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오늘방문자 : 
    278
  • 어제방문자 : 
    1,063
  • 전체방문자 : 
    1,419,548
조회 수 856 추천 수 0 댓글 0
?

단축키

Prev이전 문서

Next다음 문서

크게 작게 위로 아래로 댓글로 가기 인쇄
?

단축키

Prev이전 문서

Next다음 문서

크게 작게 위로 아래로 댓글로 가기 인쇄
Extra Form
설교자 손재호
성경본문 살전 1:9-10

2009년 데살로니가전서 공부
                                                          노하심에서 건지심
말씀:데살로니가전서 1:9-10

 

우리는 지난 주에 복음의 핵심에 대해서 배웠습니다. 복음의 핵심 내용이 무엇이었습니까? 예수님의 죽으심과 다시 사심이었습니다. 예수님의 죽으심과 부활에 믿는 자가 함께 참여되어 진다는 사실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믿는 자는 죄에 대하여 죽은 자요, 의에 대하여 산 자가 되었습니다. 죄의 권세가 주장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이제는 생명이 왕 노릇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아직도 몸을 가지고 있기에 여러 가지 유혹과 실패와 좌절을 맛보지만 그러나 그러한 것들이 결코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어내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은 죄의 삯인 사망의 권세에서 해방이 된 것입니다. 이것이 복음이라는 것입니다.

 

이러한 복음을 우리가 알고 받았다면 우리는 정말 평생토록, 영원토록 주님을 찬송하여도 부족할 것입니다. 그런데 왜 우리에게 이러한 감사와 기쁨과 찬양이 없는 것일까요? 그것은 아직도 하나님의 진노가 어떠한지를 잘 모르고, 그러한 진노에서 구원이 무엇인지 잘 모르기 때문이라고 생각이 됩니다. 단지 예수를 믿는다는 것이 이 세상에서 잘 되고 복 받기 위한 것이 아니었나 하는 것입니다. 곧 예수를 믿는다며 이 세상의 것들을 바라고 있지나 않았나 하는 것입니다. 고린도전서 15:19절을 보면 “만일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의 바라는 것이 다만 이생뿐이면 모든 사람 가운데 우리가 더욱 불쌍한 자리라”고 했습니다. 예수님께 소망을 두면서, 기대하는 바가 이 세상의 것이라면 얼마나 불쌍한가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 세상이나 세상에 속한 것을 사랑하지 말라고 하신 것입니다. 이러한 것들은 아버지께로부터 온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것들은 다 지나가는 것들이고, 이러한 세상에 속한 것들은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들입니다. 이러한 것들이 아버지께로서 온 것이 아니라 세상을 좇아 온 것인데 예수님을 믿으면서도 은근히 세상의 것들을 기대하는 것이 얼마나 불쌍한 사람들입니까?

 

예수님의 공생애를 보면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의 주변에 기웃 기웃거렸습니까? 혹시 떡이나 얻어먹을까? 혹시 병이나 고쳐볼까? 무슨 기적이나 구경할까? 하고서 몰려든 자들이 어떻게 되었습니까? 내가 너희에게 줄 것은 썩는 양식이 아니라 영생의 양식이라고 말씀하시면서 자신의 살과 피를 먹고 마셔야 영생 얻는다고 하니 거의 다 떠나가 버린 것입니다(요 6장). 그들의 관심은 영생이 아니었습니다. 죄사함이 아니었습니다. 단지 현실적인 필요들을 위하여 따라 나선 자들이었습니다. 오늘날도 교회 안에 많은 사람들이 자신들의 현실적인 필요로 인하여 나오는 자들이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러한 자들은 하나님의 말씀 앞에서 깨어지든지, 아니면 떠나든지 양단간에 결단이 나야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도 어중간하게 있다는 것은 복음이 제대로 증거 되지 않았다고 생각을 해봅니다. 왜냐하면 복음이 제대로 증거 되면 어중간하게 있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복음은 받아들이는 자와 거부하는 자로 분명히 나누어 버립니다.

