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이델베르그 요리문답
2014.06.11 18:31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 제31주Ⅱ(85문) - 천국열쇠(2)

조회 수 2467 댓글 0
?

단축키

Prev이전 문서

Next다음 문서

크게 작게 위로 아래로 댓글로 가기 인쇄
?

단축키

Prev이전 문서

Next다음 문서

크게 작게 위로 아래로 댓글로 가기 인쇄
Extra Form
설교자 최상범
85문
문답내용 85문 : 교회의 권징을 통하여 어떻게 천국이 닫히고 열립니까?
답 : 그리스도의 명령을 따라서, 그리스도인의 이름을 가진 자가 교리나 생활에서 그리스도인답지 않을 경우, 먼저 형제로서 거듭 권고할 것입니다. 그렇지만 자신의 오류나 악행에서 돌이키기를 거부한다면, 그 사실을 교회 곧 치리회에 보고해야 합니다. 그들이 교회의 권고를 듣고도 돌이키지 않으면, 성례에 참여함을 금하여 성도의 사귐 밖에 두어야 하며, 하나님께서도 친히 그들을 그리스도의 나라에서 제외시킬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이 참으로 돌이키기를 약속하고 증명한다면, 그들을 그리스도의 지체와 교회의 회원으로 다시 받아들입니다.
강설날짜 2014-06-01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 제31주Ⅱ(85문)


천국열쇠(2)


말씀 : 마 18:15-18


85문 : 교회의 권징을 통하여 어떻게 천국이 닫히고 열립니까?
답 : 그리스도의 명령을 따라서, 그리스도인의 이름을 가진 자가 교리나 생활에서 그리스도인답지 않을 경우, 먼저 형제로서 거듭 권고할 것입니다. 그렇지만 자신의 오류나 악행에서 돌이키기를 거부한다면, 그 사실을 교회 곧 치리회에 보고해야 합니다. 그들이 교회의 권고를 듣고도 돌이키지 않으면, 성례에 참여함을 금하여 성도의 사귐 밖에 두어야 하며, 하나님께서도 친히 그들을 그리스도의 나라에서 제외시킬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이 참으로 돌이키기를 약속하고 증명한다면, 그들을 그리스도의 지체와 교회의 회원으로 다시 받아들입니다.


1. 권징 할 때 마음자세


마태복음 18장 15-18절은 권징에 대한 예수님의 가르침입니다.


“(15)네 형제가 죄를 범하거든 가서 너와 그 사람과만 상대하여 권고하라 만일 들으면 네가 네 형제를 얻은 것이요(16)만일 듣지 않거든 한 두 사람을 데리고 가서 두 세 증인의 입으로 말마다 증참케 하라(17)만일 그들의 말도 듣지 않거든 교회에 말하고 교회의 말도 듣지 않거든 이방인과 세리와 같이 여기라(18)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무엇이든지 너희가 땅에서 매면 하늘에서도 매일 것이요 무엇이든지 땅에서 풀면 하늘에서도 풀리리라”(마 18:15-18)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이 권징에 대한 말씀을 그냥 하신 것이 아니라 어떤 문맥 속에서 이 말씀을 하셨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 본문을 둘러싸고 있는 문맥을 잘 봐야 합니다.


가. 19-20절 - 주님께서 치리회의 결정에 함께 하심


먼저 바로 뒤에 나오는 말씀을 보십시오.


“(19)진실로 다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중에 두 사람이 땅에서 합심하여 무엇이든지 구하면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께서 저희를 위하여 이루게 하시리라(20)두 세 사람이 내 이름으로 모인 곳에는 나도 그들 중에 있느니라”(마 18:19-20


이것은 앞의 본문에 포함되는 단락인데, 많은 경우 앞의 문맥과는 상관없이 이 구절만 딱 떼어서 생각합니다. 주로 어떤 상황에서 이 구절을 언급하느냐 하면, 모임을 하는데 사람들이 적게 모였을 때, 그리고 개척교회 상황에서 이 말씀을 언급하면서 위로를 받습니다. 두 세 사람이 모여도 주님이 함께 하시니까요. 물론 이 말씀을 통해서 이런 위로를 받을 수가 있습니다. 그러나 사실 이 말씀의 본의는 그것보다도 권징의 상황을 전제로 하고 있습니다.


우선 이 말씀은 교회가 권징을 해 나갈 때 두 세 사람이 결정을 해나가야 함을 가르쳐줍니다. 즉 한 사람이 모든 권한을 가지고서 권징을 하고 결정을 해나가도록 해서는 안 되는 것이죠. 그런 면에서 로마가톨릭의 교황독재체제는 옳지 못합니다. 두 번째는 교회가 권징 할 때, 합심해서 기도해야 함을 말해줍니다. 무엇을 위해서 기도해야 합니까? 범죄한 형제가 돌이킬 수 있도록, 그리고 돌이키지 않을 때 주님의 뜻을 따라 중대한 결정들을 해 나아갈 수 있도록, 그리고 이 교회의 결정에 주님이 승인해주시기를 위해서 기도하는 것입니다. 세 번째로 그렇게 두 세 사람이 모여 기도면서 권징의 결정을 할 때 주님이 함께 하신다는 것을 가르쳐줍니다. 그 두 세 사람의 결정이 곧 주님의 결정이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왜 하필 두 세 사람을 말씀하시는 것일까요? 일차적으로 이 말씀은 12제자들 중의 두 세 사람을 의미합니다. 우리는 예수님께서 둘씩 묶어서 전도여행을 보내신 것을 기억합니다. 그리고 오순절 성령강림 이후에 12사도들이 모두 예루살렘 교회에서 사역했다고 보여지지 않고, 두 세 사람씩 다른 지역으로 파송해서 교회를 섬기도록 했을 것으로 추정됩니다. 그렇게 교회를 세워 나아갈 때, 교회의 영적 지도자로서 두 세 사람의 사도들이 함께 모여 권징을 의논하고 또 어떤 결정을 할 때 주님이 함께 하시리라는 의미입니다. 그러므로 “두 세 사람”의 표현은 단순히 교회 멤버가 두 세 사람밖에 안 되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두 세 사람으로 구성된 교회의 치리회(또는 당회)를 의미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보는 근거구절로 17절을 보시면...


