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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 손재호
제4장 다섯 번째 교리 오류 논박
강설날짜 2018-09-09

2018년 도르트 신조 공부(34)

 

제4장. 도르트 신조의 다섯 번째 교리

- 성도의 견인 -

 

제4장 오류에 대한 반박

 

도르트 총회는 성도의 견인(도르트 신조 다섯 번째 교리)에 대한 참된 교리를 해명하고, 다음의 오류를 반박합니다.

 

1. 오류 : 참 신자들의 견인은 선택의 열매나 그리스도의 죽음으로 획득된 하나님의 선물이 아니고, 이른바 그 자신의 결정적인 선택과 칭의 이전에 사람이 자신의 자유의지로 성취해야 하는 새 언약의 조건이다.

 

* 반박 : 성경은 궁극적인 구원의 견인은 선택으로부터 나오며,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과 중보의 공로로 택자에게 주어진다고 증언합니다. 로마서 11:7절을 보면 “그런즉 어떠하뇨. 이스라엘이 구하는 그것을 얻지 못하고 오직 택하심을 입은 자가 얻었고 그 남은 자들은 완악하여졌느니라”고 했고, 로마서 8:32-35절을 보면 “자기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시고 우리 모든 사람을 위하여 내어주신 이가 어찌 그 아들과 함께 모든 것을 우리에게 은사로 주지 아니하시겠느뇨. 누가 능히 하나님의 택하신 자들을 송사하리요, 의롭다 하신 이는 하나님이시니 누가 정죄하리요, 죽으실 뿐 아니라 다시 살아나신 이는 그리스도 예수시니 그는 하나님 우편에 계신 자요, 우리를 위하여 간구하시는 자시니라. 누가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으리요, 환난이나 곤고나 핍박이나 기근이나 적신이나 위험이나 칼이랴”고 했습니다.

 

해설 : 알미니안주의자들은 하나님의 주권적인 선택을 부정하기 때문에 선택과 견인의 관계도 거꾸로 둘 수밖에 없습니다. 따라서 인간의 자유의지로 새 언약의 조건을 끝까지 충족시켜야 선택과 칭의가 일어난다고 주장합니다. 그들의 주장에 의하면 선택과 칭의는 죽은 순간에 일어나는 것이 되는 것입니다. 결국 이러한 그들의 주장은 성도의 견인이 확실함을 부정하는 셈이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알미니안주의자들은 진정한 성도의 견인이 선택의 결과 혹은 열매이자 하나님의 선물임을 부정합니다. 또한 성도의 견인이 그리스도의 죽음으로써 얻어진다는 것을 부정합니다. 그러나 성경은 견인이 선택으로부터 나옴을 보여 주고 있습니다. 그리고 선택은 변할 수 없기에 성도가 견인된다는 것은 확실합니다. 또한 선택이 유효할 수 있는 것은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과 중재로 인함입니다. 그리스도의 구속 사역으로 아버지가 선택하신 자들을 구원하시는 것입니다. 선택의 유효성과 불변성은 그리스도의 구속 사역으로 더욱 분명해집니다. 결국 이것으로부터 성도의 견인이 나타나는 것입니다(참조. 롬 8:32-35).

 

2. 오류 : 하나님께서는 진정 신자에게 견인을 위한 충분한 힘을 공급하시고, 만약 그가 자기의 의무를 이행하려 한다면 언제라도 이 충분한 힘을 기꺼이 보존해 주실 것이다. 그러나 비록 신자가 믿음 안에서 견인하기 위해 필요한 모든 것과 하나님께서 믿음을 보존하시기 위하여 사용하실 모든 것들을 갖추고 있다 할지라도, 여전히 사람이 견인할 것인가 아닌가 하는 것은 항상 그 사람의 의지의 결정에 달려 있다.

