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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년 야고보서 공부
                                                           하나님의 원수
말씀:야고보서 4:1-4

 

오늘부터 우리는 야고보서 4장을 공부하겠습니다. 4장은 3장에서 말한 세상 지혜와 연결되어 있습니다. 곧 성도들 간의 갈등과 처방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호세아서 4:6절에 보면 “내 백성이 지식이 없어서 망한다”라고 합니다. 또 “내 지식을 버렸으니 나도 너희를 버리겠다”고 합니다. 여기서 ‘지식’이란 ‘하나님을 아는 지식’을 말합니다. 하나님을 바로 알지 못하니 그들이 망하는 것입니다. 그런 지식을 다른 말로 ‘지혜’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지난주에 우리는 두 지혜에 대하여 살펴보았습니다. 세상으로부터 오는 지혜와 위로부터 오는 지혜입니다. 세상으로부터 오는 지혜는 세상적이고, 정욕적이고, 마귀적인 것입니다. 이 지혜의 특징은 시기와 다툼과 요란과 모든 악한 일이 있습니다. 그러나 이에 비해 위로부터 난 지혜는 성결, 관용, 양순, 긍휼과 선한열매, 편벽과 거짓이 없이 화평으로 의의 열매가 나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참된 믿음의 사람들은 세상으로부터 난 지혜가 아니라 위로부터 난 지혜를 좇아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가 지난 한 주간을 살면서 어떤 지혜로 사셨습니까? 위로부터 난 지혜를 좇아 사셨습니까? 아니면 세상적인 지혜를 좇아 사셨습니까? 우리는 우리 자신들에게 질문하면서 오늘 말씀을 살펴보고자 합니다. 앞에서 말한 것처럼 오늘 말씀은 지난 시간에 살펴본 말씀과 연결됩니다. 1절을 보면 “너희 중에 싸움이 어디로, 다툼이 어디로 좇아 나느뇨. 너희 지체 중에서 싸우는 정욕으로 좇아 난 것이 아니냐”라고 합니다. 야고보는 너의 중에 싸움과 다툼이 어디로서 오느냐고 묻습니다. 이 말씀을 볼 때 야고보가 속해 있던 공동체 가운데 싸움과 다툼이 있었던 것을 볼 수 있습니다. 3장 말씀에 기초해서 볼 때 우리는 그들 가운데 어떤 싸움이 있었는가를 짐작해 볼 수 있습니다. 서로 선생이 되고자 하고, 서로 인정받고 대접받고 섬김을 받고자 하는 악한 정욕을 좇아 독한 시기와 다툼이 일어난 것입니다. 싸움과 다툼의 문제는 야고보 시대나 오늘날 이 시대나 동일하게 있는 문제입니다. 오늘날 우리 공동체 가운데도 싸움과 다툼이 있잖아요. 그런데 이런 싸움과 다툼이 어디로서 오는 것입니까? 많은 사람들이 환경을 탓합니다. 전부 남의 탓을 합니다. 목사 탓, 사모 탓, 집사 탓을 합니다. 남편이, 자식들이 잘못하였기에 싸움과 다툼이 일어난다 합니다. 그러나 성경은 그렇게 말씀하지 않습니다.

 

