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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 최상범
성경본문 갈 2:19-20
성경본문내용 (19)내가 율법으로 말미암아 율법을 향하여 죽었나니 이는 하나님을 향하여 살려 함이니라(20)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몸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
강설날짜 2011-08-24

2011년 8월 24일 한결교회 수요모임 강설

갈라디아서 제12강

 

내가 산 것이 아니요

 

말씀 : 갈 2:19-20

이 구절은 우리가 가장 즐겨 읽는 말씀이고, 좋아하는 성구 중 하나입니다. 그러나 이 구절은 단순히 은혜만 되는 구절이 아니라, 사실은 바울의 신학에 있어서 아주 중요한 내용을 담고 있는 구절입니다. 어떻게 보면 바울신학의 핵심을 요약적으로 제시해주는 구절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이 구절의 의미와 관련해서 우리가 배울 내용이 참 많습니다. 지난 시간에 다 살펴보지 못했기 때문에 오늘 한 번 더 이 말씀의 의미를 살펴보고자 합니다.


지난 시간에 배운 내용은 이 구절이 바로 칭의와 성화의 관계를 보여준다고 하였습니다. 바울이 율법 없는 복음을 전할 때마다 부딪친 반대가 무엇이냐 하면, “오직 예수님을 믿음으로 구원 받는다고 한다면, 오직 은혜로 구원받는다고 한다면, 굳이 애써가면서 율법을 순종할 필요가 뭐가 있느냐, 바울 당신의 가르침은 사람으로 하여금 율법 없이 자기 마음대로 죄 짓고 살도록 조장하는 것이 아니냐? 사람으로 하여금 방종과 방탕의 삶을 살도록 부추기는 것 아니냐?”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율법에 대하여 죽은, 그래서 율법으로부터 해방된 신자가 왜 자신이 가진 자유를 육체의 기회로 악용할 수 없는지 그 이유를 바로 이 구절에서 서술하고 있는 것입니다. 19절에 보면 “내가 율법으로 말미암아 율법을 향하여 죽었나니 이는 하나님을 향하여 살려 함이니라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박혔나니”라고 했습니다. 그 이유는 내가 주님과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단순히 나대신 십자가에서 주님 홀로 죽어주셔서 우리를 율법에서 자유하게 하시고 죄와 심판에서 구원해 주신 것이 아니라, 나도 주님과 함께 못 박혀 죽었다라고 하는, “주님과 나와의 연합”이라고 하는 놀라운 은혜 때문에 그렇다 라는 것입니다.


이런 일이 어떻게 일어나느냐 하면, 우리가 예수님을 처음 믿게 될 때에, 성령님께서 비상한 은혜를 베풀어주셔서, 우리를 2000년 전의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 안으로 넣어주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십자가에 달리신 주님이 나와 동일시되어지고, 그래서 내가 주님의 십자가 죽음에 함께 참예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를 통해서 신자는 두 가지를 경험합니다. 첫째는 십자가에 쏟아 내려지는 하나님의 무서운 진노와 심판으로 인해 고통하시는 예수님의 고통을 우리가 공유함으로써, 우리는 하나님이 죄를 얼마나 미워하시는지, 죄에 대해서 얼마나 철저하게 심판하시고 형벌하시는지, 그 하나님의 절대적인 공의를 알게 됩니다. 그리고 죄 없으신 우리 구주를 십자가에 죽게 한 자신의 죄 된 행실들, 배은망덕한 행위들을 후회하고, 애통하며 회개하게 되고, 그와 아울러서 죄에 대한 혐오와 미움을 갖게 됩니다. 그리고 두 번째로 신자가 주님과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혀 죽음으로 경험하는 것은 이런 무서운 진노와 심판에서 나를 구원하시기 위해 십자가에서 고통당하시고, 물과 피를 다 쏟으신 주님의 희생의 사랑을 경험합니다. 벌레 같은 날 위해 십자가 지신 주님의 사랑을 깨닫게 됩니다. 오늘 말씀처럼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해서 자기 몸을 버리신 그 주님의 지극한 사랑’ 앞에서 우리는 더 이상 가만히 있을 수 없는 자리에 이르게 되는 것입니다. 이제 ‘율법에서 벗어났으니, 그리고 더 이상 형벌이 없으니, 이제부터는 내 마음대로 살겠다’ 그런 생각을 여기서는 도무지 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나 같은 죄인 살리신 주님의 사랑 앞에서 우리의 인격은 감사와 사랑으로 반응할 수밖에 없고, 죄를 미워하고 혐오하는 것으로 반응할 수밖에 없고, 이제는 주님을 믿고 사랑하며, 이 주님만을 위해 목숨을 바쳐 충성하는 새로운 삶으로 거듭나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주님의 십자가의 복음의 능력입니다. 한 사람의 인생을 삶을 송두리째 변화시키는 복음의 능력인 것입니다.