 

* 반박 : 이런 생각은 철저히 펠라기우스주의에 속해 있습니다. 이런 교리는 사람들을 자유롭게 만들기를 원하지만, 그들을 하나님의 영광에 대한 약탈자로 만듭니다. 이것은 사람에게서 자랑할 만한 모든 근거를 거두어들이고, 이런 유익에 대한 모든 찬송을 오직 하나님의 은혜에만 돌리는 복음의 일관된 가르침과 반대됩니다. 또한 그것은 사도의 증언과도 반대됩니다. 고린도전서 1:8절을 보면 “주께서 너희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날에 책망할 것이 없는 자로 끝까지 견고케 하시리라”고 했습니다.

 

해설 : 알미니안주의자들이 말하는 견인은 사람의 자유의지를 가지고 새 언약의 조건을 끝까지 충족시키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하나님께서 신자에게 견인에 필요한 충분한 능력을 공급하셨다고 말합니다. 그러면서 그 의무의 수행 여부는 사람에게 달려 있으며, 다만 그 의무를 수행할 때 하나님께서는 보존하실 준비를 하신다고 주장합니다. 그들의 이와 같은 주장은 자신들이 구원을 이룰 수 있음을 강조합니다. 그들이 말하는 의무는 회개와 믿는 의무인데 자신의 의지를 가지고 회개하고 믿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렇게 의무를 다 할 때 견인의 능력을 받아서 끝까지 믿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견인의 능력을 사용하거나 혹은 사용하지 않는 것은 사람의 자유의지에 달려 있어서 마지막까지 믿게 되는 것은 사람의 책임이라는 것입니다. 이는 하나님의 주권을 사람의 자유의지에 부속시켜 놓았기 때문에 하나님의 영광을 도적질하고 교만을 부추기는 셈입니다. 또한 자신의 믿는 행위를 강조하기 때문에 결국 자기의 의로움을 내세우게 만듭니다.

 

성경은 이 땅에서 성도 자신의 의지나 능력이 아니라 항상 주의 은덕에 의지해서 견인하라고 말씀합니다. 이것은 철저히 성도로 하여금 겸손하게 하며, 오직 하나님의 은혜가 그 중심이 되게 만드는 것입니다. 성도가 거룩해지려고 애쓰며 죄와 싸우고 선행을 하였더라도 그것은 여전히 부족하고 죄로 오염된 상태입니다. 2항에서 “… 심지어 성도의 가장 선한 행위에도 결점들이 들러붙어 있습니다. …”고 고백했습니다. 따라서 마지막 날에 그리스도 앞에 설 수 있는 것은 시작하신 은혜가 끝까지 그들을 붙잡아 주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진정으로 성도의 견인 교리를 깨닫게 되면 오직 하나님께 찬양과 영광을 돌려드리며 감사하게 됩니다.

 

3. 오류 : 참으로 중생한 신자들도 칭의의 믿음과 또한 은혜와 구원으로부터 완전히, 확실히 타락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진정 가끔씩 믿음과 은혜와 구원에서 타락하여 영원히 유실되기도 한다.

 

* 반박 : 이런 견해는 그리스도에 의한 칭의와 중생과 끊임없는 보존의 은혜를 무효화시키며, 다음의 사도 바울의 명백한 가르침과 반대됩니다. 로마서 5:8-9절을 보면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 그러면 이제 우리가 그 피를 인하여 의롭다 하심을 얻었은즉 더욱 그로 말미암아 진노하심에서 구원을 얻을 것이니”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사도 요한의 가르침과도 반대됩니다. 요한일서 3:9절을 보면 “하나님께로서 난 자마다 죄를 짓지 아니하나니 이는 하나님의 씨가 그의 속에 거함이요, 저도 범죄치 못하는 것은 하나님께로서 났음이라”고 했습니다. 또한 다음의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과도 반대됩니다. 요한복음 10:28-29절을 보면 “내가 저희에게 영생을 주노니 영원히 멸망치 아니할 터이요, 또 저희를 내 손에서 빼앗을 자가 없느니라. 저희를 주신 내 아버지는 만유보다 크시매 아무도 아버지 손에서 빼앗을 수 없느니라”고 했습니다.