“(17)만일 그들의 말도 듣지 않거든 교회에 말하고 교회의 말도 듣지 않거든 이방인과 세리와 같이 여기라”(마 18:17)


여기 17절에서 “교회에 말하고 교회의 말도 듣지 않거든”이 의미하는 바가 무엇입니까? 맨 처음에 1:1로 하고, 안 되면 두세 명을 증참시키고, 그래도 안 되면 공동의회해서 온 교회 성도들에게 그 사람의 죄를 보고하는 것을 말합니까? 그리고 ‘교회가 그 사람에게 말한다’고 했는데, 이것이 온 교회 성도들 한 사람 한 사람 자리에 일어나서 그 사람에게 회개하라고 책망한다는 말입니까? 그것이 아니라는 것이 분명합니다. 예수님이 “교회”라고 말씀하셨어도 그렇게 말씀하실 때에 염두에 두신 절차가 뭐냐 하면, 바로 온 교회가 그 일을 해 나가는 것인데, 절차상 당회가 그 중심에 있게 되리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교회에 말하라”는 말은 공동의회 때에 그 사람의 죄를 보고하라는 말이 아니라, 당회에 보고하라는 의미이고, 또 교회가 말하는 것도 온 성도들이 한 마디씩 말하는 것이 아니라 그 온 성도를 대표하여 당회가 형제에게 권면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형제가 회개하지 않을 때 온 교회가 공동의회로 모여 그 형제에게 수찬정지와 출교의 결정을 내리는 것이 아니라, 온 교회를 대표하여 당회가 수찬정지와 출교를 결정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교회에 천국열쇠를 주셨는데, 그 천국열쇠를 실질적으로 사용하여 천국 문을 열고 닫는 주체는 바로 당회인 것입니다. 그런 의미로 예수님께서는 “너희 온 무리가 합심하여 기도하면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께서 이루어주실 것이다... 온 교회가 내 이름으로 모인 곳에는 나도 그들 중에 있느니라...” 라고 말씀하시지 않고, 굳이 “두 세 사람이 합심하여 기도할 때 아버지께서 이루어주신다. 두 세 사람이 내 이름으로 모인 곳에는 나도 그들 중에 있느니라.”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이러한 해석을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이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답 : ... 그렇지만 자신의 오류나 악행에서 돌이키기를 거부한다면, 그 사실을 교회 곧 치리회에 보고해야 합니다. 그들이 교회의 권고를 듣고도 돌이키지 않으면, 성례에 참여함을 금하여 성도의 사귐 밖에 두어야 하며, 하나님께서도 친히 그들을 그리스도의 나라에서 제외시킬 것입니다.


그러므로 교회를 대표하는 치리회에 천국열쇠가 있고 치리회만이 수찬정지나 출교의 결정을 할 수가 있다는 것을 우리가 알아야 합니다. 당회가 없는 우리 교회는 미조직교회로서 자체적으로 수찬정지나 출교의 권징을 행할 수 없고, 반드시 노회의 지도를 받아야만 합니다. 그렇게 두 세 사람의 장로와 목회자로 구성된 당회가 기도하고 결정할 때 주님이 함께 하시는 것입니다. 당회는 교회를 대표하므로 당회의 결정은 곧 교회의 결정이고, 교회의 결정은 곧 주님의 결정입니다.


나. 1-14절 - 겸손과 상한 목자의 심정


이제 권징 단락의 앞부분 문맥을 보겠습니다. 3절을 보시면...


“(3)가라사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돌이켜 어린 아이들과 같이 되지 아니하면 결단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리라(4)그러므로 누구든지 이 어린 아이와 같이 자기를 낮추는 그이가 천국에서 큰 자니라”(마 18:3-4)


“누가 천국에서 큰 자입니까?” 제자들이 물었을 때, 예수님께서는 돌이켜 어린아이가 되어야만 천국에 갈 수 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어린아이와 같이 된다는 것은 어린아이와 같이 자기를 낮추는 겸손을 의미합니다. 이 겸손을 말씀하시면서 권징의 자세에 대해서 권면하시는 것입니다. 5절을 보시면...


“(5)또 누구든지 내 이름으로 이런 어린 아이 하나를 영접하면 곧 나를 영접함이니”(마 18:5)


예수님께서 이 말씀을 하실 때 실제로 어린아이 하나를 불러다가 세워놓으시고 말씀하셨습니다. 이것은 우리가 실제로 나이가 어린 아이들을 주님의 이름으로 귀하게 여기고 사랑스러운 마음으로 받아들여야 한다는 것을 말씀하시는 것이 아니라, 여기서 예수님이 불러 세워놓으신 어린아이는 교회 안에 있는 소자를 상징하는 것입니다. 즉 교회 안에 있는 영적인 어린아이들... 믿음이 없고, 인격에 모가 나있고, 자주 교회 안에서 문제를 일으키는 연약한 형제를 가리킵니다. 이런 사람들을 대할 때 솔직히 힘들죠. 미운 마음이 들고, 잘라내고 싶은 마음도 들고... 사실 영접이 잘 안 됩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그런 소자들을 영접하는 것이 곧 나를 영접하는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즉 소자의 허물과 실수를 마음으로 용납하고 품고 감당하면서 섬기는 것이 바로 예수님을 믿는다고 하는 신앙의 표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런 소자들을 어떤 자만 영접할 수 있습니까? 돌이켜 어린아이와 같이 되는 자만 가능한 것입니다. 즉 겸손한 자만이 소자를 영접할 수 있습니다. 겸손한 자는 자신이 바로 교회 안에 소자임을 고백하는 자이며, 주님 앞에서 똑같은 소자이기에 그 소자를 이해하고 동정하며 영접할 수 있는 것입니다. 겸손이란 내가 사실은 왕인데 거지로 살겠다고 자기를 낮추는 것이 아니라, 왕 행세를 하던 거지가 자신의 본질을 제대로 깨닫고 거지라는 본래 위치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권징할 때에 우리 마음에 있어야 할 가장 중요한 덕목입니다. 왜요? 권징 할 때 겸손이 왜 중요합니까? 그것은 겸손의 마음이 없으면 소자를 대할 때 비판의 자세로 대하게 되기 때문입니다.


“(1)비판을 받지 아니하려거든 비판하지 말라(2)너희의 비판하는 그 비판으로 너희가 비판을 받을 것이요 너희의 헤아리는 그 헤아림으로 너희가 헤아림을 받을 것이니라(3)어찌하여 형제의 눈 속에 있는 티는 보고 네 눈 속에 있는 들보는 깨닫지 못하느냐(4)보라 네 눈 속에 들보가 있는데 어찌하여 형제에게 말하기를 나로 네 눈 속에 있는 티를 빼게 하라 하겠느냐(5)외식하는 자여 먼저 네 눈 속에서 들보를 빼어라 그 후에야 밝히 보고 형제의 눈 속에서 티를빼리라”(마 7:1-5)


