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오늘방문자 : 
    835
  • 어제방문자 : 
    1,063
  • 전체방문자 : 
    1,420,105
조회 수 1448 추천 수 0 댓글 0
?

단축키

Prev이전 문서

Next다음 문서

크게 작게 위로 아래로 댓글로 가기 인쇄 수정 삭제
?

단축키

Prev이전 문서

Next다음 문서

크게 작게 위로 아래로 댓글로 가기 인쇄 수정 삭제
Extra Form
설교자 손재호
성경본문 요한이서 1:1-4

2008년 요한이서 공부
                                                   진리를 아는 모든 자
말씀:요한이서 1:1-4

 

1-4절에 보면 ‘진리’라는 말이 무려 네 번이나 나옵니다. ‘진리를 아는 모든 자도, 진리를 인함이로다, 진리와 사랑 가운데서, 진리에 행하는 자를’입니다. 우리는 다 진리를 안다고 자부하는 자들입니다. 그러면 진리가 무엇입니까? 공자는 ‘조문도석사가의’(朝聞道夕死可矣), ‘아침에 도를 들으면 저녁에 죽어도 좋다’고 하였습니다. 이 말에 대한 수많은 해석이 있지만 제가 보기에는 공자가 참된 진리를 발견하지 못하였기에 이런 말을 하였다고 봅니다. 그러니 평생 도를 찾기 위하여 노력을 하였습니다만 이것이 진리다고 내세울 것이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런지 몇 년 전에 유명한 책이 나왔는데 「공자가 죽어야 나라가 산다」는 책입니다. 마더 테레사의 고백에도 보면 내면은 캄캄하게 어두웠다고 고백했다고 합니다. 그 어두움을 숨기고 사람들 앞에서는 웃었다고 합니다. 그런데도 그녀가 어떻게 그런 봉사의 삶을 살았을까요? 테레사가 진리를 알았는가 알지 못했는가를 논하기 위해서 이 말을 하는 것이 아닙니다. 이처럼 진리를 알지 못할 때 선행으로 포장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바리새인들의 모습도 이를 잘 말해 주고 있습니다.

 

그러면 우리가 믿고 있는 진리가 무엇입니까? 요한복음 14:6절을 보면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고 했습니다. 우리는 이 말씀을 잘 알고 있습니다. 이 말씀을 믿으시지요? 그러면 지금 죽어도 여한이 없는 것입니다. 이 땅에 소망을 두지 않고 하나님 나라에 소망을 두고 삽니다. 이 세상의 것으로 인해 염려하거나 두려워하거나 하지 않습니다. 이 세상에서 정말 자유 하는 인생을 삽니다. 정말 지금 죽어도 여한이 없습니까? 우리가 이런 고백을 하며 즐거워합니까? 바울은 진리를 만나고 난 뒤에 ‘죄인 중에 괴수도’, ‘나는 날마다 죽노라’고 고백하였습니다. 정말 우리가 진리를 발견했다면 우리도 이런 고백을 해야 하지 않을까요? 그런데 우리의 모습이 어떠합니까? 진리가 우리를 자유케 합니까? 우리의 인생의 목마름을 해결해 줍니까? 참된 자유와 기쁨이 나타나고 있습니까? 아니면 사마리아 여인처럼 우리가 이 세상의 것에 목말라하며 채우고자 이곳저곳을 기웃거리지는 않습니까? 수많은 사람들이 길과 진리와 생명이 무엇인지를 찾고자 하였지만 무엇이 길이며, 무엇이 생명이며, 무엇이 진리인줄 모르고 죽어갔습니다.

 

