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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트신조
2018.05.10 07:07

2018년 도르트 신조(제3장 오류 논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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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 손재호
도르트 신조 제3장 오류 논박
강설날짜 2018-05-13

2018년 도르트 신조 공부(25)

 

제3장. 도르트 신조의 세 번째와 네 번째 교리

사람의 부패와 하나님께로의 회심, 그리고 그것이 일어나는 방식(9)

 

* 오류에 대한 반박

 

<총회는 사람의 부패에 대한 참된 교리와 하나님께로의 회심에 대한 참된 교리를 해명하고, 다음의 오류를 반박한다.>

 

1. 오류 : 정확히 말하자면 원죄 그 자체만으로 전 인류를 정죄하거나 현세와 내세의 형벌을 받게 하기에 충분하다고 말할 수 없다.

 

반박 : 이 말은 다음과 같이 선언한 사도의 말씀에 반대됩니다. 로마서 5:12절 “이러므로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죄가 세상에 들어오고 죄로 말미암아 사망이 왔나니 이와 같이 모든 사람이 죄를 지었으므로 사망이 모든 사람에게 이르렀느니라.” 로마서 5:16절 “또 이 선물은 범죄한 한 사람으로 말미암은 것과 같지 아니하니 심판은 한 사람을 인하여 정죄에 이르렀으나 은사는 많은 범죄를 인하여 의롭다 하심에 이름이니라.” 로마서 6:23절 “죄의 삯은 사망이요, 하나님의 은사는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 안에 있는 영생이니라.”

 

# 해설 : 아담의 죄로 인해 모든 인류에게 죄가 있으며, 그것에 대한 하나님의 일시적인 심판과 영원한 심판이 있음을 알미니안주의자들은 부정하였습니다. 또한 세대를 이어오면서 죄의 부패성과 오염된 것을 물려받은 것을 부정하였습니다. 그들은 죄를 가볍게 보는 특징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리고 죄에 대한 하나님의 일시적인 심판과 영원한 심판에 대해 불편한 마음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는 청교도 신학자 존 오웬이 지적한 것처럼 하나님의 사법권에서 벗어나 육신적으로 마음껏 살아가기 위함입니다.

 

아담의 죄는 단지 그만의 죄가 아니라 인류를 온전히 오염시켰습니다. 죄에 대한 삯은 분명히 사망이라고 하였습니다(롬 6:23). 이렇게 심각한 죄를 가볍게 여기면 그리스도의 속죄를 가볍게 여길 수밖에 없습니다. 따라서 알미니안주의자들은 그리스도의 속죄 사역의 범위를 일반적인 것으로 보고, 구원에 있어서 결정적인 것은 인간의 의지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2. 오류 : 선, 거룩, 의와 같은 영적인 은사나 선한 성품과 덕성 등은 사람이 처음 창조되었을 때에 그 사람의 의지에 속한 것도 아니고, 타락한 이후에 없어진 것도 아니다.

 

반박 : 이 오류는 바울 사도가 에베소서 4:24절에서 보여준 하나님의 형상에 대한 서술에 반대됩니다. 에베소서 4:24절을 보면 “하나님을 따라 의와 진리의 거룩함으로 지으심을 받은 새 사람을 입으라”고 했습니다. 사도가 하나님의 형상을 의와 거룩과 연관시켰다면 그것은 의심할 바 없이 의지에 속한 것입니다.

 

# 해설 : 알미니안주의자들은 의지에 선, 거룩함, 의와 같은 하나님의 은사가 있지 않았다고 주장합니다. 그들은 왜 이러한 주장을 하는 것입니까? 바로 자유의지 혹은 영혼의 기능과 능력을 강조하기 위함입니다. 그들은 사람의 의지가 선과 악을 택할 수 있다고 주장합니다. 그래서 선, 거룩, 의는 처음 사람 아담의 의지에 속해 있었던 것이 아니라고 합니다.

