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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 손재호
성경본문 약 2:14-26
강설날짜 2017-04-16

2017년 봄 사경회 특강

구원의 신앙(I)

말씀:야고보서 2:14-26

 

오늘 우리는 ‘구원의 신앙’에 대해서 공부하고자 합니다. 교회 안에서 많이 쓰는 ‘믿음’이라는 말이 참으로 나타내고 있는 뜻이 무엇입니까? 우리가 믿음을 바르게 이해하기 위해서는 먼저 잘 기억하고 있어야 할 것은 믿음이란 사람이 믿으려고 노력해서 믿어지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가령 어떤 사실에 대해서 그 사실을 내가 ‘과연 그렇다’ 하고 시인할 수 있는 것도 거기에 항상 객관적인 조건과 그렇게 수긍하지 않을 수없는 강한 선천적인 논리가 작용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내가 부인하려면 부인하고 시인하려면 시인하고 그렇게 안 되는 것입니다. 사실을 시인할 때에는 내 멋대로 하는 것이 아니라 시인하지 않을 수 없는 조건들 위에 서서 시인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것을 그렇게 생각하지 않고 신앙은 자기가 믿어 보려고 노력하면 곧바로 생겨나고 자기가 부인하려고 노력하면 부인해 버릴 수 있는 것으로 생각하는 것은 바른 생각이 아닙니다. 그것은 믿음이라는 말을 속되게 쓸 때 가지는 관념입니다. 좀 희미하고 확실한 지식이 되지 못하는 것에 대한 자기의 욕망이나 소원을 표시하기 위해 믿음이라는 말을 씁니다. 예를 들어, ‘그것이 그렇게 될 줄 믿습니다’라고 할 때에는 확실히 된다는 것을 정확하게 알고 있다는 말이 아니라 그렇게 되기를 바란다는 희망적인 요구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성경에서 쓰는 ‘믿음’이라는 말에 대하여 우리가 주의해야 합니다.

 

물론 성경에 믿음이라는 말이 쓰일 때 똑같은 의미로만 쓰인 것은 아닙니다. 크게 두 가지로 나눠 보면 구원을 확실히 드러내는 믿음 즉 ‘구원의 믿음’이 있고, 다른 하나는 비록 그것이 종교적으로 아주 훌륭한 믿음이라 할지라도 ‘구원을 보장하지 못하는 믿음’이 있습니다. 구원의 징표로서의 믿음이 아닌 것도 믿음이라는 말로 부르는 것입니다. 예를 들면, 마태복음 21:21절의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만일 너희가 믿음이 있고 의심치 아니하면 이 산더러 들려 바다에 던지우라 하여도 될 것이요”라든지, 마가복음 11:24절의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무엇이든지 기도하고 구하는 것은 받은 줄로 믿으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그대로 되리라”고 할 때 그 믿음은 반드시 구원을 받은 증거로서의 믿음은 아닙니다. 그것은 소위 ‘기적신앙’입니다. 즉 기적을 행할 때 갖는 신앙태도, 혹은 기적을 수긍하는 신앙을 말합니다. 이런 것들도 성경에는 믿음이라는 표현으로 기록되어 있지만 그것이 반드시 구원의 믿음이라고 보증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보통 기도해서 병을 고침 받은 사람은 믿음이 깊고 철저해서 하나님 앞에 가장 가까이 가는 사람인 것같이 생각하기 쉽겠지만, 어떤 거대한 종교적인 법칙 하에서 그것은 그것대로 운용이 되기도 하는 것입니다. 구원이 그런 좀더 초월한 듯한 종교적인 행동이나 종교적인 심리 작용과 연결되어 있다고 생각하거나 적어도 그런 것이 구원에 대단히 가까운 것같이 생각하기도 하지만 그러나 성경은 그렇게 안 가르쳤다는 것을 우리는 늘 주의해야 합니다. 성경에서 가르친 구원의 믿음은 하나님께서 위로부터 내려주신 것입니다. 사람이 스스로 조작해서 만들어 내는 것이 아닙니다. 물론 주실 때에도 믿음만 따로 뚝 떼어서 내려주시지 않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공로를 믿고 부활의 사실을 믿은 사람에게 하나님의 은혜로 새로운 생명이 그 안에 생겼을 때 즉 성령 하나님께서 그 사람을 하나님의 자녀로 재창조 하시는 일이 발생하면 그에게 있는 이 새 생명은 새로운 마음의 상태를 일으키는 것입니다. 이 새로운 심상에 제일차적으로 가장 현저하고 명료하게 나타나는 것이 바로 믿는 믿음입니다. 또한 이 믿음이 있는 곳에는 반드시 하나님의 뜻을 추구하고 그것을 실행해 나가는 순종의 행위가 붙어 다니게 됩니다. 이러한 재창조로 말미암은 구원의 신앙은 하나님의 말씀을 신뢰하는 것으로부터 시작합니다.

 

그런데 말씀 가운데 무엇을 믿느냐 하는 것은 대체로 어떤 일정한 범위가 있습니다. 성경에 있는 몇 마디 안 되는 짧은 말만 믿어도 곧 구원을 받는 것이 아니고 반드시 믿어야 할 사실을 믿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결핍되면 구원의 신앙이 되지 않는다는 것을 주의해야 합니다. 이제까지 구원의 신앙에 대해서 개론적으로 이야기했는데 이제 몇 가지 구원과 상관이 없는 믿음에 대해서 배운 다음에 자세히 더 살펴보기로 하겠습니다.