오늘날은 진리에 대한 질문조차 없는 세상인 것 같습니다. 가끔 길에서 ‘도를 아십니까?’ 하면서 접근하는 사이비 도가 아니라면 길과 진리와 생명이 무엇인지 관심도 없는 세상이 되어 버렸습니다. 이미 이 시대의 흐름이 절대적인 진리는 없다고 여기는 세상입니다. 모든 것이 다 상대적이라고 여깁니다. 성경적인 표현을 하자면 사람들마다 자기 소견에 옳은 대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자기 소견이 곧 진리입니다. 그렇게 자기가 옳다는 것을 절대적인 진리로 간주하고 사는 것입니다. 이런 모습을 디모데 후서 3:1-5절은 이렇게 증거 하고 있습니다. “네가 이것을 알라. 말세에 고통 하는 때가 이르리니. 사람들은 자기를 사랑하며 돈을 사랑하며 자긍하며 교만하며 훼방하며 부모를 거역하며 감사치 아니하며 거룩하지 아니하며 무정하며 원통함을 풀지 아니하며 참소하며 절제하지 못하며 사나우며 선한 것을 좋아 아니하며 배반하여 팔며 조급하며 자고하며 쾌락을 사랑하기를 하나님 사랑하는 것보다 더하며 경건의 모양은 있으나 경건의 능력은 부인하는 자니 이 같은 자들에게서 네가 돌아서라.” 이 세상은 자기 사랑이 진리입니다. 자기를 사랑하기 위해 돈이 필요합니다. 자기 사랑, 돈 사랑, 쾌락 사랑 이것은 다 같은 말입니다. 오늘날 세상이 꼭 이 말씀과 같은 세상입니다. 이렇게 사는 이유는 자기 사랑이 절대적인 진리라는 것입니다. 내가 모든 진리의 기준이며, 척도가 되어 있습니다. 나를 사랑하는 것이면 진리이고 나를 괴롭게 하고 손해가 나게 하는 것들은 다 비 진리로 여기는 것입니다. 상대방이 나에게 백번을 잘 해주다가도 한번 잘 못하면 그것이 화가 나는 것입니다. 백번 잘해 준 것은 어디에 갔는지 간곳이 없고 나의 마음에 상처가 되거나 경제적인 손해가 생긴다면 그것을 견디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진리를 안다느니 생명을 안다고 하는 말들이 사실 얼마나 엉터리인지를 고발 받아야 하는 것입니다. 진리라고 하여도 그것이 내 마음에 들어야 진리로 여기는 것은 이미 진리의 주체가 자기 자신임을 전제로 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어떤 남편이 좋은 남편입니까? 나를 행복하게 해주는 남편이 좋은 남편이라는 진리가 아내들 속에 있는 것입니다. 남편도 마찬가지입니다. 나를 행복하게 해 주는 아내가 좋은 아내입니다. 또한 교회도 어떤 교회가 좋은 교회입니까? 나를 행복하게 해주는 교회가 좋은 교회입니다. 이처럼 우리의 진리의 기준은 자기 사랑입니다. 이런 엉터리 진리 관을 가지고 있었기에 참으로 길과 생명과 진리가 되신 예수님이 배척을 받았던 것이며, 지금도 여전히 배척을 받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택하심을 입어 진리를 아는 모든 자들은 진리가 무엇임을 알며, 그 진리를 아는 자들을 또한 사랑하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 1절을 보면 이 서신을 기록한 사람이 장로라고 표현합니다. 자신의 이름이 나오지 않지만 문체나 내용을 보아서 요한 1서를 기록한 사도요한으로 봅니다. 그러므로 이 편지를 최초로 받는 사람은 장로라고 하여도 다 알아보는 것입니다. 이 장로가 어디에 편지를 보내는 것입니까? 택하심을 입은 부녀와 자녀에게 편지한다고 합니다. 이 부녀와 자녀를 특정한 인물로 보는가 아니면 교회 공동체로 보는가하는 의견들이 있습니다. 둘 다 가능하다고 봅니다. 사도행전 16장에 보면, 바울이 복음을 전할 때에 비두니아 지역으로 가려고 하였으나 허락되지 않고 밤에 환상 중에 마게도니아 지역의 사람이 우리를 도우라는 환상을 보고서 마게도니아 지역으로 갑니다. 그곳에서 루디아라는 여인을 만납니다. 주님께서 이 여인의 마음을 열어 바울의 말을 청종하게 하십니다. 그러자 그 사람과 그 집의 모든 사람이 다 세례를 받고 바울 일행을 그들의 집으로 들어와 유하라고 강권하여 있게 합니다. 이렇게 되면 자연스럽게 그 곳이 교회가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루디아 한사람으로 말미암아 빌립보 교회가 개척되는 이야기입니다. 여기서 중요한 내용은 한 가정이든 교회이든 간에 택하심을 입은 것입니다. 이 택하심을 인하여 장로가 사랑한다는 것입니다. 그것도 참으로 사랑한다는 것입니다. 이런 사랑은 장로만이 아니라 진리를 아는 모든 자도 그러하다는 것입니다. 오늘날 쏟아지는 설교들을 들어보면 하나님의 택하심에 대하여 듣기가 정말로 희귀한 세대가 되었습니다. 왜 그럴까요? 하나님의 택하심을 이야기하면 사람의 선택과 결정이 무너지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절대 주권적인 선택을 이야기하면 인간의 자기 선택을 버려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오늘날 많은 설교자들이 사람들의 긍정적이고 적극적인 사고방식들만 주로 이야기 합니다. 자신의 선택을 강조합니다. 