‘비판’은 원어로 보면 “나누다, 조각내다, 재판하다”’라는 뜻이고, ‘헤아림’은 “도량형 측정도구로 측정하다, 자로 재어보다”라는 뜻입니다. 그러므로 비판과 헤아림은 한 마디로 말해 소자의 허물과 죄를 보고서 “아니 어떻게 그런 행동을 할 수 있지? 어떻게 나한테 이런 말을 할 수 있어? 진짜 어이가 없어. 정말 싸가지가 없네. 난 정말 이해할 수 없어.”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이 말속에는 “나는 그렇게 하지 않는다, 나는 좀 싸가지가 있다”는 자기 의가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바로 그 자신의 의와 도덕적인 잣대로 그 사람을 측정해서 평가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생각할 수 없습니다. 저 사람의 범죄의 자리는 곧 나의 자리입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다 전적으로 타락한 자들이고, 은혜로 구원받은 자들이기 때문입니다. 다 똑같습니다. 우리는 다 성령님의 은혜가 아니고서는 경건과 거룩한 삶을 살아갈 수 없는 자들입니다. 그러니깐 저 형제의 범죄와 허물의 자리는 나도 주님의 은혜가 없으면 얼마든지 이를 수 있는 자리인 것입니다. 그리고 단순히 “나도 그럴 수 있다”는 정도가 아니라, 우리는 형제의 범죄와 허물과 실수를 통해서 나의 연약함, 나의 죄악됨, 나의 전적 타락함을 봅니다. 형제의 눈 속에 티를 봄으로써 우리는 우리 자신 안에 있는 들보를 봐야 합니다. 우리는 각자 각자가 서로의 모습을 비춰주는 거울입니다. 왜 저 사람과 내가 다르다고 생각합니까? 왜 내가 저 사람보다 나을 것이라고 생각합니까? 다 착각입니다. 완전히 똑같습니다. 저 사람이 그 죄를 지은 것은 그 사람 안에 있는 죄악된 본성이 파괴적으로 눈에 보이게 드러났을 뿐이고, 그 동일한 죄의 본성이 우리 안에도 있음을 우리는 알아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자신의 들보는 보지 않고 형제의 티만 보는 것에 대해서 예수님이 뭐라고 말씀하십니까? 5절에 보면 “외식하는 자여”라고 하셨습니다. 그것은 외식입니다. 자기는 안 그런 척 하며 연기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외식하는 자는 지난번에 배웠듯이 성찬에 참여할 수 없는 자로서, 권징의 대상입니다. 비판의 마음으로 권징하는 사람은 도리어 본인이 권징의 대상입니다. 똥 묻은 개가 겨 묻은 개 나무라는 격입니다. 그래서 갈라디아서에서 뭐라고 했습니까?


“(1)형제들아 사람이 만일 무슨 범죄한 일이 드러나거든 신령한 너희는 온유한 심령으로 그러한 자를 바로잡고 네 자신을 돌아보아 너도 시험을 받을까 두려워하라”(갈 6:1)


형제가 범죄하면 “어떻게 저럴 수 있지? 이해할 수 없어.”라고 하는 우월감과 정죄의 마음을 갖는 것이 아니라, “저럴 수 있겠다..”하고서 그 사람이 그렇게 하는 것이 이해가 되어져야 합니다. 왜요? 동일한 죄의 본성이 나에게도 있고, 그래서 얼마든지 자신도 그 죄에 빠질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형제가 죄를 범할 때 제일먼저 해야 할 일은 자기 자신을 돌아보고, 자신의 죄를 먼저 회개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야만 온유한 심령으로 그러한 자를 바로잡을 수 있는 것입니다. 여기서 ‘온유한 심령’은 원어로 보면 유순하고 온순한 마음을 의미하기도 하지만, 겸손한 마음을 의미하기도 합니다. 사실 온유와 겸손은 늘 같이 가는 것입니다.


“(28)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29)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러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니”(마 11:28-29)


여기서도 보는 것처럼 온유와 겸손은 항상 같이 가는 것입니다. 겸손한 자는 온유할 수밖에 없습니다. 왜냐하면 너나 나나 똑같은 죄인이기 때문에 화내거나 비판하거나 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권징 할 때 가장 중요한 자세는 겸손입니다. 나도 저 사람과 똑같은 죄인이라는 토대에서 권징 해야 합니다. 그런데 이것은 권징 하는 자에게만 필요한 덕목이 아니라 권징을 받는 사람에게도 꼭 필요한 덕목입니다. 왜냐하면 겸손한 자가 책망을 달게 듣고 회개하기 때문입니다.


두 번째로 소자를 권징 할 때 가져야 할 마음자세는 그 소자를 업신여기면 안 되고 귀하게 여겨야 한다는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자신이 이 소자를 얼마나 귀하게 여기시는지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습니다.


“(6)누구든지 나를 믿는 이 소자 중 하나를 실족케 하면 차라리 연자맷돌을 그 목에 달리우고 깊은 바다에 빠뜨리우는 것이 나으니라(7)실족케 하는 일들이 있음을 인하여 세상에 화가 있도다 실족케 하는 일이 없을 수는 없으나 실족케 하는 그 사람에게는 화가 있도다(8)만일 네 손이나 네 발이 너를 범죄케 하거든 찍어 내버리라 불구자나 절뚝발이로 영생에 들어가는 것이 두 손과 두 발을 가지고 영원한 불에 던지우는 것보다 나으니라(9)만일 네 눈이 너를 범죄케 하거든 빼어 내버리라 한 눈으로 영생에 들어가는 것이 두 눈을 가지고 지옥 불에 던지우는 것보다 나으니라(10)삼가 이 소자 중에 하나도 업신여기지 말라 너희에게 말하노니 저희 천사들이 하늘에서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얼굴을 항상 뵈옵느니라”(마 18:6-10)


교회 안에 있는 소자를 귀하게 여기지 않고, 업신여기고 함부로 대하고, 권징 한답시고 비판하는 마음으로 정죄하여서 그 소자에게 상처를 주었을 때, 그래서 그 소자가 시험에 들고 낙심해서 교회를 떠나게 되었을 때, 그 소자에게 상처 준 사람은 차라리 자살을 하든지, 아니면 가위를 가지고서 스스로 자기 입을 잘라내든지 하라는 것입니다. 그것이 지옥 가는 것을 면하는 길이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실제로 그렇게 하라는 말이 아니라 소자를 실족하게 하는 죄에 대해서 아주 심각하게 생각하라는 말씀입니다. 마음에 겸손이 없는 사람, 마음에 소자를 귀히 여기는 마음이 없는 사람이 가서 그 형제의 죄를 책망하고 권면하는 것은 마치 상처 난 부위에 소금을 뿌리는 것과 같습니다. 권징의 효과는커녕 도리어 서로 상처를 주고받고, 더 반발만 하고 오히려 역효과만 날 뿐입니다. 그래서 이승구 교수님은 기도의 뜸이 충분히 들여지기 전까지는 가서 말하지 말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정말 겸손의 마음, 소자를 귀히 여기는 마음을 주실 때까지 기도하고, 그런 마음을 주님이 주셨을 때도 아주 신중하게 그리고 조심스럽게 권면해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그 소자를 위해 주님이 피를 흘려주셨다는 것을 알아야 하고, 또 그 소자 하나를 귀히 여기사 그 소자에게 수호천사를 보내주셨음을 생각해야 합니다. 그래서 이 주님의 마음을 따라서 소자를 귀히 여기며 섬겨야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세 번째로 권징 할 때는 상한 목자의 심정이 있어야 합니다. 12절 이하를 보십시오.


