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이델베르그 요리문답
2014.04.07 21:26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 제22주(57문,58문) - 부활과 영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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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 최상범
57-58문
문답내용 57문 : “몸이 다시 사는 것”은 당신에게 어떤 위로를 줍니까?
답 : 이 생명이 끝나는 즉시 나의 영혼은 머리되신 그리스도에게 올려질 것입니다. 또한 나의 이 몸도 그리스도의 권능으로 부활하게 될 것입니다. 그래서 나의 몸은 다시 나의 영혼과 결합되어 그리스도의 영광스러운 몸과 같이 될 것입니다.

58문 : 영원한 생명은 당신에게 어떠한 위로를 줍니까?
답 : 지금도 나는 내 마음속에서 영원한 기쁨이 시작되었다는 것을 경험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 세상에서의 삶을 마친 다음에 나는 완전한 복락을 누리게 될 것입니다. 그 복락은 어떤 사람도 자기의 눈으로 보지 못하고, 귀로도 듣지 못하고, 또한 마음으로도 생각하지 못했던 것입니다. 그리고 그 복락을 누리면서 나는 하나님을 영원히 찬양할 것입니다.
강설날짜 2014-03-02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 제22주(57-58문)


부활과 영생


요절 : 빌 1:21-23


57문 : “몸이 다시 사는 것”은 당신에게 어떤 위로를 줍니까?

답 : 이 생명이 끝나는 즉시 나의 영혼은 머리되신 그리스도에게 올려질 것입니다. 또한 나의 이 몸도 그리스도의 권능으로 부활하게 될 것입니다. 그래서 나의 몸은 다시 나의 영혼과 결합되어 그리스도의 영광스러운 몸과 같이 될 것입니다.


58문 : 영원한 생명은 당신에게 어떠한 위로를 줍니까?

답 : 지금도 나는 내 마음속에서 영원한 기쁨이 시작되었다는 것을 경험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 세상에서의 삶을 마친 다음에 나는 완전한 복락을 누리게 될 것입니다. 그 복락은 어떤 사람도 자기의 눈으로 보지 못하고, 귀로도 듣지 못하고, 또한 마음으로도 생각하지 못했던 것입니다. 그리고 그 복락을 누리면서 나는 하나님을 영원히 찬양할 것입니다.


오늘 사도신경의 마지막 부분을 배워보겠습니다. 우리는 성령님과 관련된 마지막 고백으로서 “몸이 다시 사는 것과 영원히 사는 것을 믿사옵나이다” 하고 고백합니다. 한마디로 부활과 영생인데, 성경은 이것이 성령님의 사역임을 자주 증거합니다.


“(11)예수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이의 영이 너희 안에 거하시면 그리스도 예수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이가 너희 안에 거하시는 그의 영으로 말미암아 너희 죽을 몸도 살리시리라”(롬 8:11)


이 구절에 보면 예수님을 부활시키신 분은 성령님이십니다. 그런데 바로 뒤에는 “그리스도 예수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이가”라고 해서 성부 하나님이 예수님을 부활시키셨다고 말씀합니다. 또 어떤 곳에는 예수님이 스스로 부활하신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너희가 이 성전을 헐라 내가 사흘 동안에 일으키리라”(요 2:19) 그러므로 예수님의 부활은 성삼위 하나님의 사역이고, 우리의 부활도 역시 성삼위 하나님의 사역입니다. 그러나 그 대표격으로 우리는 성령님의 사역으로 돌려드립니다. 로마서 8장 11절의 말씀은 성령님께서 예수님을 부활시키셨는데, 너희 안에 성령이 계시면, 그 성령이 너희 죽을 몸도 다시 살리실 것이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영생에 이르는 것도 성령하나님을 빼놓고 이야기할 수 없습니다. 영생은 하나님 나라를 말하는데, 하나님 나라는 먹는 것과 마시는 것이 아니라 성령 안에서 의와 평강과 희락입니다. 영생은 성령 안에서 성부하나님과 성자 하나님과의 영원한 연합과 교제를 말합니다. 그래서 성령 하나님에 대한 마지막 고백으로서 부활과 영생을 말하는 것은 적절하고도 중요한 고백입니다.


