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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년 야고보서 공부
                                                       말의 실수가 없으면
말씀:야고보서 3:1-12

 

오늘부터 우리는 야고보서 3장을 공부하겠습니다. 3장은 ‘말에 대한 충고’(1-12)와 ‘두 가지 지혜’(13-18)에 대해서 말씀하고 있습니다. 3장에서 야고보의 논리는 2장의 주장 즉 “믿음은 행함으로 나타나야 한다”에 연결 되어 있습니다. 말은 참된 지혜에서 나와야 하며, 교회에 긍정적인 결과들로 나타나야 한다는 것입니다. 야고보는 이와 같은 결과들을 교회 안의 평화, 혹은 의의 열매란 단어로 요약하고 있습니다. 이런 긍정적인 결과를 만들어내지 못하는 사람들은 교회에서 선생이 되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3장 말씀을 살펴보는 가운데 말의 중요성에 대해서 배울 수 있기를 바랍니다.

 

오늘 본문에서 야고보는 선생이 되지 말라고 경고하며, 말의 영향력을 말의 재갈과 배의 키와 모든 나무를 태워버리는 불을 예로 들어 설명하고 있습니다. 1절에 보면 “내 형제들아 너희는 선생된 우리가 더 큰 심판 받을 줄을 알고 많이 선생이 되지 말라”고 합니다. 야고보는 자신을 선생이라고 하면서 형제들에게 선생 된 자가 더 큰 심판을 받기 때문에 많이 선생이 되지 말라고 합니다. 야고보가 이런 말을 하는 것은 그 당시 야고보가 속해 있던 공동체에서 선생이 되고자 하는 자들이 많았던 것 같습니다. 또한 이들로 인해 문제가 많았던 것 같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이 말을 경고로 받아들여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아무도 선생이 되지 말하는 것으로 오해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상한 결과를 나타내게 됩니다. 8절에 보면 “혀는 능히 길들일 사람이 없나니 쉬지 아니하는 악이요, 죽이는 독이 가득한 것이라”고 했습니다. 이처럼 혀를 길들이기 힘들기 때문에 경고로 말씀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선생이 된다는 것은 교회에서 주일학교 교사나 팀 리더가 되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말씀을 전문적으로 가르치는 자 곧 목사를 말하는 것입니다. 목사의 기본적인 임무는 말씀을 가르치는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치는 일은 어려운 일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바르게 가르쳐 나가는 목사가 늘 필요한 만큼 있어야 합니다. 왜냐하면 그래야 하나님의 교회가 바르게 세워져 갈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너희는 선생된 우리가 더 큰 심판 받을 줄을 알고 많이 선생이 되지 말라”는 이 말씀을 오해하여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치는 은사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목사가 되지 않고자 한다면 큰 일입니다. 그렇게 되면 교회에 하나님의 말씀을 바르게 가르쳐 나가는 일에 문제가 생기는 것입니다. 이와 반대로 말씀을 제대로 가르칠 능력이 없는데도 불구하고 누구나 목사가 되고자 한다면 이것은 더 큰 문제입니다. 말씀을 바르게 가르치지 못할 때 그 교회는 세속화 되거나 타락하게 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바르게 가르쳐 나갈 자를 세워주시도록 기도해야 합니다. 우리 시대의 교회를 위해서 뿐만 아니라 다음 세대의 교회를 위해서도 하나님의 말씀을 바르게 가르쳐 나갈 목사를 세워주시도록 기도해야 하는 것입니다.

 

야고보 당시에는 가르치는 자가 되고자 하는 자들이 많았던 것 같습니다. 왜 가르치려고 하는 자들이 많았을까요? 유대사회에서 선생은 아주 존경받는 사람입니다. 그래서 선생을 랍비라고 부릅니다. 랍비는 문자적으로 ‘나의 큰 자’라는 뜻을 가지고 있는데 실제로는 ‘선생님!’하고 부르는 말입니다. 율법 전문가이자 선생인 서기관을 존경하는 뜻으로 부를 때 사용하였습니다. 그러니 단지 선생이라는 뜻만이 아니라 아주 존경을 담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유대사회에서는 사람이 이 세상에 태어나기 위해서는 부모가 필요하지만 다음 세상에 들어가기 위해서는 선생의 도움이 필요하다고 여겼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랍비를 더욱 존경한 것입니다. 디모데전서 5:17절을 보면 “잘 다스리는 장로들을 배나 존경할 자로 알되 말씀과 가르침에 수고하는 이들을 더할 것이니라”고 했습니다. 이처럼 선생이 존경받기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선생이 되고자 한 것입니다.