“(12)너희 생각에는 어떻겠느뇨 만일 어떤 사람이 양 일백 마리가 있는데 그 중에 하나가 길을 잃었으면 그 아흔 아홉 마리를 산에 두고 가서 길 잃은 양을 찾지 않겠느냐(13)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만일 찾으면 길을 잃지 아니한 아흔 아홉 마리보다 이것을 더 기뻐하리라(14)이와 같이 이 소자 중에 하나라도 잃어지는 것은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뜻이 아니니라”(마 18:12-14)


길을 잃은 양 한 마리를 구하기 위해 아흔 아홉 마리의 양을 산에다 두고 찾아 헤매는 것이 그 당시 목자에게 흔한 일이었습니다. 우리는 목양을 안 해봐서, 목양을 마치 돼지나 닭 키우는 것하고 비슷하게 생각해서 “뭐 양 한 마리 잃어버렸다고 그거 찾으려고 온 산을 찾아 헤매는 고생을 하나... 이해가 안 된다. 한 마리가 줄어서 좀 아쉽지만, 그래도 99마리가 있으니 괜찮은 것 아니냐?”하고 생각을 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목양을 단순한 축산업을 위한 사업정도로 생각한 것입니다. 그렇지 않습니다. 그 당시 목양은 우리식으로 말하면 마치 애완견들을 키우는 것과 비슷합니다. 그래서 이 비유를 우리식으로 표현하자면 이런 것이죠. 주인에게 수십 마리의 애완견이 있는데, 한 마리가 집을 나간 것입니다. 그러면 주인이 당연히 어떻게 하겠습니까? 나머지는 집에 두고 그 한 마리 찾아 나서는 것이 당연한 것 아닙니까? 왜냐하면 애완견들은 단순히 생업에 도움주기 위한 가축이 아니라, 한 마리 한 마리가 다 이름이 있고, 주인과 인격적인 애정의 관계가 형성되어 있는 절대적인 가치를 지닌 존재들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목자는 한 마리 양을 잃어버리면 자신에게 99마리의 양이 있어도 기쁘지 않고, 온통 그 잃어버린 양 생각에 눈물이 나고, 가슴 조리면서 찾아 헤매는 것입니다. 이것이 99마리 양의 입장에서는 섭섭할 수도 있습니다. 양 99마리가 “예수님 힘내세요~ 우리가 있잖아요~” 노래를 불러도 예수님이 기쁘지 않는 것입니다. 우리가 전혀 기쁘지가 않은 것이 아니라, 예수님의 마음에는 온통 그 잃어버린 양 생각밖에 없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14절에서 보는 것처럼 자기가 택한 백성 중에서 한 사람도 잃지 않는 것이 주님의 뜻이기 때문입니다. 전부다 구원받지 못하면 99마리 구원받아도 그것은 주님 편에서 실패인 것입니다. 진주목걸이가 한 곳만 끊어져도 진주목걸이가 될 수 없듯이 잃어버린 한 양을 다시 찾지 않으면 양 99마리 있어도 소용없는 것이죠. 그래서 99마리를 그냥 산에 놓고 그 잃은 양 하나 찾기 위해서 온 산을 찾아 헤매는 것입니다. 그때 예수님의 심정이 어떠할까요? 대충 찾다가 못 찾으면 “어쩔 수 없지...” 하는 것이 아니라 반드시 찾아야 하는 것입니다. 목숨 걸고 찾고, 그래서 찾으면 그 99마리의 양보다도 그 한 마리의 양을 인해서 더 기뻐하시는 것입니다. 이것을 우리가 안다면 우리는 나만 신앙생활 잘하면 된다는 생각을 절대로 할 수가 없습니다. 옆에 형제가 시험 들어서 힘들어하고 있는데, 그것을 무시하고 99명의 성도가 사도바울처럼 위대하게 살아도 주님은 전혀 기쁘지 않는 것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주님께 가장 절실하고 시급한 문제가 무엇입니까? 우리가 무엇을 해야 주님이 기뻐하실까요? 그것은 바로 잃어버린 한 형제를 찾는 일을 하는 것입니다. 그것을 주님이 가장 기뻐하십니다. 우리는 여기 있는 우리 모든 성도가 한 사람도 빠짐없이 다 신앙생활 잘하고 다 천국 가는 것이 목표가 되어야 합니다. 그래서 서로가 서로에게 관심을 가지고 서로가 서로를 돌아보아야 하는 것입니다. 특히 우리 가운데 시험에 빠진 영적인 소자에 대해서 지대한 관심을 가지고 말씀으로 도와야 합니다. 그렇게 도울 때 그냥 대충 돕다가 불신하면 “갈 테면 가라지 뭐... 잘 되었네. 안 그래도 잘라내고 싶었는데. 너 가도 우리교회 숫자 하나 줄어들 뿐이야.” 그렇게 생각한다면, 그것은 목회가 아니라 사업입니다. 우리는 정말 잃은 양을 찾으러 가는 주님의 상한목자의 심정을 품고 소자들을 권징 해야 합니다.


그래서 죄 범한 형제에게 한 마디의 권면을 해도 그냥 하는 것이 아니라, 그 한 마디 권면의 말을 하기 위해서 얼마나 많은 눈물의 기도가 필요하고 회개가 필요한지 모릅니다. 심지어는 한 마디의 권면을 위해서 몇 날 몇일을 금식기도 해야 할 때가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그렇게 하지 않고 무턱대고 가서 이야기할 때가 얼마나 많습니까? 정죄와 비판과 복수의 감정으로 할 때가 얼마나 많습니까? 반발하면 막 쏴붙이고... 감정적으로 대할 때가 얼마나 많습니까? 우리가 이러한 우리의 죄와 허물을 회개하고, 이 주님의 마음을 덧입어야 합니다. 그래서 우리가 사랑으로 권면하고 주님의 마음으로 권징 해야 합니다.


다. 21이하 - 용서의 마음


이제 권징 단락의 뒷부분의 문맥을 살펴보겠습니다. 권징 할 때 필요한 마음자세 네 번째는 용서의 마음입니다.


“(21)그 때에 베드로가 나아와 가로되 주여 형제가 내게 죄를 범하면 몇번이나 용서하여 주리이까 일곱번까지 하오리이까(22)예수께서 가라사대 네게 이르노니 일곱번 뿐 아니라 일흔번씩 일곱번이라도 할지니라”(마 18:21-22)


만일 그 형제의 범죄가 다른 사람이 아닌 바로 자기 자신에게 피해를 입힌 것일 때, 우리 마음속에는 상한 목자의 심정이 아니라 복수의 심정이 생깁니다. 그런 마음으로는 권징 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권징 하기 전에 먼저 용서가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형제를 용서할 수 있습니까? 이에 대해서 예수님은 일만 달란트 비유를 말씀하셨습니다. 이 일만 달란트 비유의 기본적인 틀은 앞서 말씀드린 겸손의 맥락과 동일합니다. 저 사람이 나한테 잘못한 것은 백 데나리온에 불과하지만, 내가 하나님께 잘못한 것은 일만 달란트에 해당하는 것입니다. 남의 눈에는 티가 있지만, 내 눈에는 들보가 있다는 것을 아는 것입니다. 이것이 형제의 죄를 용서하는 길의 첫 번째 관문입니다. 그래서 그 사람이 나에게 입힌 피해를 생각하면서 내가 하나님께 입힌 피해가 얼마나 중대하고 큰 것인지를 생각하게 되는 것입니다.