1. 부활


57문을 보십시오.


57문 : “몸이 다시 사는 것”은 당신에게 어떤 위로를 줍니까?

답 : 이 생명이 끝나는 즉시 나의 영혼은 머리되신 그리스도에게 올려질 것입니다. 또한 나의 이 몸도 그리스도의 권능으로 부활하게 될 것입니다. 그래서 나의 몸은 다시 나의 영혼과 결합되어 그리스도의 영광스러운 몸과 같이 될 것입니다.


우리의 몸이 죽었다가 주님의 재림의 때에 다시 부활한다는 것입니다. 이 몸의 부활은 성도의 참된 소망입니다. 그런데 부활을 이야기 하려면 죽음이 선행되어야 합니다. 그래서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도 부활을 설명하면서 먼저 “이 생명이 끝나는 즉시”라고 하여 죽음을 언급하는 것입니다. 부활하기 위해서는 먼저 죽어야 합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구속의 역사 방법입니다.


예수님도 고난을 받으시고 십자가에서 죽으셨기 때문에 부활하신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에게도 동일합니다. 우리가 죽고 부활하는 것은 궁극적으로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에 연합한 결과입니다. 로마서 6장을 보면...


“(5)만일 우리가 그의 죽으심을 본받아 연합한 자가 되었으면 또한 그의 부활을 본받아 연합한 자가 되리라(8)만일 우리가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으면 또한 그와 함께 살 줄을 믿노니”(롬 6:5-6)


우리가 부활하기 위해서는, 다시 말해 그리스도의 부활과 연합되기 위해서는 그리스도의 죽음과 연합되어야 합니다. 오늘날 강단에서 부활을 이야기하기 좋아하고 구원을 이야기하기 좋아합니다. 그러나 그 이전에 무엇을 이야기해야 합니까? 그리스도의 죽음과 연합되는 것을 먼저 외쳐야 몸의 부활을 이야기할 수 있습니다. 먼저 그리스도의 죽음과의 연합이 없이는 결코 그리스도의 부활과의 연합도 없습니다.


그러면 그리스도의 죽음과 연합하는 것이 무엇입니까? 그것은 두 가지입니다.


① 우리의 옛사람이 죽음 - 중생


첫 번째로 단회적 사건으로서 십자가 안에서 나의 옛사람이 예수님과 함께 죽는 것을 말합니다. 성령님께서 시공간을 초월하여 역사하사 모든 성도들을 2000년전의 십자가 사건에 넣어주셔서 주님이 십자가에 못박혀 죽으실 때 같이 죽게 하십니다. 함께 죽을 때 무슨 일이 일어납니까? “나는 그때 이미 죽었다. 내가 지금 살아있는 것은 덤으로 주신 새생명이고 주님을 위한 생명이다. 더 이상 죄를 사랑하고 세상을 사랑하던 삶을 살 수 없다.” 그 고백이 나오는 것입니다. 즉 정과 육을 못 박고 옛사람과 단절합니다. 이것을 우리는 회개라고 말합니다. 이것이 구원입니다. 삭개오도 남의 것을 착취하던 옛사람을 못 박고 구원받았습니다. 이러한 주님의 죽음과의 연합은 경험하지 않았으면서, 회개와 변화된 삶과 옛사람과의 단절은 없으면서 부활을 기대하는 것은 헛된 소망일 뿐입니다. 그런데 재미있는 것은 우리가 주님과 함께 옛사람이 죽어야만 장차 주님의 부활과 연합하여 몸의 부활이 있게 되는 것인데, 그런데 그것만 있는 것이 아니라 나의 옛사람이 죽을 때, 동시에 주님의 부활생명이 곧바로 나에게 주어져서 새 생명으로, 부활생명으로 사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것을 중생이라고 말합니다. 이미 부활한 것입니다.