아담과 하와가 선악과를 따 먹고 난 뒤 인간은 남의 탓으로 돌리는 일이 인간의 본성적인 것입니다. 선악과를 따먹은 아담에게 하나님께서 찾아 오셔서 먹지 말라고 한 그 열매를 네가 먹었느냐고 물으셨을 때 아담이 뭐라고 대답합니까? “하나님께서 나에게 주셔서 나와 함께 하게 하신 여자 그가 그 나무 실과를 주므로 내가 먹었나이다”라고 했습니다(창 3:12). 아담은 자신의 죄를 회개하기보다 먼저 그 책임을 하와에게 돌립니다. 그런데 이것은 결국 하나님께 돌리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하와를 주셨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와는 뱀에게 책임을 돌립니다. 그러므로 다툼과 싸움과 원망과 시기가 나오는 것은 환경의 문제나 외부적인 문제가 아닙니다. 우리 속의 문제인 것입니다. 환경이 문제라면 어떻게 감옥에서 찬송할 수 있으며, 모든 재산이 하루 아침에 다 날아가고, 자식들이 다 죽고, 아내가 욕하고 도망가더라도 주신이도 하나님이시요, 취하신 이도 하나님이시라고 하면서 하나님을 원망하지 아니 할 수가 있겠습니까? 그러므로 우리 안에 싸움과 다툼이 어디에서 나오는가 하면 우리의 지체 중에서 싸우는 정욕으로 일어난다는 것입니다. 마치 고멜과 같은 것입니다. 호세아서에 보면 하나님께서는 선지자 호세아에게 음란한 여인 고멜과 결혼하라고 합니다. 그래서 결혼하여 아이를 낳고 살지만 고멜은 바람이 나서 가출한 것입니다. 남편이 부족함이 없이 해주는데도 옛 세상의 쾌락이 좋아서 집을 나가버리는 것입니다. 이런 고멜을 다시 값을 주고 찾아와서 아내로 데리고 살게 하시는 것을 통하여 이스라엘 백성들이 얼마나 하나님과 원수 되는 짓을 하고 있는지를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1절을 다시 보면 “너희 중에 싸움이 어디로, 다툼이 어디로 좇아 나느뇨. 너희 지체 중에서 싸우는 정욕으로 좇아 난 것이 아니냐”라고 합니다. 우리 가운데 싸움과 다툼이 어디에서 옵니까? 내 속에 있는 정욕에서 옵니다. 우리 속에 세상에 대한 정욕이 가득하니 싸움과 다툼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야고보는 “너희 지체 중에서 싸우는 정욕으로 좇아 난 것이 아니냐”라고 합니다. 싸우는 정욕은 욕심에서 납니다. 야고보는 바로 그런 정욕을 위하여 열심히 구하고 있다고 책망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야고보는 그 정욕이 어느 정도로 강력하다고 합니까? 2a절을 보면 “너희가 욕심을 내어도 얻지 못하고 살인하며 시기하여도 능히 취하지 못하나니 너희가 다투고 싸우는도다”라고 합니다. 살인하며, 시기하며, 싸우기까지 한다고 합니다. 이것을 볼 때 우리의 정욕이 살인을 불러일으키는 것입니다.

 

우리가 뉴스를 보면 가끔 보험금 때문에 남편과 아내와 부모와 심지어 자식까지 죽이는 것을 봅니다. 우리는 이러한 사람들을 보면서 어떻게 그렇게 잔인할 수 있는가라고 말하지만 사실 우리는 그런 욕을 할 자격이 없는 자들입니다. 우리 속에도 그러한 정욕이 늘 도사리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다만 그 정욕이 그런 여건이 안 되어서 튀어나오지 않았을 뿐입니다. 그런데도 우리는 늘 어떻게 생각합니까? 자신은 그런 악한 자들과 다르다고 생각합니다. 자신은 결코 그런 악한 짓을 하지 않는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자신이 무언가 선한 것이 있어서 그런 나쁜 짓을 하지 않는 것처럼 말하는 것은 자기를 속이고 있는 것입니다. 다윗을 보십시오. 자기는 천하에 율법을 지키고 바르게 사는 사람인줄 알았습니다. 심지어 살인하고 간음을 하고서도 자기 죄를 몰랐습니다. 그래서 나단 선지자가 부자가 가난한 사람의 한 마리뿐인 양을 빼앗아 자기 손님을 대접하였다는 이야기를 하였을 때 “그런 놈이 내 나라에 있다니 그런 놈은 죽어 마땅하다”고 했습니다. 그때 나단은 ‘그 놈이 바로 당신이오’라고 했습니다. 다윗은 선지자 나단의 책망 앞에 처절하게 회개하고 자기의 죄를 알고 자기 대신 희생당한 분의 공로로 살게 됨을 고백합니다만 다윗이 자기 정욕에 사로잡혀 있을 때는 자기의 죄를 모르는 것입니다. 이런 다윗의 모습이 다윗만의 모습입니까? 아닙니다. 우리 자신들의 모습인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의 모습이 그렇지 않습니까? 자기가 말하고 주장하는 것이 옳다고 여기는 것은 자기 정욕에 사로잡혀 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래서 기도를 하면서도 자기의 정욕에 사로잡혀 기도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살인하고 시기할 정도로 구하여도 얻지 못하는 것은 왜 그렇습니까? 구하여도 얻지 못함은 정욕을 위하여 잘못 구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런데도 우리가 자기가 원하는 것을 얻지 못할 때 어떻게 생각합니까? 정욕을 따라 구한 것을 회개하기보다 하나님께 원망하는 것입니다. 이런 모습이 우리 자신들의 모습 아닙니까? 사람을 살인하고 시기할 정도로 우리의 정욕이 강렬한 것입니다. 그 정욕을 따라 무엇이나 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예배 잘 드리면 여러분의 소원이 이루어진다고 하면 어떻게 하겠습니까? 과연 수요모임에 이렇게 밖에 나오지 않겠습니까? 그러니 우리가 마음과 뜻과 힘을 다하는 그 동기가 어디에 있습니까? 하나님입니까? 나의 정욕입니까?

