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회 수 735 댓글 0
?

단축키

Prev이전 문서

Next다음 문서

크게 작게 위로 아래로 댓글로 가기 인쇄
?

단축키

Prev이전 문서

Next다음 문서

크게 작게 위로 아래로 댓글로 가기 인쇄
Extra Form
설교자 최상범
제13조
문답내용 제 13 조 하나님의 섭리
The Providence of God

우리는 선하신 하나님께서 만물을 창조하신 후에 그 만물을 유기하시거나(abandon) 운(fortune) 혹은 우연(chance)에 맡기신 것이 아니라, 당신의 거룩한 뜻을 따라 친히 다스리시고 통치하시기 때문에, 이 세상의 그 어떤 일이라도 하나님의 허락 없이는 일어날 수 없음을 믿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저질러지는 죄의 조성자도 아니시고, 그 죄들에 대해 책임을 지셔야 하는 것도 아닙니다. 왜냐하면 그의 능력과 선은 너무도 위대하고 측량할 수 없을 정도여서 악마와 악인들이 비록 불의하게 행할지라도 그는 가장 탁월하고 정의로운 모양으로 자기 일을 정리하시고 실행하시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인간의 이해를 초월하는 그분의 일하심에 대해서 우리는 우리의 능력에 허용된 범위를 넘어서는 호기심으로 질문을 가져서는 안 됩니다. 오히려 최대의 겸손과 경외심으로 우리에게 감춰진 하나님의 의로우신 판단을 찬양하고, 우리는 스스로 그리스도의 제자(pupils of Christ)임에 만족하여, 이러한 한계를 넘지 않고 그의 말씀 안에서 우리에게 가르치시는 것만을 배워야 할 것입니다.
이 교리는 우리에게 말할 수 없는 위로를 주는데, 그 이유는 어떠한 일도 우리에게 우연히 일어나지 않고, 오직 우리의 은혜로우신 하늘 아버지의 지시에 따라 일어나는 것임을 배우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아버지의 돌보심으로 우리를 감찰하시고, 모든 피조물들을 그의 능력 아래 붙드셔서 우리의 머리카락 하나라도 (그가 다 세신 바 되었기 때문에), 참새 한 마리라도 우리 아버지의 뜻이 없이는 땅에 떨어질 수 없습니다(마10:29-30). 우리가 이것을 신뢰하는 것은 그가 마귀와 모든 원수들을 제압하심으로 하나님의 허락과 뜻 없이는 그것들이 우리를 해할 수 없음을 알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께서 만물에 아무 상관하지 않으시며 다만 우연에 맡겨두셨다고 말하는 에피쿠로스 학파(Epicureans)의 가증스런 오류를 배격합니다.
강설날짜 2015-03-01

벨기에 신앙고백서 제13조 강설


하나님의 섭리


제 13 조  하나님의 섭리

The Providence of God


우리는 선하신 하나님께서 만물을 창조하신 후에 그 만물을 유기하시거나(abandon) 운(fortune) 혹은 우연(chance)에 맡기신 것이 아니라, 당신의 거룩한 뜻을 따라 친히 다스리시고 통치하시기 때문에, 이 세상의 그 어떤 일이라도 하나님의 허락 없이는 일어날 수 없음을 믿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저질러지는 죄의 조성자도 아니시고, 그 죄들에 대해 책임을 지셔야 하는 것도 아닙니다. 왜냐하면 그의 능력과 선은 너무도 위대하고 측량할 수 없을 정도여서 악마와 악인들이 비록 불의하게 행할지라도 그는 가장 탁월하고 정의로운 모양으로 자기 일을 정리하시고 실행하시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인간의 이해를 초월하는 그분의 일하심에 대해서 우리는 우리의 능력에 허용된 범위를 넘어서는 호기심으로 질문을 가져서는 안 됩니다. 오히려 최대의 겸손과 경외심으로 우리에게 감춰진 하나님의 의로우신 판단을 찬양하고, 우리는 스스로 그리스도의 제자(pupils of Christ)임에 만족하여, 이러한 한계를 넘지 않고 그의 말씀 안에서 우리에게 가르치시는 것만을 배워야 할 것입니다.