“(4)그러므로 우리가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세례를 받음으로 그와 함께 장사되었나니 이는 아버지의 영광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심과 같이 우리로 또한 새 생명 가운데서 행하게 하려 함이니라”(롬 6:4)


그런 점에서 중생을 우리가 1차 부활이라고 말합니다. 신자에게 부활은 1차 부활이 있고 2차 부활이 있습니다. 사망도 첫째 사망이 있고 둘째 사망이 있습니다. 첫째 사망은 육체가 하나님의 형벌로 죽는 것을 말하고, 둘째 사망은 그 죽었던 사람이 다시 새로운 몸으로 부활해서 이제는 몸과 영혼이 지옥에 떨어지는 것을 말합니다. 이 2중의 사망은 오직 불신자들에게만 있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부활에도 첫째 부활이 있고 둘째 부활이 있습니다. 이 이중의 부활은 반대로 신자에게만 있는 것입니다. 첫째 부활은 우리의 허물과 죄로 죽었던 영혼이 부활하는 것이고, 둘째 부활은 우리가 이 세상을 살다가 죽은 후에 주님의 재림의 때에 다시 신령한 몸을 덧입는 몸의 부활을 말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미 부활했고 아직 부활하지 않은 ‘이미’와 ‘아직 아니’의 긴장관계에 있는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우리가 이미 부활했다는 것이고, 우리 안에 부활생명, 곧 예수의 생명이 있다는 것입니다.


② 자기 부인 자기 십자가, 고난


그런데 이 부활생명은 날마다 땅에 있는 지체를 죽이는 삶과 주와 복음을 위해 고난 받는 삶 속에서만 풍성하게 누려질 수 있습니다. 즉 그리스도와 함께 신자가 죽는 것은 중생할 때 한번 죽는 것으로 끝이 아니라, 궁극적인 부활이 있을 때까지의 신자의 지상에서의 삶의 하나의 특징으로 자리 잡습니다. 이것이 그리스도의 죽음과 연합하는 두 번째 국면입니다. 신자는 바로 날마다 이 지속적인 자기부인과 십자가 고난을 통해서 부활생명을 충만히 누려갈 수 있을 뿐만 아니라, 궁극적인 부활에 이를 수가 있는 것입니다.


“(10)내가 그리스도와 그 부활의 권능과 그 고난에 참예함을 알려하여 그의 죽으심을 본받아(11)어찌하든지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에 이르려 하노니”(빌 3:10-11)

“(11)미쁘다 이 말이여, 우리가 주와 함께 죽었으면 또한 함께 살 것이요(12)참으면 또한 함께 왕 노릇할 것이요 우리가 주를 부인하면 주도 우리를 부인하실 것이라”(딤후 2:11-12)


날마다 십자가 지고 자기부인하면서 복음과 함께 고난 받으면... 그렇게 주님과 함께 죽었으면... 또한 주와 함께 사는 것입니다. 그 고난을 참으면 왕 노릇할 것입니다. 그러나 참지 못하고 고난을 회피한다면, 이것은 주를 부인하는 것으로서 결국 지옥 가는 것입니다. 성도의 견인교리를 부정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로 정신차리도록 하시기 위해서 경고하신 것입니다. 왜냐하면 부활의 영광에 이르는 길은 오직 주님의 죽으심과 연합을 통해서만 갈 수 있기 때문입니다. 단회적 연합과 더불어 고난에 동참하는 연합을 통해 부활에 이릅니다. 그래서 생명의 길은 좁고 협착하여 찾는 이가 적습니다.


오늘날 많은 신자들이 죽으려고 하지는 않으면서 부활에는 이르고 싶어 합니다. 이 세상에서도 누리고 건강하고 행복하게 살고 저 세상에서도 부활의 영광을 꿈꾸려고 합니다. 그것은 헛된 소망입니다. 매일 매일을 우리가 순교의 정신으로 살지 않으면 우리에게 영광도 없다고 생각해야 합니다. 이 바울의 정신을 본받아서 매일매일 죄를 죽이고, 주를 위해 희생하고 헌신하고 복음과 함께 고난 받아야 합니다.


다시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을 보십시오.