 

해설 : 알미니안주의자들이 말하는 칭의와 믿음은 의지의 행위로 드려지는 믿음을 통해 죄 용서함을 얻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래서 믿고자 하는 의지가 약해지거나 소멸되면 믿음에서 떨어져 나간 것으로 봅니다. 그들은 이렇게 믿음에서 떨어져 나가는 자들이 실제로 있음을 강조합니다. 그래서 자신의 의지를 가지고 믿음을 지켜야 결국 구원을 받는 것으로 말합니다. 그들이 논리적으로 그리고 현상적으로 말하는 것은 예수님의 비유에 의하면 일시적인 믿음에 해당됩니다. 즉 진정한 믿음이 아닌 것을 칭의의 믿음으로 보았다가 그 믿음에서 떨어져 나가면 그것으로 구원을 잃었다고 주장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렇게 믿음에서 떨어져 나가거나 중도에 포기하는 믿음은 원래 구원의 믿음이 아닙니다. 그들은 믿음 아닌 것을 믿음으로 여기다가 믿음에서 떨어져 나가게 되면 진정한 신자 혹은 중생한 자가 은혜에서 떨어져 나갔다고 말합니다. 진정한 믿음은 계속해서 은혜를 구할 수밖에 없으며, 구원의 은혜를 시작하신 하나님께서는 완성하시기까지 그들을 보존하십니다. 따라서 진정한 신자 혹은 진정으로 중생한 자는 멸망에 이를 수 없습니다. 만약에 그러한 일이 일어났다면, 이는 아예 처음부터 진정한 믿음도 아니었으며, 회심한 자도 아니었던 것입니다. 다만 외형적으로 은혜의 모습을 하고 있었던 위선자에 불과한 것입니다.

 

4. 오류 : 참으로 중생한 신자들도 사망에 이르는 죄, 즉 성령훼방죄를 범할 수 있다.

 

* 반박 : 사도 요한은 요한일서 5:16-17절에서 사망에 이르는 죄를 지은 사람들에 대하여 말하고, 그들을 위한 기도를 금지 한 후에 곧바로 다음의 말씀을 덧붙입니다. 요한일서 5:18절을 보면 “하나님께로서 난 자마다 범죄치 아니하는 줄을 우리가 아노라. 하나님께로서 나신 자가 저를 지키시매 악한 자가 저를 만지지도 못하느니라”고 했습니다.

 

해설 : 성령훼방죄는 그리스도의 피를 부정한 것으로 여기고 의도적으로 죄를 짓는 것을 말합니다(히 6:6, 10:26). 알미니안주의자들은 성령의 유효한 역사로 인한 중생을 부정합니다. 사람의 의지의 행위를 믿음으로 보고 이로 인해 중생한다고 여기기 때문입니다. 중생에 대한 견해가 이렇다 보니 중생한 자도 은혜에서 떨어져 나갈 수 있다고 말하며, 마지막에 타락하거나 성령훼방죄도 저지를 수 있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물론 현상만으로 볼 때 은혜의 모습을 하고 있던 자들이 타락하는 경우를 성경이 말하고 있습니다.

 

히브리서 6:4-6절을 보면 “한번 비췸을 얻고 하늘의 은사를 맛보고 성령에 참예한 바 되고 하나님의 선한 말씀과 내세의 능력을 맛보고 타락한 자들은 다시 새롭게 하여 회개케 할 수 없나니 이는 자기가 하나님의 아들을 다시 십자가에 못 박아 현저히 욕을 보임이라”고 했습니다. 이 말씀은 성령의 은사를 맛보았지만 타락한 경우를 보여줍니다. 이러한 경우 성령의 은사는 성령의 일반적인 역사로서 특별 사역인 구원의 은혜와 구별됩니다. 즉 성령의 은사가 있는 것이 구원의 증거가 될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알미니안주의자들은 성령의 일반적인 사역과 특별 사역을 구별하지 못하고 구원의 은혜가 있었던 자들이 타락하는 것으로 이해합니다. 진정한 구원의 믿음에 대한 분별없이 단지 의지의 행위를 믿음으로 보는 알미니안주의자들에게는 이러한 혼동이 불가피합니다.

