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단축키

Prev이전 문서

Next다음 문서

크게 작게 위로 아래로 댓글로 가기 인쇄
?

단축키

Prev이전 문서

Next다음 문서

크게 작게 위로 아래로 댓글로 가기 인쇄
Extra Form
설교자 최상범
78-79문
문답내용 78문 : 그렇다면 떡과 포도주는 그리스도의 실질적인 몸과 피로 변합니까?
답 : 아닙니다. 세례의 물이 그리스도의 피로 변하는 것도 아니고 세례의 물 자체가 죄를 씻어주는 것도 아니며, 단지 죄 씻음에 대한 하나님이 주신 표와 확증인 것처럼, 성찬의 거룩한 떡도 그리스도의 실제 몸으로 변하는 것이 아닙니다. 거룩한 떡을 그리스도의 몸이라고 하는 것은 성례의 본질을 나타내는 성례적 용어입니다.

79문 : 그렇다면 왜 그리스도는 그 떡을 자신의 몸이라고 말씀하셨습니까? 또한 그 잔을 자신의 피, 또는 자신의 피로 세우는 새 언약이라고 말씀하십니까? 그리고 왜 사도바울은 (그 떡을 먹고 그 잔을 마시는 것을) 예수 그리스도의 몸과 피에 참여하는 것이라고 말합니까?
답 : 그리스도께서 그렇게 말씀하신 데에는 중요한 이유가 있습니다. 마치 떡과 포도주가 육신의 생명을 유지시키듯이, 십자가에 달리신 그의 몸과 흘리신 피가 우리 영혼을 영생으로 이끄는 참된 양식과 음료라는 사실을 가르치려 하셨습니다. 더 나아가서 그리스도께서는 눈으로 볼 수 있는 이러한 표와 보증으로써 우리에게 다음을 확신시키려 하셨습니다. 첫째, 우리가 그리스도를 기념하면서 이 거룩한 표들을 육신의 입으로 받아먹는 것처럼 실제로, 성령님의 역사에 의해 우리가 그의 참된 몸과 피에 참여합니다. 둘째 그리스도의 모든 고난과 순종이 확실하게 우리의 것이 되어, 마치 우리 자신이 직접 모든 고난을 당하고 우리의 죗값을 하나님께 치른 것과 같습니다.
강설날짜 2014-05-11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 제29주(78-79문)

 

성령님을 통해 성찬에 임재하시는 그리스도

 

요절 : 마 26:26-28

 

78문 : 그렇다면 떡과 포도주는 그리스도의 실질적인 몸과 피로 변합니까?
답 : 아닙니다. 세례의 물이 그리스도의 피로 변하는 것도 아니고 세례의 물 자체가 죄를 씻어주는 것도 아니며, 단지 죄 씻음에 대한 하나님이 주신 표와 확증인 것처럼, 성찬의 거룩한 떡도 그리스도의 실제 몸으로 변하는 것이 아닙니다. 거룩한 떡을 그리스도의 몸이라고 하는 것은 성례의 본질을 나타내는 성례적 용어입니다.

 

79문 : 그렇다면 왜 그리스도는 그 떡을 자신의 몸이라고 말씀하셨습니까? 또한 그 잔을 자신의 피, 또는 자신의 피로 세우는 새 언약이라고 말씀하십니까? 그리고 왜 사도바울은 (그 떡을 먹고 그 잔을 마시는 것을) 예수 그리스도의 몸과 피에 참여하는 것이라고 말합니까?
답 : 그리스도께서 그렇게 말씀하신 데에는 중요한 이유가 있습니다. 마치 떡과 포도주가 육신의 생명을 유지시키듯이, 십자가에 달리신 그의 몸과 흘리신 피가 우리 영혼을 영생으로 이끄는 참된 양식과 음료라는 사실을 가르치려 하셨습니다. 더 나아가서 그리스도께서는 눈으로 볼 수 있는 이러한 표와 보증으로써 우리에게 다음을 확신시키려 하셨습니다. 첫째, 우리가 그리스도를 기념하면서 이 거룩한 표들을 육신의 입으로 받아먹는 것처럼 실제로, 성령님의 역사에 의해 우리가 그의 참된 몸과 피에 참여합니다. 둘째 그리스도의 모든 고난과 순종이 확실하게 우리의 것이 되어, 마치 우리 자신이 직접 모든 고난을 당하고 우리의 죗값을 하나님께 치른 것과 같습니다.

 

오늘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은 그 당시 뜨거운 감자였던 성찬론 논쟁에 대한 개혁파의 답변을 보여줍니다. 78-79문은 사실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에서 매우 중요한 부분입니다. 팔츠 연방의 프리드리히 3세가 이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을 만들려고 했던 중요한 이유 중의 하나도 바른 개혁파의 성찬론을 정립하고자 하는 목적이 있었음을 우리는 서론에서 이미 배웠습니다.


