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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 최상범
성경본문 갈 1:6-9
성경본문내용 (6)그리스도의 은혜로 너희를 부르신 이를 이같이 속히 떠나 다른 복음 좇는 것을 내가 이상히 여기노라(7)다른 복음은 없나니 다만 어떤 사람들이 너희를 요란케 하여 그리스도의 복음을 변하려 함이라(8)그러나 우리나 혹 하늘로부터 온 천사라도 우리가 너희에게 전한 복음 외에 다른 복음을 전하면 저주를 받을지어다(9)우리가 전에 말하였거니와 내가 지금 다시 말하노니 만일 누구든지 너희의 받은 것 외에 다른 복음을 전하면 저주를 받을지어다
강설날짜 2011-06-22

2011년 6월 22일 한결교회 수요모임 강설
갈라디아서 제5강

 

다른 복음은 없나니(2)

 

말씀 : 갈 1:6-9

 

지난주에 이어서 오늘 본문 6-9절 말씀을 계속해서 살펴보겠습니다. 지난주까지의 내용을 잠깐 요약하면, 갈라디아서의 메시지는 “나의 구원의 근거를 어디에 두느냐”하는 문제였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구원하시기로 예정하시고 작정하신 뜻과 그 뜻을 이루시기 위해서 그리스도께서 우리 죄를 위하여 하신 일, 곧 자신의 몸을 십자가에 내어 주신 그 일에 근거를 두느냐? 아니면 나 자신에게서 그 구원의 근거를 찾느냐?” 하는 문제였습니다. 구원의 근거를 나에게서 찾는다는 것은 구원을 받기 위해서 자기 자신의 행위를 의지하고, 그래서 자기를 자랑하려고 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우리가 십자가의 은혜만을 의지하고 그래서 십자가만 자랑해야 하는데, 그렇게 하지 아니하고, 자신의 죄인 됨을 인정하지 않으려는 교만과 자기를 드러내려하는 육체의 욕심을 따라서 행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것이 지난주에 살펴보았던 것처럼 자랑으로만 나타나는 것이 아니라, 그 반대로 자기가 제대로 살지 못할 때는 그 동일한 교만이 스스로 절망과 좌절에 빠지는 것으로 나타나는 것입니다. 그래서 자랑이든 절망이든 이 둘 중에 어떤 것이든지 간에 결과적으로 나타나는 현상은 신앙생활 가운데 겸손과 감사와 기쁨은 사라지고, 자랑과 정죄가 성행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갈라디아서 5장에서 보는 것처럼 그리스도의 은혜에서 떨어지면 육체의 행위가 현저하게 나타나는 것입니다. 성령을 따라 살지 않고 육체의 정욕을 따라 살게 됩니다. 갈라디아서의 메시지는 바로 “이러한 가르침, 이러한 신앙생활을 하는 것이 다른복음이다”라는 것입니다. 다른복음을 좇는 것은 단순히 교리적으로 약간 문제가 있는 정도가 아니라, 하나님을 떠나는 우상숭배이고, 그래서 본인은 예수님을 믿는다고 말할지는 모르지만, 사실 그 사람은 예수님을 안 믿는 사람인 것이고, 그래서 그 사람이 하는 모든 종교 활동은 다 하나님 앞에서 무의미한 것이 된다는 것입니다. 바울은 그것이 멸망의 길이므로 속히 돌이키라고 말합니다. 저주까지 선포하면서 거기서 돌이켜 회개하라고 명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갈라디아서의 메시지입니다.