이 교리는 우리에게 말할 수 없는 위로를 주는데, 그 이유는 어떠한 일도 우리에게 우연히 일어나지 않고, 오직 우리의 은혜로우신 하늘 아버지의 지시에 따라 일어나는 것임을 배우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아버지의 돌보심으로 우리를 감찰하시고, 모든 피조물들을 그의 능력 아래 붙드셔서 우리의 머리카락 하나라도 (그가 다 세신 바 되었기 때문에), 참새 한 마리라도 우리 아버지의 뜻이 없이는 땅에 떨어질 수 없습니다(마10:29-30). 우리가 이것을 신뢰하는 것은 그가 마귀와 모든 원수들을 제압하심으로 하나님의 허락과 뜻 없이는 그것들이 우리를 해할 수 없음을 알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께서 만물에 아무 상관하지 않으시며 다만 우연에 맡겨두셨다고 말하는 에피쿠로스 학파(Epicureans)의 가증스런 오류를 배격합니다. 


지난주 제12주 내용에서 섭리에 관하여 이런 내용이 있었습니다.


또한 우리는 성부께서 자신의 영원한 섭리와 무한한 능력으로 모든 천지만물을 계속해서 유지하시고(sustain) 통치하심(govern)으로써 모든 피조물로 하여금 인간을 섬기도록 하셨으며, 마침내는 인간으로 하여금 그의 하나님을 섬기도록 하셨음을 믿습니다. 


여기에 섭리에 대한 정확한 정의가 나옵니다. 섭리는 첫째로 창조하신 모든 세계를 전능한 능력으로 유지하시고 보존하시는 것입니다. 13조 마지막 부분에 언급되는 에피쿠로스학파는 이 사실을 부정합니다. 그들은 하나님을 마치 시계를 만들고 나서 태엽을 감아놓고 시계 그 자체로 움직이도록 내버려두고 자기는 집에 가버리는 시계제조업자처럼 생각합니다. 결코 그럴 수 없습니다. 하나님은 창조하신 후에 피조세계를 내던져 놓으신 것이 아니라, 도리어 모든 만물을 친히 사랑으로 돌보시고 먹이시고 입히셔서 모든 피조물을 유지 보존하시는 것입니다. 


“이는 하나님의 영광의 광채시요 그 본체의 형상이시라 그의 능력의 말씀으로 만물을 붙드시며 죄를 정결케 하는 일을 하시고 높은 곳에 계신 위엄의 우편에 앉으셨느니라”(히 1:3)

“...그는 우리 각 사람에게서 멀리 떠나 계시지 아니하도다 우리가 그를 힘입어 살며 기동하며 있느니라...”(행 17:27-28)


그러므로 이 세상의 모든 피조물은 마치 갓난아이가 엄마 없이는 도무지 생존할 수 없는 것처럼 그렇게 그 존재와 삶에 있어서 하나님을 전적으로 의지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은 그저 모든 피조물의 생존을 위해 힘과 에너지와 자원을 공급해주시는 건전지 역할만 하시는 것입니까? 아닙니다. 하나님은 모든 피조물을 유지 보존 하실 뿐만 아니라 친히 다스리십니다. 이것이 섭리의 두 번째 의미입니다. 곧 하나님께서는 모든 만물의 생사화복을 주관하시는 것입니다(시 104편 참조). 그리고 생사화복만 주관하시는 것이 아니라 만물의 모든 행위도 주관하십니다. 그런데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이것을 부정합니다. 그들은 하나님께서 모든 만물을 유지 보존하시며 또 생사화복도 주관하시지만, 각 피조물들이 어떤 행동을 할지에 대해서는 그들에게 준 자유의지에 전적으로 맡겨두셨다고 주장합니다. 그렇게 주장하는 이유는 만일 하나님께서 정해 놓으신 대로 우리가 생각하고 말하고 행동할 수밖에 없다면, 우리는 꼭두각시나 로봇과 같은 존재에 불과하게 되고, 그렇게 되면 우리의 자유의지와 책임, 우리의 인격이 말살된다는 것입니다. 물론 이 말은 이성적으로 충분히 일리 있는 말입니다. 왜냐하면 우리의 이성에 있어서는 하나님의 주권과 인간의 자유의지(책임)가 반드시 충돌될 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알아야 할 점은 우리의 사고에서 이것이 충돌되니깐 하나님 편에서도 충돌될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하나님을 인간수준으로 끌어내리는 것이라는 겁니다. 우리 편에서는 이 문제가 충돌될 수밖에 없지만, 그러나 하나님께는 그것이 우리가 이해할 수 없는 방식으로 놀랍게 하나로 조화를 이루고 있음을 우리는 믿고 고백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의 자유의지와 책임을 말살하지 않으면서 또한 하나님의 이 절대적이고 주권적인 섭리를 고백해야 합니다. 참되게 하나님을 믿는 자는 언제나 벨기에 신앙고백서처럼 다음과 같이 고백할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는 선하신 하나님께서 만물을 창조하신 후에 그 만물을 유기하시거나(abandon) 운(fortune) 혹은 우연(chance)에 맡기신 것이 아니라, 당신의 거룩한 뜻을 따라 친히 다스리시고 통치하시기 때문에, 이 세상의 그 어떤 일이라도 하나님의 허락 없이는 일어날 수 없음을 믿습니다.