물론 오늘날에는 성찬론에 대한 논쟁도 없고, 사람들도 성찬론에 대해 별로 관심을 기울이지 않기 때문에, 이러한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의 세례나 성찬에 대한 장황한 설명들이 선뜻 이해가 안 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니 그렇기 때문에 더더욱) 이 논쟁점은 오늘날 우리에게도 매우 의미 있고 중요한 것입니다.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이 성례에 대해서 이렇게 많은 문답을 할애해서 중요하게 가르쳐주는 것은 오늘날 세례나 성찬에 대해서 별로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는 우리들에게 다시금 세례와 성찬의 의미와 중요성을 일깨워주는 중요한 의의가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부분이 우리의 신앙생활에 매우 중요한 부분임을 다시 한 번 각인하면서 바른 성찬론을 정립해야 할 것입니다. 이 떡과 포도주가 주님의 살과 피라고 했는데 어떤 점에서 주님의 살과 피인지, 이것을 분명히 알아야 성찬에 바르게 참여하여 풍성한 은혜를 받을 수 있는 것입니다. 반대로 이것을 잘못 이해하면 성찬식은 그냥 아무런 은혜도 없는 무미건조한 의식이 되는 것입니다. 또는 로마가톨릭처럼 잘못 생각하면 아주 치명적인 우상숭배가 될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이 문제는 절대로 사소한 문제가 아닙니다.


그러면 일단 이 성찬에 대한 로마가톨릭의 주장을 살펴보겠습니다. 로마가톨릭은 사제가 떡과 포도주에 축성을 하게 되면 그 축성하는 순간, 이 떡과 포도주는 정말 주님의 살과 피로 변한다고 주장합니다. 그래서 그것을 먹는 자는 실제로 물리적으로 예수님의 몸을 먹고 피를 마시는 것이 되어서 반드시 영생을 얻는다고 주장합니다. 이것을 우리가 화체설(化體說, transubstantiation)이라고 말하는데요, 이러한 관점이 어떻게 성립될 수 있었는지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성찬을 제정하실 때 하신 말씀, 떡을 떼시면서 “이것은 내 몸이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초대교회 신자들은 이 떡이 어떻게 예수님의 몸인가 하는 것을 깊이 있게 생각하지 않고, 그냥 성찬식을 행했습니다. 그러나 점차로 이것이 어떻게 예수님의 몸인가 하는 것에 대해서 고민하고 논쟁이 되기 시작했습니다. 이것을 아주 탁월하게 해결한 사람이 13세기의 토마스 아퀴나스라고 하는 사람입니다. 물론 성경적으로 해결한 것은 아니지만, 정말 반론의 여지가 없게끔 깔끔하게 결론지었습니다. 그것이 결국 화체설인데, 토마스 아퀴나스 이후부터는 종교개혁 전까지 모든 사람들이 성찬에 대해서 다 이렇게 생각했습니다.


토마스 아퀴나스는 성찬식을 설명하기 위해서 아리스토텔레스의 철학을 차용하였습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이 세상의 모든 사물이 두 가지 구성요소로 이루어져 있다고 주장했습니다. 하나는 눈에 보이고 만져지는 물질적이고 물리적인 것으로서, 그것을 ‘질료’(mater)라고 불렀습니다. 그리고 또 하나는 “그것을 그것 되게 하는 것”으로서 본질(또는 본체, 형상)이라고 불렀습니다. 그래서 떡을 생각할 때, 이 물리적인 떡은 쌀, 수분, 설탕 등의 여러 가지 재료의 분자구조들로 구성이 되어 있는데, 그러한 것들이 다 떡의 질료를 이룹니다. 떡의 질료는 눈으로 보이고, 만져지고, 떡 맛이 나게 하는 물리적인 요소를 말합니다. 보통 사람들은 이 떡의 질료만 보고 질료만 생각하는데, 아리스토텔레스는 거기다가 하나 더 보태어서 ‘본질’이라는 것이 있다고 주장한 것입니다. 그리고 그 본질이 더 중요한 요소라는 것입니다. 마치 우리의 몸은 그저 껍데기일 뿐이고 우리의 영혼이 우리의 본질을 구성하듯이, 그렇게 떡을 진정으로 떡 되게 하는 것이라는 본질이 떡 안에 있다는 것입니다. 이 본질은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이지만, 그 사물의 본질적인 구성요소입니다. 그래서 떡이라고 할 땐, 이 떡의 질료만 있는 것이 아니라 떡을 진정으로 떡 되게 하는 본질도 함께 있는 것입니다. 떡 뿐만 아니라 포도주도 마찬가지이고 이 세상의 모든 것들이 다 질료와 본질로 구성되어 있다고 주장합니다. 바로 이러한 아리스토텔레스의 철학개념을 토마스 아퀴나스는 성찬식을 설명하는데 사용하는 것입니다. 토마스 아퀴나스의 주장은 이렇습니다. 우리가 성찬식을 행할 때 떡과 포도주는 각각 질료와 본질로 구성되어 있는데, 사제가 그 떡과 포도주에 축성을 하게 되면 그 순간 떡의 본질이 예수님의 살의 본질로 변화되고, 포도주의 본질이 예수님의 피로 변화된다는 것입니다. 물론 떡의 질료는 떡의 질료 그대로 있기 때문에 모양이나, 촉감이나, 맛은 일반 다른 떡과 다를 바 없습니다. 축성했다고 해서 떡이 살맛이 나는 게 아닙니다. 포도주가 피 맛이 나는 게 아닙니다. 일반적인 떡과 포도주와 동일합니다. 그러나 눈에 보이지 않는, 그것을 그것 되게 하는 본질이 예수님의 살과 피로 변화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겉만 보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 본질을 보라는 것입니다. 축성한 떡은 더 이상 일발적인 떡이 아니라 진짜 예수님의 몸이라는 것입니다. 축성한 포도주도 일반적인 포도주가 아니라 진짜 예수님의 피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렇게 본체가 바뀌었다고 해서 화체설(transubstantiation)이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렇게 되면 이제 여러 가지 문제가 발생합니다.