여러분, 우리는 지금 어디에 있습니까? 은혜의 복음 위에 서 있습니까? 아니면 다른 복음을 좇고 있습니까? 이 문제는 우리의 영혼의 운명이 달린 문제이기 때문에, 우리 자신을 진지하게 점검해보아야 합니다. 내가 정말 예수님을 믿고 신뢰하고 굳건한 구원의 반석 위에 서서 그것을 의지하는 “신앙생활”을 하고 있는지, 아니면 자기 자신을 신뢰하는 자기생활을 하고 있는지 점검해보아야 합니다. 만일 우리가 신앙생활을 하지 않고, 자기생활을 하고 있다면 우리는 거기서 속히 돌이켜야 합니다. 돌이켜 회개하고 은혜의 복음위에 굳게 서야 합니다. 그것이 우리가 유일하게 살길인 것입니다. 주님의 은혜를 알고, 그 은혜만을 겸손히 의지하고 사시는 여러분들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그러면 우리가 은혜의 복음위에 굳게 서기 위해서 어디로 어떻게 돌이켜야 합니까? 그것은 우리가 처음 예수님을 만났을 때 듣고 믿고 받아들였던 그 은혜의 복음으로 다시 돌아와야 합니다. 우리 교회가 은혜를 회복하고 부흥하기 위해서는 전에 듣지 못했던 새로운 복음, 새로운 가르침을 필요로 하는 것이 아니라, 처음 믿었을 때 받아들였던 그 복음으로 다시 돌아가야 하는 것입니다. 오늘 말씀 8절에 보면 바울은 “그러나 우리나 혹 하늘로부터 온 천사라도 우리가 너희에게 전한 복음 외에 다른 복음을 전하면 저주를 받을지어다”라고 하고 있습니다. 그러니깐 어디로 돌아오라는 것입니까? 처음 바울이 갈라디아 교회를 개척할 때 전했던 그 은혜의 복음으로 돌아오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9절에서는 “우리가 전에 말하였거니와 내가 지금 다시 말하노니 만일 누구든지 너희의 받은 것 외에 다른 복음을 전하면 저주를 받을지어다”라고 해서 “너희의 받은 것”이라고 했습니다. 즉 갈라디아 성도들이 그렇게 열렬히 환영했던 복음, 그리고 그 복음을 받아들였을 때 성령체험을 했었던 그 복음으로 돌아오라는 것입니다.

 

“이제는 그의 육체의 죽음으로 말미암아 화목케 하사 너희를 거룩하고 흠 없고 책망할 것이 없는 자로 그 앞에 세우고자 하셨으니 만일 너희가 믿음에 거하고 터 위에 굳게 서서 너희 들은바 복음의 소망에서 흔들리지 아니하면 그리하리라 이 복음은 천하 만민에게 전파된 바요 나 바울은 이 복음의 일군이 되었노라”(골 1:22-23)

 

여기도 보면 “너희가 믿음에 거하고 터 위에 굳게 서서 너희 들은바 복음의 소망에서 흔들리지 아니하면”이라고 했습니다. 너희가 이미 듣고 믿고 받아들였던 그 은혜의 복음의 터 위에 굳게 서서 복음의 소망에서 흔들리지 아니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의 구원의 소망이 흔들리지 않으려면 우리가 은혜의 복음의 터 위에 굳게 서는 수밖에 다른 길이 없습니다. 우리가 만일 그렇게 하지 아니하고, 우리의 구원 근거를 자꾸 나에게서 찾는다고 한다면, 우리의 구원의 소망은 늘 불확실하고 흔들릴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 근거를 하나님의 작정하신 뜻과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공로에 둘 때, (그것이 은혜의 복음 아닙니까?), 즉 그 근거를 은혜의 복음 위에 둘 때, 그리고 그 은혜의 복음을 허락하신 하나님을 신뢰하며 살 때, 우리의 구원의 소망은 든든한 반석 위에 있는 것처럼 흔들리지 아니하고 견고하게 서있을 수 있는 것입니다. 그리할 때, 우리는 흠과 점도 없는 거룩한 삶을 결과로 얻게 됩니다. 은혜위에 굳게 설 때 참된 행위가 나타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처음 예수님을 만났을 때, 듣고 믿었던 그 은혜의 복음으로 다시 돌아가야 합니다. 그때 그 은혜와 감격을 회복해야 합니다. 여러분 그때를 한번 떠올려보시기를 바랍니다. 우리가 처음 예수님을 믿을 때는 (사실 지금보다 훨씬 부족한 점도 많고, 또 아는 것도 많이 없었지만 그래도) 값없이 용서해주시는 죄사함의 은혜로 인해서 기쁨과 감격이 있지 않았습니까? 우리 마음에 감사가 넘치지 않았습니까? 찬양을 하면 기쁘지 않았습니까? 저도 처음 예수님을 만나게 되었을 때, 말씀을 통해서 그리고 기도하면서 은혜 받았을 때는 참 마음에 기쁨이 있었고, 신앙생활이 그렇게 활력이 있었고, 재미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그 은혜와 감격을 많이 잃어버렸고 냉냉한 신앙생활을 하고 있는 것이 저의 솔직한 현재 모습입니다. 여러분은 어떻습니까? 솔직히 우리가 은혜를 잃어버리고, 우리의 삶 속에서 감사가 없고, 기쁨이 없고, 냉냉한 것이 사실 솔직한 우리의 모습이지 않습니까? 여러분 우리는 처음으로 돌아가야 합니다. 처음 예수님을 믿었을 때 느꼈던 그 기쁨과 감격과 감사를 회복해야 합니다. 다른 말로 하면, 요한계시록의 에베소 교회에 주님께서 하신 말씀대로 주님을 향한 첫사랑을 회복해야 합니다.