여기 보면 “당신의 거룩한 뜻을 따라”라는 말이 나옵니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창세전에 무릇 되어질 모든 일을 계획하셨다는 것을 말해줍니다. 이것이 영원 전 작정이죠. 그리고 하나님은 일어나도록 계획하신 일을 일어나도록 다스리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세상의 그 어떤 일이라도 하나님의 허락 없이는 일어날 수 없는 것입니다.


“너희는 옛적 일을 기억하라 나는 하나님이라 나 외에 다른 이가 없느니라 나는 하나님이라 나 같은 이가 없느니라 내가 종말을 처음부터 고하며 아직 이루지 아니한 일을 옛적부터 보이고 이르기를 나의 모략이 설 것이니 내가 나의 모든 기뻐하는 것을 이루리라 하였노라 내가 동방에서 독수리를 부르며 먼 나라에서 나의 모략을 이룰 사람을 부를 것이라 내가 말하였은즉 정녕 이룰 것이요 경영하였은즉 정녕 행하리라”(사 46:9-10)

“모든 일을 그 마음의 원대로 역사하시는 자의 뜻을 따라 우리가 예정을 입어 그 안에서 기업이 되었으니”(엡 1:11)

“오직 우리 하나님은 하늘에 계셔서 원하시는 모든 것을 행하셨나이다”(시 115:3)

“마음의 경영은 사람에게 있어도 말의 응답은 여호와께로서 나느니라 ... 사람이 마음으로 자기의 길을 계획할지라도 그 걸음을 인도하는 자는 여호와시니라 ... 사람이 제비는 뽑으나 일을 작정하기는 여호와께 있느니라”(잠 16:1,9,33)

“왕의 마음이 여호와의 손에 있음이 마치 보의 물과 같아서 그가 임의로 인도하시느니라”(잠 21:1)


그래서 모든 인생들이 자신의 자유의지로 자기 마음대로 결정하고 행동하는 것 같아도, 그것이 다 하나님의 작정 가운데 있는 것이고, 하나님의 섭리 하에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천사의 타락이나 아담의 범죄도, 그리고 모든 인류의 모든 범죄까지도 전부다 하나님이 작정하셨고 섭리하신 것입니까? 벨기에 신앙고백서는 그렇다고 고백합니다. 그리고 벨기에 신앙고백서는 하나님이 죄를 작정하시고 섭리하셨지만 죄의 조성자는 아니라고 고백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저질러지는 죄의 조성자도 아니시고, 그 죄들에 대해 책임을 지셔야 하는 것도 아닙니다. 