 

믿음이란 위로부터 성도에게 단번에 내려오는 것이지 조금씩 조금씩 자꾸 더 일으키는 것이 아닙니다. 유다서 3절을 보면 “사랑하는 자들아! 내가 우리의 일반으로 얻은 구원을 들어 너희에게 편지하려는 뜻이 간절하던 차에 성도에게 단번에 주신 믿음의 도를 위하여 힘써 싸우라는 편지로 너희를 권하여야 할 필요를 느꼈노니”라고 했습니다. 이 말씀은 유다서 저자가 우리가 다같이 받은 것, 곧 너도 받고 나도 받은 구원을 제목 삼아 너희한테 편지를 하고 싶었다고 하는 그런 말입니다. 우리가 함께 나눈 구원에 관하여 내가 너희에게 편지를 좀 하려고 하던 참에 ‘이것을 하지 않으면 안 되겠다’고 하는 어떤 강렬한 동기가 생겼는데 그것이 뭐냐 하면 “성도에게 단번에 주신 믿음의 도를 위해서 너희가 힘써 싸워야 하겠다”고 하는 것입니다. 표면상으로 보면 아무런 박해도 없지만 내부적으로 다른 사상, 곧 괴상한 종교적인 현상이 침해하여 참 신앙인 체하고 차츰차츰 나가는 것을 보면서 간곡한 편지를 쓸 필요를 더욱 느끼고 ‘안 되겠구나. 성도에게 단번에 내리신바 믿음의 도를 위해서 너희들은 일어나서 싸워야 하겠다’하고 편지를 했습니다. 이것이 유다서 저자가 유다서를 보내는 목적입니다.

 

이렇게 믿음은 하나님께서 성도에게 단번에 주신 것이지 자기가 믿어 보려고 애를 써 가지고 믿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예를 들면, 우리가 지금 앉아 있는 이 집이 날아서 공중으로 올라갈 필요가 있다고 할 때 ‘날아서 공중으로 올라갑니다. 나는 믿습니다. 믿습니다’하고 천 번을 외워 봐도 집이 날아서 공중으로 올라가는 것이 아닙니다. 그저 내 자신의 심리 여하에 따라서 일이 이렇게도 되고 저렇게도 되는 것이 아닙니다. 설령 자기 혼자만의 문제라고 해도 ‘아! 그러면 내 몸뚱이 하나가 날아서 공중으로 올라가야겠다. 올라가야겠다. 예, 믿습니다. 믿습니다’라고 한다고 할지라도 그렇게 믿어지는 것은 아닙니다. 예수님이 동정녀에게 탄생했다는 사실을 믿는 것과 같이, 명백한 과학적인 현실을 부인하고 동정녀가 아들을 낳으셨다는 사실을 믿게 되는 데는 사람의 보통 이론과 보통 정신으로는 결코 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위로부터 ‘성도에게 주시는 믿음’으로써 비로소 믿는 것입니다. 이것이 중요한 문제입니다.

 

믿음은 위로부터 단번에 성도에게 주어지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믿음은 하나님의 선물입니다. 에베소서 2:8-9절을 보면 “너희가 그 은혜를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었나니. 이것이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니 이는 누구든지 자랑치 못하게 함이니라”고 했습니다. 그렇습니다. 믿음은 위로부터 단번에 주어지는 하나님의 선물입니다.

 

우리가 믿었다 안 믿었다 하고 과연 그럴까 아닐까 한다면 그런 것은 안 믿는 것입니다. 야고보서 1:6-8절을 보면 “오직 믿음으로 구하고 조금도 의심하지 말라. 의심하는 자는 마치 바람에 밀려 요동하는 바다 물결 같으니. 이런 사람은 무엇이든지 주께 얻기를 생각하지 말라. 두 마음을 품어 모든 일에 정함이 없는 자로다”라고 했습니다. 믿음 쪽으로 기울어졌다가 부인하는 쪽으로 기울어졌다가 하는 이런 것은 참 믿음이 아닙니다. 참 믿음이란 그것을 위로부터 단번에 주시면 그것으로 요지부동하게 되는 것입니다. 어느 때는 마음 가운데 회의가 있어 방황하고 괴로워하다가, 또 어느 때는 조금 안심하고 안정하게 되는 일도 있습니다. 하지만 사색의 과정에서 인식이 얼마나 명료한가, 또는 재료가 얼마나 풍부한가에 따라서 자꾸 왔다 갔다 하는 것뿐이지 믿음이 새로 생겨서 조금 믿다가 믿음이 금방 희박해져서 안 믿다가 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런 것은 불신 상태의 또 한 가지입니다. 정면에서 반대하는 것만이 불신의 상태가 아닙니다. 때로는 회의하기도 하고 때로는 그럴 듯하게 여겨서 따라오더라도 절대로 그렇다고 확정하고 요지부동하게 되지 않는 상태라면 그것은 다 불신입니다. 이런 상태에 있는 것을 우리는 기독교의 신앙인 것같이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기독교의 믿음은 불교나 힌두교를 믿는 식으로 믿는 것이 아닙니다. 그런 철학적 사색이 믿음을 대체할 수 없습니다. 믿음이란 위로부터 단번에 오는 것입니다.

 

믿음과 동시에 새로운 생명이 그 속에서 역사하여 생명으로서 기능을 발휘하게 되는데 그 생명은 하나님의 자녀의 생명인 까닭에 필연적으로 하나님의 자녀다운 품격을 다 갖추어 온전함을 드러냅니다. 마치 식물의 생명은 식물인 것을 나타내고, 동물의 생명은 동물인 것을 나타내고, 사람의 생명은 사람다운 것을 나타내는 것과 같습니다. 동물이나 식물의 생명과는 구별되는 영혼의 활동이 없다면 사람의 생명이라고 말할 수 없습니다. 마찬가지로 하나님의 자녀는 하나님의 자녀다운 품격을 충분히 나타내는 것입니다. 거기에 하나님의 자녀다운 생명의 특권과 영광이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자녀다운 영혼의 활동 속에는 특별히 하나님의 말씀에 대하여 순복하고 의지하는 기능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중생하게 하시면 그 속에 있는 영혼의 성향은 늘 하나님을 향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이 주신 은혜이지 사람이 조작해서 되는 것이 아닙니다. 이리하여 하나님을 향해서 가려고 하는 필연적이고 본능적인 행동을 시작하는 것입니다. 그 부분까지를 우리는 중생이라 하는 것이고, 그 다음부터는 성령 하나님을 의지해서 구별된 하나님의 자녀다운 생활의 행보를 해 나가는 것이 성화의 생활입니다.