 

“그러나 너를 책망할 것이 있나니 너의 처음 사랑을 버렸느니라 그러므로 어디서 떨어진 것을 생각하고 회개하여 처음 행위를 가지라 만일 그리하지 아니하고 회개치 아니하면 내가 네게 임하여 네 촛대를 그 자리에서 옮기리라”(계 2:4-5)

 

여기서도 ‘처음 행위’가 중요한 것입니다. 그리고 요한일서도 보면...

 

“너희는 처음부터 들은 것을 너희 안에 거하게 하라 처음부터 들은 것이 너희 안에 거하면 너희가 아들의 안과 아버지의 안에 거하리라”(요일 2:24)

 

그러므로 무엇이든 우리의 신앙생활은 처음이 제일 중요합니다. 갈라디아 교회의 거짓교사들은 그것이 아니라, 처음 복음을 듣고 은혜를 받는 것은 하나의 통과의례이고, 이제 지금의 신앙생활을 보다 성공적으로 영위해나가기 위해서는 소위 업그레이드된 복음, 또는 새로운 복음이 필요하다고 주장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바울과 성경은 전혀 그렇지 않다는 것입니다. 우리의 신앙생활은 처음이 제일 중요하고, 처음이 모든 신앙생활의 토대이고 근거이고 원동력이다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언제나 처음으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가 처음으로 돌아갈 수 있기를 바랍니다. 우리가 때때로 교만해서 복음에서 떨어져서 우리의 욕심을 좇아서 우리 마음대로 살아갈 때가 있지만, 그러나 우리는 다시 마음을 고쳐먹고 회개하고 처음 행위로 돌이켜야 하는 것입니다. 이런 처음 행위와 사랑을 회복하는 은혜가 우리 모임 가운데 넘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다시 본문으로 돌아와서 갈라디아서 1장 7절을 보십시오.

 

“다른 복음은 없나니 다만 어떤 사람들이 너희를 요란케 하여 그리스도의 복음을 변하려 함이라”(갈 1:7)

 