이 부분이 어렵습니다. 죄는 하나님의 영원하신 작정과 섭리에 의해 발생했지만, 하나님께는 책임이 없다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이 난제를 해결하기 위해 의지의 행위와 허용을 구별하여 설명합니다. 즉 하나님은 천사나 사람들이 죄를 짓겠다고 나설 때 그것을 허용하신 것이지, 하나님께서 적극적으로 그들의 범죄를 의도하시거나 하나님의 의지에 의해 이루어지는 일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칼빈은 그의 기독교 강요에서 이런 생각을 강력하게 비판합니다(기독교강요 1권 18장 참조). 칼빈은 오히려 모든 범죄에 대해서 하나님이 그저 수동적으로 마지못해 허용하시는 것이 아니라, 도리어 창세전에 계획한 바대로 적극적인 의지를 가지고서 섭리하신다고 주장합니다. 이에 대한 근거구절로 칼빈은 여러 구절을 제시하지만, 우리는 단 하나의 사건만 봐도 이 내용을 확신할 수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입니다. 유대인들과 종교지도자들, 그리고 로마정권이 합세하여 무고한 예수를 죽이고자 하였을 때 하나님께서는 그들의 악행을 마지못해 허락하셨습니까? 아닙니다. 하나님은 오히려 예수의 죽음을 적극적으로 의도하셨습니다. 그 일은 우리를 구속하시기 위한 하나님의 분명한 의지에 의해서 생겨난 일입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적극적으로 의도하셨다고 했으니, 하나님이 친히 유대인들과 종교지도자들, 그리고 빌라도에게 예수를 못 박아 죽이라고 명령하셨거나 또는 그렇게 하도록 친히 그들의 마음을 움직이셨거나 또는 그런 마음이 들도록 유혹하셨습니까? 아닙니다. 하나님은 그런 악행을 명하신 적도 없고 명하실리도 없는 것입니다. 무고한 자를 누명 씌워 죽이는 것은 하나님 앞에서 사형당해 마땅한 극악행위입니다. 하나님의 선하신 뜻은 오히려 그런 무고한 자를 누명에서 벗겨 살려주는 것입니다. 그리고 유대인과 종교지도자들, 빌라도는 마땅히 무고한 예수님을 살려주는 일을 했어야 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자신들의 악한 마음을 따라 하나님의 선하신 교훈을 파괴하고 예수를 죽이고자 했습니다. 그런데 아이러니하게도 그렇게 예수님이 죽임 당하는 것이 또한 하나님의 작정적 뜻이었습니다. 여기서 드러나는 것처럼 하나님의 작정적 뜻과 하나님의 교훈적 뜻 사이에는 충돌이 있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의 작정적인 뜻을 이뤄드렸다고 해서 꼭 선을 행한 것은 아닙니다. 다시 말해 가룟 유다가 예수님을 팔아 하나님의 작정을 이루어드렸다고 해서 상 받아야 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물론 가룟유다 때문에 하나님의 작정이 이루어진 것은 사실이나, 그의 행위는 여전히 하나님 앞에서 형벌 받아 마땅한 악한 행위인 것입니다. 


결국 예수님이 죽임 당하신 사건에 하나님과 사람, 사단이 함께 일하지만, 그 일을 하는 동기와 역사 방식에 있어서 차이가 나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죄를 작정하시고 섭리하셨음에도 불구하고 죄에 대한 책임이 없으신 것입니다. 먼저 그 동기에 있어서 다릅니다. 즉 하나님께서 예수로 하여금 십자가에 죽임당하도록 역사하신 것은 우리를 구원하시려는 선하신 동기에 의해서 그렇게 하신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를 실제로 죽이기 위해 합세한 사람들과 그들 배후에서 역사한 사단 마귀의 의도와 목적은 하나님과는 정반대로 매우 악한 것입니다. 


그리고 역사방식에 있어서도 하나님과 사람과 사단마귀가 다릅니다. 하나님이 이 일을 섭리하셨지만, 하나님이 직접 예수를 죽이신 것이 아닙니다. 악하게 예수님을 실제로 죽인 자들은 바로 유대민중들, 종교지도자들, 로마사람들입니다. 그리고 그 배후에 역사한 사단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은 이 과정에서 어떻게 일하시고 역사하셨습니까? 하나님은 그들이 자신의 악한 본성대로 행하고자할 때 그들의 정욕대로 행하도록 내버려두시는 방식으로 일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이 일이 일어났음에도 불구하고 예수 죽인 죄에 대한 책임은 없으신 것입니다. 참으로 하나님은 그들의 악행까지도 탁월하게 역이용하셔서 자신의 작정을 친히 이루신 것입니다. 그래서 이 모든 과정을 통해서 하나님의 선하심과 의로움은 흠 없이 빛나는 반면, 사단과 사람들은 자신들의 사악함을 스스로 드러내게 됨으로써 예수를 죽인 죄에 대한 형벌을 면치 못하는 것입니다. 