 

믿음이란 이러한 하나님의 자녀다운 마음 상태의 구체적인 표시입니다. 믿음은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신뢰이므로 필연적으로 말씀이 직접 또는 간접으로 나에게 요구하고 규제하고 명령하는 것을 따르게 됩니다. 물론 그것은 자기가 목표를 세우고 노력해 가는 도덕적인 노력과는 동질의 것이 아닙니다. 신자라고 할지라도 과거의 악습에 젖어서 나태하여 정당하게 장성하지 못하거나, 성경을 밤낮 읽고 분해하고 이야기하기도 하지만 자기의 욕심에 집착해서 믿음이나 능력이 그 속에서 지배하지 않는 상태가 되면 순종의 생활은 희박해지는 것이고 결국 옛사람이 자기를 지배하게 됩니다. 이것이 그리스도 안에서 어린아이와 같은 사욕에 속한 신자의 상태입니다. 바울 사도는 고린도전서 3:1절에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형제들아! 내가 신령한 자들을 대함과 같이 너희에게 말할 수 없어서 육신에 속한 자 곧 그리스도 안에서 어린 아이들을 대함과 같이 하노라”(고전 3:1). 여기서 ‘육신에 속한 자’는 옛날 번역대로 하면 ‘사욕에 속한 자’로서 자기의 욕망에 속해서 사는 자들입니다. 그러므로 바울은 신령한 자들을 대함과 같이 하지 아니하고 그리스도 안에서 어린 아이들을 대함과 같이 한다고 하는 것입니다.

 

역사적인 개혁교회가 강력하게 강조하는 바는 성도에게 단번에 주신 믿음입니다. 그러나 이 믿음이 들어갔다고 해서 처음부터 아주 위대한 행동을 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 사람의 장성의 그릇에 따라서 차츰차츰 성장하며 그에 합당한 열매를 내게 됩니다. 이것은 물론 중생한 사람이 어떻게 정상적으로 자라느냐 하는 거룩한 도리 안에 포함되어 있는 내용입니다. 갈수록 좀더 어려운 듯하고 좀더 괄목할 만한 일에 대하여 확신을 가지고 밀고 나가면서 일을 이루고 열매를 맺어서 장성의 자태를 취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런 의미로 개혁자들은 믿음이 처음에 들어갔을 때의 상태를 ‘믿음의 씨’가 그 속에 떨어져서 싹이 나오기 시작한다는 말로 표현했습니다. 쉽게 말하자면 믿음이 들어가면 자연스럽게 열매를 자꾸 맺어 나간다는 말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노력 여하에 따라 불신과 믿음 사이를 왔다 갔다 하다가 결국 신앙이라는 위치에 안착하는 것을 믿음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잘못된 것입니다. 그것은 일반종교에 있는 현상이지 하나님께서 은혜로 주시는 계시와 거룩한 도리에 의한 참된 신앙은 아닙니다.

 

만약 기독교라는 이름 아래서 그러한 현상이 발생했다면 그것은 사이비적인 것이요, 한마디로 불신의 한 증상입니다. 믿음이든지 불신이든지 둘 중의 하나입니다. 이 명확한 점을 모호하게 할 때에 개혁교회는 이상하게 변질되고 맙니다. 곧 로마교회의 전철을 밟게 되는 것입니다.

 

개혁교회는 하나님의 말씀에 대해서 ‘말씀과 더불어’라는 말을 써서 성령 하나님께서 함께 일하시는 가운데서만 말씀은 말씀으로서의 권위를 확실히 실증한다고 말합니다. 바꾸어 말하면 어떤 사람의 속에서는 성령 하나님께서 함께 일하시는 것이 없을 수 있다는 말입니다. 말씀은 그것 자체가 신통력을 가지고 움직이는 것이 아니라고 하는 것이 개혁교회의 강렬한 주장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이니까 몇 마디 안 되는 짧은 말만 들어가도 금방 무슨 희한한 작용을 하는 것으로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그러나 한편으로 말씀은 마치 양날 선 칼과 같아서 어떤 사람에게 들어가더라도 효과를 드러낸다고 했습니다. 말씀을 받고 믿지 않았을 때에는 무서운 심판의 조건이 됩니다. 사망에 이르는 사람에게는 사망으로부터 사망에 이르는 향기가 되는 것이고, 생명에 이르는 사람에게는 생명에서 다시 생명으로 이르게 하는 향기가 되는 것입니다. 고린도후서 2:16절에 보면 “이 사람에게는 사망으로 좇아 사망에 이르는 냄새요, 저 사람에게는 생명으로 좇아 생명에 이르는 냄새라. 누가 이것을 감당하리요”라고 했습니다.

 

이런 것들은 역사적으로 말씀을 확실히 믿고 내려오던 개혁교회들이 언제든지 정신 차려서 믿고 나오던 것입니다. 우리가 형제로서 대접할지라도 이 부분에서 서로 의견을 달리할 때 ‘혹시 그런 설(說)도 있을 수 있나 보다’고 하지 않고 ‘아니다’고 하고 나가는 분명한 문제들입니다. 어떤 것은 우리가 다 부족하니까 뭐라고 단언하기 어려운 것도 있지만 어떤 것은 단언을 하는 것입니다. 이런 것들은 절대로 양보할 수 없는 교리입니다. 우리 마음대로 이럴 수도 있고 저럴 수도 있는 것이 아닙니다. ‘말씀에는 신통력 같은 것이 있어서 성령 하나님이 말씀을 통해서 역사하는 것도 있겠지!’ 그렇게 안 믿는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잘 알지 못하고 ‘말씀을 통해서 은혜를 받았다’고 하는 그런 말을 함부로 써서는 안 됩니다.