옛날에 ‘똥파리’라는 영화에 대해서 말씀드린 적이 있는데, 그 똥파리 영화를 보면 이 주인공의 아버지가 알콜 중독자에다 가정폭력을 행하던 자였습니다. 그래서 이 주인공이 어렸을 때, 아버지의 가정폭력에 의해 자신의 어머니와 누나가 죽고 말았던 것이죠. 이로 인해 이 주인공이 느꼈을 고통과 아픔, 그리고 그 아버지에 대한 복수심이 얼마나 컸겠습니까? 그래서 그 영화를 보면 주인공이 아버지의 죄에 대한 끓어오르는 분노와 복수심으로 일평생을 살면서, 나중에 아버지가 힘없는 노인이 되었을 때, 매일같이 찾아와서 폭력을 가하면서 복수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 주인공의 패륜적인 행동에 충격을 받으면서도, 또 한편으로는 그 주인공이 당한 고통이 얼마나 큰 것인지 이해가 되기도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렇게 상대방의 죄로 인해 당하는 그 끔찍한 고통에 대해서 성경은 일백 데나리온에 불과하다고 말합니다. 일백 데나리온만 빚져도 우리는 너무나 고통스럽고 힘들어서 죽을 것만 같고, 그 사람에 대한 분노와 미움과 끓어오르는 복수심을 주체할 수가 없는데, 하물며 일만 달란트 빚진 주님의 마음이 어떠하겠습니까? 인간의 죄악된 본성은 자기가 상처 받은 것만 생각하지 자기가 다른 사람을 아프게 하고 힘들게 한 것은 전혀 생각하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내가 아프고 상처받은 것만 생각하지 나 때문에 하나님이 얼마나 고통을 당하시고 피해를 입으셨는지는 전혀 깨닫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상대방의 죄로 큰 상처와 고통을 당하게 될 때에, 그래서 내 마음에 복수심이 불타오를 때, 그 상처와 아픔을 통해서 우리는 무엇을 생각해야 합니까? 주님이 나 때문에 얼마나 고통스러워 하셨을지, 그리고 나의 죄에 대해서 하나님이 얼마나 분노하셨을지 생각해야 하는 것입니다. 자기를 지으신 하나님을 모르고 반역하고 거역하며 하나님의 영광을 땅에 짓밟은 나로 인해서 주님이 받으셨을 피해, 아픔, 분노가 어떠했을지 깊이 묵상해야 하는 것입니다. 실로 우리는 주님께 일만달란트의 피해를 입혀드렸고, 따라서 무한한 복수의 심판을 받아 마땅한 죄인이었습니다. 그런데 주님이 이런 나를 어떻게 대접해주셨습니까? 나를 불쌍히 여기사 나의 모든 죄를 값없이 용서해주신 것입니다. 자기 목숨을 희생하여 우리를 구원하여주신 것입니다. 이것을 우리가 참으로 깨닫는다고 한다면 우리는 주님 앞에 눈물로 엎드릴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그리고 나에게 죄를 지은 형제를 용서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렇게 용서할 때만이 우리는 진정으로 그 사람을 권징 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결론적으로 권징 하는 사람은 바로 겸손과 소자를 귀히 여기는 마음, 상한목자의 심정과 용서의 마음으로 권징 해야 합니다. 그런데 이렇게 들으니 어떻습니까? “아이고... 어렵다. 나는 권징 할 자격이 없네. 나는 일평생 권징 하면 안 되겠구나.”하는 생각이 들기 쉽습니다. 그러나 그렇게 가버리면 안 됩니다. 예수님은 명령하십니다. “네 형제가 죄를 범하거든... 그것을 본 너는 가서 권면해라...” 이것은 “권면 했으면 좋겠다. 어떻게 권면 해주면 안 되겠니? 안 되면 어쩔 수 없고...”가 아니라 “너는 가서 권면해라”하는 엄중한 명령입니다. 형제를 서로 돌아보고 권면하는 것은 권장사항이 아니라 성도의 마땅한 의무입니다.


“(12)형제들아 너희가 삼가 혹 너희 중에 누가 믿지 아니하는 악심을 품고 살아 계신 하나님에게서 떨어질까 염려할 것이요(13)오직 오늘이라 일컫는 동안에 매일 피차 권면하여 너희 중에 누구든지 죄의 유혹으로 강퍅케 됨을 면하라”(히 3:12-13)
“(15)너희는 돌아보아 하나님 은혜에 이르지 못하는 자가 있는가 두려워하고 또 쓴 뿌리가 나서 괴롭게 하고 많은 사람이 이로 말미암아 더러움을 입을까 두려워하고”(히 12:15)


신앙생활은 나만 잘하면 되는 게 아닙니다. 나만 천국가면 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저 사람의 구원이 내 구원에 필수조건임을 알아야 합니다. 저 사람이 망하면 나도 같이 망합니다. 왜냐하면 저 사람과 나는 유기적으로 (생명적으로) 연결되어 있는 주님의 몸 된 지체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서로 돌아보아야 합니다. 서로가 서로를 관심을 가지고 살펴야 할 책임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가인에게 “네 아우가 어디 있느냐”하고 물으셨을 때 가인은 “내가 내 아우를 지키는 자니이까?”하고 그 책임을 회피했습니다. 마찬가지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네 형제가 어쩌다가 저지경이 되었느냐?”라고 물으시는데, 우리가 “하나님, 왜 저한테 그러십니까? 제가 저 형제를 지키는 자입니까?”라고 말하면 안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형제를 지키는 자입니다. 이러한 인식이 늘 있어야 합니다. 그래서 형제가 죄를 범하면, 먼저 자기를 돌아보고 기도로 준비하다가 주님의 때에 그 사람에게 가서 회개하도록 도와야 하는 것입니다.