천사의 타락이나 아담의 범죄도 다 이런 구조로 생각하면 됩니다. 즉 하나님께서는 선하신 목적과 뜻 가운데 천사와 아담이 범죄할 것을 미리 계획하셨고, 그 계획대로 섭리하시는데, 그렇다고 하나님이 천사와 아담으로 하여금 그렇게 타락하도록 그 마음을 조작하신 것이 아니라, 천사와 아담 본인이 자신의 자유의지로 하나님께 반역한 것입니다. 다만 하나님은 천사와 아담이 그 악한 정욕대로 행하도록 내버려두신 것이고, 그렇게 하여 이 세상에 죄가 있도록 계획하신 바를 성취하신 것입니다. 때문에 하나님의 선한 동기와 섭리의 방식 때문에 하나님은 그 죄에 대한 책임이 없으시고, 반대로 사단과 악인들은 자신들의 죄에 대한 하나님의 형벌을 피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가 여기서 가지게 되는 중요한 질문은 천사의 타락과 아담의 범죄를 계획하시고 섭리하신 하나님의 선하신 동기가 도대체 무엇인가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창세전에 작정하실 때 얼마든지 마음대로 작정하실 수 있으셨을 텐데 왜 하필 이 세상에 죄가 있도록 작정하시고 또 천사의 범죄와 아담의 타락을 섭리하셔서, 이렇게 비참한 세상이 되게 하셨는가?”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가 굉장히 궁금해 하는 내용인데, 성경이 이에 대해서 말해주고 있습니까? 침묵합니까? 침묵합니다. 다만 약간의 힌트는 주셨습니다. 그것은 죄가 더한 곳에 은혜가 더하게 되었다는 말씀입니다(롬 5:20). 그리고 두 번째로 하나는 귀히 쓸 그릇을 하나는 천히 쓸 그릇을 만들 권한이 있는 토기장이의 비유입니다. 


“(21)토기장이가 진흙 한 덩이로 하나는 귀히 쓸 그릇을, 하나는 천히 쓸 그릇을 만드는 권이 없느냐(22)만일 하나님이 그 진노를 보이시고 그 능력을 알게 하고자 하사 멸하기로 준비된 진노의 그릇을 오래 참으심으로 관용하시고(23)또한 영광 받기로 예비하신 바 긍휼의 그릇에 대하여 그 영광의 부요함을 알게 하고자 하셨을지라도 무슨 말 하리요”(롬 9:21-23)


이 힌트들을 종합해보면 결국 하나님께서는 이 세상에 죄가 있도록 하심을 통해서 죄인들을 준엄하게 심판하시어 자신의 진노의 능력과 공의로운 성품을 이 세상 가운데 드러내고자 하신 것입니다. 그리하여 더더욱 택자들을 그러한 진노의 심판에서 구원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한량없는 은혜의 영광을 시간과 공간 가운데 찬란히 펼쳐보이시고자 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아담의 범죄로 이렇게 죄 가운데 너무나 불행하고 비참한 삶을 살아가게 된 것도 사실이지만, 그러나 한편으로 (결과적으로 말하자면...) 아담이 타락하지 않았다면, 그래서 이렇게 우리가 비참하게 되지 않았다면 하나님의 거저 주시는 은혜의 영광도 우리는 알지 못했을 것입니다. 탕자가 아버지를 떠나 먼 나라로 떠나지 않았다면, 늘 마음조리며 기다리시는 아버지의 사랑, 값없이 용서해주시고 받아주시는 아버지의 사랑도 그는 알지 못했을 것입니다. 바로 이러한 하나님의 공의로움과 지극한 사랑과 은혜의 영광을 드러내기 위해서 죄가 이 세상에 있도록 작정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천사가 하나님을 대적하여 일어나고 아담이 하나님께 반역하여 이 땅에 사탄의 나라를 세우고, 그렇게 온 세상 사람들이 하나님께 마구 범죄하며 살아가는 것이... 그리고 이 세상에 온갖 비참한 일들이 생기는 것이... 하나님의 선하신 계획에 착오가 생겨서 그런 것이 아니라, 도리어 그렇게 되는 것이 하나님의 계획의 성취인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 눈으로 볼 때는 세상이 온통 죄와 비참한 일들로 혼란스럽고 뒤엉킨 것 같이 보여도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무한한 능력과 지혜를 따라 이 시끄러운 세상을 가장 탁월하고 정의롭게 정리해 가고 계신 것입니다. 그리하여 궁극적으로는 자신의 영광만을 드러내시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악을 합력하여 선을 이루시는 하나님의 전능하심입니다. 그래서 이런 죄에 대한 하나님의 섭리를 묵상하면 할수록 우리는 하나님의 전능하신 능력과 지혜와 선하심의 위대함과 무한함을 찬양하지 않을 수 없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의 능력과 선은 너무도 위대하고 측량할 수 없을 정도여서 악마와 악인들이 비록 불의하게 행할지라도 그는 가장 탁월하고 정의로운 모양으로 자기 일을 정리하시고 실행하시기 때문입니다.