이러한 신자의 인격의 반응과 변화를 바로 20절이 서술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제 내가 산 것이 아니요. 오직 그리스도께서 내 안에 사신 것이라”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이제 내가 산 것이 아니다” 하는 말의 의미가 이해가 되십니까? 그리고 “오직 그리스도께서 내 안에 사신다”는 말이 공감이 가십니까? 굉장히 어렵고 심오한 말입니다. “주님과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혀 죽었다”는 말도 그러한 경험을 해본 자가 아니면 결코 이해할 수 없는 심오한 말인데, “이제 내가 산 것이 아니라”는 말은 더욱 더 이해하기 어려운 심오한 말씀인 것입니다. ‘아니 내가 버젓이 살아있는데, 왜 내가 산 것이 아니라고 말하는가?’하는 질문을 계속하게 됩니다. 이 말씀은 정말 중생해서 거듭난 신자가 아니고서는 이해할 수도 없고, 또 아무리 제가 잘 설명해도 중생한 자가 아니면 깨달아 알 수 없는 그런 신령한 세계에 속한 경험입니다. 그리고 중생하고 거듭난 신자라도 정말 의의 말씀으로 연단 받아 장성하고 성숙하여 신령한 자가 되지 아니하고서는 그 깊이를 다 이해할 수 없는 그런 심오한 말씀입니다. 제가 이 말씀의 의미를 알기 위해서 주석 책을 많이 찾아보고, 묵상도 많이 해보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의 얕은 믿음으로는 이것이 무슨 말인지 조금은 알 것 같으면서도, 여전히 이해가 되지 않는, 그런 심오하고 깊은 말씀임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부족하지만, 함께 이 말씀의 의미를 살펴보는 가운데, 이 말씀의 의미를 깊이 깨닫게 하시는 성령님의 은혜가 저와 여러분에게 있기를 간절히 기도합니다.