 

또한 타락으로 인해 이러한 은사가 의지에서 분리된 것이 아니라고 주장합니다. 왜냐하면 의지는 처음부터 능력이 있었으며, 죄를 지었어도 잃어버린 것이 아니기 때문이라고 말합니다. 이러한 오류는 펠라기우스의 오류와 같은 것으로 그들은 자유의지의 능력을 강조하기 위해 불가불 이러한 주장을 하고 있습니다. 자유의지를 강조하기 위해 원죄도 부정한 것과 같습니다.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을 받은 인간은 거룩과 의로움과 선하심을 받아 하나님께 순종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타락으로 인해 이러한 선물로부터 자신을 박탈시키고 말았습니다. 그래서 도무지 스스로의 행위로나 의지로 거룩함과 선함을 추구할 수 없게 된 것입니다. 따라서 불가불 하나님의 형상의 회복이 필요한 것이며, 이를 성령 하나님께서 거룩케 하시는 작업으로 행하시는 것입니다. 물론 하나님의 형상의 회복이 가능하도록 그리스도께서 속죄의 피를 흘리셨습니다. 결국 알미니안주의자들은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케 하시는 성령 하나님의 역사를 부정한 셈인 것입니다. 그리고 인간의 의지로 선과 의를 행하여서 구원에 이르고자 한 것입니다. 그들은 가능하지 않은 일을 가능하다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온전한 의로움에 이르지 못하였음에도 불구하고 자신이 의로움에 이르렀다고 하는 거짓 확신에 이르게 되는 것입니다.

 

3. 오류 : 영적인 죽음에서도 영적인 은사들은 사람의 의지로부터 분리되지 않는데, 왜냐하면 의지 그 자체는 결코 부패되지 않았고, 지성의 어두움과 정욕의 무절제에 의해 방해를 받았을 뿐이기 때문이다. 만약 이런 장애물들이 제거된다면 의지는 내재된 충분한 능력을 발휘할 수 있을 것이다. 그 의지는 제시될 수 있는 모든 선한 방편들을 스스로 원하고 선택할 수 있거나 스스로 원하지 않으며 선택하지 않을 수도 있다.

 

반박 : 이 주장은 생소한 이론이며, 오류이고, 자유의지에 대한 능력을 격찬하려는 경향이 있습니다. 이 주장은 선지자 예레미야가 예레미야 17:9절에서 “만물보다 거짓되고 심히 부패한 것은 마음이라”고 말씀한 것에 반대됩니다. 그리고 사도 바울은 에베소서 2:3절에서 “전에는 우리도 다 그 가운데서 우리 육체의 욕심을 따라 지내며 육체와 마음의 원하는 것을 하여 다른 이들과 같이 본질상 진노의 자녀이었더니”라고 했습니다.

 

# 해설 : 알미니안주의자들은 전적부패를 부정합니다. 의지의 자유와 능력을 강조하기 위함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의지 자체가 결코 부패되지 않았다고 말하며, 타락으로 인한 부패와 영적인 죽음을 부정합니다. 그들은 다만 의지가 마음의 어두움과 무질제로 바른 것을 택하는 것에 방해를 받고 있을 뿐이라고 말합니다. 여기서 그들은 어느 정도의 마음의 어두움을 말하고 있는데, 이는 오류입니다. 사람의 마음은 타락으로 인해 영적으로 완전히 어두워졌으며, 이성은 영적인 것에 대해 무지하기 때문입니다. 죄로 인한 사람의 비참함은 교육이나 계몽으로 개선할 수 있는 것이 결코 아닙니다. 이러한 것들은 단지 장애물에 불과한 것이 아닙니다. 개선의 노력으로 제거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나 그들은 개선의 방법으로 제거될 수 있다고 말합니다. 그리고 이러한 장애물이 제거된다면 본래의 자연적인 능력을 발휘하여 선하고 의로운 것을 선택할 수 있다고 주장합니다. 그러면서 그 의지는 선을 택하지 않을 수 있다고 말합니다.

 

이러한 그들의 주장은 사람의 자유의지를 강조하고 극대화하기 위한 것으로, 사람의 영적인 실체에 대해 눈 감았으며, 하나님의 주권과 사람을 변화시키는 은혜와 그 능력을 부정하고 있습니다. 이들은 예수님의 말씀인 “좋은 나무가 나쁜 열매를 맺을 수 없고 못된 나무가 아름다운 열매를 맺을 수 없느니라”(마 7:18)는 말씀을 부정하는 자들입니다. 부패한 심령으로는 결코 선하고 의로운 행동을 할 수 없습니다. 그 심령이 부패되어서 도무지 선한 것을 할 수 없습니다. 홍수로 심판하기 전 하나님께서는 이것을 분명히 말씀하셨고(창 6:5-7), 심판에서 건짐을 받은 노아가 하나님께 번제를 드렸을 때도 주께서 사람의 부패성을 말씀하셨습니다(창 8:21-22).