여기 거짓교사들이 다른복음을 가르치는 목적을 말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첫째 요란케 하는 것이고, 두 번째 그리스도의 복음을 변하려 하는 것입니다. “요란케 한다”는 말은 뒤흔들고 휘젓고, 선동해서 혼란스럽게 한다는 말입니다. 예수님께서 태어나실 때, 왕이 나신다는 소문을 듣고 헤롯왕과 온 예루살렘이 소동했다고 했는데, 이때 “소동한다”는 말이 바로 이 ‘요란케 한다’는 단어입니다. 뭔가 안전하고 평안하지 못하고 불안하고, 흔들리고, 두려워하고, 근심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요란케 한다’는 말의 의미입니다. 거짓교사들이 다른복음을 전하는 목적은 이렇게 갈라디아 교회를 요란케 하기 위해서입니다. 그들로 불안하게 하고, 흔들리게 하고, 두려워하게 함으로써 구원의 확신 가운데 평안을 누리지 못하게 하려는 것입니다. 둘째로 거짓교사들의 목적은 그리스도의 복음을 변하려 하는 것입니다. 여기서 ‘변한다’라는 말은 ‘약간의 수정을 가한다’는 말이 아니라 ‘정반대로 뒤바꾼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바울이 오순절 성령 강림을 체험하고 설교를 할 때, 종말에 있을 일에 관한 요엘서를 인용하면서 ‘해가 변하여 어둠이 되었다’라고 말하는 부분이 있는데(행 2:20), 그때 변한다는 말이 바로 이 단어입니다. 해가 약간 빛을 잃는 것이 아니라, 아예 어둠으로 바뀐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야고보서 4:9에 “슬퍼하며 애통하며 울지어다 너희 웃음을 애통으로, 너희 즐거움을 근심으로 바꿀지어다”라고 하고 있는데, 여기서도 이 단어가 사용되었습니다. “웃음을 애통으로 (완전히 정반대의 것으로) 바꾸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단어는 정반대로 뒤바꾸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러므로 거짓교사들의 궁극적인 목적은 그리스도의 복음을 약간 수정하는 것이 아니라, 사실은 그리스도의 은혜의 복음을 완전히 무력화시키고 파괴하는 것이 그 목적인 것입니다. 이것이 다른복음의 숨어있는 무서운 본질입니다. 물론 겉으로 볼 때는 갈라디아 교회의 거짓교사들도 은혜를 얘기합니다. 예수님을 믿어야 한다고 말합니다. 예수님의 십자가의 은혜로 죄사함 받고 구원받는다고 말합니다. 그들은 그것을 한 번도 부인한 적이 없습니다. 오히려 그것을 아주 강조해서 얘기합니다. 다만 그들은 할례도 받고 율법도 행해야 진정으로 아브라함의 자손이 되고 하나님의 아들들이 될 수 있다고 하는 한 조항만을 첨가시키기를 원한 것입니다. 오늘날도 마찬가지입니다. 오늘날 행위구원론을 말하는 많은 신학자들도 항상 은혜와 믿음을 강조합니다. 이것을 말하지 않는 신학자는 이 세상에 단 한 명도 없습니다. 오히려 아주 강조하여 말합니다. 그러나 끝부분에 가서 행위가 구원의 조건이 된다고 하는 한 마디를 살짝 덧붙일 뿐입니다. 그러나 그것의 본질은 무엇입니까? 일부분을 오염시키는 것이 아니라, 은혜의 복음 전체를 말살시키는 것입니다.


여러분 물 한 컵에 똥을 조금만 떨어뜨려도, 우리가 그것을 마실 수 있겠습니까? 아주 조금만 들어갔다고 해도, 아무도 그 물을 안 마실 것입니다. 똥은 소량이지만, 그 똥이 물 전체를 부패시키고 오염시키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은혜의 복음에 어떠한 소량의 변질을 가하는 것은 사실은 그 복음 전체를 부패시키고 변질시키는 것이 된다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가 이러한 다른복음의 본질을 분명히 인식하고 파악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은혜를 완전히 무력화시키는 것이고, 사실 이것이 사단 마귀가 궁극적으로 이루고자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것처럼, 사단 마귀가 주로 하는 일이 우리를 유혹해서 죄를 짓게 만들고, 간음하게 하고, 음란하고 더러운 것을 추구하게 만들고, 돈과 명예와 안락한 이 세상의 삶을 좇아 살도록 유혹하는 것이 그들의 주된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물론 사단이 그런 일을 하는 것은 사실이지만, 그러나 전체적으로 따져보았을 때 그러한 것들은 사단 마귀에게 사실 일의 축에도 못 드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런 일들은 사단이 미끼만 던져놓으면 사람들의 육체의 정욕이 그 다음부터는 다 알아서 하기 때문입니다. 사단이 하지 말라고 해도 인간이 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깐 그것은 일도 아닙니다. 오히려 사단 마귀가 가장 심혈을 기울이고 가장 많이 애쓰고 노력하는 주된 일이 무엇이냐 하면 바로 복음을 변질시키는 것입니다. 완전히 변질시키면 티가 나니깐 조금만 변질시키는 것입니다. 그렇게 해서 우리를 속이는 것인데, 우리가 일단 거기에 속아 넘어가게 되면, 그 결과는 엄청난 재앙으로 우리에게 오는 것입니다. 십자가의 은혜의 복음의 교리를 완전히 무력화시키고, 그렇게 되면 신자들은 자연스럽게 방탕과 세속적인 삶으로 나아가게 되고 결국에는 멸망을 당하고 마는 것입니다. 이것이 사단이 노리는 것입니다.