답 : 이 생명이 끝나는 즉시 나의 영혼은 머리되신 그리스도에게 올려질 것입니다. 또한 나의 이 몸도 그리스도의 권능으로 부활하게 될 것입니다. 그래서 나의 몸은 다시 나의 영혼과 결합되어 그리스도의 영광스러운 몸과 같이 될 것입니다.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은 신자의 몸의 부활을 이야기하면서 일단 부활하기 전의 중간상태를 설명합니다. 죽음은 우리 존재의 없어짐이 아니라, 몸과 영혼의 분리입니다. 몸은 땅에 썩고 영혼은 즉시로 예수님의 품에 안깁니다.


“(21)이는 내게 사는 것이 그리스도니 죽는 것도 유익함이니라(22)그러나 만일 육신으로 사는 이것이 내 일의 열매일진대 무엇을 가릴는지 나는 알지 못하노라(23)내가 그 두 사이에 끼였으니 떠나서 그리스도와 함께 있을 욕망을 가진 이것이 더욱 좋으나”(빌 1:21-23)


육신을 떠나고 이 세상을 떠나야 그리스도와 비로소 함께 있게 됩니다. 그러면 지금 몸을 입고 이 세상에 있으면 그리스도와 함께 있지 않는다는 말입니까? 아닙니다. “내게 사는 것이 그리스도니”라고 하여 이미 그리스도께서 내 안에 계신다고 고백합니다. 그러나 몸과 영혼의 완전한 분리가 있기 전까지 이 몸을 입고 있는 동안에는 그리스도와의 연합을 온전히 경험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몸은 그냥 살덩어리가 아니라 죄의 본성에 찌들어 있는 몸입니다. 이 몸이 끊임없이 우리의 성화를 방해하고 그리스도와의 교제를 방해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바울은 그리스도와의 연합을 누리기 위해서는 몸의 행실을 죽여야 한다고 말하고, 땅에 있는 지체를 죽이라고 말하고, 육체를 쳐서 복종시켜야 한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몸의 소욕을 자신에게서 자꾸 끊어낼 때, 비로소 주님과의 연합을 누릴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럴지라도 언제나 육신을 입고 있는 한 거기에는 한계가 있습니다. 그래서 탄식하는 것이죠. 빨리 이 죄악된 몸을 벗기를 원하는 것입니다. 육신의 장막을 벗으면 주님과 온전히 함께 있게 됩니다. 그러나 이 중간상태도 우리의 궁극적인 소망이 될 수 없습니다. 물론 중간상태도 완전한 복된 상태이지만, 영혼만 있어서는 사람이라고 할 수 없는 것입니다. 신령한 몸을 덧입어서, 온전한 사람이 되어 그리스도와 온전히 함께 하는 것... 이것이 우리의 궁극적인 소망입니다. 이때 신령한 몸은 이전의 죄악된 몸과는 달리 주님과의 교제를 전혀 방해하지 않고 오히려 더 완전하게 누리게 하는 몸인 것입니다. 이 몸으로 갈아입는 것을 성경은 몸의 구속이라고 말합니다.


“(23)이뿐 아니라 또한 우리 곧 성령의 처음 익은 열매를 받은 우리까지도 속으로 탄식하여 양자 될 것 곧 우리 몸의 구속을 기다리느니라(24)우리가 소망으로 구원을 얻었으매 보이는 소망이 소망이 아니니 보는 것을 누가 바라리요(25)만일 우리가 보지 못하는 것을 바라면 참음으로 기다릴지니라”(롬 8:23-25)


탄식하며 몸의 구속을 기다립니다. 왜요? 이 몸을 입고 있는 한은 주님과의 연합을 온전히 누릴 수 없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은 부활을 소망합니까? 소망한다면 왜 소망합니까? 강하고 병들지 않고 영원히 사는 불사의 몸으로 사는 것 때문에 부활을 소망합니까? 그것은 참된 소망이 아닙니다. 부활을 소망하는 이유는 단 하나입니다. 죽음을 통해서만 이 죄악 된 몸을 벗어버릴 수 있고, 부활을 통해서만 신령한 몸을 입어서 온전히 주님과 연합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즉 부활자체가 소망이 아니라 주님과의 온전한 연합이 소망인 것입니다. 신앙이 어리면 이것을 잘 모르지만 신앙이 성숙할수록 무엇을 깨닫느냐 하면, 그리스도와의 연합이 나의 전부라는 것을 깨닫습니다. 그것만이 내 행복이요 즐거움임을 깨닫습니다.