 

알미니안주의자들이 자연적인 본성의 의지의 능력을 말하지만 사실 사람의 자연적인 본성은 오직 육신이 원하는 것을 할뿐입니다(엡 2:3). 육신적인 심령의 변화를 강조해야 하고, 성령의 중생의 사역이 필요하다고 말해야 함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은혜의 방식을 배제한 채 사람의 의지의 능력을 강조하는 것은 오류입니다.

 

4. 오류 : 중생하지 않은 사람은 죄 가운데 정말로 또는 완전히 죽은 것이 아니거나, 영적인 선에 대한 모든 능력을 빼앗긴 것이 아니다. 중생하지 않은 사람이라도 의와 생명에 주리고 목말라 할 수 있으며,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통회하고 상한 심령의 제사를 드릴 수도 있다.

 

반박 : 이 주장은 다음과 같은 성경 말씀의 분명한 증거와 반대됩니다. 에베소서 2:15절에 보면 “원수 된 것 곧 의문에 속한 계명의 율법을 자기 육체로 폐하셨으니 이는 이 둘로 자기의 안에서 한 새 사람을 지어 화평하게 하시고”라고 했고, 창세기 6:5절에 보면 “여호와께서 사람의 죄악이 세상에 관영함과 그 마음의 생각의 모든 계획이 항상 악할 뿐임을 보시고”라고 했으며, 창세기 8:21절에서는 “…이는 사람의 마음의 계획하는 바가 어려서부터 악함이라…”고 했습니다. 또한 시편 51:19절에서는 “그 때에 주께서 의로운 제사와 번제와 온전한 번제를 기뻐하시리니 저희가 수소로 주의 단에 드리리이다”라고 했고, 마태복음 5:6절에 보면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배부를 것임이요”라고 했습니다.

 

이 상의 말씀에 기초해서 볼 때 중생하지 않은 사람은 죄 가운데서 완전히 죽은 것이며, 영적인 선을 행할 능력을 완전히 상실했습니다. 오직 주께서 의롭다 하신 자들만이 의와 생명에 목말라하며,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통회하고 상한 심령의 제사를 드릴 수 있습니다.

 

# 해설 : 전적 부패를 부정하는 알미니안주의자들은 중생하지 않은 자는 죄 가운데 완전히 죽은 상태가 아니라고 주장합니다. 물론 그들은 순종의 율법을 완전히 지킬 수 있다고 말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믿음과 믿음의 부분적 순종의 조건을 충족시킬 수 있다고 보며 이것으로 구원받는다고 주장합니다. 그래서 구원에 있어서 사람의 책임과 역할을 강조하며, 이는 의지로 가능하다고 말합니다. 또한 중생하지 않았어도 그 상태는 영적으로 완전히 죽은 것이 아니라, 영적인 선을 행할 수 있는 능력이 있다는 것입니다. 더욱이 중생하지 않은 상태에서 의와 생명에 대해 목말라 할 수 있으며, 상하고 통회하는 심령의 제사를 드려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있다고 주장합니다.

 

이러한 주장에 따르면 사람 스스로 하나님에게 돌아설 수 있습니다. 중생하지 않아도 영적인 것을 깨달아 의가 필요하다는 것과 그것에 대해 목말라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이러한 주장은 성경에 비추어 보면 허구임이 드러납니다. 바울은 우리가 죄와 허물로 죽었다고 분명히 말하고 있습니다. 에베소서 2:1절을 보면 “너희의 허물과 죄로 죽었던 너희를 살리셨도다”라고 했고, 에베소서 2:5절에 보면 “허물로 죽은 우리를 그리스도와 함께 살리셨고 (너희가 은혜로 구원을 얻은 것이라)”고 했습니다. 성령 하나님께서 그 영혼을 거듭나게 하시지 않는 한 그 영혼은 구하지도 찾지도 않습니다. 다만 육신의 일을 도모할 뿐입니다. 로마서 8:5-7절을 보면 “육신을 좇는 자는 육신의 일을, 영을 좇는 자는 영의 일을 생각하나니 육신의 생각은 사망이요, 영의 생각은 생명과 평안이니라. 육신의 생각은 하나님과 원수가 되나니 이는 하나님의 법에 굴복치 아니할 뿐 아니라 할 수도 없음이라”고 했습니다. 성령의 갱신하는 역사가 없는 한 그 영혼은 영적인 것에 관심이 없으며, 그것의 중요성을 전혀 알 수 없습니다. 영적인 것을 다만 미련하게 보기 때문입니다. 고린도전서 2:14절을 보면 “육에 속한 사람은 하나님의 성령의 일을 받지 아니하나니 저희에게는 미련하게 보임이요, 또 깨닫지도 못하나니 이런 일은 영적으로라야 분변함이니라”고 했습니다.