 

그런데 교회에 이렇게 가르치는 선생이 많으면 좋을 텐데 왜 선생이 되지 말라고 하는 것입니까? 1절을 다시 보면 “너희는 선생된 우리가 더 큰 심판 받을 줄을 알고 많이 선생이 되지 말라”고 했습니다. 선생된 자가 더 큰 심판을 받기 때문입니다. 2절에 보면 “우리가 다 실수가 많으니 만일 말에 실수가 없는 자면 곧 온전한 사람이라 능히 온 몸도 굴레 씌우리라”고 했습니다. 사람이면 누구나 실수를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러나 가르치는 자의 실수는 더 큰 것입니다. 야고보는 여기서 가르치는 자들의 실수로 인하여 얼마나 잘못된 일들이 많이 일어나는가를 경고하고 있는 것입니다. 여기서 야고보가 다루는 실수란 말의 실수입니다. 가르치는 자들은 말의 실수가 없을 수가 없습니다. 의도적이든 의도적이지 않든 말이 많으면 실수도 많기 마련입니다. 단순한 말의 실수만이 아니라 가르치는 자가 잘못 가르치게 되면 소경이 소경을 인도하는 꼴이 되는 것입니다. 이런 말씀을 볼 때 목사라는 직분이 두려운 것입니다. 하루라도 빨리 그만두는 것이 낫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저는 하나님의 말씀을 바르게 전할 수 없으면 언제든지 그만 두고자 합니다. 그리고 전하고자 하여도 들을 사람이 없다면 역시 그만두고자 합니다. 들을 사람도 없는데 목사랍시고 말씀을 전한다고 자기 자리에 연연해 한다면 그것은 욕심입니다.

 

오늘날도 가르치는 자만이 아니라 모든 사람들이 다 선생이 되기를 좋아합니다. 오늘 하루를 살면서 말한 우리 자신들의 말의 내용들을 한번 돌아봅시다. 혼자 있으면 말할 필요가 없지만 혼자 있어도 누구를 가르치고자 하는 마음이 없었습니까? 남편이 오면 이것을 이렇게 하라고 말해야겠다. 자식이 오면 어떻게 하라고 말해야겠다는 식으로 마음에 생각을 하는 것입니다. 가정에서만이 아니라 교회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교회를 좀 다닌 사람치고 말 못하는 사람이 없습니다. 그런 사람들이 모든 것을 다 가르치고자 합니다. 교회는 이렇게 되어야 해! 목사는 적어도 이 정도는 되어야 해! 봉사는 이렇게 해야 돼! 말로는 선생이 다 된 것입니다. 그러나 정작 자기를 가르치고자 하지는 않는 것입니다. 지금 야고보는 그런 사람들을 염두에 두고 이 서신을 기록하고 있는 것입니다. 말만 하고 행함이 없는 것은 죽은 믿음이라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말로서야 무슨 말을 못하겠습니까?

 

또 가르치는 자가 빠지기 쉬운 다른 함정은 자기 제자를 만들려고 하는 유혹입니다. 자기 제자를 만들어 자기 말에 복종하는 자들로 만들고자 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려면 자기 말을 듣는 자들이 좋아하는 것들을 가르쳐야 합니다. 진리대로 증거 하면 인기가 없습니다. 그러나 사람의 마음의 욕구를 채워주는 가르침은 언제나 인기가 많습니다. 그 인기를 얻는 비결은 사람들의 욕망이 이루어진다는 것을 말할 뿐 아니라 더 큰 욕망을 계속 자극하는 것입니다. 그것을 희망, 비전, 발전이라는 이름으로 제시하면 그런 선생을 좋아하는 것입니다. 이미 구약에서 참된 선지자와 거짓 선지자들의 모습을 통하여 다 드러났습니다. 그런데도 인간은 또다시 자기 귀를 즐겁게 할 선생을 찾아나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많이 선생이 되지 말라는 것은 선생 된 자가 더 큰 심판을 받는 것입니다. 선생이 되어 가르치고자 하는 것에서 얼마나 많은 유혹들이 있습니까? 앞에서 예를 든 내용들만이 아닙니다. 사람이 많이 모이면 기분이 좋아서 막 열심을 내면서 가르치는데 몇 사람이 모이지 않으면 대충하고 싶은 마음이 드는 것입니다. 그리고 잘못 가르치면 그것으로 더 큰 심판도 받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많이 선생이 되려고 하지 말아야 합니다.

