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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 최상범
제26조
문답내용 제 26 조 그리스도의 중보
Christ’s Intercession

우리는 유일하신 중보자이시며 대언자이신 의로우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지 않고서는 하나님께로 나아갈 수 없음을 믿습니다. 이 일을 위하여 그리스도께서는 사람이 되시어 신성과 인성을 함께 가지셨으므로, 우리 사람들이 하나님의 위엄으로 나아가는데 방해를 받지 않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성부께서 자기와 우리 사이에 세우신 이 중보자께서는 그의 위엄으로써 결단코 우리를 위협하지 않으시는데 우리가 우리 멋대로 또 다른 중보자를 찾아서야 되겠습니까? 결코 그럴 수 없습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우리를 위협하시기는커녕 우리를 얼마나 사랑하십니까? 예수 그리스도보다 우리를 더 사랑해주는 존재는 하늘에도 땅에도 없습니다. 비록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의 본체이셨을지라도, 자기를 비워 우리를 위하여 사람의 형체와 종의 형체를 취하시고(빌2:6-7), 모든 면에서 형제들과 같이 되셨는데(히2:17), 우리가 이 그리스도 말고 우리를 더 사랑해줄 다른 중보자를 찾을 수가 있겠습니까? 심지어 우리가 당신의 원수였을 동안에도 우리를 위하여 당신의 생명을 내어주시기까지 하셨는데, 그분보다 우리를 더 사랑하는 분을 우리가 찾을 수 있겠습니까?(롬5:8,10) 만일 우리가 권세와 능력을 가진 분을 찾는다면, 성부의 오른 편에 앉아계시고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가지신 그분 외에 누가 더 있겠습니까?(마28:18) 또한 하나님의 가장 사랑하시는 아들보다 누가 더 빨리 하나님으로부터 기도의 응답을 받을 수 있겠습니까?

그러므로 성인들을 영예롭게 하기보다는 차라리 불명예스럽게 하는 습관들을 소개하여 그들이 결코 행하지도 않았고 요구하지도 않은 것을 하는 것은 순전히 신뢰의 결핍입니다. 이와 반대로 성인들은 그들의 저서들에서 나타나는 것처럼 그들의 직무에 따른 그런 영예를 끊임없이 거부했습니다. 기도할 때 우리는 우리의 무가치함을 의지하지 않아야 합니다. 왜냐하면 우리의 기도는 우리 스스로의 자긍심(dignity)에 근거한 것이 아니라 당신의 의가 믿음으로 우리의 것이 되게 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탁월하심과 그분의 가치(dignity)에 근거하여 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선한 이유로 히브리서 저자는 우리가 이런 어리석은 두려움, 더 정확하게 말하면 불신에서 벗어나도록 하기 위해서 우리에게 “예수 그리스도께서 범사에 형제들과 같이 되심이 마땅하도다. 이는 하나님의 일에 자비하고 충성된 대제사장이 되어 백성의 죄를 구속하려 하심이라. 자기가 시험을 받아 고난을 당하셨은즉 시험받는 자들을 능히 도우시느니라”고 말합니다(히2:17,18). 또한 히브리서 저자는 우리가 하나님께 나아가도록 더욱 더 격려하기 위해서, “그러므로 우리에게 큰 대제사장이 있으니 승천하신 자 곧 하나님 아들 예수시라. 우리가 믿는 도리를 굳게 잡을지어다. 우리에게 있는 대제사장은 우리 연약함을 체휼하지 아니하는 자가 아니요 모든 일에 우리와 한결 같이 시험을 받은 자로되 죄는 없으시니라”고 말합니다(히4:14,15). 동일한 서신에서 “그러므로 형제들아 우리가 예수의 피를 힘입어 성소에 들어갈 담력을 얻었나니.....참 마음과 온전한 믿음으로 하나님께 나아가자” 등등을 말합니다(히10:19,22). 또한 “예수는 영원히 계시므로 그 제사 직분도 갈리지 아니하나니 그러므로 자기를 힘입어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들을 온전히 구원하실 수 있으니 이는 그가 항상 살아서 저희를 위하여 간구하심이니라”고 말합니다(히7:24-25). 무슨 말이 더 필요합니까? 그리스도께서도 친히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요14:6). 우리가 왜 다른 대언자를 찾아야 합니까? 하나님은 당신의 아들을 우리의 대언자로 주시기를 기뻐하셨습니다. 따라서 우리가 찾을 수도 없는 다른 변호자를 취하거나 찾고 또 찾기 위하여 그를 저버리지 맙시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그분을 주셨을 때, 그분께서는 우리가 죄인임을 너무나 잘 알고 계셨기 때문입니다.