 

성경은 성령의 역사로 인해 자신의 영적인 비참함을 깨닫는다고 말씀합니다. 요한복음 16:8절을 보면 “그가 와서 죄에 대하여, 의에 대하여, 심판에 대하여 세상을 책망하시리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구원에 대한 갈망이 일어나게 하는 것도 성령의 역사임을 분명하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사야 55:1절을 보면 “너희 목마른 자들아 물로 나아오라. 돈 없는 자도 오라. 너희는 와서 사 먹되 돈 없이, 값 없이 와서 포도주와 젖을 사라”고 했고, 사도행전 2:37절을 보면 “저희가 이 말을 듣고 마음에 찔려 베드로와 다른 사도들에게 물어 가로되 형제들아 우리가 어찌할꼬 하거늘”이라고 했습니다. 이러한 성령의 역사로 말미암아 죄와 죄의 비참함에서 건짐받기를 소망하게 됩니다. 구원을 갈망하고, 생명을 위한 목마름과 하나님께 드리는 상한 심령의 제사는 오직 성령 하나님께서 그 영혼 위에 역사하셔서 죄를 깨닫게 하시고, 자신의 의가 더러운 것임을 보게 하심으로 일어납니다. 이사야 64:6절을 보면 “대저 우리는 다 부정한 자 같아서 우리의 의는 다 더러운 옷 같으며 우리는 다 쇠패함이 잎사귀 같으므로 우리의 죄악이 바람같이 우리를 몰아가나이다”라고 했습니다. 따라서 성령의 유효한 역사가 있어야만 심령이 가난해지며, 죄에 대해서 애통하고 겸손해지며, 의에 대해 갈망하게 됩니다. 마태복음 5:3-6절을 보면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희 것임이요, 애통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위로를 받을 것임이요, 온유한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땅을 기업으로 받을 것임이요,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배부를 것임이요”라고 했습니다. 하지만 이를 인간의 본성으로 할 수 있다고 말하며, 성령의 역사의 필요성을 부정하는 알미니안주의자들의 가르침은 위험한 오류입니다.

 

5. 오류 : 부패한 자연인도 (알미니안들이 본성의 빛이라고 부르는) 일반 은혜나 타락한 후에도 사람에게 여전히 남아 있는 은사들을 잘 사용할 수 있어서, 그것들을 선하게 사용함으로 더 큰 것, 즉 복음적이거나 구원받는 은혜, 그리고 구원 그 자체를 점차적으로 얻을 수 있다. 이런 방식으로 하나님께서는 그 분의 편에서 친히 모든 사람에게 그리스도를 계시하실 준비를 하신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는 그리스도에 대한 지식과 믿음과 회개를 위하여 필수적인 수단들을 모든 사람에게 충분히, 그리고 효과적으로 베풀어 주시기 때문이다.

 

반박 : 모든 시대의 경험 뿐 아니라 성경에서도 이런 주장이 진실하지 않다는 것을 증언합니다. 시편 147:19-20절을 보면 “저가 그 말씀을 야곱에게 보이시며 그 율례와 규례를 이스라엘에게 보이시는도다. 아무 나라에게도 이같이 행치 아니하셨나니 저희는 그 규례를 알지 못하였도다. 할렐루야”라고 했고, 사도행전 14:16절에 보면 “하나님이 지나간 세대에는 모든 족속으로 자기의 길들을 다니게 묵인하셨으나”라고 했으며, 사도행전 16:6-7절에 보면 “성령이 아시아에서 말씀을 전하지 못하게 하시거늘 브루기아와 갈라디아 땅으로 다녀가 무시아 앞에 이르러 비두니아로 가고자 애쓰되 예수의 영이 허락지 아니하시는지라”고 했습니다.

 

# 해설 : 알미니안주의자들이 비록 부패한 뜻을 지닌 단어를 사용할지라도 그것은 진정으로 부패한 것을 의미하지는 않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자연인이 결코 죄 가운데 죽지 않았다고 믿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사람의 의지가 결코 부패되었다고 믿지 않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일반 은총을 사용해서 구원의 은혜를 얻을 수 있다고 주장합니다. 이때 구원의 은혜는 복음적인 것이며, 구원 그 자체라고 말합니다. 물론 그들이 주장하는 일반 은총은 저항할 수 있는 은혜를 의미합니다. 이 은혜는 하나님께서 그리스도를 모든 사람에게 계시하였으며, 회개와 믿음을 위해 충분한 수단이 되는 것을 뜻합니다. 이러한 계시에 의해 사람들이 회개와 믿음의 조건을 충족시켜서 구원을 얻는다고 주장합니다.