 

교회에서의 선생은 곧 목사는 자기의 지식을 가르치는 자가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치는 자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말씀의 본의를 잘 드러내 가야 합니다. 곧 예수님을 잘 가르쳐 가야 하는 것입니다. 세례 요한은 예수님을 증거하였습니다. “보라. 세상 죄를 지고 하는 하나님의 어린 양이로다”고 증거하였습니다(요 1:29). 그리고 자기를 따르던 제자들에게 예수님을 따라 가도록 하였습니다. 그래서 세례 요한은 자기의 제자들이 예수님께서 많이 가게 되자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그는 흥하여야 하고 나는 쇠하여야 하리라”고 하였습니다(요 3:30). 이것이 교회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치는 목사의 자세여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말씀을 맡은 자는 세례 요한과 같은 자세로 말씀의 본의를 가르쳐 나가야 합니다.

 

이제 말의 중요성에 대해서 생각해 보고자 합니다. 가르치는 자들은 말이 많기 때문에 그만큼 실수도 많은 것입니다. 그러므로 야고보서 1:19절에 보면 “듣기는 속히 하고 말하기는 더디 하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말하는 것은 선생만이 아니라 우리 모두가 항상 말하면서 사는 사람들입니다. 그러면 말의 영향력과 파괴력이 어느 정도입니까? 3-6절에 보면 “우리가 말을 순종케 하려고 그 입에 재갈 먹여 온 몸을 어거하며 또 배를 보라 그렇게 크고 광풍에 밀려가는 것들을 지극히 작은 키로 사공의 뜻대로 운전하나니. 이와 같이 혀도 작은 지체로되 큰 것을 자랑하도다. 보라. 어떻게 작은 불이 어떻게 많은 나무를 태우는가. 혀는 곧 불이요, 불의의 세계라. 혀는 우리 지체 중에서 온 몸을 더럽히고 생의 바퀴를 불사르나니 그 사르는 것이 지옥 불에서 나느니라”고 했습니다.

 

야고보는 말의 중요성 곧 영향력을 세 가지 예를 통해서 증거하고 있습니다. 첫째는 말(馬)을 제어하는 재갈을 예를 들어서 설명합니다. 말을 온전히 제어하기 위해서는 말의 입에 재갈을 먹여야 합니다. 아무리 말이 크고 사납고 힘이 세어도 재갈이 먹여 있으면 기수는 말을 자기 마음대로 조정할 수 있습니다. 입에 먹여진 재갈을 통해 자신이 가고자 하는 대로 조정할 수 있는 것입니다. 두 번째는 배의 키를 예로 들고 있습니다. 엄청난 배를 움직이는 것이 무엇입니까? 작은 키입니다. 작은 키로 그 큰 배를 선장 마음대로 조정할 수 있는 것입니다. 야고보는 이를 통해서 작은 혀가 어떻게 엄청난 영향을 미치는가를 보라는 것입니다. 이제 야고보는 세 번째로 불을 예로 들고 있습니다. 작은 불이 어떻게 큰 수풀을 태우는지 우리는 산불을 통해서 볼 수 있습니다. 우리는 지난번 낙산사 산불을 통해 불의 위력을 봤습니다. 불은 순식간에 모든 것을 잿더미로 만들어 버립니다. 야고보는 말의 무서움을 바로 이렇게 불로 비유하고 있는 것입니다. 특히 야고보는 불이 우리 인생의 바퀴를 불사른다고 합니다. “혀는 곧 불이요, 불의의 세계라. 혀는 우리 지체 중에서 온 몸을 더럽히고 생의 바퀴를 불사르나니 그 사르는 것이 지옥 불에서 나느니라”(6). 혀가 불의의 세계로서 온 인생의 바퀴를 불사르는 것입니다. 그 사르는 것이 지옥 불에서 난 것이라고 합니다. 이처럼 작은 혀가 우리 인생을 망하게 합니다.