우선 ‘이제 내가 산 것이 아니라’는 말을 원문으로 직역해보면 ‘내가 사는 것은 더 이상 내가 아니다’라고 되어 있습니다. 소위 ‘내가 웃는 게 웃는 게 아니야, 내가 걷는 게 걷는 게 아니야’라는 어떤 가요의 가사처럼 굉장히 역설적인 표현입니다. 내가 살지만, 더 이상 사는 것은 내가 아니라고 말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누가 사느냐 하면, 바로 그리스도께서 사신다는 것입니다. 이 말을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우선 이 말 앞에 있는 ‘그런즉’에 주목해야 합니다. 왜 내가 사는 것이 더 이상 내가 아니고,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냐 하면, 바로 나는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혀 죽었기 때문입니다. 내가 죽었기 때문에 더 이상 내가 산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여기서 죽은 ‘나’는 옛사람을 의미합니다. 옛사람이란 주님 믿기 전의 ‘나 전체’를 말합니다. 즉 예수님을 믿기 전에 하나님을 대적하고, 이 세상에서 자기 마음대로 살면서 허랑방탕한 인생을 살던 예전의 나를 말하는 것입니다. 죄와 더러움과 온갖 추한 것들로 얼룩져 있는, 그래서 율법의 저주 아래서 비참한 삶을 살다가 결국 심판받아 멸망할 수밖에 없는, 이 옛날의 ‘나 자신’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렇게 자기 마음대로 살다가 말씀 앞에서 회개하고 예수님을 믿게 되어졌을 때에, 바로 성령님의 비상한 은혜 가운데 이 옛사람이 예수님의 십자가 안에서 함께 못 박혀 죽는 것입니다. 나의 옛사람이 주님의 십자가 안에서 하나님의 형벌을 받아 죽은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제 옛사람은 끝났습니다. 이제 옛사람은 나와 아무 상관이 없는 것입니다. 신자는 한 마디로 하면 옛사람과 단절된 사람입니다. 이러한 옛사람과의 단절에 대해서 바울은 갈라디아서 다른 곳에서 이렇게 표현하였습니다. “그리스도 예수의 사람들은 육체와 함께 그 정과 욕심을 십자가에 못박았느니라”(갈 5:24) 육체는 옛사람을 말하고, 정과 욕심은 옛사람의 대표적인 행위를 말합니다. 이렇게 예수님과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혀 죽은 신자는 과거의 옛사람이 예수님과 함께 죽어서 없어져버렸기 때문에, 다른 말로 옛날의 나와는 완전히 단절되었기 때문에, 내가 사는 것은 더 이상 옛날의 나 자신이 아니라고 오늘 본문은 지금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내가 사는 것이 더 이상 내가 아니라면, 누가 사는 것입니까? “오직 그리스도께서 내 안에 사신다”고 말씀합니다. 내가 사는 것이 아니라 주님이 사신다는 것은 어떤 상태를 말하는 것입니까? 어떤 사람들은 이것을 마치 귀신 들린 상태와 비슷한 것으로 오해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내 인격과 내 영혼이 없어지고, 주님이 이제 내 안에 들어와 나를 조종하시는 것처럼 이해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옛날의 내가 죽어 없어졌다는 말은 내 인격, 내 영혼이 없어졌다는 말이 아닙니다. 그것은 결론적으로 말하면 삶을 지배하고 다스리는 주체가 바뀌었다는 것을 말해주는 것입니다.