 

그들의 주장에 의하면 하나님께서는 단지 구원을 얻을 만한 조건을 제시해 주시고, 사람은 일반 은총을 사용해서 얼마든지 그 조건을 충족시킬 수 있습니다. 즉 하나님께서는 구원의 은혜를 베푸시는 것이 아니라, 조건과 수단만 제공하시는 분이시며, 다만 수단을 사용해서 조건을 충족시키는 존재는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결국 구원은 사람이 수단을 사용하는지의 여부에 달려 있는 셈입니다. 그러나 성경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구원의 은혜를 베풀어 주시기 위한 유효한 수단이 정해져 있다고 말씀합니다. 그 은혜의 수단을 구체적인데 결코 사람의 사용 여부에 따라 구원이 결정되는 것이 아닙니다. 복음이 보편적으로 증거되더라도 그 위에 성령이 역사하셔야만 합니다. 우리에게 일어나는 구원의 은혜는 철저히 하나님의 주권적인 은혜로부터 매우 구체적으로 나옵니다. 모든 세대에서 일어난 구원의 은혜는 하나님의 계획과 목적 아래 있기 때문에 때로는 그 수단을 허락하시기도, 거절하시기도 합니다.

 

6. 오류 : 사람의 참된 회심에 있어서 어떤 새로운 자질이나 능력이나 은사들은 하나님에 의해 사람의 의지에 주입되는 것일 수 없다. 그러므로 우리를 회심케 하고 신자라고 불릴 수 있게 하는 믿음은 하나님에 의해 주입된 자질이나 은사가 아니라, 오직 사람의 행위이다. 이 믿음에 이르게 하는 능력에 관한 것이 아니라면 은사라 불릴 수 없다.

 

반박 : 이런 가르침은 성경에 반대되는데, 성경은 하나님께서 믿음, 순종, 그리고 그 분의 사랑을 자각하는 것에 대한 새로운 자질을 우리 마음속에 불어 넣으신다고 선언합니다. 즉 예레미야 31:33절을 보면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그러나 그 날 후에 내가 이스라엘 집에 세울 언약은 이러하니 곧 내가 나의 법을 그들의 속에 두며 그 마음에 기록하여 나는 그들의 하나님이 되고 그들은 내 백성이 될 것이라”고 했고, 이사야 44:3절을 보면 “대저 내가 갈한 자에게 물을 주며 마른 땅에 시내가 흐르게 하며 나의 신을 네 자손에게, 나의 복을 네 후손에게 내리리니”라고 했으며, 로마서 5:5절에 보면 “소망이 부끄럽게 아니함은 우리에게 주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 마음에 부은바 됨이니”라고 했습니다. 또한 이 주장은 교회가 지금까지 일관되게 가르쳐왔던 교리와 반대됩니다. 교회는 선지자의 입을 통해 다음과 같이 기도합니다. 예레미야 31:18절을 보면 “에브라임이 스스로 탄식함을 내가 정녕히 들었노니 이르기를 주께서 나를 징벌하시매 멍에에 익숙지 못한 송아지 같은 내가 징벌을 받았나이다. 주는 나의 하나님 여호와시니 나를 이끌어 돌이키소서 그리하시면 내가 돌아오겠나이다”라고 했습니다.

 

# 해설 : 알미니안주의자들은 성령의 중생 사역을 부정함으로써 성경의 가르침에서 더욱 멀어집니다. 성경에서 멀어지게 하는 알미니안주의자들의 가르침 중 하나는, 사람의 참된 회심 속에서 새로운 영적 자질이나 성품 혹은 은사들이 하나님에 의하여 그의 의지 속으로 주입되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성령께서 우리의 성질을 변화시키고 새로운 영적 자질을 부여하심으로써 그 의지가 갱신되어서 그리스도를 붙잡게 되고 거룩함을 추구하게 됩니다. 참된 회심이 일어나면 죄를 미워하게 되어 죄와 싸우고 거룩함을 추구할 수 있게 됩니다. 이러한 변화는 급진적인 것으로서 눈에 드러나는 은혜의 효과입니다. 고린도후서 5:17절을 보면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것이 되었도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알미니안주의자들은 참된 회심으로 이러한 일들이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고 주장합니다. 그들이 말하는 회심은 믿음으로 일어나는데, 이 믿음은 성령의 갱신케 하는 역사로 발생되는 것이 아니라 의지의 행위로서 사람에게서 나오는 것이라고 주장합니다. 그래서 믿음 자체가 선물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 믿음을 얻게 하는 능력에 대해서는 선물이라 할 수 있다고 주장합니다. 즉 하나님의 은혜는 믿을 수 있도록 도와주시는 것에 불과하다는 것입니다.