결론적으로 우리는 그리스도의 명령에 따라 우리의 유일한 중보자 그리스도를 통하여 하늘의 아버지를 불러야 하는데, 이것은 우리가 주님께서 가르쳐 주신 기도에서 배운 바와 같습니다. 우리는 아버지께 간구하는 모든 것을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얻는다고 확신합니다(요16:23).
강설날짜 2015-06-28

벨기에 신앙고백서 제26조


그리스도의 중보


제 26 조  그리스도의 중보
Christ’s Intercession


우리는 유일하신 중보자이시며 대언자이신 의로우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지 않고서는 하나님께로 나아갈 수 없음을 믿습니다. 이 일을 위하여 그리스도께서는 사람이 되시어 신성과 인성을 함께 가지셨으므로, 우리 사람들이 하나님의 위엄으로 나아가는데 방해를 받지 않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성부께서 자기와 우리 사이에 세우신 이 중보자께서는 그의 위엄으로써 결단코 우리를 위협하지 않으시는데 우리가 우리 멋대로 또 다른 중보자를 찾아서야 되겠습니까? 결코 그럴 수 없습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우리를 위협하시기는커녕 우리를 얼마나 사랑하십니까? 예수 그리스도보다 우리를 더 사랑해주는 존재는 하늘에도 땅에도 없습니다. 비록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의 본체이셨을지라도, 자기를 비워 우리를 위하여 사람의 형체와 종의 형체를 취하시고(빌2:6-7), 모든 면에서 형제들과 같이 되셨는데(히2:17), 우리가 이 그리스도 말고 우리를 더 사랑해줄 다른 중보자를 찾을 수가 있겠습니까? 심지어 우리가 당신의 원수였을 동안에도 우리를 위하여 당신의 생명을 내어주시기까지 하셨는데, 그분보다 우리를 더 사랑하는 분을 우리가 찾을 수 있겠습니까?(롬5:8,10) 만일 우리가 권세와 능력을 가진 분을 찾는다면, 성부의 오른 편에 앉아계시고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가지신 그분 외에 누가 더 있겠습니까?(마28:18) 또한 하나님의 가장 사랑하시는 아들보다 누가 더 빨리 하나님으로부터 기도의 응답을 받을 수 있겠습니까?


그러므로 성인들을 영예롭게 하기보다는 차라리 불명예스럽게 하는 습관들을 소개하여 그들이 결코 행하지도 않았고 요구하지도 않은 것을 하는 것은 순전히 신뢰의 결핍입니다. 이와 반대로 성인들은 그들의 저서들에서 나타나는 것처럼 그들의 직무에 따른 그런 영예를 끊임없이 거부했습니다. 기도할 때 우리는 우리의 무가치함을 의지하지 않아야 합니다. 왜냐하면 우리의 기도는 우리 스스로의 자긍심(dignity)에 근거한 것이 아니라 당신의 의가 믿음으로 우리의 것이 되게 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탁월하심과 그분의 가치(dignity)에 근거하여 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선한 이유로 히브리서 저자는 우리가 이런 어리석은 두려움, 더 정확하게 말하면 불신에서 벗어나도록 하기 위해서 우리에게 “예수 그리스도께서 범사에 형제들과 같이 되심이 마땅하도다. 이는 하나님의 일에 자비하고 충성된 대제사장이 되어 백성의 죄를 구속하려 하심이라. 자기가 시험을 받아 고난을 당하셨은즉 시험받는 자들을 능히 도우시느니라”고 말합니다(히2:17,18). 또한 히브리서 저자는 우리가 하나님께 나아가도록 더욱 더 격려하기 위해서, “그러므로 우리에게 큰 대제사장이 있으니 승천하신 자 곧 하나님 아들 예수시라. 우리가 믿는 도리를 굳게 잡을지어다. 우리에게 있는 대제사장은 우리 연약함을 체휼하지 아니하는 자가 아니요 모든 일에 우리와 한결 같이 시험을 받은 자로되 죄는 없으시니라”고 말합니다(히4:14,15). 동일한 서신에서 “그러므로 형제들아 우리가 예수의 피를 힘입어 성소에 들어갈 담력을 얻었나니.....참 마음과 온전한 믿음으로 하나님께 나아가자” 등등을 말합니다(히10:19,22). 또한 “예수는 영원히 계시므로 그 제사 직분도 갈리지 아니하나니 그러므로 자기를 힘입어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들을 온전히 구원하실 수 있으니 이는 그가 항상 살아서 저희를 위하여 간구하심이니라”고 말합니다(히7:24-25). 무슨 말이 더 필요합니까? 그리스도께서도 친히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요14:6). 우리가 왜 다른 대언자를 찾아야 합니까? 하나님은 당신의 아들을 우리의 대언자로 주시기를 기뻐하셨습니다. 따라서 우리가 찾을 수도 없는 다른 변호자를 취하거나 찾고 또 찾기 위하여 그를 저버리지 맙시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그분을 주셨을 때, 그분께서는 우리가 죄인임을 너무나 잘 알고 계셨기 때문입니다.