이것을 보다 잘 이해하기 위해서는 로마서 6장을 찾아서 읽어보겠습니다. 로마서 6장 1-2절을 보시면... “그런즉 우리가 무슨 말 하리요 은혜를 더하게 하려고 죄에 거하겠느뇨 그럴 수 없느니라 죄에 대하여 죽은 우리가 어찌 그 가운데 더 살리요”라고 말씀합니다. 지금 이 말씀 앞에까지 바울은 이신칭의에 대해서 설명했습니다. 율법의 행함이 아닌 오직 은혜로, 오직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얻는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갈라디아서와 마찬가지로 동일한 반발이 있는 것입니다. ‘은혜 아래 있기 때문에 이제 죄를 마음대로 범하고 살아도 구원받는 것은 지장 없는 것 아니냐’ 하고 반발하는 것입니다. 바울은 결코 그럴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무엇을 말하느냐 하면, 갈라디아서와 동일하게 그리스도와의 연합을 말합니다. 이것이 중요합니다. 칭의와 성화의 연결점이 바로 이 그리스도와의 연합이다 하는 사실이 여기서도 다시 한 번 확인하는 것입니다. 3-4절 “무릇 그리스도 예수와 합하여 세례를 받은 우리는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세례 받은 줄을 알지 못하느뇨 그러므로 우리가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세례를 받음으로 그와 함께 장사되었나니 이는 아버지의 영광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심과 같이 우리로 또한 새 생명 가운데서 행하게 하려 함이니라” 우리가 주님과 연합하여 함께 죽고 함께 살아나는데, 무엇으로 살아나느냐 하면 새생명 가운데로 살아나게 된다는 것입니다. 즉 신자는 그분의 죽으심뿐만 아니라 그분의 부활하심에도 참예해서 이제는 하나님의 새생명으로 새롭게 부활해서, 그 생명으로 산다는 것입니다. 이 새생명은 명백하게 그리스도의 생명입니다. 왜냐하면 바울이 “내가 사는 것은 더 이상 내가 아니라 그리스도께서 사신다”고 말하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께서 내 안에 사신다는 것은 이제 이 그리스도의 생명 안에서 그와 더불어 사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뒤집어 말하면, 그리스도께서 자신의 생명을 신자에게 주심으로써 이제 신자 속에 그리스도 자신의 삶을 사시는 것입니다. 이 말이 이해가 되십니까? 예를 들어서 한 가지와 한 나무를 생각해보십시오. 맨 처음 이 가지는 나무와 떨어져 있었습니다. 각기 생명이 따로 있는 것입니다. 물론 가지 자체는 생명이 있다고 말할 수 없습니다. 죽어가고 있는 생명이 있을 뿐입니다. 그러나 이 가지가 이 나무에 접붙여졌을 때, 우리는 이것을 일컬어서 두 생명이라고 말하지 않고, 한 나무라는 한 생명으로 취급합니다. 이 가지 자체에 생명이 있는 것이 아니라, 나무로부터 생명이라는 것을 분여 받아서 한 생명으로 존재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제 이 가지는 이 나무의 생명으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즉 이 나무와 연합하여 이 나무로부터 모든 생명의 필요한 영양분을 공급받아서 옛날의 가지의 삶을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새롭게 연합한 이 나무의 일부로서 이 나무의 삶을 살아가는 것입니다. 옛날 가지로 있을 때 맺었던 나쁜 열매를 맺는 것이 아니라, 이제 이 나무의 열매, 곧 거룩한 열매를 맺게 되는 것입니다. ‘이제 내가 사는 것은 더 이상 내가 아니라,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는 말씀의 의미가 바로 이것입니다. 이제 지금의 나의 존재, 나의 삶, 나의 생명은 주님 없이는 정의될 수 없는 그런 것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예전에 나는 주님과 따로 존재했었고, 내가 내 삶의 주인이 되어서 나의 삶을 살아갔는데, 내가 예수님을 믿음으로 그런 나는 죽어 없어졌고, 이제는 주님의 생명 안에서만 내가 발견되고 정의될 수 있는 내가 되어서, 주님의 삶을 이 땅에 살아드리는 내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이제 내가 살아야 할 삶은 주님과 연합하여 주님의 몸의 한 부분이요 지체로서의 삶을 살아가야 하는 것입니다. 이전에 내 마음대로 살고, 내 뜻대로 살던 옛사람은 죽었고, 주님 안에서 가지게 된 새생명 가운데 행해야 하는 것입니다. 즉 주님께서 내 삶의 주인이 되셔서 나를 통치하시고, 나는 그분의 통치에 순종하여 주님의 뜻을 이루는 삶을 살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이것을 억지로나, 강제로 그렇게 하는 것이 아니라, 주님의 십자가에 함께 못박힘으로써 주님의 그 은혜와 사랑을 깨달아 알게 되었을 때, 그 사랑에 우리의 인격이 반응해서 사랑함과 감사와 기쁨으로 주님의 통치를 받아 주님의 삶을 살게 되고, 주님의 열매를 맺어드리는 삶을 살게 된다는 것입니다.


6절을 보십시오. “우리가 알거니와 우리 옛 사람이 예수와 함께 십자가에 못박힌 것은 죄의 몸이 멸하여 다시는 우리가 죄에게 종노릇 하지 아니하려 함이니” 주님과의 연합의 목적이 무엇이냐 하면 더 이상 옛사람처럼 죄의 종노릇하며 살지 않도록 하기 위함이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17,18절에서 의의 종으로 산다는 것으로 표현 됩니다. 그리고 이것은 22절에서 “하나님께 종이 되어 거룩함에 이르는 열매를 얻었으니”라는 말로 다시 표현됩니다.


