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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 손재호
성경본문 갈 5:16-26
강설날짜 2017-06-18

2017년 봄학기 특강(개혁주의 교회론)

성령 하나님의 인도를 신실하게 받드는 교회(3)

- 성령 하나님의 역사를 분별하는 일 -

말씀:갈라디아서 5:16-26

 

지난 시간에 우리는 성령 하나님의 인도와 목표 그리고 방식에 대해서 살펴봤습니다. 오늘은 세 번째로, 성령 하나님의 역사를 분별하는 일에 대해서 살펴보고자 합니다.

 

성령 하나님의 역사를 분별함

 

성령 하나님의 역사를 분별하는 일은 앞서 살펴본 두번째 주제 때문에 가져야 하는 관심입니다. 이것이 무엇이냐 하면 과연 내게서 나온 어떤 것이 과연 나라고 하는 자기에게서 나온 것이 아니요, 진정으로 성령 하나님께서 역사하신 데서 나온 것인 사실을 과연 어떻게 분별할 수 있느냐 하는데 대한 것입니다. 우리가 이 분별을 바르게 가지지 못하면 이중적인 측면에서 잘못을 범할 수 있습니다. 첫째는, 실제적인 성령 하나님의 사역을 나 자신의 사역으로 생각할 수 있는 오해인 것입니다. 둘째는, 나 자신이 행한 일을 성령 하나님의 역사였다고 치장할 수 있는 잘못입니다. 이 문제에 있어서 밝은 지혜를 가지려면 다음과 같은 몇 가지 사실을 염두에 두어야 합니다.

 

첫째로, 우리 성도들은 각자의 인격과 활동의 가치라는 것이 자기 개인의 것으로서는 별다른 의의를 가지지 않는다는 사실을 항상 유념해야 합니다. 우리 개인의 가치는 교회 전체에 속한 자리에서만 의미를 가집니다. 곧 교회를 구현하는 일에 기여하는 결과를 가져올 때에만 의미를 갖습니다. 이 점에 대해서 우리가 다시 한번 분명하게 이해해야 합니다.

 

이 점과 관련하여 에베소서 4:15-16절에 보면 “오직 사랑 안에서 참된 것을 하여 범사에 그에게까지 자랄지라. 그는 머리니 곧 그리스도라. 그에게서 온 몸이 각 마디를 통하여 도움을 입음으로 연락하고 상합하여 각 지체의 분량대로 역사하여 그 몸을 자라게 하며 사랑 안에서 스스로 세우느니라”고 하신 말씀이 나옵니다. 여기서 ‘온 몸’이란 두말할 것도 없이 교회를 가리킵니다. 교회는 머리이신 그리스도에게까지 자라가야 합니다. 이때 어떤 식으로 자라가느냐 하면 성도들끼리 피차간에 ‘자기의 분량대로’ 자라가야 하고, 또한 이것이 피차간에 ‘연락하고 상합하는 방식’으로 합니다. 이렇게 성도들 각자의 분량에 따라 피차간에 연락하고 상합하는 움직임의 역동성은 머리이신 그리스도에게까지 자라가기 위하여 활동하는 움직임 그 자체이고, 바로 여기에서 교회는 하나의 유기적 인격체가 되어 세상 앞에 그 모습을 도도하게 드러내게 됩니다.

 