 

미가서에서도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하면 사람들이 욕으로 받아들이지 않았습니까? 미가서 2:6절에 보면 “그들이 말하기를 너희는 예언하지 말라. 이것은 예언할 것이 아니어늘 욕하는 말을 그치지 아니한다 하는도다”라고 했습니다. 그러므로 제가 설교자로서의 고민이 정말 복음을 바르게 전하고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사람들의 안색이 변하여 돌로치려고 하는 정도로 복음은 괴로운 것입니다. 그러나 복음을 받은 자는 서로 사랑하기를 눈을 빼어줄 정도로 사랑하는 것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대신 죽기까지 하는 것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우리의 모습은 어떠합니까? 돌로 치는 것도 아니고, 목숨을 내어놓을 만큼 서로 사랑하는 것도 아니지 않습니까? 그러므로 ‘나는 복음을 희석시키고 있구나!’하는 고민이 늘 저의 고민입니다. 그러므로 저와 여러분이 오늘 또 다시 복음을 들어야 하는 것입니다. 복음은 사람들을 두 부류로 나누어 버립니다. 복음으로 기뻐하든지 아니면 돌아서든지 하는 것입니다.

 

복음을 기뻐하며 영접한 자들은 사람의 기쁨을 구하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의 기쁨을 구합니다. 데살로니가전서 2:4-6절을 보면 “오직 하나님의 옳게 여기심을 입어 복음 전할 부탁을 받았으니. 우리가 이와 같이 말함은 사람을 기쁘게 하려 함이 아니요, 오직 우리 마음을 감찰하시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려 함이라. 너희도 알거니와 우리가 아무 때에도 아첨의 말이나 탐심의 탈을 쓰지 아니한 것을 하나님이 증거하시느니라. 우리가 그리스도의 사도로 능히 존중할 터이나 그러나 너희에게든지 다른 이에게든지 사람에게는 영광을 구치 아니하고”라고 했습니다.

 

오늘날 우리가 복음을 기뻐하든지 아니하든지 간에 복음의 내용은 무엇입니까? 예수님의 죽으심과 다시 사심입니다. 그리고 이것을 믿는 자들은 예수님의 강림을 기다리는 것입니다. 오늘은 예수님의 강림과 장래 노하심에서 우리를 거지시는 예수님에 대해서 살펴보고자 합니다. 10절에 보면 “또 죽은 자들 가운데서 다시 살리신 그의 아들이 하늘로부터 강림하심을 기다린다고 말하니 이는 장래 노하심에서 우리를 건지시는 예수시니라”고 했습니다. 이 말씀 후반부에 보면 “죽은 자들 가운데서 다시 살리신 그의 아들이 강림하심을 기다린다”고 했습니다. 죽음에서 다시 살아나신 그분이 부활의 첫 열매가 되시고 이제 그를 믿는 자들도 살리시기 위하여 다시 오시는 것입니다. 이렇게 살리심은 장래 노하심에서 건지시기 위함이라고 했습니다. 장차 진노가 나타날 것입니다. 전 우주적으로 하나님의 진노가 나타날 것입니다. 여기에 대해서 한 말씀만 살펴보겠습니다. 베드로후서 3:7-10절에 보면 “이제 하늘과 땅은 그 동일한 말씀으로 불사르기 위하여 간수하신바 되어 경건치 아니한 사람들의 심판과 멸망의 날까지 보존하여 두신 것이니라. 사랑하는 자들아! 주께는 하루가 천년 같고 천년이 하루 같은 이 한가지를 잊지 말라. 주의 약속은 어떤 이의 더디다고 생각하는 것 같이 더딘 것이 아니라, 오직 너희를 대하여 오래 참으사 아무도 멸망치 않고 다 회개하기에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 그러나 주의 날이 도적 같이 오리니 그 날에는 하늘이 큰 소리로 떠나가고 체질이 뜨거운 불에 풀어지고 땅과 그 중에 있는 모든 일이 드러나리로다”라고 했습니다. 이러한 진노를 우리가 알고 믿는다면 이러한 진노에서 건지심을 받는 것이 가장 큰 복이 아닙니까? 그런데도 아직도 하나님의 진노를 받아 마땅한 것들을 바라고 소망하고 있다면 이것이 어찌 성도의 올바른 자세이겠습니까?

 

그러면 하나님의 진노가 어떻게 나타납니까? 로마서 1:18절을 보면 “하나님의 진노가 불의로 진리를 막는 사람들의 모든 경건치 않음과 불의에 대하여 하늘로 좇아 나타나나니”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의 진노가 모든 불의에 대하여 나타나는 것입니다. 즉 의롭지 아니하면 하나님의 진노가 그 위에 부어지는 것입니다. 그러면 의로우려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하나님의 모든 말씀을 하나도 빼지 말고 100% 다 지켜야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바리새인처럼 지켜서도 안 됩니다. 외형적인 충족만이 아니라 그 마음의 중심까지 온전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야 의가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의가 없는 곳에 하나님의 진노가 나타나는 것입니다. 그래서 로마서 1장에서 수많은 죄의 목록들이 나타납니다만 그러나 그러한 것도 사실 일부분에 불과 합니다. 시기, 자랑, 수군수군하는 것도 결국 불의이기에 하나님의 진노로 사형에 해당하는 죄목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의가 없으면 진노와 저주밖에 없는 것입니다.