만일 성찬을 행하기 위해서 떡을 떼다가 부스러기가 떨어지면, 그리고 그것을 쥐가 와서 먹게 되면, 쥐가 예수님의 몸을 먹게 되는 것입니다. 부스러기가 절대로 떨어지면 안 되는 것이죠. 그래서 로마가톨릭은 부스러기가 없게 하기 위해서 웨이퍼(wafer, 웨하스)라는 밀떡 조각을 만들어서 성찬식을 행합니다. 한 떡에서 떼어야 하는데, 미리 떼어서 나눠주는 것입니다. 이것은 벌써 성찬식의 중요한 한 가지 의미를 훼손해버린 것입니다.


그리고 똑같은 일은 포도주에서도 발생합니다. 예를 들어서 포도주를 따르다가 그것을 땅에다가 흘리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아니면 그것을 엎지르거나 쏟아버리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큰일 나는 것입니다. 빵의 부스러기는 주어먹으면 되지만, 포도주는 흘리면 주워 먹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전해 내려오는 이야기에 의하면 옛날에는 그렇게 흘리면 사제들이 혀로 다 핥아먹었다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그래서 그런 일이 있을까봐 포도주는 아예 평신도한테는 주지 않고, 신부가 대표로 혼자서 다 마십니다. 평신도는 오직 성찬식 때 떡만 먹습니다. 그 떡을 성체라고 말하고, 그 떡을 먹는 것을 영성체(성체를 영접한다는 의미)라고 말합니다. 그래서 그들에게 성찬식은 영성체(또는 성체성사)를 말하는 것입니다. 물론 그들은 떡이 예수님의 실제 몸이기 때문에 그 몸 안에는 예수님의 피가 포함되어 있다는 논리를 펼칩니다. 떡으로도 충분하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그들만의 논리일 뿐 전혀 성경적이지 않습니다.


왜 주님께서 떡으로만 기념하도록 안하시고 떡과 포도주, 이 두 가지로 기념하게 하셨습니까? 그것은 분명한 이유가 있는 것입니다. 그것은 성경의 용례를 잘 보여주는 것입니다. 성경은 생명을 말할 때 이원화해서 피와 살로 자주 언급합니다. 그래서 희생 제사를 드릴 때도 제물의 희생이 두 가지 측면에서 진행되는 것입니다. 먼저는 제물의 목을 따서 피를 흘려 단에 뿌립니다. 레위기 17:10-11에 보면 생명은 피에 있기 때문에, 이 흘려진 피가 죄를 속한다고 말씀합니다. 그런데 희생제사는 그것으로 끝이 아니라 이번에는 살점을 찢고 조각내어서 그것을 불에 태워 하나님께 드리는 것입니다. 피를 흘리고 살을 찢어 태우는 이중적인 의식을 통해서 희생제물의 죽음이 어떻게 보면 참혹하게 표현되는 것입니다. 떡과 포도주 두 요소로 기념하게 하신 이유도 바로 예수님의 십자가의 죽음이 구약의 희생제사의 성취로서 우리를 위해 피를 흘리시고 몸이 찢기셨음을 표하도록 하신 것입니다. 몸과 피의 분리가 바로 참혹한 예수님의 희생을 보여줍니다. 더군다나 이것이 우리가 밥만 먹으면 되는 것이 아니라, 물도 마셔야 살 수 있는 것과 딱 맞아 떨어집니다. 그래서 주님의 살은 우리의 참된 양식이고 피는 우리의 참된 음료인 것입니다. 그래서 이러한 의미를 받들어서 우리는 떡과 포도주로 기념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로마가톨릭은 자기네 식의 이상한 논리로 이 명령을 불순종합니다.