그래서 바울이 오늘 본문을 통해서 궁극적으로 말하고자 하는 바가 무엇입니까? 그것은 율법 없는 복음, 오직 믿음으로, 오직 은혜로의 복음이 도덕률폐기론으로 갈 수 없는 이유가 바로 우리가 주님과 함께 죽고 살았으며, 이제 내가 사는 것이 내가 아니라, 주님과 연합하여 주님의 생명으로 사는 것이기 때문에 그렇다는 것입니다. 오직 은혜로 구원받은 신자는 방종이나 방탕으로 나가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주님의 사랑의 통치를 받으며 거룩한 정결한 열매를 맺는 삶으로 나아간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울 복음의 핵심이요 진수입니다. 그리고 바울은 이러한 사상을 ‘그리스도 안에서’라는 말로 요약하여 진술합니다. 우리가 바울 서신을 읽으면 계속해서 반복되는 말이 ‘그리스도 안에서’,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라는 말인데, 우리가 이런 말을 그냥 쉽게 넘어가면 안 됩니다. 이 ‘그리스도 안에서’라는 그 짧은 말 속에는 사실 오늘 우리가 배운 모든 내용이 다 함축적으로 들어가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에게 있어서 이 그리스도와의 연합이라는 사상은 대단히 중요한 것입니다. “내가 주님과 함께 죽고 살았다, 이제 내가 산 것이 아니고, 주님이 내 안에 사신다.”라는 고백은 우리의 신앙생활의 근본을 이루는 것입니다. 그것은 우리 신자 스스로가 가져야 할 가장 중요한 자기 정체성이요, 또한 우리가 이 고백의 바탕위에 살아야 할 우리의 신앙고백의 정수입니다. 이 시간 우리 자신을 돌아보십시다. 여러분은 이런 고백의 의미를 깨닫고, 이 고백을 따라서 자신의 삶을 살아가고 있습니까? 여러분 안에는 누가 사십니까? 여전히 예수님 믿기 전처럼 내 마음대로, 내 고집대로, 내 욕심대로 사는 내가 살고 있습니까? 아니면 예수님이 여러분 안에 사셔서 교회의 몸 된 지체로서 주님의 통치를 받는 새로운 삶을 살아가고 있습니까? 우리는 이 시간 우리 자신을 깊이 돌아보아야 합니다. 만일 우리가 이런 삶을 살아가지 못하고 있다면 우리는 우리의 신앙에 대해서 심각하게 고민해야 합니다.


첫째는 내가 과연 주님과 함께 죽고 살아나는 중생의 체험을 한 자냐 하는 것에 대해서 의심해보아야 합니다. 나는 당연히 중생했겠지 생각하지 마시고, 오늘 본문의 말씀을 생각하며 우리 자신을 진지하게 돌아보아야 합니다.

“(5)너희가 믿음에 있는가 너희 자신을 시험하고 너희 자신을 확증하라 예수 그리스도께서 너희 안에 계신 줄을 너희가 스스로 알지 못하느냐 그렇지 않으면 너희가 버리운 자니라”(고후 13:5)

여러분은 정말 바울처럼 주님과 함께 내 옛사람이 죽고 주님의 새생명으로 새롭게 태어나는 체험을 하셨습니까? 주님의 죽으심에 참예함으로써 그 주님의 사랑을 깨닫고 나의 인격이 감사와 사랑과 기쁨으로 반응하였습니까? 정말 여러분들 마음에 내가 사는 것이 아니라 주님이 사시는 것을 깨닫습니까? 우리는 진지하게 우리 자신을 점검해야 합니다. 혹시 이런 분이 없기를 바랍니다. 이러한 주님과 함께 죽고 산 경험이 없으면서 단순히 어떤 신비한 체험을 한 것으로 자신을 믿는 자라고 착각하는 사람이 없기를 바랍니다. 그냥 말씀 듣고 감동받아서 눈물을 흘린 적이 있다고 해서 내가 믿는 자라고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그냥 교회 다니고, 복음의 교리를 잘 안다고 해서 자신을 믿는 자라고 착각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제가 단언하건데, 자신이 주님을 처음 만나고, 주님을 믿었을 때 경험한 체험이 주님과 함께 죽고 산 체험이 아니라고 한다면, 그 어떠한 다른 감동적이고 신비한 체험을 했다 하더라도 그 사람은 중생한 자가 아닙니다. 중생하지 아니했다면 그 결과는 무시무시한 것입니다. 우리는 우리 자신을 진지하게 돌아보아야 합니다. 그리고 만일 나에게 이런 경험이 없다면, 우리는 겸손하게 이 중생의 은혜를 간절히 구해야 합니다.