“(7)그러나 무엇이든지 내게 유익하던 것을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다 해로 여길뿐더러(8)또한 모든 것을 해로 여김은 내 주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함을 인함이라 내가 그를 위하여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배설물로 여김은 그리스도를 얻고(9)그 안에서 발견되려 함이니 내가 가진 의는 율법에서 난 것이 아니요 오직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은 것이니 곧 믿음으로 하나님께로서 난 의라”(빌 3:7-9)


사도바울은 예수 그리스도 만나고 그분의 영광을 체험했을 때, 그는 무한히 아름다우신 예수님께 완전히 매료되었습니다. 그렇게 되니깐 이전에 자신이 아름답다고 생각하고, 좋다고 여기고, 가치 있고 유익하다고 생각하면서 열심히 추구하고 쌓아왔던 자신의 모든 공적들이 이제는 다 배설물로 여겨지는 것입니다. 세상 사람들은 돈과 행복과 즐거움과 가족과 건강과 자신이 쌓아온 종교적인 공적들, 명예를 전부라고 생각하고, 이런 것을 잃어버리면 죽는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신자들은 이런 것들을 잃어버리는 것이 온전히 그리스도를 얻는 기회라고 생각합니다. 잃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이 땅의 모든 것을 다 잃을지라도 그리스도를 얻음으로 다 얻은 것이기 때문입니다. 죽음은 잃어버리는 것이 아니라 전부를 얻는 것임을 알기에 죽음을 두려워아니합니다.


지금 “그리스도를 얻는다”는 표현과 “그리스도 안에서 발견된다”는 표현은 바로 죽음과 부활을 통해 주님과 온전히 연합하는 것을 말합니다. 그것을 목표로, 소망으로 삼아 어떤 삶을 살아갑니까? 그 이후의 구절을 보십시오.


“(10)내가 그리스도와 그 부활의 권능과 그 고난에 참예함을 알려하여 그의 죽으심을 본받아(11)어찌하든지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에 이르려 하노니”(빌 3:10-11)


그 부활을 목표로 이 땅에서 주와 복음을 위해 고난 받는 삶을 살아가는 것입니다. 참으로 이 세상에서 살고자 하는 자는 죽고, 이 땅에서 주를 위해 죽고자 하는 자는 사는 것입니다. 그리고 계속해서 보십시오.


“(12)내가 이미 얻었다 함도 아니요 온전히 이루었다 함도 아니라 오직 내가 그리스도 예수께 잡힌바 된 그것을 잡으려고 좇아가노라”(빌 3:12)


그렇게 날마다 주를 위해 죽음에 넘겨지는 삶을 살면서도 완전히 죽을 때까지는 그것을 멈추지 않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때 사도바울은 무엇을 잡으려고 끝까지 좇아갑니까? “그리스도 예수께 잡힌바 된 것”을 잡으려고 끝까지 좇아갑니다. 이것 역시 그리스도와의 연합을 말합니다. 지금 그 연합을 누리고 있지만 완전히 누리는 것을 목표로 해서 신앙의 길을 달려가는 것입니다. 어떤 영화의 한 명대사처럼 끝날 때 까지는 끝난 게 아닌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과 함께 죽으면 주님과 함께 다시 살 것을 믿음으로 소망하면서 죽음의 길로 계속해서 가는 것입니다. 계속해서 보시면...