유기적 인격체인 교회는 세상 속에서 단순히 존재하기만 하는 것이 아니고, 완성을 향하여 계속 자라갑니다. 이 성장은 역사라고 하는 시간과 존재의 무대 위에서 이루어집니다. 이 과정 속에서 교회는 신령한 전투에 참여합니다. 그러다가 그리스도께서 재림하실 때에 역사는 종말을 맞이하게 되고 교회의 자라감은 완전에로 들어가게 될 것입니다. 지상 교회의 신령한 전투는 끝이 나고, 승리적 교회로서 본격적으로 영생을 누리게 됩니다. 이 날에 교회원들 모두는 궁극적인 영광에 이르게 되고, 하나의 몸으로 통일됨에 있어서도 완전과 충만에 이르게 됩니다. 이 날부터 머리이신 그리스도의 통치는 호리만큼도 막힘이 없이 우리 가운데서 실현됩니다. 성도들은 그리스도의 통치에 온전한 순종과 즐거움으로 생기 있게 참여하게 됩니다. 이런 영광의 날이 교회를 이루는 모든 성도들에게 예비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교회가 영단번에 이러한 수준에 이르도록 하시지 않고, 역사의 무대, 곧 시간 속에서 존재 형태를 가지면서 오랜 시간 동안 자라나오는 방식을 취하게 하셨습니다. 더욱이 택함을 입은 많은 사람들을 여기에 참여시키는 사명을 감당하면서 비로소 충만과 완성에 이르게 하셨습니다. 이런 까닭에 오늘날 교회는 이같은 미래의 목표를 향하여 자라가는 것이며, 동시에 이것은 자기 시대에 맡겨진 사명을 감당하는 것이기도 합니다. 이것이 ‘자라가는 교회’라고 하는 형상입니다.

 

그렇지만 이와 같은 교회의 자라감과 사명 감당이란 것은 그처럼 교회를 이루고 있는 개개인 성도들의 인격적 활동을 통해서만 수행되어지는 것입니다. 바로 이와 같은 구도를 전제하고서 그런 다음에 비로소 성도들 속에서 사역하시는 성령 하나님의 역사와 인도에 대해서 생각해 볼 수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이런 기조를 가져야만이 ‘자기’를 통해서 나타나거나 전개되는 ‘자기의 일’이란 것이 진정으로 성령 하나님으로 좇아서 나온 것인지 아니면 순전히 자기라고 하는 것이 기독교의 이름을 빙자하여 나타난 것인지의 여부가 분별되어지는 것입니다. ‘자기’라고 하는 개인의 인격이나 덕성 혹은 여러 가지 기독교적인 활동들은 이와 같은 교회의 전체적인 진행 속에서 그 한 역할에 참여하는 것일 때에 비로소 가치를 갖게 됩니다. 그러므로 ‘자기’에게서 나온 것이 진정으로 성령 하나님의 소욕으로 말미암은 것이라면 그것은 필히 자신이 속한 교회가 그 시대 속에서 전진해 나가는 거룩한 행진과 분리되지 않을 것입니다. 성령 하나님께서는 교회의 행진과 성숙이라고 하는 이 큰 목적을 수행해 나가는 성도에게서 행여라도 부족한 면이 나타나지 않게 하시려고 그의 속에서 구체적으로 역사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자신이 행하는 어떤 일이 진실로 성령 하나님의 역사로부터 나온 것이라는 사실을 확실하게 주장할 수 있으려면 자신에게 그만한 교회적인 의식, 또는 교회적인 정신이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의식이나 정신이 없이는 성령 하나님의 역사 운운할 수 없습니다. 물론 결과나 열매에 있어서도 실제로 이것을 위해서 행해진 것이라고 하는 평가로 나타나야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거룩한 몸인 교회를 이루어 나가는 것과 분리되어서 나오는 것인 한에는 그것이 제아무리 그럴듯한 기독교적인 모습으로 채색되었다 할지라도 정작 그것은 육신에 속한 일인 것 밖에는 더 이상 아무 것도 아닙니다. 순전히 자기라고 하는 자아가 성령 하나님을 빙자하여 나타난 것일 뿐입니다.