뿐만 아니라 떡의 본질이 예수님의 몸이니깐, 그 떡을 받는데, 그냥 받을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무릎을 꿇고 받고, 씹어서는 안 되며 녹여 먹어야 합니다. 성찬하고 남은 것은 주님의 몸이니깐 잘 보관해야 합니다. 성체 보관함에 넣어서 썩지 않도록 잘 보관합니다. 미사 때 사람들이 성당에 들어가기 전에 성모 마리아 상이나 예수님 십자가 상 앞에서 절하는 것을 볼 수가 있는데, 그것은 그 동상에다 절하는 것이 아니라, 그 동상 뒤에 있는 성체 보관함에다가 절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 성체 보관함에는 예수님의 몸이 들어있기 때문이죠. 그리고 부활절이 되면, 성체 보관함을 열고 그것을 들고 동네 한 바퀴를 돕니다. 종교적인 동네는 그 행사를 성대하게 치룹니다. 그것이 지나갈 때 모든 동네 사람들이 무릎을 꿇고 그 앞에 절합니다. 이것은 성찬의 요소 자체를 숭배하는 우상숭배가 됩니다.


그래서 종교개혁자들이 종교개혁을 하면서 이것에 대해서 문제를 제기한 것입니다. 우리 선배들이 기본적으로 문제제기 했던 것은 이것이 우상숭배라는 것입니다. 질료 안에 본질이 있다는 생각 때문에, 결과적으로 그 떡과 포도주 자체를 숭배하게 된다 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칼빈은 떡과 포도주 앞에서 무릎 꿇는 것을 없앴습니다. 이참에 아예 예배 가운데서 무릎 꿇는 것을 없앴습니다. 옛날에는 기도할 때마다 무릎을 꿇었는데, 칼빈은 예배 시간에 무릎 꿇는 것을 다 없애고, 대신에 영혼의 무릎을 꿇어야 함을 주장했습니다. 이 세상의 모든 종교들이 육체적인 경건의 모양(절하고 엎드리고 무릎 꿇고... 등)으로 신을 예배하지만 기독교는 그렇지 않다는 것입니다. 우리의 예배는 영으로 드리는 것이기에 그 정신을 살려서 모든 육체적인 숭배의 관습들을 없앴습니다.


그리고 두 번째로 종교개혁자들은 공통적으로 은혜의 방도에 대한 로마 가톨릭의 입장을 비판했습니다. 교회나 성례가 주된 은혜의 방도가 아니라 말씀이 은혜의 주된 방도라는 것입니다. 즉 성례는 말씀을 떠나서는 아무런 의미가 없으며, 성례는 사실상 가시적인 말씀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종교개혁자들은 ‘오직 성경’을 외치며, 성례중심의 로마가톨릭을 개혁해서 말씀 중심의 교회를 회복하고자 노력했습니다. 그래서 성례를 행할 때도 그냥 행하면 안 되고 항상 말씀과 기도가 곁들여져야 합니다. 성례의 의미를 설명해주고 또 은혜주시기를 위해서 기도해야 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은혜의 방도는 다 연결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안타까운 일은 그렇게 로마가톨릭의 성찬론이 잘못되었다는 것은 다 공통적으로 인정했는데, 그러면 이제 성찬을 성경적으로 어떻게 이해해야 할 것인가 하는 문제에 대해서는 루터와 칼빈과 쯔빙글리 사이에 일치를 보지 못한 것입니다.


루터는 로마가톨릭이 잘못되었다고 생각하면서, 또 한편으로는 쯔빙글리처럼 그냥 기념설을 주장하는 것에 대해서도 반대했습니다. 그 중간에 어떤 입장을 취해야 하는데, 그것이 잘 설명이 안 되니깐 결국에는 토마스 아퀴나스의 견해를 약간 수정하는 입장을 취하고 말았습니다. 루터는 공재설을 주장했는데, 공재설은 사실 화체설을 그대로 따르고 있는 것입니다. 로마가톨릭처럼 그것을 숭배하거나 말씀보다 중요하게 생각하지는 않지만, 화체설 자체에 대해서는 의문을 제기하지 않습니다. 다만 그는 떡의 본질이 예수님의 몸의 본질로 변화되는 것이 아니라 떡의 본질에 예수님의 몸이라는 본질이 ‘+’된다고 주장합니다. 즉 떡에는 떡의 본질과 예수님의 몸이라고 하는 본질이 함께 공재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공재설이라고 말합니다. 루터는 예수님께서 물리적으로 그 떡 안에 계신다는 점에서 로마가톨릭과 의견을 같이한 것입니다.