 

중생한 자는 습관적으로 죄를 지을 수 없으며, 동시에 하나님께서는 중생한 자를 지키신다고 성경은 분명히 말씀하고 있습니다. 요한일서 5:18절을 보면 “하나님께로서 난 자마다 범죄치 아니하는 줄을 우리가 아노라. 하나님께로서 나신 자가 저를 지키시매 악한 자가 저를 만지지도 못하느니라”고 했습니다. 따라서 진정으로 중생한 자들은 죽음에 이르는 죄 곧 성령훼방죄를 지을 수 없습니다.

 

5. 오류 : 특별한 계시가 없다면, 우리는 이 생에서 미래의 견인에 대한 확실성을 가질 수 없다.

 

* 반박 : 이 교리로 인해 이 생애에서 참 신자들의 확고한 위로가 약탈당하며, 로마 교황의 추종자들의 의심이 다시 교회로 끌어들여집니다. 하지만 성경은 특별하고 놀라운 계시로부터가 아니라 하나님의 자녀들에게 주신 특별한 표지와 하나님의 변함없는 약속으로부터 이 확신을 항상 이끌어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특별히 이렇게 선언합니다. 로마서 8:39절을 보면 “높음이나 깊음이나 다른 아무 피조물이라도 우리를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으리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사도 요한은 다음과 같이 기록합니다. 요한일서 3:24절을 보면 “그의 계명들을 지키는 자는 주 안에 거하고 주는 저 안에 거하시나니 우리에게 주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그가 우리 안에 거하시는 줄을 우리가 아느니라”고 했습니다.

 

해설 : 알미니안주의자들은 견인의 확신에 대해 특별한 계시의 필요성을 주장하였습니다. 그들이 말하는 특별한 계시란 성경 이외의 영적인 현상으로서 꿈, 환상, 특별한 표적을 포함합니다. 물론 개인의 내적 느낌 혹은 각성도 그 범주에 들어갈 수 있습니다. 그들의 신학체계가 상당히 이성적임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것들을 포함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체험이 견인에 대한 확신을 주지는 않습니다. 알미니안주의자들의이러한 주장은 진정한 성도에게 있는 확실한 위로를 빼앗아 갑니다. 왜냐하면 이러한 주관적이며 느낌에 의존된 체험을 해야 견인을 확신할 수 있다고 말하기 때문입니다. 결국 특별계시를 가진 자와 가지지 않은 자로 나누게 만들기 때문에 위로를 빼앗아 가는 것입니다.

 

이러한 체험이 진정으로 견인에 대한 확신을 준다면 하나님의 약속을 의지하기보다는 이러한 체험을 경험할 수 있는 수단으로 들어가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특별한 계시를 찾고 구하다가 의심의 바다로 들어가 파도가 요동치는 대로 쓸려 다니고 말 것입니다(엡 4:14). 이는 교황으로부터 견인의 확신을 얻고자 하는 로마 카톨릭의 오류로 들어가는 것입니다.

 

특별한 계시를 받았더라도 삶의 변화가 전혀 없으면 이는 아무 것도 아니요, 오히려 사단에게 속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특별한 계시를 받는 것이 견인의 확신이 될 수 없습니다. 견인의 확신은 하나님의 약속의 신실함에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사람에게 구원의 은혜를 약속하시고 이를 위해 일하십니다. 따라서 성경에서 말하는 은혜의 원리와 방식을 떠난 그 어떤 것도 견인에 대한 확신을 줄 수 없습니다.