 

“뱀이 그 간계로 이와를 미혹케 한 것같이 너희 마음이 그리스도를 향하는 진실함과 깨끗함에서 떠나 부패할까 두려워하노라 만일 누가 가서 우리의 전파하지 아니한 다른 예수를 전파하거나 혹 너희의 받지 아니한 다른 영을 받게 하거나 혹 너희의 받지 아니한 다른 복음을 받게 할 때에는 너희가 잘 용납하는구나”(고후 11:3-4)

 

여기도 보면 다른복음에 속아 미혹되었을 때, 그 결과가 무엇입니까? 진실함과 깨끗함에서 떠나 부패하는 것입니다. 다른복음을 좇을 때, (다른 복음이 무엇입니까? 행위를 강조하는 것 아닙니까?) 그래서 행위를 강조하기 때문에 더 거룩한 삶을 살 것 같지만, 결과적으로는 오히려 부패한 삶으로 나아가게 된다는 것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십자가의 은혜는 앞서 말했던 것처럼 우리 모든 신앙생활의 근본이고 토대이고 원동력이고 전부이기 때문에 그런 것입니다. 죄사함받고 의롭다 하는 것에만 십자가의 은혜가 필요한 것이 아니라, 우리의 성화에도 십자가의 은혜의 근거요 원동력인 것입니다. 그래서 사단마귀가 여기에 목숨 걸고 달려드는 것입니다. 이것만 부정되면 교회를 무너뜨리는 것은 시간문제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이 다른복음으로 교회를 무너뜨리려고 얼마나 노력하였는지, 그리고 지금도 얼마나 노력하고 있는지 정말 상상도 할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교회사적으로도 보면 항상 다른복음이 계속해서 등장해서 교회를 타락시켜 왔습니다. ‘펠라기안’이니, ‘세메펠라기안’이니, ‘알미니안’이니 하는 것이 다 이런 다른복음들입니다. 순복음교회, 감리교회, 성결교회가 다 알미니안인데, 이런 교회의 가르침에 대해서 이단이다라고 말하면, 한국교회에서 완전히 매장되어서 목회 못하게 됩니다. 이것이 오늘날 한국교회의 현실입니다.


신학 교수들 중에서도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다른복음을 좇는지 모릅니다. 전세계 신학자들 중에서 한 70%는 자유주의니깐 아예 이단 축에도 못 끼는 사이비라고 한다면, 나머지 30%중에서 거의 대부분이 복음주의자들인데 다 알미니안들입니다. 우리 칼빈주의는 아주 극소수입니다. 한국에는 그나마 많기는 한데, 점점 그 수가 줄어들고 있습니다. 제가 지금 갈라디아서 주석책들을 여러 개 보는데, 은혜의 복음을 증거하는 갈라디아서를 해석하여 풀어쓴 주석의 내용이 뭐냐면 행해야 구원받는다고 하는 것을 얘기합니다. 제가 가진 주석 책 중에 1/3이 다 그 얘기를 합니다. 예를 들면 다음과 같은 구절들...

 

“육체의 일은 현저하니 곧 음행과 더러운 것과 호색과 우상 숭배와 술수와 원수를 맺는 것과 분쟁과 시기와 분냄과 당 짓는 것과 분리함과 이단과 투기와 술 취함과 방탕함과 또 그와 같은 것들이라 전에 너희에게 경계한 것같이 경계하노니 이런 일을 하는 자들은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할 것이요(갈 5:19-21)


“스스로 속이지 말라 하나님은 만홀히 여김을 받지 아니하시나니 사람이 무엇으로 심든지 그대로 거두리라 자기의 육체를 위하여 심는 자는 육체로부터 썩어진 것을 거두고 성령을 위하여 심는 자는 성령으로부터 영생을 거두리라”(갈 6:7-8)

 