 

그들의 주장은 성경의 가르침과 정면으로 충돌됩니다. 성경은 하나님께서 말씀과 성령의 역사로 우리의 심령에 새로운 영적 자질을 부여하셨다고 가르쳐 주십니다. 회개가 가능하려면 성령이 역사하셔야 합니다. 그리스도를 믿기 위해서도 반드시 성령이 역사하셔서 그리스도의 필요성과 소중성을 알게 하셔야 합니다. 그리고 그리스도 안에 마련된 하나님의 구원의 은덕의 필요성과 중요성을 알아야 하는데 이 또한 성령께서 알게 하시고 갈망케 하시는 것입니다.

 

이러한 성령의 역사는 전적으로 하나님의 주권적인 역사며, 사람이 수단을 적절하게 사용하여 얻을 수 있는 것이 결코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이러한 은혜를 베푸시는 것의 근원을 거슬러 올라가 보면 하나님의 선택이 있음을 알게 됩니다. 그래서 구원은 오직 하나님의 은혜며, 선물임을 고백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7. 오류 : 우리를 하나님께로 회심하게 하는 은혜는 단지 신사적인 충고일 뿐이다. 충고로 이루어지는 이런 역사의 방식은 사람의 회심에 있어서 가장 고상한 방식이며, 사람의 본성과 가장 잘 어울린다. 충고하는 이 은혜만으로 본성적인 사람을 영적인 사람으로 만드는 것이 충분하지 않아야 할 이유가 없다. 참으로 하나님께서는 이런 도덕적인 설득을 통하지 않고서는 의지의 찬동을 일으키시지 않으신다. 사단이 단지 현세적 유익들만을 약속하는 반면, 하나님께서는 영원한 유익을 약속하신다는 점에서 하나님의 역사하심의 능력은 사단의 역사를 능가한다.

 

반박 : 이런 주장은 전적으로 펠라기우스파에 속한 것이며, 성경 전체와 반대됩니다. 성경은 이런 도덕적인 설득 이상의 다른 것, 곧 사람의 회심에서 성령의 역사에 속한 보다 더 능력 있고 신적인 방식을 가르칩니다. 에스겔 36:26절을 보면 “또 새 영을 너희 속에 두고 새 마음을 너희에게 주되 너희 육신에서 굳은 마음을 제하고 부드러운 마음을 줄 것이며”라고 했습니다.

 

# 해설 : 성령께서 영혼을 중생케 하실 때 영적인 성질을 그 심령에 심어 주심으로 완전히 새롭게 하십니다. 이를 성령의 거룩하게 하는 역사라고 말하며(고전 6:11; 살후 2:13; 벧전 1:2), 혹은 성령의 씻는 작업이라고도 합니다(고전 6:11; 딛 3:5). 이렇게 거룩하게 하시는 역사 속에서 죄에서 떠날 수 있도록 죄의 더러움을 보게 하시며, 하나님에게 돌아서도록 하십니다.

 

알미니안주의자들은 회심을 위해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은 설득이며 이는 사람이 지닌 자연의 본성과 어울린다고 주장합니다. 즉 그들은 하나님의 설득이 자연의 본성을 버리게 하거나 이를 무시하고 강압적으로 믿게 하는 것이 아니라고 말합니다. 하나님께서 설득하심으로 충분히 그 영혼이 영적으로 된다고 하였습니다. 하나님의 설득은 강압적이지 않기 때문에 의지의 동의를 이끈다고 주장합니다. 더욱이 그들은 하나님의 설득이 영혼을 속이는 사단의 역사를 능히 극복할 수 있게 한다고 말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것은 영원한 것인 반면에 사단이 약속한 것은 일시적인 것이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이렇게 알미니안주의자들이 말하는 회심은 하나님의 설득의 은혜로 회개하고 믿는 것입니다. 즉 성령께서 회개하고 믿으라고 설득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는 성경에서 말하는 회심이 아닙니다. 알미니안주의자즐이 말하는 회심은 성령의 강력한 역사로 새로운 마음과 성품을 부여받는 것이 아닙니다. 하지만 성령의 역사로 회심한 영혼은 거룩한 생활을 추구하고 계명을 지키며 성령의 주장에 순종하게 되어 있습니다.