 

2b절을 보면 “너희가 얻지 못함은 구하지 아니함이요”라고 합니다. 우리가 무엇을 얻기를 바란다면 구하면 됩니다. 그런데 이 말씀만 가지고 무엇이나 구하라고 합니다. 성경에서 구하면 주신다는 말씀들을 짜깁기 하면서 기도하면 반드시 응답한다고 합니다. 그 대표적인 구절이 마태복음 7:7-11절의 말씀입니다. “구하라. 그러면 너희에게 주실 것이요, 찾으라. 그러면 찾을 것이요, 문을 두드리라. 그러면 너희에게 열릴 것이니. 구하는 이마다 얻을 것이요, 찾는 이가 찾을 것이요, 두드리는 이에게 열릴 것이니라. 너희 중에 누가 아들이 떡을 달라 하면 돌을 주며 생선을 달라 하면 뱀을 줄 사람이 있겠느냐. 너희가 악한 자라도 좋은 것으로 자식에게 줄줄 알거든 하물며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서 구하는 자에게 좋은 것으로 주시지 않겠느냐”고 했습니다. 이런 말씀을 붙들고 기도하면서 약속을 붙들고 기도한다고 합니다. 하나님은 신실하셔서 자기 약속을 반드시 지키시는 분이시기에 약속을 붙들고 기도하면 반드시 응답이 된다고 합니다. 그럴듯하지 않습니까? 그러나 그 내용이 문제입니다. 그 내용물이 자기의 정욕을 위해 구하면 응답이 되지 않는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자기 정욕이라고 하지 않고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다고 합니다.

 

예를 들어볼까요? 내 자녀가 고삼이라면 무슨 기도를 하겠습니까? 요즈음은 고삼도 없습니다. 초등학교 때부터 대학 입시를 준비하고 있기에 학부모들의 소원이란 오직 성적 올라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교회에서 헌금하고 봉사하고 정성을 바치는 것도 내 아들 성적이 올라가기를 원하는 것입니다. 자기 자식이 성적이 올라가는 일이라면 물불을 가리지 않는 것이 대한민국의 엄마들입니다. 자식 공부를 위한다면 파출부도 하고, 노래방 도우미로도 나서겠다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말로는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공부를 잘하게 하소서!’ ‘좋은 대학교에 들어가게 하소서!’라고 기도하는 것입니다. 성경 어디에 공부 잘해서 하나님의 영광이 된다는 말씀이 있습니까? 이런 식으로 따져보면 우리의 기도 내용 거의 전부가 다 자기 욕심을 위한 것입니다. 교회를 위한 기도도 무엇을 위한 기도입니까? 오직 자기들의 교회가 잘 되기를 바라는 기도 아닙니까? 사람도 많이 모이고, 돈도 많이 모아져서 세상의 다른 교회들보다 좋은 일을 더 많이 해보자는 것입니다. 구제도 많이 하고, 선교도 많이 하자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 중심에 무엇이 들어 있습니까? 내 교회가 들어 있는 것입니다. 다른 교회가 그렇게 되면 배가 아픈 것입니다. 그러면서 자기 정욕이 아니라고 하겠습니까?

 

3절을 보면 “구하여도 받지 못함은 정욕으로 쓰려고 잘못 구함이니라”고 했습니다. 야고보는 우리의 기도가 응답이 되지 않는 것은 나의 정욕을 따라 구하였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물론 나의 정욕이 아닌데 응답이 되지 않을 때도 있습니다. 그것은 아직 하나님의 때가 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때는 하나님의 때를 기다려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우리의 기도가 응답이 되지 않을 때 우리의 기도를 되돌아보아야 합니다. 나의 기도가 정욕을 따라 구하고 있지는! 그렇지 않는지! 정말 하나님의 뜻을 따라 구하고 있는지! 우리는 늘 자신의 기도를 돌아보며 자신을 살펴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정욕이 얼마나 강합니까? 우리의 정욕이 얼마나 강렬한지 기도도 예배도 성경도 하나님도 예수님도 다 이용하는 것입니다. 그 정욕이 결국 하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아 죽인 것입니다.