두 번째로 내가 참으로 주님과 함께 죽고 살아난 중생한 신자인데도, 주님과 연합하여 있으면서도 주님의 통치를 받지 않고, 삶에 거룩한 열매가 나타나지 않는 경우가 있을 수 있습니다. 소아마비를 생각해보십시오. 온 몸이 그의 머리에 붙어있지만, 그러나 머리가 시키는 대로 몸이 움직여주지를 않습니다. 그것은 심각한 장애요 질병인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중생해서 주님과 연합하여 있지만, 주님께서 그 안에 사시지만, 그러나 주님의 통치를 받지 않음으로 인해서, 주님을 근심하게 하는 신앙생활을 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것은 영적으로 심각한 장애요 질병입니다. 그런데 제가 계속 드는 생각은 이것이 저와 여러분을 포함한 한국교회 대부분의 성도들의 영적인 상태라는 것입니다. 여러분들도 지금 우리 교회가 뭔가 문제가 있다고 느끼지 않습니까?


오늘날 한국교회의 가장 큰 문제점이 무엇이냐 물어보면 누구나 당연히 교회의 세속화를 말할 것입니다. 복음의 진리를 알지만, 그러나 삶이 따라주지 않는 그런 모습, 경건의 모양은 있지만, 경건의 능력을 부인하는 모습이 오늘날 우리 교회를 포함한 한국교회의 현실입니다. 김남준 목사님은 교회 성도들을 책망하면서 그 죄목들을 이렇게 지적한 적이 있습니다. “배도에 가까운 영적인 태만, 게으름, 말씀 강설 시간에 졸며 집중하지 않음, 마음에 기름기가 가득하고 심령의 얼굴에 개기름이 흐름, 무엇도 하나님께 부족함이 없는 배짱만 남은 신앙, 부주의한 예배생활, 마음을 쏟지 않는 기도생활, 세속의 감정으로 가득한 상태” 이렇게 지적했습니다. 그러나 이 모습이 솔직하게 우리의 모습이지 않습니까?


그러면 그렇게 된 원인이 무엇입니까? 그것은 한 가지입니다. 우리의 모든 신앙의 문제는 바로 그리스도의 십자가에 나타난 주님의 그 크신 사랑을 잊어버렸다는 것에 있습니다. 물론 우리가 복음의 내용을 잊어먹어서 까먹어서 그런 것이 아닙니다. 한국교회에서 십자가 복음을 말하지 않는 교회가 어디 있습니까? 우리 교회에서도 말씀 강설 속에서, 얼마나 자주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대신하여 죽어주셨고, 우리 죄를 사하시고, 우리를 은혜로 구원해주셨다는 복음의 진리가 계속해서 선포되고 있습니까? 몰라서 그런 것이 아니라, 문제는 십자가 복음이 우리의 인격으로 반응하게 하고, 우리의 영혼과 삶을 변화시키는 그런 능력의 복음으로 우리 마음 깊숙이까지 역사하지 않는다는 것이 문제인 것입니다. 몰라서 그런 것이 아니라 복음에 대한 감격과 감사를 잃어버렸기 때문입니다. 인격의 반응이 없이, 무덤덤하게 그저 복음과 관련된 단어들을 무의미하게 반복할 뿐인 것입니다. 그것을 가르칠 때나 배울 때나 우리가 그렇게 무인격적으로 무감각한 마음으로 복음을 생각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런 복음의 가르침에 우리의 귀가 닳고 닳아서, 우리의 마음이 닳고 닳아서 이제는 복음을 말하고 들을 때 아무런 감사의 감정이나 사랑의 감정이 일어나지 않는 것입니다. 옛날에는 십자가의 ‘십’자만 들어도 눈에서 눈물이 흘렀는데, 이제는 아무런 마음의 동요도 없는 것입니다. 십자가 사랑을 잊어버린 이것이 우리교회 한국교회의 본질적인 문제입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오늘 말씀을 준비하면서 저 자신이 복음을 가르칠 때, 얼마나 자주 무덤덤하게 복음을 외칠 때가 많았는지 돌아보게 되었습니다. 주님의 십자가 복음은 그냥 무덤덤한 마음으로 말할 수 있는 것이 아닌데, 많이 들었다고 식상해질 수 있는 것도 아닌데, 저 자신이 그런 은혜를 잊어버려서, 말씀을 강설할 때도 그저 무덤덤하게 복음에 관한 단어들을 무의미하게 반복할 때가 많았음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정말 자신의 배은망덕한 삶을 회개하고 참으로 주님의 사랑을 회복해야 되겠다는 간절한 소망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여러분 우리가 기억해야 할 것은 주님께서 십자가에서 대신 죽어주신 그 희생의 사랑은 말로 형용할 수 없을 만큼 놀라운 사랑이고, 누구라도 이 사랑을 깨닫게 되면 그 삶이 변하지 않을 수 없는 그런 능력의 복음이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십자가 사랑 한 가지를 잃어버리면 모든 것을 잃어버리는 것입니다. 우리의 모든 영적인 문제들을 야기하는 것입니다. 마음속에 감사와 은혜가 없으면 모든 신앙 활동은 무거운 노동일 뿐입니다. 하나님의 명령과 뜻은 다 부담스러운 것으로 들릴 수밖에 없습니다. 내가 그렇게 살고 싶고, 그렇게 살려고 노력하지만, 실패할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는 부주의한 예배생활을 할 수밖에 없습니다. 기도에 마음을 쏟을 수가 없습니다. 형제를 미워할 수밖에 없고 형제의 허물이 용서가 되지 않습니다. 나도 모르는 사이에 우리의 마음속에는 세속적인 감정들로 가득해지고, 더럽고 추한 죄들로 우리의 삶이 얼룩질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우리가 또한 기억해야 할 것은 한때는 그런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건을 경험해서 뜨거움이 있었지만, 나중에 그 경험을 잃어버리고 차갑게 식어버렸을 때는 그것을 다시 회복하는 것이 매우 어려워진다는 것입니다. 쇠가 시뻘겋게 달아올랐다 식은 쇠는 그런 적이 없는 쇠보다 훨씬 단단해집니다. 한번 은혜를 알고 뒤로 물러간 사람은 돌멩이같이 더 굳게 마련입니다. 솔직히 우리의 영적인 상태가 이런 상태가 아닙니까? 우리는 얼마나 영적으로 위험한 상태에 있는지 그 사태를 바로 직시할 필요가 있습니다.