결론적으로 이렇게 하나님은 모든 것을 자신의 영광을 위해 계획하시고 그 계획을 이루시기 위해서 창조하셨을 뿐만 아니라 친히 다스리셔서 그 뜻을 능히 성취하시는 분이십니다. 그러면 이러한 하나님의 섭리에 대한 우리의 자세가 어떠해야 합니까? 먼저 첫 번째로 겸손히 송영적 찬양을 올려드려야 합니다.


그리고 인간의 이해를 초월하는 그분의 일하심에 대해서 우리는 우리의 능력에 허용된 범위를 넘어서는 호기심으로 질문을 가져서는 안 됩니다. 오히려 최대의 겸손과 경외심으로 우리에게 감춰진 하나님의 의로우신 판단을 찬양하고, 우리는 스스로 그리스도의 제자(pupils of Christ)임에 만족하여, 이러한 한계를 넘지 않고 그의 말씀 안에서 우리에게 가르치시는 것만을 배워야 할 것입니다.


앞서 말씀드린 (죄를 작정하신 하나님의 의도에 관한) 내용은 사실 우리의 이성으로는 이해가 되지 않는 내용입니다. 우리는 당장에 “뭐라고? 자신의 은혜로운 성품을 더 찬란히 드러내시려고 죄를 작정하셨다고? 그게 말이 되는가? 결국 죄 때문에 이렇게 비참한 세상이 되었고, 심지어는 하나님 자신이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셔야만 했는데, 그 이유가 자신의 은혜를 더 빛나게 나타내기 위해서라고? 꼭 그렇게까지 하셔야했는가? 왜 그렇게 하셨지?”라는 반응을 보일 수밖에 없습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작정과 섭리의 의미가 인간의 이해를 초월한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이 사실을 우리는 로마서에서도 발견할 수 있습니다.


“(30)너희가 전에 하나님께 순종치 아니하더니 이스라엘에 순종치 아니함으로 이제 긍휼을 입었는지라(31)이와 같이 이 사람들이 순종치 아니하니 이는 너희에게 베푸시는 긍휼로 이제 저희도 긍휼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32)하나님이 모든 사람을 순종치 아니하는 가운데 가두어 두심은 모든 사람에게 긍휼을 베풀려 하심이로다(33)깊도다 하나님의 지혜와 지식의 부요함이여, 그의 판단은 측량치 못할 것이며 그의 길은 찾지 못할 것이로다”(롬 11:30-33)


사도바울은 로마서 10장에서 11장까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강퍅하게 하신 섭리의 의도를 서술했습니다. 그리고 그 결론으로 “모든 사람을 순종치 아니하는 가운데 가두어 두심은 모든 사람에게 긍휼을 베풀려 하심이로다”라고 했습니다. 그러면 우리는 당장 “아니... 모든 사람에게 긍휼을 베푸시려면 맨 처음부터 긍휼을 베푸시면 되지, 왜 순종치 아니하는 가운데, 그리고 그 비참함 가운데 가두어두신 후에 긍휼을 베푸시는가?”라고 반응을 보일 수밖에 없습니다. 그것은 사도바울도 마찬가지입니다. 사도바울 본인도 그렇게 결론을 말했지만, 그것이 상식적으로 말이 안 된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깊도다 하나님의 지혜와 지식의 부요함이여, 그의 판단은 측량치 못할 것이며 그의 길은 찾지 못할 것이로다”라고 하면서 하나님께 송영적 찬양을 올려드렸던 것입니다. 이렇게 하나님께서 작정하시고 섭리하시는 그 모든 일들에 담긴 하나님의 의중은 우리가 이해하기에 너무 심오하고 그 깊이가 무한하기 때문에, 우리가 그 깊은 뜻을 다 헤아려 알 수 없는 것입니다. 그것은 우리의 이해를 초월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일하심 앞에서 우리의 마땅한 반응은 겸손과 송영적 찬양입니다. 


여러분 우리가 만사를 성취하시는 하나님의 일을 알 수 없습니다. 아니... 물론 상당히 많이 알고 있습니다. 구약백성들은 모른다고 했지만, 우리는 모른다고 하면 안 됩니다. 우리는 신약백성으로서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경륜의 비밀을 다 아는 자들이고, 그래서 온 세상이 무엇을 목표로 지금 진행되고 있고 또 결말이 어떻게 될지 우리는 다 알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우리가 전부다 알고 있고, 또 하나님의 의중의 깊이를 충분히 알고 있다고 생각한다면 그것만큼 교만한 착각이 없는 것입니다. 우리는 아직도 모르는 것이 너무나 많고, 이미 알고 있는 내용에 대해서도 그 하나님의 의중의 참된 깊이를 결코 다 헤아려 알 수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겸손해야 합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무한한 지혜를 찬양해야 합니다.