 

그런데 문제는 이 혀를 길들일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7-8절에 보면 “여러 종류의 짐승과 새며 벌레와 해물은 다 길들므로 사람에게 길들었거니와 혀는 능히 길들일 사람이 없나니 쉬지 아니하는 악이요, 죽이는 독이 가득한 것이라”고 했습니다. 짐승이나 새나 기어 다니는 것이나 해물조차 길들일 수가 있지만 혀는 능히 길들일 수 없는 쉬지 아니하는 악이요, 죽이는 독이 가득한 것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사실 혀와 입이란 말이 나오는 통로이지 그 근원은 아닌 것입니다. 사람이 말을 실수하면 입술을 때리는데 그런다고 혀가 길들여지지 않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마태복음 15:17-20절에서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입으로 들어가는 모든 것은 배로 들어가서 뒤로 내어 버려지는 줄을 알지 못하느냐. 입에서 나오는 것들은 마음에서 나오나니 이것이야말로 사람을 더럽게 하느니라. 마음에서 나오는 것은 악한 생각과 살인과 간음과 음란과 도적질과 거짓 증거와 훼방이니. 이런 것들이 사람을 더럽게 하는 것이요, 씻지 않은 손으로 먹는 것은 사람을 더럽게 하지 못하느니라”고 했습니다. 이 말씀은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이 예수님의 제자들이 손을 씻지 않고 음식 먹는 것을 보고서 장로들의 유전을 범하느냐고 따질 때 하신 말씀입니다.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이란 바로 유대 사회에서 선생들입니다. 율법을 지키고 가르치는 선생들입니다. 그들은 입만 열면 하나님의 영광을 이야기 하고 율법을 지킬 뿐만 아니라 해석하고 적용한 장로들의 유전까지 지킨다는 자들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러한 모습이 외식이라고 예수님은 책망합니다. 그래서 소경이 소경을 인도하면 둘 다 구덩이에 빠진다고 하셨습니다. 그들의 가르침이란 사람의 교훈으로 가르친다고 책망하신 것입니다. 이 백성들이 입술로는 나를 존경하되 마음은 내게서 멀다는 이사야 선지자의 예언을 말씀하시면서 외식하는 자들이라고 책망하셨습니다. 결국 그들의 입과 혀의 문제가 아니라 마음의 문제라는 것입니다. 마음이 악한 생각과 간음과 음란과 도적질과 거짓 증거와 훼방이 가득하니 그것이 입으로 나오는 것입니다.

 

오늘 저와 여러분의 입술은 어떻습니까? 우리의 혀는 어떤 혀가 되어있습니까? 겉으로는 좋은 말을 할 수 있습니다. 입술로는 존경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과연 우리 마음에 주님과 형제를 존경하고 있습니까? 내 입에서 두 말이 나오고 있지 않습니까? 9-12절을 보면 “이것으로 우리가 주 아버지를 찬송하고 또 이것으로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을 받은 사람을 저주하나니. 한 입으로 찬송과 저주가 나는도다 내 형제들아 이것이 마땅치 아니하니라. 샘이 한 구멍으로 어찌 단 물과 쓴 물을 내겠느뇨. 내 형제들아 어찌 무화과나무가 감람 열매를, 포도나무가 무화과를 맺겠느뇨. 이와 같이 짠 물이 단 물을 내지 못하느니라”고 했습니다. 한 입으로 주 아버지를 찬송하고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을 받은 자를 저주하는 일이 일어나고 있는데 이것이 마땅치 않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을 받았다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를 말합니다. 예수님만이 하나님의 형상입니다(골1:15). 아담은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을 받았으나 범죄함으로 흙의 형상으로 돌아간 것입니다. 그래서 아담 이후의 인간은 아담의 형상, 즉 흙의 형상인 것입니다. 그런 아담의 형상이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새로 지음을 받았는데 외모를 보고 차별한다는 것은 마땅치 않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입술과 혀의 문제가 아니라 근원이 되는 마음이 문제입니다. 우리 마음에 가득한 것이 입으로 쏟아져 나오는 것입니다. 우리 마음에 주의 은혜로 충만하게 되면 은혜의 말이 나올 것입니다. 그 은혜란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아는 은혜입니다. 이것은 오직 성령 하나님의 역사로 말미암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영으로 말하는 자는 예수님을 저주할 자라고 말하지 아니하는 것입니다. 곧 우리 안에 성령님이 거하신다면 축복과 저주를 동시에 말 할 수 없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을 받은 우리 인생들을 구원하시기 위해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심으로 저주 받은 자의 모습이 되셨습니다. 예수님의 이 십자가로 우리가 구속함을 받았습니다. 그러므로 십자가를 보면서 예수님을 저주할 자라고 한다면 그 마음에 악이 가득한 것입니다. 이 세상에서 예수 믿는 형제들에 대한 우리의 자세도 마찬가지입니다. 성령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은혜를 주셔서 우리로 세상의 기준을 따라 축복과 저주를 말하는 혀가 아니라 예수님의 십자가를 기준으로 말하는 혀가 되게 하여 주시기를 원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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