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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 최상범
제1조
문답내용 제 1 조 유일하신 한 분 하나님만이 계시다

우리 모두는 유일하신 한 분 하나님만이 계시다는 것을 마음으로 믿고 입으로 고백합니다. 그분은 단순하시고 영적인 존재입니다. 그분은 영원하시며 다 알 수 없으며 보이지 않으시며 불변하시고 무한하시고 전능하시고 완전히 지혜로우시며 공의로우시고 선하시고 모든 선이 넘쳐흐르는 원천이십니다.
강설날짜 2015-01-11

※ 이후의 모든 벨기에 신앙고백서 강설은 윤석준 목사님의 강설(유은교회), 김성봉 목사님의 동영상(신반포중앙교회), C. 바우만의 해설서(손정원 목사님 번역본)를 참조하였습니다.


창원한결교회 벨기에 신앙고백서 제1조 강설


제 1 조 유일하신 한 분 하나님만이 계시다


우리 모두는 유일하신 한 분 하나님만이 계시다는 것을 마음으로 믿고 입으로 고백합니다. 그분은 단순하시고 영적인 존재입니다. 그분은 영원하시며 다 알 수 없으며 보이지 않으시며 불변하시고 무한하시고 전능하시고 완전히 지혜로우시며 공의로우시고 선하시고 모든 선이 넘쳐흐르는 원천이십니다.


1. 유일하신 한 분 하나님


유일신에서 ‘유’는 ‘있을 유’가 아니라 ‘오직 유’입니다. 오직 한 분 하나님이 계신다는 것입니다. 이 고백은 신명기 말씀을 그대로 인용한 것입니다.


“이스라엘아 들으라 우리 하나님 여호와는 오직 하나인 여호와시니”(신 6:4)


이스라엘이 노예로 살았던 애굽이나 그리고 앞으로 정복할 가나안이나 그 일대의 모든 고대근동 사회는 모두 다신론의 사상이 지배하던 사회였습니다. 그런 다신적인 분위기 가운데서 먼저 강조되는 것은 “하나님은 한 분이시다” 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이후에 성경계시가 진전되면서 한분 하나님이 계시는 존재방식이 성부 성자 성령 삼위로 계신다는 사실을 점차로 계시하셨습니다. 그래서 신구약성경전체를 통해서 우리는 한분 하나님이 삼위로 계심을 믿고 고백합니다. 이것이 우리의 신앙고백의 핵심입니다. 그러므로 이 세상에 신이라 불리는 여러 신들이 있을지라도 그것은 다 헛것이요, 그것은 오히려 귀신을 숭배하는 것이며, 오직 우리는 천지만물과 모든 피조세계를 창조하신 삼위일체 한 분이 계심을 믿습니다.


2. 마음으로 믿고 입으로 고백한다는 표현


그런데 벨기에 신앙고백서는 이러한 유일신 신앙을 어떻게 고백해야 된다고 말합니까?


우리 모두는 유일하신 한 분 하나님만이 계시다는 것을 마음으로 믿고 입으로 고백합니다.


즉 한분 하나님이 계신다는 그 고백을 그냥 지식적 동의 수준에서 고백하는 것이 아니라, 마음으로 믿고 입으로 시인해야 그것이 진짜 신앙고백이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믿음에 관한 로마서 말씀의 서술을 그대로 가져온 것입니다.


“사람이 마음으로 믿어 의에 이르고 입으로 시인하여 구원에 이르느니라”(롬 10:10)


마음으로 믿어 의에 이르고 입으로 시인하여 구원에 이르는 것은 구원의 두 단계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의 구원 사건의 두 측면입니다. 사람이 구원의 은혜를 받으면, 마음과 입이 동시적으로 반응하게 되는데, 먼저 마음은 예수님을 믿어 영접하게 되어지고, 또 동시에 그 사람의 입술은 예수를 주라 시인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항상 같이 갑니다. 그러므로 마음 따로 입 따로 신앙은 잘못된 신앙입니다.