결론적으로 우리는 그리스도의 명령에 따라 우리의 유일한 중보자 그리스도를 통하여 하늘의 아버지를 불러야 하는데, 이것은 우리가 주님께서 가르쳐 주신 기도에서 배운 바와 같습니다. 우리는 아버지께 간구하는 모든 것을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얻는다고 확신합니다(요16:23).


오늘 배울 내용은 벨기에 신앙고백서 내용 중에서 가장 긴 내용의 고백입니다. 그런데 그 내용이 사실상 앞에서 다 다루었던 내용입니다. 즉 우리의 구원에 있어서 예수 그리스도로 충분하다는 것입니다. 더브레가 이런 내용을 여러 번 반복해서 강조하는 이유는 이것이 참된 복음의 핵심이기 때문이고, 또 로마가톨릭과 그 당시 많은 성도들이 이 참된 복음에서 벗어나 있었기 때문에 그렇게 반복하여 강조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강조는 오늘날 우리에게도 여전히 필요한 것이죠.


첫 번째 문장을 보시면...


우리는 유일하신 중보자이시며 대언자이신 의로우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지 않고서는 하나님께로 나아갈 수 없음을 믿습니다. 이 일을 위하여 그리스도께서는 사람이 되시어 신성과 인성을 함께 가지셨으므로, 우리 사람들이 하나님의 위엄으로 나아가는데 방해를 받지 않게 되었습니다.


더브레는 먼저 결론부터 던지고 있습니다. 결론은 그리스도가 우리의 유일한 중보자가 되신다는 것입니다. 중보자가 무엇입니까? 중보자는 원어로 ‘메시테스’인데, 중재자라는 뜻의 단어입니다. 중재자는 분쟁에 끼어들어 쌍방을 화해시키는 일을 하는 사람을 말합니다.


즉 하나님과 우리의 관계가 원수지간인데, 중보자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둘 사이에 개입하셔서 우리를 하나님과 화목하게 하신 것입니다. 어떻게 화목하게 하셨습니까? 자신의 십자가로 죄 문제를 해결하심으로써 화목하게 하신 것입니다. 이것이 중보자의 사역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우리가 중보자를 말할 때 가장 중요한 전제는 바로 하나님과 우리의 관계가 적대관계에 있다는 것이고 그 적대관계라고 하는 것이 결국은 하나님께서 죄인들을 향해서 진노하고 계신다는 사실입니다(출 32:7-12 참조). 진노하시니깐 화목하게 할 중보자가 필요한 것 아닙니까? 그런데 놀라운 것은 우리의 중보자이신 예수님이 어떤 분이십니까? 하나님이십니다. 그래서 요약하면 죄인들을 향해서 진노하시면서 복수의 칼을 갈고 계시는 공의로우신 하나님이 또한 죄인들을 사랑하셔서 사람의 몸을 입으시고 이 땅에 내려오셔서 십자가의 대속의 피를 흘려주신 것입니다.


절대로 성부는 진노하시는데 성자는 우리를 사랑하셔서 중보하신다는 식으로 성부와 성자를 나누어서 서로 대립하는 구도로 만들면 안 됩니다. 결국 그 성자 하나님을 이 땅에 보내셔서 십자가에 죽게 하신 분이 누구십니까? 성부 하나님이 아니십니까? 사도바울의 고백처럼 예수의 십자가 죽음은 우리를 향한 성부의 사랑 아닙니까? 더브레도 벨기에 신앙고백서를 통해서 바로 이러한 사실을 고백하는 것입니다. 3번째 문단 마지막 부분을 보시면...


하나님은 당신의 아들을 우리의 대언자로 주시기를 기뻐하셨습니다. 따라서 우리가 찾을 수도 없는 다른 변호자를 취하거나 찾고 또 찾기 위하여 그를 저버리지 맙시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그분을 주셨을 때, 그분께서는 우리가 죄인임을 너무나 잘 알고 계셨기 때문입니다.