 

이런 연고로 성도는 평소에 성경을 부지런히 읽고 연구하며, 강단에서 선포되어지는 하나님의 음성에 귀를 기울이는 가운데 교회가 무엇인가를 아는 일에 있어서 날마다 새로워져 가야 합니다. 진실로 교회를 생명처럼 중요하게 생각하는 정신을 기본적으로 가져야 하고, 나아가 바른 교회를 이루는 이 일이 구원을 완성하는 문제와 직결된다고 하는 사실을 신앙으로 고백하는 정신과 마음과 태도가 있어야 합니다. 그래서 자신의 인생의 존재의의와 삶의 목표라는 것을 이렇게 바른 교회를 이루어 나가는 데에 두고 이 목표에 부합되게끔 성경의 지도에 따르는 가운데 자신의 생활을 영위해 나가야만이 비로소 ‘성령 하나님의 인도를 받는 삶’이란 것이 자기에게 작용되게 되는 것입니다. 성도라면 마땅히 교회에 대한 이해를 꾸준히 발전시켜 나가야 하고, 처음부터 차근차근히 배워서 지식을 넓혀야 하며, 깨달은 진리를 삶에 구체적으로 적용함으로서 더더욱 깊은 영적 세계로 들어가야 합니다. 이렇게 될 때에 자기의 활동이 사람의 소욕으로서 나타나는 일은 점차적으로 줄어들게 되고, 반대로 성령 하나님의 소욕을 좇는 일은 증가되어집니다.

 

둘째로, 육체의 소욕과 성령의 소욕을 분별하기 위하여 생각해 볼 점은 성령 하나님의 역사는 항상 전인격적(全人格的)이고, 합목적적(合目的的)으로 나타난다고 하는 측면입니다. 성령 하나님의 역사는 언제나 전체와의 조화 속에서 이루어지게끔 되어 있습니다. 진실로 바로 이 전체라고 하는 성격에 비추어서 나의 어떤 덕행이나 행위가 나타나고 있는가 하는 점을 보는 일입니다.

 

먼저 인격과 관련하여 살펴보겠습니다. 성령 하나님의 소욕으로 말미암는 어떤 나의 덕행은 나의 인격 전체와 조화를 이루게끔 되어 있습니다. 가령 성령의 열매의 하나인 충성과 관련시켜 봅시다. 내가 충성한다고 할 때 과연 이것이 사람의 덕으로서의 충성이냐, 아니면 성령 하나님의 소욕으로서의 충성이냐 하는 문제가 나올 것입니다. 만일 이것이 덕성의 차원에서 나오는 명제가 아니고, 신비한 능력의 차원에서 나오는 것일 때에는 사단이 가져다준 능력이냐의 문제가 나올 것입니다. 우리는 이것을 알아야 합니다. 사람은 누구나 두 서너 가지 부분에 있어서 자신의 도덕성에 의거하여 그것을 생명력 있게 구현할 수 있는 존재라고 하는 사실입니다. 그러니까 자신의 인격성 전체의 조화성과는 상관없이 어떤 특별한 기질 한 두 가지가 두드러지게 부각되어질 수 있다는 말입니다. 그리고 이 특별한 기질이란 것은 때로는 얼마든지 기독교적인 옷을 입고 나타날 수 있습니다. 그 사람에게 있는 특별한 기질이 헌금, 기도, 구제 등 여러 가지 기독교적 행위의 옷을 입고 나타날 수 있습니다. 가령 어떤 성도가 빠짐없이 새벽 기도회에 참석한다고 할 때 이것이 성령의 소욕을 따른 데서 되어진 일인 것과는 상관없이 어떤 일을 한번 작정하면 가급적이면 실천하고야 마는 것으로서의 순전히 자기의 기질에 따라 그렇게 할 수도 있습니다. 마치 학교에서 공부를 잘하는 것과 학교 수업에 개근하는 것과는 별개의 차원인 것과도 같습니다.