마음으로는 믿는다고 하는데, 입으로 고백했다가는 조롱과 핍박이 있으니깐, 두려워서 입 꼭 다물고 침묵하고 있는 사람들은 비겁한 자들로서 사실은 마음으로 안 믿는 사람들입니다. 반대로 정말 열심히 주를 부르고 입으로 믿는다고 시인하는데, 그런데 실제 삶 속에서는 구원받은 자로서의 변화된 삶이 없는 것도 역시 안 믿는 것입니다. 그것이 마음 없이 입으로만 하는 지적 동의수준의 신앙입니다. 예수님은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천국 가는 것이 아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항상 마음과 입술이 같이 반응해야 합니다.


우리의 유일신 고백이... 그리고 이후에 언급되는 벨기에 신앙고백서의 하나님의 속성에 대한 우리의 신앙고백이 그저 지적 동의수준의 입술의 고백인지, 아니면 진정으로 마음의 믿음에서부터 우러나오는 입술의 고백인지 어떻게 알 수 있을까요? 그것은 그 사람의 마음에 삼위 하나님께 대한 감사와 사랑, 경외의 마음이 있느냐로 확실히 구분되어집니다. 참된 믿음은 반드시 예수님께 대한 감사와 사랑, 경외의 마음을 수반합니다. 그리고 주님께 대한 헌신의 마음이 있습니다. 우리 마음에 예수님을 향한 진실한 사랑의 마음이 있습니까? 구원의 은혜에 대한 감사의 마음이 있습니까? 없다면, 암만 우리가 벨기에 신앙고백서 1조의 내용을 열심히 배워도 그것이 입술로만의 고백이 될 뿐입니다. 그러므로 그렇게 되지 않기 위해서, 우리는 말씀과 기도를 통해서 먼저 하나님을 만나야 합니다. 그리고 주님을 내 마음에 모시고 주님과 동행하며 성경에 계시된 하나님의 아름다운 성품들을 실제 삶속에서 맛보아 누려가야 합니다. 그럴 때만이 우리가 마음으로 믿어 입으로 고백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래야만 이 벨기에 신앙고백서 1조의 내용이 복잡하고 어려운 신학적 지식이 아니라, 감사와 찬양과 경배의 제목이 되는 것입니다.


3. 하나님의 속성


“그분은 단순하시고 영적인 존재입니다. 그분은 영원하시며 다 알 수 없으며 보이지 않으시며 불변하시고 무한하시고 전능하시고 완전히 지혜로우시며 공의로우시고 선하시고 모든 선이 넘쳐흐르는 원천이십니다.”


1) 영적인 존재이심


먼저 ‘영이시다’는 말은 물질이 아니시라는 말입니다. 물질이 아니시니 볼 수 없고 만질 수도 없는 분이십니다. 우리 육체의 오감으로는 감각되실 수 없는 분이십니다. 그러면 영이신 하나님을 우리가 어떻게 만나 뵙고 예배드릴 수 있습니까?


“하나님은 영이시니 예배하는 자가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할지니라”(요 4:24)


하나님은 영이시기 때문에 우리가 영으로 만나 뵙고 영으로 예배합니다. 그러므로 하나님 보여 달라고... 그런 기도하면 안 됩니다.


2) 단순하심


그런데 벨기에 신앙고백서는 또한 하나님은 단순하신 분이시라고 표현합니다. 이 단순성, 또는 통일성이라고 하는 하나님의 속성은 사람들에게 좀 낯선 속성인데, 단순하시다는 것은 우선 존재적으로 복합적이지 않으시다는 말입니다. 사람은 몸과 영혼으로 되어 있어서 복합적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오직 영이십니다. 단순하죠? 그리고 단순하다는 말(simple)은 하나님의 속성 면에서도 단순한 통일성을 이루고 있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의 속성은 여러 성품이 복합적으로 섞여 있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 안에 어떤 부분은 사랑이고, 또 어떤 부분은 지혜고, 또 어떤 부분은 전능이고... 이렇게 나누어지고 구분될 수 있는 여러 가지 속성들이 복합되어서 하나님 전체를 구성한다고 생각하면 안 된다는 것입니다. 오히려 하나님 전체가 사랑이십니다. 그리고 하나님 전체가 능력이십니다. 하나님 전체가 지혜이십니다. 성경에 하나님의 존재와 하나님의 속성을 동일시하는 이런 표현들이 많이 나옵니다. 그러면서 각기 속성들이 서로 충돌하지 않는 것입니다. 이러한 통일성을 우리가 단순하시다(simple)라고 말합니다.