 

이러한 하나님의 진노가 어떻게 나타나는지 한곳만 더 보겠습니다. 골로새서 3:5-6절을 보면 “그러므로 땅에 있는 지체를 죽이라. 곧 음란과 부정과 사욕과 악한 정욕과 탐심이니 탐심은 우상숭배니라. 이것들을 인하여 하나님의 진노가 임하느니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의 진노가 땅의 것을 사랑하는 탐심 위에 임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가 이 세상을 살면서 탐심이 아닌 것이 어디 있겠습니까? 세상에서 추구하는 것들은 논외로 한다고 하더라도, 교회에서 하는 일도 얼마든지 탐심으로 일할 수 있는 것입니다. 설교도, 찬양도, 기도도, 전도도, 선교도, 구제도, 건축도 다 탐심으로 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실상이 이러한데 우리가 무엇으로 하나님의 진노를 피할 수가 있는 것입니까? 그런데도 사람들이 고안해낸 방법들이 무엇입니까? 예수님의 하신 일을 믿는 것이 아니라 거기에 자꾸만 우리의 탐심을 없애고 우리의 자랑을 없애고 좀더 나은 것으로 열매를 만들어 내자라고 하는 것입니다. 다른 교회는 몰라도 우리교회는 바르게 개혁을 하여 보자고 합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오심은 이 세상을 고치시고 보전하시기 위함이 아니라, 이 악한 세상에서 자기 백성들을 건지시기 위함입니다. 장차 나타날 하나님의 진노에서 건지시기 위함이라는 것입니다.

 

예전에 밀알 장애인 복지회에 우리 교회가 지원을 한 적이 있습니다. 장애인의 사역이 얼마나 어렵고 힘드는 것입니까? 일년내내 가르쳐도 말 한마디 겨우 하는 정도를 언제까지 가르쳐야 하는 것입니까? 그러나 그렇게 해서라도 장애의 상태를 좀더 낫게 개선시키고자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죄란 부족이나 장애가 아닙니다. 부족하면 조금만 채워주면 되고, 장애라면 장애의 요소를 제거하면 됩니다. 그러나 죄인이란 고쳐지지 아니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죄인은 어떤 좋은 환경이나 프로그램으로 고쳐낼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죄악에서 건지셔야 하는 것입니다. 이것을 얼마나 인간이 싫어하는지 아십니까? 인간의 불가능에서 출발을 해야 하니 사람들이 반가워하지 않는 것입니다. 단지 예수란 우리의 가능성에 힘을 실어주는 자로서 있기를 바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보다 한걸음 더 나아가서 아예 예수님을 협박하는 것입니다. ‘이번에 이것 해결하여 주지 아니하면 한번 두고 보시오. 재미 없습니다’ 하는 식입니다. ‘닭살 돋는 묵상’이라는 책에서 나오는 장면입니다. 예수님은 벌벌떨면서 전봇대 밑에 서있고, 조폭 같은 자가 위협적인 자세로 ‘결정은 내가 할테니 주님은 복이나 주소’그러는 것입니다. 이러한 형태가 아닙니까? 주님의 진노를 생각지 아니하고 예수님을, 하나님을 생각하는 것은 금송아지를 섬기는 것이나 다름이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진노가 얼마나 무서운지를 아는 사람만이 주님의 십자가를 사랑하게 되는 것입니다. 주님의 용서와 그 사랑을 제대로 알아 가는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의 진노가 어떠합니까? 요한계시록 6:12-17절을 보면 “내가 보니 여섯째 일을 떼실 때에 큰 지진이 나며, 해가 총담 같이 검어지고 온 달이 피 깥이 되며, 하늘의 별들이 무화과나무가 대풍에 흔들려 과실이 떨어지는 것 같이 땅에 떨어지며, 하늘은 종이 축이 말리는 것 같이 떠나가고 각 산과 섬이 제자리에서 옮기우매 땅의 임금들과 왕족들과 장군들과 부자들과 강한 자들과 각 종과 자주자가 굴과 산 바위틈에 숨어 산과 바위에게 이르되 우리 위에 떨어져 보좌에 앉으신 이의 낮에서와 어린 양의 진노에서 우리를 가리우라. 그들의 진노의 큰 날이 이르렀으니 누가 능히 서리요 하리라”고 했습니다. 이러한 진노의 날이 장차 임하실 것을 믿으십니까? 이 때는 어떠한 세상의 신분이 아무런 상관이 없습니다. 오직 하나님의 진노 앞에서 경악하는 것입니다. 얼마나 무서운지 굴과 바위틈에 숨어서 산과 바위가 무너져서 자신을 가리워 주었으면 좋겠다고 하는 정도입니다.