그리고 두 번째로 우리는 하나님의 섭리의 교리 앞에서 어떤 자세를 가져야 하느냐 하면, 위로를 받고 확신해야 합니다.


이 교리는 우리에게 말할 수 없는 위로를 주는데, 그 이유는 어떠한 일도 우리에게 우연히 일어나지 않고, 오직 우리의 은혜로우신 하늘 아버지의 지시에 따라 일어나는 것임을 배우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아버지의 돌보심으로 우리를 감찰하시고, 모든 피조물들을 그의 능력 아래 붙드셔서 우리의 머리카락 하나라도 (그가 다 세신 바 되었기 때문에), 참새 한 마리라도 우리 아버지의 뜻이 없이는 땅에 떨어질 수 없습니다(마10:29-30). 우리가 이것을 신뢰하는 것은 그가 마귀와 모든 원수들을 제압하심으로 하나님의 허락과 뜻 없이는 그것들이 우리를 해할 수 없음을 알기 때문입니다.


섭리의 교리를 통해서 우리가 위로를 받고 확신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섭리 교리를 바르게 적용한 것입니다. 절대로 섭리교리를 적용해서 운명론으로 가면 안 됩니다. “하나님이 다 작정하셨기 때문에 우리가 아무리 노력하고 애써도 소용없다...” 그런 식으로 말하면서 우리의 자유의지와 책임을 말살하는 식으로 나아가면 안 되는 것입니다. 


도리어 하나님의 작정과 섭리하심을 참으로 알고 믿는 자는 그 교리에서 위로를 얻고 더욱 확신가운데 책임 있는 삶을 살게 됩니다. 사도바울이 고린도에서 복음을 전하는데, 하도 핍박도 많고 열매도 별로 없으니깐 낙심하고 있었습니다. 그때 하나님께서 꿈에 나타나셔서 “이 성중에 내 백성이 많다”고 하시면서 하나님의 영원전의 작정과 계획을 말씀해주셨습니다. 그때 바울의 반응이 무엇입니까? “하나님이 작정하셨고 또 친히 섭리하실 것이니 내가 전도 안 해도 믿겠구나...”가 아니라, “나는 택한 자들이 아무도 없는 줄 알았는데, 하나님의 택한 백성이 많다니...” 그러면서 낙심했던 마음이 위로를 얻고, 무려 1년 6개월 동안 거기 유하면서, 더욱 확신가운데 복음을 열심히 전했던 것입니다. 우리가 이렇게 하나님의 섭리의 교리를 배우면 위로와 확신을 얻게 되어 책임 있는 삶으로 나아가게 됩니다. 