2. 수찬정지와 출교


그렇게 권징 할 때 절차를 잘 밟아야 합니다. 맨 처음에는 1:1로만 상대해야 하고, 그 사람의 범죄에 대해서는 비밀로 간직해야 합니다. 두 세 사람이 증참할 때도 마찬가지입니다. 두 세 사람만 알고 있어야지, 그렇게 두 세 사람이 권면해서 그 사람이 회개를 했는데, 다음날 와보니 온 교회 성도들이 자신의 죄를 다 알고 있으면, 그것은 문제 해결이 아니라 더 큰 문제를 직면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은밀성이 매우 중요합니다. 그리고 두 세 사람의 말도 듣지 않을 때는 당회에 보고를 해서, 당회에서 공식적으로 권징 하도록 해야 합니다. 당회에서 권징 할 때 어떻게 해야 하는지에 대해서는 이미 우리가 배웠기 때문에 넘어가도록 하겠습니다(사경회강설 참조). 중요한 것은 당회의 권고와 경고도 듣지 않았을 때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 당회는 기도하는 가운데 최후통첩을 알리고 수찬정지의 결정을 합니다. 그리고 그 사람을 교회의 모든 사귐 가운데서 철저하게 배제시킵니다. 이것이 수찬정지인데, 수찬정지란 당신은 그리스도 밖에 있고 천국밖에 있다는 것을 선언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당신이 만일 지금 죽는다면 지옥에 간다는 것을 명명백백히 증거하는 것입니다. 이를 통해서 자신의 비참한 상황을 피부로 느끼도록 하고, 경각심과 두려움을 갖도록 해서 회개하도록 돕는 것입니다. 수찬정지의 목적은 다시는 구원의 가능성이 없도록 배제시키는 것이 아니라, 회개하도록 돕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수찬정지는 단순히 일정기간 자숙하라는 의미가 아닙니다. 그런데 오늘날 스스로 수찬정지내리는 사람들은 무엇입니까? 본인은 일정기간 자숙하는 의미로 불참하는 것이라고 생각할지 몰라도, 실상은 스스로 천국 문을 닫고 “나는 이제 지옥에나 가련다.” 그러고 뒷걸음질 하는 것입니다. 절대로 그럴 수 없습니다. 아무리 죄가 많고 마음이 강퍅해도, 성찬에 어찌하든지 참여하도록 하는 것이 맞습니다. 회개가 안 되면 회개의 마음을 달라고 기도하면서 참여해야 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수찬정지의 권징은 천국의 문을 닫아 잠그는 무서운 징계인 것입니다.


그러면 구체적으로 형제가 어떤 죄를 범했을 때 이러한 권징이 들어가는지 살펴보겠습니다.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은 이에 대해 두 가지 종류의 범죄를 말합니다.


답 : 그리스도의 명령을 따라서, 그리스도인의 이름을 가진 자가 교리나 생활에서 그리스도인답지 않을 경우, 먼저 형제로서 거듭 권고할 것입니다. 그렇지만 자신의 오류나 악행에서 돌이키기를 거부한다면, 그 사실을 교회 곧 치리회에 보고해야 합니다.


첫 번째는 교리적으로 오류에 빠진 경우입니다. 누구나 이단성을 가지고 있지만, 그러한 이단성을 넘어 명백한 이단사상을 고백하고 주장한다면 그 사람은 권징의 대상입니다. 두 번째로 그리스도인답지 않는 악행을 행했을 때입니다. 이것은 도덕적인 범죄로서 십계명을 어긴 죄를 말합니다.


물론 우리는 날마다 십계명을 마음과 말과 행동으로 범하며 살아갑니다. 우리는 우리 마음속에 은밀한 죄들을 품고 살아갑니다. 돈을 사랑하고 쾌락을 사랑하며 안목의 정욕을 사랑하는 우상숭배적인 삶을 살아갈 때가 많습니다. 그리고 남이 보지 않는 곳에서 은밀하게 죄를 짓습니다. 그리고 모든 성도에게는 교리적으로 잘못된 이단성이 있습니다. 그러나 이런 죄들에 대해서는 권징하지 않습니다. 아니 권징 할 수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아직 사람들의 눈에 보이게 드러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이런 죄들은 각자가 거룩한 복음의 강설을 통해 스스로 회개해야 합니다. 그런데 말씀이 막힌 상태에서 그러한 죄 된 상태를 고집하게 될 때, 결국에는 그러한 외식과 불신이 곪아터져서 그 죄가 파괴적으로 눈에 보이게 드러나게 되는데, 그것이 주로 이단사상에 빠진다든지, 아니면 눈에 보이게 십계명을 범하는 것으로 나타나는 것이죠. 예를 들면 아래의 말씀구절과 같이 말입니다.


“(11)이제 내가 너희에게 쓴 것은 만일 어떤 형제라 일컫는 자가 음행하거나 탐람하거나 우상 숭배를 하거나 후욕하거나 술 취하거나 토색하거든 사귀지도 말고 그런 자와는 함께 먹지도 말라 함이라”(고전 5:11)


이렇게 이단사상에 빠지거나 행실에 있어서 십계명을 범할 때에 비로소 권징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성경에 이러한 권징의 실제 예가 있습니까? 있습니다. 먼저 이단사상에 대해서 사도바울은 다음과 같이 권징 하라고 말했습니다.


“(14)누가 이 편지에 한 우리 말을 순종치 아니하거든 그 사람을 지목하여 사귀지 말고 저로 하여금 부끄럽게 하라(15)그러나 원수와 같이 생각지 말고 형제 같이 권하라”(살후 3:14-15)


사도를 통해서 말씀이 선포되었는데, 그 말씀을 거부하고 듣지 않으려고 하는 것입니다. 물론 이 과정에서 반복적인 권면을 했겠지요. 그러나 듣지 않을 때 교회는 그 사람을 지목하여 성도의 사귐에서 배제시킵니다. 이것은 실명을 공개한 후에 수찬정지를 내리는 것을 의미합니다. 사랑의 사도인 바울이 이정도 말했으면 매우 심각한 상황인 것입니다. 그런데 이렇게 할 때 어떤 자세로 해야 한다고 말합니까? 15절에 보면 “그러나 원수와 같이 말고, 형제에게 하듯이 권하라”라고 말했습니다. 냉정하게 결정하되, 다만 정죄하고 벌주고 복수하듯이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권징은 죽이려고 하는 것이 아니라 형제의 회복을 위한 것임을 가르쳐주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어서 도덕적인 범죄에 대한 권징의 실례를 살펴보겠습니다. 이에 대한 대표적인 예로 우리는 고린도교회의 음행의 문제를 들 수 있습니다.