 

6. 오류 : 견인과 구원의 확실성에 대한 교리는 바로 그 성격 때문에 거짓된 안도감을 일으키며, 경건과 선한 도덕과 기도와 다른 거룩한 연단에 해가 된다. 반대로 견인과 구원의 확실성을 의심하는 것은 권장할 만하다.

 

* 반박 : 이 오류는 하나님의 은혜의 효과적인 능력과 우리 안에 계시는 성령의 역사하심을 무시합니다. 그것은 다음과 같은 분명한 말씀으로 그 반대 입장을 가르치는 사도 요한의 가르침과 반대됩니다. 요한일서 3:2-3절을 보면 “사랑하는 자들아! 우리가 지금은 하나님의 자녀라. 장래에 어떻게 될 것은 아직 나타나지 아니하였으나 그가 나타내심이 되면 우리가 그와 같을 줄을 아는 것은 그의 계신 그대로 볼 것을 인함이니 주를 향하여 이 소망을 가진 자마다 그의 깨끗하심과 같이 자기를 깨끗하게 하느니라”고 했습니다. 더욱이 그것은 견인과 구원의 확신에도 불구하고 기도와 경건의 다른 연단 가운데 계속 생활했던, 구약과 신약의 성도의 실례를 통해서도 반박됩니다.

 

해설 : 알미니안주의자들의 기우처럼 교회사 속에서 성도의 견인 교리를 남용하여 경건에 힘쓰지 않고 기도에 게으르며 성화에 힘쓰지 않았던 가르침이 있었습니다. 이는 하이퍼 칼빈주의자였는데 성도의 견인 교리에서 하나님의 주권 부분만 취하고 인간의 책임 부분을 무시했던 가르침이었습니다. 이러한 가르침이 17-18세기 동안 영국의 침례교에서 유행하여 전도와 성화를 무시하게 되었습니다. 물론 이렇게 성도의 견인 교리를 남용하여 성화를 무시하는 현상이 오늘날의 장로교 내에도 여전히 있습니다. 그러나 이는 성도의 견인 교리와 구원의 확신 교리를 남용한 것으로서 성도의 견인 교리와 구원의 확신 교리는 결코 중생한 자들을 게으르게 만들거나 성화를 무시하게 만들지 않습니다. 성도의 견인은 이미 하나님의 선택이 유효하게 일어난 것을 전제로 합니다. 이 교리는 중생한 자에게 해당되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하나님의 선택이 유효하게 하는 역사를 이해하게 되면 중생한 자가 경건에 힘쓰고 거룩한 의무를 다할 수밖에 없음을 알게 됩니다. 더욱이 그리스도께서는 죄를 없애기 위해 죽으셨습니다. 요한일서 3:5절을 보면 “그가 우리 죄를 없이 하려고 나타내신 바 된 것을 너희가 아나니 그에게는 죄가 없느니라”고 했습니다. 그렇습니다. 그리스도의 이러한 은덕을 입은 자가 죄와 싸우지 않는다면 그는 아직 구원의 은혜가 없는 자입니다.

 

성도의 견인 교리는 거룩함과 경건을 위해 애쓰는데도 불구하고 여전히 능력 없는 것을 깨닫는 자에게 위로를 주고, 은혜를 더욱 의지하게 만드는 가르침입니다. 성경은 진정한 구원의 은혜가 있는 자들이 경건에 힘쓰고, 거룩한 의무에 수고했던 것을 보여 주고 있습니다. 예를 들어, 바울은 디모데후서 4:7절에 보면 “내가 선한 싸움을 싸우고 나의 달려갈 길을 마치고 믿음을 지켰으니”라고 했습니다.

 

7. 오류 : 일시적으로 믿는 사람의 믿음은 의롭게 하는 구원의 믿음과 다르지 않다. 다만 기간만 다를 뿐이다.