우리가 오직 살 길은 다시금 주님의 사랑의 통치 아래로 들어가는 것뿐입니다.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니 저가 내 안에, 내가 저 안에 있으면 이 사람은 과실을 많이 맺나니 나를 떠나서는 너희가 아무 것도 할 수 없음이라”(요 15:5) 여기서 내 안에 거한다는 말은 주님의 사랑 안에 거한다는 말입니다(9절). 즉 주님의 십자가 사랑 안에 거한다는 말입니다. 우리는 이 주님을 벗어나서는 존재할 수도 없고, 살 수도 없는 존재입니다. 오직 주님 안에서 주님의 사랑의 통치를 받을 때만 우리는 우리의 생명을 참으로 영위할 수 있고, 또한 거룩한 열매를 맺는 삶을 살아갈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주님의 십자가 사랑을 다시금 깊이 내 마음에 회복해서 그 사랑의 통치 아래로 들어가야 합니다. 그렇게 하려면 우리는 처음 주님을 만났던 장소로 돌아가야 합니다. 처음 주님을 만나 회심했을 때, 주님의 십자가에서 함께 죽고 살았던 그 체험으로 다시 돌아가야 하는 것입니다.


“내가 예수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에서 ‘못 박혔다’는 동사의 시제는 완료형 수동태로 되어있습니다. 수동태는 내 스스로의 힘으로 못 박힐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오직 성령님의 주권적인 은혜에 의해서만 못 박혀질 수 있다는 것을 말해줍니다. 그리고 완료시제라는 것은 그것이 이미 과거에 단회적으로 발생했고, 다시 반복될 수 없는 사건임을 말해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주님과 연합하여 거듭났다면, 주님과 함께 죽고 살았다면, 우리는 이미 옛사람이 아닌, 새사람이 된 것입니다. 다시 옛사람이 살아나서 또 옛사람을 죽여야 하는 경험이 필요가 없는 것입니다. 신자의 정체성이란 나무에 접붙임바 된 가지처럼 주님과 연합하여서 주님과 생명을 공유하고, 주님의 통치를 받아 주님의 열매를 맺어드리는 새생 가운데 사는 새사람이라는 것입니다. 그것이 신자의 변할 수 없는 정체성입니다.