3) 영원하심


우리는 영원하면 시간이 끝없이 계속되는 것만을 생각하는데, 그러나 하나님이 영원하시다고 할 때는 시간의 끝없음과 더불어서 또한 시간을 초월하시는 것도 포함합니다. 왜냐하면 시간도 하나님이 만드신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시간에 종속되시는 분이 아니라 도리어 시간을 다스리시고 누리시고 또 초월하시는데, 즉 과거와 현재와 미래에 동시적으로 계시고 또 시간 밖에도 계십니다. 그러한 하나님의 상태를 시간에 종속된 존재인 우리로서는 도무지 가늠할 수가 없습니다. 이것은 아마도 천국에 가서도 모를 하나님의 신비입니다. 이 점에 대해 모세가 이렇게 고백했습니다.


“(1)(하나님의 사람 모세의 기도) 주여 주는 대대에 우리의 거처가 되셨나이다(2)산이 생기기 전, 땅과 세계도 주께서 조성하시기 전 곧 영원부터 영원까지 주는 하나님이시니이다(3)주께서 사람을 티끌로 돌아가게 하시고 말씀하시기를 너희 인생들은 돌아가라 하셨사오니(4)주의 목전에는 천년이 지나간 어제 같으며 밤의 한 경점 같을 뿐임이니이다(5)주께서 저희를 홍수처럼 쓸어 가시나이다 저희는 잠간 자는 것 같으며 아침에 돋는 풀 같으니이다(6)풀은 아침에 꽃이 피어 자라다가 저녁에는 벤바 되어 마르나이다”(시 90:1-6)


하나님의 영원하심을 생각할 때 우리가 절실하게 깨닫게 되는 바는 우리는 아무것도 아니라는 것입니다. 우리 각자의 인생은 그렇게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잠시 있다 사라지는 들풀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영원하신 분이십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이 하나님의 영원하심 앞에서 모세와 같이 겸손하게 엎드려야 하는 것이고, 그 영원하신 하나님만을 사랑하고 섬기며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이 세상도, 이 세상 정욕도 다 지나가지만, 그러나 하나님의 뜻대로 행하는 자는 영원히 거한다고 성경이 약속하기 때문입니다(요일 2:17).


4) 다 알 수 없으심


그러므로 이 영원하신 하나님을 우리가 다 이해할 수 없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모든 존재나 속성이 무한하기 때문에 우리로서는 도무지 하나님을 다 알 수 없습니다. 다 알 수 없다고 했지 도무지 하나도 알 수 없다고 하지 않았습니다. 우리가 말씀을 통해서 하나님을 점차로 알아갈 수 있습니다. 그리고 삶 속에서 체험적으로 하나님을 알아갑니다. 그리고 천국에 가면 이 땅과는 비교할 수 없이 하나님에 대한 지식이 비약적으로 증가할 것입니다. 그러나 그럴지라도 그 하나님에 대한 우리의 지식은 참 하나님의 어떠하심에 비하면 지극히 일부분입니다. 그것은 망망한 바닷물에서 한바가지 물을 떠다가 담아놓은 것과 같습니다. 하나님은 무한하신분이시기 때문에 그분을 알아가는 데 무한한 시간이 필요합니다. 하나님이 만드신 이 세상도 우리가 아직 다 파악하지 못했는데, 어떻게 이 세상을 만드신 하나님을 다 알 수 있단 말입니까? 우리가 삼위일체의 신비를 다 알 수 있습니까? 하나님의 사랑의 깊이를 다 알 수 있습니까? 하나님께서 이 세상에 행하신 구속의 경륜의 깊이를 우리가 다 이해할 수 있습니까? 불가능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의 마땅한 자세는 하나님을 파악해보겠다는 모든 교만을 버리고 다 알 수 없는 그분의 초월성과 위엄 앞에 두렵고 떨림으로 엎드려 하나님께 경배 드리는 것입니다. 그래서 찬송가 410장에서 “아 하나님의 은혜로 이 쓸데없는 자 왜 구속하여 주는지 난 알 수 없도다”라고 고백한 것입니다. 다 알아서 찬송하는 것이 아닙니다. 다 알 수 없기 때문에 찬송하는 것입니다.