 

그러면 이것이 외형적으로 교회를 이루는 모습을 띄었다고 해서 무조건 성령의 소욕이요, 성령의 열매로 평할 수 있느냐 하면 그렇지 않은 것입니다. 좀더 생각해 보아야 할 부분이 있습니다. 성도에게서 나오는 영적 선행이 순전히 성령의 소욕으로 말미암은 것이라는 평가가 나려면 그것이 그 사람의 전체적인 인격과 연결되어 있어야 합니다. 그렇지 않고 단순히 자신의 인격 전체와 상관없이 나오는 특징인 한에는 그것은 성령의 소욕의 결과라고 말하기가 어렵습니다. 가령 ‘내가 마음만 먹으면 못할 일이 없다’고 한다거나, ‘내가 사실 결심을 하고 작심을 하면 그 정도는 충분히 한다’고 하는 심정에서 나오는 덕목이라면 그것은 성령의 소욕을 따른 데서 나오는 결과가 아닐 것입니다.

 

또한 교회가 행하는 어떤 일이 영적으로 깊은 사고와 숙고 끝에 얻어내는 당위성이나 복음 진리 체계의 전체적인 기반으로부터 나오는 것이 아니요, 순전히 기발하게 반짝이는 착상이나 즉흥성 혹은 그 시대의 교회적 유행을 맹목적으로 따르는 데서 나오는 열심일 때에도 마찬가지입니다. 성령 하나님은 부족하거나 변덕스럽게 일을 하시는 분이 아니십니다. 어제는 교회로부터 인정을 받지 못하던 어떤 형식이 오늘에 와서는 과학과 문화의 이름으로 인정을 받아 하나의 유행을 만들어낼 정도로 왕성해지는 따위의 일이 성령 하나님의 역사일 수는 없습니다. 성령 하나님은 제3의 물결, 치유 목회, 교회 성장학, 다락방 전도, 찬양과 경배, 드라마 예배 등의 유행을 만드시지 않습니다. 성도 개인의 인격에 있어서나 교회원 전체를 대표하여 표현되는 유기체적인 교회적 인격에 있어서 나를 무론하고 그것에서 나오는 것이 성령의 소욕으로 평가되려면 무엇보다도 전인격적이며, 합목적으로 나타나야 합니다.

 

개인적인 차원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어떤 사람에게 있는 특별한 기질로부터 나오는 덕행이란 것은 그 사람의 전체 인격으로부터 나오는 것이 아닙니다. 따라서 이런 것은 순전히 자기 필요에 따라 이것도 한번 나오고 저것도 한번 나오고 합니다. 그러나 성령 하나님의 역사로부터 나오는 것은 성령 하나님께서 그 사람 전체를 다스리는 기반을 갖습니다. 성령 하나님께서 그로 하여금 전인격적으로 그리스도의 품성을 닮게 하시고, 이를 위하여 그로 하여금 하나님의 말씀을 전체적으로 배우게 하시는 양상을 띠는 까닭에 그의 전체 인격과 조화를 이루게 됩니다.

 

왜 이 부분을 이렇게도 강조하는가 하면 갈라디아서 5:22-23절 말씀이 그렇기 때문입니다. “오직 성령의 열매는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참음과 자비와 양선과 충성과 온유와 절제니 이같은 것을 금지할 법이 없느니라”(갈 5:22-23). 여기에 열거된 아홉 가지 열매는 오늘날 다수의 성도들이 잘못 알고 있듯이 열매가 아홉 개라는 말이 아닙니다. 성령 하나님께서 어떤 이에게는 화평의 은사를 주시고, 어떤 이에게는 충성의 은사를 주신다는 식의 이론을 주장할 수 없습니다. 즉 우리가 사랑이나 희락과 같은 것을 개별적인 목표로 설정하고는 노력하고 수고하는 가운데 이 목표를 달성하거나 성취해 나가라는 의미로 이 부분을 말씀하신 것이 아닙니다. 이 부분의 헬라어 문장 구조를 보면 단수를 사용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이 말씀은 성령의 소욕을 따르는 어느 한 사람의 인격체에서 나타날 수 있는 성품의 특성을 그렇게 다양한 각도에서 묘사한 것입니다. 이것은 예수님께서 산상수훈에서 말씀하신 팔복의 성품이란 것도 사실상 하나의 사실을 다양하게 묘사한 것일 뿐이라고 하는 원리와 동일한 것입니다. 그러니까 여기 말씀도 성령 하나님께서 나라고 하는 전인적인 인격체로 하여금 예수 그리스도의 품성으로 닮아가게끔 역사하시고 인도하시게 될 때에 나의 인격이 이렇게 여러 가지 모습으로 설명될 수 있는 모습을 띠게 된다는 의미인 것입니다.