더브레는 결코 성부와 성자를 나누어서 대결구도로 만들고 있지 않습니다. 벨기에 신앙고백서의 전체적인 강조점이 중보자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에 있지만, 또한 성부의 사랑도 함께 이야기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가 이것을 어떻게 생각해야 할까요? 바로 삼위일체 하나님께서 우리 죄인들을 향해 진노하시는 것이고, 또한 삼위일체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사 구원해주시는 것입니다. 아니 어떻게 하나님께서 우리를 향해서 진노하시면서 동시에 사랑하실 수 있습니까? 이것이 우리에게는 말이 안 되지만 하나님께는 말이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진노 중에라도 긍휼을 잊지 않으시는 주님이십니다(합 3:2). 특별히 예레미야는 “(33)주께서 인생으로 고생하며 근심하게 하심이 본심이 아니시로다”라고 고백했습니다(애 3:33). 하나님께서 범죄한 이스라엘을 향해서 진노하시고 그들을 형벌하셔서 그들에게 고통을 주시는 것이 하나님의 본심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서 출애굽기 32장을 보면...


“(7)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너는 내려가라 네가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낸 네 백성이 부패하였도다(8)그들이 내가 그들에게 명한 길을 속히 떠나 자기를 위하여 송아지를 부어 만들고 그것을 숭배하며 그것에게 희생을 드리며 말하기를 이스라엘아 이는 너희를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낸 너희 신이라 하였도다(9)여호와께서 또 모세에게 이르시되 내가 이 백성을 보니 목이 곧은 백성이로다(10)그런즉 나대로 하게 하라 내가 그들에게 진노하여 그들을 진멸하고 너로 큰 나라가 되게 하리라(11)모세가 그 하나님 여호와께 구하여 가로되 여호와여 어찌하여 그 큰 권능과 강한 손으로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내신 주의 백성에게 진노하시나이까(12)어찌하여 애굽 사람으로 이르기를 여호와가 화를 내려 그 백성을 산에서 죽이고 지면에서 진멸하려고 인도하여 내었다 하게 하려 하시나이까 주의 맹렬한 노를 그치시고 뜻을 돌이키사 주의 백성에게 이 화를 내리지 마옵소서”(출 32:7-12)


여기 보면 하나님께서는 모세가 없는 사이에 금송아지를 만들어 우상숭배한 이스라엘을 향해 진노하시고 진멸하시고자 하십니다. 이것이 사실은 하나님의 본심이 아닌 것입니다. 만일 그것이 하나님의 본심이라면 모세에게 자신의 진노를 보이고 진멸하시겠다고 보고하실 필요가 없죠. 바로 멸하시면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도 모세에게 뭔가를 기대하시고 자신의 진노를 보이시고 계획을 말씀하십니다. 그러므로 이스라엘을 진멸하는 것이 결코 하나님의 본심이 아닙니다. 그러면 쑈 하시는 것입니까? 사실은 전혀 진노하지 않으셨는데, 일부러 진노하는 척 하시는 것입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정말 진노하셨고 분노하셨습니다. 그래서 진멸하고자 하셨습니다. 그것은 부인할 수 없는 하나님의 공의로우신 성품인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그것만 보면 안 되고, 그렇게 진노하시는 모습 뒤에 숨겨져 있는 하나님의 본심을 보아야 하는 것입니다. 그 본심은 이스라엘을 향한 사랑입니다. 곧 모세에게 자신의 진노와 진멸계획을 말씀하심을 통해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 앞에서 진멸당할 비참한 죄인이라는 것을 그들로 알게 하고자 하신 것이고, 또한 모세의 중보를 통해서 구원받는 것을 알게 하셔서 장차 올 중보자를 통한 구원을 계시하시고자 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잘 보시면... 하나님이 모세에게 이스라엘을 향한 자신의 진노를 보이실 때, 모세가 자신이 대신 지옥에 가겠다고 하면서 이스라엘을 중보 하는데, 사실은 그렇게 모세로 하여금 이스라엘을 위해 중보하고자 하는 마음을 주신 분이 바로 하나님이신 것입니다. 결코 모세가 희생정신이 대단한 인물이라서 그런 용기를 발휘한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그런 믿음을 주시고 그런 소원을 주신 것입니다. 그래서 이 중보하는 모세를 통해서 장차 우리 대신 지옥의 형벌을 받으셔서 우리를 구원하실 중보자 예수 그리스도를 미리 보여주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향해서 진노하셨을지라도 결국 하나님이 원하신 본심은 이스라엘이 자기 죄를 깨닫고 중보자를 믿어 구원받도록 하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마찬가지로 창세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심으로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본심은 무한한 사랑과 긍휼입니다. 그것이 이미 창세전에 시작되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중보자 되신 그리스도를 믿고 의지함으로 이 긍휼과 사랑을 누리기 위해서는 율법이 먼저 와야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알기 위해서는 먼저 하나님의 공의와 엄위가 바로 서야 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그렇게 하지 아니하시고 처음부터 우리를 사랑으로 대하시면 우리는 하나님을 아주 우습게 생각하게 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은혜를 베풀어주셔도 그것을 감사할 줄을 모르게 되어지고, 또 자기가 비참한 죄인인줄 모르기 때문에 중보자를 필요로 하지 않는 것입니다. 인간이 얼마나 교만한지... 우리는 이 교만을 이스라엘 백성들에게서 분명하게 보는 것입니다. 그렇게 애굽의 10가지 재앙을 목격하고 유월절 어린양의 피로 출애굽 했는데도 불구하고 그들이 조금만 힘든 일을 당해도 그냥 하나님께 원망불평하고 대드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은혜에 감사할 줄을 모르고 또 하나님을 두려워함이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런 교만한 이스라엘이 언제 겸손하게 바뀝니까? 시내산에 빽빽한 구름과 우뢰와 번개로 임재하셔서 율법을 명하시는 위엄의 하나님을 목격하게 되었을 때, 거룩하신 하나님을 알게 되어지고, 또 자기가 죄인인줄 알게 되어져서 “아... 죄인인 내가 이 거룩하신 하나님 뵈었으니 이제 나는 죽었구나...” 직감하고 그제야 중보자 모세한테 매달리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게 얼마나 갑니까? 별로 오래 안 가죠. 인간이 뼛속까지 교만하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자신의 공의로우시고 엄위의 성품을 한두 번 보여줘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아예 출애굽에서부터 바벨론 포로가 될 때까지 약 800년에 가까운 세월 동안에 이스라엘 전 역사를 통해서 그것을 보여주시는 것입니다.