반면에 쯔빙글리는 예수님께서 하셨던 말씀 “이것은 나의 몸이다”하는 말을 그저 상징적인 표현(significant)이라고 받아들입니다. 즉 떡은 예수님의 실제 몸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떡은 단순히 우리를 위해 찢기신 예수님의 몸을 표현하고 상징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찬식은 예수님의 죽음을 상징하고 기념하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그래서 쯔빙글리는 예수님께서 “이것을 행하여 나를 기념하라”는 말씀을 언급하면서 기념하는 것으로 끝내야지 더 나아가면 안 된다고 말한 것입니다. 이것을 상징설, 기념설이라고 합니다. 물론 이 이야기가 틀린 이야기가 아닙니다. 그러나 성찬식은 단순히 예수님의 죽음을 상징만 하는 게 아닌데, 로마가톨릭을 비판하다가 너무 한쪽으로 치우쳐버린 꼴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오늘날의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쯔빙글리와 비슷하게 생각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 생각이 어떻게 나타나느냐 하면 성찬식에 별 의미를 안두는 모습으로 나타납니다. 구세군이 대표적인 예입니다. 구세군은 떡과 포도주를 먹고 마시는 의식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날마다 우리가 주님의 죽으심을 기억하고 그 은혜 안에 거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말합니다. 그래서 구세군 교회는 아예 세례 성찬식이 없습니다. 물론 그렇다고 구세군 교회에 다니는 성도들이 구원 못 받는 것은 아닙니다. 복음의 핵심에 대해서는 정통 교회와 같이 하기 때문에 구세군 교회에 다니는 참된 성도들 역시 우리와 동일하게 주님의 몸 된 지체로 봐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교회의 표지중의 하나인 바른 성례의 집행이 없기 때문에 온전한 교회라고 보기는 조금 무리가 있고, 또 은혜의 중요한 방도인 성례를 하찮게 여김으로써 성례를 통해 얻게 될 많은 은혜의 기회들을 상실하고 있는 것입니다.


결국 쯔빙글리적인 견해의 문제는 예수님이 “기념하라”라고 말씀하신 의미를 전혀 오해했다는 데에 있습니다. 기념이 단순한 기념이 아님을 간과하고 있는 것이죠.

 

“(19)또 떡을 가져 사례하시고 떼어 저희에게 주시며 가라사대 이것은 너희를 위하여 주는 내 몸이라 너희가 이를 행하여 나를 기념하라 하시고”(눅 22:19)

 

여기 ‘기념하라’는 말이 나오는데, 이 ‘기념하라’라는 말은 유월절을 배경으로 그렇게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구약시대에 유월절 의식을 제정하시면서 이것을 행하여 일평생 출애굽의 은혜를 기억하도록 하셨습니다.

 

“(3)유교병을 그것과 아울러 먹지 말고 칠일 동안은 무교병 곧 고난의 떡을 그것과 아울러 먹으라 이는 네가 애굽 땅에서 급속히 나왔음이니 이같이 행하여 너의 평생에 항상 네가 애굽 땅에서 나온 날을 기억할 것이니라”(신 16:3)

 

그러나 이 기억은 단순한 회고가 아닙니다. 현충일이 되었을 때, 태극기 달고 나라를 위해 목숨을 바친 애국선열과 국군 장병들을 기억하고 추모하는... 그런 식의 회고가 아닙니다. 유월절 의식은 과거의 그 유월절 사건과 연합을 의미합니다.

 

“(27)너희는 이르기를 이는 여호와의 유월절 제사라 여호와께서 애굽 사람을 치실 때에 애굽에 있는 이스라엘 자손의 집을 넘으사 우리의 집을 구원하셨느니라 하라 하매 백성이 머리 숙여 경배하니라”(출 12:27)

 

이 말은 그 당시 이스라엘 백성들만의 고백이 아니라 이후에 출애굽을 경험하지 못한 한참 후대의 사람들도 이 고백을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유월절 양을 잡고 그 양을 집에서 먹으면서 가장이 이 고백을 할 때, “과거 우리 조상의 집을 구원하셨다”가 아니라 “바로 우리의 집을 구원하셨다”라고 고백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깐 유월절을 지킬 때, 과거 출애굽 당시의 시점에 자신들이 있다고 생각하는 차원에서 유월절을 지키는 것입니다. 그래서 과거의 유월절 사건에 동참해서 그 유월절의 피가 우리를 구원하였다고 고백하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성찬식을 통해서 단순히 우리를 위해서 죽으신 주님을 회고하는 정도가 아니라, 정말 주님의 십자가 사건에 연합되어서 주님의 살과 피를 먹고 마시는 일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것을 잘 생각한 칼빈이 (결국 우리가 취해야 할 입장인) 영적 임재설을 주장하는 것입니다. 칼빈은 예수님께서 비록 떡을 가리켜 “이것이 내 몸이다”라고 말씀하셨더라도, 예수님께서 물리적으로는 우리와 함께 계실 수 없다고 말합니다. 그분은 물리적으로는 하늘에 계시는 것입니다. 그러나 성찬식을 행할 때, 영적으로 우리와 함께 계시는 것입니다. 성령으로 우리와 함께 하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떡과 포도주가 주님의 살과 피가 아님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믿음으로 떡과 포도주를 먹을 때, 성령님으로 말미암아 정말 주님의 살과 피를 먹은 효과가 우리 안에 일어나는 것입니다. 정말 주님과 연합하고 영생을 누리는 은혜를 받는 것입니다. 그 이유는 성찬의 요소와 그 요소가 가리키는 신령한 은혜의 내용이 성령 안에서 하나로 신비하게 연합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성찬의 요소 - 떡과 포도주
성찬의 요소가 가리키는 신령한 은혜의 내용 - 주님과의 연합, 영생.