 

말씀을 믿고 일어난 마음의 상태가 성령 하나님의 역사로 발생한 바른 신앙의 상태라면 반드시 하나님의 요구나 명령이나 보이신 것에 대하여 간절히 사모하고 갈구하면서 나가게 됩니다. 명확한 명령의 형식이나 요구의 형식으로 오지 않더라도 그 사람의 각성 정도에 따라서 하나님께서 그냥 비추기만 하는 것도 강한 요구로 올 수가 있습니다. 소견 있는 사람은 다른 사람이 말을 할 때에 꼭 요구나 명령의 형식을 취하지 않고 자기 이야기같이 지나가는 말로 할지라도 얼른 그 취지를 짐작하고 그 마음 가운데 무엇을 원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의 생각이나 말에 주의하고 있는 사람들은 그렇습니다. 주의하지 않는 사람은 그냥 지나쳐 버리고 액면 그대로만 받지만 주의하는 사람은 그 뒤에 있는 마음의 요구, 나에게 비추려고 하는 것이 무엇인가를 아는 것입니다. 이런 것이 우리 가운데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볼 때에도 담담하게 지나가는 이야기 같은 것을 그냥 지나치지 않고 그것이 담고 있는 본래의 의미 곧 하나님이 내게 원하시는 것은 이것이라고 느낄 수 있는 성숙성이 있어야 합니다. 그러면 성경 어디를 보든지 거기에 나타난 하나님의 뜻 곧 하나님께서 나에게 알기를 원하시는 것을 알게 됩니다. 따라서 내가 해야 할 것 즉 당위를 깨닫게 됩니다. 이것이 장성한 신자의 자태입니다.

 

물론 처음에는 분명하게 명령하는 명령이나 요구로부터 시작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첫째는, 분명하게 명령하는 약속을 강력하게 믿어야 하는 것입니다. 이런 식으로 참 신앙이 명확하게 드러나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명문으로 ‘하지 말라’하는 금령이 있고, ‘너는 이렇게 하기를 바란다. 이렇게 하는 것이 내가 기뻐하는 것이다’고 하는 하나님의 요구도 있습니다. 그러면 먼저 혹시 하나님이 자기에게 하라고 하신 것을 생략하는 죄를 범하거나 금하신 것을 범하는 죄를 짓지 않을까 주의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행함입니다. “믿음이 있노라 하고 그런 행함이 없으면 그 믿음이 살아 있는 것이냐?”고 야고보서는 그것을 강력하게 논박하고 있는 것입니다(참조. 약 2장).


루터는 이신칭의(以信稱義)의 도리를 강조한 나머지 로마서와 갈라디아서를 높은 데 놓고 야고보서를 그렇게 높은 데 놓지 않으려고 하는 태도를 보였습니다. 예술가 기질을 가진 루터는 좋고 나쁜 것이 분명한 사람이니까 그렇게 했지만 그런 태도는 칭찬 받을 만한 일은 아닙니다. 성경은 어느 것이든지 하나님의 말씀이요, 권위를 가진 것으로서 역사적으로 개혁교회가 그 경중을 논하지 않는 것입니다. 가르치는 도리에 다양성이 있는 까닭에 어떤 도리를 어디서 어떻게 강조했다 하는 것은 있을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로마서는 복음의 진수를 가장 잘 강설한 책이라고 할 수 있지만 그렇다고 해서 로마서만 가장 높여야 할 이유는 없습니다. 하지만 종교개혁 시대에는 믿는 도리의 대본이라는 점에서 로마서가 강한 무기로 쓰였던 것입니다. 성령 하나님의 검으로서 우선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다 하심을 얻는 것이지 행함으로 말미암는 것이 아니다”고 하는 믿음의 도리를 굳게 세우는데 로마서가 귀히 쓰인 것입니다. 로마교회의 행함 위주 혹은 자선과 수양과 자비와 같은 행함을 강조하는 것들에 대하여 맹렬히 공격할 때 그런 것은 소용이 없다고 이야기하려니까 필연적으로 야고보서를 들고 싸울 수 없고 로마서를 들고 싸울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이 가르친 것을 치우치지 않고 바르게 다 말하려면 로마서의 이신칭의를 강해하면서 “그 믿음이라는 것은 관념론자가 말하는 신앙이 아니다. 그 믿음이라는 것은 필연적으로 새 생명의 발휘에서 능력으로 나오는 심상과 생활인 까닭에 반드시 생활이 병행하는 것이다”하고 야고보서의 말씀을 가르쳐야 하는 것입니다.

 

성도에게 단번에 주신 믿음이 들어가면 하나의 심상이 형성되고 그 심상에 의해서 마땅히 해야 할 당위를 느끼게 됩니다. 그것이 신성한 명령으로 자기에게 나팔 소리보다 크게 울릴 수가 있습니다. ‘너는 이것을 해라’고 하는 간단한 이야기이지만 그것이 울려오면 ‘예, 제가 순종치 아니할 수 없습니다’고 하고 나가는 것입니다. 이렇게 생활과 그 심상이 일치하는 것이고 따라서 여기서 우리가 분명히 알 수 있는 것은 그 사람의 믿음의 행동은 무의식중의 행동이나 깜깜한 밤중에 끌려서 걸어가는 것과 같은 것이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분명히 알고, 해야 할 당위를 느끼고, 신성한 의무감 가운데서 밀고 나가는 것입니다. 성령 하나님이 우리에게 그것을 할 수 있도록 힘 주시고 같이 거하시고 인도하시는 것입니다. 이렇게 해서 명료히 성령 하나님의 인도함을 받는다는 생생한 현실의 경험을 갖게 됩니다. 이것이 믿음의 열매입니다.

