해석했단 말입니다. 해석할 만큼 마음에 준비를 가지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를 부르신 것으로 인정했다고 했습니다. 이것이 부르신 것입니다. 그런 의미를 가진다고 말하자면 그런 의미를 해석한 것입니다. 그래서 이런 우리를 인정했다는 중요한 사실을 주의해서 생각해야 합니다. 어떻게 바울은 이 마게도냐 사람의 환상을 하나님의 부르심이라고, 마게도니아 사람들에게 전도하라고 하시는 하나님의 부르심이라고 인정하게 되었는가 하는 것을 우리는 여기 이 기록에서 그리고 바울 사도라는 그 인물을 생각하는 가운데서 찾을 수밖에 없습니다. 오늘은 여기까지 하고 다음 시간에 계속해서 이 문제에 대해서 공부하도록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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