 

얼마나 무서웠으면 이렇게 하겠습니까? 그 진노가 하나님의 보좌와 어린 양의 진노라는 것입니다. 일찍 죽임 당하신 어린 양입니다. 이분의 진노가 임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러한 진노에서 건짐을 받는 것이 얼마나 놀라운 복입니까? 이러한 것을 성경이 약속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장차 나타날 하나님의 진노, 그 어린 양의 진노에서 건짐을 받는다는 것이 얼마나 기쁜 소식입니까? 장차 주님께서 재림하셔서 하나님의 진노에서 구원하신다는 것, 이것이 복음의 내용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소식은 기쁘지 않고 장차 진노 가운데 불타버릴 것들을 바라고 소망하면서 교회 나오고 예수님을 부른다면 얼마나 불쌍한 자들입니까?

 

오늘 하루를 살면서 우리가 무엇으로 기뻐하고 살았습니까? 장차 나타날 하나님의 진노에서 건짐을 받는다는 사실을 믿음으로 인하여 얼마나 기뻐하셨습니까? 이것이 기쁘지 않다면 지금 우리의 마음은 다른 것에 빼앗겨 있는 것입니다. 이런 자들에게 하나님의 진노가 임하는 것입니다. 요한복음 3:36절을 보면 “아들을 믿는 자는 영생이 있고 아들을 순종치 아니하는 자는 영생을 보지 못하고 도리어 하나님의 진노가 그 위에 머물러 있느니라”고 했습니다. 성령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은혜를 주셔서 우리로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을 우리에게 허락해 주시기를 원합니다. 그리하여 장차 임할 하나님의 진노에서 구원받으며 영생을 얻게 하여 주시기를 원합니다. 그리하여 어떠한 상황가운데서도 기뻐하게 하시고 감사하시는 성도들이 되게 하여 주시기를 원합니다. 아멘!


List of Articles
번호 제목 성경본문 설교자 강설날짜 조회 수
435 [데살로니가전서 5장] 흠 없게 보전되기를 file 살전 5:23-28 손재호 1388
434 [데살로니가전서 5장] 하나님의 뜻(2) file 살전 5:19-22 손재호 1233
433 [데살로니가전서 5장] 하나님의 뜻(1) file 살전 5:16-18 손재호 1258
432 [데살로니가전서 5장] 화목하라! file 살전 5:12-15 손재호 1232
431 [데살로니가전서 5장] 때와 시기 file 살전 5:1-11 손재호 1374
430 [데살로니가전서 4장] 서로 위로하라! file 살전 4:13-18 손재호 1877
429 [데살로니가전서 4징] 성도의 삶 file 살전 4:9-12 손재호 972
428 [데살로니가전서 4장] 하나님의 뜻 file 살전 4:1-8 손재호 1702
427 [데살로니가전서 3장] 바울의 기도 file 살전 3:9-13 손재호 1819
426 [데살로니가전서 2장] 바울의 기쁨 file 살전 2:17-3:10 손재호 1389
425 [데살로니가전서 2장] 말씀의 역사 file 살전 2:13-16 손재호 1062
424 [데살로니가전서 2장] 사도의 의무와 권리 file 살전 2:6-12 손재호 1140
423 [데살로니가전서 2장] 하나님의 복음 file 살전 2:1-5 손재호 1412
» [데살로니가전서 1장] 노하심에서 건지심 file 살전 1:9-10 손재호 856
421 [데살로니가전서 1장] 복음의 내용 file 살전 1:9-10 손재호 929
420 [데살로니가전서 1장] 복음의 능력 file 살전 1:5-8 손재호 1609
419 [데살로니가전서 1장] 바울의 감사 file 살전 1:2-4 손재호 967
418 [데살로니가전서 1장] 은혜와 평강 file 살전 1:1 손재호 1183
417 [골로새서 4장] 하나님 나라를 위하여 file 골 4:7-18 손재호 1885
416 [골로새서 4장] 기도를 항상 힘쓰라 file 골 4:2-6 손재호 1324
목록
Board Pagination Prev 1 ... 3 4 5 6 7 8 9 10 11 12 13 14 15 16 17 18 19 20 21 22 ... 34 Next
/ 3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