“(13)형제들아 나는 아직 내가 잡은 줄로 여기지 아니하고 오직 한 일 즉 뒤에 있는 것은 잊어버리고 앞에 있는 것을 잡으려고(14)푯대를 향하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이 위에서 부르신 부름의 상을 위하여 좇아가노라”(빌 3:13-14)


여기서 부름의 상이 무엇입니까? 예수 그리스도와의 연합입니다. 그리스도 자체가 우리에게 주시는 최고의 상급입니다. 그리고 이것이 신자의 소망입니다. 이것이 전부가 아닌 자는 절대로 이 세상에서 육신을 입고 있는 것으로 인해서 탄식하지도 않고 몸의 구속을 소망하지도 않습니다. 빨리 죽고 싶어 하지 않고 어찌하든지 건강하게 오래 살려고 합니다. 절대로 이 땅에서 그리스도의 죽음에 동참하려고 하지 않습니다. 그리스도를 얻는 것이 자신에게 전부가 아닌 사람은 참되게 예수님을 만난 사람이라고 할 수 없습니다. 이 시간 우리 자신을 돌아보십시다. 우리는 어떤 삶을 살고 있고, 무엇을 소망하며 살고 있습니까? 우리가 참으로 이 말씀 앞에서 회개해야 합니다. 그리스도와 함께 죽고 살아난 신자는 이 땅을 소망하면 안 되고 위엣 것을 소망하면서, 그리고 땅에 있는 지체를 죽이며 살아야 합니다.


그러므로 신자에게 있어서 가장 복된 소망이며 참된 소망은 이 육신의 장막을 하루속히 벗어서, 하늘에서 내려오는 처소를 덧입고 주님과 같이 영광스럽게 되어서 주님과 온전히 연합하는 그것입니다. 주님과 함께 영광을 누리며 왕 노릇하며 사는 것, 이것이 신자의 유일한 소망입니다.


2. 영생


이어서 영생에 대해서 살펴보겠습니다.


58문 : 영원한 생명은 당신에게 어떠한 위로를 줍니까?

답 : 지금도 나는 내 마음속에서 영원한 기쁨이 시작되었다는 것을 경험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 세상에서의 삶을 마친 다음에 나는 완전한 복락을 누리게 될 것입니다. 그 복락은 어떤 사람도 자기의 눈으로 보지 못하고, 귀로도 듣지 못하고, 또한 마음으로도 생각하지 못했던 것입니다. 그리고 그 복락을 누리면서 나는 하나님을 영원히 찬양할 것입니다.


“(3)영생은 곧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그의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니이다”(요 17:3)


위의 구절에서 보는 것처럼 영생이란 성령 하나님 안에서 성부 하나님과 성자 하나님을 아는 것입니다. 부부가 서로 체험적으로 아는 것처럼 부부관계와 같은 긴밀한 관계를 맺고 삼위 하나님과 연합하는 것이 바로 영생입니다. 그리고 그 관계 안에서 사는 것이 영생입니다. 영원히 사는 것이 영생이라면 지옥에 있는 사람들도 영생하는 것입니다. 단순히 시간적으로 영원히 사는 것은 불멸입니다. 물론 영생이 영원이라는 시간 개념을 배제 하지는 않지만, 그러나 그 영생의 핵심은 하나님과의 관계, 교제를 말하는 것입니다. 삼위 하나님과의 연합이 곧 영생입니다.


“(54)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자는 영생을 가졌고 마지막 날에 내가 그를 다시 살리리니(55)내 살은 참된 양식이요 내 피는 참된 음료로다(56)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자는 내 안에 거하고 나도 그 안에 거하나니(57)살아 계신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시매 내가 아버지로 인하여 사는 것같이 나를 먹는 그 사람도 나로 인하여 살리라”(요 6:54-57)


주님의 살과 피를 먹음으로써, 곧 예수님을 먹음으로써 예수님이 내안에 들어오시는 것입니다. 십자가의 은혜 아래서 주님의 사랑을 깊이 깨닫고 주님과 연합한 것을 말합니다. 그러한 사귐이 바로 영생입니다. 주님과 연합하여 교제 나누는 것은 꼭 어떤 필(feel)이 오고 느낌이 오는 것만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오늘 밤에 하나님이 내 손을 잡아주신 것 같았어요...” 이런 신비적인 느낌만을 교제라고 생각하지 마십시오. 성삼위 하나님과의 교제의 핵심은 계명을 지키는 것입니다.