그러면 어떤 위로와 확신을 얻습니까? 그것은 온 천지만물과 세상역사와 사단과 원수들까지도 친히 주관하시며 섭리하시는 분이 우리를 사랑하시는 우리의 아버지가 되신다는 사실에서 우리가 큰 위로와 확신을 얻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사랑하시되 독생자를 허락하시기까지 우리를 사랑하셨습니다. 그런데 아들까지 주신 분이 무엇인들 아끼시겠습니까? 우리에게 무슨 일이 일어나든 그것은 모두 우리의 유익을 위해서 그렇게 하신 것임을 우리가 확신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하나님의 섭리를 굳게 믿는 사람은 범사에 감사하며 미래를 염려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능히 자신을 먹이고 입히실 것을 믿는 것입니다. 그리고 핍박의 상황에서도 우리의 머리털까지 다 세시는 분께서 우리를 능히 원수의 손에서 보호하실 것을 믿고 확신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설사 순교당해도, 그것이 하나님이 힘이 없으셔서 그런 것이 아니라, “아... 이제 때가 되어 나를 부르시는 것이구나... 안 그래도 빨리 죽어서 주님 품에 안기고 싶었는데, 감사합니다.” 그러는 것입니다. 물론 죽음의 고통이 겁나기는 하지만, 그러나 원수들은 그저 우리의 육체만을 해할 수 있을 뿐 우리의 영혼은 영원히 안전한 것입니다. 그리고 욥의 인내에서 보는 것처럼 우리가 이 잠간의 고난을 잘 참고 인내하면 하나님이 그 고난과는 비교할 수 없는 영광으로 우리를 인도하실 것을 믿는 것입니다. 그리고 마침내는 주님이 다시 오셔서 우리의 원수를 친히 갚아주실 것입니다. 귀도 더브레가 바로 이 믿음으로 담대하게 순교한 것 아닙니까? 귀도 더브레와 같이 우리도 범사에 하나님의 섭리를 인정하고 고백하면서 늘 하나님을 경외하고 하나님과 동행하며 사는 복된 자들이 다 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List of Articles
번호 분류 제목 설교자 조회 수
81 벨기에 신앙고백서 벨기에 신앙고백서(벨직 신앙고백서) 제25조 - 그리스도, 율법의 완성 file 제25조 최상범 876
80 벨기에 신앙고백서 벨기에 신앙고백서(벨직신앙고백서) 제24조 - 우리의 성화와 선행 file 제24조 최상범 747
79 벨기에 신앙고백서 벨기에 신앙고백서(벨직 신앙고백서) 제23조 - 하나님 앞에서 우리의 의 file 제23조 최상범 771
78 벨기에 신앙고백서 벨기에 신앙고백서(벨직신앙고백서) 제22조 -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을 통한 우리의 칭의 file 제22조 최상범 734
77 벨기에 신앙고백서 벨기에 신앙고백서(벨직 신앙고백서) 제21조 - 우리의 대제사장이신 그리스도의 속죄 file 제21조 최상범 732
76 벨기에 신앙고백서 벨기에 신앙고백서(벨직 신앙고백서) 제20조 강해 -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하나님의 공의와 자비 file 제20조 최상범 949
75 벨기에 신앙고백서 벨기에 신앙고백서(벨직 신앙고백서) 제19조 강해 - 그리스도의 한 위격 안에 있는 두 본성 file 제19조 최상범 779
74 벨기에 신앙고백서 벨기에 신앙고백서(벨직신앙고백서) 강설 제18조 - 하나님의 아들의 성육신 file 제18조 최상범 671
73 벨기에 신앙고백서 벨기에 신앙고백서(벨직 신앙고백서) 제17조 강설 - 타락한 인간의 회복 file 제17조 최상범 627
72 벨기에 신앙고백서 벨기에 신앙고백서(벨직 신앙고백서) 제16조 강설 - 하나님의 선택 file 제16조 최상범 671
71 벨기에 신앙고백서 벨기에 신앙고백서(벨직 신앙고백서) 제15조 - 원죄 file 제15조 최상범 747
70 벨기에 신앙고백서 벨기에 신앙고백서(벨직 신앙고백서) 제14조 강설 - 사람의 타락과 자유의지 file 제14조 최상범 728
» 벨기에 신앙고백서 벨기에 신앙고백서(벨직 신앙고백서) 제13조 강설 - 하나님의 섭리 file 제13조 최상범 735
68 벨기에 신앙고백서 벨기에 신앙고백서(벨직 신앙고백서) 제12조 강설 - 하늘과 땅의 창조 file 제12조 최상범 740
67 벨기에 신앙고백서 벨기에 신앙고백서(벨직신앙고백서) 제9조,제10조,제11조 강설 - 삼위일체(2) file 제9-11조 최상범 1575
66 벨기에 신앙고백서 벨기에 신앙고백서 (벨직 신앙고백서) 강설 제8조- 삼위일체 file 제8조 최상범 753
65 벨기에 신앙고백서 벨기에 신앙고백서(벨직 신앙고백서) 강설 제6조, 제7조 - 성경의 충족성 file 제6,7조 최상범 853
64 벨기에 신앙고백서 벨기에 신앙고백서(벨직 신앙고백서) 제3조, 제4조 강설 - 정경 file 제4,5조 최상범 785
63 벨기에 신앙고백서 벨기에 신앙고백서(벨직 신앙고백서) 제2조, 제3조 강설 - 특별계시와 성경 file 제2조 최상범 984
62 벨기에 신앙고백서 벨기에 신앙고백서(벨직 신앙고백서) 제1조 강설 - 하나님의 속성 file 제1조 최상범 2086
목록
Board Pagination Prev 1 2 3 4 5 6 7 8 9 10 11 12 13 Next
/ 1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