 

그래서 성경은 이러한 신비한 연합 때문에, 성례의 요소 자체가 곧 신령한 은혜를 주는 것처럼, 또는 성례의 요소 자체가 곧 신령한 은혜 그 자체인 것처럼 표현하는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예수님도 떡을 가리켜서 “내 몸을 상징하는 것이다”하지 않으시고 “내 몸이라”고 말씀하신 것이고, 사도바울도 떡을 먹고 포도주를 마시는 것이 곧 주님의 몸과 피에 참여하는 것이고 주님과 연합하여 주님과의 ‘코이노니아’를 누리는 것이라고 말한 것입니다. 그것이 이러한 성례전적인 연합을 우리에게 잘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찬식의 떡과 포도주를 아주 가볍게 생각하고, 우리가 명절날 제사드릴 때 제삿밥에 관심이 있는 것처럼 “아~ 저 카스테라 맛있게다, 아~! 저 포도주 보니 술 한잔 하고 싶네” 이런 생각으로 먹고 마시면 그것이 주님을 모독하는 것이 되어서 주님의 몸과 피를 범하는 죄가 되는 것이고, 스스로 심판과 정죄를 먹고 마시는 것이 되는 것입니다. 단순히 상징이면 그렇게 참여해도 위험할 것 없죠. 그러나 단순한 상징이 아닌 것입니다.

 

78문 : 그렇다면 떡과 포도주는 그리스도의 실질적인 몸과 피로 변합니까?
답 : 아닙니다. 세례의 물이 그리스도의 피로 변하는 것도 아니고 세례의 물 자체가 죄를 씻어주는 것도 아니며, 단지 죄 씻음에 대한 하나님이 주신 표와 확증인 것처럼, 성찬의 거룩한 떡도 그리스도의 실제 몸으로 변하는 것이 아닙니다. 거룩한 떡을 그리스도의 몸이라고 하는 것은 성례의 본질을 나타내는 성례적 용어입니다.

 

그래서 이런 질문이 나옵니다.

 

79문 : 그렇다면 왜 그리스도는 그 떡을 자신의 몸이라고 말씀하셨습니까? 또한 그 잔을 자신의 피, 또는 자신의 피로 세우는 새 언약이라고 말씀하십니까? 그리고 왜 사도바울은 (그 떡을 먹고 그 잔을 마시는 것을) 예수 그리스도의 몸과 피에 참여하는 것이라고 말합니까?
답 : 그리스도께서 그렇게 말씀하신 데에는 중요한 이유가 있습니다. 마치 떡과 포도주가 육신의 생명을 유지시키듯이, 십자가에 달리신 그의 몸과 흘리신 피가 우리 영혼을 영생으로 이끄는 참된 양식과 음료라는 사실을 가르치려 하셨습니다. 더 나아가서 그리스도께서는 눈으로 볼 수 있는 이러한 표와 보증으로써 우리에게 다음을 확신시키려 하셨습니다. 첫째, 우리가 그리스도를 기념하면서 이 거룩한 표들을 육신의 입으로 받아먹는 것처럼 실제로, 성령님의 역사에 의해 우리가 그의 참된 몸과 피에 참여합니다. 둘째 그리스도의 모든 고난과 순종이 확실하게 우리의 것이 되어, 마치 우리 자신이 직접 모든 고난을 당하고 우리의 죗값을 하나님께 치른 것과 같습니다.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은 예수님께서 떡을 가리켜 “내 몸을 상징하는 것이다”하지 않으시고 “내 몸이다”라고 말씀하신 데에는 중요한 이유가 있다고 말하면서 두 가지를 말합니다.