“(9)아버지께서 나를 사랑하신 것같이 나도 너희를 사랑하였으니 나의 사랑 안에 거하라(10)내가 아버지의 계명을 지켜 그의 사랑 안에 거하는 것같이 너희도 내 계명을 지키면 내 사랑 안에 거하리라”(요 15:9-10)


계명을 지킴으로 주님과의 신령한 교제를 나눕니다. 계명은 성경전체의 가르침을 말합니다. 그래서 성경말씀을 사랑하고 그 가르침을 기쁨으로 수납하며 순종하며 사는 것을 자신의 즐거움으로 삼는 삶이 영생입니다. 그런데 그 계명 중에서도 특히 새 계명을 지키며 사는 것이 영생입니다.


“(14)우리가 형제를 사랑함으로 사망에서 옮겨 생명으로 들어간 줄을 알거니와 사랑치 아니하는 자는 사망에 거하느니라”(요일 3:14)


형제를 사랑하며 사는 것이 영생입니다. 반대로 용서하지 않고 사랑하지 않는 것이 지옥이요 사망입니다. 다시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을 보십시오.


답 : 지금도 나는 내 마음속에서 영원한 기쁨이 시작되었다는 것을 경험하고 있습니다...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은 영생을 이미 누리게 되었음을 말합니다. 여러분은 영생을 이미 누리고 있습니까? 주의 계명대로 살아가는 것을 영원한 즐거움으로 느끼고 형제를 사랑하며 살아가고 있습니까? 만일 우리가 기도생활이 괴롭고 말씀도 재미없고 주일을 지키는 것도 그냥 안하면 안 되니까 하고... 그렇다고 한다면 주님과의 교제가 기쁘지 않은 사람입니다. 이것은 정말 심각한 것입니다. 그러할 때 그가 지키는 모든 신앙의 의무들은 교제가 아니라 율법입니다. 사귐이냐 율법이냐를 결정하는 기준은 그것을 기쁘고 즐겁고 자원하는 마음으로 하느냐, 의무적으로 억지로 하느냐 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영생은 성령 안에서 의와 평강과 희락이기 때문입니다. 신약교회의 특징은 기뻐하고 즐거워하는 것입니다. 신앙생활이 신이 나고 재미가 있어야 합니다. 말씀을 배워감에 있어서 기쁨과 즐거움이 있어야 합니다. 그것이 영생입니다.


생각해보십시오. 영생의 완성이 결국 영원한 천국에서 이루어지는데, 이 땅에서 주님과 교제하는 것이 지루하고 따분하고 고통스럽고 설교를 한 시간이상하면 졸거나 몸이 비틀거리고... 그러는 사람이 천국가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천국가면 영원히 그렇게 살아야 합니다. 매일 찬양하고 기도하고 예배하면서 살아야 합니다. 아마 그 사람은 견디다 못해 “지옥에 보내주세요.”라고 말할 것입니다. 그 사람에게는 천국이 지옥인 것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이런 질문을 합니다. “천국가면 맨날 예배만 하고 찬양만 드린다는데... 재미없어서 어떻게 사나?... 강남스타일 노래도 듣고, 춤도 추고, 포카 하고, 당구 같은 거 안 하나? 축구도 하고 농구도 하고 싶은데.. 그런 거 없으면 지루하고 재미없어서 어떻게 사나?” 이렇게 생각하는 사람들은 그 마음에 영생이 없기 때문에 그런 것입니다. 지금 이 땅에서 예수님과의 사귐이 없다는 것입니다. 예수님과 사귐, 예수님과의 연합을 누리는 것이 전부가 아닌 사람인 것입니다. 예수님과 교제 나누는 것이 얼마나 달콤하고 감미로운지 모르는 것이죠. 신앙생활이 재미없고 지루하다는 것은 지금 그 안에 영생이 없다는 증거입니다. 이 땅에서 영생이 없는 사람은 죽어서도 영생이 없습니다. 영원한 영생은 이 땅에서 이미 영생을 누리고 있는 자만 들어갈 수 있습니다. 지금 나에게 영생이 있느냐 없느냐 하는 것은 간단하게 판단해낼 수 있습니다. 그 시금석은 이 땅에서의 삶이 즐거우냐 아니면 주님과의 교제가 즐거우냐 하는 것입니다. 속히 이 육신을 벗어나서 주님과 온전하게 연합하고 싶습니까?