이런 말씀들을 얘기하면서 우리는 믿음으로만 구원받지 못하고 행함이 따라와야 구원받는다라고 말합니다. 우리가 똑바로 못살면 구원이 취소된다고 얘기합니다. 그래도 제가 가진 주석들은 대부분 건전하다고 칭해지는 보수적인 주석들만 모아놓은 것인데, 그런데도 이런 얘기를 하는 주석들이 많습니다. 아니 행위를 강조하는 야고보서 주석 같은데서 그런 얘기를 하면 그래도 이해가 되는데, 갈라디아서를 주석하면서 행위구원론을 얘기하는 정도니깐 이 시대 신학이 얼마나 타락했는지를 우리는 알 수 있는 것입니다. 물론 신학자들의 의도는 이해가 됩니다. 오늘날 한국교회가 세속적이 되고, 행함이 나타나지 않으니깐 행함을 조금 더 강하게 강조하는 것인데, 아이러니하게도 그러한 행함에 대한 강조가 오히려 우리 교회의 세속화를 앞당기고 있고, 더 나아가 그리스도의 복음을 통째로 변질시키고 있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한국교회의 세속화는 은혜만 가르쳐서 그런 것이 아니라, 값싼 은혜를 가르쳤기 때문입니다. 누구라도 그리스도의 그 십자가의 은혜가 얼마나 큰 지를 진정으로 알게 되면, 죄를 미워할 수밖에 없고, 죄와 싸우는 삶을 살 수밖에 없습니다. 한국교회가 세속화된 것은 은혜를 악용하는 것도 있지만, 사실은 은혜를 정말 모르기 때문에 그런 것입니다. 신학자들은 이러한 사실을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행함을 강조하지 않았기 때문에 한국교회가 이렇게 되었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그들은 구원의 조건에 믿음과 더불어 행함을 집어넣기를 주저하지 않는 것입니다. 참으로 앞으로 한국교회의 미래가 어두운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많은 목회자들을 배출하는 신학교가 이 지경이니 한국교회가 앞으로 어떻게 되겠습니까? 불 보듯 뻔한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는 시대를 분별하고, 사단의 속임수를 분별하고, 거짓복음들을 분별해 낼 수 있어야 합니다. 특히 사단은 자신을 광명한 천사로 가장하여 교회 안에 들어오기 때문에 성도들이 속기 쉬운데, 우리는 절대로 속아서는 안 될 것입니다. 바울은 8절에서 “그러나 우리나 혹 하늘로부터 온 천사라도 우리가 너희에게 전한 복음 외에 다른 복음을 전하면 저주를 받을지어다”라고 말합니다. 우리가 신구약 성경에서 천사들이 직접 와서 하나님의 메시지를 전달해주는 경우들을 많이 보는데, 어떤 경우는 천사의 빛나는 모습에 압도되어서 주님으로 착각해서 천사 앞에 엎드려 절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여러분 한번 상상해보시기 바랍니다. 그러한 영광스럽고 찬란하게 빛나는 천사가 지금 이 자리에 와서, 하나님의 말씀을 전해준다고 하면서 몇 마디 말을 말한다면 우리가 그 말을 의심 없이 하나님의 뜻으로 받아들이지 않겠습니까? 그런데 바울은 그런 빛나고 영광스러운 천사라 하더라도 다른 복음을 전하면 저주가 있을 것이라고 선언하는 것입니다. 심지어는 참된 복음을 전했던 하나님의 사도인 바울 자신이라도 나중에 노선을 바꾸어서 다른 복음을 전하면 저주가 있을 것이라고 합니다. 물론 바울이 그럴 리는 없겠습니다만, 그 정도로 다른복음은 없다는 것을 강조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복음의 진정성이라고 하는 것이 누가 그 복음을 전하는가 하는 것에 달려있는 것이 아니라 복음 그 자체에 달려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우리는 영성이 뛰어나고 의롭고 선하고, 아주 사랑이 많고, 인격적이고, 능력이 많고, 언변이 좋고, 신비한 은사와 기적을 행하는 아주 천사와 같은 사람이 무슨 말을 하면, 우리는 귀를 쫑긋 세워서 듣고, 또 그것을 의심 없이 받아들이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러나 저 같이 별로 시원치 않은 사람이 말하면 그냥 듣습니다. 여러분 절대로 복음을 그런 식으로 분별하면 안 됩니다. 물론 목회자가 영성이 뛰어나야 하고, 본이 되는 삶을 살아야 하는 책임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하고 복음을 분별하는 문제하고는 다른 것입니다. 우리는 그 전하는 사람을 보고서 복음을 판단할 것이 아니라, 그 복음의 내용을 가지고 판단해야 하는 것입니다. 어떤 내용으로 판단하는 것입니까? 우리의 구원이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은혜로 충분하다는 사실을 인정하느냐 하는 것으로 판단해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행위와 상관없이 오직 십자가의 은혜로, 오직 믿음으로 구원받는다는 것을 인정하느냐 하는 것으로 판단해야 하는 것입니다.