이런 상황에서 어떤 사람이 하나님의 선택을 이야기하면 그 사람이 사랑스러운 것입니다. 요즈음 시대에도 사람의 선택이 아니라 하나님의 선택을 이야기하는 사람이 있다는 것으로 만나고 싶어지는 것입니다. 오늘 1절 말씀도 하나님의 택하심을 입은 부녀와 자녀를 향하여 참으로 사랑한다고 합니다. 뿐만 아니라 진리를 아는 모든 자도 또한 사랑한다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도 진리를 아는 사람이라면 하나님의 택하심을 입은 자를 사랑할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의 택하심을 입어 진리를 아는 일들이 어떻게 나타나는 것입니까? 2절을 보면 진리가 우리 안에 거하여 영원히 함께하시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우리가 원하지도 않았는데 진리가 우리 안에 쑥 쳐들어 온 것입니다. 그리고 이 진리가 우리를 떠나지 않고 영원히 거하는 것입니다. 진리가 어떻게 우리 안에 거하게 되는 것입니까? 요한복음 14:16-17절을 보면 “내가 아버지께 구하겠으니 그가 또 다른 보혜사를 너희에게 주사 영원토록 너희와 함께 있게 하시리니. 저는 진리의 영이라 세상은 능히 저를 받지 못하나니 이는 저를 보지도 못하고 알지도 못함이라. 그러나 너희는 저를 아나니 저는 너희와 함께 거하심이요 또 너희 속에 계시겠음이라”고 했습니다. 제자들도 예수님께서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라”고 하신 말씀을 이해하지 못합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진리가 되시는데 또 다른 보혜사를 보내주시겠다는 것입니다. 이 보혜사를 진리의 영이라고 합니다. 그래서 진리를 알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 진리의 영 곧 보혜사 성령은 예수님의 영입니다. 예수님이 영으로서 자기 택한 자들에게 임하신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원해서 진리가 우리 속에 들어온 것이 아니라 일방적인 은혜로, 하나님의 절대주권적인 선택으로 말미암아 우리 속에 들어오신 것입니다. 진리가 우리 속에 들어와서 철퍼떡 눌러 앉아 영원히 거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진리를 알게 된 것입니다. 이 영은 진리의 영이기에 세상은 능히 받을 수가 없을 뿐 아니라 보지도 못하고 알지도 못한다는 것입니다. 왜 세상이 알 수도 없고 볼 수도 없기에 받을 수도 없는 진리입니까? 예수님이 진리며 생명이며 길이라고 하시는데 예수님을 바라보니, 사람들에게 배척받아 십자가에서 못 박혀 죽은 것입니다. 이런 예수님을 진리라고 따르겠습니까? 그러니 사람들에 미련하고 어리석어 보이는 것입니다. 눈에 보이는 세상의 영광과 행복을 진리의 척도로 여기며 사는 사람들에게 예수님의 이야기는 밀쳐내고 싶은 진리이지 환영하며 받아들일만한 진리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이런 모습은 우리도 마찬가지지 않습니까? 우리가 언제 진리에 관심이나 있었습니까? 그저 내 몸 하나 편하고 행복한 것이 진리라고 여기고 사는 것입니다. 그러니 행복한 교회, 행복한 가정, 이런 슬로건이 교회에서 나오고 있는 것입니다. 꿈대로 되는 교회도 있고 말입니다. 진리는 간 곳이 없고 자신들의 욕망만이 담겨져 있는 곳이 과연 진리의 기둥과 터라고 할 수가 있겠습니까? 그러므로 우리가 성경에서 말씀하는 진리를 받아들이고 그 진리를 기뻐한다는 것은 우리로서는 상상도 할 수가 없는 일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오직 진리가 주체가 되셔서 창세전에 택하신 자들에게 진리의 영을 보내주심으로 진리를 알게 되는 것입니다. 이 진리를 넣어주시기 위하여 예수님은 십자가를 지시고 부활 승천하셔서 그 약속하신바 진리의 영을 우리 속에 넣어주신 것입니다. 이렇게 진리가 임하면 영원토록 함께 하시기에 이제부터 자기의 진리관은 무너지고 주님의 진리가 그 사람에게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의 진리가 들어온 자들의 특징이 무엇입니까? 3절을 보면 은혜와 긍휼과 평강이 함께 합니다. 은혜란 우리가 행한 것이 없이 받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진리의 영이 임한 자만이 하나님의 은혜를 압니다. 고린도전서 2:1-5절을 보면 바울사도가 전도할 때에 말과 지혜의 아름다운 것으로 하지 않았다고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십자가에 못 박하신 것 외에는 아무 것도 알지 않기로 작정하였다고 합니다. 바울이 이렇게 전하면서 약하며 두려워하며 심히 떨었다고 합니다. 바울의 말과 전도가 사람이 지혜로 되는 것이 아니라 성령이 나타남과 능력으로 되게 하기 위함이라고 하였습니다.