 

* 반박 : 마태복음13:20-23절과 누가복음 8:13-15절에서 그리스도께서는 친히 이 지속성에 관한 문제 외에도 단지 일시적으로 믿는 자들과 참된 신자들 사이의 세 가지 측면에서의 차이를 분명하게 지적하셨습니다. 주님께서는 일시적인 신자는 돌밭에 그 씨를 받은 자이며, 참 신자는 좋은 땅, 곧 좋은 마음에 그 씨를 받는 자라고 선언하십니다. 즉 돌밭의 씨는 뿌리가 없는 반면에, 좋은 땅의 씨는 견고한 뿌리를 낸다고 하셨고, 돌밭의 씨는 열매가 없는 반면에, 좋은 땅의 씨는 끊임없이, 그리고 변함없이 많은 열매를 맺는다고 하셨습니다.

 

해설 : 알미니안주의자들은 일시적인 믿음도 의롭게 하는 구원의 믿음과 다르지 않다고 주장하며, 다만 그 기간만 다른 것이라고 말합니다. 이렇게 주장하는 자들은 예수님의 말씀을 무시하고 부정하는 셈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일시적인 믿음과 진정한 믿음의 차이를 설명하기 위해 씨 뿌리는 비유로 말씀하셨습니다(마 13:18-30). 이를 말씀하신 이유는 천국의 비밀을 허락되는 것과 그렇지 않는 것을 가르치기 위함이셨습니다. 마태복음 13:10-12절을 보면 “제자들이 예수께 나아와 가로되 어찌하여 저희에게 비유로 말씀하시나이까? 대답하여 가라사대 천국의 비밀을 아는 것이 너희에게는 허락되었으나 저희에게는 아니되었나니 무릇 있는 자는 받아 넉넉하게 되되 무릇 없는 자는 그 있는 것도 빼앗기리라”고 했습니다. 이렇게 예수님께서 믿음을 구별하셨는데도 알미니안주의자들은 기간만 다를 뿐이지 같다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이 두 믿음은 말씀을 받는 것에서부터 다르며, 깨달음의 유무에서도 차이가 나고, 열매의 유무 여부도 완전히 다릅니다. 따라서 알미니안주의자들의 주장은 예수님의 가르침으로부터 벗어난 오류입니다.

 

8. 오류 : 그의 첫 중생을 유실해 버린 사람이 다시, 그리고 심지어 그 이상 몇 번이고 새롭게 태어난다는 것은 불합리하지 않다.

 

* 반박 : 이 교리는 우리를 거듭나게 한 하나님의 씨가 영구적이라는 것을 부인하며, 다음의 사도 베드로의 증언과도 반대됩니다. 베드로전서 1:23절을 보면 “너희가 거듭난 것이 썩어질 씨로 된 것이 아니요, 썩지 아니할 씨로 된 것이니 하나님의 살아 있고 항상 있는 말씀으로 되었느니라”고 했습니다.

 

해설 : 알미니안주의자들은 중생을 잃어버릴 가능성을 말하고, 후에 다시 중생할 수 있다고 주장합니다. 우리는 여기서 우선 그들이 말하는 중생은 성령의 유효한 역사로 일어나는 중생이 아님을 기억해야 합니다. 이들이 말하는 중생은 의지의 행위로 인한 것입니다. 이렇게 중생한 후에 의지가 약해지거나 소멸되면 중생을 잃어버린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다시 의지의 행위로 그리스도를 믿는다고 하면 또 중생한다는 것입니다. 물론 그들의 주장 속에는 성도의 견인 교리도 설 곳이 없습니다.