결국 구약의 내용이 율법을 명하시고, 이스라엘이 불순종하고, 그래서 경고하신대로 율법에 예고된 언약적 저주가 그대로 이스라엘에게 내려지는 그 과정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초신자들이 구약을 읽어 가면 굉장히 큰 혼란을 경험하게 되는데 왜냐하면 처음 예수님 믿을 때는 하나님을 사랑이 충만하신 하나님으로 생각했는데, 구약을 보니깐 내가 생각하는 하나님하고는 너무나 다른 하나님을 만나는 것입니다. 신약의 하나님은 사랑이 많으시고 은혜로우시고 너무나 좋은데, 구약의 하나님은 너무나 무서운 것입니다.


이런 초신자의 혼란스러운 경험은 대단히 바람직한 현상입니다. 그것이 바로 잘못된 하나님에 관한 생각들이 깨뜨려지는 과정입니다. 왜냐하면 그동안 하나님에 대해서 너무 한쪽으로 치우쳐서 만만하게 그리고 가볍게 생각했던 것입니다. 그런데 구약성경을 통해서 범죄한 자기 백성들을 향해서 진노하시고 언약적 저주를 내리시는 그 공의로우신 하나님을 배우게 되면, 교만이 박살나면서 비로소 하나님을 두려워하게 되고, 자기 죄가 심각하다는 것을 알게 되면서 진정으로 그리스도를 간절히 찾고 의지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께서 사람을 구원하시는 섭리의 원리입니다.


그래서 오늘 우리가 벨기에 신앙고백서를 통해서 중보자 개념을 배울 때 가장 중요한 것은 이러한 복합적인 구조를 잘 생각해야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 죄인들을 향해 진노하시는 것이고, 그리고 진노만 하시는 것이 아니라 피할 길을 주셔서 중보자를 허락해주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죄인들이 자신들의 죄를 깨닫고 중보자에게로 달려가 구원을 받는 것입니다. 이러한 하나님의 섭리의 원리를 잘 알아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신구약 성경말씀 전체에서 계시하시는 거룩하시고 공의로우신 하나님을 깊이 깨닫는 것이 대단히 중요하고 율법에 대한 날카로운 인식을 날마다 유지하는 것이 매우 중요한 것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는 이스라엘 백성들과 똑같이 되는 것입니다. 은혜를 감사할 줄을 모르고 하나님을 두려워함이 없게 되는 것입니다. 입으로는 이론적으로는 얼마든지 예수 이름 부르고 중보자를 의지하는 척하지만, 사실은 중보자를 필요로 하지 않는 삶을 살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우리 자신을 잘 돌아보아 이런 거짓된 신앙에 빠지지 않도록 주의해야 할 것입니다.