 

과연 여기에 나오는 성령의 열매라는 것은 사실상 하나의 열매인 것이요, 곧 그 성도의 성품을 다양하게 표현한 것입니다. 성령 하나님께서 성도 속에서 소욕을 일으키실 때마다 그가 여기에 순종하는 삶을 부단히 추구해 나왔다고 하는 전제 하에서 그의 성품이 이렇게 아홉 가지 모습으로도 이야기 할 수 있는 양태를 띤 것입니다. 다시 말하여 충성이 있는 곳에는 사랑도 있고, 또 거기에는 오래참음도 있고, 절제도 있고 하는 것입니다. 충성은 하는데 고집이 세다든가, 사랑은 있는 듯 한데 질서가 없다든가, 성경 지식은 있는 듯 한데 통일성이 없다든가, 예배 참석은 빠짐없이 하는데 졸기 일쑤라든가, 기도는 열심히 하는데 중언부언한다든가, 도덕성은 있는데 혈기 왕성하다든가 하게 되면, 이런 것들을 가리켜 성령의 열매라고는 말하지 못합니다. 또한 돈에는 욕심이 없는데 권력에는 욕심이 있다든가, 혹은 교회의 일에 충성은 하지 않지만 세상을 좇는 데에는 열심이라든가, 마음이 넓고 자비롭지만 불의에 대해서 관용한다든가, 순진하긴 하지만 어리석다든가 하는 등등의 모습으로 나타날 때에도 마찬가지입니다. 자기 시대를 가장 성령으로 충만하게 사셨던 예수님의 인격을 보면 이런 식으로 편협되이 나타나지 않았습니다.

 

사람을 평가하고 분석할 때에도 이런 측면에서 접근해야 합니다. 그러니까 그 사람의 인생 전체가 지향해 나가는 삶의 큰 행보를 볼 수 있어야 합니다. 그 사람의 삶의 큰 행보를 보지 아니하고, 그 속에 속해지는 어떤 부분 하나만을 보게 되면 그릇된 판단을 하기 십상입니다. 예를 들어, 어떤 사람이 사랑이 많다고 해서 그것이 반드시 성령의 열매는 아닌 것이요, 어떤 사람이 일순간 도덕적으로 범죄했다고 해서 그것이 그의 인생 전체가 성령의 소욕과 상관이 없다고도 볼 수 없는 것입니다. 만일 어떤 사람에게 있는 그 큰 사랑이 진정으로 성령의 소욕일 수 있으려면 그 사랑의 열매 혹은 덕행이 다른 덕성들과 조화를 이루어야 하고 균형을 갖추어야 합니다. 그리고 이것은 즉흥적이거나 충동적인 것이어서도 안 되고, 지속적이어야 합니다. 장단이 있고, 굴곡이 있으며, 기복이 크게 나타나는 데서 되어지는 사랑의 행위라면 그것은 성령의 소욕이 아닐 가능성이 많습니다. 이렇게 인격적인 조화 못지 않게 중요하게 보아야 하는 이 기준을 달리 말한다면 그의 덕행들이 과연 하나님의 나라를 이루어 나가는 일과 접목되느냐 하는 점인 것입니다. 반복하지만 성도에게 있어서 인생이란 것은 목표를 바르게 설정하는 일입니다. 성령의 열매는 그가 자신의 삶의 행보를 하나님의 나라 안에서 그의 나라를 선양한다고 하는 이 특별한 목적에 맞추는 때에 나오게 됩니다. 이런 것은 틀림없이 성령의 소욕이 가져온 성령의 열매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분별을 잘해야 합니다. 순전히 그 사람이 가진 기질에 불과한 것이 기독교적인 옷을 입는 까닭에 성령의 열매로 둔갑하는 일이 얼마든지 일어날 수 있습니다.