 

따라서 성경에서 말하는 회심을 반대하고 성질을 변화시키는 성령의 역사를 단순히 하나님의 설득으로 전락시키는 알미니안주의자들의 가르침은 오류입니다. 하나님의 설득으로 인해 단순히 자연적인 성품으로 회개하고 믿는 것을 회심이라고 부른다면, 죄와 싸우는 거룩한 삶을 어떻게 기대할 수 있겠는가? 이러한 주장을 하는 알미니안주의자들의 가르침 가운데 진정한 회개와 믿음은 기대하기 힘듭니다.

 

8. 오류 : 사람의 중생에 있어서 하나님께서는 믿음과 회심에 사람의 의지를 강력하고 확실하게 굴복시키기 위해 그 분의 전능하신 능력을 사용하지 않으신다. 비록 하나님께서 사람을 회심시키기 위해 사용하시는 은혜의 모든 역사가 완료되었고, 심지어 하나님께서 사람의 중생을 의도하시고 그를 중생하게 하기를 원하신다고 할지라도,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은 하나님과 성령께 반항할 수 있으며, 실제로 종종 그렇게 반항을 해서 그의 중생을 전적으로 방해한다. 그러므로 중생하거나 하지 않는 것은 사람의 능력에 달려 있다.

 

반박 : 이와 같은 주장은 사람의 회심에 대한 하나님의 은혜의 모든 공효를 부인하고, 전능하신 하나님의 역사를 사람의 의지에 종속시키는 것에 불과합니다. 그것은 사도들의 가르침과도 반대됩니다. 사도들은 에베소서 1:19절에 보면 “그의 힘의 강력으로 역사하심을 따라 믿는 우리에게 베푸신 능력의 지극히 크심이 어떤 것을 너희로 알게 하시기를 구하노라”고 했고, 데살로니가후서 1:11절에 보면 “이러므로 우리도 항상 너희를 위하여 기도함은 우리 하나님이 너희를 그 부르심에 합당한 자로 여기시고 모든 선을 기뻐함과 믿음의 역사를 능력으로 이루게 하시고”라고 했으며, 베드로후서 1:3절에 보면 “그의 신기한 능력으로 생명과 경건에 속한 모든 것을 우리에게 주셨으니 이는 자기의 영광과 덕으로써 우리를 부르신 자를 앎으로 말미암음이라”고 했습니다.

 

# 해설 : 알미니안주의자들은 사람의 의지를 강조하기에 하나님의 은혜를 평가 절하하고, 하나님의 주권을 박탈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죄인을 돌아서게 하시는 것은 강력한 역사로서 이것은 그 영혼에 새로운 성질과 성품을 부여하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 사도는 새로운 피조물이 되었다고 하였습니다. 고린도후서 5:17절을 보면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것이 되었도다”고 했습니다. 이러한 성령의 갱신의 역사는 의지 또한 새롭게 하셔서 영적인 것을 택하게 하시고 자발적인 순종을 이끄십니다. 또한 심령의 돌들을 제거하시고 부드러운 마음을 주십니다. 에스겔 36:26절을 보면 “또 새 영을 너희 속에 두고 새 마음을 너희에게 주되 너희 육신에서 굳은 마음을 제하고 부드러운 마음을 줄 것이며”라고 했습니다. 따라서 고집스럽고 반항적인 의지가 꺾이게 됩니다. 영혼이 상한 심령이 되게 하시고 가난한 심령으로 만드시는 것이 이러한 역사의 결과입니다. 마태복음 12:20절을 보면 “상한 갈대를 꺾지 아니하며 꺼져 가는 심지를 끄지 아니하기를 심판하여 이길 때까지 하리니”라고 했습니다.

 

더욱이 알미니안주의자들은 하나님께서 사람의 중생을 의도하고 모든 은혜를 사용하셔도 사람이 저항할 수 있다고 주장합니다. 물론 그들이 말하는 중생은 믿는 것에 설득되어서 믿겠다는 의지를 보이는 것을 의미합니다. 따라서 얼마든지 자신의 의지를 번복할 수 있는데, 믿겠다고 했다가도 믿지 않을 수 있기 때문에 이러한 주장을 펴는 것입니다. 결국 이러한 주장의 핵심은 구원의 최종성이 사람에게 있음을 말하고자 함입니다. 결국 그들은 줄기차게 하나님의 은혜의 유효성을 부정하고 있습니다. 자유의 의지를 하나님의 자리에 올려 놓았기 때문에 이러한 논리적 굴레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것입니다.