그런데 또 한편으로 우리가 주의해야 할 것은... 하나님께서 죄에 대해 진노하시며 심판하시는 그런 공의로운 분이심을 인식하고 깨닫는 것은 좋은데, 그런데 문제는... 그렇게 공의를 실현하실 때 그러한 무서운 모습 뒤에 감추어진 하나님의 본심은 보지 못하고, 하나님의 사랑과 긍휼은 바라보지 못하고 그저 죄에 진노하시고 심판하시는 하나님만 받아들여서, 마치 하나님을 내가 신앙생활 똑바로 못하고 죄 짓고 그러면 하나님께서 진심으로 나를 미워하시고 싫어하셔서 진노하시는 그런 차갑고 냉정한 재판관으로 생각하는 수가 있는 것입니다. 이것도 굉장히 심각한 오류인 것입니다.


사실 이것이 로마가톨릭의 오류인 것입니다. 벨기에 신앙고백서의 내용을 보시면...


그런데 성부께서 자기와 우리 사이에 세우신 이 중보자께서는 그의 위엄으로써 결단코 우리를 위협하지 않으시는데 우리가 우리 멋대로 또 다른 중보자를 찾아서야 되겠습니까?


더브레가 이 질문을 하는 이유는 로마가톨릭이 이렇게 주장했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성부는 죄인들을 싫어하시고 진노하셔서 공격하시는 분이시고, 예수님도 결국은 하나님이기 때문에 성부와 마찬가지로 아주 냉정하시고 차가운 재판장이 되신다.”고 주장합니다. 그래서 그들에게는 마리아가 필요한 것입니다. 그런데 마리아도 너무 높은 분이라서 거리감이 느껴지니깐 그 마리아에게 나아가기 위해서 성자들의 도움을 청하고 천사들의 도움을 청하는 것입니다.


그야말로 성경을 모르고 하나님을 심각하게 오해한 것인데, 우리도 얼마든지 로마가톨릭처럼 성경과 하나님을 그렇게 오해할 수 있는 것입니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우리가 마리아나 성자를 숭배하지는 않겠지만, 결국에는 절망에 빠져서 감히 예수님께 나아가지도 못한 채 그 가련한 영혼이 방황하는 삶을 살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오늘 벨기에 신앙고백서의 내용을 통해서 하나님의 본심을 발견하고 하나님의 마음을 깨달아 알아야 하는 것입니다. 구약에서는 이 하나님의 마음이 온전히 밝히 계시되지는 않았습니다. 오히려 하나님의 공의로우신 성품에 대한 계시가 주된 초점이었습니다. 물론 구약에서도 희생제사제도나 제사장이라는 모형들을 통해서 자신의 본심을 어느 정도 계시해주셨습니만... 옛언약은 결국 율법이기 때문에 주된 강조점은 하나님의 공의로우신 성품에 있었습니다. 그러나 신약은 그렇지 않습니다. 그리스도를 통해서 그동안 감추어져 있었던 경륜의 비밀들이 다 밝히 계시되었습니다. 그리스도를 통해서 하나님의 사랑과 긍휼이라고 하는 하나님의 본심이 밝히 계시된 시대를 우리가 살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날 이런 하나님의 사랑을 알지 못하고 여전히 구약에 있는 것처럼 율법주의적으로 신앙생활하는 신자들이 얼마나 많이 있습니까? 참으로 안타깝지 않을 수 없는 것이죠. 오늘 우리가 벨기에 신앙고백서를 통해서 하나님의 마음을 깨달아서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과 긍휼에 대해 의심이 없어야 하겠습니다.


결코 그럴 수 없습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우리를 위협하시기는커녕 우리를 얼마나 사랑하십니까? 예수 그리스도보다 우리를 더 사랑해주는 존재는 하늘에도 땅에도 없습니다.


이 사실을 믿습니까? 이 땅에서 우리를 가장 사랑하는 분은 바로 부모님입니다. 그런데 부모님보다 우리를 더 사랑하시는 분이 바로 삼위일체 하나님이십니다. 그 사랑을 자신의 죽음으로 몸소 보여주신 분이 예수 그리스도시죠. 그러므로 우리가 아무리 죄가 많고 부족해도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과 긍휼에 의심이 없어야 하겠습니다.