 

따라서 복음으로 말미암는 덕행인 듯이 보이는 일들을 피상적인 안목으로 안일하게 평가하면 안됩니다. 가령 여기 갈라디아서에 보면 육체의 일(19-21절)과 성령의 열매(22-23절)가 대조되었는데, 그렇지만 이 대조는 일반적인 관점에서 되어진 것이라는 사실을 생각해야 합니다. 즉 이 부분은 평범하게 보더라도 도덕적인 성향이 아주 뚜렷하게 비교됩니다. 믿음이 없는 세상 사람들이 보더라도 여기에 열거된 현저(evident)한 육체의 일들이란 것은 도덕적으로 아주 저급하게 평가를 하는 것이고, 성령의 열매는 높게 평가를 하게 됩니다. 이런 까닭에 여기에 나온 명백한 육체의 일 반대편에 있는 어떤 행위들이 복음의 옷을 입고 나타나게 되면 그것을 성령의 열매라고 쉽게 단정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분명하게 알아야 할 것은 복음 안에서도 얼마든지 분쟁과 시기 같은 것들이 있을 수 있고, 반대로 세상 사람들 속에서도 화평과 양선 같은 것들이 있을 수 있다는 사실입니다. 세상 사람들의 경우라고 해서 항상 속이 뒤집혀서 사는 것이 아니고 자기네들끼리 피차 사랑하고 도와주며 화평하게 사는 일이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곳에서 대조되고 있는 육체의 일과 성령의 열매는 그야말로 일반적인 비교를 그렇게 한 것이지 섬세하게 대조한 것이 아님을 알아야 합니다.

 

이 문제를 좀더 분명하게 짚고 넘어갈 필요가 있습니다. 누군가가 복음의 이름으로 여러 가지 덕목들을 행했다 할지라도 그것이 전혀 성령의 열매가 아닐 가능성은 얼마든지 있습니다. 성령의 소욕을 따르지 않는 데서도 얼마든지 성령의 열매인 듯이 보이는 덕행들이 나타날 수 있는 법입니다. 가령 주색잡기에 빠져 있던 누군가가 어떤 계기로 말미암아 갑자기 개과천선을 하고 도덕군자의 길을 가기로 했다고 합시다. 더욱이 이 사람은 복음을 받아들이고 기독교의 영역으로 들어와서 그처럼 도덕군자다운 삶을 추구해 나갑니다. 그의 이러한 삶은 교회 안에서 자타가 공인할 정도로 두드러지게 드러납니다. 그러면 이런 경우 그에게서 나오는 덕행들은 무조건 성령의 열매가 된다고 볼 수 있겠는가 하는 말입니다. 이런 정도만으로는 그렇게 볼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사람은 얼마든지 ‘선’과 ‘의’에 대한 자기 나름대로의 기준을 가지고 그렇게 할 수 있는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중생하기 전에 나름대로 가지고 있었던 유교적 영향이나 논어 맹자와 같은 서책들의 감흥이 그의 속에서 나오는 것임에도 불구하고 다만 이것이 기독교적인 것으로 채색되어졌을 뿐인 경우가 허다합니다.

 