 

이런 믿음의 열매 없이 덮어놓고 믿음이란 말만 하면 그 믿음은 그 자체가 죽은 것입니다. 지금 야고보서는 그것을 논하는 것입니다. 마치 영혼이 없는 육신이 시체인 것처럼 행위 없는 믿음이라는 것은 죽은 것이라는 참 중요한 도리를 가르친 것입니다. 믿음이라는 말을 오해하는 소위 관념론적인 신앙을 가진 사람들에게 주의를 시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믿음에 대해서 항상 주의하고 함부로 그릇된 생각으로 나가지 아니해야 할 것입니다. 성령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은혜를 주셔서 위로부터 단번에 주어지는 믿음을 우리에게 허락하여 주시기를 원합니다. 그리하여 우리가 구원의 신앙 가운데 있게 하여 주시기를 원합니다. 아멘!

 

 

 

 

2017년 봄 사경회 특강

구원의 신앙(II)

말씀:야고보서 2:14-26

 

우리는 지난 시간에 이어서 계속해서 구원의 신앙에 대해서 공부하고자 합니다. 마태복음 8:28-34절에 보면 가다라 지방에서 귀신 들린 자는 예수님을 만났을 때 그 앞에 엎드려서 소리지르기를 “하나님의 아들이여 우리와 당신과 무슨 상관이 있나이까. 때가 이르기 전에 우리를 괴롭게 하려고 여기 오셨나이까?”라고 하였습니다(29). 당시의 이스라엘 종교 지도자들도 모르고 있었고, 혹은 잘 알려고 하지 않거나 부인하던 예수님을 귀신들은 지극히 높이 계시사 천지의 주재로 계시는 분의 아들이심을 아주 생생하게 알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야고보서 2:19절에 보면 야고보서 기자는 “네가 하나님은 한 분이신 줄을 믿느냐. 잘하는도다. 귀신들도 믿고 떠느니라”고 했습니다. 야고보서 기자는 귀신들이 믿는 것처럼 그렇게 믿는 믿음이 구원받는 믿음은 아니라고 했습니다. 성경을 많이 알면 구원받는 믿음을 가진 것이냐? 그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예수님 가까이에 있던 제자들도 잘 몰랐던 사실을 이 귀신은 처음부터 잘 알고 있었지만 그 사실이 귀신을 구원할 만한 아무런 조건도 안 되었던 것입니다.

 

오늘날에도 성경 공부를 하고 신학 공부를 한다고 하면서도 구원의 신앙이 풍성히 없고 빈곤하다면 큰 문제입니다. 교회가 바로 서는 것은 많은 것을 아는 것으로서가 아니고 참으로 믿었다는 것과 믿는 생활에서 열매를 거두는 것이 더 중요한 증거가 됩니다. 교회가 사람 많은 것을 더 중요하게 생각하거나, 믿는다는 종교 관념과 종교 의식 쪽으로 치우치는 것은 좋지 않습니다. 특별히 한국교회는 종교 감정을 신앙의 중요한 척도로 삼는데 무엇보다 믿음으로 말미암은 생활의 열매가 분명히 있어야 합니다. 열매라고 할 때에 무슨 큰 사업을 하여 좋은 성적을 만들어 내고, 업적을 만들어 내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에게 주신 새로운 생명이 새로운 사람답게 나타나는 것이 제일의 과제입니다. 그 사람의 도덕적인 성격 즉 품성이 그리스도적인 것으로 나타나는 것이 위대한 열매가 되는 것입니다.

 

갈라디아서 5:16-26절에 보면 갈라디아서 기자는 육신의 일과 성령의 열매를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내가 이르노니 너희는 성령을 좇아 행하라 그리하면 육체의 욕심을 이루지 아니하리라. 육체의 소욕은 성령을 거스리고 성령의 소욕은 육체를 거스리나니 이 둘이 서로 대적함으로 너희의 원하는 것을 하지 못하게 하려 함이니라. 너희가 만일 성령의 인도하시는 바가 되면 율법 아래 있지 아니하리라. 육체의 일은 현저하니 곧 음행과 더러운 것과 호색과 우상 숭배와 술수와 원수를 맺는 것과 분쟁과 시기와 분냄과 당 짓는 것과 분리함과 이단과 투기와 술 취함과 방탕함과 또 그와 같은 것들이라. 전에 너희에게 경계한 것같이 경계하노니 이런 일을 하는 자들은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할 것이요, 오직 성령의 열매는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 참음과 자비와 양선과 충성과 온유와 절제니 이같은 것을 금지할 법이 없느니라. 그리스도 예수의 사람들은 육체와 함께 그 정과 욕심을 십자가에 못 박았느니라. 만일 우리가 성령으로 살면 또한 성령으로 행할지니 헛된 영광을 구하여 서로 격동하고 서로 투기하지 말지니라”고 했습니다. 그런고로 나가서 무슨 큰일을 하지 않고 화려하고 기이한 일을 도모하지 않을지라도 그의 존재 자체가 하나의 중요한 열매를 맺게 되는 그릇이 되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와 동시에 거룩한 교회아(敎會我)로서 책무가 있습니다. 여기 ‘교회아’라는 말을 우리가 새겨들어야 합니다. ‘아상’(我相)이라든지, ‘천당’이라든지, ‘지옥’이라든지 하는 말은 사실 불교에서 빌어다 기독교의 어떤 도리를 나타내는 데 쓰고 있습니다. 이런 말들은 비교적 근사한 말입니다. 그러나 ‘교회아’라는 말은 불교 용어가 아니라 철학적인 용어입니다. 자기라는 것을 생각할 때에 나 개인적으로 생각지 않고 ‘교회는 예수 그리스도의 몸이요, 나는 그 지체요, 그 부분이다’고 하는 생각 가운데 이 말을 쓰는 것입니다. 이러한 인간관이 구원의 신앙을 가진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반드시 필요한 것입니다. 이러한 ‘교회아’를 가지게 되면 자기가 우선적으로 교회의 한 지체로서 내 본분은 무엇인가? 내가 마땅히 해야 할 것은 무엇인가? 나는 그 지체로서 어떠한 양상으로 존재하는 것이 정당한가를 생각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동시에 하나님 나라의 시민으로서 그 나라에 대한 나의 책무, 단순한 의무에 불과한 것이 아니라 적극적으로 그리고 구체적으로 그 나라의 성격을 명료하게 하고 역사 위에 확증하기 위해서 필요한 책임이 있는데 그것은 그 나라의 법칙과 성격을 바로 지키고 보존해서 정당하게 살아야 할 책임입니다. 이런 책무를 깨달아야 합니다. 단순히 자기의 인격의 문제만이 아니라 인생의 길을 행보해 나가는 데서 맺어 가야 할 열매가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런 열매를 맺지 아니하고 기독교를 이 세상의 다른 문화의 내용이나 종교의 하나로 다루어서 다른 종교에서 하듯이 성경을 연구해서 소위 전문가 노릇을 하고 직분자로 서려고 한다면 참으로 안타까운 일인 것입니다. 곧 증거할 만한 믿음의 내용이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말씀이 분명히 그 사람 속에서 역사하여 하나님께서 요구하시는 열매를 맺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주님이 가르치신 큰 도리입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천지를 진동하는 메시아의 기적에 의해서 자기네가 원하는 하나님의 나라 혹은 하늘 나라가 초래되고 메시아의 복지 국가가 설 것으로 기대했습니다. 곧 다윗왕국과 같은 메시아 왕국이 건설될 것을 기대했습니다. 그것이 늘 메시아 자체보다 더 중요한 사상이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오셔서 자신이 과연 메시아인 것을 제자들에게 가르치시되 눈앞에 당장 그 위대한 이상 세계를 현실로 건설하실 것을 말씀하신 것이 아니라 “말씀이 너희 속에 들어가서 그 말씀에 대한 반응이 정당하면 열매를 맺어 천국이 입증되겠지만 종교적인 현상만 현저하고 결국 열매가 없을 때는 다 소용이 없는 것이다”고 하는 것을 씨 뿌리는 비유를 통해서 가르쳐 주셨습니다.