이 땅에서 하나님의 말씀이 재미없고 세상의 것들이 재미있는 사람이 가는 곳이 지옥입니다. 반대로 세상의 것들이 재미없지만, 하나님의 말씀을 사랑하고 순종하는 것은 즐거운 사람들이 가는 곳이 영생입니다. 하나님은 각 사람이 가고 싶은 데로 가게 해주십니다.


답 : 지금도 나는 내 마음속에서 영원한 기쁨이 시작되었다는 것을 경험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 세상에서의 삶을 마친 다음에 나는 완전한 복락을 누리게 될 것입니다. 그 복락은 어떤 사람도 자기의 눈으로 보지 못하고, 귀로도 듣지 못하고, 또한 마음으로도 생각하지 못했던 것입니다. 그리고 그 복락을 누리면서 나는 하나님을 영원히 찬양할 것입니다.


영원한 새 하늘과 새 땅에서 보고 누리게 될 것은 우리가 상상하지도 못한 것입니다.


“(9)기록된바 하나님이 자기를 사랑하는 자들을 위하여 예비하신 모든 것은 눈으로 보지 못하고 귀로도 듣지 못하고 사람의 마음으로도 생각지 못하였다 함과 같으니라”(고전 2:9)


완전한 복락을 누린다고 하였습니다. 그런데 복락 하면 사람들은 무엇을 떠올립니까? 온통 보석이 있고 화려한 집에서 영원히 슬픈 것도 없고 아픈 것도 없고 정말 행복하게 영원히 풍요와 번영을 누리며 사는 것을 떠올립니다. 그런 복락을 기대합니까? 만일 그런 것을 기대했다면 그것은 앞서 나온 “천국가면 지루해서 어떻게 살아요?”라고 하는 질문과 똑같은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러한 복락은 우리가 이 세상 살면서 기대한 것 아닙니까? 그런데 세상이 그것을 줄 수 없으니깐 그것을 천국에서 기대하는 것입니다. 세상의 즐거움을 천국에서 기대하는 것입니다.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에서 말하는 복락은 삼위 하나님과 함께 하고 삼위 하나님을 영원히 찬양하며 예배하는 것입니다. 하나님 자체가 나에게 복이요 상급입니다. 물론 보석이 있고 화려한 집에 영원히 슬픈 것도 없고 아픈 것도 없고 말할 수 없는 풍요와 번영을 누립니다. 그러나 그것은 어디까지나 옵션입니다. “꽃보다 남자”라는 드라마를 보면, 주인공 남자가 배경이 장난이 아닙니다. 대기업 사장 아들이죠. 그것은 마치 남자가 화려하고 예쁜 꽃을 들고 있는 것과 같습니다. 그런데 여자가 그 꽃을 보고서 그 꽃을 갖고 싶어서 그 남자를 좋아하고 그 남자를 좇아다닌다고 한다면, 그것은 매우 이기적인 사랑입니다. 그런데 드라마를 보면 여자 주인공이 꽃 때문에 그 남자를 좋아하는 게 아니라, 그 남자 자체를 좋아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드라마 제목이 “꽃보다 남자”입니다. 그리고 남자 자체를 사랑하는 가운데서 그 남자가 선물로 주는 꽃을 받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하나님이 우리에게 이 모든 것을 주시지만, 그러나 그때가 되면 아마 하나님밖에 안 보일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먼저 각자 예수님을 인격적으로 만나고 진정으로 예수님의 영광을 체험해야 합니다. 이 일이 있기 전까지 인간은 절대로 내가 우주의 중심이고, 내 행복이 최고라고 하는 자기 아상(我想)을 절대로 포기하지 않습니다. 오직 십자가 은혜를 깊이 깨닫고 주님의 은혜의 영광과 아름다움을 알게 될 때, 그래서 그분께 매료될 때, 비로소 이 세상의 것들이 다 배설물로 여겨지고, 주님과 연합하는 것이 내 인생의 전부가 되는 것입니다. 그래야지만 이 땅에서 이미 영생을 누리는 삶을 살 수 있고, 궁극적으로 있을 영원한 영생을 참으로 소망하면서 살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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