 

그러면 성령으로 나타내신 일이 무엇입니까? 고린도전서 2:6-16절을 보면 “그러나 우리가 온전한 자들 중에서 지혜를 말하노니 이는 이 세상의 지혜가 아니요. 또 이 세상의 없어질 관원의 지혜도 아니요. 오직 비밀한 가운데 있는 하나님의 지혜를 말하는 것이니 곧 감취었던 것인데 하나님이 우리의 영광을 위하사 만세 전에 미리 정하신 것이라. 이 지혜는 이 세대의 관원이 하나도 알지 못하였나니 만일 알았더면 영광의 주를 십자가에 못 박지 아니하였으리라. 기록된바 하나님이 자기를 사랑하는 자들을 위하여 예비하신 모든 것은 눈으로 보지 못하고 귀로도 듣지 못하고 사람의 마음으로도 생각지 못하였다함과 같으니라. 오직 하나님이 성령으로 이것을 우리에게 보이셨으니 성령은 모든 것 곧 하나님의 깊은 것이라도 통달하시느니라. 사람의 사정을 사람의 속에 있는 영 외에는 누가 알리요. 이와 같이 하나님의 사정도 하나님의 영 외에는 아무도 알지 못하느니라. 우리가 세상의 영을 받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께로 온 영을 받았으니 이는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은혜로 주신 것들을 알게 하려 하심이라. 우리가 이것을 말하거니와 사람의 지혜의 가르친 말로 아니하고 오직 성령의 가르치신 것으로 하니 신령한 일은 신령한 것으로 분별하느니라. 육에 속한 사람은 하나님의 성령의 일을 받지 아니하나니 저희에게는 미련하게 보임이요. 또 깨닫지도 못하나니 이런 일은 영적으로라야 분변함이니라. 신령한 자는 모든 것을 판단하나 자기는 아무에게도 판단을 받지 아니하느니라. 누가 주의 마음을 알아서 주를 가르치겠느냐 그러나 우리가 그리스도의 마음을 가졌느니라”고 했습니다. 사람의 속을 누가 알 수 있습니까? 그 사람만이 압니다. 다른 사람이 알 수 없습니다. 남편과 아내가 같이 살아도 모릅니다. 이와 같이 하나님의 속도 누가 알 수 있습니까? 성령이 아십니다. 성령이 임하면 무엇을 알게 되는 것입니까? 은혜로 주신 것을 알게 됩니다. 은혜로 주신 것이 무엇입니까?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그래서 진리를 아는 자를 만나면 서로 사랑하게 되는 것입니다. 같은 진리를 말하는데 어떻게 서로 사랑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그러므로 진리를 아는 자는 은혜와 긍휼과 평강으로 충만케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진리는 세상이 볼 수도 없고 알 수도 없습니다. 그러나 이 진리를 아는 자에게는 은혜와 긍휼과 평강이 주어집니다. 요한서신을 보면서 바울서신을 더 길게 보았습니다. 그래도 되는 것은 서로 공통점이 있는 것입니다. 그 공통점이 진리에 대한 내용이 같은 것입니다. 내용만이 아니라 진리가 어떻게 성도에게 주어지는지 그 과정도 같습니다. 그러므로 한 성령을 받았다는 통일성이 증거 되는 것입니다. 이렇게 성령이 임하게 되면 하나님께서 은혜로 주신 것들을 알게 하시는 것입니다. 이런 은혜의 바탕은 하나님의 긍휼입니다. 그 긍휼과 자비가 무궁하시므로 자기의 택하신 자들에게 진리의 영을 부어주시는 것입니다. 그렇게 된 자들은 드디어 평강을 맛보게 됩니다. 이 평강 또한 세상이 알 수도 없고 맛 볼 수도 없는 평강입니다. 마치 진리의 영을 세상이 알 수도 없고 볼 수도 없고 받을 수도 없는 것처럼 은혜와 긍휼로 주어지는 평강도 알 수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께서 우리에게 평강을 주시는데 우리에게 주신 평안은 감옥에서도 평안한 것입니다. 이것은 세상이 감당치 못할 평강입니다. 이런 평강은 진리를 아는 자들만이 누리는 평강입니다.