“(1)너희 중에 심지어 음행이 있다 함을 들으니 이런 음행은 이방인 중에라도 없는 것이라 누가 그 아비의 아내를 취하였다 하는도다(2)그리하고도 너희가 오히려 교만하여져서 어찌하여 통한히 여기지 아니하고 그 일 행한 자를 너희 중에서 물리치지 아니하였느냐(3)내가 실로 몸으로는 떠나 있으나 영으로는 함께 있어서 거기 있는 것같이 이 일 행한 자를 이미 판단하였노라(4)주 예수의 이름으로 너희가 내 영과 함께 모여서 우리 주 예수의 능력으로(5)이런 자를 사단에게 내어주었으니 이는 육신은 멸하고 영은 주 예수의 날에 구원 얻게 하려 함이라”(고전 5:1-5)


이 말씀의 상황은 사실 고린도 도시 자체가 음란한 도시였는데, 고린도 교회가 그러한 음란한 문화에 영향을 받고 만 것입니다. 고린도전서 5장의 상황은 이렇습니다. 그 도시에 예쁜 여자 한명이 있었는데, 그 여자의 집에 아버지가 밤에 들어갔다 나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다음 날에는 아들이 그 여자의 집에 들어갔다 나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아버지와 아들이 둘 다 교인인 것입니다. 그리고 그 죄를 회개하지 않고 계속 지속하는 것이죠. 그런 사실을 고린도교회가 알게 되었는데도 아무런 조치를 취하지 않고 그냥 쉬쉬한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바울이 강하게 책망하면서 그런 죄를 지은 자를 교회에서 쫓아낼 것을 명하였습니다. “이런 자를 사단에게 내어주었다.”는 말은 출교하라는 말입니다. 어떤 죄도 용서받지 못할 죄가 없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회개하지 않으면 출교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렇게 출교하는 목적이 무엇입니까?


“(5)이런 자를 사단에게 내어주었으니 이는 육신은 멸하고 영은 주 예수의 날에 구원 얻게 하려 함이라”(고전 5:5)


출교하는 목적이 그 사람의 영은 주 예수의 날에 구원을 얻게 하려 하는 것에 있는 것입니다. 여기서도 벌주는 것 그 자체가 목적이 아니라 그 사람이 회개하도록 하기 위해 출교하는 것임이 다시 한 번 강조됩니다.


이렇게 교리와 생활에서 죄를 범하고도 회개하지 않을 때 권징이 내려지는 것인데, 재미있는 것은 데살로니가후서의 이단사상에 대해서는 수찬정지의 권징을 내려졌는데, 이 고린도전서의 음행죄에 대해서는 수찬정지가 아니라 출교가 내려졌습니다. 이것은 분명한 차이가 있는 것입니다. 사실 출교와 수찬정지는 의미상 아무런 차이가 없습니다. 둘 다 그 사람이 하나님의 백성이 아닌 지옥백성임을 선언하는 것입니다. 다만 차이가 있는 것은 수찬정지의 경우는 성찬에 참여할 수 없고, 성도들과 어떠한 교제도 불가능하지만, 그러나 예배에 나와서 말씀을 들을 수는 있는 것입니다. 즉 교회 못 나오게 하지는 않는 것입니다. 왜요? 말씀을 들어야 회개할 수 있으니까요. 그런데 출교는 좀 더 심각한 상황입니다. 그 사람이 교회에 계속해서 출석함을 통해서 교회가 지속적으로 악영향을 받는 경우는 수찬정지로는 안 되고 출교시켜야 하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어떤 사람이 이단사상을 가지고 있는데 혼자만 가지고 있는 것이 아니라, 밖에 있는 이단과 연합해서 교회 성도들에게 자신의 이단사상을 퍼뜨리면서 교회를 어지럽히는 경우는 수찬정지가 아닌 출교를 시켜야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고린도교회처럼 심각한 음행을 저질렀을 때도 회개하지 않을 때는 수찬정지가 아니라 쫓아내야 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 사람이 회개하지 않은 채로, 그 죄를 계속 짓고 있는 채로, 교회 있는 것 자체가 교회에 심각한 부정적인 영향을 미치기 때문입니다. 왜냐하면 죄에는 누룩과 같은 성질이 있어서 전염되기가 쉬운 것입니다. 특히 음행죄는 더욱 그러합니다. 그래서 한 사람의 음행을 교회가 방치하게 되었을 때, 그 한 사람의 음행은 한 사람의 음행으로 그치지 않고 온 교회로 퍼지게 되는 것입니다. 이런 전염성이 강한 죄들에 대해서는 단호하게 잘라내야 하는 것입니다. 권징의 목적은 단순히 그 범죄한 형제를 바로잡고 돌이키게 하는 데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교회의 거룩성을 유지하는 데에도 있다는 것을 생각해야 합니다. 그래서 교회가 죄를 회개치 않는 자들에게 수찬정지와 출교를 내리게 될 때에 온 성도들이 그 권징을 통해 교훈을 받고 두려움을 가지게 되는 것이고, 특히 믿음이 연약한 자들이 동일한 범죄에 빠지지 않도록 미리 예방하는 효과를 나타내는 것입니다. 그래서 수찬정지나 출교의 권징을 할 때는 인정에 이끌려서 우유부단하게 하면 안 됩니다. 아주 냉정하게 그리고 단호하게 해야 하는 것입니다.


삼국지에 보면 제갈량이 마속을 굉장히 좋아했는데, 마속이 명을 어기고 자기 마음대로 하다가 전쟁에서 그만 패하고 말았습니다. 그래서 제갈량이 그 사랑하는 마속을 눈물을 머금고 숙청했습니다. 왜요? 한 사람의 죄에 대해서 그 무질서를 용인해주고 방치하게 되면 그 나라 전체의 기강과 질서가 다 무너지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눈물을 머금고 숙청하여 사람들에게 본을 보였던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교회가 회개치 않는 자들에게 수찬정지와 출교의 권징을 하면, 교회의 상황이 나빠지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교회의 질서와 기강이 든든하게 세워지고, 또 교회의 거룩성이 보존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참된 교회로 세워지기 위해서는 반드시 권징이 필요한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권징은 교회의 중요한 표지입니다.


그러면 언제까지 수찬정지와 출교를 명합니까? 회개할 때까지입니다.


답 : ... 그러나 그들이 참으로 돌이키기를 약속하고 증명한다면, 그들을 그리스도의 지체와 교회의 회원으로 다시 받아들입니다.


구약에서 문둥병자와 같은 경우는 항상 부정하기 때문에 여호와의 진 바깥에서 살아야 했습니까? 언제까지 여호와의 진 바깥에서 삽니까? 문둥병이 다 나을 때까지입니다. 다 나으면 여호와의 진 안으로 들어오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그 사람의 교리와 삶에서 회개에 대한 분명한 열매가 보이면 교회는 다시 천국 문을 열어 교회 안으로 그를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3. 주일예배 성수와 관련한 권징


그러면 오늘날 우리의 상황에서 실질적으로 권징이 어떻게 이루어집니까? 사실 이단사상에 빠지거나 도덕적인 죄를 눈에 보이게 범해서 권징이 들어가는 경우는 극히 드뭅니다. 왜냐하면 그런 도덕적인 범죄들은 교회에서 벌 받기 이전에 사회적으로 처벌받기 때문에 두려워서 그런 죄는 잘 짓지 않는 것입니다. 그러면 불신과 외식의 삶을 고집할 때 주로 눈에 보이게 나타나는 범죄가 무엇이냐 하면 바로 주일을 성수하지 않는 것입니다.