 

마태복음 13:1-9절을 보면 “그 날에 예수께서 집에서 나가사 바닷가에 앉으시매 큰 무리가 그에게로 모여 들거늘 예수께서 배에 올라가 앉으시고 온 무리는 해변에 섰더니. 예수께서 비유로 여러 가지를 저희에게 말씀하여 가라사대 씨를 뿌리는 자가 뿌리러 나가서 뿌릴새 더러는 길 가에 떨어지매 새들이 와서 먹어버렸고 더러는 흙이 얇은 돌밭에 떨어지매 흙이 깊지 아니하므로 곧 싹이 나오나 해가 돋은 후에 타져서 뿌리가 없으므로 말랐고 더러는 가시떨기 위에 떨어지매 가시가 자라서 기운을 막았고 더러는 좋은 땅에 떨어지매 혹 백배, 혹 육십배, 혹 삼십배의 결실을 하였느니라. 귀 있는 자는 들으라 하시니라”고 했습니다. 길가, 돌밭, 가시떨기에 떨어졌다는 상태가 분명한 종교 현상으로 있는 것입니다. 분명히 말씀이 전달되었지만 그 마음자리는 길가와 같고 돌밭과 같고 가시떨기 같아서 결국은 열매를 못 맺고 마는 것입니다. 열매를 맺지 못하는 땅은 소용이 없는 것입니다. 오직 옥토라야만 합니다.

 

그뿐만이 아닙니다. 마귀는 적극적으로 사이비적인 것을 심어 놓았습니다. 우리는 이것을 가라지 비유에서 볼 수 있습니다. 마태복음 13:36-43절을 보면 “이에 예수께서 무리를 떠나사 집에 들어가시니 제자들이 나아와 가로되 밭의 가라지의 비유를 우리에게 설명하여 주소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좋은 씨를 뿌리는 이는 인자요, 밭은 세상이요, 좋은 씨는 천국의 아들들이요, 가라지는 악한 자의 아들들이요, 가라지를 심은 원수는 마귀요, 추수 때는 세상 끝이요, 추숫군은 천사들이니. 그런즉 가라지를 거두어 불에 사르는 것같이 세상 끝에도 그러하리라. 인자가 그 천사들을 보내리니 저희가 그 나라에서 모든 넘어지게 하는 것과 또 불법을 행하는 자들을 거두어 내어 풀무 불에 던져 넣으리니. 거기서 울며 이를 갊이 있으리라. 그 때에 의인들은 자기 아버지 나라에서 해와 같이 빛나리라. 귀 있는 자는 들으라”고 하였습니다.

 

원수가 와서 악한 자의 자식들을 그 속에 함께 뿌려 놓아서 같은 곳에 뿌리를 박고 있습니다. 그런즉 당장에 가라지를 뽑으면 뿌리가 들썩거려서 알곡도 나중에 시들고 못쓰게 되어 버리니까 아직 뽑지 말라고 하신 것입니다. 마지막 추수하기 직전에 가라지만 먼저 뽑아서 단으로 묶어 불에 사르고 알곡은 거두어야겠다고 하신 것입니다. 이렇게 알곡을 거둘 때까지 무서운 사이비의 현실이 터전을 함께하고 생활의 근거를 같이하여 우리가 흡수하는 여러 가지 것들을 공동으로 흡수해 가면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말씀을 바르게 받지 못해서 열매를 못 맺을 경우 심하면 가라지 노릇도 하는 것입니다. 이와 같이 열매를 맺지 아니한다면 구원과 상관이 없는 것이 되는 것입니다.