 

3절을 다시 보면 은혜와 긍휼과 평강이 하나님 아버지와 아들 예수 그리스도께로부터 진리와 사랑 가운데서 우리와 함께 있으리라고 합니다. 진리를 아는 모든 자들은 한결 같이 주님의 은혜와 긍휼과 평강을 이야기 합니다. 그 은혜와 긍휼과 평강이 진리와 사랑 가운데서 우리와 함께 하는 것입니다. 이런 진리에 행하는 자를 보는 것은 장로의 기쁨인 것입니다. 진리를 아는 자는 계명 안에 거하게 됩니다. 그래서 4절에 보면 너의 자녀 중에 우리가 아버지께 받은 계명대로 진리에 행하는 자를 내가 보니 심히 기쁘다고 합니다. 이 계명은 이미 요한 1서 3:23절에서 보았듯이 예수님을 믿음과 서로 사랑하는 것입니다. 이런 믿음과 사랑이 나타나는 것을 보니 내가 심히 기쁘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장로의 기쁨은 진리를 아는 모든 자들의 기쁨인 것입니다. 이런 믿음이 나타나는 것은 역시 택하심을 입고 우리 안에 영원히 함께 할 진리로 인한 것입니다. 이런 진리는 은혜와 긍휼과 평강이 진리와 사랑 안에서 주어집니다. 이런 내용이 나에게 기쁨이 됩니까? 지금 세상을 사는 형편은 돈도 없고 몸도 아프고 내 뜻대로 되는 일이 없는데도 성경이 약속하는 이런 진리로 인한 기쁨이 있습니까? 그렇다면 진리를 아는 모든 자 중에 포함이 된 것입니다. 이런 사람은 주님의 약속을 기쁨으로 받아들이게 됩니다. 성령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은혜를 주셔서 진리를 알게 하시고 진리로 말미암아는 은혜와 긍휼과 평강에 충만케 하여 주시기를 원합니다. 아멘!

TAG •

List of Articles
번호 제목 성경본문 설교자 강설날짜 조회 수
375 [요한삼서 1장] 으뜸되기 file 요한삼서 1:9-15 손재호 1320
374 [요한삼서 1장] 진리를 위한 수고 file 요한삼서 1:5-8 손재호 1098
373 [요한삼서 1장] 내 영혼이 잘 됨 같이 file 요한삼서 1:1-4 손재호 1998
372 [요한이서 1장] 누구와 사귑니까? file 요한이서 1:10-13 손재호 1063
371 [요한이서 1장] 처음부터 가진 것 file 요한이서 1:4-9 손재호 1170
» [요한이서 1장] 진리를 아는 모든 자 file 요한이서 1:1-4 손재호 1448
369 [사무엘상 11장] 길갈로 가서 나라를 새롭게 하자 file 사무엘상 11장 손재호 2015-03-25 2113
368 [사무엘상 10장] 사울이 왕으로 뽑히다. file 사무엘상 10장 손재호 2015-03-18 2421
367 [사무엘상 9장] 사울이 사무엘을 만나다. file 사무엘상 9장 손재호 2015-03-11 2317
366 [사무엘상 8장] 우리에게 왕을 세워 주소서! file 사무엘상 8장 손재호 2015-03-04 2220
365 [사무엘상 7장] 에벤에셀의 하나님! file 사무엘상 7장 손재호 2015-02-25 2584
364 [사무엘상 5-6장] 벧세메스로 돌아온 하나님의 언약궤 file 사무엘상 5-6장 손재호 2015-02-11 2471
363 [사무엘상 4장] 이스라엘을 떠난 하나님의 영광 file 삼상 4:1-22 손재호 2015-02-04 2708
362 [사무엘상 3장] 사무엘을 부르시는 하나님 file 삼상 3:1-21 손재호 2015-01-28 3099
361 [사무엘상 2장] 제사를 멸시한 제사장 file 삼상 2:12-36 손재호 2015-01-21 2377
360 [사무엘상 2장] 한나의 찬양 file 삼상 2:1-11 손재호 2015-01-14 2692
359 [사무엘상 1장] 한나의 기도와 사무엘의 출생 file 삼상 1:1-28 손재호 2015-01-07 3239
358 [룻기서 4장] 메시아의 계보를 회복시키시는 하나님의 섭리 file 룻 4:1-22 손재호 2014-12-31 2018
357 [성탄말씀] 초림과 재림 히 9:26-28 최상범 2014-12-24 1289
356 [룻기서 3장] 나오미의 계획을 섭리하시는 하나님 file 룻 3:1-18 손재호 2014-12-17 2193
목록
Board Pagination Prev 1 ... 6 7 8 9 10 11 12 13 14 15 16 17 18 19 20 21 22 23 24 25 ... 34 Next
/ 3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