 

9. 오류 : 은혜와 자유의지는 회심의 시작을 함께 일으키는 부분적인 원인들이다. 이 원인들의 순서에 있어서 은혜는 의지의 작용보다 먼저 일어나지 않는다. 하나님께서는 사람의 의지가 스스로 움직여 이것을 행하기로 결정할 때까지는 사람의 의지가 회심에 도달하도록 효과적으로 돕지 않으신다.

 

반박 : 고대 교회는 오래 전에 사도들의 말씀을 따라 펠라기우스파의 이런 교리를 정죄하였습니다. 로마서 9:16절을 보면 “그런즉 원하는 자로 말미암음도 아니요, 달음박질하는 자로 말미암음도 아니요, 오직 긍휼히 여기시는 하나님으로 말미암음이니라”고 했고, 고린도전서 4:7절에 보면 “누가 너를 구별하였느뇨. 네게 있는 것 중에 받지 아니한 것이 무엇이뇨. 네가 받았은즉 어찌하여 받지 아니한 것같이 자랑하느뇨”라고 했으며, 빌립보서 2:13절을 보면 “너희 안에서 행하시는 이는 하나님이시니 자기의 기쁘신 뜻을 위하여 너희로 소원을 두고 행하게 하시나니”라고 했습니다.

 

# 해설 : 알미니안주의자들의 주장은 사람의 의지를 가지고 회개와 믿음의 조건을 충족시키면 구원을 얻는다는 것입니다. 물론 사람의 의지가 우선순위를 가지고 있으며, 의지가 부족할 때 하나님께서 설득의 은혜로 도와주시면 된다는 것입니다. 그들의 주장은 신인협력설에 해당됩니다. 그런데 그것도 하나님의 은혜가 먼저가 아니고 인간의 의지가 먼저라는 것입니다. 사람의 의지가 먼저 나서야 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람의 의지가 스스로에게 동기를 주고 결정해야 된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의지가 먼저 드려지기 전까지 하나님께서는 사람의 의지에 영향을 주거나 압력을 행사하시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들의 이러한 주장은 사람의 자유의지를 구원의 가장 중요한 요소로 보는데서 나왔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인간의 자유의지 아래 주었고, 하나님을 수동적인 하나님으로 만들어 놓았습니다. 사람의 의지와 행위에 강조를 두고 하나님의 주권과 은혜를 포기하면 이러한 체계에 빠져버립니다. 때로 믿는다고 고백하지만 행위가 전혀 없는 경우가 있습니다. 이러한 경우를 개혁하기 위해 사람의 의지와 행위를 강조하게 되면 결국 펠라기우스의 가르침으로 돌아가게 되는 셈입니다. 오늘날 한국교회 가운데서 믿음의 행위를 강조하면서 믿음과 회개가 일어나는 원리를 생략한 ‘바울의 새관점’이나 ‘칭의유보론’이 마찬가지의 패턴을 따르고 있습니다.

 

신앙고백은 있지만 진정한 삶의 증거를 보이지 않을 경우 의지와 행위 자체를 강조할 것이 아니라 경건의 삶을 이끄는 진정한 은혜를 강조해야 합니다. 완전히 새롭게 하는 성령의 유효한 역사를 강조해서 행함이 나오지 않는 교인들로 하여금 자신에게 무엇이 결여되어 있는지를 점검하게 해야 합니다.

 

성경은 사람의 의지와 설득의 은혜가 협력해서 구원을 얻는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 믿음이 발생되고 그 믿음으로 그리스도를 붙잡아서 구원을 얻는다고 말합니다. 에베소서 2:8-9절을 보면 “너희가 그 은혜를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었나니 이것이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니 이는 누구든지 자랑치 못하게 함이니라”고 했습니다. 바울은 디도서 3:5절에서 “우리를 구원하시되 우리의 행한바 의로운 행위로 말미암지 아니하고 오직 그의 긍휼하심을 좇아 중생의 씻음과 성령의 새롭게 하심으로 하셨나니”라고 했습니다. 그러므로 은혜보다 의지의 작용을 먼저 내세우는 알미니안주의자들의 주장은 오류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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