 

유다서도 구원에 관해서 이야기를 했고, 오늘 읽은 야고보서도 보면 분명히 구원에 관해서 이야기를 했습니다. ‘믿음이 있다고 생각하지만 그 믿음이 능력으로 실증되어 자기의 생활 행동에서 하나님의 법을 순종하고 하나님의 명령과 요구를 깨닫고 거기에 순응하여 어떤 열매를 맺어야 할 텐데 그렇지 않다면 무슨 이익이 있겠느냐? 그러한 믿음이 능히 자기를 구원하겠느냐?’고 머뭇거리지 않고 분명히 구원 문제를 가지고 이야기했습니다. ‘믿음이라고 하면 덮어놓고 구원인 줄 알지 말아라. 그런 관념론적인 신앙이라는 것도 있는 것이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런고로 구원에 관련되는 신앙을 허술하게 그냥 관념, 이론, 신학으로 생각지 말라는 것입니다. 진리의 깊이를 깨닫는 것이 참지식입니다. 사람들이 써 놓은 책을 보고 암기하는 일은 안 믿는 사람도 할 수 있습니다.

 

안 믿는 사람도 신학을 잘하는 사람이 있어서 문제가 많이 생깁니다. 믿지도 않고 믿음도 없는 사람이 교회 다니면서 신학을 해서 유명한 신학자들이 되고, 파괴적인 사상으로 자기의 이름을 내고 그것을 다른 사람들에게 자꾸 전파하기도 합니다. 그러면 배운 이들은 굉장한 것을 배운 것같이 생각하고 그 이름에 현혹되어 움직이기도 합니다. 세상이 사람들의 안목의 정욕에다가 화려한 치장을 해 주는 것입니다. 불트만 같은 유명한 이름을 가진 사람이 독일의 대학에 앉아서 교수를 할 때에 그 사람한테 배웠노라 자랑하는 일이 있었는데 과연 무엇을 배우고 나왔겠습니까? 이렇게 이 세상을 좇고 유명한 것을 좇고 허영을 좇아가겠는가? 아니면 조용한 가운데 아무도 알아주는 사람이 없을지라도 참으로 하나님을 믿는 데서 한 걸음씩 한 걸음씩 자기 인생의 길을 정당하게 걸어가는 것을 택하겠는가?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주님만 따라가겠다고 할 때에는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라 하더라도 그냥 따라가는 것입니다. 화려해야만 하고 출세해야만 하는 것은 아닙니다. 좀 명료하게 자기의 신앙 태도를 취하고 나가야 합니다. 그런데 불명료하고 불철저한 태도를 취하고 살다가다가 나중에는 그것을 인정해 주는 괴상한 사회 제도가 있기 때문에 나중에는 이용해 먹는 것입니다. 예를 들면, 일제시대에 신학교에 다니는 중에 신사 참배를 강요당하자 그런 죄를 범하고 학교 다니느니 차라리 죄를 범하는 데서 피하여 학교를 안 다니겠다 하고 그만두고 간 사람도 있습니다. 우리가 알듯이 많지는 않습니다. 아주 소수입니다. 그러나 다수는 그냥 신사 참배하는 것을 수긍하고 우상에게 절해 가면서 신학교를 졸업했습니다. ‘참배한 것은 잘못이지만 학교 졸업한 것은 인정해 다오’해서 사회 제도와 종교계는 그것을 다 인정해 주어서 그 사람들은 목사가 되었고 신사 참배 않고 집어치운 사람들은 목사가 되지 못했습니다. 누가 신앙을 지키고 주님 앞에 바로 섰던 사람인가 생각해 보십시오. 이렇게 시세에 영합하여 유리하게 해 놓고 또 시대가 바뀌면 과거의 것은 잘 묻지 않으니까 그냥 따라가곤 합니다. 이렇게 두 길 보기에 요령 좋은 사람들, 정함이 없는 두 마음을 품은 사람들을 향해서 야고보서는 강력하게 꾸짖었습니다.

 

야고보서 1:8절을 보면 야고보서 기자는 “두 마음을 품어 모든 일에 정함이 없는 자로다”라고 책망했습니다. 두 마음을 품어 정함이 없는 사람은 하나님과 직접 교통을 해서 거기에서 무엇을 받으려고 생각지 말아야 합니다. 이렇게 철저한 생활을 해 나가는 사람들에게서 비로소 교회의 소망을 볼 수 있는 것입니다. 적당히 출세주의로 자기 유익을 따라 활동하는 것은 정당한 믿음으로 말미암은 바가 아닌 것입니다. 믿음을 그렇게 쉽게 생각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주를 위해서 모든 것을 버려야 할 때는 버릴 수 있는 것이 참된 믿음입니다.

 