 

그들이 말하는 믿음은 성경에서 말하는 구원의 믿음도 아니며, 그들이 말하는 중생은 성령의 주권적인 역사로 거룩한 성질이 부여되는 중생이 아닙니다. 이들은 단지 잘못된 개념을 신학적인 언어로 현혹하고 있습니다. 성령으로 거듭나게 하실 때 하나님의 썩지 않는 씨로 하시며, 그것은 심령에 뿌려져서 효과를 나타내게 되어 있습니다. 그 효과는 반드시 유효하기 때문에 썩지 않는 씨라고 말하는 것입니다(벧전 1:23). 따라서 중생의 효과는 취소되거나 잃어버릴 수 없습니다. 그리고 중생을 잃어버린 후에 또 중생하는 것은 더욱 아닙니다.

 

9. 오류 : 그리스도께서는 신자들이 믿음을 끊임없이 유지해야 한다고 어디에서도 기도하지 않으셨다.

 

* 반박 : 이것은 그리스도께서 친히 말씀하신 것과 반대됩니다. 누가복음 22:32절을 보면 “그러나 내가 너를 위하여 네 믿음이 떨어지지 않기를 기도하였노니 너는 돌이킨 후에 네 형제를 굳게 하라”고 했습니다. 또한 그리스도께서 사도들뿐만 아니라 그들의 말을 통하여 믿을 모든 사람을 위하여 기도하신다고 선언한 사도 요한의 선언과도 반대됩니다. 요한복음 17:11절을 보면 “나는 세상에 더 있지 아니하오나 저희는 세상에 있사옵고 나는 아버지께로 가옵나니. 거룩하신 아버지여! 내게 주신 아버지의 이름으로 저희를 보전하사 우리와 같이 저희도 하나가 되게 하옵소서”라고 기도했고, 요한복음 17:15절에도 보면 “내가 비옵는 것은 저희를 세상에서 데려가시기를 위함이 아니요, 오직 악에 빠지지 않게 보전하시기를 위함이니이다”라고 했으며, 요한복음 17:20절에도 보면 “내가 비옵는 것은 이 사람들만 위함이 아니요, 또 저희 말을 인하여 나를 믿는 사람들도 위함이니”라고 했습니다.

 

해설 : 알미니안주의자들은 그리스도께서 신자들의 견인을 위해 기도하지 않았다고 주장합니다. 이렇게 주장하는 근거는 어차피 신자들이 타락할 가능성이 있기 때문에 그들의 견인을 위해 기도할 필요가 없다는 주장입니다. 여기서도 그들은 신자들의 타락 가능성을 계속 강조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께서는 신자들의 견인을 위해 기도하셨습니다(눅 22:32; 요 17:11, 15, 20). 예수님께서는 타락 가능성 때문이 아니라, 그들이 견인의 은혜 가운데 있도록 기도하셨습니다. 중생했더라도 육신의 연약함을 가지고 있으며, 세상과 마귀의 유혹 가운데 있기 때문에 신자들의 견인을 위해 기도하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베드로를 위해서도 기도하셨습니다. 비록 그가 예수님을 부인하는 죄를 지었지만 자신의 죄를 깨닫고 회개하였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에 의해 회복 될 수 있었습니다. 즉 베드로를 위한 예수님의 기도는 그의 견인을 위한 기도로서 그 목적이 충분히 성취되었습니다. 예수님의 기도는 오늘날 중생한 우리 성도들에게도 이와 같이 적용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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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3 돌트신조 2018년 도르트 신조 공부(제3장 11-12항) file 도르트 신조 제3장 11-12항 손재호 132
142 돌트신조 2018년 도르트 신조 공부(제3장 9-10항) file 도르트 신조 제3장 9-10항 손재호 122
141 돌트신조 2018년 도르트 신조 공부(제3장 7-8항) file 도르트 신조 제3장 7-8항 손재호 112
140 돌트신조 2018년 도르트 신조 공부(제3장 5-6항) file 도르트 신조 제3장 5-6항 손재호 108
139 돌트신조 2018년 도르트 신조 공부(제3장 4항) file 도르트 신조 제3장 4항 손재호 111
138 돌트신조 2018년 도르트 신조 공부(제3장 1-3항) file 도르트 신조 제3장 1-3항 손재호 1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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