비록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의 본체이셨을지라도, 자기를 비워 우리를 위하여 사람의 형체와 종의 형체를 취하시고(빌2:6-7), 모든 면에서 형제들과 같이 되셨는데(히2:17), 우리가 이 그리스도 말고 우리를 더 사랑해줄 다른 중보자를 찾을 수가 있겠습니까? 심지어 우리가 당신의 원수였을 동안에도 우리를 위하여 당신의 생명을 내어주시기까지 하셨는데, 그분보다 우리를 더 사랑하는 분을 우리가 찾을 수 있겠습니까?(롬5:8,10) 만일 우리가 권세와 능력을 가진 분을 찾는다면, 성부의 오른 편에 앉아계시고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가지신 그분 외에 누가 더 있겠습니까?(마28:18) 또한 하나님의 가장 사랑하시는 아들보다 누가 더 빨리 하나님으로부터 기도의 응답을 받을 수 있겠습니까?


이 계속되는 내용은 바로 주님이 우리의 최상의 그리고 유일한 중보자가 되심을 가르쳐주고 있는 것입니다. 왜 최상의 유일한 중보자가 되십니까? 그것은 예수님께서 우리를 가장 사랑하시고 긍휼이 여겨주시는 분이시기 때문이고, 또 사랑하실 뿐만 아니라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가지셔서 우리를 능히 사망권세에서 구원하실 수 있는 유일하신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무엇보다도 그리스도께서 하늘에서 지금도 우리를 위해 기도하시고 계신데, 예수님이 기도하시는 것보다 더 잘 들어주시는 그런 중보자를 우리가 찾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최상의, 그리고 유일한 중보자가 되십니다.


그러므로 이 완전한 중보자를 놔두고 다른 무슨 중보자를 찾거나 또는 절망에 빠져서 이 사랑과 긍휼의 중보자께 감히 나아가지 못하는 일이 없어야만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완전하신 중보자께서 우리를 위해 죽으신 것이 확실하다면,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의 공로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나아가는 그 자세가 당당해야만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인들을 영예롭게 하기보다는 차라리 불명예스럽게 하는 습관들을 소개하여 그들이 결코 행하지도 않았고 요구하지도 않은 것을 하는 것은 순전히 신뢰의 결핍입니다. 이와 반대로 성인들은 그들의 저서들에서 나타나는 것처럼 그들의 직무에 따른 그런 영예를 끊임없이 거부했습니다.


(이 문장은 조금 번역이 매끄럽지 못한데...) 로마가톨릭의 성자숭배가 사실상 성자들을 영예롭게 하기보다는 불명예스럽게 하는 것인데, 왜냐하면 그들이 추앙하고 의지하는 성자들 본인이 자기를 그렇게 높이는 것에 대해서 강력하게 반대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도 그들이 성자를 높이고 성자를 중보자로 대하는 것은 그야말로 그리스도에 대한 불신앙에서 나온 것입니다.


기도할 때 우리는 우리의 무가치함을 의지하지 않아야 합니다. 왜냐하면 우리의 기도는 우리 스스로의 자긍심(dignity)에 근거한 것이 아니라 당신의 의가 믿음으로 우리의 것이 되게 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탁월하심과 그분의 가치(dignity)에 근거하여 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주님 앞에 나갈 때 자기를 의지하여 나갈 때가 참 많습니다. 즉 기도하고 예배하는데, 지난 한 주간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잘 순종하고, 전도 많이 하고, 헌신을 많이 하면, 하나님 앞에 설 때에 괜히 떳떳한 것입니다. 그러나 반대로 똑바로 신앙생활 못하고 죄를 많이 지었으면 면목이 없고 기가 죽어서 하나님께 나아가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어찌하든지 하나님께 떳떳하게 나아가기 위해 스스로를 꾸미고 단장하려고 무진 애를 쓰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자기를 의지하는 것이고, 자기 자긍심으로 하나님께 나아가려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런 모든 기세들은 전부 거절당하는 것이 바로 주님의 존전인줄 아십시다. 벨기에 신앙고백서의 고백처럼 우리는 전적으로 무가치한 존재입니다. 우리에게서 나온 그 어떤 것으로도 우리는 주님을 감동시킬 수 없습니다. 뭐가 주님을 감동시킵니까? 우리의 구주인 예수 그리스도가 유일한 최상의 중보자이심을 인정하고 그분을 믿고 의지하는 것만이 하나님을 감동시키는 것입니다. 우리가 주님 안에서 용납 받는 것이지, 우리의 열심, 우리의 봉사, 우리의 헌신으로 용납 받는 것이 아닙니다.