 

제가 이런 말씀을 드리면 대부분의 사람들이 그러면 기도할 것이 없잖아요 하실지 모르겠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구한다고 하지만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자기 정욕을 따라 구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지금까지 얼마나 자기의 정욕을 위하여 기도하여 왔는지를 알게 된다면 그것은 참으로 다행스러운 일입니다. 우리는 우리의 기도가 하나님 앞에 바른지를 살펴서 이제부터라도 제대로 기도를 해 나가야 할 것입니다. 우리는 무엇을 위하여 기도해야 합니까?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도록 기도해야 합니다. 사실 성경의 모든 말씀이 다 우리의 기도의 내용입니다. 우리의 힘으로 이루어 낼 수 있는 말씀이 한 말씀도 없기에 우리는 오직 기도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기도란 자기 부인인 것입니다. ‘나는 할 수 없습니다. 그러니 은혜를 베풀어 주소서!’ 이것이 바로 기도인 것입니다.

 

예를 들어, 돈을 사랑함이 일만 악의 뿌리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이 말씀을 지켜낼 인간이 있습니까? 그러므로 쉬지 말고 기도해야 하는 것입니다. 언제까지? 돈을 사랑하지 않을 때까지! 그러나 그렇게 되겠습니까? 안 되겠지요! 그러니 죽을 때 까지 쉬지 말고 기도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런 기도제목을 두고서 새벽기도, 금식, 철야하는 그런 사람을 보았습니까? 현재 있는 것으로 족한 줄 알게 하옵소서! 이런 기도제목의 기도회를 보신 적이 있습니까? 오늘날 우리의 현실이 어떠합니까? 교회들마다 무엇을 위하여 기도합니까? 오직 자기 교회의 부흥을 위해서 기도합니다. 자기 정욕을 위해서 기도하면서 정욕이 아닌 것처럼 교묘하게 위장하는 것입니다. 성경을 인용하면서 자기들의 정욕을 정당시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렇게 하는 것이 어떤 결론에 이르게 됩니까? 구하여도 얻지 못하는 것입니다.

 

4절을 보면 “간음하는 여자들이여! 세상과 벗된 것이 하나님의 원수임을 알지 못하느뇨. 그런즉 누구든지 세상과 벗이 되고자 하는 자는 스스로 하나님과 원수 되게 하는 것이니라”고 했습니다. 오늘날 우리가 구하며 사는 내용이 무엇입니까? 세상과 벗되고자 하는 것들이지 않습니까? 여기에 간음하는 여자란 여자만의 문제가 아닙니다. 남자도 마찬가지요, 교회도 마찬가지입니다. 교회란 어떤 곳이 되어야 합니까? ‘이 세상이 심판받았습니다. 그래서 망하는 중입니다. 세상은 불사르기 위하여 간직되고 있습니다. 주님은 다시 재림하십니다. 이 세상을 심판하십니다. 영원한 하나님 나라가 이루어집니다.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서 별세 하셨듯이 우리도 이 세상에서 별세를 꿈꾸며 살아야 합니다. 영원한 하나님 나라를 소망하며 거룩한 나그네로 살아야 합니다.’ 이렇게 전하는 곳이 교회여야 합니다. 그런데 오늘날 교회가 과연 애굽에서 탈출하듯이, 바벨론에서 탈출하듯이 이 세상이나 세상에 속한 것에서 탈출하기를 소원하고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오히려 반대이지 않습니까? 예수님을 잘 믿으면 세상에서 잘 된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잘 믿고 복 받아야 한다고 합니다. 그런데 이와 같은 것은 마귀가 예수님께 유혹한 내용입니다. 마태복음 4장에 보면 예수님께서 공생애를 시작하실 때 마귀는 자신의 말만 잘 들으면 세상의 영광을 주겠다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그 마귀의 유혹을 물리치고 예수님께서 가신 길은 십자가의 길이었습니다. 그러므로 교회가 세상을 사랑하게 하는 것이라면 하나님과 원수가 되게 하는 것입니다. 오늘날 교회가, 성도들이 세상을 사랑하는 것이 바로 간음하고 있는 것입니다. 간음하는 여자들이여! 간음하는 교회들이여! “세상과 벗됨이 하나님과 원수 됨을 알지 못하느뇨? 그런즉 누구든지 세상과 벗이 되고자 하는 자는 스스로 하나님과 원수 되게 하는 것이니라.” 우리가 주님을 믿고 믿음으로 산다고 하지만 세상과 짝하는 삶을 살고 있지는 않습니까? 우리의 소망이 어디에 있습니까? 성령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은혜를 주셔서 우리 속에 있는 정욕을 좇아 살지 않게 하여 주시기를 원합니다. 그리하여 세상과 벗하지 않게 하시고 하나님의 원수로 행하지 않게 하여 주시기를 원합니다. 오직 우리로 세상보다 우리 주님을 사랑하며, 영원한 하나님 나라를 소망하며, 하나님의 뜻을 따라 살게 하여 주시기를 원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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