“깊도다 하나님의 지혜와 지식의 부요함이여, 그의 판단은 측량치 못할 것이며 그의 길은 찾지 못할 것이로다”(롬 11:33)


5) 볼 수 없으심


볼 수 있다는 것은 우리가 보고 관찰하고 파악할 수 있다는 말입니다. 그러나 볼 수 없는 것은 그것이 안 됩니다. 그래서 볼 수 없는 세계를 우리는 미지의 세계라고 말합니다. 미지의 세계는 사람들에게 그야말로 두려움과 공포의 세계입니다. 하나님이 보이지 아니하시는 분이시다는 고백은 단순히 영이시기 때문에 안 보인다는 신학적 지식을 말하려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은 우리의 손이 닿을 수 없는, 우리의 생각과 이해와 심지어는 우리의 상상으로조차도 다다를 수 없는 곳에 계시는, 두려움과 경외의 대상이라는 것을 말해줍니다.


“오직 그에게만 죽지 아니함이 있고 가까이 가지 못할 빛에 거하시고 아무 사람도 보지 못하였고 또 볼 수 없는 자시니 그에게 존귀와 영원한 능력을 돌릴지어다 아멘”(딤전 6:16)


그리고 하나님이 보이지 않는다는 것은 우리의 예배의 방식을 규정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시내산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빽빽한 구름 가운데서 하신 말씀이 “너희가 아무 형상도 보지 못하였은즉 너희는 아무 형상이라도 새기지 말라”고 하신 것입니다(신 4:15이하). 왜 사람들이 신을 숭배할 때 형상을 만들어 숭배합니까? 신을 손에 닿을 수 있게, 그리고 내 시야에 딱 보에게 만들어 놓아야 자기 집에 모셔놓고 그 신을 나에게 복주는 신으로 내가 조종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시내산에서 임재하실 때 이스라엘 백성들로 하여금 아무 형상도 보지 못하도록 하셔서 자신이 바로 볼 수 없는 하나님이시오, 이방신과 같이 사람들의 조종을 받으실 수 없는 창조주요 주권자이심을 친히 계시하신 것입니다.


그리고 성경은 형상숭배를 하면 안 되는 두 번째 이유로서 하나님께서 친히 자신의 형상을 이 세상에 나타내셨기 때문이라고 말합니다. 곧 사람이 하나님의 형상입니다. 그러나 타락한 인간으로서는 참 하나님의 형상이라고는 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참 하나님의 형상으로 이 세상에 내려오신 것입니다.


“(13)그가 우리를 흑암의 권세에서 건져내사 그의 사랑의 아들의 나라로 옮기셨으니(14)그 아들 안에서 우리가 구속 곧 죄 사함을 얻었도다(15)그는 보이지 아니하시는 하나님의 형상이요 모든 창조물보다 먼저 나신 자니”(골 1:13-15)


그것은 우리를 구속하시기 위해서 그리고 또 우리와 교제 나누시기 위해서 하나님께서 사람의 몸을 입으시고 이 땅에 내려오신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본 자는 아버지를 보았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물론 이 때도 예수님의 겉모습을 보는 것이 곧 하나님을 보는 것이 아닙니다. 여전히 예수 그리스도의 신성은 인성 안에 신비하게 감추어져 있기 때문에 예수님의 신성은 예수님 당시에도 그리고 지금도 그렇고 심지어 천국 가서도 보이지 않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신성은 예수님께서 이 땅에 행하신 여러 가지 눈에 보이는 기적과 이사, 그리고 그분의 가르침과 사역을 통해 그 증거로 나타났습니다. 그것을 사람들이 눈으로 보고, 진리를 깨달아 그 영안이 뜨여짐으로써 영적으로 예수님의 신성을 보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 면에서 예수님은 하나님의 형상이십니다. 형상은 원형을 반영하고 나타내주는 역할을 합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을 이 세상에 눈으로 보이게끔 나타내주신 분이십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크고 두려우신 분으로서 도무지 우리의 손이 닿을 수 없는 곳에 계시고 또 우리의 생각과 이해와 상상조차도 다다를 수 없는 곳에 계시는 그런 분이시지만, 그러나 그렇게 하나님은 영원히 미지의 세계 속의 분으로 계속 계신 것이 아니라, 우리 이 보잘 것 없는 피조물에게 눈에 보이게끔 임하셔서 자기를 계시해주시고 우리로 하나님을 알고 하나님의 영광을 즐거워할 수 있게끔 해주신 것입니다. 이것이 참으로 놀라운 은혜인 것입니다.