이런 성향은 서양의 경우를 참작하여 추론해 보면 더더욱 명료해집니다. 왜냐하면 서양의 경우 그들 세계와 문화를 형성하고 있는 도덕기준이 성경인 경우가 많기 때문입니다. 가령 뉴질랜드의 경우를 보면 통계적으로 97 퍼센트의 국민이 기독교인입니다. 저마다 자신을 크리스천이라고 소개합니다. 그렇지만 이들 중의 대다수는 고작해야 1년에 서너 차례밖에 예배당에 출석하지 않습니다. 이것은 교회를 이루는 삶이 구원과 동질성을 가진다고 하는 차원에서 볼 때 그들의 구원 자체를 짚어보지 않을 수 없을 정도의 심각한 문제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들이 가진 도덕성은 세계에서 최고입니다. 윤리와 도덕 환경 등의 다방면에 걸쳐서 항상 상위권에 듭니다. 그러면 이들의 정신과 생활을 지배하는 정신이 무엇이냐 하면 바로 성경입니다. 이들의 선조들은 신앙이 투철한 사람들이었고, 성경의 정신이 지배하는 국가를 만들어 볼려고 했습니다. 그래서 뉴질랜드에는 아예 도시 이름을 예수님의 이름과 교회로 명명한 곳도 있습니다. 남섬에 있는 ‘크라이스처치’가 그렇습니다. 이런 정신이 후대로 계승되었습니다. 그래서 뉴질랜드의 경우 성경적인 사상이 그들 문화를 지배적으로 창출하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이들이 성령의 소욕을 좇고 있고, 성령의 열매를 맺고 있다고 말할 수 있는가 하면 그렇게는 못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이들은 대다수는 정작 교회 생활에는 등한시 하고, 하나님의 나라를 운반해 나가는 주체자라고 하는 의식에 있어서 전무하기 때문입니다. 이들은 그들 문화 속에서 형성된 전통적인 기질을 발휘하고 있을 뿐인 것이요, 그래서 비록 성경적인 문화를 형성해 내고는 있지만 여전히 육신의 소욕의 결과들일 뿐입니다.

 

이런 예는 여러 다방면에 걸쳐서 나타날 수 있습니다. 가령 선지자적인 안목을 가진 일꾼이 있어서 그가 밤낮으로 교회 개혁을 부르짖으면서 제도권과 맞서 고군분투한다 할지라도 이것이 반드시 성령의 소욕을 좇는 데서 나오는 것일 수는 없고, 순전히 그 사람 자신에게 형성되어 있는 선과 의의 욕구가 기독교적인 옷을 입고 나오는 것일 수도 있는 것입니다. 성령의 소욕을 좇아 행하는 데서 나오는 성령의 열매라는 것을 분별하는 일은 그렇게 피상적인 접근으로는 되어지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방금 살펴보았듯이 순전히 자기의 기질이란 것이 기독교적인 옷을 입고 얼마든지 나올 수 있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정리하자면 참으로 육체의 소욕과 성령의 소욕을 분별하는 일은 그러니까 자기가 행한 어떤 일이 순전히 자기의 행위라는 것이 기독교의 옷을 입고 나온 것인지, 아니면 순수한 성령 하나님의 행위인지를 구별하기 위해서는 예민함이 있어야 합니다. 행동의 동기에 있어서 결코 자기라고 하는 것이 없는 데서 나온 것이어야 합니다. 추호도 자기의 목적이 없어야 하고, 자기의 힘을 의지하지 않으려고 해야 합니다. 또한 그 행동의 방법에 있어서 그것이 이루어질 때까지 지속적으로 성령 하나님을 의지하는 심정을 가져야 합니다. 제아무리 작은 일이라 할지라도 하나님을 간절하게 의지하는 자세가 있어야 하고, 오직 하나님의 힘으로만 이 일이 이루질 수 있고, 또한 가치를 가진다는 심정을 놓치지 말아야 합니다. 이럴 때에 실제로 성령 하나님께서 그 일을 주관하시고 인도하시게 됩니다. 처음부터 자기가 무엇을 하겠다고 하고, 자기의 힘과 꾀를 의지하게 되면 그것은 성령 하나님의 역사라고 말하기 곤란합니다. 성령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은혜를 주셔서 우리가 성령 하나님의 역사를 잘 분별하게 하여 주시고, 우리로 성령 하나님의 역사를 따라 사는 자들이 되게 하여 주시기를 원합니다. 그리하여 우리 가운데 성령의 열매가 충만케 하여 주시고, 우리 교회가 성령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받는 교회로 세워져 가게 하여 주시기를 원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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