히브리서 기자는 히브리서 11장에서 믿음의 선진들의 참된 믿음을 이렇게 증거하였습니다.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지 못하는 것들의 증거니. 선진들이 이로써 증거를 얻었느니라. 믿음으로 모든 세계가 하나님의 말씀으로 지어진 줄을 우리가 아나니 보이는 것은 나타난 것으로 말미암아 된 것이 아니니라. 믿음으로 아벨은 가인보다 더 나은 제사를 하나님께 드림으로 의로운 자라 하시는 증거를 얻었으니 하나님이 그 예물에 대하여 증거하심이라. 저가 죽었으나 그 믿음으로써 오히려 말하느니라. 믿음으로 에녹은 죽음을 보지 않고 옮기웠으니 하나님이 저를 옮기심으로 다시 보이지 아니하니라. 저는 옮기우기 전에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자라 하는 증거를 받았느니라. 믿음이 없이는 기쁘시게 못하나니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는 반드시 그가 계신 것과 또한 그가 자기를 찾는 자들에게 상 주시는 이심을 믿어야 할지니라. 믿음으로 노아는 아직 보지 못하는 일에 경고하심을 받아 경외함으로 방주를 예비하여 그 집을 구원하였으니 이로 말미암아 세상을 정죄하고 믿음을 좇는 의의 후사가 되었느니라. 믿음으로 아브라함은 부르심을 받았을 때에 순종하여 장래 기업으로 받을 땅에 나갈새 갈 바를 알지 못하고 나갔으며, 믿음으로 저가 외방에 있는 것같이 약속하신 땅에 우거하여 동일한 약속을 유업으로 함께 받은 이삭과 야곱으로 더불어 장막에 거하였으니 이는 하나님의 경영하시고 지으실 터가 있는 성을 바랐음이니라. 믿음으로 사라 자신도 나이 늙어 단산하였으나 잉태하는 힘을 얻었으니 이는 약속하신 이를 미쁘신 줄 앎이라. 이러므로 죽은 자와 방불한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하늘에 허다한 별과 또 해변의 무수한 모래와 같이 많이 생육하였느니라. 이 사람들은 다 믿음을 따라 죽었으며 약속을 받지 못하였으되 그것들을 멀리서 보고 환영하며 또 땅에서는 외국인과 나그네로라 증거하였으니 이같이 말하는 자들은 본향 찾는 것을 나타냄이라. 저희가 나온바 본향을 생각하였더면 돌아갈 기회가 있었으려니와 저희가 이제는 더 나은 본향을 사모하니 곧 하늘에 있는 것이라. 그러므로 하나님이 저희 하나님이라 일컬음 받으심을 부끄러워 아니하시고 저희를 위하여 한 성을 예비하셨느니라. 아브라함은 시험을 받을 때에 믿음으로 이삭을 드렸으니 저는 약속을 받은 자로되 그 독생자를 드렸느니라. 저에게 이미 말씀하시기를 네 자손이라 칭할 자는 이삭으로 말미암으리라 하셨으니 저가 하나님이 능히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리실 줄로 생각한지라. 비유컨대 죽은 자 가운데서 도로 받은 것이니라. 믿음으로 이삭은 장차 오는 일에 대하여 야곱과 에서에게 축복하였으며, 믿음으로 야곱은 죽을 때에 요셉의 각 아들에게 축복하고 그 지팡이 머리에 의지하여 경배하였으며, 믿음으로 요셉은 임종시에 이스라엘 자손들의 떠날 것을 말하고 또 자기 해골을 위하여 명하였으며, 믿음으로 모세가 났을 때에 그 부모가 아름다운 아이임을 보고 석달 동안 숨겨 임금의 명령을 무서워 아니하였으며, 믿음으로 모세는 장성하여 바로의 공주의 아들이라 칭함을 거절하고 도리어 하나님의 백성과 함께 고난 받기를 잠시 죄악의 낙을 누리는 것보다 더 좋아하고 그리스도를 위하여 받는 능욕을 애굽의 모든 보화보다 더 큰 재물로 여겼으니 이는 상주심을 바라봄이라. 믿음으로 애굽을 떠나 임금의 노함을 무서워 아니하고 곧 보이지 아니하는 자를 보는 것같이 하여 참았으며, 믿음으로 유월절과 피 뿌리는 예를 정하였으니 이는 장자를 멸하는 자로 저희를 건드리지 않게 하려한 것이며, 믿음으로 저희가 홍해를 육지 같이 건넜으나 애굽 사람들은 이것을 시험하다가 빠져 죽었으며, 믿음으로 칠일 동안 여리고를 두루 다니매 성이 무너졌으며, 믿음으로 기생 라합은 정탐군을 평안히 영접하였으므로 순종치 아니한 자와 함께 멸망치 아니하였도다. 내가 무슨 말을 더 하리요 기드온, 바락, 삼손, 입다와 다윗과 사무엘과 및 선지자들의 일을 말하려면 내게 시간이 부족하리로다. 저희가 믿음으로 나라들을 이기기도 하며 의를 행하기도 하며 약속을 받기도 하며 사자들의 입을 막기도 하며 불의 세력을 멸하기도 하며 칼날을 피하기도 하며 연약한 가운데서 강하게 되기도 하며 전쟁에 용맹되어 이방 사람들의 진을 물리치기도 하며 여자들은 자기의 죽은 자를 부활로 받기도 하며 또 어떤 이들은 더 좋은 부활을 얻고자 하여 악형을 받되 구차히 면하지 아니하였으며 또 어떤 이들은 희롱과 채찍질 뿐 아니라 결박과 옥에 갇히는 시험도 받았으며 돌로 치는 것과 톱으로 켜는 것과 시험과 칼에 죽는 것을 당하고 양과 염소의 가죽을 입고 유리하여 궁핍과 환난과 학대를 받았으니(이런 사람은 세상이 감당치 못하도다). 저희가 광야와 산중과 암혈과 토굴에 유리하였느니라. 이 사람들이 다 믿음으로 말미암아 증거를 받았으나 약속을 받지 못하였으니 이는 하나님이 우리를 위하여 더 좋은 것을 예비하셨은즉 우리가 아니면 저희로 온전함을 이루지 못하게 하려 하심이니라”(히 11장). 믿음장이라고 불리우는 이 장에서 언급되는 믿음의 사람들은 다 주를 위하여 모든 것을 버린 사람들임을 볼 수 있습니다. 이들은 오직 주를 위해 산 자들입니다. 이런 자들이 구원의 신앙을 소유한 자들입니다. 성령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은혜를 주셔서 위로부터 단번에 주시는 믿음을 우리에게도 선물로 허락하여 주시기를 원합니다. 그리하여 우리가 참 믿음이 무엇인가 맛보아 가게 하시고, 구원받은 신앙을 가진 하나님의 백성으로써 합당한 열매를 우리의 삶 가운데서 맺어가게 하여 주시기를 원합니다. 그리하여 우리로 믿음의 선진들과 같이 구원의 믿음에 있게 하여 주시기를 원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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