6) 불변하심


하나님은 변함이 없으신 분이십니다. 변함에는 일단 시간의 흐름이 있어야 하고, 그 흐름에 따라 존재나 양태가 달라져야 합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시간을 초월하시는 분이시고 또 모든 속성이 완전하시고 무한하시기 때문에 달라진다는 개념자체가 성립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모든 존재와 속성이 영원히 불변하십니다. 이 점에 대해 야고보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각양 좋은 은사와 온전한 선물이 다 위로부터 빛들의 아버지께로서 내려오나니 그는 변함도 없으시고 회전하는 그림자도 없으시니라”(약 1:17)


이런 변함없으신 하나님이 우리의 아버지가 되어 우리를 변함없이 사랑하시고 우리에게 언제나 각양 좋은 은사와 온전한 선물들을 다 허락하여 주시는 것입니다.


7) 무한하심


무한하다는 것은 하나님의 모든 존재와 속성에 한계가 없다는 말입니다. 시간에 무한하신 것을 우리가 영원이라고 말하고, 공간에 무한하신 것을 편재라고 말하고, 능력에 있어서 무한하신 것을 전능이라고 말하고, 지식에 있어서 무한하신 것을 전지라고 말합니다. 하나님의 모든 속성이 그렇게 무한한 것입니다.


8) 전능하심


이 전능하심은 아마도 하나님의 속성 가운데서 사람들에게 가장 인기 있는 속성일 것입니다. 왜냐하면 전능하신 손길로 우리의 소원을 들어달라고 늘 우리가 기도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전능하심은 알라딘 램프와 같은 전능이 아니라, 하나님 자신의 뜻과 계획대로 모든 것을 능히 이루어내시는 전능하심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9) 완전히 지혜로우심


지혜는 통전적인 이해력 또는 세상의 이치를 바르게 깨달은 통찰력을 의미합니다. 또는 그것을 바탕으로 최선의 길을 선택하는 능력을 의미합니다. 비슷한 단어로 슬기, 명철을 들 수가 있습니다. 하나님은 바로 그렇게 지혜로우신 하나님이십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자신의 지혜를 따라 자신의 영광을 위한 최상의, 최고의, 최선의 계획을 세우시고 그 계획대로 이 세상을 창조하시고 지금도 섭리하고 계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지금 온 우주의 역사는 잘못된 길로 가고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계획을 따라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최선의 길을 가고 있습니다.


그런데 여기 우리가 주목해야 할 부분은 하나님께서 그냥 지혜로우신 것이 아니라 “완전히” 지혜로우시다고 하는 표현입니다. 이 “완전히” 라는 표현은 사실 하나님의 모든 속성에 다 적용되는 것입니다. 앞에 ‘영원’, ‘불변’, ‘무한’도 마찬가지였죠. 그러므로 하나님의 모든 존재와 속성은 영원하고 불변하며 무한하고 완전합니다. 특히 ‘무한’과 ‘완전’이 어떻게 다른지 잘 알아야 하는데, 완전은 질적인 면에서 어떠한 불순물도 없음을 의미하고, 무한은 양적인 면에서 한계가 없다는 말입니다.


하나님은 무한히 그리고 완전히 지혜로우시기 때문에 그 누구도 하나님께서 하신 일에 대해 훈계하거나 훈수할 수 없습니다. 지금은 “하나님이 왜 이렇게 하셨을까?”하는 의문이 드는 일이 많이 있을지라도, 그것은 순전히 우리 편에서 그렇게 느끼는 것일 뿐이고, 마지막 때가 되어 모든 일의 결말을 보게 되면, 우리는 그제야 하나님이 행하신 모든 일이 하나님의 완전하고 무한한 지혜로 말미암았음을 깨닫고, 감탄하면서 하나님은 완전히 지혜로우시다고 탄복할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10) 공의로우심


공의와 선, 그리고 하나 더 이야기 하자면, 거룩하심은 모두 다 하나로 연결되어 있는 하나님의 도덕적인 속성입니다. 우리의 도덕성은 하나님이 우리에게 명하신 법과 질서에 우리가 잘 부합하면 그것이 우리의 선이고, 거룩이고, 공의로움이지만, 하나님은 하나님 위에 어떤 법이 있어서, 그 법에 따라 하나님이 선하고 거룩하시고 공의로우신 것이 아니라, 하나님 자신이 법이기 때문에, 하나님 자신이 선 그 자체이신 것이고, 하나님 자신이 거룩하심, 공의로우심 그 자체이신 것입니다.