“(12)우리가 그 안에서 그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담대함과 하나님께 당당히 나아감을 얻느니라”(엡 3:12)
“(16)그러므로 우리가 긍휼하심을 받고 때를 따라 돕는 은혜를 얻기 위하여 은혜의 보좌 앞에 담대히 나아갈 것이니라”(히 4:16)


그러므로 우리 안에 그리스도의 영이 계신다면 우리는 더 이상 기가 죽어서 쭈삣쭈삣 나갈 것이 아니라 담대히 나아가야 하는 것입니다. 사단 마귀가 “벼룩도 낯짝이 있지, 니가 뭘 잘했다고 그렇게 뻔뻔하게 담대하냐?” 송사할 때 우리는 “내 잘난 것은 아무것도 없다. 다만 그가 날 위해서 죽어주셨다.” 그 한마디만 하면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불쌍히 여기심을 받고, 때를 따라 돕는 은혜를 받기 위해 은혜의 보좌 앞에 담대히 나아가십시다.


그러므로 선한 이유로 히브리서 저자는 우리가 이런 어리석은 두려움, 더 정확하게 말하면 불신에서 벗어나도록 하기 위해서 우리에게 “예수 그리스도께서 범사에 형제들과 같이 되심이 마땅하도다. 이는 하나님의 일에 자비하고 충성된 대제사장이 되어 백성의 죄를 구속하려 하심이라. 자기가 시험을 받아 고난을 당하셨은즉 시험받는 자들을 능히 도우시느니라”고 말합니다(히2:17,18). 또한 히브리서 저자는 우리가 하나님께 나아가도록 더욱 더 격려하기 위해서, “그러므로 우리에게 큰 대제사장이 있으니 승천하신 자 곧 하나님 아들 예수시라. 우리가 믿는 도리를 굳게 잡을지어다. 우리에게 있는 대제사장은 우리 연약함을 체휼하지 아니하는 자가 아니요 모든 일에 우리와 한결 같이 시험을 받은 자로되 죄는 없으시니라”고 말합니다(히4:14,15). 동일한 서신에서 “그러므로 형제들아 우리가 예수의 피를 힘입어 성소에 들어갈 담력을 얻었나니.....참 마음과 온전한 믿음으로 하나님께 나아가자” 등등을 말합니다(히10:19,22). 또한 “예수는 영원히 계시므로 그 제사 직분도 갈리지 아니하나니 그러므로 자기를 힘입어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들을 온전히 구원하실 수 있으니 이는 그가 항상 살아서 저희를 위하여 간구하심이니라”고 말합니다(히7:24-25). 무슨 말이 더 필요합니까? 그리스도께서도 친히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요14:6). 우리가 왜 다른 대언자를 찾아야 합니까? 하나님은 당신의 아들을 우리의 대언자로 주시기를 기뻐하셨습니다. 따라서 우리가 찾을 수도 없는 다른 변호자를 취하거나 찾고 또 찾기 위하여 그를 저버리지 맙시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그분을 주셨을 때, 그분께서는 우리가 죄인임을 너무나 잘 알고 계셨기 때문입니다.


성경의 거듭거듭 반복되는 내용이 오직 예수입니다. 우리를 향한 주님의 사랑과 긍휼은 창세전부터 시작되었고, 우리가 원수 되었을 자기 아들을 십자가에 못 박음으로 우리에게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으며, 지금도 그 사랑은 변함이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사실을 우리가 믿는다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결론적으로 우리는 그리스도의 명령에 따라 우리의 유일한 중보자 그리스도를 통하여 하늘의 아버지를 불러야 하는데, 이것은 우리가 주님께서 가르쳐 주신 기도에서 배운 바와 같습니다. 우리는 아버지께 간구하는 모든 것을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얻는다고 확신합니다(요16:23).


결국 오늘 배운 내용,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한 최상의 유일한 중보자가 되신다는 사실을 깨달아 알게 되어지면 우리의 기도의 자세가 바뀔 수밖에 없죠. 예수님의 이름을 의지하여 하나님을 나의 아버지로 고백하면서 확신과 담대함으로 하나님께 나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구할 때 뭐든지 다 들어주실 것이라는 확신을 갖는 것입니다. 물론 이 말을 오해해서 예수님이름으로 구하면 내 모든 소원 다 성취된다고 생각하면 곤란하죠. 정말 하나님의 사랑을 깨닫고 그리스도를 중보자로 믿고 의지하는 자의 마음에는 그런 세속적인 마음이 없습니다. 그런 것을 구할 마음이 없어요. 하나님의 뜻에 합한 것을 구하려고 하고, 또 하나님께서 그 구한 것을 반드시 들어주시는 것입니다.


우리가 최상의 그리고 유일한 중보자 되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의지하며 사는 복된 성도들이 다 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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