물론 주일을 잘 지킨다고 해서 그 사람의 신앙이 좋다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주일을 잘 지켜도 그것이 외식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어떤 사람이 주일예배에 상습적으로 빠진다든지, 또는 주일예배 때 상습적으로 존다든지, 또는 주일예배 때 상습적으로 지각을 한다든지 하면, 그 사람은 100% 지금 불신과 외식 가운데 살고 있다고 확신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오늘날 우리가 도둑질을 하거나 살인을 행하거나 간음을 행하면 큰 죄를 지었다고 생각하는데, 주일을 안 지킨 것에 대해서는 심각하게 생각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살고 있는 시대가 그런 것 같습니다. 우리는 예배시간에 늦거나 빠지는 것을 죄라고 생각하지 않는 시대를 살고 있습니다. 그리고 일이 있으면 얼마든지 다른 교회 가서 예배드리면 된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예배가 무엇입니까? 예배는 영어로 ‘worship’입니다. 워십은 worth(가치) + ship(추상명사어미)입니다. 즉 최고의 가치를 드리는 행위입니다. 온 우주를 지으신 최고의 하나님께 경외와 감사의 마음을 담아 자신의 최고의 가치를 드리는 것이 예배입니다. 그런데 그런 예배에 상습적으로 지각을 한다고 한다면, 그것이 얼마나 하나님을 불명예스럽게 하는 큰 죄가 되겠습니까? 만일 우리가 대통령과 약속했는데 우리가 늦었다고 생각해보십시오. 그러면 우리가 얼마나 큰 죄를 지었다고 생각하고 대통령에게 사과를 하겠습니까? 그러므로 우리가 예배에 상습적으로 지각하는 것에 대해서 심각하게 생각하지 않을 수 없는 것입니다.


그리고 예배는 온 교회로 모여 주님의 통치를 받는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예배시간에 말씀과 성령으로 우리를 통치하십니다. 지금 주일예배 때 출애굽기 말씀을 하고 있는데, 주님께서는 이 출애굽기 말씀을 통해서 특별히 우리 교회에게 하실 말씀이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말씀을 온 교회가 함께 들어야 하는 것인데, 어떤 사람이 일이 있다고 하면서, 이번 주는 다른 교회 가서 주님의 말씀 듣겠다고 하면서 빠지는 것이죠. 그러면 온 교회가 함께 주님의 말씀의 통치를 받아갈 수가 없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예배에 지각하는 것에 대해서, 그리고 예배를 빠지는 것에 대해서 아주 민감하게 반응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바로 이런 죄들에 대해서 권징 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어떤 교회는 예배시작하면 문을 잠가서 지각하는 사람들로 하여금 밖에서 예배드리도록 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어떤 교회는 지각하는 성도가 앉는 자리를 정해서 공개적으로 부끄러움을 주는 방법을 사용하기도 합니다. 그것이 쪽팔리게 하려고 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이 얼마나 큰 죄인가 하는 것을 온 교회로 알도록 하는 것입니다. 이런 문제를 크게 다룸으로 말미암아 모든 성도들이, 그리고 특히 어려서부터 자라나는 아이들이 예배시간 늦는 것이 큰 죄라는 것을 몸에 익히면서 커 나아가도록 하는 것입니다.


물론 우리가 예배에 피치 못할 사정으로 빠질 수가 있고 또 지각할 수가 있습니다. 예배 빠졌다고 무조건 율법적으로 권징 할 수는 없는 것입니다. 예외적으로 우리가 허락하는 경우가 있지만, 그러나 우리는 할 수만 있으면 예배에 지각 안 하고 안 빠지도록 해야 합니다. 그리고 우리 가운데 그렇게 하지 못하는 형제가 있으면 적극적으로 성도들끼리 권면하고 돌이킬 수 있도록 도와서 함께 하나님을 경외하며 예배할 수 있도록 해야 할 것입니다.


오늘 권징에 대해서 간략하게 배웠습니다. 자세한 내용은 지난 봄 사경회 때 배운 내용을 참조해주시고, 오늘 배운 내용을 마음에 새겨서 정말 주님의 마음으로 서로 권징 해 나아감으로써 우리 교회가 더욱 굳건히 세워져 나아가는 은혜가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List of Articles
번호 분류 제목 설교자 조회 수
52 하이델베르그 요리문답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 제45주(116문,117문,118문,119문) - 기도 file 116-119문 최상범 2448
51 하이델베르그 요리문답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 제44주Ⅱ(114문,115문) - 율법과 성화 file 114-115문 최상범 2303
50 하이델베르그 요리문답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 제44주Ⅰ(113문) - 제10계명 file 113문 최상범 2668
49 하이델베르그 요리문답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 제43주(112문) - 제9계명 file 112문 최상범 2604
48 하이델베르그 요리문답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 제42주(110문,111문) - 제8계명 file 110-111문 최상범 2568
47 하이델베르그 요리문답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 제41주(108문,109문) - 제7계명 file 108-109문 최상범 2011
46 하이델베르그 요리문답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 제40주(105문,106문,107문) - 제6계명 file 105-107문 최상범 2711
45 하이델베르그 요리문답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 제39주(104문) - 제5계명 file 104문 최상범 2640
44 하이델베르그 요리문답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 제38주(103문) - 제4계명 file 103문 최상범 2683
43 하이델베르그 요리문답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 제36-37주(99문,100문,101문,102문) - 제3계명 file 99-102문 최상범 2372
42 하이델베르그 요리문답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 제35주(96문,97문,98문) - 제2계명 file 96-98문 최상범 3035
41 하이델베르그 요리문답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 제34주(91문,92문,93문,94문,95문) - 율법과 제1계명 file 91-95문 최상범 3462
40 하이델베르그 요리문답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 제33주Ⅱ(88문,89문,90문,91문) - 그리스도인의 회개의 삶 file 88-91문 최상범 2549
39 하이델베르그 요리문답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 제33주Ⅰ(88문,89문,90문) - 예수님과 함께 죽고 사는 것의 의미 file 88-90문 최상범 2762
38 하이델베르그 요리문답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 제32주Ⅱ(87문) - 구원과 성화(끝까지 회개하지 아니하면) file 87문 최상범 2958
37 하이델베르그 요리문답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 제32주(86문) - 신자가 선행을 행하는 이유 file 86문 최상범 2766
» 하이델베르그 요리문답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 제31주Ⅱ(85문) - 천국열쇠(2) file 85문 최상범 2467
35 하이델베르그 요리문답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 제31주(83문,84문) - 천국열쇠(1) file 83-84문 최상범 2800
34 하이델베르그 요리문답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 제30주(80문,81문,82문) - 성찬을 합당치 않게 먹고 마시면 file 80-82문 최상범 2692
33 하이델베르그 요리문답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 제29주(78문,79문) - 성찬론에 대하여(화체설,공재설,기념설,영적임재설) file 78-79문 최상범 2868
목록
Board Pagination Prev 1 2 3 4 5 6 7 8 9 10 11 12 Next
/ 1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