 

마치 떡과 포도주가 육신의 생명을 유지시키듯이, 십자가에 달리신 그의 몸과 흘리신 피가 우리 영혼을 영생으로 이끄는 참된 양식과 음료라는 사실을 가르치려 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떡을 가리켜 “내 몸이다”라고 말씀하신 것은 일차적으로 이 떡과 포도주가 주님의 살과 피를 표하고 인친다고 하는 사실을 우리로 알게 하시기 위함이다 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떡과 포도주를 보고 먹고 마심으로 보이지 않는 주님의 십자가 복음을 더 분명하게 깨달아 알고 또 “정말 주님이 나를 위해 몸이 찢기시고 피를 흘려주셨구나, 내가 주님의 살과 피를 먹어 영생을 얻었구나” 하는 확신을 얻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것으로 끝이 아닙니다.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의 답을 계속해서 보십시오.

 

더 나아가서 그리스도께서는 눈으로 볼 수 있는 이러한 표와 보증으로써 우리에게 다음을 확신시키려 하셨습니다. 첫째, 우리가 그리스도를 기념하면서 이 거룩한 표들을 육신의 입으로 받아먹는 것처럼 실제로, 성령님의 역사에 의해 우리가 그의 참된 몸과 피에 참여합니다.

 

지금 이 떡과 포도주를 먹을 때, 이 떡과 포도주가 내 몸 안으로 들어와서 실제로 나의 육신에 생명을 주는 양식으로 소화된 것처럼, 그렇게 실제적으로 지금 주님이 내안에 들어와 사시는 일이 있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어떤 일이 일어납니까?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 답을 이어서보면...

 

둘째 그리스도의 모든 고난과 순종이 확실하게 우리의 것이 되어, 마치 우리 자신이 직접 모든 고난을 당하고 우리의 죗값을 하나님께 치른 것과 같습니다.

 

이것은 우리가 주님과 연합했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늘 주님과 연합해 있지만, 특별히 성찬식을 통해서 우리는 주님과 정말 찐하게 연합합니다. 그래서 정말 주님의 생명, 주님의 지혜, 주님의 모든 공로, 주님의 고난, 희생, 주님의 모든 공생애가 나의 것임을 우리가 확실히 깨달아 알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은혜 안에서 주님의 죽으심과 부활에 우리도 함께 참여하여 내가 죽고 사는 역사가 성찬식에 참여하는 지금! 일어납니다. 그리고 그런 쏟아 부어지는 은혜 속에서 회개가 절로 되어지고, 나의 내면이 놀랍게 변화되고, 기쁨과 감사가 넘치게 되어지고, 주님을 사랑하는 마음이 불일 듯 일어나고, 형제자매를 용서하고 사랑하고 섬기고자 하는 마음이 생겨나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칼빈의 영적임재설입니다. 예수님께서 성령으로 우리와 함께 하셔서 그 성찬의 요소와 그 요소가 가리키는 은혜를 하나로 연합시켜 우리가 떡을 먹고 잔을 마실 때, 우리의 영혼이 주님의 살과 피를 먹고 강건하게 되는 은혜가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쯔빙글리의 생각처럼 성찬식은 그냥 주님의 죽으심을 회고하는 정도의 의식일 수가 없습니다. 어떻게 참여해야 합니까? 이런 놀라운 은혜를 기대하면서 믿음으로 참여해야 하는 것입니다. 정말 성찬식에 대한 이해가 그렇다 라고 한다면 우리의 당연한 반응은 성찬식을 흥분된 마음으로 기다리게 될 것입니다. 홈페이지를 통해 날짜를 미리 알려준 이유도 기대하는 마음으로 간절히 기다리라고 그렇게 한 것입니다. 기대하는 마음도 없고 기다리지도 않는다면 그것은 큰 문제인 것입니다. 그냥 교회에 아무 생각 없이 왔는데 와보니 오늘 성찬식이 있다는 것을 비로소 알게 된다면, 참으로 난감한 상황이 아닐 수 없는 것입니다. 어제 밤새도록 TV보고 아침에 나오기 전에 마누라하고 한바탕 싸우고, 그러고 교회 왔는데, 단상에 책상이 놓여있고 하얀 보자기가 씌워져있고... 그러면 참 난감한 것입니다. 그렇게 하는 것에 대해서 정말 우리는 회개해야 합니다. 성찬을 기다리지 않는다는 것은 우리 마음이 주님을 떠나 있다는 증거이고, 주님과 연합하는 것이 즐겁지 않다는 증거입니다. 아니면 성찬식을 단순히 쯔빙글리처럼 의식정도로 생각하든지 둘 중의 하나입니다. 어떤 경우든 거기서 회개하고 돌이켜야 합니다. 정말 이 주님과의 연합이 나의 생명임을 알고 이 주님과의 연합을 간절히 사모해야 합니다. 그렇게 되려면 먼저 평소에 말씀과 기도에 힘쓰고, 교회의 공적인 가르침을 잘 받고, 날마다 십자가 은혜를 묵상하면서 날마다 주님의 살과 피를 먹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것이 실제로는 잘 안 됩니다. 그것이 잘 되면 성찬식 필요 없습니다. 칼빈은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우리가 항상 땅에 붙어 기어 다니고 육에 붙어 떨어지지 않으며 영적인 일은 조금도 생각하지 않고 상상조차 하지 못하므로 하나님께서는 자신을 낮추셔서 이런 땅에 붙은 것까지 이용해서 우리를 자신에게로 인도하시며 육에 있는 우리 앞에 영적인 복의 거울을 두신다.”