그래서 사실 성경전체에서 말하는 ‘공의’라는 개념이 ‘선’과 ‘거룩’이라는 개념과 섞여서 상당히 복합적인 개념으로 제시되고 있지만, 각설하고 여기서 우리는 단순히 우리 인생들에게 법을 명하시고 그 법대로 우리 인생을 통치하시는 하나님의 도덕적 통치에 대해서만 관심을 가지려고 합니다. 하나님이 공의로우시다는 말은 바로 법의 집행의 문제로서 의인은 상주고 죄인은 벌주는 배분적 정의를 말합니다.


그런데 모든 인생들이 다 범죄 했기 때문에 하나님이 죄를 죄대로 다루시면 그 누구도 하나님 앞에 설 수 없습니다. 우리가 이 자리에 서서 하나님을 예배하는 것도 하나님의 공의에 의하면 있을 수 없는 일이죠. 그런데 어떻게 저와 여러분이 이렇게 교회 가운데서 용납되어 하나님을 예배할 수 있는 것입니까? 그것이 다 누구 때문이죠? 예수님 때문이죠.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내리실 형벌을 예수님에게 다 쏟아 부으셔서 자신의 공의를 만족시키고, 또 예수님의 의로운 행실을 우리의 행실로 여겨주셔서 우리를 기쁘게 용납해주신 것입니다. 그냥 우리 죄를 눈감아 주신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에게 우리의 죗값을 하나도 빠짐없이 철저하게 물으셔서 다 갚게 하실 정도로 하나님은 철두철미하신 분이십니다. 우리가 값없이 구원받았지만, 그냥 공짜로 주어진 것이 아니라 아주 값비싼 대가를 치름을 통해 주어진 것입니다. 그러므로 자기 아들까지 내려 보내주셨는데도 그 아들 예수를 대적하고 예수와 교회를 핍박하는 이 세상을 하나님이 어떻게 가만히 놔두실 수가 있겠습니까? 반드시 모든 죄인들에 대해서 현세와 내세에서 벌하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현세에서는 하나님이 죄인들에게 오래 참으시고 또 부분적인 형벌만 내리시고, 오히려 일반은총을 베풀어주십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이것을 어떻게 착각하느냐 하면, 죄를 지어도 별일 없으니깐 하나님이 안 계신다고 착각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아주 악행하는 자들이 도리어 선을 행하는 자들보다 더 행복하게 잘 살아가는 것을 보면서, 하나님이 살아 계시다면 어떻게 저럴 수 있냐고 하면서 항변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알아야 합니다. 지금은 뭔가 혼란스럽고 하나님의 정의가 상실된 것 같이 보여도, 마지막 때가 되면 결국에는 하나님께서 자신의 공의를 온전히 실현하실 것이라는 겁니다. 즉 각 사람이 죽을 때, 그리고 주님이 재림하실 때 모든 죄들에 대해서 미루어두었던 죄의 형벌을 그때가 되면 한꺼번에 내리실 것입니다. 그래서 각 사람이 행한 대로 다 갚으실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영원한 지옥형벌입니다. 이것이 철두철미한 하나님의 공의로우심입니다.


11) 선하심


그리고 하나님의 선하심은 히브리어 ‘토브’인데, ‘좋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이 선하시다는 말은 하나님이 좋으신 분이시라는 말입니다. 하나님이 왜 우리에게 좋으신 분이십니까? 우리를 사랑하셔서 우리에게 긍휼과 자비와 구원의 은혜를 베푸시고, 우리에게 날마다 복주시며, 우리를 신실하게 인도하시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이 외에도 하나님이 왜 좋으신 분이신지 여러 가지 이야기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것이 다 하나님의 선하심 안에 들어가 있는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벨기에 신앙고백서는 하나님의 속성에 대해서 사랑, 거룩, 인자, 자비, 긍휼, 진실 등등에 대해 언급하지 않는데, 그 이유는 선하심 안에 그 모든 것들이 다 들어가 있다고 보기 때문입니다.