그러나 문제는 신자 안에 여전히 죄성이 남아있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이 세상에 사는 한, 이 육체 가운데 거하는 한, 죄의 영향에서 우리는 전적으로 자유롭지 못하는 것입니다. 옛사람이 죽었지만, 여전히 잔재가 남아 있습니다. 정과 욕심을 십자가에 못 박았지만, 그래서 그 뿌리를 없앴지만, 여전히 정욕의 이파리들이 남아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남아있는 죄가 우리를 유혹해서 끊임없이 주님의 사랑을 잊어버리게 만들고, 주님의 통치를 받아서 주님의 삶을 살아야 할 우리가, 과거 옛사람이 그러했던 것처럼 죄의 정욕을 따라 자기 마음대로 살아가도록 역사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과 연합한 신자라도 ‘이제 내가 사는 것은 내가 아니요’ 라고 고백하지 못하고, 내가 삶에 주인이 되어 나의 인생을 살 때가 많은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지금 어떤 상황입니까? 제가 자주 드는 예인데, 개구리를 사람으로 변화시켜주셨으면, 사람으로서 밥을 먹어야지, 개구리적 시절을 못 잊고 자꾸 파리를 좇아 다니는 격이 되는 것입니다. 사람이 파리를 먹는 것은 너무나 그 정체성에 어울리지 않는 더럽고 추한 행동입니다. 마찬가지로 주님과 함께 이미 죽고 살아서 새사람이 된 신자가 여전히 옛사람의 행실을 따라, 세상 정욕을 따라 자기 마음대로 살아가는 것은 그 자신의 새롭게 된 신분에 전혀 어울리지 않는 행동이 되고 마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런 배은망덕한 죄된 삶에서 돌이켜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우리의 죄성으로 인해서 자주 이 십자가의 은혜에서 떨어지기 때문에 계속해서 다시금 이 은혜가 우리 안에서 재현되어야만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완료시제의 두 번째 측면이 중요한 것입니다. 완료시제는 과거의 단회적 사건을 말할 때 쓰이지만, 단순히 과거의 일어난 사건에만 초점을 맞추는 것이 아니라, 그것이 현재까지 지속적으로 의미를 주고 영향을 주고 있을 때에 사용하는 시제입니다. 즉 이 과거의 회심체험이 우리의 매일의 삶속에 계속해서 의미를 주고 우리에게 영향을 미쳐야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 마음속에서 끊임없이 되새겨지고, 재현되어져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날마다 주님과의 처음 만났던 그 장소로 가야 하는 것입니다. 주님을 만나서 주님과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히고 다시 살아난 그 은혜로 돌아가야 하는 것입니다. 날마다 말씀 읽고 배우고 묵상하기를 힘쓰면서, 간절하게 이 은혜를 기도하며 구해야 합니다. 그렇게 간절한 마음으로 진실한 마음으로 주님께 간구하고 기도하면 주님은 반드시 우리의 기도에 응답해주십니다. 그래서 그렇게 주님의 은혜가 임할 때 우리는 “내가 주님과 함께 이미 죽고 살았구나” 하는 것을 다시금 확인하여 깨닫게 되어지고, 그 안에 놀라운 사랑과 은혜를 다시금 깨닫게 되고, 거기에 우리의 인격이 반응하게 되고, 그리하여 구원에 대한 감사와 감격이 회복되어지는 것입니다. 그리고 동시적으로 우리에게 너무나 큰 고통이었던 우리 마음속에 있던 죄성이 나도 모르는 사이에 죽어진 것을 발견하게 되고, 주님이 주시는 힘으로 이 죄와 싸워 이기며, 그리하여 주님의 사랑의 통치 아래서 순종하는 삶을 살아갈 수 있게 되어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나의 인생, 나의 삶이 아닌 주님의 인생, 주님의 삶을 살아드리는 그런 새생명 가운데 행하는 삶을 살게 되는 것입니다.


주님께서 은혜를 주셔서 우리로 이 주님의 십자가 사랑을 다시금 뜨겁게 회복해주시기를 간절히 기도합니다. 그리하여 내가 내 삶의 주인으로 사는 것이 아니라, 주님께서 사시는 그러한 열매 맺는 삶을 사는 자들이 다 되게 하여주시기를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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