 

근본 눈에 보이는 뭔가가 없으면 우리는 너무나 쉽게 흔들릴 수밖에 없는 것을 아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찬식을 주신 것입니다. 정말 분명하게 깨닫고 정말 생생하게 복음의 은혜를 체험해서 의심하지 말고 확신하라고 성찬식을 주신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러한 놀라운 은혜를 기대하면서 성찬식을 기다려야 합니다. 이것을 주의 깊게 생각하지 않으면 또 성찬식 잊고 살아가다가 준비 없이 성찬식에 참여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렇게 되지 않도록 하기 위해 이전에 교회는 성찬식 하루전날에는 전부 금식했습니다. 영적으로 깨어있도록, 그리고 회개하며 참석하도록 하기 위해 그렇게 했습니다. 우리도 이렇게 했으면 좋을 것 같습니다.


다음 성찬식은 7월 27일입니다. 달력에 메모하거나 스마트폰에 일정관련 앱에 입력해두는 것이 좋은 방도가 될 것입니다. 그리고 광고 나가면 그 전주에는 온 가족이 하루 날 정해서 금식하며 기도했으면 좋을 것 같습니다. 우리가 바른 성찬에 대한 이해를 가지고 믿음으로 참여해서 성령의 놀라운 은혜를 받아 누리는 은혜가 있기를 기도합니다.


List of Articles
번호 분류 제목 설교자 조회 수
40 하이델베르그 요리문답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 제33주Ⅱ(88문,89문,90문,91문) - 그리스도인의 회개의 삶 file 88-91문 최상범 2528
39 하이델베르그 요리문답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 제33주Ⅰ(88문,89문,90문) - 예수님과 함께 죽고 사는 것의 의미 file 88-90문 최상범 2733
38 하이델베르그 요리문답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 제32주Ⅱ(87문) - 구원과 성화(끝까지 회개하지 아니하면) file 87문 최상범 2934
37 하이델베르그 요리문답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 제32주(86문) - 신자가 선행을 행하는 이유 file 86문 최상범 2737
36 하이델베르그 요리문답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 제31주Ⅱ(85문) - 천국열쇠(2) file 85문 최상범 2426
35 하이델베르그 요리문답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 제31주(83문,84문) - 천국열쇠(1) file 83-84문 최상범 2756
34 하이델베르그 요리문답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 제30주(80문,81문,82문) - 성찬을 합당치 않게 먹고 마시면 file 80-82문 최상범 2644
» 하이델베르그 요리문답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 제29주(78문,79문) - 성찬론에 대하여(화체설,공재설,기념설,영적임재설) file 78-79문 최상범 2805
32 하이델베르그 요리문답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 제28주Ⅱ(76문) - 성찬의 의미(Ⅱ) file 76문 최상범 2059
31 하이델베르그 요리문답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 제28주(75문,76문,77문) - 성찬의 의미 file 75-77문 최상범 2930
30 하이델베르그 요리문답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 제27주(72문,73문,74문) 세례의 의미와 유아세례 file 72-74문 최상범 3257
29 하이델베르그 요리문답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 제26주(69문,70문,71문) - 세례와 성화론 file 69-71문 최상범 5398
28 하이델베르그 요리문답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 제25주(65문,66문,67문,68문) - 말씀과 성례 file 65-68문 최상범 2615
27 하이델베르그 요리문답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 제24주Ⅱ(64문) - 성화는 칭의의 열매 file 64문 최상범 2580
26 하이델베르그 요리문답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 제24주Ⅰ(62문,63문) - 성경적인 성화론 file 62-63문 최상범 2985
25 하이델베르그 요리문답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 제23주(59문,60문61문) - 이신칭의 file 59-61문 최상범 2958
24 하이델베르그 요리문답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 제22주(57문,58문) - 부활과 영생 file 57-58문 최상범 3024
23 하이델베르그 요리문답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 제21주Ⅱ(56문) - 죄 사함 file 56문 최상범 3213
22 하이델베르그 요리문답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 제21주Ⅰ(54문,55문) - 거룩한 공회와 성도의 교통 file 54-55문 최상범 3501
21 하이델베르그 요리문답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 제20주(53문) - 성령 하나님 file 53문 최상범 3464
목록
Board Pagination Prev 1 2 3 4 5 6 7 8 9 10 11 Next
/ 1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