사단은 할 수만 있으면, 택한 사람이라도 미혹하기 위해서 자기를 천사로 가장하고 온갖 이적과 기사를 보여준다고 했습니다. 우리는 절대로 거기에 미혹되어서는 안 되고, 우리가 오늘 배운 내용을 확실히 숙지해서 그러한 이단사상들을 분별해야 합니다. 혹시 제가 그런 다른 복음을 말한다면, 여러분은 저를 가차 없이 내어 쫓아야 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목사님도 마찬가지이고, 누구든지 예외가 없습니다. 인정사정에 끌려서 타협해서는 절대로 안 됩니다. 아무리 친하고 정든 사이라도 이 점에서 차이가 날 때는 결코 양보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런 가르침들을 단호하게 물리치고, 이렇게 가르치는 사람들에게 바울과 같이 저주를 선언하고 교회에서 내어 쫓아야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런 잘못된 가르침을 주는 목사들만 쫓아낼 것이 아니라, 사실은 더 중요한 것인데, 우리 마음속에 은밀히 들어와 있는 다른복음을 즉시로 내어 쫓아야 합니다. 왜냐하면 우리도 모르게 은밀하게 다른복음이 우리 마음속에 들어와 있을 수가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모든 신앙생활의 문제는 다 여기에 해당되는 것입니다. 저는 우리교회의 문제의 본질이 여기에 있다고 생각합니다. 은혜가 없고, 기쁨이 없고, 감사가 없고, 냉냉하고, 영적 침체에 있고, 절망과 좌절감을 느끼고 하는 모든 신앙의 문제가 다 이것과 연관되어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 자신을 깊이 돌아보아 점검하고, 만일 내가 은혜에서 떨어져 있으면 속히 이 은혜의 복음으로 다시 돌아가서, 회개하고 참회하는 마음으로 처음 예수님을 믿고 영접했을 그 때로 돌아가서 그 은혜의 복음 위에 굳게 서야 하는 것입니다. 기쁨과 감격과 은혜와 감사를 회복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것조차도 우리의 힘으로 할 수 없는 것입니다. 주님께서 은혜를 주셔야 우리가 처음 은혜로 돌아올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열심히 은혜의 방도를 부지런히 사용하는 가운데 이 성령님의 새롭게 하시는 역사를 사모함으로 기다려야 하는 것입니다. 주님께서 은혜를 주셔서 우리로 처음 주님을 만났던 그 은혜와 감격을 회복시켜주시고, 처음 그 복음위에 굳게 세워주시기를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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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5 갈라디아서 서론(1)-갈라디아서 구조분석과 핵심 메시지 file 최상범 2011-05-25 3145
184 예배에 대하여! file 1681
183 예배에 있어서 축도의 의미 file 1891
182 예배에 있어서 찬송의 의미(2) file 1370
181 예배에 있어서 찬송의 의미(1) file 1548
180 사도신경 12강(몸이 다시 사는 것과 ---) file 1707
179 사도신경 11강(죄를 사하여 주시는 것과) file 1820
178 사도신경 10강 보충강의(진정한 친교의 실제) file 1629
177 사도신경 10강(성도가 서로 교통하는 것과) file 1775
176 사도신경 9강(거룩한 공회와) file 1743
175 사도신경 8강(성령을 믿사오며) file 18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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