12) 모든 선의 원천


그리고 마지막으로 하나님은 모든 선의 원천이라고 고백합니다.


“예수께서 길에 나가실새 한 사람이 달려와서 꿇어 앉아 묻자오되 선한 선생님이여 내가 무엇을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이까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가 어찌하여 나를 선하다 일컫느냐 하나님 한 분 외에는 선한 이가 없느니라”(막 10:17-18)


하나님 한 분만 선하다는 것은 예수님은 선하지 않다는 말이 아닙니다. 예수님은 마치 이렇게 말씀하시는 것 같습니다. “나를 선한 인간 정도로 보았느냐? 그것은 틀렸다. 두 가지 점에서 틀렸는데, 하나는 모든 인간은 하나도 선하지 않다는 것이다. 오직 하나님만이 선하시다. 그리고 두 번째로 나는 그냥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이다. 나는 하나님으로서 선하다.” 그러므로 삼위일체 하나님만이 선하십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우리를 예수와 연합하게 하셔서 우리로 거룩하고 선한 열매를 맺게 하셨습니다. 그 선함은 우리 스스로 맺은 열매가 아니라, 예수님으로부터 받은 은혜의 결과입니다. 그러므로 무슨 선한 행위든지 그것이 자신에게서 나온 것인 양 교만하게 생각할 수 없습니다. 삼위일체 하나님만이 모든 선의 원천이시므로 모든 영광은 하나님께 돌려져야 합니다.


4. 결론 : 하나님을 두려워하고 사랑하라


그러므로 우리가 이 내용만 보아도 하나님이 얼마나 크고 두려우신 분이신가 하는 것을 보게 되고, 또 하나님이 얼마나 선하시고 아름다우신 분이신가 하는 것을 보게 됩니다. 우리는 이 하나님의 속성들 앞에서 우리가 얼마나 아무것도 아닌 피조물이며, 얼마나 비참한 죄인인가를 깨닫고 하나님을 두려워함으로 그 앞에 엎드려야 합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베푸신 은혜와 사랑을 깨닫고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하나님께 감사와 찬양과 경배를 올려드려야 합니다.


특별히 오늘날은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마음, 곧 경외심이 회복되어야 합니다. 왜냐하면 교회마다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만 외치면서 하나님을 너무 친근한 분으로 또는 좀 가볍게 생각하는 풍조가 팽배해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경외함이 없으면 그것은 신앙이 아닙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시내산에서 빽빽한 구름 가운데 친히 하나님의 영광과 위엄을 목도하고 하나님의 어떠하심을 체험적으로 경험했을 때, 그들은 죽을 것 같은 공포와 두려움에 사로잡혀서 하나님을 두려워하면서 모세로 대신 말씀해달라고 그리고 모세가 말해도 다 듣겠다고 청원했습니다. 그때 하나님이 “그들의 말이 옳다. 다만 항상 그들이 이 같은 마음을 품어 나를 경외하며 나의 모든 명령을 지켜서 복 받기를 원한다.”고 말씀하신 것입니다(신 5:28-29). 마찬가지로 우리도 하나님을 참되게 경험해서 하나님이 참으로 두려우신 분이신줄 알아야 합니다. 단순하시고 영원하신 유일하신 한 분 하나님, 영원하시고 다 알 수 없고 보이지 아니하시고 불변하시고 무한하신 하나님, 전능하시고 완전히 지혜로우시고, 공의로우시고, 선하신 하나님, 모든 선의 원천이신 하나님을 참되게 깨달아야 합니다. 그리하여 그분 앞에서 우리 자신이 어떤 자인지 깨닫고 그 광대하시고 두려우신 하나님 앞에 겸손히 엎드려야 합니다. 신앙은 바로 여기서부터 시작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얼마나 두려우신 분이시지, 그리고 또한 얼마나 아름답고 은혜와 사랑으로 충만하신 분이신지 우리가 하나님의 속성들을 날마다 더 깊이 깨달아 갈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그리고 우리의 삶속에서 그분과 동행하면서 과연 그러한 분이심을 실제로 맛보고 누리며 살아가는 우리 모두가 되게 하여주시기를 기도합니다. 그리하여 날마다 하나님을 경외하며 하나님을 사랑하면서 그 뜻에 순종하며 살아가는 우리 모두가 되게 하여주시기를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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